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무로마치 시대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무로마치 시대는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1336년에 겐무시키모쿠를 제정하고 1338년에 세이이타이쇼군에 취임하면서 시작되어, 15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1573년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교토에서 추방당하기까지의 시기를 일컫는다. 이 시기는 남북조 시대, 센고쿠 시대를 포함하며, 좁은 의미로는 남북조가 통일된 1392년부터 메이오 정변(1493년)까지를 의미하기도 한다. 무로마치 막부가 정치적으로 중앙과 지방의 세력 균형을 이루며, 농업, 수공업, 상업의 발달과 화폐 경제의 보급을 통해 경제적 성장을 이루었다. 이 시기에는 선종 불교의 영향을 받은 무로마치 문화가 발달하여 북산 문화와 동산 문화로 대표되며, 건축, 회화, 조각, 문학 등 다양한 예술 분야에서 독자적인 양식이 형성되었다. 명나라, 조선, 류큐 등과의 대외 관계가 이루어졌으며, 왜구와 서양인의 도래도 있었다. 유교, 선종, 신토 등 다양한 사상이 공존하며 학문이 발전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무로마치 시대 - 교토
    교토는 혼슈 중앙부에 위치하며 약 천 년간 일본의 수도였던 도시로, 헤이안쿄로 설계되어 전란과 화재를 겪었으나 복구 노력을 통해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고, 에도 시대에는 문화와 상공업의 중심지로, 오늘날에는 세계적인 관광 도시로 번영하며 수많은 유적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 무로마치 시대 - 남조 (일본)
    남조는 14세기 일본 남북조 시대에 고다이고 천황이 세운 천황가의 분파로,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세운 북조와 대립하다가 1392년 종결되었으며, 메이지 시대에 정통으로 인정받았다.
  • 일본의 역사 - 에도 시대
    에도 시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에 막부를 세운 1603년부터 메이지 유신으로 막부가 멸망한 1868년까지의 일본 역사 시대로, 도쿠가와 막부의 통치 아래 평화와 사회적 안정을 누렸으나 엄격한 신분제도와 쇄국정책을 유지하며 막번체제, 산킨코타이 제도 등 독특한 정치·사회·경제 체제를 통해 일본 근세사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 일본의 역사 - 연호
    연호는 군주의 권위와 통치권을 상징하며, 군주의 즉위와 함께 사용되는 칭호로, 고대 중국에서 시작되어 동아시아 국가들에 영향을 주었고, 현대에는 일본, 중화민국, 북한 등에서 사용된다.
  • 일본 - 후쿠시마 TV
    후쿠시마 TV는 후쿠시마현 최초의 민영 텔레비전 방송국으로 개국하여 여러 네트워크와의 제휴 및 탈퇴를 거쳐 현재는 FNN/FNS 계열의 완전 독점 방송국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후쿠시마현이 주식의 절반을 소유하여 공공적인 성격을 띠는 것이 특징이다.
  • 일본 - FM 오사카
    FM 오사카는 1970년 간사이 지역 최초의 민영 FM 방송국으로 개국하여 오사카부를 중심으로 85.1MHz 주파수로 방송되며 자체 제작 프로그램과 JFN 네트워크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FM OH!'라는 애칭을 사용하다 2020년 'FM오사카'로 변경, 음주운전 방지 캠페인 등 사회 공헌 활동을 펼치는 일본의 라디오 방송국이다.
무로마치 시대
지도
기본 정보
시대 명칭무로마치 시대
다른 명칭아시카가 시대
일본어 명칭室町時代 (무로마치 지다이)
일본어 명칭 (다른 표기)足利時代 (아시카가 지다이)
막부 명칭무로마치 막부
막부 명칭 (다른 표기)아시카가 막부
연도1336년 ~ 1573년
금각사
역사적 배경
이전 시대가마쿠라 시대
다음 시대아즈치모모야마 시대
주요 사건남북조 시대, 센고쿠 시대
주요 세력아시카가 막부
사회 문화
특징무로마치 문화 발달
기타 정보
참고일본의 역사
남북조 시대
센고쿠 시대

2. 시대 구분

넓은 의미로는 아시카가 다카우지1336년 겐무시키모쿠(建武式目)를 제정하고 1338년 세이이타이쇼군(征夷大將軍)에 취임한 때부터, 15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1573년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교토에서 추방당하기까지의 237년간을 가리킨다.

그러나 고다이고 천황겐무 신정(建武新政)기를 포함한 최초의 약 60년간을 난보쿠초 시대(南北朝時代, 남북조 시대), 오닌의 난(応仁の乱, 1467년) 혹은 메이오 정변(明応の政変, 1493년) 이후를 센고쿠 시대(戦国時代, 전국 시대)로 구분하여 별도로 다루기도 한다. 이 경우 메이토쿠의 화약(明徳の和約, 1392년)으로 남북조가 통일된 이후부터 메이오 정변까지의 약 100년간을 좁은 의미의 무로마치 시대로 본다.

2. 1. 하위 시대 구분

아시카가 다카우지1336년 겐무시키모쿠(建武式目)를 제정하고 1338년 세이이타이쇼군(征夷大將軍)에 취임한 때부터, 15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1573년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교토에서 추방되기까지의 237년간을 넓은 의미의 무로마치 시대로 본다.

그러나 고다이고 천황겐무 신정(建武新政)기를 포함한 최초의 약 60년간을 난보쿠초 시대(南北朝時代, 남북조 시대), 오닌의 난(応仁の乱, 1467년) 혹은 메이오 정변(明応の政変, 1493년) 이후를 센고쿠 시대(戦国時代, 전국 시대)로 구분하여 별도로 다루기도 한다. 이 경우 메이토쿠의 화약(明徳の和約, 1392년)으로 남북조가 통일된 이후부터 메이오 정변까지의 약 100년간을 좁은 의미의 무로마치 시대로 본다.[1]

3. 정치

1336년 고다이고 천황과 대립한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지묘인 계통[13]고묘 천황을 옹립하고 막부를 개창하여 남북조가 대립하였으나, 1392년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에 의해 통일되어 무가가 우위를 점했다. 쇼군 직할의 군사력과 재정 기반이 약하여 중앙의 막부가 상위에 서고 지방 권력인 슈고 다이묘가 감독 아래 있는 상호 보완적인 정치적·경제적 지배를 전개했다.

3대 쇼군 요시미쓰가 교토 무로마치에 하나노고쇼(꽃의 어소)를 만든 이후 역대 쇼군을 무로마치 도노(室町殿)라 부르게 되어 그 정권을 무로마치 막부, 시대를 무로마치 시대라고 부른다.[14]

요시미쓰 시대에는 국내가 안정되었지만, 오닌의 난(1467~1477년)이나 메이오 정변(1492년) 이후에는 전국동란의 시대(센고쿠 시대)를 맞아 막부-슈고 체제, 장원(荘園)공령제가 붕괴하고 각지의 지역 국가(센고쿠 다이묘)가 병립하게 되었다.

무로마치 시대는 가마쿠라 시대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출신 불명의 농민, 상인층의 사회 진출이 가능해져, 일본 역사상 최초로 민중이 크게 활약한 시대이기도 하다. 구세력의 몰락과 신세력의 부흥(하극상)의 시대로 파악할 수 있다. 전란이 계속되는 시대였지만, 경제면에서는 농업·공업과 함께 기술 향상으로 생산도 증대되어 내외 유통이 활발해졌다.

3. 1. 무로마치 막부

1336년, 고다이고 천황과 대립한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지묘인 계통[13]고묘 천황을 옹립하고 막부를 개창하여 한동안 남북조가 대립하였으나, 1392년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에 의해 남북조가 통일되었다. 쇼군 직할의 군사력과 재정 기반이 그다지 강고하지 못하여 중앙의 막부가 상위에 서고 지방권력에 해당하는 슈고 다이묘가 그 감독 아래에 있는 모양새를 취하면서도 일방적 상하관계가 아닌 상호보완적인 정치적·경제적 지배를 전개했다.

3대 쇼군 요시미쓰가 교토무로마치에 하나노고쇼(꽃의 어소)를 만든 이후 역대 쇼군을 무로마치 도노(室町殿)라 부르게 되어 그 정권을 무로마치 막부라고 부른다.[14]

교토의 하나노고쇼(꽃의 궁전)


고다이고 천황겐무 신정에서의 짧은 봉건 제도 복고 시도는 무사 계급을 소외시켰고,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그들의 지지로 고다이고 천황을 폐위시켰다. 1338년 다카우지는 쇼군으로 선포되었고 교토에 그의 정부를 수립했다. 그러나 고다이고 천황은 감금에서 탈출하여 나라에서 그의 정치적 권력을 부활시켰다. 이후 아시카가 통치 시대(1336~1573)는 그 본부 – 하나노고쇼|꽃의 궁전일본어 – 가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에 의해 1378년 교토의 무로마치 지역으로 이전된 것에 따라 무로마치 시대로 불리게 되었다. 아시카가 막부를 가마쿠라 막부와 구별하는 것은 가마쿠라가 궁정과 균형을 이루며 존재했던 반면, 아시카가는 궁정 정부의 잔재를 장악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시카가 막부는 가마쿠라만큼 강력하지 않았고 내전에 크게 휘말렸다. 아시카가 요시미쓰(쇼군 1368~1394, 섭정 1394~1408)의 통치가 시작되기 전까지는 질서가 나타나지 않았다.

무로마치 시대 무사(1538)


요시미쓰는 가마쿠라 시대에 제한된 권력을 가졌던 슈고들이 강력한 지역 통치자, 후에 다이묘라 불리게 되는 자들이 되도록 허용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쇼군과 다이묘 사이에 권력 균형이 형성되었고, 가장 유명한 세 다이묘 가문이 교토의 쇼군의 대리인으로 순환 근무했다. 요시미쓰는 마침내 1392년 남북조 시대북조남조를 통일하는 데 성공했지만, 황실 계보 사이의 더 큰 균형이라는 그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북조는 그 후에도 왕위를 장악했다. 쇼군들의 계보는 요시미쓰 이후 점차 약해졌고, 다이묘 및 기타 지역의 강자들에게 점점 더 권력을 잃었다. 쇼군의 황위 계승에 대한 영향력은 약해졌고, 다이묘들은 자신의 후보를 지지할 수 있었다.

