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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부 시게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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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난부 시게나오는 에도 시대 초기의 다이묘로, 모리오카 번의 2대 번주이다. 1606년에 태어나 1632년 아버지 난부 도시나오의 사망으로 가문을 계승했다. 모리오카성 축성 공사를 완성하는 등 번의 기반을 다지는 데 힘썼으며, 산킨코타이 지각으로 처벌받기도 했다. 1664년 사망했으며, 후계자 문제로 인해 동생들에게 영지가 분할 상속되었다. 네덜란드 선박 브레스켄스호 사건 당시 승무원들을 심문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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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부 시게나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난부 시게나오의 초상
본명남부 시게나오
출생1606년 4월 16일
출생지에도, 일본
사망1664년 10월 30일
사망지에도, 일본
묻힌 곳모리오카, 이와테현 성수사
국적일본
다른 이름통칭: 곤베이 (権平)
직함모리오카번 다이묘
이전난부 도시나오
이후난부 시게노부
배우자가토 요시아키의 딸
어머니가모 우지사토의 딸
아버지난부 도시나오
생애
시대에도 시대 전기
출생 (음력)게이초 11년 3월 9일 (1606년4월 16일)
사망 (음력)간분 4년 9월 12일 (1664년10월 30일)
관위종5위 하야마시로노카미
막부에도 막부
섬긴 군주도쿠가와 이에미쓰
이에쓰나
무쓰모리오카번 번주
씨족남부 씨
부모아버지: 난부 도시나오
어머니: 가모 우지사토의 딸, 다케히메
형제이에나오
마사나오
난부 시게나오
도시야스
시게노부
도시나가
나오후사
7히메
기타 나오치카
히가시 다네마사의 처
배우자정실: 가토 아키토시의 3녀
측실: 혼칸 진에몬의 여동생, 데이신인
측실: 기시모토 우에몬의 딸, 류코인
자녀양자: 가쓰나오
양자: 시게노부
계보 정보
가명곤베이 (権平)
계명즉성원전삼봉종현대거사 (即性院殿三峯宗玄大居士)
묘소이와테현모리오카시의 성수사
번주 정보
직책모리오카번 번주
대수2대
임기1632년 ~ 1664년
전임자난부 도시나오
후임자난부 시게노부

2. 생애

게이초 11년(1606년) 3월 9일, 에도 사쿠라다 저택에서 초대 번주 난부 도시나오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간에이 9년(1632년) 아버지 난부 도시나오가 사망하여 가독을 이었다. 조부 노부나오 시대에 착공한 모리오카성 축성 공사를 완성하는 등 모리오카번의 기반을 다지는 데 힘썼다. 성격은 격렬했다고 전해진다. 친아들이 없어서 막부에 열을 올려 후다이 다이묘가 되려고도 했다. 홋타 마사모리의 아들을 양자로 들여 가쓰나오라 칭하고 양육했으나, 가쓰나오는 양자 결연 직후 18세에 요절했다.

간에이 12년(1636년) 4월, 산킨코타이에 10일 늦게 도착하여 도쿠가와 이에미쓰의 노여움을 사, 다음 해까지 난부번 에도 저택에서 근신 처분을 받았다. 이는 전 해부터 무가 제법도에 의거하여 시작된 첫 산킨코타이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간분 4년(1664년) 9월 12일, 에도에서 향년 59세로 사망했다. 시게나오는 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쓰나에게 후계자 선정과 난부 가문의 존속을 사전에 요청했다. 시게나오 사후 이에쓰나는 재결정하여 시게나오의 동생 시치노헤 시게노부에게 2만 석을 삭감한 모리오카 8만 석을 주어 가문을 잇게 했다. 또한, 같은 동생인 나카자토 나오요시에게는 새롭게 하치노헤 2만 석을 주어 별가를 세우게 하여 사실상 분할 상속을 했다. 시치노헤 시게노부는 난부 시게노부로, 나카자토 나오요시는 난부 나오후사로 이름을 고쳤다.

