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그래스 파이트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그래스 파이트는 1835년 11월 26일 텍사스 혁명 기간에 벌어진 전투이다. 텍사스 군은 샌안토니오 데 베하르에서 멕시코군이 풀을 운반하는 것을 발견하고 공격하여, 금괴를 얻으려던 초기 기대와 달리 풀만 획득했다. 이 전투는 텍사스 군의 사기를 높였고, 며칠 후 텍사스 군이 베하르를 공격하여 승리하는 데 기여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835년 11월 - 1835년 11월 20일 일식
  • 1835년 분쟁 - 텍사스 혁명
    텍사스 혁명은 1835년부터 1836년까지 텍사스 주민들이 멕시코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벌인 일련의 사건으로, 곤잘레스 전투를 시작으로 알라모 전투와 샌 재신토 전투를 거쳐 텍사스 공화국을 수립하게 된 사건이다.
  • 1835년 분쟁 - 털리도 전쟁
    털리도 전쟁은 1835년 오하이오 주와 미시간 준주 간의 털리도 스트립 영토 분쟁으로, 미시간의 주 승격 지연, 대통령의 중재, 그리고 미시간이 어퍼 반도를 받는 조건으로 오하이오에 털리도 스트립을 양도하는 것으로 종결되었으며, 이후 두 지역 간 경쟁 의식을 낳았다.
  • 텍사스 혁명의 전투 - 샌재신토 전투
    1836년 텍사스 혁명 중 텍사스 군이 멕시코 군을 기습하여 승리하고 산타 안나 대통령을 포로로 잡은 샌재신토 전투는 텍사스 공화국의 독립을 가져왔으며, 현재 기념탑이 세워져 이를 기념하고 있다.
  • 텍사스 혁명의 전투 - 알라모 전투
    알라모 전투는 1836년 텍사스 혁명 당시 멕시코군이 알라모 요새를 공격하여 텍사스 의용군을 몰살시킨 전투로, 텍사스 독립 투쟁의 상징이 되었다.
그래스 파이트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정보
전투그래스 파이트
부분텍사스 혁명의 일부
날짜1835년 11월 26일
장소산안토니오 데 벡사르 근처
좌표29.41° N, 98.51° W
결과텍사스 공화국군의 승리
교전 세력
교전 1텍사스 공화국군
교전 2멕시코 중앙집권 공화국
지휘관 및 지도자
텍사스 공화국군 지휘관제임스 보위
윌리엄 잭
멕시코 중앙집권 공화국 지휘관해당 정보 없음
병력 규모
텍사스 공화국군 병력약 140명의 기병 및 보병
멕시코 중앙집권 공화국 병력100–150명의 기병 및 보병, 1문의 대포
사상자 및 피해
텍사스 공화국군 사상자4명 부상, 1명 탈영
멕시코 중앙집권 공화국 사상자3명 사망, 14명 부상

2. 배경

1835년 10월 2일, 텍사스 식민지 개척자들은[1] 곤잘레스 전투에서 멕시코군을 공격하여 공식적으로 텍사스 혁명을 시작했다.[2] 전투가 끝난 후, 불만을 품은 식민지 개척자들은 멕시코의 이 지역 통치를 결정적으로 종식시키기 위해 곤잘레스에 계속 모여들었다. 10월 11일, 조직되지 않은 자원병들은 텍사스에 최초의 영어 사용 식민지 개척자를 정착시킨 스티븐 F. 오스틴을 총사령관으로 선출했다.[3] 며칠 후 오스틴은 새로 창설된 텍시안 군대를 멕시코 대통령 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 안나의 처남인 마르틴 페르펙토 데 코스 장군이 알라모의 주둔지를 감독하고 있던 산안토니오 데 베하르로 진군했다.[4] 10월 말 텍시안군은 베하르 공방전을 시작했다.[5]

스티븐 오스틴 장군은 약 400명의 텍사스 군대를 이끌고, 멕시코의 산안토니오 데 베하르 마을과 바로 근처의 옛 스페인 선교 시설인 알라모를 포위했다. 1,000명 이상의 멕시코 군대를 지휘한 사람은 마르틴 페르펙토 데 코스 장군이었다.

