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무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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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무종은 일본 프로 야구 선수로, 1972년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 입단하여 1982년 첫 홈런을 기록했다. 1983년에는 우다 히가시시게와 함께 해태 타이거즈로 이적하여 '김무종'이라는 등록명으로 활동했다. 한국 프로 야구에서 3번의 한국시리즈 우승과 5번의 올스타전 출전을 기록했으며, 1986년 올스타전 MVP로 선정되었다. 1988년 은퇴 후 회사원으로 전직했으며, '타키무라 시게미'로 개명했다. 은퇴 후 1991년부터 1993년까지 삼성 라이온즈의 배터리 코치를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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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일 한국인 출신 KBO 리그 선수 - 송재박
송재박은 일본과 한국 프로 야구에서 선수와 코치로 활동하며, 일본에서는 세이부 라이온스와 요코하마 다이요 훼일스에서, 한국에서는 OB 베어스에서 선수 생활을 했고, 은퇴 후 두산 베어스 코치로 활동하며 우수 코치상을 수상했다. - 재일 한국인 출신 KBO 리그 선수 - 후쿠시 히로아키
후쿠시 히로아키는 일본 프로 야구와 KBO 리그에서 투수로 활약하며 1980년 일본 최고 승률, 1983년 KBO 리그 30승 및 골든 글러브를 수상했으나, 은퇴 후 마약 투약 혐의로 구속되는 불운을 겪은 일본 돗토리현 출신 야구 선수이자 코치이다. - 1983년 스포츠 - 김일권 (야구인)
김일권은 군산남초등학교에서 야구를 시작하여 프로 선수로 해태 타이거즈, 태평양 돌핀스, LG 트윈스에서 활동하며 통산 363개의 도루를 기록했고, 은퇴 후에는 여러 팀에서 주루코치로 활동했다. - 1983년 스포츠 - 이상윤 (야구인)
이상윤은 8시즌 동안 해태 타이거즈 투수로 활약하며 175경기 65승 46패 14세이브, 평균 자책점 3.13을 기록했고, 1983년 20승을 달성했으며, 1990년 해태 타이거즈 코치로 활동했다. - 재일 한국인 야구 선수 - 송재박
송재박은 일본과 한국 프로 야구에서 선수와 코치로 활동하며, 일본에서는 세이부 라이온스와 요코하마 다이요 훼일스에서, 한국에서는 OB 베어스에서 선수 생활을 했고, 은퇴 후 두산 베어스 코치로 활동하며 우수 코치상을 수상했다. - 재일 한국인 야구 선수 - 장훈
장훈은 일본 히로시마 출신의 재일 한국인 야구 선수이자 해설가로, 일본 프로야구에서 최다 안타 기록과 3,000안타-500홈런-300도루라는 이례적인 기록을 보유했으며, 은퇴 후에는 해설가로 활동하며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대한민국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상했다.
2. 일본 프로 야구 시절
야마구치 사쿠라가오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72년 드래프트 8위로 히로시마에 입단[3]했다. 프로 10년차인 1982년에 1군 첫 홈런을 기록[3]했다.
2. 1. 유년 시절 및 히로시마 도요 카프 입단
야마구치 사쿠라가오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72년 드래프트 8위로 히로시마에 입단했다.[3] 프로 10년차인 1982년에 1군 첫 홈런을 기록했다.[3]2. 2. 프로 선수 경력
야마구치 사쿠라가오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72년 드래프트 8위로 히로시마에 입단했다.[3] 프로 10년차인 1982년에 1군 첫 홈런을 기록했다.[3]1983년 1월, 우다 히가시시게와 함께 한국의 해태 타이거즈로 이적했다.[3] 대한민국에서의 등록명은 '''김무종'''(金武宗)이었다.
한국에서는 한국시리즈 3회 출전, 올스타전 5회 출전을 기록했으며, 1986년에는 올스타전 MVP로 선정되는 등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다.[3]
1983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했을 당시 시상식에는, 히로시마 시절 동료로 삼미 슈퍼스타즈로 이적해 활약하고 있던 후쿠시 타카아키가 찾아와 "잘됐다", "온 보람이 있었다"고 말하며, 우다를 포함한 3명이 함께 울었다는 일화가 있다.[4]
1988년에 현역에서 은퇴했다.
