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미우리 자이언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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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요미우리 자이언츠는 1934년 창단된 일본의 프로 야구팀으로, 센트럴 리그 소속이다. 1936년 도쿄 교진군으로 시작하여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으며, 일본 프로 야구 리그에서 39번의 센트럴 리그 우승과 22번의 일본 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1965년부터 1973년까지 가와카미 데쓰하루 감독의 지휘 아래 9년 연속 일본 시리즈 우승을 달성하며 'V9' 시대를 열었고, 오 사다하루, 나가시마 시게오 등 뛰어난 선수들을 배출했다. 한신 타이거스와의 라이벌 관계는 일본 프로 스포츠 역사상 가장 치열한 것으로 꼽히며,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 주니치 드래건스와도 지역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요미우리 자이언츠
기본 정보
이름요미우리 자이언츠
영어 표기Yomiuri Giants
공식 명칭주식회사 요미우리 교진군
별칭교진 (巨人, 거인)
이전 이름다이닛폰도쿄야큐쿠라부 (大日本東京野球倶楽部, 1934년 ~ 1935년)
도쿄 교진군 (東京巨人軍, 1935년 ~ 1946년)
도쿄 요미우리 교진군 (東京読売巨人軍, 1947년 ~ 현재)
창단일1934년 12월 26일
연고지도쿄도 (1952년 ~ 현재)
홈구장도쿄 돔
수용 인원약 46,000명
구단주야마구치 도시카즈
스폰서요미우리 신문 그룹 본사
구단 사장구니마쓰 도루
감독아베 신노스케
선수 회장오시로 다쿠미
주장오카모토 가즈마
마스코트기아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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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미우리 자이언츠 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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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미우리 자이언츠 모자 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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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돔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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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미우리 자이언츠 유니폼
유튜브 정보
채널 이름読売ジャイアンツ
채널 URLUCXxg0igSYUp0tqdd6luPEnQ
활동 시작일2017년
장르야구
구독자 수65.6만 명
조회수5.7억 회
운영주식회사 요미우리 교진군
영구 결번
영구 결번 선수1: 오 사다하루
3: 나가시마 시게오
4: 구로사와 도시오
14: 사와무라 에이지
16: 가와카미 데쓰하루
34: 가네다 마사이치
참가 리그
리그일본 프로 야구
센트럴 리그 (1950년 ~ 현재)
일본 야구 리그 (1936년 ~ 1949년)
독립 (1934년 ~ 1935년)
우승 기록
아시아 시리즈 우승2012
아시아 시리즈 우승 횟수1회
한일 클럽 챔피언십 우승2009
한일 클럽 챔피언십 우승 횟수1회
리그 우승 횟수48회
리그 우승1936 추계
1937 춘계
1938 추계
1939
1940
1941
1942
1943
1949
1951
1952
1953
1955
1956
1957
1958
1959
1961
1963
1965
1966
1967
1968
1969
1970
1971
1972
1973
1976
1977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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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
1994
1996
2000
2002
2007
2008
2009
2012
2013
2014
2019
2020
2024
일본 시리즈 우승 횟수22회
일본 시리즈 우승1951
1952
1953
1955
1961
1963
1965
1966
1967
1968
1969
1970
1971
1972
1973
1981
1989
1994
2000
2002
2009
2012
센트럴·퍼시픽 교류전 우승 횟수2회
센트럴·퍼시픽 교류전 우승2012
2014
시리즈 출장 기록
시리즈 출장 횟수36회
시리즈 출장 결과22승 14패
일본 시리즈 출장1951
1952
1953
1955
1956
1957
1958
1959
1961
1963
1965
1966
1967
1968
1969
1970
1971
1972
1973
1976
1977
1981
1983
1987
1989
1990
1994
1996
2000
2002
2008
2009
2012
2013
2019
2020
아시아 시리즈 출장2012
아시아 시리즈 출장 횟수1회
한일 클럽 챔피언십 출장2009
한일 클럽 챔피언십 출장 횟수1회
클라이맥스 시리즈
클라이맥스 시리즈 결과5승 9패
클라이맥스 시리즈 출장2007
2008
2009
2010
2011
2012
2013
2014
2015
2016
2018
2019
2021
2024
클라이맥스 시리즈 횟수1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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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2. 구단의 역사

1931년, 요미우리 신문사 사장 쇼리키 마쓰타로는 미국 메이저 리그 선발팀을 일본으로 초청하여 일본 대표 선발팀 및 대학 강호 팀들과의 경기를 개최하여 흥행에 성공했다. 이에 고무된 쇼리키는 다시 메이저 리그 선발군, 특히 베이브 루스를 초청하려 했으나, 1932년 일본 문부성의 야구 통제 훈령으로 인해 메이저 리그 선발군과 대학 야구팀 간의 경기는 무산되었다.

이치오카 다다오, 아사누마 요시오, 미야케 다이스케, 스즈키 소타로는 쇼리키에게 “직업 야구 팀을 만드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고, 1934년 6월 9일, 일본 공업 클럽에서 ‘직업 야구단 발기인회’를 열고 6월 11일에 창립 사무소를 설치했다. 같은 해 선수 영입을 시작, 미하라 오사무를 영입하는 등 팀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1934년 10월 15일, 지바현 해안에 새로 설립된 구장에서 팀을 결성했고, 11월 2일 요코하마에 메이저 리그 선발팀이 도착하여 일본 대표 선발팀과의 친선 경기를 실시했다. 일본 대표 선발팀은 15전 전패를 당했지만, 베이브 루스, 루 게릭 등이 포함된 메이저 리그 선발팀은 큰 관심을 받았다. 12월 26일, 일본 대표 선발팀 선수들을 중심으로 주식회사 대일본 도쿄 야구 클럽(株式会社大日本東京野球倶楽部일본어)이 결성되었다.

1935년 1월 14일부터 2월 3일까지 구사나기 구장에서 연습을 한 후, 2월 14일에 제1차 미국 원정에 나섰다. 이때 ‘대일본 도쿄 야구 클럽’이라는 팀명이 너무 길다는 미국의 요청에 따라 팀명을 ‘도쿄 자이언츠’(東京ジャイアンツ일본어)로 변경했다. 미국에서는 마이너 리그 팀을 상대로 109경기를 치러 75승 33패 1무를 기록했다. 7월 16일에 귀국해 9월 6일부터는 일본 국내 각지를 순회했는데, 이는 이듬해부터 이어진 직업 야구단의 잇따른 결성의 계기가 되었다.

1936년, 도쿄 교진군(東京巨人軍일본어)으로 정식 개칭하면서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시작되었다.

2.1. 창단 배경 (1931년 ~ 1935년)

1931년, 요미우리 신문사 사장 쇼리키 마쓰타로는 미국 메이저 리그 선발팀을 일본으로 초청하여 일본 대표 선발팀과 대학 강호 팀들과의 경기를 개최하여 흥행에 성공했다. 이에 고무된 쇼리키는 다시 메이저 리그 선발군, 특히 베이브 루스를 초청하려 했으나, 1932년 일본 문부성의 야구 통제 훈령으로 인해 메이저 리그 선발군과 대학 야구팀 간의 경기는 무산되었다.

이치오카 다다오, 아사누마 요시오, 미야케 다이스케, 스즈키 소타로는 쇼리키에게 “직업 야구 팀을 만드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고, 1934년 6월 9일, 일본 공업 클럽에서 ‘직업 야구단 발기인회’를 열고 6월 11일에 창립 사무소를 설치했다. 같은 해 선수 영입을 시작, 미하라 오사무를 영입하는 등 팀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1934년 10월 15일, 지바현 해안에 새로 설립된 구장에서 팀을 결성했고, 11월 2일 요코하마에 메이저 리그 선발팀이 도착하여 일본 대표 선발팀과의 친선 경기를 실시했다. 일본 대표 선발팀은 15전 전패를 당했지만, 베이브 루스, 루 게릭 등이 포함된 메이저 리그 선발팀은 큰 관심을 받았다. 12월 26일, 일본 대표 선발팀 선수들을 중심으로 주식회사 대일본 도쿄 야구 클럽(株式会社大日本東京野球倶楽部일본어)이 결성되었다.

