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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카호 기요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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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니카호 기요시게는 세이와 겐지 오가사와라 씨의 후손으로, 무로마치 시대에 니카호 향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한 니카호 씨의 일족이다. 16세기에는 쇼나이 지방으로 진출하여 세력을 떨쳤으며, 도요토미 히데요시 정권 하에서 오다와라 정벌, 구노헤 마사자네의 난 토벌 등에 참여했다. 임진왜란에도 참전했으며,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동군에 가담하여 공을 세웠으나, 이후 히타치국으로 이봉되었다. 오사카 전투에서 다시 공을 세워 옛 영지로 복귀했지만, 1624년에 사망했다. 사후 니카호 가는 세 가문으로 분할되어 존속했다.

2. 니카호 씨의 성립

니카호 씨는 세이와 겐지 오가사와라 씨의 일족으로, 시조는 오이 아사미츠이다. 아사미츠는 숙모인 다이니노츠보네로부터 데와 국 유리 군을 상속받아, 유리 군에서 시나노 오이 씨가 번영하게 되었다.

가마쿠라 시대 초기, 오이 씨는 시나노 국 오이 장을 본관으로 삼고 지토다이를 파견하여 유리 군을 지배했는데, 이는 가마쿠라 시대 말기까지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처음에는 '츠쿠모데고'라고 불린 야지마 향(현재의 유리혼조시 야지마 정 부근)을 지배한 야지마 씨가 지토다이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야지마 씨의 시조로 여겨지는 오이 마사미츠와 니카호 씨의 시조로 여겨지는 가이노카미 미츠나가는 형제인 듯하며, 미츠나가의 손자인 도모미츠 대에 니카호 향(현재의 니카호 시 부근)으로 진출한 것으로 보인다. 니카호 씨의 보리사인 젠린지에는 이 시대부터의 위패가 남아 있다.

2. 1. 겐무 신정과 남북조 시대

겐무 신정·남북조 시대 등의 혼란기를 거쳐 유리 군은 오이 씨로부터 독립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제압하기 위해 새롭게 지토다이로 임명되어 유리 군으로 이주해 오는 자들이 많았던 듯하다. 특히, 후에 아카오츠(아카오츠) 씨라고도 불리는 코스케가와 씨는 오이 씨의 분가로서 유리 군의 북쪽에서 오모노가와 하구 부근까지 세력을 넓혔고, 무로마치 시대 중기에는 다이고지산보인 문적령을 횡령할 정도로 세력을 키웠다. 도모미츠의 넷째 아들인 도모아게는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 가마쿠라에서 내려왔다고 전해진다.

당시 도호쿠 지방의 정치 상황으로 미루어 볼 때, 이는 간단한 일이 아니었으며, 간토칸레이·데와 탄다이·무로마치 막부의 의도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오이 종가의 당주인 모치미츠는 가마쿠라 구보아시카가 시게우지의 외조부였으며, 간토칸레이인 우에스기 씨와 대립 관계에 있었다. 또한 다이고지의 장원을 횡령한 오이 씨의 분가인 코스케가와 씨(아카오츠 씨)의 존재도 있어, 우에스기 씨와 가까운 관계에 있던 오이 씨 분가인 도모아게의 유리 군 하향은 매우 정치적인 것이었을 것이다.

2. 2. 니카호 씨의 발전

도모아게의 아들 야마토노카미 아게마사는 주요 영지였던 니카호 향의 이름을 따서 '니카호'를 성으로 삼았다. 니카호라는 이름은 다이에이 4년(1524년) 나가오 다메카게에게 보낸 시바 마사카즈의 서장에 나타나며, 이 시기에 니카호 씨는 중앙 정권에 말을 헌상하기도 했다.

아게마사의 아들 아게히사는 뛰어난 인물로 쇼나이 지방으로 군사를 보내 일본해의 도비시마를 점령하는 등 활약했지만, 야지마 씨와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전사하면서 니카호 씨는 쇠퇴했다. 이 시기 북데와에서는 미나토 안토 씨, 오노데라 씨가 교토 어부치슈였으며, 니카호 씨는 확실하지 않지만, 같은 유리 군의 국인 영주인 타키자와 씨가 교토에 대관소를 가지고 있었고, 어용 상인이 방문한 것으로 보아 중앙 정권에 가까운 유력한 국인 영주로서의 지위를 확립했던 것으로 보인다.

