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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타구치 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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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무타구치 렌야는 사가현 출신으로, 일본 제국 육군 군인이다. 1910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시베리아 출병에 참전했으며, 프랑스에서 군사 참관원으로 활동했다. 1937년 마루코브리지 사건에 연루되어 중일 전쟁을 촉발하는 데 기여했고, 1941년 제18사단 사령관으로 말레이 반도 침공과 싱가포르 전투에 참여했다. 1943년 임팔 전투를 지휘했으나 실패하여 해임되었고, 전쟁 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는 독선적인 지휘 스타일과 부하들과의 갈등으로 비판받았으며, 특히 임팔 전투에서의 무리한 작전으로 많은 병사들의 희생을 초래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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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타구치 렌야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렌야 무타구치 중장
이름무타구치 렌야
출생일1888년 10월 7일
출생지사가현, 일본 제국
사망일1966년 8월 2일
사망지도쿄도 조후시, 일본
군사 경력
소속일본 제국 육군
복무 기간1910년 – 1945년
최종 계급육군 중장
지휘일본 육군 제18사단, 일본 육군 제15군
참전 전투시베리아 출병
중일 전쟁
제2차 세계 대전
파시르 판장 전투
훈장훈1등 서보장 외
기타

2. 생애

무타구치 렌야는 사가현 출신으로, 1910년 일본 제국 육군사관학교 22기, 1917년 육군대학교 29기를 졸업했다. 시베리아 출병에 참여하여 볼셰비키 적군과 극동 러시아에서 싸웠으며, 이후 군사 참관원으로 프랑스에 파견되었다.[1]

1926년 소좌, 1930년 대좌로 진급한 후, 1933년부터 1936년까지 일본 제국 육군참모본부 총무과에서 근무했다. 1936년 중국으로 건너가 베이징 주둔 일본군 사령관을 거쳐 제1보병연대장을 역임했다. 1937년 7월 7일, 그가 지휘하던 부대가 마루코브리지 사건에 연루되면서 중일 전쟁이 발발하는 계기가 되었다.[1]

1938년 소장으로 진급, 제4군 참모장을 역임하고 일본으로 돌아와 1939년부터 1941년까지 육군예비학교 교장으로 근무했다.[2] 1940년 중장으로 진급, 태평양 전쟁 발발 직후인 1941년 4월 제18사단 사령관이 되었다. 제18사단은 말레이 반도 침공에 참여했고, 무타구치는 1942년 2월 싱가포르 전투에서 부상을 입었다. 싱가포르 함락 후 제18사단은 필리핀으로 이동하여 미군을 바탄 반도로 몰아내는 데 기여했고, 1942년 4월 버마로 재배치되었다.[3]

1943년 3월, 무타구치는 제15군 사령관이 되어 임팔 전투를 일으켰다. 1944년 5월 임팔 공세 실패 후에도 사단장들의 후퇴를 불허하고 세 명의 사단장을 모두 해임하는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결국 7월 3일 공격을 중단했으나, 8만 5천 명의 병력 중 5만 5천 명이 사상자를 내는 등 일본군 최악의 패배를 기록했다. 이로 인해 8월 30일 사령관직에서 해임되어 도쿄로 소환되었고, 1944년 12월 강제 은퇴했다.[3] 1945년 잠시 현역으로 복귀하여 육군예비학교 교장직을 다시 맡았다.[3]

전쟁 후, 미국 점령당국에 체포되어 싱가포르에서 군사재판을 받고 전쟁 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1948년 3월 출옥하여 일본으로 돌아왔으며, 1966년 8월 2일 도쿄에서 사망했다.[4]

무타구치 렌야의 가족 관계는 다음과 같다.

관계이름출생년도사망년도비고
부인무타구치 토시코1895년불명도쿄부립 제3고등여학교(현·도쿄도립 고마바 고등학교) 출신
장남무타구치 에이쿤1917년불명도쿄제국대학 법학부 졸업, 스미토모 베이크라이트 주식회사 이사 역임
차남무타구치 겐도1921년불명와세다대학 이공학부 출신
손자무타구치 테루야스1950년티에스 테크 주식회사 사외이사·이사회 의장, 전 사이타마현 산업기술종합센터장


2. 1. 초기 생애 및 군 경력

사가현 사가시 출신으로, 1910년 일본 제국 육군사관학교 22기, 1917년 일본 육군대학교 29기를 졸업했다.[1] 졸업 후 보병 제13연대에서 대대 부속 장교 후보생으로 근무한 후 소위로 임관했다. 1914년부터 1917년까지 육군대학교(29기)에 재학했다.[14] 육군대학교 졸업 후에는 참모본부에서 운수부 선박반에 배속되었다.[15] 이후 18년간 참모본부와 육군성 등 육군 중앙에서 근무하며 군인 관료로서 경력을 쌓았다.[16]

시베리아 출병에 참여하여 볼셰비키 적군과 극동 러시아에서 싸웠다.[1] 1919년에는 시베리아 출병에 따른 조사를 위해 캄차카 반도 잠입을 명령받고, 페트로파블롭스크에서 스파이 활동을 했다.[19] 1920년에는 니항 사건에 대응하기 위해 파견된 북부 연해주 파견대의 참모 중 한 명으로 현지에 파견되었다.[20] 그 후 군사 참관원으로 프랑스에 파견되었다.[1]

1926년 소좌로 진급한 후 근위보병 제4연대 제1대대장이 되었다.[22] 1927년에는 육군성 군무국 군무과로 발령받았다.[24] 1930년 대좌로 진급했다.[24] 1933년부터 1936년까지 일본 제국 육군참모본부 총무과에서 근무했다.[1]

무타구치는 육군 내 파벌인 벚꽃회와 일석회에 참여했다. 벚꽃회는 천황 친정과 만몽 문제 해결을 기치로 국가 개조를 주장했던 조직이었다.[25] 일석회는 인사 쇄신과 군제 개혁을 단행하고, 군의 현대화와 국가 총동원 체제 확립, 육군 내 장주벌 타도 등을 목표로 하는 젊은 장교들의 연구 모임이었다.[27] 무타구치는 황도파에 속했으며, 5・15 사건 관련자나 아이자와 사건의 주범과 교류가 있었다.[31]

다음은 무타구치 렌야의 초기 생애 및 군 경력을 정리한 표이다.

연도내용
1910년일본 제국 육군사관학교 졸업 (22기)[244]
1910년육군 보병 소위, 보병 제13연대 배속[244]
1913년육군 보병 중위
1917년일본 육군대학교 졸업 (29기)[245]
1918년참모본부 부속(선박반)[245]
1919년시베리아 출병 관련 캄차카 반도 잠입 임무[19]
1920년육군 보병 대위, 참모본부 부원, 니항 사건 관련 북부 연해주 파견대 참모[20]
1926년육군 보병 소좌, 근위보병 제4연대 배속[244]
1926년근위보병 제4연대 대대장[244]
1927년육군성 군무국 과원(군무과)[244]
1929년프랑스 출장, 참모본부 부원[244]
1930년육군 보병 중좌[244]
1933년참모본부 총무부 서무과장[244]
1934년육군 보병 대좌[244]
1936년2・26 사건 연루 의혹으로 베이징 주둔 보병 대대장으로 좌천[36]


2. 2. 군 내부 파벌 항쟁

무타구치는 중국 주둔 보병 제1연대장으로 부임하면서, 연대의 단결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부하 장병들에게 친절하게 대하고, 오해로 질책한 중대장에게 직접 찾아가 사과하는 등 소통을 중시했다. 또한 연대 비품 파손 신고를 숨김없이 하도록 독려하고, 그 책임을 자신이 지는 모습을 보여주어 부하들의 신뢰를 얻었다.[35][37] 이러한 노력으로 연대 분위기는 밝아졌고, 무타구치는 부하들로부터 "뭐든지 해준다"는 칭찬을 받으며 존경받았다.[35]

상관이었던 가와베 마사사부로 소장은 육군 중앙 근무가 길었던 무타구치에게 친절하게 지도하며 연대장으로서의 자세를 가르쳤고, 무타구치 역시 가와베를 존경하며 따랐다.[38]

