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카시마 테루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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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카시마 테루시는 일본의 야구 선수로, 투수에서 야수로 전향하여 프로 선수 생활을 했다. 아마추어 시절 투수로 활약하며 신궁 대회 우승을 이끌었고,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에서 4번 타자로 활약하며 올림픽 출전에 기여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획득했으며, 1989년 닛폰햄 파이터스에 입단하여 프로 생활을 시작했다. 1992년 올스타전에 출전했으며, 1997년 은퇴 후 코치와 감독으로 활동하며, 2017년에는 한화 이글스 타격 코치를 역임했다. 2020년부터 교토 선단 과학 대학 야구부 감독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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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시마 테루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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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선수 이름 | 중지마 데루시 |
소속 구단 | 교토 첨단 과학 대학교 경식 야구부 |
직책 | 감독 |
등번호 | 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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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 일본 |
출생지 | 사가현 간자키군 미타가와정 (현: 요시노가리정) |
생년월일 | 1962년 7월 27일 |
신장 | 188cm |
체중 | 92kg |
던지는 팔 | 오른쪽 |
타석 | 오른쪽 |
수비 위치 | 외야수, 1루수, 3루수 |
프로 입단 연도 | 1988년 |
드래프트 순위 | 드래프트 1위 |
첫 출장 | 1989년 4월 8일 |
마지막 출장 | 1996년 10월 6일 |
연봉 | 알 수 없음 |
경력 | 야나가와 고등학교 프린스 호텔 경식 야구부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 (1989년 - 1995년) 오사카 긴테쓰 버펄로스 (1996년 - 1998년) |
감독/코치 경력 | 오사카 긴테쓰 버펄로스 (1999년)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 (2008년 - 2009년) 통일 세븐일레븐 라이온즈 (2011년 - 2013년) 도쿠시마 인디고삭스 (2014년 - 2016년) 한화 이글스 (2017년) 교토 첨단 과학 대학교 |
메달 정보 | |
은메달 | 1988년 |
종목 | 야구 |
2. 경력
나카시마 테루시는 3살 때부터 야구를 시작하여 야나가와 고교 시절 투수로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다.[1] 선발 대회에 출전했으나 2회전에서 탈락했다.[3] 프린스 호텔에서 야수로 전향,[5][6] 아시아 선수권 및 IBAF 인터컨티넨탈컵에서 활약하며 서울 올림픽 대표팀에 발탁되어 은메달을 획득했다.[8][9]
1988년 드래프트에서 닛폰햄의 1위 지명을 받아 프로에 입단,[15] 1989년 신인 개막전 끝내기 홈런을 기록했다.[9] 1992년 올스타전에 출전하고 규정 타석을 채웠으나,[22][23] 1995년 오사카 긴테쓰 버팔로즈로 이적, 1998년 은퇴했다.[26]
은퇴 후 긴테쓰 2군 타격 코치 및 스카우트, 닛폰햄 스카우트 및 코치, 퉁이 세븐일레븐 라이온스 코치 및 감독, 도쿠시마 인디고삭스 감독, 한화 이글스 코치 등을 역임했다.[4][28][37] 2020년부터 교토 선단 과학 대학 경식 야구부 감독을 맡고 있다.[40][41]
2. 1. 아마추어 시절
사가상의 투수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나카시마 테루시는 3살 때부터 야구공으로 놀았다.[1] 미타가와 중학교 시절에는 현 대회에서 준우승을 차지했다. 이후 야나가와 고교(재학 중 명칭 변경)에 입학했다.[1] 야구부 동기로는 다카기 모토히코(전 체커즈)가 있으며, 졸업 후에도 교류를 이어갔다.[2] 투수를 맡아 1학년 가을 신궁 대회에서 우승하며 전국적으로 이름을 알렸다.[1]매일 200개의 공을 던지는 훈련으로 제구력을 향상시킨 나카시마는 2학년 가을 현 대회 및 큐슈 대회에서 9경기에 등판하여 5실점, 5 완봉, 100 탈삼진, 노히트 노런 2회라는 뛰어난 투구를 선보이며 이듬해 봄 선발 대회 출전에 기여했다.[3] 본 대회 2회전에서 아마가사키키타에 패했지만, 큰 키에서 네시를 흉내내어 "테르시"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인기를 얻었다.[1] 1980년 드래프트 회의 전 8개 구단이 상위 지명을 검토했지만, 전년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데다 어머니가 안정적인 사회인 야구 진출을 원해 프린스 호텔에 입사했다.[4]
