국민의회 (프랑스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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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국민의회는 18세기 말 프랑스 혁명 시기에 제3신분 대표들이 결성한 의회이다. 재정난과 신분 간 갈등으로 소집된 삼부회에서 신분별 표결 방식에 반발한 평민 대표들이 국민의회를 결성하고, 테니스 코트의 서약을 통해 헌법 제정을 결의했다. 루이 16세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국민의회는 제헌의회로 발전하여 봉건제 폐지를 선언하고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을 발표하는 등 프랑스 혁명의 주요 사건들을 주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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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회 (프랑스 혁명) - [의회]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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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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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 국민 의회 (Assemblée nationale) |
상세 정보 | |
국가 | 프랑스 왕국 |
의회 유형 | 단원제 |
의원 수 | 1139명 |
설립일 | 1789년 6월 20일 |
해산일 | 1789년 7월 9일 |
이전 의회 | 1789년 전국 삼부회 |
다음 의회 | 제헌 국민 의회 |
2. 배경
18세기 말 프랑스는 미국 독립 전쟁 참가, 계속된 흉년, 경제 상황 악화 등으로 인해 정치적, 경제적 혼란을 겪고 있었다. 루이 16세는 재정난을 해결하기 위해 명사회를 개최하여 귀족들의 도움을 요청했으나, 귀족들은 프랑스 전국민을 대표하는 삼부회가 열리기 전에는 도움을 줄 수 없다며 거부하였다.[11]
18세기 말 프랑스는 미국 독립 전쟁 참가, 계속된 흉년, 경제 상황 악화 등으로 인해 정치적, 경제적 혼란을 겪었다. 루이 16세는 명사회를 개최하여 귀족들의 도움을 요청했으나, 귀족들은 삼부회가 열리기 전에는 도움을 줄 수 없다고 거부했다.
결국 1789년 5월 5일, 루이 16세는 삼부회를 소집하여 재정난과 정치적 어려움을 해결하고자 하였다.[11] 삼부회는 신분제 의회의 일종으로, 각 신분은 하나의 표결권을 가졌다. 당시 귀족들은 절대왕정의 힘을 약화시키고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하고자 하였으나, 기본적으로는 국왕을 중심으로 한 중세적 신분제도를 지키고자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3신분은 자신들의 뜻을 펴기 어려웠다. 삼부회 초반부터 제3신분은 신분별 표결이 아니라 머릿수에 따른 투표를 요구하며 제1, 2신분 대표들과 대립하였다.[11]
삼부회는 제1신분(성직자), 제2신분(귀족), 제3신분(평민, 실제로는 시민 계급) 대표로 구성되었다.[7] 제3신분은 의원 수 배증을 인정받았지만, 1789년 5월 5일 개회 초에 모든 표결이 의원 수가 아닌 신분별로 진행된다는 것을 알게 되어, 수적 우위를 확보하지 못했다. 제3신분 의원들은 이에 반대하여 삼부회에서 분리되어 회합하기 시작했다.[7][8]
신분 간의 협상이 계속되었지만 결렬되었고, 5월 28일에 제3신분 의원들이 단독으로 회합하기 시작했으며,[9] 스스로를 코뮌(Communes)이라고 칭하며 삼부회에서 독립적인 권한을 행사했다. 6월 13일부터 점차 귀족의 일부와 성직자의 대다수가 합류했으며, 6월 17일에 스스로를 국민 의회라고 칭하게 되었다.
3. 삼부회 소집과 국민의회 결성
결국 1789년 5월 5일 루이 16세는 삼부회를 소집하여 재정난과 정치적 어려움을 해결하고자 했다.[11] 삼부회는 중세적 신분제의 일종으로, 한 신분이 한 개의 표결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귀족들은 절대왕정의 힘을 약화시키고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하고자 했으나, 기본적으로는 국왕을 중심으로 한 중세적 신분제도를 지키고자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3신분은 자신들의 뜻을 펴기 어려웠다. 삼부회 초반부터 제3신분은 신분별 표결이 아니라 머릿수에 따른 투표를 요구하며 제1, 2신분 대표들과 대립했다.
삼부회는 프랑스의 재정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소집되었지만, 곧 의결 방법을 둘러싼 분규가 발생했다. 삼부회는 세 신분(제1신분 (성직자), 제2신분 (귀족), 제3신분 (이론적으로는 모든 평민, 실제로는 부르주아를 대표))으로 구성되었다. 제3신분은 "배가 대표"가 부여되었지만, 1789년 5월 5일 개회에서 모든 투표가 "머릿수"가 아닌 "신분별"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통보를 받았고, 따라서 배가 대표는 권력 측면에서 무의미했다. 그들은 이를 거부하고 별도로 회의를 진행했다.[2][3]
각 신분 간의 셔틀 외교는 5월 27일까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5월 28일, 제3신분의 대표들은 스스로를 ''Communes'' ("평민")라고 부르며, 다른 단체와는 별도로 "권한 검증"을 진행하면서 독자적으로 회의를 시작했다.[4] 6월 13일부터 17일까지 그들은 귀족 일부와 다수의 성직자, 그리고 농민과 같은 다른 사람들과 점차 합류했다.