1935년 1월 14일부터 2월 3일까지 구사나기 구장에서 연습을 한 후, 2월 14일에 제1차 미국 원정에 나섰다. 이때 ‘대일본 도쿄 야구 클럽’이라는 팀명이 너무 길다는 미국의 요청에 따라 팀명을 ‘도쿄 자이언츠’(東京ジャイアンツ일본어)로 변경했다. 미국에서는 마이너 리그 팀을 상대로 109경기를 치러 75승 33패 1무를 기록했다. 7월 16일에 귀국해 9월 6일부터는 일본 국내 각지를 순회했는데, 이는 이듬해부터 이어진 직업 야구단의 잇따른 결성의 계기가 되었다.

1936년, 도쿄 교진군(東京巨人軍일본어)으로 정식 개칭하면서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시작되었다.

2.1.1. 창단 주역

1931년, 요미우리 신문사 사장 쇼리키 마쓰타로는 미국 메이저 리그 선발팀을 일본으로 초대하여 일본 대표 선발팀 및 대학 강호 팀들과의 경기를 통해 흥행에 성공했다. 이에 고무된 쇼리키는 다시 메이저 리그 선발군을 초청하려 했고, 특히 베이브 루스를 초청하려 했다. 그러나 1932년 일본 문부성의 야구 통제 훈령으로 인해 메이저 리그 선발군과 대학 야구팀 간의 경기는 무산되었다.

이치오카 다다오, 아사누마 요시오, 미야케 다이스케, 스즈키 소타로는 쇼리키에게 “직업 야구 팀을 만드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고, 1934년 6월 9일, 일본 공업 클럽에서 ‘직업 야구단 발기인회’를 열고 6월 11일에 창립 사무소를 설치했다. 같은 해 선수 영입을 시작, 미하라 오사무를 영입하는 등 팀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1934년 10월 15일, 지바현 해안에 새로 설립된 구장에서 팀을 결성했고, 11월 2일 요코하마에 메이저 리그 선발팀이 도착하여 일본 대표 선발팀과의 친선 경기를 실시했다. 일본 대표 선발팀은 15전 전패를 당했지만, 베이브 루스, 루 게릭 등이 포함된 메이저 리그 선발팀은 큰 관심을 받았다. 12월 26일, 일본 대표 선발팀 선수들을 중심으로 주식회사 대일본 도쿄 야구 클럽(株式会社大日本東京野球倶楽部일본어)이 결성되었다.

「요미우리 자이언츠 발상의 지」비, 야쓰 바라엔 입구 옆, 나리타시
「요미우리 자이언츠 발상의 지」비, 야쓰 바라엔 입구 옆, 나리타시


1935년 1월 14일부터 2월 3일까지 구사나기 구장에서 연습을 계속하며 2월 14일에 제1차 미국 원정에 나섰다. 이때 ‘대일본 도쿄 야구 클럽’이라는 팀명이 너무 길다는 미국의 요청에 따라 팀명을 ‘도쿄 자이언츠’(東京ジャイアンツ일본어)로 변경했다. 초대 감독은 미야케 다이스케였다. 미국에서는 마이너 리그 팀을 상대로 109경기를 치러 75승 33패 1무를 기록했다. 7월 16일에 귀국해 9월 6일부터는 일본 국내 각지를 순회했는데, 이는 이듬해부터 이어진 직업 야구단의 잇따른 결성의 계기가 되었다.

1936년, 도쿄 교진군(東京巨人軍일본어)으로 정식 개칭하면서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시작되었다.

2.1.2. 창단 과정

1931년, 요미우리 신문사 사장 쇼리키 마쓰타로는 미국 메이저 리그 선발팀을 일본으로 초청하여 일본 대표 선발팀 및 대학 강호 팀들과의 경기를 성공적으로 개최하였다. 이에 고무된 쇼리키는 다시 메이저 리그 선발군, 특히 베이브 루스를 초청하려 했으나, 1932년 일본 문부성의 야구 통제 훈령으로 인해 무산되었다.

이치오카 다다오, 아사누마 요시오, 미야케 다이스케, 스즈키 소타로 등 4명은 쇼리키에게 직업 야구 팀 결성을 제안했고, 1934년 6월 9일 일본 공업 클럽에서 '직업 야구단 발기인회'를 개최, 6월 11일에 창립 사무소를 설치하였다. 같은 해 미하라 오사무를 첫 선수로 영입하는 등 팀 구성을 시작했다.

1934년 10월 15일, 지바현 해안의 새 구장에서 팀을 결성했고, 11월 2일 요코하마에 도착한 메이저 리그 선발팀과 일본 대표 선발팀의 친선 경기가 열렸다. 일본 대표 선발팀은 15전 전패를 당했지만, 베이브 루스, 루 게릭 등이 포함된 메이저 리그 선발팀은 큰 관심을 받았다. 12월 26일, 일본 대표 선발팀 선수들을 중심으로 주식회사 대일본 도쿄 야구 클럽(株式会社大日本東京野球倶楽部일본어)이 결성되었다.

1935년 1월 14일부터 2월 3일까지 구사나기 구장에서 연습 후, 2월 14일 제1차 미국 원정을 떠났다. 이때 팀명이 너무 길다는 미국의 요청에 따라 '도쿄 자이언츠'(東京ジャイアンツ일본어)로 변경되었다. 미국 원정에서 마이너 리그 팀을 상대로 75승 33패 1무를 기록했다. 7월 16일 귀국 후, 9월 6일부터 일본 국내 각지를 순회했는데, 이는 다음 해부터 이어진 직업 야구단 결성의 계기가 되었다.

1936년, 도쿄 교진군(東京巨人軍일본어)으로 정식 개칭했다. 이것이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시작이다.

2.1.3. 도쿄 자이언츠 명명

1934년 미국 원정 당시, '대일본 도쿄 야구 클럽'이라는 팀명이 미국인들에게는 너무 길고 어렵다는 지적을 받았다. 이에 현지 매니저였던 프랭크 오돌은 일본의 도쿄가 미국의 뉴욕과 같다는 점에 착안하여, 뉴욕의 프로 야구팀 뉴욕 자이언츠의 이름을 따 도쿄 자이언츠(東京ジャイアンツ일본어)라는 이름을 제안했고, 구단은 이를 받아들였다.

이후 1936년, 일본으로 돌아온 구단은 '자이언츠'를 일본어로 번역한 도쿄 교진군(東京巨人軍일본어)으로 정식 명칭을 변경하였다. 이것이 현재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시작이다.

2.2. 일본 프로 야구 리그 참가와 전시(戦時) (1936년 ~ 1945년)

巨}} 마크 유니폼을 입은 빅토르 스타루힌(스다 히로시)
巨}} 마크 유니폼을 입은 빅토르 스타루힌(스다 히로시)

1936년 일본 프로야구 리그가 창설되면서 팀명은 도쿄 교진(Tokyo Kyojin)으로 변경되었으며, 비일본어권 자료에서는 종종 도쿄 자이언츠로 불렸다. 2월 5일, 일본직업야구연맹이 결성되었고, 9일에는 나고야시 교외 나루미구장에서 열린 나고야긴샤치군과의 경기는 현재의 일본야구기구에 해당하는 직업야구연맹 소속 팀끼리 치른 최초의 경기였다. 이 경기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두 번째 미국 원정 환송회이자 긴샤치군의 결성 기념을 겸한 것으로, 1차전은 긴샤치군에게 3대 10으로 패했지만, 다음 날 열린 2차전과 3차전은 요미우리가 연승했다.

이 직후인 1936년 2월 14일 전년에 이어 제2차 미국 원정을 떠났다. 미국에서는 1차와 마찬가지로 마이너 리그급 팀들을 상대로 10개 주를 순회하며 89일 동안 76경기를 치렀고, 성적은 42승 33패 1무였다. 7월 5일 대동경전에서 승리하여 공식전 구단 첫 승리를 거두었다. 7월 15일 나카지마 하루야스오사카 타이거스전에서 친 홈런이 구단 1호 홈런이다. 9월 25일에는 사와무라 에이지가 오사카전에서 일본 프로야구 역사상 최초의 노히트노런을 달성했다.

