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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이르호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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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부이르호 전투는 1388년 명나라가 몽골을 공격하여 일어난 전투이다. 명나라가 몽골의 나가추를 항복시키자, 몽골의 우스할 칸은 부이르호 일대에 주둔했다. 이에 홍무제는 남옥을 보내 15만 대군으로 공격하게 했다. 명나라는 기습 작전을 통해 우스할 칸을 격파하고, 몽골 수뇌부를 사로잡는 등 큰 전과를 올렸다. 이 전투의 패배로 우스할 칸이 사망하고 몽골 고원은 오이라트, 도친 몽골, 명나라에 항복한 세력으로 분열되며 북원 시대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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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이르호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개요
분쟁홍무제의 몽골 원정
시기1388년
장소부이르호 북동쪽
결과명나라의 승리
교전 세력
교전 1명나라
교전 2북원
지휘관 및 지도자
명나라남옥
북원토구스 테무르
전력
명나라150,000명
북원불명
피해 규모
명나라매우 경미
북원3,000명의 귀족 가문 전체가 항복. 70,000명 이상 포로, 막대한 사상자 발생.
기타 정보

2. 배경

1368년 주원장이 황제에 즉위하여 명나라를 건국한 후, 해마다 몽골에 대한 출병을 계속하여 북방으로 영토를 확대했다. 그러나 1372년 북원 정권을 멸망시키기 위해 파견된 원정군은 영북의 전투에서 빌리크투 칸(소종 아유르시리다라), 코코 테무르 등이 이끄는 몽골군에게 대패했다. 이 패배로 무력으로 몽골 세력을 타도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홍무제는 정책을 변경하여 사자를 파견하는 등의 방법으로 몽골의 유력자를 투항시키는 방책을 취했다.[1]

이러한 정책은 빌리크투 칸이 건재했을 때는 성과가 나타나지 않았지만, 1378년 우스할 칸이 새로 즉위하자 다이르 부카 등 명나라에 투항하는 자가 늘어났다. 이러한 몽골인의 명나라 투항 중 가장 규모가 크고 몽골 고원의 정세를 일변시킨 것은 요동의 국왕 나가추의 투항이었다. 나가추는 몽골 제국 건국의 공신 무칼리의 후예로, 20만 대군을 보유한 대세력이었으나 기근 발생 등으로 1387년 어쩔 수 없이 명나라에 항복하게 되었다.[5]

나가추의 투항은 몽골 측에게 충격이었고, 명나라에 항복하는 것을 거부한 나가추 세력의 잔당을 수용하기 위해 우스할 칸은 몽골 고원 동쪽의 부이르 호(부이르 노르) 일대에 주둔했다. 지금이야말로 몽골에 결정적인 타격을 줄 호기라고 본 홍무제는 다시 대규모 원정군을 조직하여 몽골 고원으로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이 원정에 홍무제가 품었던 기대는 컸고, 나가추의 투항을 성공시킨 펑성을 해임하고 람옥을 기용한 데다가, 원정군의 여러 장수들에게 "사막[의 몽골 세력]을 숙청하는 것은, 이번 한 번에 달려있다. 경들은 이에 힘쓰라('''숙청 사막, 재차 일거. 경등 기면지''')"라고까지 말했다[6]

3. 전투 과정

1387년, 홍무제남옥 장군에게 15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퉁구스 테무르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2] 남옥은 군대를 이끌고 만리장성을 넘어 다닝과 칭저우로 진군했다. 그곳에서 첩자들은 퉁구스 테무르가 부이르호 근처에 진을 치고 있다는 정보를 가져왔다.[1] 이후 명나라 군대는 고비 사막을 건너 북쪽으로 진격하여[1][2][3] 마침내 부이르호에 도착했다.[1][2]

부이르호에서 40리 이내로 접근했을 때 북원 군대를 발견하지 못해 남옥은 실망했다.[1] 그러나 부하인 정원후 왕필 장군은 남옥에게 이렇게 큰 군대를 이끌고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돌아가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상기시켰다.[1] 결국 그들은 북원 군대가 부이르호의 북동쪽에 있다는 것을 알아낸 후, 어둠과 모래 폭풍을 틈타 접근했다.[1]

명군은 구덩이를 파고 밥을 지어 취사 연기가 몽골군에게 발각되지 않도록 하면서 군을 진격시켰다. 남옥 등은 경기병에게 판자를 물게 하여 소리를 내지 않도록 하고, 몽골군의 허를 찔렀다. 우스칼 칸 등은 명나라 군대가 병참 유지를 어려워한다는 것을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명군이 몽골 고원 깊숙이 진군하지 않을 것이라고 방심하고, 명군의 공격에 대한 대비를 전혀 하지 않았다. 게다가 이때 강풍으로 모래가 휘날려 명군의 접근을 가려 버렸다.