당시 제3신분의 다수를 이루고 있었던 법률가, 공무원, 언론인, 기업가, 은행가 등 부르주아지들은 자신들의 자유주의적 입장에 동의하는 1, 2신분 의원들을 설득하여 신분별 표결을 폐지하고자 하였으나, 1, 2신분 중 일부만 이에 동의할 뿐이었다. 삼부회의 파행이 장기화되던 끝에 제3신분인 평민대표들은 자신들이 국민의 96%를 대표한다는 주장과 함께 6월 17일에 별도로 '국민의회'를 결성하였다.[12] 아울러 어떠한 세금도 자신들의 동의 없이 징수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12]
국민의회는 자본가(국채 발행에 필요한 신용을 얻기 위해)와 평민에게 접근했다. 먼저 국민 의회는 공채를 정리하는 동시에 기존의 과세는 모두 위법하게 강요된 것이라고 선언하고, 다만 국민 의회 개최 중에 한해 잠정적으로 종전대로의 과세를 승인하기로 결의했다. 이것이 자본가의 신뢰를 얻는 계기가 되어, 자본가는 국민 의회의 존속에 강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국민 의회는 평민을 위해 생존에 관한 위원회를 설치하고 식량 부족에 대처했다.
3. 1. 테니스 코트의 서약
1789년 6월 20일, 루이 16세는 국민의회 회의장을 폐쇄했다.[12] 이에 국민의회 대표들은 베르사유 궁전 근처 실내 테니스 코트에 모여 헌법 제정과 국민의회 해산 거부를 서약했다.[13][14][15][16] 이들은 "왕국의 헌법이 제정되고 견고한 기반 위에 확립될 때까지 결코 해산하지 않고, 사방의 상황에 따라 어떤 장소에서도 회의를 열겠다"라고 엄숙히 맹세했다. 한 명을 제외한 576명이 서명한 이 맹세는 혁명적인 행동이었으며, 정치적 권위가 국왕이 아닌 국민과 그 대표자에게서 비롯된다는 선언이었다. 이는 한국의 6월 항쟁 당시 민주 헌법 제정을 요구하며 시위대가 보여준 저항 정신과 유사하다.
4. 국왕의 저항과 국민의회의 대응
테니스 코트의 서약 이후, 많은 제1신분(성직자) 의원들과 상당수의 제2신분(귀족) 의원들이 국민의회에 합류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루이 16세는 국민의회를 인정하고, 삼부회(États généraux프랑스어)의 모든 의원이 국민의회에 참여하게 되었다.[12]
자크 네케르는 루이 16세의 재무 장관으로, 분열된 신분들을 화해시키기 위해 국왕이 '왕립 회의'(Séance Royale프랑스어)를 열 것을 제안했다. 국왕은 동의했지만, 세 신분 모두 왕립 회의 개최에 대해 공식적으로 통보받지 못했고, 모든 토론은 '왕립 회의'가 열릴 때까지 중단되었다.[5]
하지만 사건들은 네케르의 계획보다 빠르게 진행되었다. 루이 16세는 추밀원 측근들의 영향으로, 의회의 법령을 무효화하고 신분 분리를 명령하며, 개혁안을 복원된 삼부회가 시행하도록 지시하기로 결정했다. 6월 19일, 그는 국민 의회가 열리는 살 데 에타(Salle des États)를 폐쇄하고, 마를리 성에 머물며 연설문을 준비했다.[6]
이틀 후, 테니스 코트 사용마저 금지당한 국민의회는 생 루이 교회에서 회합을 가졌고, 다수의 성직자 대표들이 합류했다. 6월 23일, 국왕은 세 신분 대표들 앞에서 연설했지만, 싸늘한 침묵만이 돌아왔다. 그는 해산 명령으로 연설을 마쳤지만, 평민 대표들은 미라보의 연설에 따라 자리를 지켰다. 미라보는 "군대가 의회를 포위하고 있습니다! ... 헌법을 제정할 때까지 여러분은 이 자리에서 물러날 수 없습니다."라고 연설했다.[8]
그날 왕실 측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네케르는 루이 16세에게는 불신을 샀지만, 국민의회에서는 다시 환영을 받았다. 생 루이 교회에서 의회에 합류했던 성직자들은 의회에 남았고, 오를레앙 공작을 포함한 귀족 47명이 곧 합류했다. 6월 27일까지 왕실은 공개적으로 굴복했지만, 군사적 반격의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프랑스군은 파리와 베르사유 주변으로 대거 집결하기 시작했다.
