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젤라 폰 슈바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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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젤라 폰 슈바벤은 슈바벤 공작 헤르만 2세의 딸로, 브라운슈바이크 백작 브루노 1세, 슈바벤 공작 에른스트 1세, 그리고 신성 로마 황제 콘라트 2세와 세 번 결혼했다. 그녀는 제국 의회에 참여하고, 아를 왕국을 남편에게 계승시키는 등 정치적인 역할을 수행했으며, 남편 콘라트 2세가 황제로 즉위한 후 황후가 되었다. 기젤라는 또한 교회 회의에도 참여했으며, 섭정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1043년 이질로 사망하여 슈파이어 대성당에 묻혔으며, 1900년 그녀의 묘가 열렸을 때 172cm의 금발 머리를 가진 것으로 확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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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89년 출생 - 범중엄
북송 시대의 정치가이자 문인인 범중엄은 "선천하의 우이우 후천하의 락이락" 정신으로 유명하며, 관리 제도 개혁, 인재 양성, 무력 강화 등의 정치 활동과 서하와의 전쟁에서의 군사적 업적, 그리고 『악양루기』를 포함한 다수의 저서를 남겨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기젤라 폰 슈바벤 | |
---|---|
기본 정보 | |
![]() | |
이름 | 기젤라 폰 슈바벤 |
로마자 표기 | Gিসেল라 폰 슈바벤 |
작위 | |
신성 로마 황후 | 1027년–1039년 |
결혼과 자녀 | |
배우자 | 브라운슈바이크 백작 브루노 1세 슈바벤 공작 에른스트 1세 신성 로마 황제콘라트 2세 |
자녀 | 프리지아 변경백 리우돌프 슈바벤 공작 에른스트 2세 슈바벤 공작 헤르만 4세 신성 로마 황제하인리히 3세 마틸데 폰 프랑코니아 |
가문 | |
가문 | 콘라딘 가문 |
아버지 | 슈바벤 공작헤르만 2세 |
어머니 | 부르군트의 게르베르가 |
생애 | |
출생 | 기원전 990년경 |
사망일 | 1043년 2월 15일 |
사망 장소 | 작센 공국고슬라르황궁 |
매장지 | 슈파이어 대성당 |
대관식 | |
첫 번째 대관식 | 1024년 9월 21일 쾰른 대성당 |
두 번째 대관식 | 1027년 3월 26일 로마성 베드로 대성당 |
2. 생애
기젤라는 슈바벤 공작 헤르만 2세와 부르고뉴 왕 콘라트 1세의 딸인 부르고뉴의 게르베르가의 딸로, 부모 모두 샤를마뉴의 후손이었다.[3]
1002년경 작센 백작 브라운 1세 폰 브라운슈바이크와 처음 결혼했다.[3] 브라운이 사망한 후 1012년경 바벤베르크 가문의 에른스트 1세와 재혼했는데,[3] 에른스트는 기젤라의 오빠 슈바벤 공작 헤르만 3세가 죽자 독일 국왕 하인리히 2세로부터 슈바벤 공국을 봉토로 받아 상속자로서 정당성을 확보하려 했다. 1015년 에른스트가 일찍 죽자 기젤라는 어린 아들 에른스트 2세의 섭정이 되었다.
1017년 1월 이전, 콘라트 2세와 세 번째 결혼을 했다. 콘라트 2세는 1024년 독일 국왕으로 선출되었고, 1027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되었다.[3] 메르제부르크의 티트마르에 따르면, 아리보는 기젤라와 콘라트가 너무 가까운 친척 관계라며 여왕 대관을 거부했다. 두 사람은 모두 하인리히 1세 왕의 후손이었다.[3] 콘라트 대관식 13일 후 필그림 대주교에 의해 대관되고 성유를 받았다.[4]
기젤라는 정치에 적극 참여하여 제국 의회에 참석하고 여러 교회 시노드에도 참여했다. 자매 마틸다의 딸들인 소피와 베아트리체를 돌봤으며,[41] 소피와 베아트리체는 각각 바 공국과 토스카나 변경백국을 통치했다.