1643년(간에이 20년) 7월 말, 네덜란드 선박 브레스켄스호의 승무원이 모리오카 번 영토 야마다우라에 상륙하여 체포되었다. 이를 "브레스켄스호 사건"이라고 부른다. 선장 이하 선원은 에도로 호송되었는데, 먼저 모리오카성으로 연행되었다. 선장 스하르프는 "...성벽이 있는 마을에 도착하여, 이 마을에서, 아마도 대영주나 작은 국왕 앞에 나아가기 위해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깨달았다. 다양한 나무가 있는 정원이나, 여러 가게가 늘어선 큰 거리가 있는 이 아름다운 마을을 지나, 마을 외곽에 있는 큰 저택의 나무로 된 높은 문 안의 별채로 안내되었다."|"...성벽이 있는 마을에 도착하여, 이 마을에서, 아마도 대영주나 작은 국왕 앞에 나아가기 위해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깨달았다. 다양한 나무가 있는 정원이나, 여러 가게가 늘어선 큰 거리가 있는 이 아름다운 마을을 지나, 마을 외곽에 있는 큰 저택의 나무로 된 높은 문 안의 별채로 안내되었다."nl라고 일기에 성하마치 모리오카의 인상을 기록했다.

번주 시게나오는 처음에는 그들을 밀항한 선교사가 아닌가 의심하여, 통역에게 포르투갈인, 스페인인, 프랑스인, 영국인, 덴마크인, 스웨덴인, 크레타인(그리스인)이 아닌가 질문하게 했다. 또한 십자가를 내밀어 기도하도록 했다. 그들은 이를 거부하고 네덜란드인이라고 답했으며, 황제(도쿠가와 쇼군)의 허가를 받아 나가사키에서 교역을 하거나, 매년 에도에서 황제를 배알하고 선물을 바치고 있다고 대답했다. 번주는 더욱 그들을 시험하기 위해, 후미에에 사용하는 성모 마리아가 그려진 동판을 내밀어, 여기에 입을 맞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선원들은 반대로 동판에 침을 뱉고, 이것을 부숴도 좋으냐고 물었다. 이를 들은 번주는 크게 웃으며, 그들이 선교사 등이 아님을 확인했다. 또한 선원 중 한 명은 실론 섬에서 포르투갈인에게 받은 상처를 보여주며, 포르투갈인은 이런 짓을 하는 우리의 원수라고 답했다. 이러한 어필은 번주에게 호감을 샀다. 그 후, 선원들은 2주 정도 모리오카에 머물며 정중한 대접을 받은 후, 에도로 출발했다. 스하르프의 일기에 따르면, 체류 중 그들의 신변을 돌보던 관리는 눈물을 흘리며 작별을 아쉬워했다고 한다.

2. 1. 가독 상속과 번정

게이초 11년(1606년) 3월 9일, 에도 사쿠라다 저택에서 초대 번주 난부 도시나오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간에이 9년(1632년), 아버지의 사망으로 가독을 이었다. 번정에서는 조부 난부 노부나오 시대에 착공한 모리오카성의 축성 공사를 완료하는 등 모리오카번의 기반을 다지는 데 힘썼다. 성격은 격렬했다고 전해진다. 친아들이 없어 막부에 열을 올려 후다이 다이묘가 되려고 했다고도 한다. 홋타 마사모리의 아들을 양자로 들여 가쓰나오라 칭하고 양육했으나, 가쓰나오는 양자 결연 직후 18세에 요절했다.

간에이 12년(1636년) 4월, 산킨코타이에 10일 늦게 도착하여 도쿠가와 이에미쓰의 노여움을 샀다. 이로 인해 다음 해까지 난부번 에도 저택에서 근신 처분을 받았다. 이는 전 해부터 무가 제법도에 의거하여 시작된 첫 산킨코타이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간분 4년(1664년) 9월 12일, 에도에서 사망했다. 향년 59세였다.

시게나오는 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쓰나에게 후계자 선정과 난부 가문의 존속을 사전에 요청했다. 시게나오 사후 이에쓰나는 재결정하여 시게나오의 동생 시치노헤 시게노부에게 2만 석을 삭감한 모리오카 8만 석을 주어 가문을 잇게 했다. 또한, 같은 동생인 나카자토 나오요시에게는 새롭게 하치노헤 2만 석을 주어 별가를 세우게 하여 사실상 분할 상속을 했다. 시치노헤 시게노부는 처음에는 하나와 시게마사라고 칭했으나 난부 시게노부로, 나카자토 나오요시는 난부 나오후사로 이름을 고쳤다.