일본과 중국 간의 긴장이 고조되던 중, 펑타이에서 양군 간의 작은 충돌(펑타이 사건)이 발생했다. 가와베는 무타구치에게 경험을 쌓게 하기 위해 중국 측과의 협상을 맡겼다. 무타구치는 중국 측에 강경한 태도를 보이며 병사들을 병영 앞에 세우고 지휘관에게 사과를 요구하는 등 체면을 중시하는 중국인의 신경을 건드렸다.[39] 하지만 무타구치는 회고에서 중국군 무장 해제를 주장하는 부하를 질책하고 원만하게 해결하려 노력했다고 주장하며, 함께 간 사쿠라이 토쿠타로 중좌로부터 칭찬을 받았다고 한다.[40] 그러나 무타구치는 중국군이 말뿐인 사과에 그치고 무력 충돌에 대비한 준비를 하고 있다고 판단하여 불신감을 키웠다.[41]

1937년 7월 7일, 뤄구차오 사건이 발발했다. 무타구치가 지휘하던 중국 주둔 보병 제1연대 제3대대가 야간 훈련 중 중국군으로 추정되는 총격을 받았고, 병사 1명이 일시적으로 행방불명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무타구치는 즉시 병력을 집합시키고 중국군에게 증거를 요구하며 강경하게 대응했다.[42][44] 지차정무위원회와의 협상에서 원만하게 해결하려는 의지를 보였지만,[45] 중국군의 계속된 발포에 격분하여 반격을 허가했고, 이는 양군의 무력 충돌로 이어졌다.[41][45]

무타구치는 회상에서 관사에서 취침 중이었다고 주장했지만, 당시 중국 대사관 무관 보좌관 이마이 타케오는 무타구치가 병영 사무실 전화 옆에 있었고, 즉시 병력에 출동 준비를 명령했다고 증언했다.[46] 무타구치는 중국군에게 사과와 병사 인도를 요구했지만 거부당하자, 중국군 기지 내 수색을 요구하며 격렬한 설전을 벌였다.[47]

현지에서는 중국군이 계속 발포했고, 일본군 병사가 저격당하는 사건까지 발생하자, 무타구치는 중국군이 적대 행위를 한다고 판단하여 반격을 허가했다.[41] 이치키는 반격 개시 7분 만에 용왕묘를 점령하고 중국군 유기 시체 27구를 확인했다.[48]

베이징으로 돌아온 가와베는 무타구치에게 공격 중지 명령을 내렸지만, 무타구치는 가와베의 불확대 방침에 반대하며 전투 준비를 명령했다. 무타구치는 부하를 정찰병으로 잠입시켜 폭죽을 터뜨리는 중국인을 발견했고, 그가 마오쩌둥의 지령을 받고 있다고 자백했다고 주장했다.[49]

7월 10일, 양군이 충돌하자[50] 무타구치는 중국군 섬멸을 명령했다.[51] 가와베는 무타구치의 독단적인 행동에 침묵으로 질책했지만, 이미 공격 명령이 내려진 상황에서 이를 뒤집을 수 없었다.[52][53] 무타구치는 야습을 통해 용왕묘 부근의 중국군을 섬멸했다.[52]

무타구치는 훗날 자신이 중일전쟁의 발단을 만들었다고 생각하며, 임팔 작전 발안에 이 생각이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뤄구차오 사건의 계기를 만들었지만, 전쟁이 확대되어 대동아 전쟁까지 이어졌다고 말하며, 인도 진공을 통해 국가에 대한 미안함을 덜고 싶어했다.[54][55] 그러나 뤄구차오 사건이 중국 공산당의 모략이었다는 견해를 전제로 한다면, 무타구치의 주장은 자의식 과잉으로 평가될 수 있다.[56]

무타구치의 교전은 명백한 월권 행위였지만, 가와베는 이를 묵인하고 자신의 명령으로 공격했다고 꾸몄다.[57] 무타구치는 처벌받지 않고 오히려 "뤄구차오의 용장"으로 주목받았지만,[58][59] 회고에서는 중국 측과의 담판과 협상에 시달리는 정치가와 같았다고 말했다.[60]

현지에서는 사건 확대를 원하지 않았고, 이마이 타케오 소좌 등의 노력으로 7월 11일 현지 협정이 조인되었다. 그러나 일본 중앙 정부는 중국에 3개 사단을 증파하기로 결정했고,[61] 무타구치는 이를 비판하며, 중앙 정부가 전선 확대를 부추겼다고 주장했다.[49] 일본군 증강 후 중국 측의 도발은 더욱 격화되었고, 결국 일중 양군은 전면 충돌하게 되었다.[50][62]

2. 3. 중일 전쟁과 루거우차오 사건

무타구치는 1936년 중국으로 이동하여 베이징 주둔 일본군 사령관이 되었다. 1936년부터 1938년까지 중국에서 제1보병연대장을 역임했다. 무타구치가 지휘하는 부대는 1937년 7월 7일 마루코브리지 사건에 연루되었고, 이 사건은 중일 전쟁을 촉발하는 데 기여했다.[1]

북평 주둔 보병대는 개편되어 중국 주둔 보병 여단중국 주둔 보병 제1연대가 되었고, 무타구치는 연대장이 되었다. 무타구치는 사실상 좌천이었던 이 중국행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연대장이 되어서야 비로소 군인으로서의 진가를 파악할 수 있었다”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35] 중국 주둔 보병 제1연대는 전국의 사단에서 모아져 편성되었기 때문에 연대의 단결력에 문제가 있었지만, 무타구치는 “전통에 얽매이지 않는 창설 연대를 내가 훌륭하게 육성한다”고 의욕을 불태웠다.[35]

이때 무타구치의 상관은 가와베 마사사부로 소장이었는데, 가와베는 무타구치를 친절하게 지도하고 연대장으로서의 자세를 가르쳤고, 무타구치도 그런 가와베를 따랐다.[38]

중국 파병군을 계속 증강하는 일본과 중국 측의 긴장은 고조되었고, 서로의 부대가 주둔하는 펑타이에서는, 중국 주둔 보병 제1연대가 중국군에게 맞는 등 양군의 작은 충돌이 발생했다. (펑타이 사건) 가와베는 무타구치에게 경험을 쌓게 하기 위해, 사건 처리를 위한 중국 측과의 협상을 맡겼다. 가와베는 가능한 한 원만하게 사건을 종결시키고 싶어했지만, 작은 충돌의 원인에 대해, 과실이라고 주장하는 중국 측에 대해, 무타구치는 “이는 분명 일본군에 대한 모욕이다”라고 강경한 태도로 임했다.[39]

사법성은 사건 발생 약 3주 전인 1937년 6월 17일, 만주국에 민법을 공포하고 연내 시행 예정이었다. 또한 상공성·개척성은 7월에 만주국 보험업법을 공포 시행할 예정이었다.

이와 같이 일중간의 긴장은 고조되고 있었지만, 1937년 7월 7일 중국 주둔 보병 제1연대 제3대대가 뤄구차오 부근에서 야간 훈련을 실시했다. 그 직후 오후 10시 40분경, 제8중대의 뒤편 용왕묘에서 중국군으로 추정되는 4~5발의 총성이 들렸다. 그 후, 중대에서 인원 점호를 실시한 결과, 이등병 1명이 행방불명인 것이 판명되었고, 제3대대장 이치키에게 보고되었다.[42]

무타구치는 이때 베이징에 있던 일본 대사관 구내 관저에서 취침 중이었지만, 여단장 가와베가 톈진에 출장 중이어서 그 대리로 임명되어 있었고, 7월 8일 0시 무렵 이치키로부터의 전화 보고를 받았다. 무타구치는 발포보다 병사 1명이 행방불명이라는 사태를 중시하여, 즉시 “대대는 곧 일자산에 병사를 집합시켜라. 중국군이 쏜 증거를 잡아야 한다”고 명령한 후, 중국 주둔군 사령부 부(북평특무기관장) 마쓰이 다쿠로 소장과 대응책을 협의했다. [44]

당시 중국 대사관 무관 보좌관 이마이 타케오에 따르면, 무타구치는 관사에 돌아가지 않고, 계속 병영 사무실 전화 옆에 있었다. 이치키로부터 보고가 들어오자 가와베의 의향을 확인하는 것도 없이, 즉시 병영에 있던 전 병력에 출동 준비를 명령하고, 우선 준비가 된 1개 중대를 이치키 중대의 증원으로 출동시켰다.[46]

7월 8일 오전 3시 25분에는 승마 전령 중인 병사가 저격당하여 고삐에 명중했다. 주위는 밝아지기 시작했고, 이치키는 이미 명백한 공격 의지를 가지고 사격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무타구치에게 다시 보고했다. 이치키로부터 “어떻게 할까요”라고 판단을 요구받은 무타구치는 “이미 밝은데”라고 현장 상황을 묻자, 이치키로부터 “밝습니다”라는 답변을 받았다. 모리타에게는 협상으로 원만하게 해결하도록 말했지만,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쏜 것은 분명 일본군임을 알고 적대시하고 있다고 판단, “사건을 가장 신속하게 해결하려면, 잘못을 저지른 자에게 그 자리에서 철저하게 주먹을 먹이는 것밖에 없다”고 흥분하며[41]“중국군이 두 번이나 사격한 것은 순전히 적대 행위다. 단호히 전투를 개시해야 한다.”라고 이치키에게 반격을 허가했고, 이후 양군의 무력 충돌로 발전해 버렸다(뤄구차오 사건)[45]

베이징으로 돌아온 가와베는 무타구치에게 공격 중지 명령을 내렸고, 현지 부대 간의 휴전 협상이 이루어졌지만, 중국군의 철수가 진행되지 않는 상황을 본 무타구치는 사건 불확대의 가와베의 방침에 반하여, 지휘하 연대에 “중국군의 협정 위반을 인정하면 즉시 일격을 가한다”고 전투 준비를 명령하고, 적정 시찰 명목으로 1개 소대를 용왕묘에 파견했다.

