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지 유신
1. 개요
메이지 유신은 1868년 일본에서 일어난 정치적 변혁으로, 에도 막부의 쇄국 체제를 종식하고 천황 중심의 중앙집권 국가를 수립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서구 열강의 압력과 불평등 조약 체결에 대한 반발, 국내 정치 상황의 변화를 배경으로, 삿초 동맹을 통한 막부 타도와 왕정복고가 이루어졌다. 메이지 유신을 통해 일본은 부국강병을 추구하며 근대 국가로 전환되었고, 신분제 폐지, 근대적 교육 시스템 도입, 산업화 등을 추진했다. 메이지 유신은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단기간에 입헌 제도를 달성한 성공적인 개혁 사례로 평가받지만, 번벌 정부, 전통주의자들의 반발, 불완전한 개혁이라는 비판도 존재한다. 이 사건은 일본의 근대화와 아시아 국가들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다양한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 로마자 표기 | Meiji Ishin |
|---|---|
| 가나 표기 | めいじいしん |
| 한자 표기 | 明治維新 |
| 한국어 표기 | 메이지 유신 |
| 다른 이름 | 어일신(御一新) |
|---|---|
| 시기 | 1868년 1월 3일 |
| 장소 | 일본 |
| 결과 | 도쿠가와 막부 타도 |
| 주요 원인 | 에도 막부의 쇠퇴와 서구 열강의 압력 |
|---|---|
| 촉발 요인 | 흑선 내항을 비롯한 서양 세력의 개항 요구 |
| 정치 개혁 | 봉건제 폐지 및 중앙집권 체제 강화 |
|---|---|
| 경제 개혁 | 자본주의 경제 체제 도입 |
| 사회 개혁 | 신분제 폐지 및 교육 제도 개혁 |
| 군사 개혁 | 서구식 군대 도입 및 징병제 실시 |
| 국내 | 일본의 근대화 및 부국강병 정책 추진 |
|---|---|
| 국제 | 일본 제국주의의 토대 마련 |
| 주요 인물 | 메이지 천황, 사이고 다카모리, 기도 다카요시, 오쿠보 도시미치 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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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정복고 -
잉글랜드 왕정복고
잉글랜드 왕정복고는 찰스 1세 처형과 청교도 혁명 후 공화정 시대를 끝내고 찰스 2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정치적 불안과 청교도 통치에 대한 반감으로 발생했으며, 왕권이 의회 통제를 받는 정치 변화와 함께 자본주의 기반 유지 속에 왕당파 복권 및 국교회 재건 등 보수적 경향을 보였다. -
왕정복고 -
베트남 제국
베트남 제국은 1945년 일본의 지원을 받아 바오다이 황제가 건국한 국가로, 쩐쫑낌 내각을 구성하여 개혁을 추진했으나 일본의 항복과 베트민의 혁명으로 멸망했다. -
메이지 시대 -
도쿄부
도쿄부는 1868년 에도에서 개칭된 도쿄에 설치된 일본의 행정 구역으로, 에도 시가지에서 현재의 도쿄도와 거의 같은 영역으로 확장되었으며, 1943년 도쿄도제가 시행되면서 도쿄도로 개편되었다. -
메이지 시대 -
러일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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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진개화파 -
권동진
권동진은 조선 말기 개화파 관료이자 독립운동가, 정치인으로, 을미사변 가담 후 천도교에 입교, 3·1 운동 민족대표, 신간회 부회장을 역임하고 광복 후 우익 정치인으로 활동하며 반탁운동을 전개했다. -
급진개화파 -
이동녕
이동녕은 대한제국 시기 개화 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으로, 독립협회, 신민회, 서전의숙, 신흥무관학교, 《대동신문》, 한국독립당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국권 회복과 독립 운동에 헌신하며 임시정부를 이끌었다.
2. 배경
에도 막부는 일본인의 출입국과 무역을 관리, 통제, 제한하기 위해 오랫동안 쇄국 체제를 유지해 왔다. 그러나 1856년부터 1860년에 걸친 아편 전쟁 이후 동아시아로 진출하려는 서구 제국주의의 물결은 더욱 거세졌다. 1853년 미국의 매슈 페리 제독이 밀러드 필모어 미국 대통령의 개국 요구 국서를 가지고 일본에 왔다.(흑선 내항) 이에 막부는 1854년 미일화친조약에 이어 1858년에는 미국을 비롯하여 영국, 러시아, 네덜란드, 프랑스와 굴욕적인 통상조약(안세이 5개국 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이 조약은 막부 정부에서 고메이 천황의 칙허 없이 처리했다는 점 때문에 이에 반발한 반막부 세력이 일어나 막부 정부와 대립하는 혼란기를 겪었다. 그러다가 260여 년이나 내려오던 도쿠가와 막부가 1866년 사카모토 료마를 내세우는 삿초 동맹에 패배하였고, 1867년에는 대정봉환과 왕정복고가 이루어졌다.