1388년 5월 18일, 부이르호 근처에서 명나라 군대는 기습적으로 북원군을 공격했다.[1] 명군의 기습을 받은 우스할 칸 등 수뇌진은 북쪽으로 도망가기 위해 수레와 말을 정비했지만, 곧 명군이 따라붙었다. 몽골 측에서는 만지 태위가 이끄는 부대가 뒤에 남아 항전했지만, 중과부적으로 수천 명이 살해당했다. 이 전투는 명나라가 많은 몽골인을 포로로 잡으면서 끝났지만, 퉁구스 테무르는 도주했다.[1][2][3]

최종적으로 명군은 우스할 칸의 차남 티보드(지보노), 고 비리크트 칸의 비와 공주 59명, 오왕 돌지 등 2994명, 군사 77037명, 보새·도서·패면 149개, 선칙·조회 3390개, 금인 1개, 은인 3개, 말 47000필, 낙타 4804마리, 소와 양 102994마리, 수레 3000대를 전리품으로 획득했고, 남겨진 갑옷 등은 포로로 잡은 몽골 병사들에게 태워 버렸다.[10][11][12]

4. 전투 결과

부이르호 전투는 명나라북원 양측 모두에게 큰 영향을 끼친 사건이었다.

명나라 측에서는 남옥 장군이 큰 공을 세워 한나라의 명장 위청에 비견될 정도로 칭송받았고, 양국공(涼國公)에 봉해짐과 동시에 태부(太傅)라는 높은 지위에 올랐다. 또한 많은 부관들이 승진하거나 하사품을 받는 등 큰 성과를 거두었다.

북원 측에서는 이 전투로 인해 몽골 고원의 정세가 완전히 바뀌었다. 우스칼 칸이 살해되고, 예스델이 칸으로 즉위했지만, 정통성이 부족하여 몽골인들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몽골 고원은 크게 세 개의 집단으로 나뉘었다.

구분세력설명
첫 번째 집단오이라트 부족 중심예스델을 옹립. 몽골 고원 서북부에 유목지를 가진 유목 집단으로, 돌벤 오이라트(4 오이라트 부족 연합)를 형성하여 몽골 고원 서부를 지배.
두 번째 집단우스칼 칸 직속 부하들카라잔 태사, 마르하자 태위, 알크타이 등이 대표. 흩어진 우스칼 칸의 옛 신하들을 모아 재편성. 도친 몽골(40 몽골)이라고 불리며, 명나라는 이들을 타타르라고 칭함.
세 번째 집단명나라에 항복한 자들지원 네케레이, 요왕 아자슐리, 숙왕 구나실리 등. 명나라의 위소 제도 안에 편입되었으나, 실질적으로는 유목 국가(울루스) 형태 유지.



결과적으로 부이르호 전투는 13세기 말부터 이어진 대원 울루스의 국체가 붕괴되고, 서쪽의 오이라트와 동쪽의 몽골이라는 두 세력이 몽골 고원의 패권을 다투는 북원 시대의 기본 구도를 만들어낸 중요한 사건이었다.

4. 1. 명나라의 입장

홍무제는 승전보를 듣고 남옥 장군을 한나라의 명장 위청에 비견하며 크게 칭찬하였다.[1] 남옥은 이 공로로 양국공(涼國公)에 봉해지고 태부(太傅)의 자리에 올랐다.[1] 그의 부관 6명은 장군으로 승진하였고, 다른 부관들도 막대한 하사품을 받았다.[1]

명나라 기록에 따르면, 이 전투에서 퉁구스 테무르의 가족 100명, 왕자 3,000여 명, 남녀 77,000여 명과 칸의 보물들을 확보하였다.[2] 그러나 퉁구스 테무르와 그의 장자는 전투 도중 도망쳤다.[2] 퉁구스 테무르는 툴라 강에 이르러 부관에게 살해당했거나, 아리크부카의 5대손 이수데르 조리그투의 기습으로 살해되었다.[4]

4. 2. 북원의 입장

기록에 의하면 이 전투로 퉁구스 테무르의 가족 100명, 3,000여 명에 달하는 왕자들, 77,000여 명에 달하는 남녀와 칸의 보물들을 확보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퉁구스 테무르와 그의 장자는 전투 도중 도망쳤다고 한다.[1][2][3] 퉁구스 테무르는 전투 도중 도망쳐 툴라 강에 이르렀고, 그 곳에서 부관에 의해 살해당했다.[4] 혹은 아리크부카의 5대손 이수데르 조리그투의 기습공격을 받고 살해되었다.