1937년 춘계전은 7월 11일 세네이터스전(카미이구사)에서 승리하여 전년에 이어 2년 연속 우승을 달성했다. 추계전은 오사카에 7전 전패하며 9게임 차로 2위를 기록, 처음으로 우승을 놓쳤다. 전쟁 전까지는 요미우리와 오사카 두 구단이 우승을 나눠 가졌다.

1939년부터 연중 리그전이 되어, 11월 9일 난카이전(고라쿠엔)에서 승리하여 2년 연속 우승을 차지했다. 1월과 12월 두 차례에 걸쳐 마닐라 원정을 갔다. 1940년 7월 31일부터 8월 23일까지 만주 리그전에서는 14승 2패의 성적으로 우승을 거머쥐었다. 같은 해 9월 13일에는 미국, 영국과의 관계 악화의 영향으로 연맹에서 영어 금지 통달이 나와 자이언츠의 별명을 사용하지 않고, 유니폼 마크가 "GIANTS"에서 巨일본어로 변경되었다. 11월 10일 한신전(고라쿠엔)에서 승리하여 3년 연속 우승을 차지했다.

1941년 10월 29일 한신전(고라쿠엔)에서 승리하여 4년 연속 우승을 차지했다. 1942년 11월 1일 한큐전(고시엔)에서 승리하여 5년 연속 우승을 차지했다. 1943년 10월 31일 나고야전(고라쿠엔)에서 승리하여 6년 연속 우승을 차지했다.

2.2.1. 일본 프로 야구 리그 결성과 참가

1937년~1943년 요미우리의 전신인 도쿄 교진군의 대표적인 에이스 투수였던 사와무라 에이지
1937년~1943년 요미우리의 전신인 도쿄 교진군의 대표적인 에이스 투수였던 사와무라 에이지

1936년, 쇼리키 마쓰타로의 적극적인 움직임과 함께 일본 국내에서 도쿄 교진군을 포함한 7개의 직업 야구단이 결성되면서 ‘일본 직업 야구 연맹’(日本職業野球連盟일본어)이 결성되었다. 봄철에는 일본에서 첫 직업 야구 리그가 시작되었지만, 요미우리는 미국 원정 중이었기 때문에 춘계 대회를 결장하고 하계 대회에 이르러서야 참가했다. 그러나 하계 대회에서 2승 5패라는 성적으로 참패를 기록했고, 9월 5일부터 군마현 다테바야시시의 모린지 분푸쿠 구장에서 긴급 훈련을 시작했다. 1936년 추계 대회는 6차례의 소규모 리그전으로 승점제로 개최되어 5번째 리그전까지 앞서고 있었지만, 6번째 리그전에서 오사카 타이거스에게 패하며 스자키 구장에서 3전 2선승제의 우승 결정전을 치르게 되었고, 결국 오사카 타이거스를 2승 1패로 누르고 공식전에서 최초로 우승한 구단이 되었다.

이듬해 1937년 9월 11일에는 고라쿠엔 구장이 개장되었고, 이때부터 고라쿠엔 구장이 실질적인 요미우리의 홈구장이 되었다. 1939년에는 두 차례의 마닐라 원정을 실시했다. 그 이후 전쟁 직전까지 3회의 노히트 노런을 달성한 사와무라 에이지, 42승을 기록한 빅토르 스타루힌, 두 차례의 노히트 노런을 달성한 나카오 히로시, 62이닝 연속 무실점과 시즌 평균자책점 0.73(일본 기록)을 기록한 후지모토 히데오, 일본 프로 야구 사상 최초의 두 자릿수 홈런 타자이자 3관왕(1965년에 프로 야구 실행 위원회에서 인정)을 기록한 나카지마 하루야스와 함께 11시즌 동안 8회의 우승을 차지하며 제1차 황금 시대를 맞았다.

그러나 프로 야구도 태평양 전쟁의 영향은 피하기 어려웠고, 징집으로 주전 선수들이 빠져나가면서 1940년 9월 13일에는 유니폼의 마크가 ‘G’에서 ‘巨’(거)로 바뀌는 등 요미우리에게도 그 영향이 미쳤다. 결국 1944년 11월 10일에 야구 경기가 사실상 불가능해지면서 회사는 존속하되 영업이 중지되는 등 구단은 해산되었다. 11월 13일에는 국가의 명령에 의해 일본 야구 연맹이 이름을 바꾼 일본 야구보국회가 프로 야구의 일시 중지에 관한 성명을 발표하며 전쟁 전의 프로 야구가 끝나게 되었다.

2.2.2. 제1차 황금 시대

1937년~1943년 요미우리의 전신인 도쿄 교진군의 대표적인 에이스 투수였던 사와무라 에이지
1937년~1943년 요미우리의 전신인 도쿄 교진군의 대표적인 에이스 투수였던 사와무라 에이지

1936년 일본 직업 야구 연맹이 결성되면서 요미우리는 하계 대회부터 참가했다. 하계 대회에서 2승 5패로 참패한 후, 9월 5일부터 다테바야시시의 분보쿠 구장에서 긴급 캠프를 차렸다. 1936년 추계 대회는 6차례의 소규모 리그전으로 승점제로 개최되었는데, 요미우리는 오사카 타이거스와의 우승 결정전에서 2승 1패로 승리하며 공식전 첫 우승을 차지했다.

1937년 9월 11일 고라쿠엔 구장이 개장되어 요미우리의 홈구장이 되었다. 1939년에는 두 차례 마닐라 원정을 실시했다. 이후 전쟁 직전까지 3회의 노히트 노런을 달성한 사와무라 에이지, 42승을 기록한 빅토르 스타루힌, 두 차례의 노히트 노런을 달성한 나카오 히로시, 62이닝 연속 무실점과 시즌 평균자책점 0.73(일본 기록)을 기록한 후지모토 히데오, 일본 프로 야구 사상 최초의 두 자릿수 홈런 타자이자 3관왕을 기록한 나카지마 하루야스를 앞세워 11시즌 동안 8회 우승을 차지하며 제1차 황금 시대를 맞았다.

그러나 태평양 전쟁의 영향으로 주전 선수들이 징집되어 이탈했고, 1940년 9월 13일에는 유니폼 마크가 ‘G’에서 ‘巨’(거)로 바뀌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1944년 11월 10일에는 야구 경기가 불가능해지면서 구단은 해산되었다.

2.2.3. 태평양 전쟁의 영향

프로 야구도 태평양 전쟁의 영향을 피하기 어려웠으며, 징집으로 주전 선수들이 잇따라 이탈했다. 1940년 9월 13일에는 유니폼 마크가 ‘G’에서 ‘巨’(거)로 바뀌는 등 요미우리에도 그 영향이 미쳤다. 1944년 11월 10일에는 야구 경기가 사실상 불가능해져 회사는 존속하되 영업이 중지되었고, 구단은 해산되었다. 11월 13일, 국가의 명령에 따라 일본 야구 연맹이 이름을 바꾼 일본야구보국회가 프로 야구 일시 중지 성명을 발표하면서 전쟁 전 프로 야구는 막을 내렸다.

징병으로 3년 만에 복귀한 사와무라 에이지1943년 10월 24일 한신 타이거스전에서 대타로 출전한 것을 마지막으로, 이듬해 1944년 시즌 전에 해고되었고, 같은 해 세 번째 징병을 받아 12월 2일 전사했다.

2.3. 전후 재건과 미즈하라 감독 시대 (1946년 ~ 1960년)

1978년, 히로오카 다쓰로 감독이 이끄는 야쿠르트 스왈로스와 치열한 우승 경쟁을 벌였다. 8월 말까지 2위 야쿠르트와 4~5경기 차를 유지하며 우승이 유력해 보였으나, 9월 들어 갑작스러운 성적 부진으로 야쿠르트에게 리그 우승을 내주었다. 이로 인해 야구계에서는 나가시마 시게오 감독의 지도력에 대한 의문이 커졌다.

1978년 오프 시즌에는 호세이 대학 소속 선수 에가와 스구루의 거취를 둘러싼 이른바 에가와 사건(속칭 ‘공백의 하루’)이 발생했다. 이듬해 1979년 3월, 에가와는 일단 한신 타이거스에 입단한 후 고바야시 시게루와의 맞트레이드 형식으로 요미우리에 입단하게 되었지만, 이 사건은 언론의 집중 포화를 받았다.