2.1. 외세의 압력과 개국
에도 막부는 외교 권한을 독점하고 일본인의 출입국과 무역을 통제하기 위해 오랫동안 쇄국 정책을 유지해 왔다. 그러나 1856년부터 1860년까지 이어진 아편 전쟁 이후, 동아시아로 진출하려는 서구 제국주의 열강의 압력은 더욱 거세졌다. 1853년 미국의 동인도함대 사령관 매슈 페리 제독이 밀러드 필모어 미국 대통령의 개국 요구 국서를 가지고 일본에 왔다.(흑선 내항)
이에 막부는 1854년 미일화친조약을 체결하고, 1858년에는 미국을 비롯하여 영국, 러시아, 네덜란드, 프랑스와 불평등 통상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은 일본이 관세 자주권을 상실하고 서구 열강에게 치외법권을 인정하는 등 불평등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1854년에 체결된 가나가와 조약은 미국과 일본 간의 무역을 개방했다. 이후 일본은 미국의 압력으로 프랑스, 영국, 네덜란드, 러시아와도 무역 협정을 확대했다. 1858년, 일본 주재 미국 대사인 타운젠드 해리스는 일본의 항구를 무역에 개방하는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들은 막부 정부가 고메이 천황의 허가 없이 처리했다는 점 때문에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반(反)막부 세력이 일어나 막부 정부와 대립하는 혼란을 야기했다.
2.2. 국내 정치 상황의 변화
에도 막부는 외교 권한을 독점하고 일본인의 출입국과 무역을 통제하기 위해 오랫동안 쇄국 정책을 유지했다. 그러나 1856년부터 1860년까지 벌어진 아편 전쟁 이후 서구 제국주의 세력이 동아시아로 진출하면서 상황이 변했다. 1853년 미국의 매슈 페리 제독이 밀러드 필모어 미국 대통령의 개국 요구 국서를 가지고 일본에 왔다. (흑선 내항) 이에 막부는 1854년 미일화친조약을 체결하고, 1858년에는 미국, 영국, 러시아, 네덜란드, 프랑스와 불평등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은 고메이 천황의 허가 없이 막부 정부가 처리했기 때문에 반발하는 세력이 나타나 혼란이 발생했다. 260여 년간 지속된 도쿠가와 막부는 1866년 사카모토 료마를 중심으로 한 삿초 동맹에 패배했고, 1867년에는 대정봉환과 왕정복고가 이루어졌다.
1866년 일본 남서부의 사쓰마 번과 조슈 번의 개혁파 인사 사이고 다카모리와 기도 다카요시는 사쓰마-조슈 연합을 맺었다. 이들은 고메이 천황(메이지 천황의 아버지)을 지지하고 사카모토 료마의 중재로 도쿠가와 막부에 대항하여 천황의 권력을 회복하려 했다. 1867년 1월 30일 고메이 천황이 사망하고 메이지 천황이 즉위하면서 일본은 봉건 사회에서 중앙집권 국가로 변화하기 시작했으며, 이는 일본에 지속적인 근대성에 영향을 주었다.
1867년 11월 9일, 15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천황에게 자신의 특권을 넘기고 10일 후 사임하면서 도쿠가와 막부는 공식적으로 막을 내렸다. 이는 천황 통치의 복고(대정봉환)였지만, 요시노부는 여전히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1868년 1월 3일, 천황은 요시노부의 모든 권력을 박탈하고 권력 복고를 공식 선언했다.
1868년 1월, 도바·후시미 전투를 시작으로 보신 전쟁이 발발했고, 조슈 번과 사쓰마 번 군대가 전 쇼군 군대를 격파했다. 모든 도쿠가와의 영토는 몰수되어 천황의 통제 아래 놓였고, 새로운 메이지 정부의 권한 아래 놓였다. 부현삼치제에 따라 지역은 도시 부(府), 농촌 현(県), 그리고 이미 존재하는 번의 세 가지 유형으로 나뉘었다.
1869년, 막부에 가장 강력하게 저항했던 도사 번, 히젠 번, 사쓰마 번, 조슈 번의 다이묘들은 그들의 영토를 천황에게 반환하도록 설득되었다. 다른 다이묘들도 설득되어 일본 전역에 걸쳐 직접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중앙 정부가 수립되었다.
일부 막부 군대는 홋카이도로 도망쳐 에조 공화국을 세우려 했지만, 1869년 5월 하코다테 전투에서 천황에게 충성하는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다. 에노모토 다케아키와 히지카타 도시조가 이끈 전 쇼군 군대의 패배는 도쿠가와 막부의 종말과 천황 권력의 완전한 회복을 의미했다.
1872년까지 과거와 현재의 다이묘들은 천황 앞에 소환되었고, 모든 번이 천황에게 반환되어야 한다고 선포되었다. 약 280개의 번은 72개의 현으로 바뀌었고, 각 현은 국가가 임명한 지사의 통제를 받았다. 다이묘들이 평화적으로 따랐다면 새로운 메이지 정부에서 중요한 목소리를 얻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후 그들의 빚과 사무라이 봉록 지급은 과세되거나 채권으로 전환되어 전직 사무라이들의 재산 손실이 커졌다.
2.3. 사쓰마번과 조슈번의 성장
1866년 사쓰마번의 지도자 사이고 다카모리와 조슈번의 기도 다카요시 사이에 삿초 동맹이 맺어졌다. 이들은 사카모토 료마의 중재로 고메이 천황을 지지하며 도쿠가와 막부에 대항하여 천황의 권력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1866년 12월 25일 고메이 천황이 사망하자, 1867년 1월 9일 메이지 천황이 즉위하였다.
3. 메이지 유신의 전개
메이지 유신의 시작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덴포 시대(1831년~1845년)를 유신 변혁의 모순이 나타난 시기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이 시기에는 덴포 대기근(1833년~1839년)으로 100만 명 이상이 희생되었고, 농민 반란과 오시오 헤이하치로의 난(1837년)이 발생했다. 반샤의 옥으로 쇄국 비판 세력이 탄압받았고, 덴포의 개혁도 기근 대책에 실패했다. 1842년 아편전쟁에서 청이 영국에 패배하자 막부는 이국선 타파령을 폐지하고 땔나무 물 공급령을 제정했다.