6월 23일의 국왕 회의에서 국왕은 '위헌 헌장'을 부여하며, 세 개의 신분으로 구성된 삼부회에게 별도의 심의 권리를 확인했다. 그러나 이 움직임은 실패했고, 곧 귀족 대표 중 일부가 국왕의 요청에 따라 국민 의회에 합류했다. 삼부회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고, 국민 의회가 되었지만, 이 단체들은 별도의 신분에서 선출된 동일한 대표들로 구성되었다.[8]
5. 국민 제헌 의회
테니스 코트의 서약 이후 많은 제1신분 의원들이 합류하고, 제2신분에서도 상당수의 의원들이 국민의회로 들어갔다. 이러한 상황에 루이 16세는 국민의회의 존재를 인정하게 되었으며, 삼부회의 모든 의원이 국민의회에 참가하게 되었다. 이후 국민의회는 7월 7일에 헌법위원회를 창설하고, 7월 9일에는 국민 제헌 의회(Assemblée nationale constituante프랑스어)로 명칭을 변경한다.[12]
파리와 다른 프랑스 도시들로부터 의회에 대한 지지 메시지가 쏟아졌다. 의회는 왕에게 정중하지만 단호한 어조로 군대의 철수를 요청했다. 그러나 루이 16세는 군대의 필요성을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뿐이라고 선언했고, 군대가 엄격하게 예방 조치로 배치되었다고 확신시켰다. 루이 16세는 의회를 노용 또는 수아송으로 옮기도록 "제안"했는데, 이는 두 군대 사이에 의회를 위치시키고 파리 시민의 지원을 박탈하려 한 것이다. 이러한 군대 주둔에 대한 대중의 분노는 바스티유 감옥 습격을 촉발하여 혁명의 다음 단계를 시작했다.[8]
6. 8월 4일 밤의 선언과 인권 선언
국민의회는 성난 민중들을 진정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봉건제 폐기뿐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8월 4일 밤의 선언〉을 발표하였다.[17] 더불어 국민 의회는 8월 26일 〈인간과 시민의 권리들에 대한 선언(인권선언)〉을 통하여 자유, 평등, 사유 재산의 불가침성, 압제에 저항할 권리 등을 천명하였다.[17]
이 선언으로 프랑스의 가톨릭 교회는 상당한 충격에 빠졌다. 왜냐하면, 두 가지 선언으로 인해 교회의 성직자들이 지니고 있던 다양한 특권들과 권리들이 포기되었기 때문이다.[18] '8월 4일 밤의 선언'으로 가톨릭 성직자들은 프랑스 내에서 더 이상 우월한 지위를 누릴 수 있는 별개의 계급으로 존재할 수 없게 되었으며, 신자들에게 십일조를 부과하거나 가톨릭 교회의 소유 재산을 관리할 수 있는 가톨릭 교회의 권리를 박탈당하였고, 국민의회가 부과하는 세금을 납부할 의무를 지게 되었다. 즉, 일반인들과 같은 수준의 시민이 되어 법률에 복종해야만 하였다. ‘인간과 시민의 권리들에 대한 선언(인권선언)’은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였다.[19]
1789년 8월, 국민의회는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을 기초하여 만들었다. 이 선언은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평등하다"(제1조)라고 규정하며, 평등하고 양도 불가능한 권리는 모든 프랑스 시민에게 보장되며, 어떤 정부의 행위나 법률로부터도 보호받는다고 명시했다. 이 선언이 국민의회에서 가결되자, 프랑스 식민지 제국 전체에서 프랑스 시민이 되어 동등한 권리를 누리려는 투쟁이 일어났다. 그 대표적인 것이 생도맹그(아이티)의 유색 인종에 의한 시민권 요구였으며, 이것이 거부된 것이 아이티 혁명으로 이어졌다.
7. 영향
프랑스 혁명은 절대 왕정을 종식시키고 민주주의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세계 역사에 큰 영향을 주었다. 특히 한국의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중요한 이념적 기반을 제공했다.
한국에서는 1960년 4·19 혁명과 1987년 6월 항쟁 등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프랑스 혁명의 자유, 평등, 박애 정신은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 큰 영감을 주었다.
프랑스 혁명은 전 세계적으로 민주주의와 인권 사상을 확산시키는 데에도 기여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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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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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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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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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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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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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프랑스의 역사
까치글방
2013-03-11
[12]
서적
프랑스의 역사
까치글방
2013-03-11
[13]
지식백과
테니스 코트의 서약
pmg 지식엔진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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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산백과
테니스코트의 서약 [Serment du Jeu de Pau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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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백과 사전
테니스코트의 서약 (Serment du Jeu de Paume)
[16]
교과서
'[고등교과서 세계사]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시대'
https://100.daum.net[...]
천재교육 편집부
[17]
서적
프랑스의 역사
까치글방
2013-03-11
[18]
논문
프랑스 혁명(革命)시기 교회의 모습에 대한 연구
광주가톨릭대학교 대학원
[19]
서적
한국가톨릭대사전,제12권
한국교회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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