1027년 콘라트와 삼촌 부르고뉴의 루돌프 3세 사이를 중재하여 바젤 근처 무텐에서 평화 협정을 이끌어냈다. 루돌프는 남편의 부르고뉴 왕위 계승권을 인정했다. 콘라트와 아들 슈바벤의 에른스트 2세 사이를 중재하려 했으나, 에른스트는 계부에게 반복적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1030년 에른스트가 친구이자 봉신인 키부르크의 베르너를 거스르고 평화를 강요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모든 노력은 실패했다.
1032년 미에슈코 2세 람베르트 국왕을 대신해 성공적으로 중재하여 콘라트의 호의를 되찾게 했다. 슈파이어 대성당의 오랜 기증자이자 후원자로 가족 기념 문화 발전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8] 1039년 콘라트가 죽은 후, 아들 하인리히 3세와 장례 행렬을 이끌었다.
1030년대 동안 새로운 교회 개혁 운동의 후원자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1037년 이탈리아로 돌아가 새로운 위기에 대처한 콘라트를 대신하여 섭정으로 통치했다.[9] 1043년 고슬라르 황궁에서 이질로 사망했다.[3] 여러 황제들과 제국 가문 구성원들과 함께 독일 슈파이어 대성당 동굴에 묻혔다. 기젤라는 "매우 보기 좋은 외모"로 알려졌다.[10] 1900년 슈파이어에서 열린 묘에서 그녀의 미라화된 신체는 키가 172cm였고, 긴 금발 머리를 가졌다는 것이 밝혀졌다.[3]
2. 1. 가계 배경
슈바벤 공작 헤르만 2세와 부르고뉴 왕 콘라트의 딸 게르베르가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부모는 모두 샤를마뉴의 후손이었다.[39]아버지 헤르만 2세는 하인리히 1세의 손자인 리우돌프의 딸 작센의 리첼다의 아들이었다.[44] 어머니 부르고뉴의 게르베르가의 친정어머니 마틸다 드 서프랑크는 서프랑크 왕국 카롤링거 왕조의 군주 루이 4세의 딸로, 루이 4세는 샤를마뉴의 아들 루트비히 경건왕의 다섯째 아들 카를 2세의 증손이었다.
기젤라는 샤를마뉴의 후손임을 내세웠지만, 작센 왕조의 시조인 하인리히 1세나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대왕에 더 가까웠다. 할머니인 작센의 리첼다는 오토 1세의 장남 리우돌프의 딸로 하인리히 1세의 친증손녀였고, 외할머니 마틸다 드 서프랑크는 하인리히 1세의 딸 작센의 게르베르가의 딸이었다. 친할머니 리첼다의 친할머니는 에드워드 대왕의 딸 잉글랜드의 에디트였고, 외증조부 루이 4세의 어머니는 에드워드 대왕의 다른 딸 에드지푸였다.
기젤라의 언니 마틸다 폰 슈바벤은 케른텐 공작 콘라트 1세와 결혼하여 콘라트 2세 황제와 대적한 그의 사촌동생 콘라트 2세의 어머니가 되었다.
2. 2. 세 번의 결혼
기젤라는 브루니드 가문의 브라운슈바이크 백작 브루노 폰 브라운슈바이크와 결혼했다.[39] 그는 하인리히 1세의 큰아버지인 브루노의 후손이었다. 브루노와의 사이에서 프리슬란트의 리우돌프 변경백과 두 명의 딸을 얻었다.[33]1002년 브루노 폰 브라운슈바이크가 죽자, 바벤부르크 가문 출신 에른스트 1세와 재혼하였다.[39] 이 결혼에서 에른스트 2세와 헤르만 4세를 얻었다.[33] 루게릭병을 앓다가 자녀 없이 사망한 기젤라의 오빠 헤르만 2세의 후임으로 그의 두 번째 남편 에른스트 1세가 슈바벤 공작이 되었다.