3. 니카호 쿄세이의 등장과 활약

니카호 쿄세이(仁賀保挙誠)는 가문 내 분쟁과 패전으로 쇠퇴한 니카호 씨를 중흥시킨 인물로, 아카오쓰 씨에서 양자로 들어왔다. 우에스기 겐신 사후, 모가미 요시아키가 데와 쇼나이에서 세력을 확장하자 쿄세이는 요시아키와 대립했다.

덴쇼 13년(1585년), 쿄세이가 가문을 계승할 당시 니카호 씨는 오노데라 씨의 일족인 니시모나이 씨의 딸을 아내로 맞이한 야지마 미쓰야스와 대립했다. 그러나 모가미 요시아키가 쇼나이 지방으로 세력을 확장하면서 야지마 미쓰야스와 화해하고 쇼나이 지역 전투에 전념하게 되었다.

덴쇼 16년(1588년) 모가미 요시아키는 데와 탐제에 임명되었다고 주장하며 압력을 가했지만, 혼조 시게나가가 이끄는 우에스기 군이 모가미 군을 격파하면서 쇼나이는 완전히 우에스기 영토가 되었다. 이후 요시아키는 야지마 미쓰야스를 회유하여 니카호 씨를 흔들려 했지만, 쿄세이는 책략으로 야지마 씨를 멸망시키고 야지마 고를 자신의 영지로 편입했다.

덴쇼 18년(1590년) 오다와라 정벌에 참가하여 니카호 고와 야지마 고의 영지를 인정받았다. 같은 해 12월 24일자 지행할행장에 의해 유리 군 남쪽 절반을 영유하는 것이 결정되었다. 덴쇼 18년(1590년)의 고쿠다카는 3,716석이었으나, 덴쇼 20년(1592년)에는 8,000석 이상으로 증가했으며, 영내에 설치된 덴료 분을 합하면 1만 2,000석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네이 씨와 가타보 씨의 영지가 더해졌다.

3. 1. 쇼나이 전투와 야지마 씨와의 관계

모가미 요시아키와 연합한 야지마 미쓰야스와 화해하고 쇼나이 전투에 전념한 쿄세이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소무지령을 명분으로 내세운 요시아키에게 출사하면서도 그의 명령에는 따르지 않았다. 덴쇼 16년(1588년), 요시아키는 데와 탐제에 임명되었다고 주장하며 다시 압력을 가했지만, 혼조 시게나가가 이끄는 우에스기 군이 모가미 군을 격파하면서 쇼나이는 완전히 우에스기 영토가 되었다. 이때 니카호 씨 등은 쇼나이에 출병하여 모가미 군을 몰아냈다.

이후 요시아키는 니카호 씨를 흔들기 위해 야지마 미쓰야스를 회유하는 데 성공했지만, 쿄세이는 책략으로 야지마 씨를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야지마 고를 자신의 영지로 편입했다. 이는 야지마 씨를 이용하여 유리 군을 자신의 영토로 만들려던 요시아키의 야망을 좌절시킨 것이었다.

3. 2. 도요토미 정권 하의 니카호 쿄세이

쿄세이는 오다와라 정벌에 참가하여 영지를 인정받았다. 이듬해 덴쇼 19년(1591년)에는 구노헤 마사자네의 난 토벌군의 한 부대로 참전하여 큰 공을 세웠다.

분로쿠의 역에서는 히젠 나고야성에 주둔하여 "오코시 탄(おこし炭)"의 역할을 수행했다. 마키쓰성(牧使城) 공격의 한 부대로 도해할 예정이었으나, 함락되었기 때문에 도해하지 못했다. 분로쿠 연말부터는 도요토미 정권이 붕괴될 때까지 북동 토호쿠(北東北) 모든 다이묘(大名)에게 명해진 삼나무 목재 헌상 사업에 종사했다.

게이초 5년(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모가미 요시미츠(最上義光)로부터 동군(東軍) 참여를 권유받아, 동족인 아카오즈 손지로와 함께 동군에 가담하여 쇼나이(庄内)까지 출진했다. 그러나 이시다 미쓰나리가 거병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상락하자, 이에야스로부터 문서를 받은 후 거성으로 귀환했다. 그 직후, 우에스기(上杉) 측의 사주를 받은 야지마 미쓰야스(矢島満安)의 유신들이 일어섰기 때문에, 이를 토벌했다. 이 때문에 쇼나이의 우에스기 세력을 공격할 수 없었고, 후에 요시미츠로부터 서군(西軍) 가담 혐의를 받았다.