오른쪽 어깨 쇄골 아래 혈행 장애가 발생하여 4개월 요양 후 투수를 포기하고, 부터 야수로 전향했다.[5][6] 지명 타자 제도가 있는 사회인 야구에서는 타격 연습을 전혀 하지 않았지만, 매일 1,000번 배트를 휘두르며 봄 무렵부터 타격에 대한 감을 느끼게 되었다.[7]
아시아 선수권 겸 서울 올림픽 예선에서 일본 대표팀 4번 타자를 맡아 타율 .714, 4홈런, 14타점으로 대회 3관왕을 차지하며 일본의 올림픽 출전권 획득에 기여했다.[8] 같은 해 IBAF 인터컨티넨탈컵에서도 6홈런을 기록했다.[9] 이러한 활약으로 다음 해 서울 올림픽 대표에 선발되기 위해 감독 이시야마 켄이치로부터 프로 입단을 미뤄달라는 요청을 받았고, 이를 수락했다.[9] 이 요청에는 일본 야구 연맹 회장 야마모토 에이이치로와 프린스 호텔 오너 쓰쓰미 요시아키의 의향도 있었다고 한다.[4] 같은 해 1루수 부문 첫 사회인 베스트 나인을 수상했다.[10]
동료 이시이 다케히로, 오가와 히로후미와 함께 올림픽 대표로 선발되어 쓰쓰이 다이스케 등과 함께 야수진의 중심 역할을 맡았다.[11] 준결승 한국전에서는 7회말 등판한 에이스 朴東熙|박동희_(야구_선수)한국어에게서 동점 홈런을 쳐냈다.[12] 나카시마는 올림픽 5경기 모두 4번 타자, 1루수로 선발 출장하여 팀 최다 10안타, 타율 .436, 1홈런, 6타점으로 은메달 획득에 기여했다.[13] 같은 해 다시 사회인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었다.[14] 11월 12일에는 3년간 교제한 여성과 타카나와 프린스 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렸다.[6]
1988년 가을 드래프트 회의에서 닛폰햄 파이터스와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의 1위 지명을 받았고, 추첨 결과 닛폰햄이 교섭권을 획득했다. 드래프트 전에는 재경 센트럴 리그 구단을 희망했지만, 하라 다쓰노리, 기요하라 가즈히로와 함께 당시 NPB 최고액인 계약금 8000만엔과 연봉 840만엔(추정)으로 입단 계약을 맺었다.[15]
2. 2. 프로 선수 시절
1989년, 닛폰햄 파이터스에 입단하여 프로 생활을 시작했다. 금속 배트에서 나무 배트로 바꾸는 데 어려움을 겪었지만, 오픈전에서 최우수 신인으로 선정되었다.[16][17] 그해 4월 8일 개막전에 7번 타자, 우익수로 선발 출장하여 9회말 야마우치 다카노리에게서 아나부키 요시오 이후 33년 만이자 역대 두 번째로 신인 선수 개막전 끝내기 홈런을 기록했다.[9] 6월 중순부터 성적이 하락했고, 7월 2일 세이부 라이온스전에서 이시이 다케히로에게 왼쪽 손에 사구를 맞아 손등이 골절되어 전치 3주의 부상을 입었다.[18] 이 부상으로 주니어 올스타 게임 출전을 포기했다.[18] 8월 말에 1군에 복귀했고,[18] 타율 .233, 9홈런을 기록하며 연봉 1000만엔(추정)으로 계약을 갱신했다.[19]1990년에는 3루수로 포지션이 변경되었고, 오픈전에서 타율 .341의 좋은 성적을 기록했다.[20] 개막전에도 3루수로 선발 출장했지만, 시즌 후반에는 우익수로 출전하는 경우가 많았다. 7월 1일 오릭스 버팔로즈전에서는 3루 라인 드라이브가 안면에 직격하여 왼쪽 눈썹 아래를 10바늘 꿰매는 부상을 입었다.[21]
1992년에는 처음으로 올스타전에 출전하여 제2전에서 대타로 안타를 쳤다.[22] 처음으로 규정 타석을 채우며 타율 .290, 13홈런, 66타점을 기록했고, 1520만엔 인상된 연봉 3200만엔(추정)으로 계약을 갱신했다.[23] 1990년부터 1992년까지 3년 연속으로 팀이 패하며 세이부 라이온스의 리그 우승을 눈앞에서 지켜봐야 했다.[24] 1993년에는 타격 성적이 전년보다 떨어졌지만, 계약 갱신에서 400만엔 인상된 연봉 3600만엔(추정)을 받았다.[25]
1995년, 우에다 토시하루가 감독으로 취임하면서 팀의 젊은 선수 기용 정책으로 인해 출전 기회가 줄었고, 그해에는 33경기 출전에 그쳤고 프로 입단 후 처음으로 홈런을 기록하지 못했다.[26] 시즌 후 구단에서 웨이버 공시되었고, 신임 감독인 사사키 쿄스케에게 장타력을 평가받아 오사카 긴테쓰 버팔로즈로 이적했다.[26] 1996년, 1군에서는 이전과 같은 장타력을 발휘하지 못했지만, 주력 타자로서 2군의 웨스턴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26] 다음 해인 1997년에 이적해 온 아베 오사무나 요시오카 유지의 활약으로 1997년과 1998년에는 1군 출장 없이, 1998년에 현역에서 은퇴했다.[26]
2. 3. 은퇴 이후
1999년 긴테쓰의 2군 타격 코치를 맡았다. 2000년부터 긴테쓰의 스카우트로 활동했다.[4]2003년 닛폰햄의 규슈 지역 담당 스카우트로 복귀했다. 2008년 닛폰햄 1군 타격 코치로 취임했지만, 팀 타율, 득점, 안타, 홈런이 리그 최하위에 머물렀다. 2009년 2군 타격 코치를 맡았고, 그 해 퇴단했다.