2. 2. 성격과 야심

난부 시게나오는 성격이 격렬했다고 한다. 친아들이 없었고, 막부에 열을 올려 후다이 다이묘가 되려고 했다고도 한다. 그 때문에 홋타 마사모리의 아들을 양자로 들여 가쓰나오라고 칭하게 하여 양육했다(가쓰나오는 양자 연을 맺은 직후 18세에 요절했다).[1]

2. 3. 산킨코타이 지각 사건

1636년 4월, 시게나오는 산킨코타이에 10일 늦게 도착했다. 도쿠가와 이에미쓰의 노여움을 사, 다음 해까지 난부번 에도 저택에서 근신 처분을 받았다. 이는 전 해부터 무가 제법도에 의거하여 시작된 첫 산킨코타이에서의 일이었다.[1]

2. 4. 브레스켄스호 사건

1643년(간에이 20년) 7월 말, 네덜란드 선박 브레스켄스호의 승무원이 모리오카 번 영토 야마다우라에 상륙하여 체포되었다. 이를 "브레스켄스호 사건"이라고 부른다.[1]

선장 이하 선원은 에도로 호송되었는데, 먼저 모리오카성으로 연행되었다. 선장 스하르프는 "...성벽이 있는 마을에 도착하여, 이 마을에서, 아마도 대영주나 작은 국왕 앞에 나아가기 위해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깨달았다. 다양한 나무가 있는 정원이나, 여러 가게가 늘어선 큰 거리가 있는 이 아름다운 마을을 지나, 마을 외곽에 있는 큰 저택의 나무로 된 높은 문 안의 별채로 안내되었다."|"...성벽이 있는 마을에 도착하여, 이 마을에서, 아마도 대영주나 작은 국왕 앞에 나아가기 위해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깨달았다. 다양한 나무가 있는 정원이나, 여러 가게가 늘어선 큰 거리가 있는 이 아름다운 마을을 지나, 마을 외곽에 있는 큰 저택의 나무로 된 높은 문 안의 별채로 안내되었다."nl라고 일기에 성하마치 모리오카의 인상을 기록했다.[1]

번주 시게나오는 처음에는 그들을 밀항한 선교사가 아닌가 의심하여, 통역에게 포르투갈인, 스페인인, 프랑스인, 영국인, 덴마크인, 스웨덴인, 크레타인(그리스인)이 아닌가 질문하게 했다. 또한 십자가를 내밀어 기도하도록 했다. 그들은 이를 거부하고 네덜란드인이라고 답했으며, 또한 황제(도쿠가와 쇼군)의 허가를 받아 나가사키에서 교역을 하거나, 매년 에도에서 황제를 배알하고 선물을 바치고 있다고 대답했다. 번주는 더욱 그들을 시험하기 위해, 후미에에 사용하는 성모 마리아가 그려진 동판을 내밀어, 여기에 입을 맞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선원들은 반대로 동판에 침을 뱉고, 이것을 부숴도 좋으냐고 물었다. 이를 들은 번주는 크게 웃으며, 그들이 선교사 등이 아님을 확인했다. 또한 선원 중 한 명은 실론 섬에서 포르투갈인에게 받은 상처를 보여주며, 포르투갈인은 이런 짓을 하는 우리의 원수라고 답했다. 이러한 어필은 번주에게 호감을 샀다. 그 후, 선원들은 2주 정도 모리오카에 머물며 정중한 대접을 받은 후, 에도로 출발했다. 스하르프의 일기에 따르면, 체류 중 그들의 신변을 돌보던 관리는 눈물을 흘리며 작별을 아쉬워했다고 한다.[1]

2. 5. 사망과 후계 문제

난부 시게나오는 도쿠가와 이에쓰나에게 후계자 선정과 난부 가문의 존속을 사전에 요청했다. 시게나오 사후 이에쓰나는 재결정하여 시게나오의 동생인 시치노헤 시게노부에게 모리오카 8만 석을 주어 가문을 잇게 했고, 같은 동생인 나카자토 나오요시에게는 하치노헤 2만 석을 주어 별가를 세우게 하여 사실상 분할 상속을 했다. 시치노헤 시게노부는 난부 시게노부로, 나카자토 나오요시는 난부 나오후사로 이름을 고쳤다.[1]

3. 가계도

관계이름비고
아버지난부 도시나오1576년-1632년
어머니무히메(오타케노카타, 겐슈인)가모 우지사토의 딸
정실가토 요시아키의 셋째 딸, 후에 병약으로 이혼
측실테이신인혼칸 진에몬의 여동생
측실류코인기시모토 우에몬의 딸
양자난부 가쓰나오1642년-1659년, 홋타 마사모리의 다섯째 아들
양자난부 시게노부1616년-1702년, 난부 도시나오의 다섯째 아들


참조

[1] 서적 用語南部盛岡藩辞典 (Yogo Nanbu Morioka-han jiten) Toyo Shoin
[2] 간행물 寛永13年南部重直 参勤交代遅参事件の再検討」 http://www.komonjo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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