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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펠스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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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네펠스 전투는 1388년 4월 9일, 스위스 연방과 합스부르크 가문 간에 벌어진 전투이다. 젬파흐 전투 이후 스위스 연방이 비젠을 점령하고 글라루스가 합스부르크 지배에서 벗어나자, 오스트리아군은 네펠스를 공격했으나, 스위스군의 기습으로 패배했다. 이 전투에서 스위스군은 승리하여 영토를 확보하고, 7년 평화 조약을 통해 독립을 굳건히 했다. 네펠스 전투는 스위스 연방의 독립과 국가 정체성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으며, 매년 기념 순례가 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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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펠스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개요
1513년 루체른 실링에 묘사된 전투
1513년 《루체른 실링》에 묘사된 전투
전투네펠스 전투
일부스위스 연방 확장
날짜1388년 4월 9일
장소네펠스
결과스위스 승리
교전 세력
교전국 1구 스위스 연방


슈비츠
교전국 215px 오스트리아 공국
지휘관 및 지도자
교전국 2 지휘관[[File:Wappen Toggenburger2.svg|15px]] 도나트 폰 토겐부르크
병력 규모
교전국 1 병력약 400명
교전국 2 병력약 5,000명
사상자 규모
교전국 1 사상자54명
교전국 2 사상자수백 명

2. 배경

14세기 후반, 스위스 연방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에 맞서 독립을 추구하며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1386년 젬파흐 전투에서 스위스 연방이 승리한 후, 글라루스 칸톤은 합스부르크 가문에 대한 저항을 본격화했다. 1387년 3월 11일, 글라루스 의회는 합스부르크의 지배에서 벗어났다고 선언했다.[2]

2. 1. 스위스 연방의 봉기

젬파흐 전투 이후 몇 주 만에 스위스 연방은 발렌 호수에 있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마을인 비젠을 점령했다.[2] 그 다음 해, 글라루스는 합스부르크 가문에 대항하여 봉기하여 빈데크 성을 파괴했다. 1387년 3월 11일, 글라루스 의회는 합스부르크의 지배에서 벗어났다고 선언했다.

2. 2. 합스부르크의 반격

젬파흐 전투 이후 몇 주 만에 스위스 연방은 발렌 호수에 있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마을인 비젠을 점령했다.[2] 그 다음 해, 글라루스는 합스부르크 가문에 대항하여 봉기하여 빈데크 성을 파괴했고, 1387년 3월 11일, 계곡 의회는 합스부르크의 지배에서 벗어났다고 선언했다.

이에 오스트리아군은 1388년 2월 21일에서 22일 밤에 비젠을 공격하여 스위스 군대를 몰아냈다.[2] 4월 초, 두 개의 오스트리아 군대가 나머지 연방으로부터 글라루스를 고립시키기 위해 출발했다. 약 5,000명의 병력으로 구성된 주력 부대는 토겐부르크 백작 도나트 폰 토겐부르크와 토르베르크 성의 기사 페터 폰 토르베르크의 지휘 하에 네펠스로 진격했다. 1,500명의 병력으로 구성된 두 번째 부대는 한스 폰 베르덴베르크-사르간스 백작의 지휘 하에 케렌저베르크 고개를 통과하여 진격했다.[2]

3. 전투 경과

전통에 따르면 네펠스 전투에서 사용된 글라루스의 수호성인인 성 프리돌린을 묘사한 깃발


1388년 4월 9일, 토겐부르크와 토르베르크 휘하의 오스트리아 주력군은 네펠스 주변의 요새(''레치'')를 공격하여 점령했다.[2] 글라루스 출신 병력 약 400명과 슈비츠 주와 우리 주에서 온 수십 명의 병력으로 구성된 수비대는 잠시 동안 버텼지만, 산으로 후퇴했다.[2] 오스트리아군은 마을과 농장을 약탈하기 위해 흩어졌고, 글라루스 군은 눈과 안개 속에서 나타나 약탈에 정신이 팔린 오스트리아군을 기습했다.[2][3]

네펠스의 ''레치'' 잔해


짧은 전투 후, 무질서해진 오스트리아군은 붕괴되어 비젠으로 도망쳤지만, ''마그'' 또는 ''비저 린트'' 위의 다리가 무너지면서 군대의 상당수가 강에 빠져 익사했다. 주력 부대의 궤멸을 본 베르덴베르크-사르간스 군대는 몰리스 시에 있는 베글링겐 마을로 후퇴했다.[2]

3. 1. 전투 결과

스위스군은 54명이 사망했으며, 이들은 몰리스의 교구 교회에 매장되었다.[2] 합스부르크 군의 사상자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수백 명에서[2] 1,700명 사이로 추정된다.[3] 1389년 11월 29일, 아보트 빌게리는 전장에서 수습한 약 180구의 시신을 뤼티 수도원(현재의 뤼티 개혁 교회 성가대)에 매장했다.[2]

4. 전투의 영향

1389년 에서 7년 평화 조약이 체결되어, 스위스 연방은 전쟁에서 획득한 영토에 대한 권리를 인정받았다. 같은 해, 첫 번째 '네펠스 파르트' 순례가 시작되었으며, 매년 4월 첫째 목요일에 전투를 기념하는 행사가 열리고 있다. 이 순례는 글라루스 통합 칸톤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2]

참조

[1] HDS Sempach War
[2] HDS
[3] 서적 The rise of the Swiss republic: a history https://books.google[...] Georg & Cie Libraires 2009-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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