흑선 내항(1853년)이나 안세이 5개국 조약(1858년)을 시작 시기로 보는 견해도 있다. 메이지 정부의 관선 사료집 『복고기』는 대정봉환(1867년)부터 동정 대총독 해임(1868년)까지를 다루었다. 문부성·도쿄대학 사료 편찬소 편찬 『대일본 유신 사료』는 코메이 천황 즉위(1846년)부터 폐번치현(1871년)까지를 유신 자료로 정리했다. 좁은 의미로는 메이지 개원(1868년 10월 23일)이지만, 일반적으로는 대정봉환, 왕정복고 이후의 개혁을 가리킨다.
메이지 천황은 1868년 칙서에서 "온 세상의 지식을 구하여 국정의 기초를 굳건히 할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1873년 모리 아리노리의 지도 아래 메이로쿠샤가 결성되어 "문명과 계몽을 증진"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메이지 유신 기간 동안 정치 권력은 도쿠가와 막부에서 사쓰마 번(오쿠보 도시미치, 사이고 다카모리)과 조슈 번(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 기도 다카요시) 출신 지도자들의 과두 정치로 이동했다.
당시 일본 전역에는 190만 명의 사무라이가 있었다. 이는 프랑스 혁명 이전 프랑스 특권 계급 규모의 10배가 넘는 수치였다. 사무라이 봉록 유지는 막대한 재정적 부담이었고, 이는 과두 정치가들이 행동에 나선 원인 중 하나였을 수 있다.
과두 정치가들은 사무라이 계급 폐지를 위해 1873년 봉록 누진세 부과, 1874년 봉록의 국채 전환(1876년 강제) 조치를 취했다. 1873년 전국적 징병제로 모든 남성이 21세에 4년간 군 복무(이후 3년간 예비역)를 하도록 했고, 사무라이와 농민 계급의 무기 소지권 차이를 없앴다.
이에 불만을 품은 사무라이들의 폭동이 발생했다. 사이고 다카모리가 주도한 사쓰마 반란은 내전으로 번졌으나, 서구식 전술과 무기로 훈련받은 일본 제국 육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새 군대의 핵심은 전직 사무라이 출신 도쿄 경찰이었다. 이후 사무라이 봉기는 줄어들었고, 사무라이들은 새로운 사회에 합류하면서 그 구분은 이름만 남게 되었다. 사무라이의 군국주의적 정신은 일본 제국의 20세기 초 전쟁에서 선전으로 이용되었다.
대부분의 사무라이는 지위가 폐지되었음에도 정부 관료 조직에 취업하는 등 만족했다. 과두 정치가들은 토지 개혁을 통해 소작 제도를 합법화했다.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 승리로 일본군은 스스로를 성장하는 세계 강국이라고 여기기 시작했다. 메이지 유신은 일본의 산업화를 가속화시켰고, "부국강병" 슬로건 아래 1895년 일본을 군사 강국으로 부상시켰다.
1860년대 요코하마와 고베의 국제 거류지에 서구 기술을 사용한 공장들이 설립되었지만, 영향은 미미했다. 수입 기술은 1870년대부터 중요해졌고, 1880년대에 상당한 생산량을 기록했다. 메이지 시대 일본에서 원사 수출은 큰 성장을 경험하여 중국을 제쳤다. 원사 수출 수익은 산업 장비와 원자재 구입에 사용되었다. 일본은 표준화된 실크 생산으로 세계 시장을 장악했다. 산업화 비용과 현대화 투자는 농민들에게 큰 부담이었다. 농민들은 높은 지방세율(수확량의 약 30%)을 부담했는데, 이는 유럽 국가들의 2~7배였다. 높은 세율은 메이지 정부가 새로운 사업에 투자할 수 있는 재량권을 제공했다.
메이지 시대 유럽과 미국은 일본의 변혁을 도왔다. 일본 산업화 성공의 주요 요인 중 하나는 서구 제국주의에 매력적이지 않게 만든 상대적으로 부족한 자원이었다. 일본 지도자들은 서구 기술을 장악하고 적용하여 세계 최대 산업 국가 중 하나로 남았다.
일본의 급속한 산업화와 근대화는 생산과 인프라의 대규모 증가를 가져왔다. 일본은 조선소, 제철소, 방적 공장 등을 건설하여 기업가들에게 매각했다. 국내 기업들은 서구 기술을 활용하여 국제 시장에서 저렴하게 판매할 수 있는 품목을 생산했다. 이로 인해 산업 지역이 성장했고, 농촌에서 산업 중심으로의 대규모 이주가 발생했다. 산업화는 국가 철도 시스템과 현대 통신의 발전과 함께 진행되었다.
| 연도 | 생산량 | 수출량 |
|---|---|---|
| 1868–1872 | 1026 | 646 |
| 1883 | 1682 | 1347 |
| 1889–1893 | 4098 | 2444 |
| 1899–1903 | 7103 | 4098 |
| 1909–1914 | 12460 | 9462 |
산업화와 함께 석탄 수요가 발생하여 생산량이 급증했다.