정지 6년/조헤이 22년(1367년) 2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라가 죽고 10세의 요시미츠가 3대 쇼군이 되었다. 간레이 호소카와 요리유키는 어린 쇼군을 보좌하여 막부 권력의 안정화를 추진했다. 코랴쿠 원년/덴주 5년(1379년)에는 코랴쿠의 정변으로 요리유키가 실각하고, 후임에는 시바 요시마사가 취임한다. 요시미츠는 봉공중이라 불리는 쇼군 직할의 군사력을 정비하고, 유력 슈고 다이묘인 야마나 씨와 오우치 씨를 도발하여 각각 메이토쿠의 난, 오에이의 난으로 토벌하고, 쇼군 권력을 강화하여 메이토쿠 화약에 의해 남북조를 통일하고, 천황에 필적하는 권력을 확립했다.

아시카가 요시미츠가 급사하자 4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모치는 시바 요시마사의 보좌를 받아, 요시미츠에 대한 태상천황의 추호를 거부하고, 감합 무역에서 과의 통상을 일시 중지하는 등 요시미츠의 정책을 부정하고 막정을 수구적인 것으로 바꾼다. 오에이 30년(1423년)에 친자 아시카가 요시카즈에게 쇼군직을 양보하지만 요시카즈가 요절하고, 또한 요시모치 자신도 후계자를 정하지 않은 채 죽는다. 6대 쇼군은 제비뽑기로 정해지게 되어, 요시미츠의 자식으로 승려가 되었던 요시엔이 환속하여 아시카가 요시노리를 이름으로 쇼군에 취임한다.

아시카가 요시미츠가 남북조 통일을 달성하고 막부 권력을 절대적인 것으로 만들었지만, 요시미츠 급사 후에는 대명 합의제로 돌아가 상대적으로 쇼군의 권력도 저하되었다. 히에이잔 자주였던 아시카가 요시노리가 제비뽑기로 쇼군이 되자, 도키 씨, 아카마쓰 씨, 오우치 씨 등의 유력 슈고 다이묘의 후계 쟁탈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쇼군 권력 강화에 힘썼다. 또한 막부에 반항적이었던 가마쿠라 구보 아시카가 모치우지를 에이쿄의 난에서, 그 잔당을 유키 전투에서 토벌하자 전국에 아시카가 쇼군에게 공개적으로 대항하는 세력은 없어지고, 일견 사회는 안정을 향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너무나도 강경한 정치 자세가 사람들에게 "공포 정치"라는 반발을 불러일으켜, 가키쓰 원년(1441년)에 아카마쓰 미쓰스케에 의해 요시노리는 암살되었다(가키쓰의 난). 이것을 계기로 쇼군의 힘은 약해졌다.

요시노리의 급사로 아들 아시카가 요시카쓰가 유소년기에 7대 쇼군이 되지만, 재위 1년 만에 요절했다. 요시카쓰의 사후, 8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가 취임한다. 유소년 쇼군이 계속되었기 때문에 유력 다이묘에 의한 합의로 막정이 운영되었다.

관동에서 가마쿠라 구보 아시카가 시게우지가 간토 간레이 우에스기 노리타다를 암살한 것을 발단으로 교토쿠의 난이 발발하자, 요시마사는 시게우지에 대한 대항책으로 전년에 환속시킨 이복형 아시카가 마사토모를 정식 가마쿠라 구보로 관동에 보냈다. 그러나 마사토모는 가마쿠라에 들어갈 수 없고, 그 앞의 이즈의 호리고에에 머물러 거기에 호리고에 고쇼를 축조했다. 한편 시게우지는 이마가와 노리타다에게 가마쿠라를 점령당했기 때문에, 시모우사의 고가를 새로운 근거지로 삼았다. 이에 따라, 호리고에 구보와 고가 구보라는 두 개의 가마쿠라 구보가 병립하게 되었다.

요시마사는 아이에게 복이 없었기 때문에 동생 아시카가 요시미를 양자로 삼아 후계자로 지명했지만, 정실인 히노 도미코에게 아들 아시카가 요시히사가 태어나자 쇼군 후계 문제가 발생했다. 분쇼 원년(1466년), 이세 사다치카는 시바 씨의 가독 쟁탈(부쿄 소동)에 개입하여 시바 요시토시에게 가독을 줄 것을 요시마사에게 요구했고, 요시마사도 이에 응했다. 그러나 유력 다이묘인 야마나 소젠은 시바 요시카도를 지지하여, 이에 반발했다. 사다치카는 요시토시 외에, 일명 무역의 이권을 놓고 호소카와 가쓰모토와 대립하고 있던 오우치 마사히로도 포섭하여 일대 파벌을 결성한 뒤, 요시미에게 반역의 혐의가 있다고 요시마사에게 참소하여 요시미를 배제하려고 했다. 그러나 요시미가 가쓰모토 저택에 달려가 구원을 요청하자, 가쓰모토와 소젠은 결탁하여 요시마사에게 항의했고, 이에 따라 사다치카는 실각하고 교토를 떠났다(분쇼 정변). 측근인 사다치카의 실각으로 요시마사는 쇼군 친정을 할 수 없게 되고, 요시마사의 권위는 추락했다.

오닌의 난 발발지 비석 (가미고료 신사 토리이 앞)


그 후, 소젠은 하타케야마 씨의 가독을 둘러싸고 하타케야마 마사나가와 다투고 있던 하타케야마 요시나리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요시나리에게 상락을 재촉했다. 한편 이것은 마사나가를 지지하는 가쓰모토와의 대립을 의미했다. 요시마사는 소젠・요시나리 진영의 군사적 우위를 깨닫고, 요시나리 지지를 표명하여 마사나가를 간레이직에서 파면하고, 소젠에 가까운 시바 요시카도를 새로운 간레이로 임명했다. 마사나가는 이에 반발하여 가미고료 신사에 진을 치고 쇼군 저택을 노리는 태세를 보였다. 요시마사는 야마나・호소카와 양명에게 하타케야마 가문에 대한 군사 개입을 금지하고, 요시나리와 마사나가를 일대일로 대결시켜 사태를 수습하려 했다. 가쓰모토는 요시마사의 명령에 따랐지만, 소젠은 이를 무시하고 요시나리와 함께 마사나가를 공격했다. 마사나가는 패주하여 가쓰모토의 저택으로 도망쳤다. 파벌의 영수로서 체면을 구긴 가쓰모토는 소젠과의 전면 대결을 결의했다.

이윽고 양자의 대립은 전국 다이묘의 병력을 정치 중심지인 교토에 집결시켜 마침내 대규모 군사 충돌을 일으켰다. 이것이 오닌의 난이다. 진을 친 곳으로부터 호소카와 측을 "동군", 야마나 측을 "서군"이라고 부른다. 가쓰모토의 요청에 따라 요시마사는 동군에게 쇼군기를 주고, 서군을 적군으로 규정했다. 이에 따라 동군은 정당성 면에서 우위를 점했지만, 오우치 마사히로가 입경하자 서군은 형세를 만회했다. 더욱이 요시마사가 사다치카를 정무에 복귀시키자, 이에 반발한 요시미는 서군으로 달아났고, 서군 여러 장수들은 요시미를 새로운 쇼군으로 추대했다. 이에 따라 아시카가 쇼군가는 둘로 분열되었다. 그 후, 전황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양군 사이에 염전 감정이 퍼지지만, 동군의 아카마쓰 마사노리와 서군의 하타케야마 요시나리는 화목에 반대했고, 가쓰모토와 소젠 모두 이러한 화목 반대파를 설득할 수 없었다. 가쓰모토와 소젠이 많은 다이묘를 자기 진영에 끌어들인 결과, 참전 다이묘가 안고 있는 문제의 해결이나 그들이 요구하는 이익 배분에 응하는 것이 어려워져 진영을 통솔할 수 없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수도에서 11년 동안이나 결착이 나지 않는 군사 충돌을 단속적으로 계속하게 되었다. 양군의 총대장인 가쓰모토와 소젠이 잇달아 병사해도, 요시마사가 아들의 요시히사에게 쇼군직을 물려주고 은거해도, 여러 다이묘는 병사를 철수시키지 않았다. 병사를 철수하게 된 것은 지나치게 긴 전쟁에 견디지 못한 영국에서 불안한 움직임이 잇달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오닌의 난은 수도 교토를 초토화시켰을 뿐 승패를 결정짓지 못한 채 종결되었다. 그러나 오닌의 난을 계기로 한 전투는 난 종결 후에도 지방으로 확대되어 간토의 교토쿠의 난도 10년 가까이 전투가 계속되었다. 이 일련의 전투는 일본 전토를 휩쓸고, 센고쿠 시대라고 불리는 혼란스러운 시대로 돌입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후 아시카가 쇼군가에서는 요시마사가 요시히사에게 정무 이양을 선언하고 동산 산장으로 이사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권력을 계속 유지했기 때문에 무로마치 궁과 동산 궁의 이중 권력 상태가 계속되었다. 일본 정원이나 서원조 건물에 열정을 쏟았던 요시마사는 이러한 조영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서도 권력을 내놓을 수 없었다. 이러한 요시마사의 예술 보호는 후의 히가시야마 문화 발전의 기초가 되어 후대의 일본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한편 요시마사의 간섭을 싫어했던 요시히사는 그 치세 말년에는 롯카쿠 다카요리 정벌과 병행하여 요시마사의 영향력을 배제하기 위해 무로마치 제가 아닌 오미에서 정무를 보게 되었다.

또한 오닌의 난 이후 많은 슈고 다이묘가 교토를 떠나 재국하게 되어 수호 재경제(守護在京制)가 형해화되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막부의 권위가 실추했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막부의 권위가 실추함으로써 거기에 근거하고 있던 수호로서의 통치권이 흔들려 다이묘는 자기 힘으로 영국 지배를 유지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하급이었던 슈고다이나 고쿠진 무리에 의한 하극상, 더 나아가 가가 잇코잇키나 야마시로 국 잇키를 대표하는 민중의 잇키에도 그 영국 지배를 위협받게 되는 것이다.