1015년 두 번째 남편 에른스트 1세가 죽자, 1016년 또는 1017년 슈파이어 백작이던 콘라트 2세와 재혼했다.[39] 콘라트 2세는 오토 1세의 딸 리우트가르트의 증손자였으므로, 1024년 황제 하인리히 2세가 자녀 없이 죽자 독일의 국왕(프랑크인의 왕)이 되었다. 1027년에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관을 차지했다.[40]
기젤라와 브라운슈바이크의 브룬 1세 백작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자녀가 있었다.[33]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프리슬란트의 리우돌프 변경백 | 1003년경 – 1038년 1월 24일 | |
딸 | 1004년경 – ? | 포름바흐의 티에모 2세 백작과 결혼 |
기젤라 | 1005년경 – 1052년경 | 장거하우젠의 베르톨트 백작과 결혼 |
기젤라와 슈바벤의 에른스트 1세 공작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자녀가 있었다.[33]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슈바벤의 에른스트 2세 공작 | 1013년경 – 1030년 8월 17일 | |
슈바벤의 헤르만 4세 공작 | 1015년경 – 1038년 7월 28일 |
기젤라와 콘라트 2세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자녀가 있었다.[14]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헨리 3세 | 1017년 10월 28일 – 1056년 10월 5일 | |
마틸다 | 1027년 – 1034년 1월 | 프랑스의 앙리 1세와 약혼 |
베아트릭스 | 1030년경 – 1036년 9월 26일 |
2. 3. 프랑크 왕비 및 신성 로마 제국 황후
메르제부르크의 주교 테이도마르와 마인츠 대주교 아리보는 콘라트 2세와 기젤라가 가까운 친척이라는 이유로 결혼 무효를 주장했다.[3] 그러나 남편 콘라트 2세가 황제관을 쓴 뒤 13일 만에 기젤라는 황후로 책봉되었다.[4] 콘라트 2세에게서 훗날 신성 로마 제국 황제직을 계승하는 하인리히 3세, 프랑스의 왕 앙리 1세에게 시집가는 마틸타 폰 잘리어, 6세에 요절한 베아트릭스의 1남 2녀를 얻었다.기젤라는 신성 로마 제국의 정치에도 관여하여 제국 의회에도 개입하였다. 기젤라는 자신의 외삼촌 루돌프 3세를 상대로 상속권을 주장하여, 자신의 남편 콘라트 2세에게 아를 왕국을 가게 했다.[41] 또한 기젤라는 교회의 여러 행사, 모임에 참석하였다. 기젤라는 언니 마틸다의 두 딸 소피와 베아트리체가 상속권을 주장할 것을 대비하여, 각각 멀리 이탈리아의 바르 백작과 토스카나 변경백국 후작에게 시집보냈다.[41]
기젤라의 세 번째 결혼은 1017년 1월 이전에 이루어졌으며, 콘라트 2세와 결혼했다.[39] 콘라트 2세는 1024년 독일 국왕으로 선출되었고, 1027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되었다. 메르제부르크의 티트마르에 따르면, 아리보는 기젤라와 콘라트가 너무 가까운 친척 관계에 있다며 여왕으로 대관하는 것을 거부했다.[3] 두 사람은 모두 하인리히 1세 왕의 후손이었다. 대신 그녀는 콘라트의 대관식 13일 후에 필그림 대주교에 의해 대관되고 성유를 받았다.[4]
1039년 콘라트가 죽은 후, 그녀와 아들 하인리히 3세는 장례 행렬을 이끌었다.