| 연도 | 백만 톤 |
|---|---|
| 1875 | 0.6ton |
| 1885 | 1.2ton |
| 1895 | 5ton |
| 1905 | 13ton |
| 1913 | 21.3ton |
석탄은 증기선과 철도에 필요했다.
| 연도 | 증기선 수 |
|---|---|
| 1873 | 26 |
| 1894 | 169 |
| 1904 | 797 |
| 1913 | 1,514 |
| 연도 | 킬로미터(km) |
|---|---|
| 1872 | 18km |
| 1883 | 240km |
| 1887 | 640km |
| 1894 | 2100km |
| 1904 | 4700km |
| 1914 | 7100km |
3.1. 대정봉환(大政奉還)과 왕정복고(王政復古)
1866년 사쓰마 번의 지도자 사이고 다카모리와 조슈 번의 기도 다카요시 사이에 삿초 동맹이 맺어졌다. 이 두 지도자는 고메이 천황을 지지하였으며, 사카모토 료마의 주선으로 도쿠가와 막부에 대항하고 천황의 권력을 회복하기 위해 힘을 합쳤다. 1866년 12월 25일 고메이 천황이 사망하자 1867년 1월 9일 메이지 천황이 뒤를 이었다.
1867년 11월 9일, 15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천황에게 자신의 특권을 양도하고 10일 후 사임하면서 도쿠가와 막부는 공식적으로 막을 내렸다. 이는 천황의 통치 복고(대정봉환)였지만, 요시노부는 여전히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1868년 1월 3일, 천황은 요시노부의 모든 권력을 박탈하고 그의 권력 복고를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1868년 1월, 도바·후시미 전투를 시작으로 보신 전쟁이 발발했고, 조슈 번과 사쓰마 번의 군대가 전 쇼군의 군대를 격파했다. 모든 도쿠가와의 영토는 몰수되어 "천황의 통제" 아래 놓였으며, 새로운 메이지 정부의 권한 아래 놓였다. 부현삼치제에 따라 지역은 부일본어(부), 현일본어(현) 그리고 이미 존재하는 번으로 나뉘었다.
1869년, 막부에 가장 강력하게 저항했던 도사 번, 히젠 번, 사쓰마 번, 조슈 번의 다이묘들은 "그들의 영토를 천황에게 반환하도록" 설득되었다. 다른 다이묘들도 이후 설득되었고, 이로써 일본 전역에 걸쳐 직접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중앙 정부가 수립되었다.
일부 막부 군대는 홋카이도로 도망쳐 에조 공화국을 세우려고 시도했지만, 천황에게 충성하는 군대가 1869년 5월 하코다테 전투에서 이 시도를 종식시켰다. (에노모토 다케아키와 히지카타 도시조가 이끈) 전 쇼군 군대의 패배는 천황의 권력이 완전히 회복되면서 도쿠가와 막부의 최종적인 몰락을 의미했다.
1872년까지 과거와 현재의 다이묘들은 천황 앞에 소환되었고, 모든 번이 이제 천황에게 반환되어야 한다고 선포되었다. 약 280개의 번은 72개의 현으로 바뀌었고, 각 현은 국가가 임명한 지사의 통제를 받았다.
3.2. 메이지 신정부의 개혁
메이지 정부는 구미 열강을 따라잡기 위해 개혁을 추진했다. 부국강병을 목표로 유럽과 미국의 근대 국가를 모델로 삼아 학제, 징병령, 지조개정 등 일련의 개혁을 실시했다. 그러나 민주화와 인권 운동을 탄압하고 천황 주도로 자본주의 육성과 군사력 강화에 힘썼다.
왕정 복고의 대호령으로 막부와 섭정, 간파쿠가 폐지되고 일본 천황의 친정이 결정되었다. 그러나 메이지 천황이 어렸기 때문에 보좌 체제가 필요했고, 정체서(政体書)가 공포되었다. 이후 율령제를 본뜬 2관 6성제가 발족했지만, 잦은 개편으로 제도가 안정되지 않았다. 입법부인 좌원(후에 원로원), 우원, 지방관 회의 등도 설치와 폐지가 반복되었다. 메이지 중앙의 개혁은 1885년 내각 제도 발족으로 안정되었다.
기도 다카요시 등은 의회 개설을 주장했지만, 시기상조라는 이유로 오쿠보 도시미치를 중심으로 한 사쓰마, 조슈 번 출신 관료 중심의 개혁 체제가 유지되었다. 그러나 자유민권운동의 고조와 제도 정비로 1881년 국회 개설 조서가 발포되었다.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헌법 제정 움직임이 본격화되어 추밀원이 설치되었다. 1889년 일본 제국 헌법이 공포되고 1890년 제국의회가 발족하여 동아시아 최초로 입헌 군주제가 도입되었다.
교토의 구폐를 이유로 오사카 천도론이 오쿠보 도시미치를 중심으로 제기되었으나, 반대가 많아 에도를 도쿄로 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메이지 천황의 도쿄 행차로 태정관도 도쿄로 옮겨져 도쿄가 사실상의 수도가 되었다.
메이지 정부는 판적봉환으로 구 번의 영주에게 토지와 인민을 천황에게 반납하게 하고, 다시 지번사로 임명하여 번의 영지와 영주를 분리했다. 중요 지역과 옛 막부 직할지는 부, 현으로 하여 '부번현 체제'가 되었다. 그러나 중앙집권화를 위해 폐번치현이 실시되어 도도부현 제도가 설치되고, 중앙정부에서 지사를 파견했다. 사쓰마 번의 시마즈 히사미쓰를 제외하고는 큰 반발은 없었다.