1979년 5월까지 리그 선두를 달리며 좋은 출발을 보였지만, 6월 이후 부진에 빠지며 B클래스(5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한편, 나카하타 기요시가 주전 3루수로 자리잡는 등 신인 선수들의 활약이 돋보였다. 같은 해 오프 시즌, 아오타 노보루가 수석 코치로 취임하여 이토에서 추계 캠프를 열고 마쓰모토 다다시, 나카하타, 니시모토 다카시 등의 선수들을 맹훈련시켰는데, 이는 후에 ‘이토 캠프’로 불리게 되었다.

1980년에는 개막 초반부터 우승 경쟁에서 멀어지면서 나가시마 감독에 대한 비판 여론이 거세졌다. 시즌 후반 새로운 선수들을 대거 기용하며 승률 5할을 넘겨 3위를 기록, A클래스를 확보했지만, 양대 리그 분열 이후 최초로 3년 연속 리그 우승에 실패하는 불명예를 안게 되었다. 결국 10월 21일, 나가시마는 팀 성적 부진에 대한 책임을 지고 ‘남자의 책임’(男のケジメ일본어)이라는 말을 남기며 사임했다. 당일 스포츠 닛폰이 ‘나가시마 해임’이라고 보도한 것처럼, 이는 요미우리 신문 간부에 의한 사실상의 해임이었다. 이러한 움직임에 요미우리 팬들은 격분했고, 스포츠 호치(호치 신문)를 포함한 요미우리 신문의 구독을 중단하는 팬들이 늘어나는 등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2.3.1. 전후 리그 재개

1978년, 히로오카 다쓰로 감독이 이끄는 야쿠르트 스왈로스와 치열한 우승 경쟁을 벌였다. 8월 말에는 2위 야쿠르트와 4~5경기 차로 앞서며 우승이 유력해 보였으나, 9월 들어 갑작스러운 부진으로 결국 야쿠르트에게 리그 우승을 내주었다. 이로 인해 나가시마 시게오 감독의 지도력에 대한 의문이 야구계 내부에서 커졌다.

1978년 오프 시즌에는 호세이 대학 소속 선수 에가와 스구루의 거취를 둘러싼 이른바 에가와 사건(속칭 ‘공백의 하루’)이 발생했다. 결국 1979년 3월, 에가와는 한신 타이거스에 입단한 후 고바야시 시게루와의 맞트레이드를 통해 요미우리에 입단하는 형식으로 결론이 났지만, 이 사건은 언론의 집중 공세를 받았다.

1979년 5월까지 리그 선두를 달리며 좋은 출발을 보였지만, 6월 이후 부진에 빠지며 B클래스(5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한편, 나카하타 기요시가 주전 3루수로 자리잡는 등 신인 선수들의 활약이 돋보였다. 같은 해 오프 시즌, 아오타 노보루가 수석 코치로 취임하여 이토에서 추계 캠프를 진행, 마쓰모토 다다시, 나카하타, 니시모토 다카시 등의 선수들을 맹훈련시켰다. 이는 후에 ‘이토 캠프’로 불리게 되었다.

1980년에는 개막 초반부터 우승 경쟁에서 멀어지면서 나가시마 감독에 대한 비판 여론이 거세졌다. 시즌 후반 새로운 선수들을 대거 기용하며 승률 5할을 넘겨 3위를 기록, A클래스를 확보했지만, 양대 리그 분열 이후 처음으로 3년 연속 리그 우승에 실패하는 불명예를 안았다. 결국 10월 21일, 나가시마 감독은 팀 성적 부진에 대한 책임을 지고 ‘남자의 책임’(男のケジメ일본어)이라는 말을 남기며 사임했다. 당일 스포츠 닛폰이 ‘나가시마 해임’이라고 보도한 것처럼, 이는 요미우리 신문 간부에 의한 사실상의 해임이었다. 이러한 움직임에 요미우리 팬들은 격분했고, 호치 신문을 포함한 요미우리 신문의 구독을 중단하는 팬들이 늘어나는 등 소동이 일기도 했다.

2.3.2. 전력 보강과 리그 우승

1978년에는 히로오카 다쓰로 감독이 이끄는 야쿠르트 스왈로스와 치열한 우승 경쟁을 펼쳤다. 8월 말에는 2위 야쿠르트와 4~5경기 차로 앞서며 우승이 유력해 보였으나, 9월에 들어서면서 성적이 급격히 하락하여 결국 야쿠르트에게 리그 우승을 내주었다. 이로 인해 야구계 내부에서는 나가시마 감독의 지도력에 대한 의문이 커졌다.

1978년 오프 시즌에는 호세이 대학 소속 선수인 에가와 스구루의 거취를 둘러싼 이른바 에가와 사건(속칭 ‘공백의 하루’)이 발생했다. 이듬해 1979년 3월, 에가와는 일단 한신 타이거스에 입단한 후 고바야시 시게루와의 맞트레이드를 하는 형식으로 요미우리에 입단하게 되었지만, 이 사건은 언론의 집중 공세를 받았다.

1979년 5월까지 리그 선두를 달리며 좋은 출발을 보였지만, 6월 이후 부진에 빠지면서 결국 B클래스인 5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한편, 나카하타 기요시가 주전 3루수가 되는 등 신인 선수들의 활약이 돋보였다. 같은 해 오프 시즌, 아오타 노보루가 수석 코치로 취임하여 이토에서의 추계 캠프에서 마쓰모토 다다시, 나카하타, 니시모토 다카시 등의 선수들을 맹훈련시켰는데, 이는 후에 ‘이토 캠프’로 불리게 되었다.

1980년에는 개막 초반부터 우승 경쟁에서 멀어지면서 나가시마 감독에 대한 비판 여론이 높아졌다. 시즌 후반 새로운 선수들을 대거 기용하며 승률 5할을 넘겨 3위를 기록, A클래스를 확보했지만, 양대 리그 분열 이후 최초로 3년 연속 리그 우승에 실패하는 불명예를 안게 되었다. 결국 10월 21일, 나가시마는 팀 성적 부진에 대한 책임을 지고 ‘남자의 책임’(男のケジメ일본어)이라는 말을 남기며 사임했다. 그 당일에 스포츠 닛폰이 ‘나가시마 해임’이라고 보도한 것처럼, 이는 요미우리 신문 간부에 의한 사실상의 해임이었다.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요미우리 팬들은 격노했고, 호치 신문(스포츠 호치)을 포함한 요미우리 신문의 구독을 중단하는 팬들이 늘어나는 등 소동이 일어났다.

예전 홈구장인 고라쿠엔 구장의 위성 사진(1987년 해체)
예전 홈구장인 고라쿠엔 구장의 위성 사진(1987년 해체)

홈구장인 도쿄 돔의 전경
홈구장인 도쿄 돔의 전경

도쿄 돔 주변 야경
도쿄 돔 주변 야경

1981년, 후지타 모토시가 감독으로 취임하면서 후지타 감독, 오 사다하루 조감독, 마키노 시게루 수석 코치에 의한 ‘트로이카 체제’가 구축되었다. 에가와 스구루, 니시모토 다카시, 사다오카 쇼지, 가토 하지메 등 선발 4인방을 중심으로 투수 왕국을 형성하여(에가와 20승, 니시모토 18승, 사다오카 11승, 가토 12승) 4년 만에 리그 우승을 달성했고, 8년 만에 일본 시리즈 제패에도 성공했다. 에가와는 역대 5번째인 투수 부문 5관왕(평균자책점, 최다승, 최고 승률, 최다 탈삼진, 최다 완봉)을 차지했고, 니시모토는 사와무라상, 스미 미쓰오는 구원왕을 차지하는 등 투수 부문 타이틀을 독점하며 후지타 감독의 투수 중심 수비 야구가 성과를 거두었다. 타자 부문에서도 신인 선수인 하라 다쓰노리가 최우수 신인왕을 차지하고, 시노즈카 도시오가 3할 5푼 7리의 시즌 최고 타율을 기록하는 등 젊은 선수들의 활약이 돋보였다. 한편, 김재박 영입설이 있었지만 군 문제로 무산되었다. 이듬해인 1982년에는 0.5경기 차로 리그 2위에 머물렀다.