7월 10일에 양군이 충돌했고,[50] 무타구치는 주저 없이 중국군의 섬멸을 명령했다.[51] 전투 개시를 알게 된 가와베는 연대 사령부를 방문했지만, 불쾌한 듯한 얼굴로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입을 다물고 무타구치를 노려볼 뿐이었다. 무타구치는 그것을 “침묵의 질책”으로 인식하고, 빨리 총성이 그치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양군의 총성은 그칠 기미는커녕 더욱 격렬해지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가와베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또 어떤 지시도 하지 않은 채 떠나갔다.[52] 이미 무타구치가 공격 명령을 내렸기 때문에, 그것을 상급 지휘관인 가와베가 뒤집으면 군의 통솔의 혼란을 초래하므로, 무타구치의 명령 위반을 추인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53] 무타구치는 가와베가 돌아간 후, 용왕묘 부근의 중국군에게 야습을 걸게 하여 이것을 섬멸했다.[52]

이로부터 무타구치는 자신이 중일전쟁의 발단을 만들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뤄구차오 사건을 중국 공산당의 모략에 의해 중국 제29군이 일으켰다고 하는 견해를 전제로 한다면, 무타구치의 자의식 과잉이라고도 평가된다.[56]

교전은 명백한 무타구치의 월권 행위였지만, 보고를 받은 가와베가 그 독단을 허용하고, 가와베의 명령으로 공격했다고 꾸몄다.[57] 그 때문에 무타구치는 죄를 묻기는커녕, “협정을 무시하고 용왕묘에 습격한 폭력적인 중국 병사에게 응전한 동북의 건아는 분전하여 적을 격퇴했지만 나의 무타구치 ○대장은 선두에 서서 칼을 휘둘러 적진에 뛰어들었다” 등 과장 보도되어, 일약 “뤄구차오의 용장” 등으로 주목을 받게 되었다.[58][59]

현지에서는 이 이상의 사건 확대를 바라지 않고, 대사관 부 육군 무관 보좌관의 이마이 타케오 소좌 등의 노력도 있어, 7월 11일에 중국 측이 일본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형태로 현지 협정이 조인되었다. 무타구치도 이것으로 전투가 그치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중국에서의 전선 확대는 중앙의 방침이 되어 있었고, 현지 협정이 조인된 같은 날에는 중국에 3개 사단의 증파가 결정되었고,[61] 무타구치 등 현지 일본군은 놀랐다.

2. 4. 태평양 전쟁

1941년 12월,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무타구치는 제18사단장으로서 말레이 작전과 싱가포르 전투를 지휘했다. 제18사단은 와타미 히로시 소장이 이끄는 부대가 코타바루에 상륙하여 전투를 시작했고,[75] 주력 부대는 싱고라에 상륙하여 싱가포르 공략전에 참전했다.[76]

1942년 2월 8일, 제18사단은 조호르 해협을 건너 싱가포르에 상륙했다. 영국군의 포격 속에서 무타구치는 2월 9일 새벽에 상륙, 혼전 중에 수류탄 파편에 부상을 입었으나 최전선에서 지휘를 계속했다.[78][79][80] 제18사단은 부킷 티마 고지를 점령하고, 케펠 항으로 진격했다.[85][92] 영국군은 15인치(380㎜) 요새포 등의 요새포로 저항했으나,[93] 결국 항복했다.[97]

무타구치는 중일 전쟁의 책임을 통감하며, 미영 격멸을 위해 노력했다고 밝혔다.[90] 싱가포르 전투에서 그의 용맹함은 널리 알려졌으나, 제18사단의 피해도 컸다.[91][100]

2. 4. 1. 임팔 작전

도조 히데키사이판 섬 함락의 책임을 지고 총리대신, 육군대신, 참모총장의 모든 직책을 사임했다. 육군 내 도조 파벌의 숙청 인사가 행해졌고, 무타구치도 1944년 8월 30일 제15군 사령관에서 해임되어 도쿄로 소환되었다.[181] 12월에 예비역 편입되었으나, 이듬해 1945년(쇼와 20년) 1월에 소집되어 육군예과사관학교장에 보임되었다.[182]

무타구치는 1943년 3월부터 제15군 사령관이 되었고, 아삼으로 진격하는 자신의 계획을 강력히 추진하여 임팔 전투를 일으켰다. 1944년 5월 임팔 공세가 실패한 후 무타구치는 사단장들의 후퇴를 허용하지 않고 세 명의 사단장을 모두 해임했다. 그는 결국 7월 3일에 공격을 중단했다. 무타구치의 8만 5천 명의 병력 중 5만 5천 명이 사상자를 냈고, 많은 수가 기아나 질병으로 사망했다. 이는 당시 일본군이 입은 최악의 패배였다.[3]

1942년 9월, 남방군이 버마 공략의 여세를 몰아 인도 동부 아삼 지방에 침공하는 21호 작전을 기획했을 때, 무타구치는 상관인 이이다 쇼지로제15군 사령관과 함께 병참 면의 준비 부족으로 실현 가능성이 없다고 반대하여, 동 작전을 무기한 연기시켰다. 그는 다음과 같은 이유를 설명했다.[115][116]

제18사단 참모장 다케다는 무타구치의 의견에 동의했지만, “임팔 부근까지 가라고 한다면, 어떻게든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만”이라고 말했고, 이 발언은 무타구치에게 “임팔”이라는 지명을 강하게 인상에 남겼다.[117] 무타구치는 항상 강경한 것이 자신의 장점이라고 생각했고, 이 작전이 무기한 연기된 후, 반대한 것에 대해 후회하며 “(21호 작전이 재검토된다면) 시일의 여유가 없다거나, 준비가 불충분하다는 말은 할 수 없다. 가능한 한 모든 준비를 갖춰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렀다.[118][119]

그 후 버마 전선에 오드 윈게이트 준장이 이끄는 코만도 부대친디트가 등장하여 북부 버마의 국경을 넘어 일본군의 후방을 교란했다. 제18사단장으로서 친디트 토벌에 분주했던 무타구치는 버마 북부가 안전지대가 아님을 절감하고, 그 방어를 위해 적 거점을 공격하는 “공격 방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122] 그는 버마의 건기에는 일본의 가을처럼 나무잎이 떨어져, 인적 미답이라고 생각했던 정글의 시야가 예상 이상으로 트이는 것을 인식했고,[123] 그 건기를 노려 철저히 준비하여 버마 북부에 침입한 친디트에게 강한 감명을 받았다.[124] 무타구치는 자신이 격파했던 영국군이 인도에서 버마로 침입해 왔다면, 자신이라면 대군을 이끌고 인도로의 진공도 가능하지 않을까 상상하게 되었고,[125] 건기에 철저한 준비를 한다면, 정글이나 산악 지대를 진격하더라도 전투 여력은 충분히 유지할 수 있다고 주장하게 되었다.[124]

무타구치는 “루거우차오 사변의 책임”에서, 자신의 손으로 이 전쟁을 해결하기 위해 “진공 작전으로 적의 세력원을 섬멸하고, 인도의 독립을 촉진하며, 영국의 전쟁 이탈을 도모하여, 대동아 전쟁 전반에 기여한다”는 장대한 구상을 품게 되었다.[126][127]

2. 5. 전후

무타구치는 미국 점령당국에 의해 체포되어 싱가포르로 압송되었고, 그곳에서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전쟁 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1948년 3월 출옥하여 일본으로 돌아왔다. 1966년 8월 2일 도쿄에서 사망했다.[4]