3. 2. 남북조 내란기 (1336년 ~ 1392년)

1333년 가마쿠라 막부 멸망 후 시작된 고다이고 천황겐무 신정은 은상과 영지를 둘러싼 불만과 혼란으로 오래가지 못하고 붕괴 조짐을 보였다. 불만을 품은 무사들은 세이와 겐지 혈통으로 가마쿠라 막부 격파의 공로자인 아시카가 다카우지에게 모여들었고, 고다이고 천황과 다카우지의 대립관계가 깊어졌다. 1336년, 다카우지는 고다이고 천황을 퇴위시키고 북조의 고묘 천황을 옹립하여 막부를 개창했으며, 2년 뒤 세이이타이쇼군에 취임하였다. 이에 맞서 고다이고 천황은 교토를 탈출하여 야마토국 요시노(吉野)에 조정을 열어(남조) 내란이 장기간 계속되었다.[13]

남조는 구스노키 마사시게, 기타바타케 아키이에, 닛타 요시사다 등 주요 무장이 잇따라 전사하고 1339년 고다이고 천황이 사망하였다. 그 후, 기타바타케 지카후사가 남조를 지탱했으나, 각지 무사들도 점차 남조에 등을 돌려 가와치국 구스노키 마사쓰라, 규슈 가네나가 친왕 정도만 남조 측에 남았다. 1348년 마사쓰라가 고노 모로나오가 이끄는 막부군에 패배하여 전사하고, 모로나오가 요시노로 진격하여 요시노 행궁을 불태워 남조는 더욱 변방인 아노(賀名生)까지 밀려났다.

내란의 귀추가 거의 결정된 듯 보였지만, 막부에서는 다음 해 1349년 정무를 맡던 다카우지 동생 아시카가 다다요시와 군무에 뛰어난 쇼군 시쓰지 고노 모로나오 사이의 대립이 일어났다. 결국 슈고와 각국 고쿠닌이 다카우지·모로나오 파와 다다요시 파로 나뉘어 전국 규모 항쟁으로 발전하였다(간노의 소란). 1352년 고노 모로나오가 살해되었으나, 이후에도 동란이 계속되어 세력을 회복한 남군이 교토를 침공하여 북조의 스코 천황을 폐위시키고, 고곤, 고묘, 스코 세 상황과 황태자 나오히토 친황을 납치하였다. 규슈, 주고쿠 지방에서는 다다요시의 양자 다다후유가 세력을 키우고 야마나 씨와 연계하여 교토를 공격하는 등 반막부 저항이 계속되었다.[14]

3. 3. 막부 안정기

1392년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에 의해 남북조가 통일되어 무가(武家)가 최종적으로 우위를 점했다. 쇼군 직할 군사력과 재정 기반은 그다지 강하지 못하여, 중앙 막부가 상위에 서고 지방 권력인 슈고 다이묘가 감독 아래 있는 형태를 취하면서도 상호 보완적인 정치적·경제적 지배를 전개했다.

1367년 제2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라가 사망하고 10세의 아시카가 요시미쓰가 제3대 쇼군에 취임하였다. 간레이 호소카와 요리유키는 어린 쇼군을 보필하며 1368년에는 남군의 장수 구스노키 마사노리를 배반하게 하고, 규슈의 남조 세력 제거를 위해 이마가와 사다요를 파견하였다. 1379년 고랴쿠 정변으로 요리유키가 실각하고 후임으로 시바 요시유키가 취임한다. 요시미쓰는 호코슈(奉公衆)라는 군사력을 갖추고, 유력 슈고 다이묘인 야마나 씨와 오우치 씨를 도발하여 각각 메이토쿠의 난, 오에이의 난으로 토벌하고, 쇼군 권력을 굳혀나가 남북조를 통일하여 강력한 권력을 확립했다.

1408년 아시카가 요시미쓰가 급사하자 4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모치태상천황 시호를 사양하고 감합무역에서 명과의 통상을 일시 정지하는 등 요시미쓰의 정책을 부정하였다. 1423년 아들 아시카가 요시카즈에게 쇼군을 물려주었으나 요절하고, 요시모치도 후계자를 정하지 못한 채 사망하였다. 후임 쇼군은 제비뽑기로 정해져 아시카가 요시노리가 제6대 쇼군이 되었다.

3. 4. 막부 쇠퇴기와 오닌의 난 (1467년 ~ 1477년)

8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는 예술과 건축에는 뛰어났지만,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다. 정치는 쇼군의 정실 히노 도미코와 측근, 유력 다이묘 간의 권력 다툼의 장이 되었다. 간토에서 가마쿠라 구보의 부활을 둘러싼 교토쿠의 난이 발생했지만, 막부는 방관했다.

요시마사는 동생 아시카가 요시미를 후계자로 삼으려 했으나, 아들 아시카가 요시히사가 태어나면서 후계자 문제가 발생했다. 호소카와 가쓰모토를 필두로 하는 요시미 지지파와 야마나 소젠이 이끄는 요시히사 지지파가 대립했고, 하타케야마 가문과 시바 가문의 가독 승계 다툼이 얽히면서 문제는 더욱 복잡해졌다.

결국, 양측의 대립은 오닌의 난으로 이어졌다. 전국의 다이묘들이 교토에 집결하여 대규모 군사 충돌이 발생했다. 호소카와 측은 "동군", 야마나 측은 "서군"으로 불렸다. 동군은 쇼군기를 받아 정당성에서 우위를 점했지만, 오우치 마사히로가 입경하면서 서군이 형세를 만회했다. 요시미는 서군으로 달아났고, 서군은 요시미를 새 쇼군으로 추대하여 아시카가 쇼군가는 분열되었다.

전황이 교착되자 양군에 염전(厭戰) 감정이 퍼졌지만, 화목 반대파를 설득하지 못해 11년간 결판이 나지 않았다. 요시마사가 요시히사에게 쇼군 직을 물려주고 은거하고, 양군 총대장인 호소카와 가쓰모토와 야마나 소젠이 병사해도 다이묘들은 병사를 물리지 않았다. 긴 전쟁에 견디지 못한 영지에서 불안한 움직임이 잇따르자 병사를 철수하게 되었다.

오닌의 난은 교토를 초토화시켰을 뿐 승패를 결정짓지 못하고 종결되었다. 하지만 이 난을 계기로 전란은 지방으로 확대되었고, 간토의 교토쿠의 난도 10년 가까이 계속되었다. 이 전란은 일본 전역을 휩쓸며 센고쿠 시대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오닌의 난 이후, 막부의 정치적·경제적 기반은 붕괴되었고 쇼군의 권위는 이름뿐이었다. 요시마사는 긴카쿠지를 비롯한 히가시야마 산장 조영 등 예술에 몰두했다.[16]

얄궂게도 쇼군의 권위를 경시하던 다이묘들은 슈고 임명권자인 쇼군의 권위 상실로 자신들의 통치권마저 잃어버렸다. 슈고다이, 고쿠진 등에 의한 하극상, 민중의 잇키로 인해 많은 다이묘가 몰락했다.

3. 5. 센고쿠 시대 (1493년 ~ 1573년)

오닌의 난(1467~1477) 이후, 쇼군의 권위는 완전히 실추되고 막부의 권력도 쇠퇴하였다. 하지만 쇼군의 군사적인 실권은 어느 정도 유지되고 있었다. 난 후에는 쇼군의 권위에 기댄 간레이 호소카와 마사모토가 절대적인 권력자로 대두하였다. 요시히사의 사후, 쇼군의 자리는 요시미의 아들 아시카가 요시키(足利義材)가 계승하였지만, 요시키와 대립한 마사모토는 요시키와 손잡은 전 간레이 하타케야마 마사나가(畠山政長)를 토벌하고 메이오 정변으로 쇼군 요시키를 추방, 아시카가 요시즈미를 새로운 쇼군으로 옹립했다. 센고쿠 시대의 시작은 앞서 일어난 오닌의 난을 계기라고 여기는 경우가 많았으나, 근래에는 메이오 정변을 계기로 보는 설이 유력해지고 있다.

가신인 간레이가 쇼군을 쫓아낸 이 사건에 의해 마사모토는 호소카와 가문에 의한 간레이 직의 세습화와 독점 상태를 확립하고 쇼군의 폐위권마저 손에 넣었지만, 그 천하도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고 자신의 후계자를 둘러싼 가문의 내분으로 살해당했다. 이후 마사모토의 양자인 호소카와 스미모토(細川澄元)와 호소카와 다카쿠니(細川高国)가 간레이 직을 두고 싸움을 시작했다. 이를 안 전 쇼군 요시타네(요시키)는 오우치 요시오키의 지원으로 상경하여 호소카와 다카쿠니의 마중을 받아 쇼군 직에 복귀했다. 하지만 오우치 요시오키가 자신의 영지의 정세에 의해 귀국하자, 다카쿠니는 태도를 바꾸어 망명지에서 죽은 요시즈미의 아들인 아시카가 요시하루(足利義晴)를 새 쇼군으로 옹립하고 요시타네와 스미모토의 연합군을 물리쳤다.

최종적으로 스미모토의 아들 호소카와 하루모토(細川晴元)가 다카쿠니를 물리치고 요시하루를 새 쇼군으로 인정하여 그의 간레이가 되는 것으로 20년 이상에 걸친 내분에 종지부를 찍었다. 결국, 일련의 내분으로 막부 자체가 쇠퇴하여 교토 주변을 다스리는 데 불과한 일개 지방정부로 전락하여, 가까스로 슈고를 대신하여 전국을 할거한 센고쿠 다이묘에게 권위를 부여하는 기관 정도의 존재감 밖에 갖지 못하는 존재로 전락하였다.

그러나 하루모토는 정권 획득의 최종 단계에서 큰 공을 세운 가신 미요시 모토나가(三好元長)를 살해한 것이 후년에 큰 맹점으로 남는다. 모토나가의 아들인 미요시 나가요시 형제는 부친의 복수를 위하여 반기를 들고 거병하여 하루모토를 추방하고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를 괴뢰화하였다. 나가요시는 하루모토의 후임으로 괴뢰 간레이를 세워 그 정권을 빼앗고 쇼반슈의 일원으로서 막부 정치의 전권을 장악했다. 하지만 말년에는 그 역시 중신 마쓰나가 히사히데에게 실권을 빼앗기고 병사했다.

이 상황을 본 쇼군 요시테루는 우에스기 겐신(간토 간레이)을 비롯한 친 쇼군 파 센고쿠 다이묘의 지원을 받으면서 쇼군 권위의 재건을 꾀해보지만, 마쓰나가 일파의 쿠데타(에이로쿠의 변)에 의해 암살당했다. 그의 동생 아시카가 요시아키는 간레이 시바 가문의 전 가신 오다 가문의 오다 노부나가의 지원을 받아 상경하여 마쓰나가 일파를 굴복시키고 쇼군에 취임하였다. 하지만, 얼마 안 있어 '''천하포무'''를 외치며 새로운 질서 형성을 향하는 노부나가와 종래의 쇼군, 막부 중심의 질서 재건을 꾀하던 요시아키는 적대하게 되고, 1573년에 요시아키는 노부나가에 의해 교토에서 추방당하고 막부 조직은 노부나가가 만든 정치 기구에 해체, 흡수당했다.