1983년에는 마쓰모토 다다시가 도루왕(당시 도루 기록 76개는 센트럴 리그 기록), 하라 다쓰노리가 시즌 103타점으로 타점왕을 차지하는 등 타선의 활약에 힘입어 리그 우승을 차지했지만, 일본 시리즈에서 세이부 라이온스에게 3승 4패로 패했다. 당시 일본 시리즈는 끝내기 승리가 세 번이나 나오면서 일본 시리즈 굴지의 명승부로 꼽힌다. 참고로 TV 프로 야구 중계에서 현재까지 가장 시청률이 높았던 것은 제1차 후지타 감독 시절(평균 시청률 25.5%)이었다.

2.3.3. 양대 리그 분열

1978년 히로오카 다쓰로 감독이 이끄는 야쿠르트 스왈로스와 치열한 우승 경쟁을 펼쳤다. 8월 말 2위였던 야쿠르트와 4~5경기 차를 벌이며 우승이 거의 확실시되었으나, 9월 들어 성적이 급락하여 야쿠르트에게 리그 우승을 내주었다. 이 부진으로 야구계 내부에서는 나가시마 감독의 지도력에 대한 의문이 커졌다.

1978년 오프 시즌, 호세이 대학 소속 선수 에가와 스구루의 거취를 둘러싼 이른바 에가와 사건(속칭 ‘공백의 하루’)이 일어났다. 이듬해 1979년 3월, 에가와는 일단 한신 타이거스에 입단한 후 고바야시 시게루와의 맞트레이드로 요미우리에 입단하는 형식으로 결론이 났지만, 이 사건은 언론의 집중 공세를 받았다.

1979년 5월까지 리그 선두였으나, 6월 이후 부진으로 B클래스인 5위에 머물렀다. 나카하타 기요시가 주전 3루수가 되는 등 신인 선수들의 두각이 나타났다. 같은 해 오프 시즌 아오타 노보루 수석 코치는 이토 추계 캠프에서 마쓰모토 다다시, 나카하타, 니시모토 다카시 등을 맹훈련시켰고, 이는 ‘이토 캠프’로 불렸다.

1980년 개막 초반부터 우승 레이스에서 멀어지며 나가시마 감독에 대한 비판이 최고조에 달했다. 시즌 후반 새 선수들을 대거 기용, 승률 5할을 넘겨 3위를 기록하며 A클래스는 확보했지만, 양대 리그 분열 이후 최초로 3년 연속 리그 우승에 실패했다. 10월 21일, 나가시마는 성적 부진에 책임을 지고 ‘남자의 책임’(男のケジメ일본어)이라는 말을 남기며 사임했다. 당일 스포츠 닛폰의 ‘나가시마 해임’ 보도는 요미우리 신문 간부에 의한 사실상의 해임이었다. 요미우리 팬들은 격노하며 요미우리 신문·호치 신문(스포츠 호치) 구독을 중단하는 등 소동이 일어났다.

이후 1984년부터 1988년까지 5년간 오 사다하루가 감독을 맡았다. 1987년 리그 우승 후 일본 시리즈에서 세이부와 맞붙었으나, 1983년 일본 시리즈의 복수에는 실패하고 2승 4패로 우승 달성에 실패했다. 1988년 홈구장을 고라쿠엔 구장에서 도쿄 돔으로 이전했으나, 요시무라 사다아키, 워렌 크로마티의 부상 이탈로 선두 주니치에 12경기 차로 리그 2위에 그치며 오 사다하루 감독은 사임했다.

1978년 시즌 요미우리는 최다 볼넷 허용 529개를 기록했다.

2.3.4. 미즈하라 감독 시대와 제2차 황금시대

1978년에는 히로오카 다쓰로 감독이 이끄는 야쿠르트 스왈로스와 치열한 우승 경쟁을 펼쳤다. 8월 말까지 2위 야쿠르트와 4~5경기 차를 유지하며 우승이 유력해 보였으나, 9월 들어 갑작스러운 성적 부진으로 야쿠르트에게 리그 우승을 내주고 말았다. 이로 인해 야구계에서는 나가시마 시게오 감독의 지도력에 대한 의문이 커졌다.

1978년 오프 시즌에는 호세이 대학 소속 선수 에가와 스구루의 거취를 둘러싼 이른바 에가와 사건(속칭 ‘공백의 하루’)이 발생했다. 이듬해 1979년 3월, 에가와는 일단 한신 타이거스에 입단한 후 고바야시 시게루와의 맞트레이드 형식으로 요미우리에 입단하게 되었지만, 이 사건은 언론의 집중 포화를 받았다.

1979년 5월까지 리그 선두를 달리며 좋은 출발을 보였지만, 6월 이후 부진에 빠지며 B클래스(5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한편, 나카하타 기요시가 주전 3루수로 자리잡는 등 신인 선수들의 활약이 돋보였다. 같은 해 오프 시즌, 아오타 노보루가 수석 코치로 취임하여 이토에서 추계 캠프를 열고 마쓰모토 다다시, 나카하타, 니시모토 다카시 등의 선수들을 맹훈련시켰는데, 이는 후에 ‘이토 캠프’로 불리게 되었다.

1980년에는 개막 초반부터 우승 경쟁에서 멀어지면서 나가시마 감독에 대한 비판 여론이 거세졌다. 시즌 후반 새로운 선수들을 대거 기용하며 승률 5할을 넘겨 3위를 기록, A클래스를 확보했지만, 양대 리그 분열 이후 최초로 3년 연속 리그 우승에 실패하는 불명예를 안게 되었다. 결국 10월 21일, 나가시마는 팀 성적 부진에 대한 책임을 지고 ‘남자의 책임’(男のケジメ일본어)이라는 말을 남기며 사임했다. 당일 스포츠 닛폰이 ‘나가시마 해임’이라고 보도한 것처럼, 이는 요미우리 신문 간부에 의한 사실상의 해임이었다. 이러한 움직임에 요미우리 팬들은 격분했고, 스포츠 호치(호치 신문)를 포함한 요미우리 신문의 구독을 중단하는 팬들이 늘어나는 등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2.4. 가와카미 감독 시대와 V9 (1961년 ~ 1974년)

1961년부터 1974년까지 가와카미 데쓰하루 감독이 이끈 요미우리 자이언츠는 일본 프로 야구 역사에 길이 남을 V9(9년 연속 일본 시리즈 우승)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했다. 이 시기 동안 오 사다하루(왕정치)와 나가시마 시게오는 팀의 중심 타자로 활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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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미우리 자이언츠 주요 선수 홈런 기록
순위선수홈런 수활동 기간
1오 사다하루8681959–1980
2나가시마 시게오4441958–1974
10가와카미 데쓰하루1811938–1958


1949년 시즌 후, 일본 프로야구는 센트럴 리그, 퍼시픽 리그로 분열되어 2리그제가 되었고, 자이언츠는 센트럴 리그에 소속되었다.

2.4.1. 가와카미 감독 취임

제1차 거인 황금 시대 타선의 주축 3인. 왼쪽부터 가와카미 데쓰하루, 지바 시게루, 아오타 노보루
제1차 거인 황금 시대 타선의 주축 3인. 왼쪽부터 가와카미 데쓰하루, 지바 시게루, 아오타 노보루

1946년 리그 재개 이후 요미우리 자이언츠는 그레이트 링과 1경기 차이로 2위에 그쳤다. 1947년에는 요미우리 신문사가 경영을 맡게 되었고, 같은 해 4월 3일 구단명을 도쿄 요미우리 자이언츠(東京読売巨人軍)로, 닉네임을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정했다. 난카이 호크스의 부상과 전후 혼란으로 전력 확보에 어려움을 겪어 1947년에는 구단 사상 처음으로 승률 5할을 밑도는 등 재개 이후 3시즌 연속 우승을 놓쳤다.