3. 전투

1835년 11월 26일 오전 10시, 텍사스 정찰병 에라스투스 "디프" 스미스는 베하르에서 약 8.05km 떨어진 곳에서 멕시코군 병사 50~100명이 노새, 말, 당나귀 짐마차를 호위하고 있다는 보고를 했다.[6][7] 며칠 동안 텍사스인들은 멕시코군이 병사들의 봉급을 지급하기 위해 은과 금을 실어올 것이라는 소문을 들었고,[8] 약탈을 위해 캠프에서 뛰쳐나가고 싶어 했다.[7] 제임스 보위 대령은 기병 35~40명을 이끌고 조사하되, 필요할 경우에만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보위가 원정대에 육군의 명사수 12명을 모집하자, 그는 공격할 이유를 찾으려고 할 것이라는 데 의심의 여지가 거의 없었다. 윌리엄 잭 대령은 보위의 부대를 지원하기 위해 보병 100명을 보냈다.[7][9]

제임스 보위 대령은 그래스 파이트 동안 텍사스 기병대를 이끌었다


베하르에서 약 약 1.61km 떨어진 곳에서 보위와 그의 부대는 멕시코 병사들이 마른 계곡을 건너는 것을 발견했다.[6] 이곳은 알라잔, 아파치, 산 페드로 개울이 합류하는 지점 근처였을 것이다.[10] 보위의 부대는 멕시코군을 공격하여 노새들을 흩어지게 했다.[9] 기병대는 잠시 교전을 벌인 후, 양측 모두 말에서 내려 마른 개울 바닥에서 엄폐했다. 멕시코군은 반격을 가했지만 격퇴되었다.[6] 베하르에서 코스 장군은 전투가 시작되는 것을 보고 기병대가 마을로 퇴각할 수 있도록 엄호를 제공하기 위해 보병 50명과 대포 1문을 보냈다.[6] 텍사스 보병대도 초탄을 듣고 전투를 향해 달려갔으며, 한때 허리 깊이의 물을 건너기도 했다. 그들은 소강 상태에서 전장에 접근했다. 소리가 나지 않아 멕시코 군대가 어디에 있는지 확인하기 어려웠고, 텍사스인들은 멕시코 기병대와 보병대 사이에 있다는 것을 알고 놀랐다. 멕시코 군대가 사격을 시작하자 텍사스 보병은 땅에 엎드렸다. 토마스 러스크 대령은 15명의 부대를 이끌고 가장 가까운 멕시코 기병대를 공격했다. 그 기병대가 도망치자 텍사스 보병은 엄폐물로 재빨리 이동할 수 있었다.[6]

텍사스 기병대는 보병과 합류했다.[6] 벌레슨의 아버지 제임스 벌레슨은 멕시코 진지를 향해 기병대를 진격시키며 "얘들아, 우리는 한 번 죽을 뿐이다. 그들은 저기에 참호에 있다. 돌격하라!"라고 외쳤다.[11] 멕시코 포병은 세 번 사격하여 텍사스인들을 물러나게 했다. 멕시코 기병대는 포병에게 더 나은 위치를 제공하기 위해 작은 언덕을 점령하려 세 번 시도했지만 격퇴되었다. 멕시코 보병이 공격해 왔다. 러스크는 멕시코의 공격에 대해 "이들은 우리 군의 파괴적인 사격에도 불구하고, 엄격한 질서를 유지하고 혼란을 보이지 않으며... 훌륭한 냉정함과 용맹함으로 진격했다"고 썼다.[11] 텍사스인 제임스 스위셔가 기병대를 이끌고 멕시코 대포를 탈취하려 했다는 것을 깨닫자 보병은 공격을 포기했다.[11] 멕시코군은 베하르 방향으로 물러났다.[9]