이후에도 요시아키는 세이이타이쇼군에서 해임당하지 않은 정통성을 가지고 각지를 전전하며 다이묘를 회유하여 노부나가 토벌 활동을 벌였으나, 노부나가에 의한 새로운 질서 형성의 기세 앞에서는 무력하여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여 요시아키의 교토 추방 시점으로 무로마치 막부 및 무로마치 시대는 끝을 맞게 된다.

15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

4. 경제

무로마치 시대에는 농업과 공업 기술이 발전하고 생산량이 증가하면서 국내외 유통이 활발해졌다. 특히 농민과 상인층이 사회적으로 크게 성장하였는데, 이는 이전 시대에는 볼 수 없었던 현상이었다. 이 시기는 구세력이 몰락하고 신세력이 부흥하는, 이른바 하극상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14]

잦은 전쟁으로 인해 경제가 불안정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군대의 이동은 오히려 수송과 통신을 발달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관세와 통행세 수입 증가로 이어졌고, 상업은 이러한 세금을 피할 수 있는 중앙 지역과 세토 내해로 이동하게 되었다. 경제가 발전하고 무역 성과를 보호해야 할 필요성이 커지면서 상인과 장인들은 길드를 설립하였다.[14]

무로마치 막부는 단전(段銭)·동별전(棟別銭) 등 돈으로 세금을 납부하는 제도를 시행했고, 토장(土倉)이나 주점(酒屋)으로부터 토장역(土倉役)·주점역(酒屋役) 등 막대한 세금을 부과했다.

영락통보


표준 화폐는 영락통보였지만, 막부는 화폐를 주조하지 않고 나라와의 무역으로 명전을 수입하여 유통시켰다. 동일본에 화폐 경제가 침투하면서 통화 수요가 증가함에 따라 유통 화폐가 부족해졌다. 대체 통화로 사주전 등 위조 동전이 대량으로 유통되었지만, 수취 거부로 인해 상거래 결제에 차질을 빚게 되자 유력한 슈고 다이묘와 막부는 여러 차례 선전령으로 규정 비율의 악전 수취 거부를 규제하였다. 서일본에서는 명전은 위조 동전과 마찬가지로 싫어했다. 특히 상인들 사이에서는 수백 년간의 유통 실적이 있는 송전이 가장 신뢰를 받았고, 송전을 축적하면서 지불에는 명전이나 위조 동전을 이용하여 서로에게 떠넘기는 그레셤의 법칙이 나타났다.[14]

시장 성립과 교통 정비는 도시 발전을 촉진했다. 농업 생산량 향상으로 잉여 생산물이 상품으로 시장에 유통되고, 농촌에도 상품 경제와 화폐 경제가 침투해 간 것이 무로마치 시대 전기부터 중기의 경향이다.



센고쿠 시대에는 일본 전역에서 광산 개발, 특히 금광산과 은광산 개발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1533년 하카타의 상인 神屋寿禎(카미야 스즈토시)이 조선으로부터 회취법을 도입하여 石見銀山(이시미 은광산)에서 실시하였는데, 이 기술은 은 생산량을 크게 증대시켰다. 회취법은 은광산뿐만 아니라 금광산 개발에도 크게 기여했다.

4. 1. 농업

가마쿠라 시대부터 이모작 기술이 서일본에서 관동 지방으로 확산되었고, 우마경, 수차 등을 이용한 관개 시설 정비 및 비료 발달로 농업 생산력이 향상되었다. 이러한 농업 기술 발전은 집약적·다각적인 농업을 가능하게 하여 자립 농민의 성장을 촉진하고 향촌제의 성립을 가져왔다.[14] 특히 벼는 오늘날 베트남에서 참성미(당시에는 중국에서 유입되었기 때문에 "대당미" 등으로 불렸다)가 전래되어 수확량이 증가했다. 이 품종은 이전의 것보다 병충해와 가뭄에 강했다.

16세기 모내기 풍경(월차풍속도 병풍)


무로마치 시대 후기에는 쇼엔 영주와 센고쿠 다이묘가 광범위한 관개 공사와 치수 사업 등을 실시하여 신개지가 증대되고 저습지대가 안정화되면서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향상되었다.

또한 이 시기부터 수공업 원료가 되는 뽕나무, 닥나무 등도 재배되었다. 그 전까지는 수입에 의존하던 목화 재배도 16세기경부터 미카와 지방에서 시작되었다. 이 목화 생산은 범포로서의 용도가 있어 해운 사업 면에서도 많은 이익을 가져왔다. 이 밖에 비파, , 감, 박과 등의 과일류 유통이 발전하여 산지 이름을 붙여 부르게 된 것도 무로마치 시대부터이다.

4. 2. 수공업

농민의 자립이 진행됨에 따라, 궁정에 속해 있던 기능공들도 해방되어 자립하면서 수공업이 일반적으로 행해지고 시장이 형성되었다. 일용품, 농기구, 직물, 종이 등이 생산되었다. 오늘날 각 지방의 특산물 중 상당수는 무로마치 시대에 기원을 두고 있다. 교토 니시진에서는 명나라에서 수입한 생사를 이용하여 고급 직물인 니시진오리가 생산되었다.

일명 무역의 영향으로 사카이, 야마구치, 하카타 등에서도 고급 직물이 생산되기 시작했다. 사찰 건립이 지방으로 확대되면서 제지업이 크게 발전했고, 오닌의 난 전후부터 도자기 제작업이 지방으로 확산된 점이 무로마치 시대의 특징이다.

무로마치 시대 전기에는 큰 사찰의 개수 및 건립, 후기에는 센고쿠 다이묘의 성곽·군선 등의 건설과 관련하여 가마쿠라 시대보다 임업이 발달하고 유통도 이루어졌다. 덴몬 초년 본원사 수축에 토사 국에서 자재를 조달했으며, 덴몬 연간 교토의 재목 시장에서는 미노와 히다의 목재가 거래되었다.

4. 3. 상업

무로마치 시대에는 농업 생산력이 향상되고 수공업이 독립하면서 시장이 형성되었고, 도시와 교통 요지에는 시장이 발달하였다. 가마쿠라 시대의 삼재시(三斎市)에서 월 6회 정기적으로 열리는 육재시(六斎市) 등의 정기시장이 등장했고, 도시 지역에서는 점포(見世棚)를 가진 상설 점포와 특정 상품만을 취급하는 도매 시장, 도매업(卸売業)을 영위하는 도매상(問屋)도 나타났다. 행상인은 연작상인(連雀商人)이라 불렸다.

헤이안 시대부터는 공가(公家)나 사찰을 본소(本所)로 하여 판매 독점권이나 관세 면제 등의 특권을 얻는 좌(座)라는 폐쇄적인 상업 독점 체제가 성장했지만, 전국 다이묘(大名)에 의해 자영 영업을 허가하는 락시·락좌(楽市・楽座) 정책으로 폐지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무로마치 막부는 단전(段銭)·동별전(棟別銭) 등 돈으로 세금을 납부하는 제도를 시행했고, 토장(土倉)이나 주점(酒屋)으로부터 토장역(土倉役)·주점역(酒屋役) 등 막대한 세금을 부과했다.

잦은 군대 이동은 지역 경제를 교란시키기보다는 수송과 통신의 발달을 촉진했고, 이는 관세와 통행세의 추가적인 수입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수수료를 피하기 위해 상업은 어떤 다이묘도 통제할 수 없었던 중앙 지역과 세토 내해로 이동했다. 경제 발전과 무역 성과 보호에 대한 욕구는 상인과 장인 길드의 설립으로 이어졌다.[14]

4. 4. 화폐 경제



표준 화폐는 영락통보였지만, 무로마치 막부는 화폐를 주조하지 않고 나라와의 무역으로 명전을 수입하여 유통시켰다. 동일본에 화폐 경제가 침투하면서 통화 수요가 증가함에 따라 유통 화폐가 부족해졌다. 승산기에 따르면 1514년, 1515년, 1516년, 1519년, 1525년, 1529년에 돈이 부족한 상태에 빠졌다고 기록되어 있다(원인으로는 10대 쇼군 足利義稙파와 11대 쇼군 足利義澄파의 정치적 불안과 대영 3년의 닝보의 난에 의한 사무역 거부 및 밀무역 단속 강화가 고려된다). 대체 통화로 사주전 등 위조 동전이 대량으로 유통되었지만, 수취 거부로 인해 상거래 결제에 차질을 빚게 되자 유력한 슈고 다이묘와 막부는 여러 차례 선전령으로 규정 비율의 악전 수취 거부를 규제하였다. 동일본에서는 영락전이 선호되어 유통되었지만, 서일본에서는 명전은 위조 동전과 마찬가지로 싫어했다. 특히 상인들 사이에서는 수백 년간의 유통 실적이 있는 송전이 가장 신뢰를 받았고, 송전을 축적하면서 지불에는 명전이나 위조 동전을 이용하여 서로에게 떠넘기는 그레셤의 법칙이 나타났다.[14]

4. 5. 도시

1336년 고다이고 천황과 대립한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지묘인 계통(持明院統)[13]고묘 천황을 옹립하고 막부를 개창하면서 무로마치 시대가 시작되었다. 시장 성립과 교통 정비는 도시 발전을 촉진했다. 농업 생산량 향상으로 잉여 생산물이 상품으로 시장에 유통되고, 농촌에도 상품 경제와 화폐 경제가 침투해 간 것이 무로마치 시대 전기부터 중기의 경향이다. 또한, 이 시대에는 이세 신궁 참배와 사이구 33곳 순례 등 사찰 참배가 유행하여 사람들의 왕래가 활발해짐에 따라 숙(宿)을 중심으로 한 역참마을이 가도를 따라 발생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교통 발전은 교통업자 발달을 촉진했고, 역참마을은 점차 커져 갔다. 더욱이 오닌의 난은 여러 도시의 발전을 가져왔다.

그 후, 수호대명은 성하마을을 정비했다. 동시에 지성을 지역 지배 거점으로 삼고, 본거지와 지성을 잇는 가도를 정비함으로써 가도변 역참도 보호되고 확대되어 갔다. 이러한 역참에서는 통행세인 관전을 징수하기도 했지만, 영내 필요 물자의 중계·유통 거점이 되어, 이에 따른 인구 증가는 분국 경제의 일부가 되었다. 동시에, 가마쿠라 시대에는 모호했던 도시와 농촌 구분이 명확해지면서 봉건 사회에서 신분제 발생의 단초가 되었다.