하지만 감독 미하라 오사무와 "빨간 배트"의 가와카미 데쓰하루, 지바 시게루, 아오타 노보루를 비롯한 제1차 황금 시대 선수들이 전선에서 귀국하여 팀에 복귀했다. 1948년 시즌 오프에는 난카이의 베쓰쇼 아키라(거인 시절 등록명은 베쓰쇼 다케히코)를 영입하는 등 점차 전력이 충실해졌다. 1리그제의 마지막 해인 1949년에는 전후 첫 우승을 차지했다. 1947년 6월 23일 구로사와 도시오가 사망하였고, 구로사와의 등번호 4와 전사한 사와무라 에이지의 등번호 14는 일본 프로야구계 최초의 영구 결번이 되었다.

2.4.2. V9 달성

V9일본어 달성은 1965년부터 1973년까지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9년 연속 일본 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것을 말한다. 이 시기는 일본 프로 야구 역사상 전례 없는 황금기로 꼽힌다.

V9 기간 동안 자이언츠는 압도적인 전력을 자랑했다. 특히, 'ON포'라 불리는 오 사다하루(왕정치)와 나가시마 시게오의 활약은 대단했다. 두 선수는 홈런과 타점 등 공격 전 부문에서 리그 최상위권을 휩쓸며 팀을 이끌었다.

V9의 성공 요인은 강력한 타선뿐만 아니라 호리우치 츠네오, 다카하시 가즈미 등 투수진의 안정감도 한몫했다. 또한, 가와카미 데쓰하루 감독의 뛰어난 리더십과 용병술도 V9 달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V9 시대는 일본 프로 야구 역사상 가장 빛나는 순간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 자이언츠는 이 기간 동안 일본 야구의 상징적인 존재로 자리매김했으며, 수많은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2.5. 제1차 나가시마 감독 시대 (1975년 ~ 1980년)

제공된 원본 소스에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제1차 나가시마 감독 시대(1975년 ~ 1980년)에 대한 내용이 없으므로, 해당 섹션은 작성할 수 없습니다.

2.5.1. 최하위와 재건

하라 감독과 함께 가토리 요시타카 수석 코치는 투수진을 전반적으로 개편하면서, 하라 감독은 부임 첫 해에 전 구단을 상대로 좋은 성적을 거두며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일본 시리즈에서는 세이부를 만나 구단 역사상 최초로 4연승을 거두며 통산 20번째 일본 시리즈 우승을 달성했다. 그러나 오프 시즌에 팀의 주축 타자였던 마쓰이 히데키가 FA를 선언하고 뉴욕 양키스로 이적했으며, 이에 앞서 11월 17일 뉴욕 양키스와 우호협정을 맺었다.

2.5.2. 에가와 사건과 감독 사임

이듬해 마쓰이 히데키가 빠진 공백을 메우기 위해 야쿠르트에서 로베르토 페타지니를 영입했지만, 하라 감독은 선수들의 수비 위치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다. 게다가 가토리 수석 코치에게 일임한 투수진 정비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시즌 막판 9연패를 당하는 등 리그 우승팀 한신에게 15.5경기 차로 밀리며 리그 3위에 그쳤다. 9월 25일, 하라는 이 결과에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 당시 전국적으로 인기 있던 하라 감독과 와타나베 쓰네오 구단주 간의 갈등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이에 실망한 요미우리 팬들이 이탈했다. 이 혼란으로 가와이 마사히로는 코치 취임 요청을 거절하고 주니치로 이적했다.

2.6. 후지타, 오 사다하루 감독 시대 (1981년 ~ 1992년)

요미우리 자이언츠는 1981년부터 1992년까지 후지타 모토시와 오 사다하루 감독 체제를 거쳤다. 이 시기는 요미우리의 전력 강화와 변화가 두드러진 시기였다. 그러나 주어진 원본 소스에는 1981년 ~ 1992년에 해당하는 내용이 없으므로, 이 부분은 작성할 수 없다.

2.6.1. 제1차 후지타 감독 시대

호리우치 쓰네오가 감독으로 전격 취임했다. 프랜차이즈 스타로 떠오른 다카하시 요시노부를 중심으로, 전년도 긴테쓰와의 계약을 마친 터피 로즈, 다이에에서 무릎 인대 부상 이후 출전하지 못하던 고쿠보 히로키를 영입했다. 기요하라 가즈히로, 페타지니, 에토 아키라 등 다양한 구단에서 4번 타자로 활약하던 선수들이 한 팀의 타선을 구성하는 초중량 타선이 생겼다. 나가시마 시게오 종신 명예 감독은 이 타선을 ‘사상 최강의 타선’이라고 칭했는데, 1년 동안 259개의 팀 홈런을 기록하는 일본 프로 야구 역사상 신기록을 수립했다. 그러나 투수진의 부진으로 악재가 겹쳐 팀 성적은 2년 연속 3위에 그치고 말았다. 프로 야구 재편 문제에서는 구단 스카우트 과정에서 부정 행위가 발생하자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와타나베 쓰네오가 구단주 자리에서 물러났다.

2.6.2. 오 사다하루 감독 시대

포지션 간의 경쟁을 멈추게 하고 1년 동안 타선을 고정함에 따라 이를 ‘부동명왕 타선’이라고 이름을 붙였으나 다카하시 요시노부, 니오카 도모히로 등이 일제히 부상을 당했다. 그 해 처음 도입된 센트럴·퍼시픽 리그 교류전에서 종합 순위 4위(센트럴 리그에서는 2위)를 기록하며 선전했으나 투수진이 붕괴되고 팀이 사실상 공중 분해되는 상황을 겪으면서 8년 만에 B클래스인 5위로 시즌을 마쳤다. 또 하라 다쓰노리 감독의 사임 소동 이후 요미우리의 인기가 단번에 떨어지면서 관중 동원 수가 감소하고 TV 시청률도 급격히 감소했다. 이렇게 팀이 큰 침체에 빠지면서 성적 부진과 부상에 시달린 터피 로즈와 기요하라 가즈히로가 8월 무렵 팀 편성에서 사실상 이탈해 팀 구성이 어긋나면서 첫 외부 구단 출신으로 호시노 센이치 시니어 디렉터의 이름이 올랐다. 호시노 초빙 보도가 표면화되면서 구단 출신자만이 감독이 되던 전통을 무너뜨리는 것에 대한 일부 OB나 팬들이 반발하면서 9월 10일 호시노는 기자회견을 열어 한신에 잔류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10월 5일 호리우치 쓰네오 감독이 팀 성적 부진에 대한 책임지고 임기를 1년 남긴 채 사퇴하며 후임 감독으로는 하라 다쓰노리가 2년 만에 복귀하는 것으로 결정됐다.

2.6.3. 제2차 후지타 감독 시대

하라 다쓰노리 감독은 처음 요미우리 감독을 맡았던 시절에는 요미우리에서 현역으로 활약했던 선수 출신들을 중심으로 코치진을 구성했지만, 두 번째 임기에서는 다른 구단에서 경험이 풍부한 인재를 영입하고자 했다. 수석 코치에 곤도 아키히토, 수비 주루 코치로 시노즈카 가즈노리가 복귀했고, 투수 코치로 오바나 다카오를 초빙했다. 또 1994년부터 2002년까지 타격 코치를 맡다가 2003년 히로시마로 떠났던 우치다 준조가 복귀했다. 또한 적극적인 선수 보강에 들어갔는데 오릭스에서 자유 계약으로 떠난 제레미 파웰, FA 선언을 한 도요다 기요시(세이부), 노구치 시게키(주니치)를 차례로 영입했다. 야수에서는 전년도 일본 시리즈에서 활약했던 지바 롯데 마린스의 이승엽을 영입한데 이어 현금 트레이드로 골든 글러브상 4회 수상에 빛나는 고사카 마코토까지 영입했다. 동시에 기존 전력에 대한 정리 작업도 진행되었는데 지난 시즌부터 팀 전력 구상에서 사실상 빠진 기요하라와 로즈를 자유 계약으로 방출했고 도요다에 대한 FA 보상선수로 지명하였다.

2.7. 제2차 나가시마 감독 시대 (1993년 ~ 20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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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1. 나가시마 감독 복귀와 마쓰이 히데키 영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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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2. 기요하라 가즈히로 영입과 ON 감독 대결

오치아이 히로미쓰가 FA로 입단하고, 세이부 라이온스에서 키요하라 가즈히로가 이적해 오면서, 나가시마 시게오 감독 시절 이래 'ON포'라고 불리는 클린업 트리오가 결성되었다.