4. 전투 결과

토마스 러스크 대령은 그래스 파이트에 참여했다.[11][12] 텍사스 측에서는 4명이 부상을 입었고, 1명이 탈영했다.[11][12] 버렐슨은 멕시코 군인 15명이 사망하고 7명이 부상당했다고 보고했고,[12] 보위는 60명이 사망했다고 주장했다.[13] 역사학자 앨윈 바는 저서 《반란의 텍사스인: 1835년 샌안토니오 전투》에서 멕시코 군인 3명만이 사망하고 14명이 부상당했으며, 대부분 기병대에서 나왔다고 밝혔다.[11] 버렐슨은 모든 장교들의 행동을 칭찬했으며, 그 중 보위가 가장 많이 언급되었다.[12]

텍사스인들은 말과 노새 40마리를 포획했다.[11] 그러나 안장 가방에는 금괴가 없었다. 대신 노새들은 베하르에 갇힌 멕시코 말에게 먹일 갓 베어낸 풀을 운반하고 있었고, 이 전리품으로 인해 이 전투는 '그래스 파이트(Grass Fight)'라는 이름이 붙여졌다.[12] 역사학자 J. R. 에드먼슨이 "우스꽝스러운 사건"이라고 칭한 이 교전은 귀중한 약탈물은 없었지만, 텍사스 군대를 하나로 묶는 데 기여했다. 며칠 전, 군대는 격렬하게 분열되어 장기간의 포위 공격이나 공격을 감수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래스 파이트에서의 성공으로 텍사스 병사들은 수적으로 열세하더라도 베하르 수비대를 이길 수 있다고 믿기 시작했다.[12] 텍사스인들은 코스가 베하르의 안전에서 벗어나 병력을 보낼 정도로 필사적이었음에 틀림없다고 믿었다.[13]

며칠 후인 12월 1일, 베하르에 있던 몇몇 미국인들이 코스를 설득하여 도시에서 자유롭게 통행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그들은 그 나라를 떠나겠다고 약속했지만, 새뮤얼 매버릭을 포함한 이들은[14] 대신 텍사스 군대에 합류하여 멕시코 방어에 대한 정보와 도시 내부의 낮은 사기를 제공했다. 그래스 파이트 승리에 힘입어 12월 5일 텍사스인들은 베하르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고;[15] 코스는 12월 9일 항복했다.[16] 멕시코군은 가석방 조건으로 텍사스 지방을 떠나야 했고, 텍사스 식민지인들은 완전한 통제권을 얻게 되었다.[17]

텍사스군은 멕시코군이 도주한 시점에서 멕시코군의 말을 모아 전리품을 확인했다. 그런데 그들이 놀랍게도 화물차에 실린 짐은 알라모 요새와 샌안토니오의 멕시코군 말 사료였다. 모은 말과 사료의 총 가치는 아마 2000USD 정도였지만, 보물을 기대했던 텍사스군은 기뻐하지 않았다. 결국 사료를 둘러싼 전투가 벌어졌기 때문에 "그래스(사료) 파이트"라고 불리게 되었다. 텍사스군의 손실은 부상자 4명과 탈주자 1명, 멕시코군은 약 16명이 사망했다.

바얼슨이 작성한 이날 전투의 공식 기록에서는, 그는 보위를 제외한 모든 병사의 행동을 칭찬했다. 역사가들은 바얼슨이 보위와 새뮤얼 휴스턴, 오스틴의 친밀한 관계에 대해 의구심을 품었다고 보고 있다. 보위는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골리아드(w:Goliad, Texas)로 향해 필립 디밋 대위를 만났다. 보위가 없는 동안 샌안토니오 포위전은 결론이 났고, 보위는 전투가 끝난 후에 도착했다. 그는 바얼슨의 뒤를 이어 지휘하고 있던 프랭크 존슨에게 보고했다.