나가추의 투항은 몽골 측에게 충격이었고, 명나라에 항복하는 것을 거부한 나가추 세력의 잔당을 수용하기 위해 우스할 칸은 몽골 고원 동쪽의 부이르 호(부이르 노르) 일대에 주둔했다.

부이르 호 전투의 패배와 우스칼 칸의 죽음은 몽골 고원의 정세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우스칼 칸을 시해한 예스델은 조리크 칸으로 즉위했지만, 대의명분이 없는 시해였기에 몽골인들의 신망을 얻지 못했고, 몽골 고원의 주민들은 크게 3개의 집단으로 나뉘어졌다.

  • 첫 번째 집단은 예스델을 옹립한 세력으로, 화이역어 갑종본에 따르면 오이라트 부족을 주체로 하는 집단이었다. 오이라트 부족은 몽골 고원 서북부에 유목지를 가진 유목 집단이었으며, 마찬가지로 몽골 고원 서쪽에 거주하던 케레이트부의 후예 케레누트(후의 토르구트), 나이만부의 후예 초로스(후의 준가르 등), 바르구트 제 부족 등과 함께 '''돌벤 오이라트'''(4 오이라트 부족 연합)를 형성했다. 돌벤 오이라트는 주로 몽골 고원 서부를 지배하며, 후술할 도친 몽골과 몽골 고원의 패권을 놓고 다투게 된다.

  • 두 번째 집단은 카라잔 태사, 마르하자 태위, 알크타이를 대표로 하는 우스칼 칸 직속의 부하들로, 그들은 흩어진 우스칼 칸의 옛 신하들을 모아 재편성했다. 돌벤 오이라트의 내부 항쟁으로 인해 건문 4년(1402년)에 쿤 테무르 칸이 죽었을 때, 마르하자 등은 아라샤 지방에 거주하는 오고데이 가문의 후예 오르크 테무르를 옹립했다. 오르크 테무르 및 마르하자 등은 몽골 제국의 정통 후계자를 자처했기 때문에, 몽골어 사료는 이 세력을 '''도친 몽골'''(40 몽골)이라고 칭한다. 한편, 명나라는 이 세력을 '''타타르'''라고 칭하는데, 이는 몽골 제국이 이미 멸망하고 명나라가 그 지위를 계승했다는 입장에서 "몽고(몽골)"를 일방적으로 바꿔 부른 것에 지나지 않는다.

  • 세 번째 집단은 지원 네케레이, 요왕 아자슐리, 숙왕 구나실리 등 명나라에 항복한 자들이다. 어떤 자는 예스델을 섬기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어떤 자는 명나라의 무위를 두려워하여 투항해 온 자들을 명나라는 응창위・올량해 삼위・하미위와 같은 위소 제도 안에 편입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집단을 명나라가 직접 통치하게 된 것은 아니며, 명목상으로는 명나라의 영향하에 있으면서도 실질적으로는 울루스(유목 국가)에 다름 아니었다.


총괄적으로, 부이르 호 전투는 13세기 말부터 이어진 대원 울루스의 국체가 붕괴되고, 서쪽의 오이라트와 동쪽의 몽골이라는 2대 세력이 몽골 고원의 패권을 다투며, 그 주변을 몽골계 기미 위소가 둘러싸는 북원 시대의 기본형을 만들어낸 몽골사에서 중요한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5. 이후 몽골의 정세

홍무제는 부이르호 전투의 승전보를 듣고 남옥 장군을 한나라 시절의 명장 위청에 비견하며 크게 칭찬하였다. 남옥은 이 공으로 양국공(涼國公)에 봉해지고 태부(太傅)의 자리에 올랐다. 6명의 부관들이 장군으로 승진하였으며, 그 외 부관들도 막대한 하사품을 받았다.[1]

이 전투로 퉁구스 테무르의 가족 100명, 3,000여 명의 왕자들, 77,000여 명의 남녀와 칸의 보물들을 확보하였다.[2] 하지만 퉁구스 테무르와 그의 장자는 전투 도중 도망쳤다.[2][3] 퉁구스 테무르는 툴라 강에 이르렀으나, 그곳에서 부관에게 살해당했다.[4] 혹은 아리크부카의 5대손 이수데르 조리그투의 기습 공격을 받고 살해되었다.