3. 한국 프로 야구 시절
야마구치 사쿠라가오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72년 드래프트 8위로 히로시마에 입단[3]했다. 프로 10년차인 1982년에 1군 첫 홈런을 기록[3]했다.
1983년 1월, 우다 히가시시게와 함께 해태 타이거즈로 이적[3]하여, 한국시리즈 3회, KBO 올스타전 5회 출전, 1986년 올스타전 MVP 등에 선정되었다.[3] 1988년에 은퇴했다.[5]
3. 1. 해태 타이거즈 입단
1982년에 일본 프로 야구 1군에서 첫 홈런을 기록했다.[3] 1983년 1월, 우다 히가시시게와 함께 해태 타이거즈로 이적했으며, 당시 계약 조건은 계약금 2100만엔, 연봉 2400만엔이었다.[3] 대한민국에서의 등록명은 '''김무종'''(김무종|한국어)이었다.3. 2. 해태 타이거즈에서의 활약 (1983-1988)
1983년 1월, 김무종은 우다 히가시시게와 함께 계약금 21000000JPY, 연봉 24000000JPY의 조건으로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했다.[3] 한국시리즈에 3회 출전하고, 올스타전에 5회 출전했으며, 1986년에는 올스타전 MVP로 선정되었다.[3] 1988년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3. 2. 1. 1983년 한국시리즈 우승 일화
1983년 1월, 우다 히가시시게와 함께 한국의 해태 타이거즈로 이적했다.[3] 1983년 한국시리즈 우승 당시 시상식에는 히로시마 시절 동료로 삼미 슈퍼스타즈에서 활약하던 후쿠시 타카아키가 찾아와 "잘됐다", "온 보람이 있었다"라고 말하며, 우다를 포함한 세 명이 함께 울었다는 일화가 있다.[4]3. 3. 은퇴
1988년에 현역에서 은퇴했다.[5] 은퇴 후에는 회사원으로 전직했으며, "타키무라 시게미"(滝村 茂美)로 성을 개명했다.[5]4. 은퇴 이후
5. 통산 기록
6. 상세 정보
김무종은 1983년부터 1988년까지 해태 타이거즈에서 사용한 등록명이다.[3] 해태 타이거즈 시절 등번호는 25번이었다.[3]
6. 1. 일본 프로 야구 주요 기록
; 주요 기록
- 첫 출장: 1974년 10월 5일, 대 주니치 드래곤스 25차전 (히로시마 시민 구장), 9회말 가와바타 가즈토의 대타로 출장, 미사와 준에게 범타
- 첫 안타: 1982년 8월 18일, 대 요미우리 자이언츠 23차전 (히로시마 시민 구장), 8회말 오가와 구니카즈의 대타로 출장, 아사노 게이지로부터 단타
- 첫 선발 출장: 1982년 8월 21일, 대 한신 타이거스 16차전 (히로시마 시민 구장), 8번·포수로 선발 출장
- 첫 홈런·첫 타점: 1982년 9월 4일, 대 야쿠르트 스왈로스 20차전 (나가오카시 유큐잔 야구장), 7회초 가지마 겐이치로부터 솔로 홈런
6. 2. 수상 경력
- 1986년 KBO 올스타전 MVP[1]
6. 3. 등번호
- 57번 (1973년 - 1974년)
- 37번 (1975년 - 1982년)
- 25번 (1983년 - 1988년)
6. 4. 등록명
김무종|金茂宗한국어으로, 1983년부터 1988년까지 해태 타이거즈에서 사용한 등록명이다.[3]참조
[1]
서적
プロ野球人名事典 2003
日外アソシエーツ
2003
[2]
뉴스
<野球>ハンファ、在日同胞の姜秉秀と契約
https://japanese.joi[...]
[3]
서적
プロ野球人名事典 2003
日外アソシエーツ
2003
[4]
서적
海峡を越えたホームラン―祖国という名の異文化
双葉社
1997-01-01
[5]
방송
NHK「ハイビジョン特集『白球〜選手たちは海を渡った』」
2011-02-06
[6]
뉴스
프로야구 독수리,홈런 3발로 곰 격파
https://newslibrary.[...]
동아일보
2020-09-21
[7]
뉴스
"[삼성라이온즈 18년 .5] 김성근 감독"
https://www.yeongnam[...]
영남일보
2020-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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