5. 전투 이후

토머스 제퍼슨 러스크 대령은 그래스 파이트에 참여했다


네 명의 텍사스인들이 전투에서 부상을 입었고, 한 명의 병사가 전투 중에 탈영했다.[11][12] 버렐슨은 보고서에서 15명의 멕시코 군인이 사망하고 7명이 부상을 입었다고 주장했고,[12] 보위는 60명의 멕시코 군인이 사망했다고 주장했다.[13] 역사학자 앨윈 바는 그의 저서 《반란의 텍사스인: 1835년 샌안토니오 전투》에서 멕시코 군인 3명만이 사망하고 14명이 부상당했으며, 대부분의 사상자는 기병대에서 나왔다고 밝혔다.[11] 버렐슨은 모든 장교들의 행동을 칭찬했으며, 보위가 가장 많이 언급되었다.[12]

텍사스인들은 말과 노새 40마리를 포획했다.[11] 놀랍게도 안장 가방에는 금괴가 없었다. 대신 노새들은 베하르에 갇힌 멕시코 말에게 먹일 갓 베어낸 풀을 운반하고 있었고, 이 전리품으로 인해 이 전투는 '그래스 파이트(풀 싸움)'라는 이름이 붙여졌다.[12] 역사학자 J. R. 에드먼슨이 "우스꽝스러운 사건"이라고 칭한 이 교전은 귀중한 약탈물을 얻지 못했지만, 텍사스 군대를 하나로 묶는 데 기여했다. 며칠 전, 군대는 격렬하게 분열되어 있었고, 장기간의 포위 공격이나 공격을 감수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래스 파이트에서의 성공으로 텍사스 병사들은 수적으로 열세하더라도 베하르 수비대를 이길 수 있다고 믿기 시작했다.[12] 텍사스인들은 코스가 베하르의 안전에서 벗어나 병력을 보낼 정도로 필사적이었음에 틀림없다고 믿었다.[13]

며칠 후인 12월 1일, 베하르에 있던 몇몇 미국인들이 코스를 설득하여 도시에서 자유롭게 통행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그들은 그 나라를 떠나겠다고 약속했지만, 새뮤얼 매버릭을 포함한 이들은[14] 대신 텍사스 군대에 합류하여 멕시코 방어에 대한 정보와 도시 내부의 낮은 사기를 제공했다. 그래스 파이트 승리에 힘입어 12월 5일 텍사스인들은 베하르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고;[15] 코스는 12월 9일 항복했다.[16] 멕시코군은 가석방 조건으로 텍사스 지방을 떠나야 했고, 텍사스 식민지인들은 완전한 통제권을 얻게 되었다.[17]

텍사스군은 멕시코군이 도주한 시점에서 멕시코군의 말을 모아 전리품을 확인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화물차에 실린 짐은 알라모 요새와 샌안토니오의 멕시코군 말 사료였다. 모은 말과 사료의 총 가치는 아마 2000USD 정도였지만, 보물을 기대했던 텍사스군은 기뻐하지 않았다. 결국 사료를 둘러싼 전투가 벌어졌기 때문에 "그래스(사료) 파이트"라고 불리게 되었다. 텍사스군의 손실은 부상자 4명과 탈주자 1명, 멕시코군은 약 16명이 사망했다.

바얼슨이 작성한 이날 전투의 공식 기록에서는, 그는 보위를 제외한 모든 병사의 행동을 칭찬했다. 역사가들은 바얼슨이 보위와 새뮤얼 휴스턴, 오스틴의 친밀한 관계에 대해 의구심을 품었다고 보고 있다. 보위는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골리아드(w:Goliad, Texas)로 향해 필립 디밋 대위를 만났다. 보위가 없는 동안 샌안토니오 포위전은 결론이 났고, 보위는 전투가 끝난 후에 도착했다. 그는 바얼슨의 뒤를 이어 지휘하고 있던 프랭크 존슨에게 보고했다.

참조

[1] 간행물
[2] 서적 1994
[3] 서적 1990
[4] 서적 1990
[5] 서적 1994
[6] 서적 1990
[7] 서적 1994
[8] 서적 1998
[9] 서적 2000
[10] 서적 1998
[11] 서적 1990
[12] 서적 2000
[13] 서적 1994
[14] 서적 1990
[15] 서적 1990
[16] 서적 1990
[17] 서적 1990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