2.8. 하라, 호리우치 감독 시대 (2002년 ~ 2005년)

2009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일본 대표팀 감독으로 취임한 하라 다쓰노리 감독을 대신해 시즌 개막 전에는 이하라 하루키 수석 코치가 감독 대행을 맡았다.

2.8.1. 제1차 하라 감독 시대

2009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일본 대표팀 감독으로 취임한 하라 다쓰노리 감독을 대신해 시즌 개막 전에는 이하라 하루키 수석 코치가 감독 대행을 맡았다. 사카모토 하야토를 1번 타순에 고정하고 마쓰모토 데쓰야를 2번 타순으로 고정하여 테이블 세터를 짜는 등 선수 기용이 맞아떨어지며 개막 8경기만에 리그 선두로 올라선 후 시즌 내내 선두 자리를 유지했고, 2009년 9월 23일 주니치 드래건스와의 경기에서 5-3으로 승리하며 V9 시대 이후 최초의 3년 연속 리그 우승으로 통산 33번째 센트럴 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는 제2 스테이지에서 주니치와 대전, 어드밴티지 1승을 포함한 3승 1패를 거두며 2년 연속 일본 시리즈 진출에 성공했다. 1981년 고라쿠엔 구장에서의 일본 시리즈 이후 처음으로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와 맞대결한 일본 시리즈에서는 아베 신노스케의 맹활약에 더불어 11월 7일 총전적 4승 2패로 2002년 이후 7년 만에 21번째 일본 시리즈 우승을 달성했다. 1월 14일에는 한국시리즈 우승 팀 KIA 타이거즈와의 한일 클럽 챔피언십에서까지 승리를 거두며 시즌을 마무리했다.

시즌 개막 직후 지난 해를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하여 코치직을 맡고 있던 기무라 다쿠야가 경기 전 연습 도중 지주막하출혈이 발병하여 급사했다. 야수에선 가메이 요시유키, 투수진에선 디키 곤잘레스가 부진하면서 그레이싱어마저 부상으로 팀 전력에서 장기 이탈했지만, 신인 조노 히사요시가 가세한 막강한 타선의 위력은 변함없이 유지된데 이어 개막전 이후 선발 투수진들도 호조를 보이며 한동안 선두 자리를 지켰다. 그러나 7월에는 연달아 좋은 모습을 보여주던 선발진이 무너진데 이어 타선도 사카모토마쓰모토의 페이스가 동시에 떨어졌다. 그러나 이런 위기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선두 싸움을 이끌었으나 리그 우승에 성공한 주니치 드래건스와의 1경기차로 결국 3위에 그쳤다.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는 제1 스테이지에서 한신에 2연승을 거뒀지만 계속되는 제2 스테이지에서는 주니치와 상대하여 1승 4패의 성적으로 일본 시리즈 진출에는 실패했다.

2.8.2. 호리우치 감독 시대

2009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일본 대표팀 감독으로 취임한 하라 다쓰노리 감독을 대신해 시즌 개막 전에는 이하라 하루키 수석 코치가 감독 대행을 맡았다. 사카모토를 1번 타순에, 마쓰모토 데쓰야를 2번 타순에 고정하는 등 선수 기용이 맞아떨어지며 개막 8경기 만에 리그 선두로 올라선 후 시즌 내내 선두 자리를 지켰다. 2009년 9월 23일 주니치 드래건스와의 경기에서 승리하며 V9 시대 이후 최초로 3년 연속 리그 우승이자 통산 33번째 센트럴 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는 주니치를 꺾고 2년 연속 일본 시리즈에 진출했다. 1981년 이후 처음으로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와 맞붙은 일본 시리즈에서는 아베 신노스케의 활약으로 4승 2패를 기록, 2002년 이후 7년 만에 21번째 일본 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1월 14일에는 한국시리즈 우승 팀 KIA 타이거즈와의 한일 클럽 챔피언십에서도 승리했다.

동일본 대지진으로 개막이 연기되어 팀 역사상 최초로 지방 구장인 우베 시 야구장에서 개막전을 치렀다. 전국적인 절전 요청으로 홈구장인 도쿄 돔 사용에 영향을 받으면서 리그 일정이 크게 바뀌었고, 바뀐 공인구의 영향으로 오가사와라와 라미레스 등 타선의 장타력이 급감했다. 하지만 신인 사와무라 히로카즈가 선발 투수진을 이끌었다. 그러나 마무리 투수 부재, 주전 포수 아베의 부상, 외국인 선수 부진으로 전반기에는 부진했다. 후반기 들어 구보 유야가 마무리로 자리잡으며 8월에 7연승을 기록하는 등 페이스를 회복했다. 리그 막판 한신과 3위 경쟁을 벌여 10월 한신과 주니치 상대 6연전에서 5승 1패를 거두며 클라이맥스 시리즈 진출에 성공, 주니치의 리그 우승 확정을 저지했다. 결국 선두 주니치와 3.5게임차 3위로 정규 시즌을 마쳤다.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는 야쿠르트에 1승 2패로 탈락했다. 조노 히사요시가 타격왕, 후지무라 다이스케가 도루왕을 획득했다.

11월 11일, 수석 코치 인사권에 대해 구단 대표 기요타케 히데토시가 와타나베 쓰네오 구단 회장의 부당 개입을 고발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기요타케는 이 일로 18일에 해임되었다(자세한 내용은 기요타케의 난 참조). 시즌 후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로부터 무라타 슈이치를, 소프트뱅크로부터 스기우치 도시야를 영입했다. 반면 라미레스, 그레이싱어, 오무라 사부로는 팀을 떠났다(라미레스는 요코하마 DeNA, 오무라와 그레이싱어는 지바 롯데로 이적).

2.9. 제2차 하라 감독 시대 (2006년 ~ 2015년)

2012년 시즌 초반, 요미우리 자이언츠는 주력 선수들의 부진으로 침체를 겪었다. 특히 4월 4일 마쓰다 스타디움에서 열린 히로시마전에서 패하며 최하위로 떨어졌다. 개막 후 8경기 동안 홈런 없이 5번의 완봉패를 당했고, 46이닝 무득점이라는 불명예스러운 기록을 남기는 등 4월 한 달 동안 두 번의 5연패를 겪었다.

11월 8일부터 11월 11일까지 대한민국 부산 사직야구장에서 개최된 아시아 시리즈에 일본 대표로 출전, 결승전에서 대만 대표 라미고 몽키스를 꺾고 아시아 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2.9.1. 하라 감독 복귀와 선수 보강

2013년 시즌 후 주니치 드래건스에서 자유 계약으로 풀린 이바타 히로카즈를 영입했다.

2.9.2. 3년 연속 리그 우승과 일본 시리즈 우승

5월에는 10연승(중간에는 3번의 무승부)을 기록했고 5월 14일에는 5할 대의 승률을 기록했다. 교류전에 들어가면서 호조는 계속되었고 6월 6일에는 리그 단독 선두로 올라서면서 6월 16일의 K스타 미야기에서 라쿠텐전에서 승리하는 등 센트럴 리그 구단으로서는 최초로 교류전 우승을 달성했다. 그 후 주니치와의 선두 경쟁을 펼쳐 7월 1일에는 단독 선두 자리에 올라섰고 주니치와의 4경기 반 차이로 전반기를 마감했다.

8월에는 6연승과 7연승을 연거푸 기록했고, 8월 23일에는 매직 넘버 30을 기록, 9월 8일의 야쿠르트전에서 승리하는 등 클라이맥스 시리즈 진출을 결정지었다. 9월 21일에는 야쿠르트전(도쿄 돔)에서 승리해 3년 만에 통산 34번째의 리그 우승을 달성하였는데 최종적으로 86승 15무 43패를 기록하여 2위 주니치와의 10경기 반 차이를 냈다. 타자 부문에서는 아베 신노스케가 수위타자, 타점왕 등 2관왕을 차지했고 조노 히사요시사카모토 하야토가 최다 안타를 획득했다. 투수 부문에서는 우쓰미 데쓰야가 최다승, 스기우치 도시야는 최다 탈삼진과 최고 승률로 투수 부문 2관왕을 석권했다. 클라이맥스 시리즈 파이널 스테이지에서는 2위 주니치와 상대하여 내리 3연패를 당하는 등 일본 시리즈 진출이 좌절될 위기에 몰려있었지만 이후 요미우리가 3연승을 기록하여 일본 시리즈 진출에 성공했다. 일본 시리즈에서는 2009년과 마찬가지로 닛폰햄과 상대하면서 4승 2패의 성적을 기록하며 3년 만에 통산 22번째의 일본 시리즈 우승을 달성했다.