2. 4. 태후와 사망
1039년 기젤라는 세 번째 남편 콘라트 2세의 죽음을 맞이했다. 콘라트 2세 사후, 기젤라와 아들 하인리히 3세는 장례 행렬을 이끌었다.[42]1043년 2월, 기젤라는 이질에 걸려 고생하다가 2월 14일 또는 15일에 고슬라어 궁전에서 사망했다.[3] 그녀는 슈파이어 대성당의 황실 묘소에 안치되었다.[8] 1900년에 그녀의 석관이 발견되었는데, 미라화된 시신에는 납 함유량이 높았고, 긴 금발머리에 키는 172cm 전후였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3. 평가
기젤라는 "매우 보기 좋은 외모"로 알려져 있었다.[10] 1900년 슈파이어에서 기젤라의 묘가 열렸을 때, 미라화된 그녀의 신체는 키가 172cm였고 긴 금발 머리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기젤라는 야심차고, 지적이며, 활력이 넘치는 인물이었다. 남편의 "필수적인 동반자"로서, 종종 남편의 소규모 자문단 내에서 권위적이고 단호하게 행동했다.[11] 콘라트와 달리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그는 종종 그녀에게 교회의 일을 위임하기도 했다.[12]
독일에서는 기젤라 폰 슈바벤에 대한 새로운 연구와 전시가 이루어지면서, 잘리어 왕조와 황실 여성에 대한 최근의 관심과 함께 그녀에 대한 평가가 부활했다.[15][16] 기젤라는 종종 야심차고 지적이며 강인한 여성으로 묘사되지만, 동시에 남편에게 충실한 파트너였으며, "자신의 정치"를 추구하기보다는 조화로운 팀을 이루었다고 여겨진다.[8]
기젤라의 결혼과 관련된 많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녀가 결혼한 남자들은 모두 독일 왕이 될 잠재력이 있었고, 결국 콘라트가 왕위에 올랐다. 두 번째 남편 에른스트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도 전해지는데, 그는 의심스러운 상황에서 사냥 중 수행원 중 한 명이 쏜 화살에 맞아 죽었다. 그는 자신을 죽인 자를 용서하고 기젤라에게 다음 결혼에 대해 경고했다고 전해진다. 콘라트가 기젤라를 납치했다는 두 가지 이야기도 있는데, 역사가들은 이 이야기를 완전히 무시하지 않는다.
4. 유산
독일에서는 기젤라 폰 슈바벤에 대한 새로운 연구와 전시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이는 잘리어 왕조와 황실 여성에 대한 최근의 관심이 높아진 덕분이다. 과거에는 기젤라가 남편과 가족에게 가려져 잊혀졌었지만, 이제는 그녀의 역할과 영향력이 재조명되고 있다.[15][16] 기젤라는 야심차고 지적이며 강인한 여성이면서도, 남편에게 충실한 동반자로서 조화로운 관계를 추구했던 인물로 묘사된다.[8]
기젤라의 결혼과 관련된 여러 이야기들이 전해져 내려온다. 그녀가 결혼한 남자들은 모두 독일 왕이 될 가능성이 있었고, 실제로 콘라트가 왕위에 올랐다. 첫 번째 남편 브룬은 암멘슬레벤 백작 밀로에게 살해당했고, 두 번째 남편 에른스트는 사냥 중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다. 에른스트는 자신을 죽인 자를 용서하고 기젤라에게 다음 결혼에 대해 경고했다고 전해진다. 콘라트가 기젤라를 납치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역사가들은 이 이야기가 과장되었거나 근친혼에 대한 비판을 피하기 위한 의도적인 왜곡일 수 있다고 추정한다.
기젤라와 콘라트의 첫째 아들 콘라트는 림부르크에서 죽었는데, 사냥 중 사고를 당했거나 절벽에서 추락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기젤라는 콘라트에게 조상 대대로 살던 곳을 성스러운 땅으로 바꿀 것을 설득했고, 1030년 7월 12일 림부르크 수도원의 초석을 놓았다. 같은 날 정오에는 슈파이어 대성당의 첫 번째 돌을 놓았다.[19][20]
기젤라는 이탈리아의 아델라이드, 테오파누, 룩셈부르크의 쿤둥데, 푸아티에의 아그네스와 함께 "권력의 기둥"으로 묘사되며, 라인강변 잉겔하임 시에서 기념되고 있다. 하이데스하임 문에는 이들의 삶과 업적을 묘사하는 6개의 석주가 있다. 이 다섯 명의 황후들은 모두 잉겔하임의 ''카이저팔츠''(황제의 거처)에 머물렀던 적이 있다.