부이르 호 전투의 패배와 우스칼 칸의 죽음은 몽골 고원의 정세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우스칼 칸을 시해한 예스델은 조리그투 칸으로 즉위했지만, 대의명분이 없는 시해였기에 몽골인들의 신망을 얻지 못했고, 몽골 고원의 주민들은 크게 3개의 집단으로 나뉘었다.


  • 오이라트: 화이역어 갑종본에 따르면 오이라트 부족을 주축으로 하는 집단이었다. 이들은 몽골 고원 서북부에 유목지를 가진 유목 집단이었으며, 케레이트부의 후예 케레누트(후의 토르구트), 나이만부의 후예 초로스(후의 준가르 등), 바르구트 제 부족 등과 함께 '''돌벤 오이라트'''(4 오이라트 부족 연합)를 형성했다. 돌벤 오이라트는 주로 몽골 고원 서부를 지배하며, 도친 몽골과 몽골 고원의 패권을 놓고 다투게 된다.

  • 도친 몽골: 카라잔 태사, 마르하자 태위, 알크타이를 대표로 하는 우스칼 칸 직속 부하들로, 흩어진 우스칼 칸의 옛 신하들을 모아 재편성했다. 돌벤 오이라트의 내부 항쟁으로 인해 건문 4년(1402년)에 쿤 테무르 칸이 죽었을 때, 마르하자 등은 아라샤 지방에 거주하는 오고데이 가문의 후예 오르크 테무르를 옹립했다. 오르크 테무르 및 마르하자 등은 몽골 제국의 정통 후계자를 자처했기 때문에, 몽골어 사료는 이 세력을 '''도친 몽골'''(40 몽골)이라고 칭한다. 한편, 명나라는 이 세력을 '''타타르'''라고 칭하는데, 이는 몽골 제국=원나라가 이미 멸망하고 명나라가 그 지위를 계승했다는 입장에서 "몽고(몽골)"를 일방적으로 바꿔 부른 것에 지나지 않는다.

  • 명나라 투항자: 지원 네케레이, 요왕 아자슐리, 숙왕 구나실리 등 명나라에 항복한 자들이다. 명나라는 이들을 응창위·올량해 삼위·하미위와 같은 위소 제도 안에 편입시켰다. 그러나 이들은 명나라의 직접 통치를 받지 않았으며, 명목상으로는 명나라의 영향하에 있으면서도 실질적으로는 울루스(유목 국가)와 다름없었다.


결론적으로, 부이르 호 전투는 13세기 말부터 이어진 대원 울루스의 국체가 붕괴되고, 서쪽의 오이라트와 동쪽의 몽골이라는 2대 세력이 몽골 고원의 패권을 다투며, 그 주변을 몽골계 기미 위소가 둘러싸는 북원 시대의 기본형을 만들어낸 몽골사에서 중요한 사건이었다.