사카이(오사카부사카이시)나 하카타(후쿠오카현후쿠오카시) 등에서는 회합중을 중심으로 자치적인 도시 운영을 하고 있었고, 오닌의 난 이후에는 무장하여 방위를 강화하며 자치적인 성격을 가졌다. 중세 대표적인 자치 도시인 사카이는 선교사도 "동양의 베네치아"라고 평가하는 문서를 남겼고, 오다 노부나가에게 항복할 때까지 자치를 행했다. 일향종 사찰을 중심으로 형성된 사찰내마을도 자치적인 성격을 가졌다. 대표적인 사찰내마을에는 셋쓰 국 이시야마(오사카부)나 에치젠국요시자키(후쿠이현), 후타바야시(오사카부 후타바야시시) 등이 있다. 이들은 노부나가에 의한 일향일기 평정으로 해체되었다.

4. 6. 광업

무로마치 시대, 특히 센고쿠 시대에 접어들면서 일본 전역에서 광산 개발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특히 금광산과 은광산 개발이 전국 다이묘들에 의해 적극적으로 추진되었으며, 사료상 최초로 기록된 덴분 2년(1533년)에 하카타의 상인 神屋寿禎(카미야 스즈토시)이 조선으로부터 도입하여 石見銀山(이시미 은광산)에서 실시한 회취법에 의한 생산량 증대가 특히 주목할 만하다. 이 회취법은 은광산에서도 효과적이었지만, 그 이전까지는 모래금에서 채취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금광산 개발에도 크게 기여했다.

5. 교통

가마쿠라 시대 말기부터 화폐경제가 지방에도 보급되면서 화폐경제의 보급과 서민의 성장에 따른 지방 도시가 발달하였다. 원거리 상품 유통과 공납 수송을 위해 가도가 정비되면서 지방 문화 교류도 활발해졌다. 육상 교통에서는 말꾼, 수레꾼 등의 육상 운송업자가, 해상 교통에서는 회선을 이용하여 수송과 위탁 판매를 하는 중개업자인 문환이 활약했다. 항구와 가도의 요충지에는 막부와 사찰, 지방 영주 등에 의해 관소가 설치되어 관전과 진료를 징수했다. 교토 칠관 등이 그 예이다.

무로마치 시대의 말꾼(『석산사연기화권』)

6. 대외 관계

무로마치 시대의 배(1538년)


무로마치 시대에는 왜구라 불리는 무국적 해상 세력이 활동했는데, 이들은 조선반도와 중국 연안, 동남아시아에 걸쳐 해적 행위와 밀무역 등을 일삼았다. 14세기 왜구를 전기 왜구, 15세기 왜구를 후기 왜구로 구분한다. 한편, 대항해시대를 맞아 포르투갈, 스페인 등 유럽인들도 동아시아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명나라(1368~1644)는 중국 연안의 일본 해적(왜구) 진압을 위해 일본에 지원을 요청했고, 아시카가 요시미쓰는 중국과의 관계 개선 및 왜구 위협 제거를 위해 1401년 조공 체제를 재개, 50년간 관계를 지속했다. 일본은 목재, 유황, 구리 광석, 칼 등을, 중국은 비단, 도자기, 책, 화폐 등을 교환했는데, 중국은 조공으로, 일본은 수익성 있는 무역으로 여겼다.[1] 일명무역(간합무역)에서 왜구와 구분하기 위해 사카이하카타 등지에서 배를 출항시켜 닝보에서 간합부를 조사받았다. 아시카가 요시모토가 무역을 일시 중단했으나, 아시카가 요시노리가 재개했고, 이후 오우치 씨가 무역 실권을 장악했다.

아시카가 요시미쓰는 왜구를 단속하고 조선과 교역했다. 1375년 조선통신사 파견을 시작으로 15세기 중반까지 교류가 이어졌다. 1419년에는 조선이 대마도를 습격한 응영의 외구가 발생했고, 미우라의 난과 같은 사건도 있었다.

1429년 류큐왕국(琉球王国)이 건국된 후, 류큐는 명나라 책봉을 받고 조선, 말라카, 파타니, 안남(安南), 아유타야 등과 중계무역(中継貿易)을 했다. 1414년 쇼군 아시카가 요시모치가 류큐 왕에게 답례 서장을 보냈는데, 무로마치 시대에 류큐는 "일본"으로 인식되었다.

고려 말기 에조(蝦夷) 반란 이후, 에조관령(蝦夷管領) 안동씨(安東氏)가 십삼항(十三湊)을 근거지로 번영했으나 남부씨(南部氏)에 밀려 북주(北州)(홋카이도(北海道))로 이동했다. 북주에서 화인(和人)(대화민족(大和民族)) 세력이 확장되며 아이누와 충돌이 발생했고, 1457년 코샤마인(コシャマイン)이 이끄는 아이누 부족이 봉기하기도 했다.

무로마치 시대 말, 규슈 남쪽 타네가시마에 포르투갈인이 상륙하면서(1543년) 남반 무역 시대(南蛮貿易時代)가 시작되었다. 1551년 프란시스코 하비에르가 일본을 방문했고,[7] 이후 스페인(1587년), 네덜란드(1609년)도 일본에 도착했다. 일본은 유럽 문물을 연구하며 경제적 기회를 얻었지만, 정치적 과제도 발생했다. 유럽의 총기, 직물, 유리 제품, 시계, 담배 등이 일본의 금, 은과 교환되며 무역을 통해 부가 축적되었고, 특히 규슈의 하급 다이묘들이 권력을 키웠다. 화기 도입으로 지방 전쟁은 더욱 치명적이 되었다.

6. 1. 왜구와 서양인의 도래



일본과 명나라(1368~1644)의 교류는 명나라가 무로마치 시대 중국 연안 지역의 일본 해적 진압을 위해 일본에 지원을 요청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시대와 지역의 일본 해적은 중국에서 '왜구'(일본어: わこう, wakō)로 불렸다. 아시카가 요시미쓰는 중국과의 관계 개선과 왜구의 위협 제거를 위해 중국과 50년간 지속될 관계를 수립했다. 1401년 그는 조공 체제를 재개하여 중국 황제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을 "폐하의 신하, 일본의 왕"이라고 칭했다. 일본산 목재, 유황, 구리 광석, 칼, 접이식 부채는 중국산 비단, 도자기, 책, 화폐와 교환되었는데, 중국은 이를 조공으로 여겼지만 일본은 수익성 있는 무역으로 여겼다.[1]

남반 무역선이 일본에 도착하는 모습. 16세기 그림.


무로마치 시대 말기에 최초의 유럽인들이 일본에 도착했다. 1543년 포르투갈인들이 규슈 남쪽의 타네가시마에 상륙했고, 2년 안에 정기적인 항구 방문을 시작하여 100년간 지속된 남반 무역 시대(南蛮貿易時代)를 열었다. 1551년에는 나바라 출신의 로마 가톨릭 선교사 프란시스코 하비에르가 일본을 방문한 최초의 서양인들 중 한 명이었다.[7]

1587년에는 스페인인들이, 1609년에는 네덜란드인들이 도착했다. 일본인들은 유럽 문명에 대한 심층적인 연구를 시도하기 시작했고, 경제에 새로운 기회가 제시되는 한편 심각한 정치적 과제가 제기되었다. 유럽의 총기, 직물, 유리 제품, 시계, 담배 및 기타 서양의 혁신적인 제품들이 일본의 금과 은과 교환되었다. 무역을 통해 상당한 부가 축적되었고, 특히 규슈의 하급 다이묘들은 권력을 크게 증가시켰다. 머스킷과 대포와 같은 화기의 도입과 보병의 증가된 사용으로 지방 전쟁은 더욱 치명적이 되었다.

室町時代에는 왜구(倭寇)라 불리는 무국적 해상 세력이 활동했는데, 14세기의 왜구는 전기 왜구, 15세기의 왜구는 후기 왜구로 불린다. 왜구는 조선반도와 중국 연안, 동남아시아에 걸친 동아시아 지역에서 활동하며 해적 행위와 밀무역 등을 자행했다. 더불어 세계사적으로는 대항해시대를 맞이하여 포르투갈과 스페인 등 유럽인들도 동아시아에서 활동 영역을 넓혀가고 있었다.

6. 2. 명과의 관계



일본과 명나라(1368~1644)의 교류는 명나라가 무로마치 시대 중국 연안 지역의 일본 해적 진압을 위해 일본에 지원을 요청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시대와 지역의 일본 해적은 중국에서 '왜구'(일본어: わこう|와코일본어)로 불렸다. 요시미쓰는 중국과의 관계 개선과 왜구의 위협 제거를 위해 중국과 50년간 지속될 관계를 수립했다. 1401년 그는 조공 체제를 재개하여 중국 황제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을 "폐하의 신하, 일본의 왕"이라고 칭했다. 일본산 목재, 유황, 구리 광석, 칼, 접이식 부채는 중국산 비단, 도자기, 책, 화폐와 교환되었는데, 중국은 이를 조공으로 여겼지만 일본은 수익성 있는 무역으로 여겼다.[1]

일명무역(간합무역)에서 왜구와 구분하기 위해 상업 도시 사카이와 규슈의 항구 도시인 하카타와 보진(가고시마현 미나미사쓰마시 보진정보진)에서 배를 출항하여, 닝보에서 간합부를 조사받았다. 아시카가 요시모토가 과의 무역을 일시 중단하였으나, 아시카가 요시노리가 간합무역을 재개하였다. 호소카와 씨와 오우치 씨가 실권을 놓고 충돌하여(닝보의 난), 이후 오우치 씨가 무역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6. 3. 조선과의 관계

아시카가 요시미쓰왜구를 단속하고 조선과의 교역을 했다.

  • 조선통신사 - 1375년에 아시카가 요시미쓰에게 신의를 통하게 하는 사자로서 파견된 것이 시작이다. 조선통신사는 아시카가 요시미쓰로부터의 사자와 국서에 대한 답례로 파견되었으며, 15세기 중반까지 이어졌다.
  • 응영의 외구 - 1419년(응영 26년)에 일어난 조선의 대마도 습격.
  • 미우라의 난 - 미우라 (내이포(진해시), 부산포(부산시), 염포)에 정주하는 일본인의 반란.