5. 현대의 재조명
기젤라의 결혼, 남편들의 죽음, 콘라트 2세의 기젤라 납치설 등 여러 이야기가 전해진다. 역사가들은 콘라트가 기젤라를 위해 벌름 가문의 이해관계에 반하는 결혼을 다시 주선할까 봐 걱정했을 수 있다는 점을 들어 납치설을 완전히 무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들은 허황되거나 부정확한 세부 사항을 추가함으로써 자체적인 신빙성을 훼손하기도 한다.[19] 메르제부르크의 티트마르는 폭력적인 행위가 아닌 근친혼을 이유로 결혼을 비판했다.[19]
기젤라는 아들 콘라트가 죽자 남편 콘라트 2세에게 조상 대대로 살던 곳을 성스러운 땅으로 바꿀 것을 설득했다. 이에 따라 1030년 7월 12일 림부르크 수도원의 초석을 놓았고, 슈파이어 대성당의 첫 번째 돌을 놓았다.[19][20]
1880년 발견된 25점의 금제 보석은 "기젤라의 보석" 또는 "기젤라의 보물"이라고 불리며, 프랑크푸르터 룬트샤우(Frankfurter Rundschau)는 이를 "중세 금세공의 가장 중요한 증거"로 평가했다. 그러나 보물의 시기, 기원, 소유자에 대한 논쟁이 많다. 헤시셰스 란데스뮤지엄 다름슈타트(Hessisches Landesmuseum Darmstadt) 전시회에서는 이 보석들이 비스바덴(Wiesbaden) 근처에서 발견되었으며, 일부는 빌헬름 2세(Wilhelm II)를 속이기 위한 19세기 위조품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메크틸트 슐체-되를람은 보물이 진품이고 발견 장소가 마인츠라고 주장했지만, 11세기 조각들로 구성된 이 보물은 기젤라의 며느리인 푸아티의 아그네스(Agnes of Poitou)와 관련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21][22][23][24] 메트로폴리탄 미술관(Metropolitan Museum of Art)의 찰스 T. 리틀은 테오파누(Theophanu)와 연결시켰고,[21][22][23][24] 피터 라스코는 카롤링거 왕조(Carolingian dynasty) 후기 시대를 제시한다. 가장 주목할 만한 작품은 독수리(또는 공작새) 모양의 피불라인데, 진위는 의심받지 않지만, 최신 조사에서도 명확한 시기를 확정하지 못했다. 비르기트 하이데는 그 시기가 9세기 후반(즉, 후기 카롤링거 시대)보다 훨씬 이전이거나, 975년에서 1025년 사이일 것이라고 주장한다.[25][26]
하인리히 3세의 황금 복음서(Golden Gospels of Henry III)는 하인리히 3세가 어머니 기젤라를 기리기 위해 의뢰한 것으로, 기젤라와 콘라트가 그리스도 앞에 있는 이미지가 주목할 만하다. 이 부부는 통치 파트너로 묘사되어 있으며, 신성한 축복을 받고, 신성한 인물과 연관되어 있으며, 의상의 색상이 일치한다.[27]
기젤라는 이탈리아의 아델라이드, 테오파누, 룩셈부르크의 쿤둥데, 푸아티에의 아그네스와 함께 "권력의 기둥(Säulen der Macht)"으로 묘사되며, 라인강변 잉겔하임 시에서 기념되고 있다. 하이데스하임 문(Heidesheimer Tor)에는 이들의 삶과 업적을 묘사하는 6개의 석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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