폐번치현과 태정관 제도 개혁으로 중앙집권 체제가 갖춰지면서 막부 시대 제도 개혁의 준비가 완료되었다. 궁중 개혁도 이루어져 궁녀가 폐지되고, 사족 중심의 시종들이 메이지 천황을 개혁 군주에 어울리게 양육했다. 메이지 천황은 서양식 입헌 군주로서의 마음가짐을 배우고, 헌법 제정 과정에서 추밀원 심의에 참석하는 등 정국 조정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신분 제도에서는 '사농공상' 구별이 폐지되고, 구 무사 계급은 사족, 그 외는 평민으로 하여 '사민평등'을 내세웠다. 구 구게, 다이묘, 일부 승려 등은 화족으로 특권 계급화하고 궁내성 지배 아래 두었다.
이와쿠라 도모미를 정사, 오쿠보 도시미치, 기도 다카요시, 이토 히로부미 등을 부사로 하는 이와쿠라 사절단이 구미에 파견되었다. 일본에 남은 사이고 다카모리, 이노우에 가오루, 오쿠마 시게노부, 이타가키 다이스케, 에토 신페이, 오키 다카토 등에 의해 학제 개혁, 지조 개정, 징병령, 그레고리력 채용, 사법 제도 정비, 단발령 등의 개혁이 추진되었다. 그러나 급격한 개혁으로 모순도 많아 사족과 농민의 불만을 샀고, 정한론으로 이어졌다는 주장도 있다. 구미 사절에서 귀국한 이와쿠라와 오쿠보가 정한론을 지지하지 않았고, 오쿠보 아래 내무성이 설립되어 개혁 정리가 이루어졌다.
같은 시기 민간에서 문명 개화 움직임, 육식 보급, 철도 개통 등이 일어나 신시대 '메이지'의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경제 산업 분야에서는 부국강병, 식산흥업 슬로건 아래 도미오카 제사장을 비롯한 관영 공장이 만들어지는 등 정부 주도의 산업 육성이 시작되어 서양식 공업 기술이 도입되었다. 금융 제도에서는 통화 단위로 '엔'이 도입되고(1871년), 국립은행 조례에 의한 국립은행을 거쳐 일본 은행이 설립되어(1882년) 자본주의적 금융 제도가 정비되었다. 유통 분야에서는 우편 제도, 전신망, 철도 및 선박 운수(일본 유센) 등이 정비되었다. 화족의 자산에 의한 투자 활동도 이러한 자본 활동의 배경이었다.
'고용 외국인'이라 불리는 외국인들이 기술 지도, 교육, 관제, 군제 정비 등 여러 분야에서 고용되어 근대 국가 건설을 도왔다.
메이지 천황은 1868년 칙서 선서에서 "온 세상의 지식을 구하여, 이로써 국정의 기초를 굳건히 할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모리 아리노리의 지도 아래, 1873년 메이로쿠샤가 결성되어 근대 윤리와 사상을 통해 "문명과 계몽을 증진"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메이지 유신 기간 동안 정치 권력은 도쿠가와 막부에서 사쓰마 번(오쿠보 도시미치, 사이고 다카모리)과 조슈 번(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 기도 다카요시) 출신 지도자들의 과두 정치로 이동했다. 이는 일본 천황이 국가의 정신적 지도자로서만 역할하고, 그의 신하들이 그의 이름으로 국가를 통치한다는 전통적인 제왕 통치 관습에 대한 그들의 신념을 반영했다.
천황의 통치하에 정부를 구성한 메이지 과두 정치는 막부, 다이묘, 사무라이 계급 등 에도 시대 정부의 잔재에 맞서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를 먼저 도입했다.
당시 일본 전역에는 190만 명의 사무라이가 있었다. 이는 프랑스 혁명 이전 프랑스 특권 계급 규모의 10배가 넘는 수치였다. 일본의 사무라이는 영주만이 아니라 고급 가신들도 포함되었다. 각 사무라이에게 고정된 봉록이 지급되었기에 그들의 유지에는 막대한 재정적 부담이 따랐고, 이는 과두 정치가들이 행동에 나서게 된 원인 중 하나였을 수 있다.
과두 정치가들은 사무라이 계급을 폐지하기 위한 느리고 신중한 과정에 착수했다. 1873년 사무라이 봉록에 대한 누진세 부과가 발표되었다. 1874년 사무라이들은 봉록을 국채로 전환할 수 있게 되었다. 1876년 이러한 전환이 강제되었다.
군대 개혁을 위해 정부는 1873년 전국적인 징병제를 실시하여 모든 남성이 21세가 되면 4년간 군 복무를 하고, 이후 3년간 예비역으로 복무하도록 했다. 사무라이와 농민 계급의 주요 차이점 중 하나는 무기 소지권이었는데, 이것이 모든 남성에게 확대되었다. 사무라이는 더 이상 자신의 지위를 과시하기 위해 칼이나 무기를 휴대하고 마을을 돌아다닐 수 없었다.