6. 4. 류큐와의 관계

1429년에 중산왕(中山王) 상씨(尚氏)가 삼산(三山)을 통일하여 류큐왕국(琉球王国)을 건국하고 명나라의 책봉을 받았다. 국가 경제를 무역에 의존하던 류큐왕국은 명나라 외에도 조선, 말라카 왕국(マラッカ王国), 파타니 왕국(パタニ王国), 안남(安南), 아유타야 왕조(アユタヤー王朝) 등 동남아시아(東南アジア)에 걸쳐 광범위한 독자적인 중계무역(中継貿易)을 실시했다. 1414년에는 쇼군 아시카가 요시모치가 류큐왕의 헌상물에 대한 답례의 서장을 보냈는데, 무로마치 시대에는 류큐가 “일본”으로 인식되었다.

6. 5. 북방 세계

고려 말기에는 에조(蝦夷)의 반란이 가마쿠라 막부를 뒤흔들었고, 막부 멸망 후에는 에조관령(蝦夷管領)인 안동씨(安東氏)가 십삼항(十三湊)을 근거지로 번영하였으나, 곧 남부씨(南部氏)의 흥륭으로 북주(北州)(에조(蝦夷)지, 홋카이도(北海道))로 도망친다. 북주에서는 화인(和人)(대화민족(大和民族))의 거주 세력이 넓어지면서 토착의 아이누 민족과의 충돌이 발생한다. 1457년에 아이누의 족장인 코샤마인(コシャマイン)이 이끄는 부족이 봉기하여 가키자키씨(蠣崎氏)와 다케다 노부히로(武田信広) 등과 싸운다.

7. 문화

무로마치 시대는 가마쿠라 시대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출신 불명의 농민, 상인층의 사회 진출이 가능해져, 일본 역사상 최초로 민중이 크게 활약한 시대이기도 하다. 구세력의 몰락과 신세력의 부흥 시대로 파악할 수 있으며,(하극상) 전란이 계속되는 시대였지만, 경제면에서는 농업·공업과 함께 기술 향상으로 생산도 증대되어 내외 유통이 활발해졌다.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 시대의 북산 문화는 중앙집권적이고 공가 문화와 무가 문화, 그리고 중국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반면 8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 시대의 동산 문화는 서민적이고 와비사비라는 선종 등의 영향이 강한 것이 특징이다. 오닌의 난으로 교토가 황폐해지면서 문화는 지방으로 전파되었고, 소손과 도시의 발달에 따라 성장하고 있던 서민에게도 문화가 스며들었다.[14]

건축, 문학, 노극, 교겐(희극), 시가, 사루가쿠(민속 오락), 다도, 정원 조경, 화도 등 모든 종류의 예술이 무로마치 시대에 번영했다. 가마쿠라 시대에는 사찰에서만 사용되던 기와가 성곽 건축에 사용되게 되고, 이윽고 마치야에도 퍼지게 되었다. 동시에 다도·노가쿠·서원조 등 오늘날 문화의 원형으로 생각되는 것이 이 시대에 확립되었다.

선종은 종교적 가르침과 실천뿐만 아니라 중국 (960~1279), 원, 명 왕조의 회화에서 파생된 영향을 포함한 예술과 문화 전파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2] 막부와 궁정의 근접성으로 인해 황실 가족, 신하, 다이묘, 사무라이, 선승들이 서로 밀접하게 교류하게 되었다.[2]

7. 1. 북산 문화와 동산 문화

아시카가 요시미쓰 시대와 아시카가 요시마사 시대에는 각각 특징적인 문화가 번영하여, 북산문화(北山文化)·동산문화(東山文化)라고 불린다.[14] 남북조 시대의 활력을 배경으로, 3대 쇼군 요시미쓰 시대의 북산문화는 중앙집권적이고 공가 문화와 무가 문화, 그리고 중국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반면 8대 쇼군 요시마사 시대의 동산문화는 서민적이고 "와비사비(わび・さび)"라는 선종(禪宗) 등의 영향이 강한 것이 특징이다. 오닌의 난으로 교토가 황폐해지면서 문화는 지방으로 전파되었고, 소손(惣村)과 도시의 발달에 따라 성장하고 있던 서민에게도 문화가 스며들었다.[14]

선종은 종교적 가르침과 실천뿐만 아니라 중국 송(宋)(960~1279), 원(元), 명(明) 왕조의 회화에서 파생된 영향을 포함한 예술과 문화 전파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2] 막부(幕府)와 궁정의 근접성으로 인해 황실 가족, 신하, 다이묘(大名), 사무라이, 선승들이 서로 밀접하게 교류하게 되었다.[2]

건축, 문학, 노(能)극, 교겐(狂言, 희극), 시가, 사루가쿠(猿樂, 민속 오락), 다도(茶道), 정원 조경, 화도(華道) 등 모든 종류의 예술이 무로마치 시대에 번영했다. 무로마치 시대 후기, 센고쿠 시대가 되면서 성곽 건축(城郭建築)이 발전하였다. 초기의 성곽은 전쟁을 위한 군사 시설이 주목적이었지만, 영토가 넓어짐에 따라 호화롭게 변모하였다. 가마쿠라 시대에는 사찰에서만 사용되던 기와가 성곽에 사용되게 되고, 이윽고 마치야(町屋)에도 퍼지게 되었다. 동시에 다도·노가쿠(能楽)·서원조(書院造) 등 오늘날 문화의 원형으로 생각되는 것이 이 시대에 확립되었다.

  • 자세한 내용은 무로마치 문화(室町文化)·북산문화(北山文化)·동산문화(東山文化) 항목을 참조.

7. 2. 건축 및 정원

아시카가 요시미쓰가 기타야마에 건조한 금각사(鹿苑寺 금각)는 궁궐 건축 양식과 선종 사찰 건축 양식을 융합한 것으로, 기타야마 문화를 대표하는 건축물이다. 아시카가 요시마사가 건립한 은각사(慈照寺 은각)는 선종 사찰 건축 양식에 서원 양식을 결합한 건축물이며, 누각 건축 또한 이 시대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慈照寺 내 동구당 동인재는 4.5畳 규모의 방으로, 초기 서원 양식으로 여겨지며, 오늘날의 일본식 건축의 원형이 되고 있다. 이 외에도 상공업의 발전에 따라 낙중낙외도 병풍 등에는 서민의 주택에도 2층 건물이 그려지는 등, 부유층의 증가를 확인할 수 있다.[1]

7. 3. 회화 및 조각

선종(禪宗)은 종교적 가르침과 실천뿐만 아니라 중국 (宋)(960~1279), 원(元), 명(明) 왕조의 회화에서 파생된 영향을 포함한 예술과 문화의 전파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막부(幕府)와 궁정의 근접성으로 인해 황실 가족, 신하, 다이묘(大名), 사무라이, 선승들이 서로 밀접하게 교류하게 되었다. 무로마치 시대에는 재구성된 『벽암록(碧巖錄)』이 일본 선종 문헌의 중심적인 경전이 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그 위치를 유지하고 있다.[2]

건축, 문학, (能)극, 교겐(狂言, 희극), 시가, 사루가쿠(猿樂, 민속 오락), 다도(茶道), 정원 조경, 화도(華道) 등 모든 종류의 예술이 무로마치 시대에 번영했다. 새로운 선종 사찰들은 중국적 배경과 가마쿠라 시대의 무사 정권을 바탕으로 후지와라 전통에 필적할 만한 독특한 문화적 유산을 만들고자 했다. 따라서 중국 화승들이 사찰에 자주 초청되었고 일본 승려들은 중국과 오가며 교류했다. 이러한 교류는 무로마치 시대의 수묵화를 탄생시켰는데, 이는 종종 중국적 주제, 중국 수묵 기법, 유려한 묘사선, 건필, 그리고 거의 보이지 않는 얼굴 표정 등을 포함했다. 초기의 창작적 제약에도 불구하고, 일본 선 수묵화는 요소들이 일본식으로 재배치되고 붓놀림이 부드럽고 유려하며 더욱 충동적인 표현이 되면서 곧 시적이고 토착적인 표현에 도달했다.[6]

세이슈(雪舟) 필 아마노하시다테도(天橋立図)


회화에서는 아시카가 쇼군가의 부하인 동朋衆(도우보우슈우)의 노아미(能阿弥)·신아미(真阿弥) 등에 의한 산수화나, 화승인 메이쵸(明兆)·뇨세쓰(如拙)·슈분(周文) 등을 거쳐 세이슈(雪舟)에 의한 수묵화가 완성되었다. 여기에는 문화의 담당자로서 궁정이나 공가뿐만 아니라 무가와 무가와의 관계가 강한 선종 사찰이 존재했던 것이 영향을 미치고 있다.

카노 모토노부(狩野元信)는 수묵화와 야마토에(大和絵)의 기법을 융합시켜 나중에 가노파(狩野派)로 불리게 된다. 이들은 불화 등의 종교화와는 달리 세속적, 또는 예술적인 측면으로서의 회화의 발생이라고 말할 수 있다. 동시에 서민 계급의 부유화에 따라 풍속 병풍도나 유락도 등, 풍속화라고 해야 할 회화도 발생하고 있다. 또한, 교역의 발전에 따른 해외 회화 기술의 영향이 보인다.

조각에서는 그 이전까지의 불교 조각에 더하여 노면 조각이 만들어지게 된다. 한편, 가마쿠라 시대와 비교하면 불상 조각은 쇠퇴했다. 구 불교 사찰에서 선종에 의한 신불교 사찰로의 변화나, 공가 정권하와는 달리 무가 정권하에서는 새로운 사찰의 건립 수가 줄어든 것 등, 여러 가지 요인이 있다고 생각된다. 어느 쪽이든 이 시대의 불상은 경파(慶派)와 같은 유파가 아니라, 개인의 불사(佛師)가 손댄 작례가 더 유명하며, 전체적으로는 적다. 그 한편, 성곽이나 서원의 발달에 따라 건축의 장식 조각은 발전기에 해당하며, 후의 도요토미 건축을 특징짓는 목조 장식의 원형이 무로마치 시대 후기에 발생했다.