그러나 이시다 미쓰나리가 패사한 후, 홀로 철저 항전하고 있는 카게카츠(景勝)를 공격했다. 이때, 우에스기 가신 시모 시위에몬(下次右衛門)의 스가노성(菅野城)을 시작으로 수많은 성을 함락시키고, 자신도 부상을 입을 정도로 분전했다. 이 때문에 후에 이에야스로부터 영지를 안도받고, 감상을 받았다.

4. 도쿠가와 정권 하의 니카호 쿄세이

쿄세이는 히타치 국 다케다로 이봉되었으나, 오사카 전투에서 공을 세워 옛 영지인 니카호로 복귀했다. 오사카 겨울 전투에서는 우마와리(마상 시위대)의 일원으로 참전했고, 이듬해 여름 전투에서는 요도성 수비를 맡았다. 겐나 2년에는 후시미 성의 경비를, 겐나 9년에는 오사카 성의 경비를 맡았다.

도이 도시카쓰의 가신 사케노베 히데쓰나는 세키가하라 전투 때 쿄세이의 용맹함을 도이 도시카쓰에게 이야기했고, 이에 감명을 받은 도시카쓰의 천거로 쿄세이는 겐나 9년 옛 영지 니카호로 복귀했다. 이때 분가인 우치코시씨(打越氏)에게도 영토 내의 야지마(矢島) 향을 주어, 니카호씨(仁賀保氏)는 우치코시령을 포함한 옛 영지를 거의 되찾았다.

니카호로 복귀하여 시오고시 성(塩越城)에 들어간 이듬해 간에이 원년 2월 14일에 사망했다. 향년 65세였다. 보리사는 니카호시(にかほ市) 인나이(院内)의 젠린사(禅林寺)이다.

4. 1. 니카호 가의 분할과 후손

교세이의 유언에 따라 니카호 가는 세 가문으로 분할되었다. 장남 요시토시는 7,000석, 차남 세이세이는 2,000석, 삼남 세이지는 1,000석을 상속받았다. 차남과 삼남의 가계는 메이지 유신까지 존속했다.

장남 요시토시는 처음에는 구라우도를 칭했지만, 가독 상속 후 아버지와 같은 관직인 효고노카미를 칭했다. 요시토시에게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니카호 종가는 단절되었다.

차남 세이세이의 가계는 다음과 같다.

  • 세이세이
  • 세이쇼
  • 세이신
  • 세이이 (쓰즈키 타메마사의 친아들)
  • 마사하루 (쿠와야마 모토타케의 친아들)
  • 세이인 (쿠와야마 타카하루의 친아들)
  • 세이신 (코노 미치타카의 친아들)
  • 세이준 (니카호 세이유키의 친아들)
  • 세이쇼
  • 세이메이
  • 세이세이 (스가누마 사다치카의 친아들)
  • 세이토


삼남 세이지의 가계는 다음과 같다.

  • 세이지
  • 세이호
  • 세이코 (하세가와 시게카타의 친아들)
  • 세이유키 (하세가와 시게유키의 친아들)
  • 세이젠
  • 세이케이
  • 세이쿄 (니카호 세이젠의 친아들)
  • 세이이 (나카야마 노부미의 친아들)
  • 세이츄 (마쓰다이라 노부히로의 친아들)
  • 세이카쿠 (사타케 요시치카의 친아들)
  • 고로


또한, 니카호 세이지의 셋째 아들 세이신의 가계는 다음과 같다.

  • 세이신
  • 세이쇼 (이노우에 토시나가의 친아들)
  • 세이도 (하세가와 시게카타의 친아들)
  • 세이쇼 (핫토리 야스요시의 친아들)
  • 세이보
  • 세이이치로

5. 니카호 쿄세이의 영지

쿄세이의 영지는 현재의 니카호시유리혼조시의 야지마(矢島)・초카이 지역에 걸쳐 있었다. 덴쇼 18년(1590년) 오슈 시오키 때, 유리군에서는 니카호 씨 외에 아카오츠 씨, 다키자와 씨, 우치코시 씨, 이와야 씨, 이시자와 씨, 시타무라 씨, 네이 씨, 토우모로코시 씨, 가타보 씨 등이 존속을 인정받았다. 이 중 이시자와, 시타무라, 토우모로코시, 네이, 가타보 씨는 분로쿠 4년(1595년)에 다른 씨의 산하에 들어간 듯하다.

고쿠다카는 덴쇼 18년(1590년)에는 3,716석이었으나, 덴쇼 20년(1592년)에는 8,000석 이상이었음이 확인되었으며, 영내에 설치된 덴료를 합하면 1만 2,000석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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