이로 인해 불만을 품은 사무라이들의 일련의 폭동이 발생했다. 주요 폭동 중 하나는 사쓰마 반란을 주도한 사이고 다카모리에 의해 일어났으며, 결국 내전으로 번졌다. 그러나 이 반란은 서구식 전술과 무기로 훈련받은 일본 제국 육군에 의해 신속하게 진압되었다. 새 군대의 핵심은 대부분 전직 사무라이로 구성된 도쿄 경찰이었다. 이는 반대하는 사무라이들에게 그들의 시대가 끝났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보냈다. 이후 사무라이의 봉기는 줄어들었고, 사무라이들이 새로운 사회에 합류하면서 그 구분은 이름만 남게 되었다. 사무라이의 군국주의적 정신은 미화된 형태로 남아 일본 제국의 20세기 초 전쟁에서 선전으로 자주 이용되었다.
대다수의 사무라이는 지위가 폐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만족했다. 많은 사람들이 정부 관료 조직에 취업했다. 사무라이는 대부분의 인구보다 교육 수준이 높았기 때문에 교사, 총기 제작자, 정부 관리 및/또는 군 장교가 되었다. 사무라이라는 공식 직함은 폐지되었지만, 사무라이 계급을 특징짓던 엘리트 정신은 계속해서 살아남았다.
과두 정치가들은 또한 토지 개혁에 착수했다. 그들은 도쿠가와 시대부터 계속되어 온 소작 제도를 합법화했다. 막부가 사회의 네 계급을 제자리에 고정시키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통치 기간 동안 마을 사람들은 다른 농부들에게 토지를 임대하기 시작하여 부유해졌다. 이는 막부가 구상했던 계급 제도를 혼란시켜 막부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에서의 군사적 성공으로 강화된 일본군은 자신들이 성장하는 세계 강국이라고 여기기 시작했다.
메이지 유신은 일본의 산업화 과정을 가속화시켰고, "부국강병(富國强兵, fukoku kyōhei)" 슬로건 아래 1895년 일본의 군사 강국으로 부상했다.
1860년대 요코하마와 고베의 국제 거류지에 서구인들과 일부 지역 영주들에 의해 수입 기술을 사용한 공장들이 설립되었지만, 영향은 미미했다. 수입 기술이 중요한 역할을 하기 시작한 것은 1870년대부터였고, 상당한 생산량을 기록한 것은 1880년대였다. 메이지 시대 일본에서 원사는 가장 중요한 수출품이었고, 원사 수출은 엄청난 성장을 경험하여 중국을 제쳤다. 원사 수출에서 얻은 수익은 일본의 산업 장비와 원자재 구입에 사용되었다. 최고급 실크는 여전히 중국에서 생산되었고, 일본의 실크 산업에서 현대 기계 도입은 더뎠지만, 일본은 표준화된 실크 생산으로 세계 실크 시장을 장악했다. 누에알 재배 표준화는 기계화된 실크 직조에 중요한 품질 일관성을 가져왔다. 경제의 새로운 부문은 세금을 많이 부과할 수 없었기 때문에 산업화 비용과 현대화에 필요한 투자는 농민들에게 막대한 부담이었다. 농민들은 세계 다른 지역에 비해 매우 높은 지방세율(수확량의 약 30%)을 부담했는데, 이는 순 농업 생산량 기준으로 유럽 국가들의 2배에서 7배였다. 청나라의 지방세율은 약 2%였다. 높은 세율은 메이지 정부가 새로운 사업에 투자할 수 있는 재량권을 제공했다.
메이지 시대 유럽과 미국 같은 강대국들은 일본의 변혁을 도왔고, 변화의 필요성을 깨닫게 했다. 일부 지도자들은 외국으로 나가 지식과 정부 문서를 활용하여 생산 같은 일을 가능하게 한 영향력 있는 정부를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일본이 다른 강대국들로부터 도움을 받았음에도, 일본 산업화 성공의 주요 요인 중 하나는 서구 제국주의에 매력적이지 않게 만든 상대적으로 부족한 자원이었다. 농민과 사무라이 계급이 기반이었고, 곧 국가 산업 노동 내 성장의 한계가 존재하는 이유가 문제가 되었다. 정부는 사무라이 같은 관리들을 파견하여 진행되는 업무를 감독하게 했다. 일본 지도자들이 서구 기술을 장악하고 적용했기 때문에 일본은 세계 최대 산업 국가 중 하나로 남아 있다.
일본의 급속한 산업화와 근대화는 생산과 인프라의 대규모 증가를 가능하게 하고 요구했다. 일본은 조선소, 제철소, 방적 공장과 같은 산업을 건설하여 기업가들에게 매각했다. 국내 기업들은 서구 기술을 소비하여 국제 시장에서 저렴하게 판매할 수 있는 품목을 생산하는 데 사용했다. 이로 인해 산업 지역이 성장했고, 농촌에서 산업화된 중심지로의 대규모 이주가 발생했다. 산업화는 국가 철도 시스템과 현대 통신의 발전과 함께 진행되었다.
| 연도 | 생산량 | 수출량 |
|---|---|---|
| 1868–1872 | 1026 | 646 |
| 1883 | 1682 | 1347 |
| 1889–1893 | 4098 | 2444 |
| 1899–1903 | 7103 | 4098 |
| 1909–1914 | 12460 | 9462 |
산업화와 함께 석탄에 대한 수요가 발생했다. 아래 표에서 보듯이 생산량이 급증했다.
| 연도 | 백만 톤 |
|---|---|
| 1875 | 0.6ton |
| 1885 | 1.2ton |
| 1895 | 5ton |
| 1905 | 13ton |
| 1913 | 21.3ton |
석탄은 증기선과 철도에 필요했다. 이들 부문의 성장은 아래에 나와 있다.