전후 얼마 지나지 않은 1945년 12월 2일, 무타구치 렌야는 GHQ에 의한 제3차 전범 지명 대상이 되어 체포되어 스가모 감옥에 수감되었다.[185] 무타구치는 자신이 체포된 것은 루거우차오 사건의 죄에 물린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이 기회에 철저히 조사받을 수 있다며 용감하게 스가모 감옥에 수감되었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루거우차오 사건에 대해 심문받는 일은 없었다. 답답해진 무타구치는 담당 법무장교에게 루거우차오 사건은 중국 측의 도발로 교전이 시작된 것이라고 설명하고, 조셉 키넌 주석 검사에게 자신을 법정에 세워줄 것을 요청해달라고 했다. 무타구치의 부탁에 대해 법무장교는 “소원대로 해 드리겠다”고 약속했지만, 결국 그 기회는 오지 않았다.[186]

무타구치는 A급 전범으로서는 일체 심리를 받지 않고, 1946년 10월 싱가포르에서 열린 영국군에 의한 BC급 전범 소추의 군사재판 피의자로서 싱가포르로 호송되었다. 이와쿠니 비행장에서 며칠에 걸쳐 싱가포르에 도착했는데, 싱가포르 화교 학살 사건 등으로 사형 판결을 받게 된 가와무라 산로 중장과 함께였다.[187] 무타구치와 가와무라는 종전까지 일본군이 싱가포르 전투에서 얻은 다수의 포로를 수용했던 창이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때의 모습은 1947년 8월 28일 데일리 텔레그래프지에 보도되었는데, 무타구치는 상반신을 벗은 채 죄수 번호가 적힌 무릎까지 오는 헐렁한 반바지를 입고 맨발인 사진이 촬영되어 “한때 ‘말레이의 정복자’로 알려졌던 일본 중장 무타구치 렌야 씨(왼쪽)는 현재 싱가포르 창이 감옥의 죄수입니다. 사진은 지난주 아침 열병식에서 그가 감옥장 톰 힐 소령에게 경례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렌야 씨는 현재 전쟁 범죄로 재판을 받고 있는 많은 일본 고관 중 한 명입니다”라고 소개되었다.[188] 무타구치와 가와무라는 같은 감방에 들어 있었고, 매일 바둑을 두는 등 지루함을 달랬다.[187] 무타구치 등과 같은 창이 감옥 B동에는 그 외에도 근위 사단장 니시무라 타쿠마 중장, 제2야전헌병대장 오오이시 마사유키 대좌, F기관의 후지와라 이와이치 중좌도 수감되어 있었다.[189]

제18사단이 제25군 명령에 따라 조호르주에서 치안 진압이라는 명목으로 학살을 저지른 것은 확실하고,[110] 미얀마 방면군 참모로 무타구치와도 관계가 깊었던 후지와라 이와이치 소좌는 제18사단 장교로부터 조호르바루에서의 학살 상황을 듣고, 그 장교는 아직도 마음이 아프다고 후지와라에게 털어놓았다고 한다.[190] 무타구치 자신도 학살 사실을 파악하고 있었다. 도쿄 니치니치 신문의 사진기자 안보 히사타케가 제18사단이 주둔하고 있던 조호르바루를 취재하기 위해 방문했을 때, 시내에서 다량의 학살된 시체를 목격했고, 그 후 사단 사령부에서 무타구치와 면담했는데, 무타구치는 학살 사실을 파악하고 있는 듯했다고 한다.[191](자세한 내용은 #제18사단장 시대에서 후술) 또 위에서 언급한 대로, 알렉산드라 병원 사건에 대해서도 인식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았다.[192]

싱가포르와 말레이에서의 일본군에 의한 전쟁 범죄 수사는 일본 거주 경험이 있는 친일파 동남아시아 최고 사령부 정보지대 전쟁 범죄 조사국 E그룹 시릴 와일드 소좌가 중심이 되어 진행되었는데, 알렉산드라 병원 사건에서 살해된 영국군 육군 대위 아라다이스는 시릴이 일본에 거주하던 시절 친구였고, 전쟁 범죄로서의 소추에 의욕을 보이고 있었다. 시릴은 종전 직후인 1945년 10월에는 마닐라 대학살 등의 죄로 미국군에 체포되어 있던 야마시타 봉문 대장을 마닐라까지 가서 심문하고, 알렉산드라 병원 사건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들었다. 거기서 야마시타는 자신은 그 사건에 대해 전혀 모른다는 것과, 그 지역을 담당하고 있던 것은 제18사단이며, 사단장 무타구치를 심문해야 한다고 말했다.[193]

시릴은 1946년 9월 도쿄 재판에 검찰 측 증인으로 출석하여 일본군의 전쟁 범죄 내용에 대해 증언했는데, 그중에는 알렉산드라 병원 사건도 포함되어 있었다.[194] 시릴은 야마시타에 대한 심문 후, 무타구치에 대한 심문 메모를 작성하고, 야마시타가 알렉산드라 병원 사건의 잔혹 행위를 비판하고 무타구치에 대한 심문을 유도한 것을 전해 실망시키고, 그 위에 전쟁 범죄 재판에 회부하겠다고 무타구치를 위협함으로써 증언을 끌어내겠다는 작전을 세우는 등, 무타구치에 대한 심문에 의욕을 보였지만,[194] 심문이 실현되기 전인 1946년 9월 25일에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고,[195] 중심 인물인 시릴을 잃은 이후 싱가포르의 전범 재판은 대충 진행되었다.[187]

시릴 사후 12월 7일에 무타구치는 심문을 받았지만, 그때는 알렉산드라 병원 사건에 대해서는 전혀 질문받지 않았고, 같은 방에 있던 가와무라는 무타구치가 안도하는 모습이었다고 유고에 기록하고 있다.[187] 그러나, 전 방위대학교 준교수이자 군사 연구가·전쟁사가인 세키구치 타카후미가 무타구치의 유품에서 영국군 군사재판소에 제출한 서한을 발견했는데, 그 서면에 따르면, 무타구치는 워슨 소좌로부터 알렉산드라 병원 사건에 대해 심문을 받았고, 그때 워슨 소좌로부터는 “학살 사건이 있던 다음 날 무타구치가 병원을 방문하여 환자에게 사과했다”, “무타구치는 자신이 천황 폐하의 직접적인 대표라고 자칭했다”, “학살 사건의 상세 내용을 알고 있었다” 등 영국군 측의 증언을 제시받았지만, 그에 대해 무타구치는 그 서한에서 “나는 일본 영국 양군의 전상자를 위문하기 위해 병원에 갔을 뿐이다”라며 사건의 연루를 부인했고, 영국군 측도 학살 사실도 무타구치의 연루도 증명할 수 없어 소추할 수 없었다.[196]

또, 치안 진압에 의한 학살에 대해서도, 싱가포르에서의 학살 사건에 비해, 말레이에서는 소추된 사건 자체가 제한되었다. 제18사단이 치안 진압을 담당했던 조호르주에서도 다수의 학살 사건이 보고되었지만, 제18사단은 당시 참모 2명이 영국군의 추적을 받았음에도 기소되지 않았고, 무타구치는 추적조차 받지 않았다.[197] 사단장이나 참모 등 사단 중추가 죄에 물리지 않은 것은, 담당 지역에서 더 대규모의 학살 사건이 일어난 제5사단도 마찬가지로, 네그리 셈빌란주에서는 제5사단 예하 보병 제11연대에 의해 학살이 행해졌지만, 전후 재판을 받고 사형된 것은 연대장 와타나베 쓰나히코 대좌와 실제로 실행한 중대장과 소대장뿐이었다.[198] 당시 사단장 마쓰이 타쿠로 중장은 종전 시 상하이에서 중국군에 항복하여 구류되어 있었기 때문에, 영국 측으로부터 중국 당국에 학살 행위와 관련이 있다고 하여 싱가포르로 이송하도록 요청받았지만, 이유는 불명확하지만 마쓰이는 체포되거나 추적을 받지 않고 그대로 복귀했다.[197] 일련의 학살 사건을 계획하고 주도한 제25군 참모 쓰지 마사노부도 GHQ참모 제2부의 정치적 압력 때문에 소추를 면했다.[199]