참조

[1] 서적 Early Ming China: A Political History, 1355–1435 Stanford University Press
[2] 서적 The Cambridge History of China, Volume 7: The Ming Dynasty, 1368–1644, Part 1 Cambridge University Press
[3] 서적 Perpetual Happiness: The Ming Emperor Yongle University of Washington Press
[4] 서적 The Mongol empire and its legacy Brill 1998
[5] 문서 『明太祖実録』洪武二十年十月「是月、宋国公馮勝以罪召還、至京師」
[6] 문서 『明太祖実録』洪武二十年九月三十日丁未「遣指揮趙隆齎詔命右副将軍永昌侯藍玉為征虜大将軍、延安侯唐勝宗為左副将軍、武定侯郭英為右副将軍、都督僉事耿忠為左参将、都督僉事孫恪為右参将。勅諭玉等曰『……宜因天時、率師進討、曩諭克取之。機尚服斯言益勵士卒奮揚威武期必成功。粛清沙漠、在此一挙。卿等其勉之』」
[7] 문서 『明太祖実録』洪武二十一年三月「是月、大将軍永昌侯藍玉等率師十五万、由大寧進至慶州、聞虜主脱古思帖木児在捕魚児海、従間道、兼程而進」
[8] 문서 『明太祖実録』洪武二十一年四月九日癸丑「大将軍永昌侯藍玉等師次遊魂南道、無水泉、軍士渇甚、其地有小山、在韃官観童所居営、忽聞有声如砲、玉使人視之、則四泉湧出、士馬就飲、得不困乏、餘流溢出如渓。衆咸懽呼曰『此朝廷之福、天之助也』……」
[9] 문서 『明太祖実録』洪武二十一年四月十一日乙卯「大将軍永昌侯藍玉師至百眼井、去捕魚児海尚四十餘里、哨不見虜、欲引兵還。定遠侯王弼曰『吾等受朝廷厚恩、奉聖主威徳提十餘万衆、深入虜地。今略無所得遽言班師恐軍麾一動難可復止、徒労師旅、将何以復命』。玉深然之。戒諸軍、皆穴地而爨、毋令虜望見煙火、師遂進」
[10] 문서 『皇明資治通紀』巻3,「四月藍玉等進兵至哈剌哈河、前鋒探知虜営不遠、来報。玉等帥軽騎、銜枚捲甲、倍道而進、出其不意、直搗虜営。虜主脱古思帖木児大驚、帥十餘騎、潰囲走、其時蛮子太尉来拒、我師奮撃擒之、獲両営輜重金宝及馬四万餘、俘其衆五万餘人。復追至捕魚児海、生擒虜将咬咬司徒・十不剌王子及後宮后妃等四万餘人、馬駝一万五千匹、牛羊輜重無算。都督兪通淵・何福帥師、至曲律河、招降平章阿晩木等、人口馬駝亦万計、乃旋師……」
[11] 문서 『明太祖実録』洪武二十一年四月丙辰「黎明至捕魚児海南飲馬、偵知虜主営在海東北八十餘里。玉以弼為前鋒、直薄其営。虜始謂我軍乏水草、必不能深入、不設備。又大風揚沙、晝晦軍行、虜皆不知。虜主方欲北行、整車馬皆北向、忽大軍至、其太尉蛮子率衆拒戦、敗之、殺蛮子及其軍士数千人、其衆遂降。虜主脱古思帖木児与其太子天保奴・知院捏怯来・丞相失烈門等数十騎遁去。玉率精騎追之、出千餘里、不及而還。獲其次子地保奴妃子等六十四人及故太子必里禿妃並公主等五十九人。其詹事院同知脱因帖木児将逃、失馬、竄伏深草間、擒之。又追獲呉王朶児只・代王達里麻・平章八蘭等二千九百九十四人、軍士男女七万七千三十七人、得宝璽図書牌面一百四十九、宣勅照会三千三百九十道、金印一、銀印三、馬四万七千匹、駝四千八百四頭、牛羊一十万二千四百五十二頭、車三千餘輌。聚虜兵甲焚之。遣人入奏、遂班師」
[12] 문서 ブイル・ノールの戦いについては『皇明資治通紀』と『明太祖実録』にそれぞれ異なった形の記録が残されており、一見すると異なる戦闘であるように見えるが、実際には両史料の差異は報告者の観点の違いに由来するものと考えられている。すなわち、前者がハルハ河での戦闘、ブイル・ノール北岸での戦闘、ケルレン河での戦闘及び戦利品を別々に記述しているのに対し、後者は一連の戦闘・戦利品を一括して記録していると考えると、両史料の整合性がとれる(和田1959,28頁)
[13] 문서 『明太祖実録』洪武二十一年十月丙午「初虜主脱古思帖木児在捕魚児海、為我師所敗、率其餘衆、欲還和林、依丞相咬住。行至土剌河、為也速迭児所襲撃、其衆潰散独与捏怯来等十六騎遁去。適遇丞相咬住・太尉馬児哈咱領三千人来迎、又以闊闊帖木児人馬衆多、欲往依之、会天大雪、三日不得発。也速迭児遣大王火児忽答孫・王府官孛羅追襲之、獲脱古思帖木児、以弓絃縊殺之、並殺其太子天保奴。故捏怯来等恥事之、遂率其衆来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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