| 연도 | 증기선 수 |
|---|---|
| 1873 | 26 |
| 1894 | 169 |
| 1904 | 797 |
| 1913 | 1,514 |
| 연도 | 킬로미터(km) |
|---|---|
| 1872 | 18km |
| 1883 | 240km |
| 1887 | 640km |
| 1894 | 2100km |
| 1904 | 4700km |
| 1914 | 7100km |
4. 메이지 유신의 영향
메이지 유신 이전에도 에도 막부는 외국인 전문가들을 고용했다. 독일 외교관 필리프 프란츠 폰 지볼트를 외교 고문으로, 네덜란드 해군 기술자 헨드릭 하르데스를 나가사키 조선소에, 빌럼 후이센 반 카텐디이크를 나가사키 해군 훈련소에, 프랑스 해군 기술자 프랑수아 르온스 베르니를 요코스카 해군 조선소에, 영국 토목 기사 리처드 헨리 브런턴을 고용했다. 이들은 대부분 정부 승인을 받아 2~3년 계약으로 일했으며, 일본 근대화에 기여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이들이 일본에 영구 정착하는 것을 원치 않았고, 계약이 끝난 후 대부분 자국으로 돌아갔다.
메이지 유신은 흑선 내항으로 상징되는 서구 열강의 경제적, 군사적 팽창에 대한 저항 운동(양이 운동)에서 시작되었다고 여겨진다. 19세기 에도 막부 체제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서구 열강의 산업혁명으로 아시아 여러 민족이 식민지화되고, 청나라까지 영국에 패배하면서 일본도 위기감을 느꼈다. 일본 내에서는 페톤호 사건, 몰리슨호 사건 등 외압과 보력 사건, 명화 사건, 오시오 헤이하치로의 난 등 내분, 우치코와시와 같은 민중 운동이 활발해졌다. 로쥬 마쓰다이라 사다노부, 고가쿠 학자 모토오리 노리나가 등은 대정 위임론을 주장하며 막부 정치가 천황에게서 위임받은 것이라는 견해가 퍼져나갔고, 존황 사상·존왕론이 확산되었다.
19세기 중반 아편전쟁 이후, 제국주의 영향이 동아시아에 미치면서 쇄국 정책과 막번 체제를 유지하려는 양이 사상이 나타났다. 그러나 에도 막부가 개국 노선을 선택하면서 존왕론과 결합하여 존왕양이 운동으로 발전했다. 매슈 페리가 우라가에 내항하자 도쿠가와 막부는 조정에 위기를 알리고 제후와 일반의 의견을 수렴했다. 이는 막부 단독 결정에서 천황 중심 통일 국가를 만들어야 한다는 위기감 때문이었다.
막부의 개국 노선을 인정하는 제후들 사이에서도 웅번을 중심으로 막부의 대외 무역 독점에 반대하거나 막번 체제 개혁을 요구하는 세력이 나타났다. 이들도 조정을 통해 요구를 실현하려 했고, 교토를 무대로 정쟁이 벌어졌다. 사쓰에이 전쟁과 하관 전쟁 등으로 서구 열강과의 군사력 차이를 인식하면서 국내 정치 권력 통일과 체제 개혁(근대화)을 통해 부국강병을 이루고 서구에 대항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고, 장주번도 개국론으로 전향했다. 영국 외교관 어니스트 사토의 논문 『영국책론』은 천자 주권론과 타막을 이론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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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부는 공무합체 정책으로 존왕양이파와 타협하며 구체제 유지를 꾀했지만, 웅번의 지지를 잃었다. 흑선 내항 이후 막부 위신 저하와 세정 불안으로 농민 봉기가 자주 일어났다. 토사번, 에치젠번 등은 제후 연합 정권(공의정체론)을, 사쓰마번은 과두 정권을 주장하며 막부 폐지 후 조정 아래 중앙 집권적 정치 체제 수립 구상이 지지를 얻었다.
1863년 8월 18일의 정변으로 교토에서 장주번 등 존양파가 추방되고, 사쓰마번 등이 공의 정체 수립을 시도했지만, 도쿠가와 요시노부와 아이즈번 등에 의해 저지되었다. 이후 공의 운동도 반 도쿠가와 막부 운동으로 기울었다. 공의 운동과 존양 운동이 도쿠가와 막부 타도 아래 결합하여 사쓰초 동맹이 체결되었다.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사카모토 료마의 「선중팔책」을 통해 대정봉환을 결의했다. 대정봉환 상소문에는 서양 여러 나라와 관계가 깊어짐에 따라 정권을 조정에 반납하고, 널리 공의를 모아 서양 여러 나라와 대등하게 나아가야 한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개혁 세력 협력 아래 왕정복고가 선포되고, 율령제나 겐무 신정에서 중앙 집권적 왕권 통치의 선례를 찾으면서도, 근대 국가를 본보기로 하는 공의 정체 실현을 목표로 했다. 보신 전쟁으로 구막부 세력을 몰아내고 권력을 확립한 신정부는 사쓰마·장주 출신 관료 중심으로 급진적 근대화 정책을 추진했다. 메이지 천황은 오고조의 칙서를 통해 널리 회의를 열어 공론 정치를 펼칠 것을 맹세했고, 이는 메이지 유신의 국시가 되었다. 정체서에는 미국식 삼권 분립이 제시되었다.