무타구치 렌야는 전쟁 범죄자로 기소되지 않았고, 창이 감옥에서는 영국군의 요청에 따라 임팔 작전에 대한 영국군 전사 편찬에 협력하기도 했지만, 1948년 3월에 석방되어 코지마 마사노리 소장과 함께 배편으로 귀국했다. 만약 시릴이 생존해 있었다면 알렉산드라 병원 사건으로 중형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는 지적도 있다.[187] 귀국 후에는 도쿄도 조후시에서 여생을 보냈지만, 군 사령관으로서 패배한 것을 매우 부끄럽게 여기고 강한 책임감을 느껴, “패배한 장수는 병법을 논하지 않는다”는 자세로 어떠한 비판에도 이를 받아들이고 일체 변명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200] 그 때문에 스스로 적극적으로 공식적인 자리에 나서는 것을 계속 삼가면서 생활했다.[201]

그래도 언론의 취재를 받은 적이 있으며, 1955년 잡지 「문예춘추」에 싱가포르 부킷 티마 고지 전투기를 집필했지만, 문예춘추의 취재에 대해서는 버마의 전투에 대해서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202] 또한 1961년 잡지 「화보전기」의 취재에서는 “특히 인상 깊었던 작전은 무엇입니까?”라는 기자의 질문에 무타구치는 “그것은 무엇보다도 루거우차오 사건과 싱가포르 공략입니다”라고 버마에서의 전투는 회피했고, 그 후에도 버마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 더욱이 그 취재에서는 당시 사회 문제가 되었던 미쓰이 미이케 노동쟁의의 화제도 나왔는데, 쟁의의 중심지가 자신이 이전에 지휘했던 제18사단의 편성지인 구루메시 근교였던 것 때문에, “저 미이케 노동쟁의에도 틀림없이 나의 부하들이…”라고 걱정하고 있었다.[69]

무타구치는 버마 전쟁 관계자들에 의해 조직된 “버마 영령 헌장회”(회장은 전 제15군 참모 하시모토)가 매년 야스쿠니 신사에서 개최했던 버마 방면 전몰자 합동 위령제에 계속 참가하여 전사자의 위령에 힘썼지만,[203] 자택에는 전사자의 유족이 몰려오는 일도 있었고, 취재를 위해 무타구치의 자택을 방문하려고 했던 역사학자 하타 이쿠히코가 역전의 파출소에서 경찰관에게 길을 묻자 “원한을 품고 오는 사람이 꽤 있다”고 알려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전사자의 유족이 찾아오면 머리를 다다미에 대고 토하자로 사죄했다. “죽은 아들을 돌려달라”거나 “머리를 깎고 중이 되라”는 신랄한 편지도 많이 우송되었고, 같은 전직 군인으로부터 “할복하라”는 자결 교사까지 당했다. 그 때문에 구군인의 모임에서도 고립되기 쉬웠고, 쇼와 40년대에 수바스 찬드라 보스의 위령제가 렌코지에서 개최되었을 때, 가와베를 비롯한 버마 전선의 구장관이나 참모들이 담소하는 가운데, 혼자 떨어져 하늘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모습이 보였다고 한다.[204]

이러한 생활 방식에 대해 무타구치는 1956년에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205]

전시 중에 격렬하게 대립했던 전 제31사단장 사토로부터도 계속 비판받고 있었고, 무타구치는 사토가 생존해 있는 동안에는 반론을 하지 않았다. 1958년 2월에 사토가 병사했을 때 무타구치는 고별식에도 참례하여 사토의 가족에게 토하자를 하고 “내가 잘못했다, 미안한 짓을 했다”고 사과했다.[206]

무타구치는 항상 고뇌하고 있었고, 그 생각을 토로한 적도 있었다.[204]

정신적인 고뇌로 인해 신체적으로도 이상을 일으켰고, 버마 종군 관계자가 모여 1년에 한 번 개최되었던 버마회라는 모임에서 무타구치는 도중에 심한 경련에 걸려 자리를 뜨게 되었는데, 의사의 진찰 결과 “수년에 걸친 정신적 고뇌가 원인”이라고 진단받았다.[207] 그러한 은둔 생활을 전후 17년 동안 계속했지만, 1962년에 무타구치의 생활을 일변시키는 사건이 일어난다.[208]

무타구치는 은둔 생활을 계속하면서도 내심으로는 “임팔 작전이 전략적으로 타당한 것이었는지, 또 작전 자체가 정말로 무모한 것이었는지”, “나는 나 자신에 의해 다시 한번 그것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것을 확인하지 않으면 나는 죽을 수 없다. 지옥조차 갈 수 없다”는 생각을 계속 품고 있었다.[204] 그런 무타구치에게 1962년이 되어 임팔 작전 당시 참모 아서 바커 중좌(최종 계급은 대좌)로부터 편지가 도착했다. 바커는 일부러 영국 대사관을 통해 무타구치의 주소를 조사해서 편지를 보냈는데, 바커는 버마 작전 당시 참모로서 작전에 종군했던 것도 있어서 「델리로의 진군」이라는 버마 전기 출판을 위해 무타구치에게 취재를 요청한 것이었다.[209] 바커의 편지에는, 이미 언급했듯이, 디마푸르 공략과 그 후의 아쌈 주로의 침공이 가능했던 점과, “귀전(무타구치)의 뛰어난 지휘 아래 일본군의 인도 공략 작전은 90% 성공했습니다”라는 칭찬의 말과, 작전에 대한 몇 가지 질문도 적혀 있었다.[164] 바커는 영국군 사령부 내부를 자세히 관찰해 왔기 때문에, 버마 작전 당시 영국군의 작전 지휘에 대해 냉정하다기보다는 오히려 비판적이었고, 임팔 작전의 선발전이 된 제2차 아카브 작전에 대해서도, 당시 영국군 사령부가 대승리라며 기뻐했던 것을 떠올리며 “영국군 5개 사단과 풍부한 항공 전력이 일체가 되어 일본군 단 1개 사단의 침입을 저지했을 뿐인데다 사상자는 영국군이 더 많았다”고 신랄하게 평가했다.[210]

전후 오랫동안 아무에게도 귀 기울여지지 않았던 패전 장군 무타구치는 예상치 못했던 옛 적의 높은 평가에 의해, 좋지 않았던 건강도 회복하고, 바커와 7차례에 걸쳐 편지를 주고받았다. 처음에는 “사토 중장이 고인이 된 오늘, 그를 책망하는 것은 정으로 참을 수 없다”고 망설였지만, 무타구치의 후임인 제18사단장이었던 타나카 신이치로부터 “마음은 이해합니다만, 진상을 전하는 전사를 잘못 기록하는 것은 도의에 어긋나므로, 사실을 왜곡하지 않고 진상을 있는 그대로 쓰시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설득당해[211] 자신의 작전의 정당성을 주장하게 되었다.[212]

무타구치로부터 답장을 받은 바커도, 당시 코히마와 디마푸르의 방위를 지휘했던 사령관을 포함하여, 임팔 작전에 종군했던 영국군 지휘관들과 오랫동안 논의한 결과, 무타구치의 디마푸르 진격 명령을 철회시킨 가와베를 “융통성 없는 인물이었다”고 평가하고, 그 뜻을 다시 답장해서 무타구치의 자신감을 더욱 깊게 했다.[213]

전후 오랫동안 “무모한 신내림 장군” 등으로 불리며 “저걸로 무타구치가 잘 살아있네”라며 욕을 먹어왔던 무타구치는, 지금까지의 울분을 푸는 것처럼 적극적으로 이 주장을 하게 되었다. 전우회와 방위대학교에도 나가서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고,[214]『마루』1964년 12월 1일호에서 작가 야마오카 소하치와의 대담에서는 “겨우 코히마를 빼앗고 디마푸르로 가라는 명령을 내렸는데도 불구하고, 가와베 씨가 막았다. 철회를 명령했다. 그 철회를 명령한 시기가 정말 유일한 승산이었다”라며 가와베와 사토를 비판하고 있다.[215][216] 후년에는 작가 타카기 토시로의 버마 전선 논픽션 소설을 출판하고, 철저하게 무타구치를 비판하는 잡지 출판사 분게이슌주[217], 잡지 「분게이슌주」1963년 9월호 지면에서도 무타구치는 “사토 코토쿠 중장에게 즉시 후퇴하는 적을 추격하여 디마푸르로 돌진하라고 명령했다”고 하지만 “이 명령은 k(가와베) 방면군 사령관에 의해 삭제되었다. 이것은 내가 지금도 아쉽게 생각하는 바이다”“디마푸르로의 진격은 우리 제15군에 부과된 작전 임무를 초월하는 것이며, k(가와베) 방면군 사령관이 나의 계획을 승인하지 않았던 것도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불행하게도 승패의 원인은 하나에 달려 여기에 있었다고 생각한다”고 주장하고 있다.[218] 또, 전 주독일특명전권대사오시마 히로시에게 소개받은 작가 사가라 슌스케에게 무타구치는 “사가라 씨! 부탁합니다. 이 무타구치를 남자로 만들어주십시오”라며 자신의 주장을 널리 알려달라고 간청하기도 했다.[204]

