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부 도시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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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난부 도시타다는 모리오카 번의 10대 번주이다. 8대 번주의 장남으로 태어났지만 상속받지 못하고 승려가 되었다가 환속하여 번주가 되었다. 그는 번의 재정 개선을 위해 개혁을 추진했지만, 급진적인 정책과 불통으로 인해 가신과 농민들의 반발을 샀다. 결국 아들에게 번주 자리를 물려주고 은퇴했지만, 은퇴 후에도 번정에 개입하여 갈등을 빚었고, 막부의 개입으로 가택 연금 중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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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부 도시타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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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사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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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본명 | 난부 도시타다 (南部利済) |
출생 | 1797년 10월 18일 |
출생지 | 모리오카, 일본 |
사망 | 1855년 5월 29일 |
사망지 | 에도, 일본 |
국적 | 일본 |
다른 이름 | 겐타마루 (源太丸, 유년기 이름) 긴메이 (謹明) 노부치카 (信親) 리사이 (利済) 조유 (浄祐, 호) |
통칭 | 슈리 (修理), 슈레이 (修礼) |
관직 | |
관위 | 종4위하 시나노노카미, 근위부 좌소장 |
주군 | 도쿠가와 이에나리 → 도쿠가와 이에요시 |
가문 | 난부 씨 → 산노헤 씨 → 난부 씨 |
가족 관계 | |
아버지 | 난부 도시노리 |
어머니 | 이시하라 씨 (세이쿄인, 아부라 고젠) |
양아버지 | 난부 도모치카 |
배우자 | 마쓰다이라 데루노부, 다카사키 번 번주의 딸 |
자녀 | 난부 도시요시 난부 도시타케 난부 히사에 난부 긴쇼 난부 다케히로 난부 노부카타의 아내 |
모리오카 번주 | |
직책 | 모리오카 번 번주 |
대수 | 12대 |
임기 | 1825년 ~ 1847년 |
이전 번주 | 난부 도시모치 (1803년) |
다음 번주 | 난부 도시토모 |
2. 생애
난부 도시타다는 모리오카 번의 11대 번주로, 재임 기간 동안 번정 개혁을 추진하고 여러 사건을 겪었다.
그는 모리오카 8대 다이묘 난부 도시카츠의 장남이었지만 상속받지 못한 난부 도시노리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사망하자 승려가 되었으나, 번의 명령으로 환속하여 어린 난부 도시모치의 고문으로 활동하다가 도시모치의 후계자로 임명되었다. 난부 도시모치는 건강이 좋지 않아 1825년에 사망했고, 그의 유언에 따라 도시타다는 모리오카의 다이묘가 되었다. 그는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에게 알현하고, 여러 관직을 거쳤다.
도시타다는 번의 재정난을 해결하기 위해 광범위한 재정 개선을 시행하고, 새로운 산업을 후원하며, 군사력을 강화했지만, 여러 차례 반란에 직면했다. 가신들의 불만과 농민 반란이 일어났다.
결국, 그는 아들에게 번주 자리를 물려주었지만, 아들과의 불화로 번정에 계속 간섭하다 막부의 개입으로 가택 연금되었고, 얼마 후 사망했다.[1]
2. 1. 출생과 출가
난부 도시타다는 간세이 9년 (1797년 10월 18일) 모리오카에서 8대 다이묘 난부 도시카츠의 장남이었지만 상속받지 못한 난부 도시노리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평민 출신으로 칠기 장인의 과부였기 때문에 '기름 어전'이라고 불렸다. 이러한 출신 배경으로 인해 도시타다가 난부 가문의 혈통이 아니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1]분카 11년 (1814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조도 신슈 간쿄지에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1]
2. 2. 환속과 번주 취임
분세이 3년(1820년), 번 정부의 명령으로 환속하여 '''산노헤 슈레이'''라 칭했고, 이듬해에는 난부 씨를 칭하는 것을 허락받았다.[1] 분세이 5년(1822년), 병약했던 번주 난부 도시모치는 만약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길 경우 슈레이에게 번주를 상속하도록 막부에 요청했다.[1]분세이 8년(1825년) 9월 24일, 난부 도시모치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그의 요청대로 모리오카 번의 11대 번주로 취임했다.[1] 같은 해 12월 1일, 11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에게 알현하고, 12월 16일 종4위하 시나노노카미에 임명되었다.[1] 분세이 10년(1827년) 12월 16일에는 지주(시종)로 승진했고,[1] 덴포 10년(1839년) 12월 18일 사쇼쇼(좌소장)로 승진했다.[1]
2. 3. 번정 개혁과 반발
도시타다는 번 재정 개선을 위해 광범위한 개혁을 시행하고, 새로운 산업을 육성하며, 번의 군사력을 강화했다. 그러나 그의 급진적인 개혁과 번의 열악한 재정 상황은 가신들의 불만을 야기했고, 1836년에는 농민 반란(난부 난포 잇키)이 발생했다.[1]1841년 번교를 메이기도(明義堂)로 개명하였다.