또한 칠기에도 고마키에(高蒔絵)나 니쿠고우켄슈츠마키에(肉合研出蒔絵), 킷킨(切金)의 기법을 마키에(蒔絵)에 응용하는 등, 전통적인 마키에 기법 외에도 새로운 시도가 행해졌다. 마키에사(蒔絵師)인 코우아미 미치나가(幸阿弥道長)는 토사 미츠노부(土佐光信)의 하가에(下絵)를 사용했다고 여겨지고 있으며, 회화와의 융합도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무사 계급의 부유화에 따라, 도검의 장식 등에 사용되는 츠바(鍔)의 조각 등, 금속 공예도 독특한 발전을 이룩했다. 8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足利義政)를 섬긴 고토 유죠(後藤祐乗)에 시작되는 고토가(後藤家) 등, 일반적인 수요의 마치조리(町彫り)와는 다른 종류의 이에조리(家彫り)라고 불리는 유파의 발생이다. 또한, 무구에는 칠보를 사용한 히라타파(平田派) 등이 알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가부토(冑)의 메이친파(明珍派) 등, 새로운 일파가 많이 발생했다.

7. 4. 문학 및 예술

무로마치 시대의 허구적 이야기에 대한 삽화


선종(禪宗)은 종교적 가르침과 실천뿐만 아니라 중국 (960~1279), 원, 명 왕조의 회화에서 파생된 영향을 포함한 예술과 문화의 전파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막부와 궁정의 근접성으로 인해 황실 가족, 신하, 다이묘, 사무라이, 선승들이 서로 밀접하게 교류하게 되었다. 무로마치 시대에는 재구성된 『벽암록』이 일본 선종 문헌의 중심적인 경전이 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그 위치를 유지하고 있다.[2]

건축, 문학, 노극, 교겐(희극), 시가, 사루가쿠(민속 오락), 다도, 정원 조경, 화도 등 모든 종류의 예술이 무로마치 시대에 번영했다.

가마쿠라 시대부터 발달하여 무로마치 시대에 최전성기를 맞이한 연가는 상하구를 이어 만드는 일본의 와카이다. 소기, 이조요시모토, 소초, 신케이 등의 연가사가 등장하여, 다이묘공경, 승려들이 사찰에 모여 연가회를 열었다. 연가는 귀족에서 일반 민중에 이르기까지 널리 퍼졌다. 차노유는 남북조 시대에 행해지던 투차(闘茶)와 차기합(茶寄合)이 동산 시대에 무라타 주코에 의해 와비차가 되고, 전국 시대에 센노 리큐에 의해 완성된다. 차도의 유행은 동시에 도자기의 발전을 촉진하여 미노야키와 라쿠야키 등 중세 육고요와는 다른 새로운 요업을 탄생시켰다.

아시카가 요시미쓰의 보호를 받은 간아미・제아미 부자는 가마쿠라 시대부터 행해지던 연악・전악로써 크게 발전시켰다. 제아미는 「풍자화전」에서 예도론을 저술했다. 대화극인 교겐도 성립되었다.

7. 5. 민중 문화

무로마치 시대는 가마쿠라 시대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출신 불명의 농민, 상인층의 사회 진출이 가능하게 되었고, 일본 역사상 최초로 크게 활약한 민중이 등장시킨 시대이기도 하다. 구세력의 몰락과 신세력의 부흥의 시대로 파악할 수 있다.(하극상) 전란이 계속되는 시대였지만, 경제면에서는 농업·공업과 함께 기술의 향상으로 생산도 증대되어 내외의 유통이 활발해졌다.

무로마치 시대는 惣村(소촌)의 성립과 도시의 발달에 따라, 농민과는 다른 도시에 거주하는 서민들이 문화의 중심이 된 시대이기도 했다. 서민들 사이에서는 단편적인 읽을거리 모음인 오가사라소시(御伽草子)가 읽히고, 狂言(쿄겐)과 작은 노래, 코와카마이(幸若舞) 등의 서민 예능이 유행했다. 식문화에서는 된장(味噌), 간장(醤油), 두부(豆腐) 등 일본요리(日本料理)의 기본 요소들이 갖춰졌다. 간장을 제외하고는 중국에서 전래된 요소이며, 무로마치 시대의 상공업 발달에 따라 보급되었다(간장의 보급은 다소 늦어져 간사이 지방에서는 에도 시대 초, 에도에서는 중기에 보급되었다).

7. 6. 예법

무로마치 막부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는 공가(公家)에는 공가의 예법, 무가(武家)에는 무가의 예법이 있다고 하여, 막부의 여러 행사에서의 공식 예법을 명확히 정했다. 오가사와라 나가히데, 이마가와 사쿄다이부 우지요리, 이세 무사고 모리타다에게 「삼의일통」을 편찬하게 하여, 무사의 일반 상식을 정리하게 했다. 오가사와라 사다요시는 「삼의일통」 이후에 추가된 기록을 하여, 무가 예법을 「오가사와라 예서 7책」으로 정리했다. 지도역인 고케(이세가, 오가사와라가, 이마가와가(후의 기라가)) 중, 이세가는 주로 안의 예법(전중의 예법), 오가사와라가는 주로 밖의 예법(주로 궁마 예법)을 맡아 다이묘·하타모토 등에 한정하여 가전(구두 전승)에 의해 비전으로 전승했다. 이마가와가는 서예와 그림을 맡았다. 또한, 지배 계층이 익혀야 할 “능(能)”(실천적인 교양)이었던 “궁술·축국·포정” 중, 포정을 다이쿠사 공지에게 명하여 창시하게 했다.

8. 학문과 사상

무로마치 시대에는 유교가 다이묘 교육에 필수적인 것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명나라에서 돌아온 겐주 케이안(권중계안)은 규슈에서 히고 국의 기쿠치 씨와 사쓰마 국의 시마즈 씨를 대상으로 강연했고, 이후 사쓰난 학파(사쓰마의 성리학 학파)를 설립했다.[4] 도사에서는 미나미무라 바이켄이 남학(도사의 성리학)을 창시했다.[4] 호쿠리쿠 지방에서는 기요하라 노부타카가 노토 국의 하타케야마 씨, 와카사 국의 다케다 씨, 에치젠 국의 아사쿠라 씨 등 여러 다이묘에게 유교를 강의했다.[4]

일본 동부에서는 우에스기 노리자네가 아시카가 학교를 재건하여 전국 각지의 승려와 무사들이 학문을 익혔다.[4] 오다와라의 후호조 씨가 이 학교를 보호하기도 했으며,[4] 예수회 선교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반도(일본 동부)에서 가장 크고 유명한 학원"이라고 기록했다.[4]

당시 지방 영주와 씨족들은 영토 관리를 위해 읽기, 쓰기, 산술을 필수적으로 익혔고, 평민 계급에서도 문맹률이 낮았다.[4] 알레산드로 발리냐노는 일본인들이 유럽인보다 우수하며, 하층민조차 지능적이고 배우는 속도가 빠르다고 기록했다.[4]

정훈왕래, 고성패식목, 실어교 등이 무사 계급 자녀 교육 교재로 사용되었고,[4] 센고쿠 시대에는 절용집, 의서대전 등이 출판되었다.[4][5]

선종은 종교적 가르침, 실천, 예술, 문화 전파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막부와 궁정의 근접성으로 인해 황실, 신하, 다이묘, 사무라이, 선승들이 교류했으며, 벽암록이 일본 선종 문헌의 중심이 되었다.[2]

신토불교에 흡수되었으나, 몽골의 일본 원정 이후 가미카제에 대한 국가적 의식이 일어나면서 기타바타케 지카후사의 진노 쇼토키와 같이 신토적 역사관을 제시하는 저술이 나타났다.[3]

무로마치 시대 말, 남반 무역 시대가 시작되어 포르투갈인이 상륙했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등 가톨릭교회 선교사기독교를 전파했다. 1582년 15만 명의 개종자와 200개의 교회가 있었으나, 1587년부터 탄압받았다.[7]

일본 불교에서는 선종이 무가에 퍼져 무로마치 문화에 영향을 미쳤고, 도시에서는 닛렌종, 서민 사이에서는 조동종이 퍼졌다. 정토진종 중 본원사파가 유력해져 일향일키를 맺었다.[7]

신도에서는 요시다 가네토모가 요시다 신도를 창시했다.

역사서로는 마스카가미, 태평기, 매송론, 신황정통기, 난태평기 등이 있고, 에도 막부가 편찬한 후감도 있다.[1] 도인 긴카타의 엔타이랴쿠, 나카하라노 모로모리의 모로모리기, 나카하라 야스토미의 야스토미키, 야마시나 도키쓰구의 도키쓰구쿄키 등 일기 자료도 중요하다.[1]

8. 1. 학문

무로마치 시대에 유교는 다이묘의 교육에 필수적인 것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명나라에서 돌아온 겐주 케이안(권중계안)은 규슈를 여행하며 히고 국의 기쿠치 씨와 사쓰마 국의 시마즈 씨의 초청을 받아 강연을 했고, 이후 사쓰난 학파(사쓰마의 성리학 학파)를 설립했다.[4] 도사에서는 성리학을 강의한 미나미무라 바이켄이 남학(도사의 성리학)의 창시자로 알려졌다.[4] 호쿠리쿠 지방에서는 기요하라 노부타카가 노토 국의 하타케야마 씨, 와카사 국의 다케다 씨, 에치젠 국의 아사쿠라 씨 등 여러 다이묘를 위해 유교를 강의했다.[4]

한편, 일본 동부에서는 우에스기 노리자네가 서적을 수집하여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학문 기관인 아시카가 학고를 재건했고, 전국에서 승려와 무사들이 모여 학문을 익혔다.[4] 아시카가 학고는 후에 오다와라의 후호조 씨의 보호를 받았다.[4] 일본에서 기독교를 전파한 예수회 선교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아시카가 학고는 반도(일본 동부)에서 가장 크고 유명한 학원(동부 일본의 대학)이다"라고 기술했다.[4] 승려이자 중국풍 시가의 작곡가였던 반리 슈쿠는 오닌 전쟁 때 미노 국으로 내려갔다가 오타 도칸의 초청으로 에도로 갔다.[4] 그는 간토 지방, 에치고 국, 히다 국 등을 두루 여행했다.[4] 앞서 언급된 셋슈는 데와 국 야마가타 시의 릿샤쿠지를 방문했다.[4]

이 시대에 지방 영주와 씨족들은 영토 관리를 위해 읽기, 쓰기, 산술 능력을 습득하는 것을 필수적이라고 여겼다. 농민들이 작성한 토지 문서가 증가했는데, 이는 평민 계급에서도 문맹률이 낮았음을 의미한다.[4] 이탈리아 예수회 선교사 알레산드로 발리냐노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4]

> "일본인들은 백인(흑인이 아님)이고 문화적입니다. 평민과 농민조차도 예의 바르게 잘 교육받았고, 궁정에서 훈련받은 듯한 인상을 줍니다. 이 점에서 그들은 다른 동양 사람들뿐만 아니라 유럽 사람들보다도 우수합니다. 그들은 매우 유능하고 지능적이며, 아이들은 우리의 수업과 지시를 빨리 이해합니다. 유럽의 아이들보다 훨씬 빠르고 쉽게 우리 언어를 읽고 쓰는 법을 배웁니다. 일본의 하층민은 유럽의 하층민처럼 조야하고 무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일반적으로 지능적이고, 예의 바르며, 배우는 속도가 빠릅니다."