국립국회도서관구술 역사의 일환으로 루거우차오 사건에 대한 증언 녹음을 무타구치에게 요청했고, 1963년 4월 23일과 1965년 2월 18일에 그 녹음이 실시되었을 때, 무타구치는 2번째 녹음에서 국립도서관이 요청한 주제와는 다른 임팔 작전의 회상에 대해서도 이야기했고, 이때 이야기한 내용과 바커와의 서신 왕복을 정리한 『1944년 우호 작전에 관한 국회도서관에서의 설명 자료』라는 자료를 직접 작성하여, 매스컴 관계자와 구 군 관계자에게 배포했다.[219] 그 소책자에서 임팔 작전 실패에 대한 무타구치의 분석은 다음과 같다.[220]

# 남방군의 개입으로 작전 전력이었던 제15사단의 버마 도착이 늦어 작전 개시까지 사단 전 전력이 갖춰지지 않았다.

# 보급이 어려운 이 작전에서는, 식량이나 탄약 등은 “적의 양식으로 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며, 과감한 작전 지휘가 필요하다. 과감한 작전 지휘는 위험을 수반하지만, 제31사단의 미야자키는 그것에 성공했다.

# 독창적인 전법을 취하는 이 작전에서는, 전투 지휘관의 지휘력이 필요하며, 확고한 전적을 가진 지휘관을 선발해야 했다. 제33사단도 실전 경험이 부족한 야나이다가 아니라, 처음부터 야나이다의 후임이었던 만주 사변의 맹장 타나카 노부오 중장을 사단장으로 해야 했다. 또, 제31사단도 사토가 아니라 미야자키가 사단장이었다면, 사단장의 군기 문란도 없었을 것이다.

# 최고 지휘자인 면전군 사령관에는 우유부단한 가와베가 아니라, 만인이 인정하는 확고한 신념을 가진 인물이어야 했다. 사령관에게는 스스로 대본영에 가서라도 증원을 실현시키는 기세가 필요했지만, 가와베는 루거우차오에서도 이 작전에서도 지휘력의 약점이 인정되었다.

# 영국군은 측면으로부터의 위험 감지가 민감하다는 군대의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그 약점을 명심하고 실전에 활용해야 했다.

비판받은 가와베는 전후 상당 기간이 경과해도 임팔에서의 실책을 후회하는 무타구치를 보고 “아직도 그런 것으로 고민하고 있는가”라고 탄식한 후, 임팔에서의 패전의 책임은 두 가지가 있었다고 지적하고, 그 중 하나가 그렇게 쇠퇴한 것을 알면서 중간에 작전을 중지하지 않았던 것이며, 그 점에 대해서는 무타구치보다 자신을 더 책망해도 좋다고 말하고 있다.[225] 또, 고별식에서 무타구치에게 토하자로 사과받은 사토의 가족은, 그 후에 무타구치가 사토를 비판하는 주장을 시작했기 때문에, “죽은 사람에게 입이 없다”며 억울해했다고 한다.[206] 한편, 임팔 작전에서 끝까지 맹렬하게 싸운 제31사단 제31보병단의 단장 미야자키 시게사부로 소장은, 자신에게 소병력만 남겨두고 독단적으로 철수한 사토를 비판했기 때문에, 전후에도 무타구치와 친교를 계속했고, 미야자키도 코히마 점령 후 디마푸르로의 침공을 사토로부터 명령받지 못한 것에 대해 오랫동안 의문을 느끼고 있으며, 무타구치의 디마푸르 진격 명령은 옳았다고 말하며, 무타구치의 작전 정당화를 뒷받침했다.[167]

무타구치의 작전 정당화 주장은 무타구치를 좋게 생각하지 않는 자들로부터 자기 변호로 여겨져 격렬하게 비판받게 되었다. 하지만 무타구치의 생각은 자기 변호가 아니라 “전쟁을 한 자는 항상 그 적측의 문제를 정확하게 평가해야 한다. 전사를 쓸 때 ‘언덕의 반대편’에 대해 냉정한 배려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어디까지나 작전을 객관적으로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었지만, 이것을 당사자인 무타구치가 하려고 했기 때문에, 스스로 반성하지 않는다고 오해받고, 처신의 서투른 점도 화가 되어 자기 변호를 하고 있다는 격렬한 비판을 초래하게 되었다.[227]

작전 정당화에 힘쓰던 무타구치였지만, 임팔 작전의 기억을 더듬으면 눈물짓는 경우도 많았다.[215] 이미 언급한 잡지 『마루』1964년 12월 1일호에서 작가 야마오카와의 대담에서는, 화제가 임팔 작전에 이르자, 무타구치의 양 눈에서 갑자기 큰 눈물이 쏟아졌다. 그때까지와는 완전히 달라진 무타구치의 모습을 보고, 야마오카와 잡지 『마루』 편집장 타카조우 하지메는 깜짝 놀라 무타구치의 안부를 걱정했지만, 잠시 울고 나서 대담을 재개했다. 타카조우는 많은 구 일본군의 제독과 장관들과 대담해 왔지만, 이때의 무타구치의 모습이 가장 강하게 인상에 남았다고 한다.[228] 후일에 타카조우는 이때의 이야기를 친했던 “대공의 사무라이”인 사카이 사부로에게 이야기했지만, 사카이는 자신의 경험을 떠올리며 “중단되었던 기억이 대담 자리에 앉자마자 한꺼번에 되살아났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229] 타카조우는 이 무타구치의 눈물을, 작전에서 전사한 병사들에 대한 애석한 마음과, 비난이 빗발치던 반생을 되돌아보는 것이었다고 추측하고, 기사 제목을 “귀장군의 눈물”이라고 했다.[215]

3. 논란과 비판

영국의 역사학자 프랭크 맥클린(Frank McLynn)은 무타구치를 "괴짜", "무모한", "광신자"라고 묘사하며, 임팔 전투에서 병사들에게 겨우 20일 치 식량만 제공한 그의 결정을 비판했다.[5] 이로 인해 전투 전에 일본군은 9만 명 중 5만 5천 명이 굶주림으로 사망하는 참사를 겪었다.

뤄구차오 사건 당시, 무타구치는 베이징의 일본 대사관 관저에서 취침 중이었지만, 여단장 가와베 마사사부로가 톈진에 출장 중이어서 그 대리로 임명되어 있었다. 1937년 7월 8일 0시 무렵 이치키 키요나오로부터 전화 보고를 받고 병사 1명이 행방불명이라는 사태를 중시하여 즉시 반격을 허가했고, 이후 양군의 무력 충돌로 발전했다.[45] 무타구치는 중국 측 협상 위원에게 확인한 후 반격 명령을 내렸다고 주장한다.

이후 무타구치는 자신이 일중전쟁(중일전쟁)의 발단을 만들었다고 생각했으며, 훗날 임팔 작전 발안에도 이 생각이 강하게 영향을 미쳤다. 다만, 뤄구차오 사건이 중국 공산당의 모략이었다는 견해를 전제로 한다면, 이는 무타구치의 자의식 과잉으로 평가된다.[56]

1941년 12월 태평양 전쟁(대동아 전쟁)이 발발하자, 무타구치는 제18사단장으로 말레이 작전, 싱가포르 공략전의 지휘를 맡았다. 싱가포르 공략전에서 무타구치는 수류탄 파편에 부상을 입었지만,[80] 피투성이가 되면서도[59] 최전선에서 지휘를 계속했다.[80]

싱가포르 작전 중 제18사단은 비전투원에 대한 학살을 자행했다. 1942년 2월 14일에는 제18사단 부대가 알렉산드라 병원에 돌입하여 군의관 장교, 간호병, 부상병을 학살했다.[104]

싱가포르 공략 후 제25군은 각 사단에 치안 유지를 위해 화교 숙청을 명령했고, 제18사단도 조호르주에서 화교 학살을 실행했다.[110]