2. 4. 아들과의 갈등과 은퇴
고카 4년 (1847년)에 그의 통치에 반대하는 대규모 반란(제1차 산헤이이키)이 발생했다.[1] 가에이 원년 (1848년) 6월 13일에 장남 도시토모(도시요시)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은퇴했다. 그러나 도시토모와의 관계는 세자 시절부터 매우 험악했고, 도시타다는 은퇴 후에도 번정에 계속 개입했다.[1] 가에이 2년 (1849년)에는 도시토모를 폐하고, 그의 동생 도시히사(도시타케)를 번주로 삼아 1854년까지 원정을 펼쳤다.2. 5. 막부 개입과 최후
도시타다의 전횡은 1854년 또 다른 대규모 반란(제2차 산헤이이키)을 야기했고, 결국 도쿠가와 막부가 개입하게 되었다.[1] 막부는 도시타다에게 에도 시모야시키에서의 가택 연금을 명령했고, 도시타다는 1855년 5월 29일 가택 연금 중에 사망했다.[1]3. 인물 및 평가
난부 도시타다는 사치스러운 취향과 여색을 밝혔다는 평판을 받았다.[1] 처음에는 '근명'이라 칭했으며, 아들들에게 아버지 도시사다의 휘(이름)의 한 글자(편휘)를 붙이는 등, 적자이면서도 폐적된 아버지에게 효를 다하고자 하였다. 나가우타 명곡 '가을의 색종'(작곡: 10대 키네야 로쿠자에몬)의 가사를 썼다고 전해진다.[1]
도시타다는 재정 개선, 새로운 산업 후원, 번의 군사력 개선 등의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와 번의 열악한 재정 상태는 가신들의 불만을 야기했고, 1836년에는 농민 반란으로 이어졌다. 1847년에는 그의 통치에 반대하는 광범위한 반란이 발생했다. 1848년 아들 난부 도시토모에게 자리를 물려주었으나, 부자 관계는 최악이었고, 도시타다는 은퇴 후에도 번 정치에 계속 간섭했다. 1848년, 그는 아들을 제쳐두고 도시토모의 동생인 난부 도시히사를 명목상 다이묘로 세우고 실질적인 통치를 계속했다. 이로 인해 1854년에 또 다른 반란이 발생했고, 도쿠가와 막부가 개입하게 되었다.[1]
4. 관직 및 위계 이력
5.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
아버지 | 난부 도시노리 |
어머니 | 오요네노카타 (세이칸인, 이시하라 씨, 아부고젠) |
양부 | 난부 도시토시 |
정실 | 마사코(아사코) - 난부 도시타카의 양녀, 마쓰다이라 테루노부의 딸 |
계실 | 렛코 - 나라야마 다카쿠니의 여동생 |
측실 | 호주인 |
측실 | 아오키 치요코 |
측실 | 코데라 히데코 |
측실 | 요시 |
측실 | 무라세 치에 |
참조
[1]
서적
用語南部盛岡藩辞典 (Yogo Nanbu Morioka-han jiten)
Toyo Shoin
[2]
문서
『日本人名大辞典』及び『岩手県史』参照
[3]
문서
文政8年の江戸武鑑参照
[4]
문서
須原屋版の文政[[武鑑]]では「利用の養女」と表記されていた。
[5]
문서
『岩手県史』および武鑑、『日本人名大辞典』では利剛と謹敦を同一人物とす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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