2.10. 다카하시 감독 시대 (2016년 ~ 2018년)

10월 26일, 다카하시 요시노부 감독 취임 회견이 열렸다. 계약 기간은 3년이고, 등번호는 현역 선수 때와 같은 24번을 사용하기로 했다. 같은 날 전임 감독인 하라 다쓰노리가 2016년 1월 1일부로 구단 특별 고문으로 취임하는 것 역시 결정됐다. 11월 23일 팬 행사에서 다카하시 요시노부 감독의 현역 선수 은퇴식 및 감독 취임식 행사가 열렸다. 팀은 공식 시즌 종료 후에 리그 우승 탈환 및 일본 시리즈 우승을 위한 적극적인 선수 보강에 나섰는데,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로 이적했던 와키야 료타를 다시 영입했고, 상실된 팀의 장타력을 회복하기 위하여 뉴욕 양키스의 4번 타자 역할을 맡기도 했던 개럿 존스와 지바 롯데 마린스의 루이스 크루스를 보강했다.

2.11. 아베 감독 시대 (2024년 ~ )

2024년 시즌은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와의 개막 3연전에서 모두 승리하며 시작되었다. 요미우리가 새로운 감독 지휘 아래 개막 3연전에서 3연승을 거둔 것은 1981년 후지타 모토시 감독 이후 35년 만의 일이었다.

3. 역대 감독

* 三宅大輔일본어(1934년 ~ 1935년)
* 浅沼誉夫일본어(1935년 ~ 1936년)
* 藤本定義일본어(1936년 ~ 1942년)
* 中島治康일본어 〈제1차〉(1943년)
* 藤本英雄일본어(1944년 ~ 1946년)
* 中島治康일본어 〈제2차〉(1946년 ~ 1947년)
* 三原脩일본어(1947년 ~ 1949년)
* 水原茂일본어(1950년 ~ 1960년)
* 川上哲治일본어(1961년 ~ 1974년)
* 長嶋茂雄일본어 〈제1차〉(1975년 ~ 1980년)
* 藤田元司일본어 〈제1차〉(1981년 ~ 1983년)
* 王貞治일본어(1984년 ~ 1988년)
* 藤田元司일본어 〈제2차〉(1989년 ~ 1992년)
* 長嶋茂雄일본어 〈제2차〉(1993년 ~ 2001년)
* 原辰徳일본어 〈제1차〉(2002년 ~ 2003년)
* 堀内恒夫일본어(2004년 ~ 2005년)
* 原辰徳일본어 〈제2차〉(2006년 ~ 2015년)
* 高橋由伸일본어(2016년 ~ 2018년)
* 原辰徳일본어 〈제3차〉(2019년 ~ 2023년)
* 阿部慎之助일본어(2024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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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국적재임 시작재임 종료총 경기승률
후지모토 사다요시1936년1942년60442216814.715
나카지마 하루야스1943년1943년8454273.667
후지모토 히데오1944년1944년3519142.576
후지모토 히데오 (2)1946년1946년251591.625
나카지마 하루야스 (2)1946년1947년17196741.564
미하라 오사무1947년1949년3021771187.600
미즈하라 시게루1950년1960년140788149729.639
가와카미 데쓰하루1961년1974년1868106674161.590
나가시마 시게오1975년1980년78038738655.533
후지타 모토시1981년1983년39021114831.588
오 사다하루1984년1988년65034726439.568
후지타 모토시 (2)1989년1992년5203052132.587
나가시마 시게오 (2)1993년2001년12026475514.538
하라 다쓰노리2002년2003년2801471385.535
호리우치 쓰네오2004년2005년2841331447.480
하라 다쓰노리 (2)2006년2015년144179559551.572
다카하시 요시노부2016년2018년42921020811.502
하라 다쓰노리 (3)2019년2023년65734431335.524
아베 신노스케2024년현재14377597.5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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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번호이름취임퇴임
1미야케 다이스케1934년1935년
230아사누마 요시오1935년1936년
322, 30후지모토 사다노부1936년1942년
430나카지마 하루야스1943년1943년
530후지모토 히데오1944년1946년
630나카지마 하루야스 (2차)1946년1947년
731미하라 오사무1947년1949년
830미즈하라 시게루1950년1960년
916, 77가와카미 데쓰하루1961년1974년
1090나가시마 시게오1975년1980년
1173후지타 모토지1981년1983년
121오 사다하루1984년1988년
1373후지타 모토지 (2차)1989년1992년
1433나가시마 시게오 (2차)1993년(1999년)
3(2000년)2001년
1583하라 다쓰노리2002년2003년
1688호리우치 쓰네오2004년2005년
1788하라 다쓰노리 (2차)2006년2015년
1824다카하시 요시노부2016년2018년
1983하라 다쓰노리 (3차)2019년2023년
2083아베 신노스케2024년

4. 영구 결번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영구 결번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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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이름포지션지정 연도비고
1오 사다하루내야수1989년개인 통산 홈런 세계 신기록(868개)
3나가시마 시게오내야수1974년2000년 ~ 2001년 (감독으로 사용)
4구로사와 도시오외야수1947년장티푸스로 사망, 사와무라 에이지와 함께 일본 프로야구 최초의 영구 결번
14사와무라 에이지투수1947년태평양 전쟁 전사, 구로사와 도시오와 함께 일본 프로야구 최초의 영구 결번
16가와카미 데쓰하루내야수1965년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
34가네다 마사이치투수1970년일본 프로야구 최초 통산 400승


* #1 오 사다하루(1989년 ~ ): 개인 통산 홈런 세계 신기록(868개)을 수립한 공로를 인정받아 영구 결번으로 제정되었다. 요미우리에서 선수, 조감독, 감독으로 30년 동안 계속 사용했다. 한 사람이 같은 등번호를 30년 동안 계속 사용한 예는 오 사다하루 밖에 없다.
* #3 나가시마 시게오(1974년 ~ ): 제2차 감독 시절이었던 2000년부터 2년 간 착용했다.
* #4 구로사와 도시오(1947년 ~ ): 현역 시절 장티푸스에 걸려 사망했다.
* #14 사와무라 에이지(1947년 ~ ): 태평양 전쟁에서 전사했다. 전후 이마이즈미 가쓰요시와 사카모토 시게루가 착용했지만 구로사와와 함께 영구 결번이 되었다.
* #16 가와카미 데쓰하루(1965년 ~ ): 은퇴 후에도 착용했지만, 1965년 1월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이 결정된 후 영구 결번이 되었다. 당시 감독이었던 가와카미는 이 해부터 등번호를 77번으로 변경했다.
* #34 가네다 마사이치(1970년 ~ ): 야구계 최초로 통산 400승을 기록한 공로를 인정받아 영구 결번으로 제정되었다.

5. 역대 한국인 선수

* 조성민
* 정민태
* 정민철
* 이승엽(李承燁)

6. 라이벌 관계

요미우리 자이언츠는 일본 프로 야구에서 여러 팀들과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주요 경기 기록은 다음과 같다.

* 최장 경기 시간: 5시간 42분 (2004년 8월 20일, 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 최단 경기 시간: 1시간 14분 (1951년 3월 31일, 대 오사카 타이거스)

6.1. 한신 타이거스

주어진 원본 소스에는 '한신 타이거스'에 대한 내용이 없으므로, 이전 답변과 마찬가지로 섹션 내용을 작성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변경 사항이 없습니다.

6.2.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

이 섹션은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관련된 기록 중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와의 경기에서 나온 기록들을 언급하고 있지만,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라는 별도의 섹션으로 다룰 내용은 아닙니다. 따라서, 이 섹션에는 내용을 추가하지 않습니다.

6.3. 주니치 드래건스

2003년 9월 16일 주니치 드래건스와의 경기 6회에 이닝 최다 실점(12실점)을 기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