1942년 9월, 남방군이 21호 작전을 기획했을 때, 무타구치는 병참 부족을 이유로 반대하여 작전을 무기한 연기시켰다.[115][116] 그러나 무타구치는 인도 침공보다는 쿤밍에서 중경으로 침공하여 장제스를 타도하고 일중전쟁을 해결하려는 “쿤밍 작전”을 주장했다.[120]

임팔 작전 중지 후, 무타구치는 도조 히데키의 실각과 함께 해임되었다.[181] 이후 예비역으로 편입되었다가 다시 소집되어 육군예과사관학교장에 취임했다.[182] 그는 학생들에게 "인생은 돈이나 명예가 아니다.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는 것이다"라는 교육 방침을 내걸었다.[69]

소설가 다카기 도시로(Takagi Toshirō)는 전후 무타구치가 참전 용사 장례식에서 자신이 전투에서 승리했다는 내용의 팸플릿을 배포했다고 주장했으나, 2022년 한 군사 역사가는 이것을 날조라고 밝혔다.[6]

3. 1. 독단적 지휘와 부하와의 갈등

무타구치 렌야는 "괴짜", "무모한", "광신자"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독단적인 지휘 스타일을 보였다. 특히 임팔 전투에서 겨우 20일 치 식량만 제공하여 병사들의 87%가 사망하는 참사를 초래했다.[5]

일夕회에 참가한 무타구치는 참모본부 총무부 서무과장으로 발탁되어 인사권을 쥐게 되었는데, 이때의 경험이 독선적인 인사 스타일의 토대가 되었다고 한다.[29] 그는 사람을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심했고, 자질이 떨어진다고 판단되는 자에게는 철저히 냉담하게 대했다.[29]

황도파에 속했던 무타구치는 육군 내 파벌 싸움에 휘말리게 된다. 5・15 사건 실행범 중 한 명과 교류가 있었고, 아이자와 사건에서는 주범을 옹호하는 증언을 하기도 했다.[31]

사토 코토쿠와의 악연도 이 시기에 시작되었다. 벚꽃회 동지였던 두 사람은 파벌이 갈리면서 대립하게 되었고, 사토는 무타구치가 자신을 좌천시키고 감시했다고 의심하며 불신감을 키웠다.[32] 이는 훗날 임팔 작전에서 일본 육군 사상 최초의 항명 사건으로 이어진다.[33]

2・26 사건 이후 황도파가 숙청되면서 무타구치는 북경 주둔 보병 대장으로 좌천되었지만, 오히려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며 야전 지휘관으로서의 새로운 군 생활을 시작했다.[36] 그는 부하들에게 친절하게 대하고, 오해로 질책한 중대장을 찾아가 사과하는 등 인간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37]

중국 주둔 보병 제1연대 연대장 시절, 무타구치는 펑타이 사건 처리를 위한 중국 측과의 협상에서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그는 중국 측의 사과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에 대한 모욕이라며 추가적인 요구를 했고, 이는 중국인의 신경을 거스르는 행동이었다.[39]

뤄구차오 사건 당시, 무타구치는 중국군의 발포를 적대 행위로 간주하고 즉각 반격을 허가하여 양군의 무력 충돌을 야기했다.[45] 상관인 가와베 마사사부로는 무타구치의 독단을 허용하고, 자신의 명령으로 공격한 것처럼 꾸며 무타구치는 처벌받지 않았다.[57]

버마 전투에서 무타구치는 뎅기열에 감염되었음에도 최전선에서 부대를 독려하며 맹진격을 이끌었다.[114] 그러나 21호 작전에 대해서는 병참 부족을 이유로 반대하며 냉정한 전략적 안목을 보이기도 했다.[115]

임팔 작전 중지 시기, 무타구치는 도조 히데키의 지원을 받았으나, 도조의 실각과 함께 해임되었다.[181] 이후 예비역으로 편입되었다가 다시 소집되어 육군예과사관학교장에 취임했다.[182]

제15군 사령관 시절, 무타구치는 자신에게 엄격했던 만큼 다른 사람에게도 엄격함을 요구하는 비타협적이고 편집적인 성격을 보였다.[256] 그는 농담을 즐겨 했지만, 때로는 부적절한 발언으로 주변을 당황하게 만들기도 했다.[257]

임팔 작전에서 무타구치는 제33사단장 야나기다 겐조를 노골적으로 무시하고, 제15사단장 야마우치 마사후미에게는 무능하다고 비난하며 해임하는 등 독단적인 지휘로 부하들과의 갈등을 심화시켰다.[176], [262] 작전 실패 후에는 자결을 언급하기도 했지만, 실행하지 않았다.[268]

작전 중지 후, 무타구치는 철수를 서두르면서도 정작 자신은 안전한 곳으로 이동하여 부하들의 불신을 샀다.[274] 그는 군 사령관 해임 전까지 낚시를 하며 소일했고, 성격도 이전과 달리 많이 누그러졌다고 한다.[275]

3. 2. 전쟁 범죄

무타구치 렌야는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A급 전범으로 체포되었으나, 루거우차오 사건에 대해서는 심문받지 않았다. 1946년 BC급 전범 혐의로 싱가포르로 이송되어 창이 감옥에 수감되었다. 이곳에서 알렉산드라 병원 사건과 싱가포르 화교 숙청 사건 등 전쟁 범죄에 대한 조사를 받았으나, 주요 증인이 사망하는 등의 이유로 기소되지 않았다.[187]

알렉산드라 병원 사건의 경우, 무타구치는 영국군 측에 자신이 사건과 무관하며 병원 방문은 부상병 위문 목적이었다고 주장했다.[196] 영국군은 학살 사실과 무타구치의 연관성을 증명하지 못해 기소하지 못했다.[196]

싱가포르 화교 숙청 사건과 관련하여, 제18사단은 조호르주에서 치안 유지 명목으로 화교 학살을 자행했다.[110] 무타구치는 학살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지만,[191] 제18사단 참모들은 기소되지 않았고 무타구치는 조사조차 받지 않았다.[197]

1948년 석방된 무타구치는 일본으로 귀국하여 여생을 보냈다. 그는 패전의 책임을 통감하며 변명하지 않고 전몰자 위령에 힘썼다.[200] 전사자 유족들에게 사죄하고,[201] 자결 권유까지 받는 등[204] 고립된 생활을 했다. 그는 임팔 작전 패전의 책임을 지고 침묵을 지켰으며, 정신적 고뇌로 인해 건강 이상을 겪기도 했다.[207]

3. 3. 역사 왜곡과 자기 합리화

프랭크 맥클린(Frank McLynn)은 무타구치를 "괴짜", "무모한", "광신자"라고 묘사하며, 임팔 전투에서 병사들에게 겨우 20일 치 식량만 제공한 그의 결정을 비판했다.[5] 이로 인해 일본군은 9만 명 중 5만 5천 명이 굶주림으로 사망하는 참사를 겪었다.

전후 무타구치가 참전 용사 장례식에서 자신이 전투에서 승리했다는 내용의 팸플릿을 배포했다는 주장이 있었으나, 이는 날조로 밝혀졌다.[6]

무타구치는 뤄구차오 사건을 자신이 일중전쟁(중일전쟁)의 발단을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는 훗날 임팔 작전 발안에도 이 생각이 강하게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하지만 뤄구차오 사건이 중국 공산당의 모략이었다는 견해를 전제로 한다면, 이는 무타구치의 자의식 과잉으로 평가된다.[56]

무타구치는 전후에도 임팔 작전이 전략적으로 타당했고, 작전 자체가 무모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옛 영국군 참모 아서 바커와의 서신 교환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려 했다. 그는 제31사단장 사토 고토쿠가 코히마 점령 후 디마푸르로 진격하지 않은 것과 가와베 마사카즈 군 사령관이 자신의 진격 명령을 철회한 것을 비판했다.[215][216]

무타구치는 임팔 작전 실패의 책임을 부하들의 무능함으로 돌리며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했지만, 이는 많은 비판을 받았다. 그는 작전의 객관적 평가를 주장했지만, 당사자로서의 반성이 부족하다는 오해를 샀다.

4. 평가

무타구치 렌야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린다. 임팔 작전에서의 무모한 지휘와 그로 인한 참혹한 결과는 비판의 주된 대상이지만, 일부에서는 그의 용맹함과 전략적 판단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전후 무타구치는 임팔 작전의 실패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그는 옛 적이었던 영국군 장교 아서 바커와의 서신 교환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려 했다.[212] 바커는 무타구치의 지휘를 칭찬하며, 디마푸르 공략 가능성을 언급했다.[164] 이러한 평가는 무타구치에게 큰 힘이 되었고, 그는 자신의 주장을 더욱 적극적으로 펼치게 되었다.