정훈왕래』, 『고성패식목』, 『실어교』 등이 신사와 사찰에서 무사 계급 자녀 교육의 교재로 널리 사용되었다.[4] 센고쿠 시대에는 만주야 소지가 지은 이로하 순서의 일본어 사전 『절용집』과 사카이 시의 상인이자 의사였던 아사이 소즈이가 번역한 명나라어 의학서 『의서대전』이 출판되었다.[4][5]

8. 2. 종교 및 사상

선종은 종교적 가르침과 실천뿐만 아니라 중국 송(宋), 원(元), 명(明) 왕조의 회화에서 파생된 영향을 포함한 예술과 문화 전파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막부(幕府)와 궁정의 근접성으로 인해 황실 가족, 신하, 다이묘(大名), 사무라이, 선승들이 서로 밀접하게 교류하게 되었다. 무로마치 시대에는 재구성된 『벽암록』이 일본 선종 문헌의 중심적인 경전이 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그 위치를 유지하고 있다.[2]

불교의 압도적인 지배 아래 조용히 공존해 온 신토에 대한 관심이 새롭게 일어났다. 경전이 없고 기도가 거의 없었던 신토는 나라 시대부터 시작된 종합적인 관행의 결과로 진언종 불교 의례를 널리 받아들였다. 8세기부터 14세기 사이에 신토는 불교에 거의 완전히 흡수되어 료부 신토(두 신도)로 알려지게 되었다.

13세기 후반 몽골의 일본 원정은 적을 물리치는 데 가미카제(神風)의 역할에 대한 국가적 의식을 불러일으켰다. 1339~1343년, 남조군의 총사령관 기타바타케 지카후사는 『진노 쇼토키』를 저술했다. 이 연대기는 아마테라스로부터 현 황제에 이르는 천황 혈통의 신성을 유지하는 중요성을 강조했는데, 이는 일본에 특별한 국체를 부여하는 조건이었다. 『진노 쇼토키』는 천황을 신으로 굳히는 개념을 강화하는 것 외에도, 모든 일본인의 신성과 중국과 인도에 대한 일본의 정신적 우월성을 강조하는 신토적 역사관을 제시하였다. 6세기에 들어온 불교는 교육에 영향을 미쳤지만 신토를 대체하지는 못했다.[3]

무로마치 시대 말기에 최초의 유럽인들이 일본에 도착했다. 1543년 포르투갈인들이 규슈 남쪽의 다네가시마에 상륙했고, 2년 안에 정기적인 항구 방문을 시작하여 100년간 지속된 남반 무역 시대를 열었다. 1551년 나바라 출신의 로마 가톨릭 선교사 프란시스코 하비에르가 일본을 방문한 최초의 서양인들 중 한 명이었다.[7]

일본의 봉납 제단, 남만 양식 양식. 16세기 말. 기메 미술관.


기독교는 주로 예수회의 노력, 특히 1549년 남쪽 규슈 가고시마에 도착한 스페인의 프란시스코 하비에르를 중심으로 일본에 영향을 미쳤다. 다이묘와 무역 관계 개선을 추구하는 상인뿐 아니라 농민들도 개종자들에 포함되었다. 1560년 교토가 일본의 또 다른 주요 선교 지역이 되었다. 1568년 규슈 북서부의 나가사키 항구가 기독교 다이묘에 의해 설립되었고, 1579년 예수회의 관리하에 놓였다. 1582년 15만 명(인구의 2%)에 달하는 개종자와 200개의 교회가 있었다. 그러나 국가가 통일되고 개방성이 감소함에 따라, 이러한 이질적인 영향에 대한 막부의 관용은 줄어들었다. 1587년 기독교에 대한 금지령이 시작되었고, 1597년 노골적인 박해가 시작되었다. 외국 무역은 여전히 장려되었지만 엄격하게 규제되었고, 1640년 에도 시대에는 기독교의 배척과 탄압이 국가 정책이 되었다.

일본 불교에서는 선종이 무가 계층에도 널리 퍼져 무가의 보호를 받는 선의 오산이 정해지는 등 불교를 통해 무가 문화와 귀족 문화가 융합하는 등 무로마치 문화에 영향을 미쳤다. 도시부에서는 닛렌종이 퍼지고, 교토에서는 닛신이 포교 활동을 펼쳐, 마치슈(町衆)는 신도적인 결속력으로 토이치키에 맞서 싸웠다. 1536년 닛렌종이 비와코 동쪽 기슭의 연력사와 충돌하여 덴문 호케의 난이라는 소란이 일어났다. 서민들 사이에서는 조동종이 퍼졌다.

정토진종에는 본원사파와 고다파, 불광사파, 삼문도파 등의 종파가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본원사파의 렌뇨가 재흥시킨 본원사파(일향종이라고도 불렸다)는 라고 불리는 신도 집단을 형성하여 정토진종 종파 중 가장 유력한 종파가 되었다.

본원사파의 신도들은 자신의 종파를 지키기 위해 신앙을 바탕으로 일향일키를 맺고 단결했다. 본원사파는 오닌의 난 이후 전국 시대의 혼란 속에서 가가 일향일키를 통해 가가국을 지배하며 전국 다이묘에 필적하는 세력이 되어 무로마치 막부와 여러 전국 다이묘와 합종연횡을 펼쳤다.

오다 노부나가가 상락했을 때, 노부나가는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지지했지만, 후에 대립했다. 그때 본원사파는 요시아키를 지지하여 노부나가에 대항하여 이시야마 합전을 벌였다. 오사카의 이시야마 본원사가 함락된 이후로는 진정되었다.

노부나가는 닛렌종 승려와 정토종 승려를 시켜 논쟁을 벌이게 했다(안토 종론).

신도에서는 요시다 가네토모가 요시다 신도를 창시했다.

8. 3. 역사서

고토바 천황의 즉위부터 1333년 유배되었던 고다이고 천황이 교토로 귀환할 때까지의 궁정 사회 동향을 기록한 増鏡가 있다. 고다이고 천황의 즉위부터 세가와 요리유키(細川頼之)가 관령(管領)에 취임할 때까지의 남북조 시대를 다룬 太平記는 군기물어(軍記物語)의 성격이 강하여 무로마치 시대부터 에도 시대에 걸쳐 태평기 독서(太平記読み)라고 불리는 이야기 승려들에 의해 서민들에게도 전해졌다.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정당성을 강조하여 쓰여진 역사서인 梅松論은 『太平記』보다 성립 시기가 빠르며, 자료적 가치가 높다.[1] 北畠親房가 간토(関東)에서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남조의 정통성을 신대(神代)부터 기록한 神皇正統記는 후대의 황국사관(皇國史觀)으로 이어지는 이데올로기적 성격이 강한 역사서였다.[1] 今川貞世가 저술한 難太平記는 『太平記』의 오류를 수정하면서 今川氏의 업적을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다.[1]

1391년 명덕의 난(明徳の乱)의 경과를 기록한 『明徳記』, 1399년 응영의 난(応永の乱)과 남북조 합체(南北朝合体)의 기록을 담은 『応永記』, 영향의 난(永享の乱)을 중심으로 한 간토(関東)의 정세를 다룬 『永享記』, 아시카가 요시마사의 치세부터 응인의 난(応仁の乱)의 모습을 기록한 『応仁記』 등이 있다.[1] 에도 막부가 막말(幕末)에 편찬한 역사서로 『後鑑』이 있으며, 1333년부터 1597년에 이르는 역사적 사실을 편년체로 기록하고 각 항목에 출전이 된 다양한 자료를 직접적으로 수록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1]

그 외, 역사서는 아니지만, 洞院公賢의 『園太暦』, 中原師守의 『師守記』, 中原康富의 『康富記』, 山科言継의 『言継卿記』 등의 일기(日記) 자료도 중요하다.[1]

참조

[1] 서적 History of Japan: Revised Edition Tuttle Publishing
[2] 서적 The Garden of Flowers and Weeds: a New Commentary on the Blue Cliff Record Monkfish Book Publishing Company
[3] 서적 Philips' Atlas World History https://archive.org/[...]
[4] 서적 The Worship of Confucius in Japan http://public.eblib.[...] Harvard University Asia Center 2020
[5] 서적 Japanese Confucianism: a cultural history https://doi.org/10.1[...] 2016
[6] 서적 Japanese Art Thames & Hudson
[7] 학술지 Xavier and Tanegashima 1974-12
[8] letter https://sourcebooks.[...] 2019-06-17
[9] 서적 The life and letters of St. Francis Xavier https://books.google[...] Burns and Oates 2019-06-17
[10] 서적 A History of Japan, 1334–1615 Stanford University Press
[11] 문서 1432년, 금각사에서, 서 있는 소변을 비웃은 승려가 격분하여, 대소동으로 발전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12] 웹사이트 草戸千軒展示室「よみがえる草戸千軒」 https://www.pref.hir[...] 2022-11-26
[13] 문서 제 89대 천황 고후카쿠사 천황의 자손들.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고후카쿠사 천황의 동생인 제 90대 천황 가메야마 천황의 자손인 다이카쿠지 계통(大覚寺統)의 고다이고 천황에게 대항하기 위하여 이 계통의 천황을 옹립하였다.
[14] 문서 덧붙여, 쇼군의 정권·지배기구를 가리켜 막부라고 하는 용어를 사용하게 된 것은 후세의 일이다.
[15] 문서 무로마치 시대 후반기에 활발하게 벌어진 민중들의 정치적인 요구 활동. 채권·채무의 탕감을 명령하는 도쿠세이레이를 발해줄 것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았다.
[16] 문서 그렇지만, 요시마사의 예술보호가 후의 히가시야마 문화(東山文化) 발전의 기초가 되어, 후세의 일본문화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