2011년 대만 프로야구팀 퉁이 세븐일레븐 라이온스의 코치를 맡았다. 2012년 도중 승부 조작 사건에 연루되어 사임한 뤼원셩(呂文生)을 대신하여 감독으로 취임했다. 그 해 카마타 유야를 끈기 있게 기용하여 최다승을 획득하는 활약을 뒷받침했다.[27] 2013년 8월 4일, 성적 부진으로 퉁이 세븐일레븐 라이온스 2군 감독으로 강등되었다.
2014년 시코쿠 아일랜드 리그 플러스 도쿠시마 인디고삭스의 야수 종합 겸 타격 코치로 취임했다. 그 해 오프에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 코치로 전직한 시마다 나오야의 후임으로, 2015년 시즌부터 도쿠시마 인디고삭스 감독으로 취임했다.[28]
2015년 전반기는 3위[29], 후반기는 2위로 마감하여, 팀의 연간 종합 우승 3연패 목표는 달성하지 못했다.[30] 전반기 종료 후, 리그가 편성한 북미 원정 선발팀 "시코쿠 아일랜드 리그 플러스 ALLSTARS" (캐나디안 아메리칸 리그와 대전)의 감독도 맡았다.[29][31]
2016년 전반기는 2위[32], 후반기는 승률 5할로 4위(최하위)였지만,[33] 연간 승률 2위로 에히메 만다린 파이러츠와의 연간 챔피언십에 출장했다.[34] 챔피언십은 0승 2패로 패했다.[35] 또한, 전년에 이어 북미 원정 선발팀 감독을 맡았다.[36] 12월 5일, 도쿠시마 감독 퇴임이 발표되었다.[37]
도쿠시마 감독 퇴임 발표와 함께 KBO 리그 한화 이글스의 타격 코치 취임이 발표되었다.[37] 2017년 시즌 1군을 담당했지만,[38] 그 해 10월에 퇴임했다.[39]
2020년 1월 1일, 게이지 대학 야구 연맹 교토 선단 과학 대학 경식 야구부 감독으로 취임했다.[40][41]
3. 플레이 스타일
4. 상세 정보
나카시마 테루시는 1989년 4월 8일,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와의 1차전(도쿄 돔)에서 7번·우익수로 선발 출장하며 첫 출장 및 첫 선발 출장을 기록했다.[43] 같은 경기 2회말에 야마우치 다카노리로부터 3루 땅볼을 쳐 첫 타점을, 5회말에는 야마우치 다카노리로부터 2루타를 쳐 첫 안타를 기록했다.[43] 또한, 9회말에는 야마우치 다카노리로부터 끝내기 2점 홈런을 기록하며 첫 홈런을 장식했다.[43]
신인으로서 개막전 홈런은 역대 11번째 기록이며,[43] 끝내기 홈런은 1956년 아나부키 요시오 이후 역대 2번째 기록이다.[43] 1992년에는 올스타전에 출장했다.[43]
4. 1. 연도별 타격 성적
연도 | 소속 팀 | 경기 | 타수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도루 | 4사구 | 삼진 | 타율 |
---|---|---|---|---|---|---|---|---|---|---|---|---|
1989년 | 닛폰햄 | 81 | 259 | 55 | 10 | 0 | 9 | 24 | 5 | 19 | 60 | .233 |
1990년 | 117 | 361 | 83 | 16 | 1 | 11 | 50 | 5 | 21 | 54 | .253 | |
1991년 | 111 | 320 | 61 | 15 | 1 | 7 | 27 | 0 | 37 | 58 | .219 | |
1992년 | 115 | 485 | 128 | 23 | 1 | 13 | 66 | 0 | 35 | 83 | .290 | |
1993년 | 87 | 263 | 68 | 12 | 3 | 6 | 33 | 3 | 23 | 41 | .286 | |
1994년 | 55 | 131 | 23 | 3 | 0 | 6 | 15 | 0 | 7 | 28 | .189 | |
1995년 | 33 | 82 | 15 | 0 | 0 | 0 | 5 | 0 | 7 | 15 | .203 | |
1996년 | 긴테쓰 | 42 | 98 | 20 | 2 | 0 | 0 | 5 | 0 | 8 | 22 | .227 |
통산: 8년 | 641 | 1999 | 453 | 81 | 6 | 52 | 225 | 13 | 157 | 361 | .251 |
4. 2. 기록
첫 선발 출장첫 타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