그러나 무타구치의 이러한 태도는 자기 변호라는 비판을 받았다. 많은 이들이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오히려 임팔 작전의 희생자들을 모욕하는 행위로 간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타구치는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으며, 죽을 때까지 임팔 작전의 정당성을 옹호했다.[233]

무타구치는 임팔 작전의 기억을 떠올릴 때면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215] 이는 작전 실패에 대한 죄책감과 회한의 표현으로 해석될 수 있다.

4. 1. 부정적 평가

무타구치 렌야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그의 군 경력, 특히 임팔 작전에서의 지휘와 관련된 문제점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영국 역사가 프랭크 맥클린(Frank McLynn)은 무타구치를 "괴짜", "무모한", "광신자"라고 묘사하며, 거의 4개월 동안 지속된 임팔 전투에서 병사들에게 겨우 20일 치 식량만 제공한 그의 결정을 비판했다.[5] 이로 인해 일본군은 9만 명 중 5만 5천 명이 굶주림으로 사망하는 참사를 겪었으며, 결국 그의 병사들 중 1만 2천 명만이 일본으로 돌아와 87%의 사상률을 기록했다.

임팔 작전의 실패는 무타구치의 독단적인 지휘와 현실 인식 부족에서 비롯되었다고 평가된다. 특히, 그는 보급 문제의 심각성을 간과하고, 부하 지휘관들의 의견을 무시하는 경향을 보였다. 사토 고토쿠 중장과의 갈등은 이러한 문제점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사토는 무타구치의 명령에 불복종하고 독단적으로 철수했는데, 이는 일본 육군 사상 최초의 항명 사건으로 기록되었다.[33]

전후 무타구치는 임팔 작전의 실패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작전이 옳았다고 주장하며 부하들의 무능함을 탓했다. 그는 옛 적이었던 영국군 장교 아서 바커와의 서신 교환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려 했지만, 이는 오히려 자기 변호라는 비판을 받았다.[212]

무타구치는 싱가포르 점령 후 화교 학살을 자행했다는 의혹도 받고 있다. 그는 알렉산드라 병원 사건에 연루되어 전범으로 체포되기도 했다.[109]

종합적으로 볼 때, 무타구치 렌야는 용맹한 장군으로 칭송받기도 했지만, 그의 독단적이고 현실 인식 부족한 지휘는 임팔 작전의 실패와 많은 병사들의 희생을 초래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4. 2. 일부 긍정적 평가

무타구치는 은둔 생활을 하면서도 임팔 작전이 전략적으로 타당했는지, 작전 자체가 정말로 무모했는지 확인하고 싶어 했다.[204] 1962년, 당시 영국군 제4군단 참모였던 아서 바커 중좌(후에 대좌)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바커는 버마 작전 관련 서적 출판을 위해 무타구치에게 취재를 요청했다.[209] 바커는 편지에서 디마푸르 공략과 아삼 주 침공 가능성을 언급하며, "귀전(무타구치)의 뛰어난 지휘 아래 일본군의 인도 공략 작전은 90% 성공했습니다"라고 칭찬했다.[164] 바커는 영국군 사령부 내부를 관찰하며 당시 영국군의 작전 지휘에 비판적이었고, 제2차 아카브 작전에 대해서도 "영국군 5개 사단과 풍부한 항공 전력이 일본군 단 1개 사단의 침입을 저지했을 뿐, 사상자는 영국군이 더 많았다"고 평가했다.[210]

전후 오랫동안 비판받던 무타구치는 옛 적의 높은 평가에 건강을 회복하고 바커와 7차례 편지를 주고받았다. 처음에는 망설였지만, 후임 제18사단장 타나카 신이치의 설득으로[211] 자신의 작전 정당성을 주장하게 되었다.[212] 무타구치는 미야자키 시게사부로가 코히마 고지를 점령한 것을 히토츠야의 전투에서 미나모토노 요시이에가 사용한 “볏짚산의 역낙하”에 비유하며, 영국군이 당황했을 때 더 진격했더라면 디마푸르까지 갈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바커는 당시 코히마와 디마푸르 방위를 지휘했던 사령관을 포함한 영국군 지휘관들과 논의한 결과, 무타구치의 디마푸르 진격 명령을 철회시킨 가와베를 “융통성 없는 인물이었다”고 평가했다.[213]

무타구치는 전우회와 방위대학교에 나가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고[214], 『마루』 1964년 12월 1일호에서 작가 야마오카 소하치와의 대담에서 가와베와 사토를 비판했다.[215][216] 분게이슌주[217] 잡지 「분게이슌주」 1963년 9월호에서도 “사토 코토쿠 중장에게 즉시 후퇴하는 적을 추격하여 디마푸르로 돌진하라고 명령했다”고 하지만 “이 명령은 k(가와베) 방면군 사령관에 의해 삭제되었다."고 주장했다.[218]

국립국회도서관구술 역사 프로젝트로 임팔 작전에 대해 이야기하며, 『1944년 우호 작전에 관한 국회도서관에서의 설명 자료』를 직접 작성하여 배포했다.[219] 이 자료에서 무타구치는 임팔 작전 실패에 대한 자신의 분석을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220]

# 남방군의 개입으로 제15사단의 도착이 늦어져 작전 개시까지 전력이 갖춰지지 않았다.

# 보급이 어려운 이 작전에서는 식량, 탄약 등을 “적의 양식으로 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며, 과감한 작전 지휘가 필요했다.

# 독창적인 전법을 사용하는 이 작전에서는 전투 지휘관의 지휘력이 필요하며, 확고한 전적을 가진 지휘관을 선발해야 했다.

# 최고 지휘자인 면전군 사령관은 우유부단한 가와베가 아니라 확고한 신념을 가진 인물이어야 했다.

# 영국군은 측면으로부터의 위험 감지가 민감하다는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비판받은 가와베는 임팔에서의 실책을 후회하는 무타구치를 보고 “아직도 그런 것으로 고민하고 있는가”라고 탄식하며, 임팔에서의 패전 책임 중 하나는 쇠퇴한 것을 알면서 중간에 작전을 중지하지 않았던 것이라고 말했다.[225] 한편, 임팔 작전에서 끝까지 싸운 미야자키 시게사부로 소장은 무타구치와 친교를 계속했고, 무타구치의 작전 정당화를 뒷받침했다.[167]

무타구치의 작전 정당화 주장은 자기 변호로 여겨져 비판받았지만, 무타구치는 “전쟁을 한 자는 항상 그 적측의 문제를 정확하게 평가해야 한다"는 객관적인 평가를 하려던 것이었다.[227] 작전 정당화에 힘쓰던 무타구치였지만, 임팔 작전의 기억을 더듬으면 눈물짓는 경우도 많았다.[215] 『마루』 1964년 12월 1일호에서 작가 야마오카와의 대담에서 임팔 작전 이야기가 나오자 눈물을 흘렸다.[228]

해외 평가는 무타구치 개인보다는 임팔 작전을 지휘한 버마의 일본군 상층부 전체에 대한 비판이 많다. 영국군 제14군 사령관 윌리엄 슬림 중장은 회고록에서 일본군의 버마 작전을 비판하며, 일본군 지도자의 근본적인 결함은 도덕적 용기의 결여라고 지적했다.[162]

군사사 연구가 존 페리스는 동남아시아에서 일본과 영국군의 전투는 제2차 세계대전 중 가장 일방적인 전투가 되었고, 대전 후기 버마 전투는 버마의 일본군 장군의 무능과 영국군의 물량에 의해 영국군의 압승으로 끝났다고 평가했다.[303]

무타구치 개인에 대한 평가로, 코히마 전투에 영국군 사관으로 종군한 아서 스윈슨은 "그(무타구치)는 직업 군인 중에서도 드문 남자로, 진실로 전투를 좋아하고, 두려워하지 않고, 기세등등하게 난전에 뛰어드는 성격이었다"고 평가했다.

윙게이트 여단(en) 참모장 데릭 털록 소장은 무타구치의 작전 지도가 부당하게 낮게 평가되고 있다고 하며, 임팔 작전 이외의 주요 전투에서는 승리했고, 임팔 작전에서도 워털루 전투처럼 아슬아슬한 전투를 선전했다고 높이 평가했다.[305] 털록은 무타구치가 사무라이의 행동 규범을 강렬하게 신봉하고, 단호한 결의와 용기를 가지고 공격하는 것에 집착했다고 평가했다.[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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