메이지 유신과 일본의 근대화는 서구 모델을 기반으로 근대화된 최초의 아시아 국가가 되면서 아시아 이웃 국가와 관련된 일본인의 정체성에 영향을 미쳤다. 이는 중국 주도의 전통적인 유교적 계층 질서를 근대성에 기반한 질서로 대체했다.
일본의 개방은 무역항 개항뿐만 아니라 사회 구성원들의 융합 과정을 시작하게 했다. 서구 교사와 고문들이 일본으로 이주하고, 일본 국민들이 교육 목적으로 서구 국가로 이주했다. 이는 일본인들의 서구 관습, 기술, 제도에 대한 지식을 확장하는 데 기여했다. 많은 사람들은 강대국이 되기 위해 서구의 "정신"을 습득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믿었다.
모리 아리노리의 지도 아래, 1873년 저명한 일본 지식인들은 메이로쿠샤를 결성하여 근대 윤리와 사상을 통해 "문명과 계몽"을 증진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메이지 유신 기간 동안 정치 권력은 도쿠가와 막부에서 사쓰마 번(오쿠보 도시미치, 사이고 다카모리)과 조슈 번(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 기도 다카요시) 출신 지도자들의 과두 정치로 이동했다. 이는 일본 천황이 국가의 정신적 지도자 역할만 하고 신하들이 그의 이름으로 국가를 통치한다는 전통적인 제왕 통치 관습에 대한 믿음을 반영했다.
천황 통치하의 정부를 구성한 메이지 과두 정치는 막부, 다이묘, 사무라이 계급 등 에도 시대 정부의 잔재에 맞서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를 도입했다. 당시 일본 전역에는 190만 명의 사무라이가 있었다. 이는 1789년 프랑스 혁명 이전 프랑스 특권 계급 규모의 10배가 넘는 수치였다. 일본의 사무라이는 영주뿐만 아니라 고급 가신, 즉 실제로 일하는 사람도 포함되었다. 사무라이에게 지급된 고정 봉록은 막대한 재정 부담이었고, 이는 과두 정치가들의 행동 원인 중 하나였을 것이다.
과두 정치가들은 사무라이 계급 폐지를 위한 느리고 신중한 과정에 착수했다. 1873년 사무라이 봉록에 대한 누진세 부과가 발표되었다. 1874년 사무라이는 봉록을 국채로 전환할 수 있게 되었고, 1876년 전환이 강제되었다. 군대 개혁을 위해 1873년 전국 징병제를 실시하여 모든 남성이 21세가 되면 4년간 군 복무 후 3년간 예비역으로 복무하게 했다. 사무라이와 농민 계급의 주요 차이점 중 하나인 무기 소지권이 모든 남성에게 확대되었다. 사무라이는 더 이상 지위 과시를 위해 칼이나 무기를 휴대하고 마을을 돌아다닐 수 없었다. 이는 불만을 품은 사무라이들의 폭동으로 이어졌다. 사쓰마 반란을 주도한 사이고 다카모리의 반란은 내전으로 번졌으나, 서구식 전술과 무기로 훈련된 일본 제국 육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새 군대의 핵심은 전직 사무라이로 구성된 도쿄 경찰이었다. 이는 사무라이들에게 시대가 끝났음을 알리는 메시지였다. 이후 사무라이 봉기는 줄었고, 사무라이들이 새로운 사회에 합류하면서 구분은 이름만 남게 되었다. 사무라이의 군국주의 정신은 미화되어 일본 제국의 20세기 초 전쟁에서 선전으로 이용되었다. 대다수의 사무라이는 지위 폐지에도 만족했다. 많은 이들이 정부 관료 조직에 취업했다. 사무라이는 교육 수준이 높아 교사, 총기 제작자, 정부 관리, 군 장교가 되었다. 사무라이 직함은 폐지되었지만, 사무라이 계급의 엘리트 정신은 계속 살아남았다.
과두 정치가들은 토지 개혁에 착수했다. 도쿠가와 시대부터 계속된 소작 제도를 합법화했다. 막부가 사회 네 계급을 고정시키려 했지만, 통치 기간 동안 마을 사람들은 다른 농부에게 토지를 임대하여 부유해졌다. 이는 막부가 구상했던 계급 제도를 혼란시켜 막부 몰락으로 이어졌다.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 승리로 강화된 일본군은 성장하는 세계 강국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중앙집권 국가 건설과 국가 정체성 확립을 위해 일본 사회 구조가 급격히 변화하는 가운데, 정부는 지방 방언을 대체하는 標準語일본어를 제정했다. 도쿄 사무라이 계급 언어 패턴을 기반으로 한 표준어는 교육, 언론, 정부, 사업 등 모든 영역에서 표준어가 되었다.
계몽사상의 이상인 보편적 교육을 채택하여 일본 정부는 전국적인 공립학교 제도를 수립했다. 이 무상 교육기관에서는 학생들에게 읽기, 쓰기, 수학을 가르쳤다. 또한 학생들은 황제와 일본 국가에 대한 의무를 강화하는 "도덕 교육" 과정도 이수했다. 메이지 시대 말까지 공립학교의 학생 수는 크게 증가하여 숙련된 노동자의 수가 늘어나고 일본의 산업 성장에 기여했다.
1860년대 요코하마와 고베 국제 거류지에는 서구인과 일부 지역 영주들에 의해 수입 기술을 사용한 공장이 설립되었지만, 영향은 미미했다. 수입 기술이 중요해진 것은 1870년대부터였고, 상당 생산량을 기록한 것은 1880년대였다. 메이지 시대 일본에서 원사는 가장 중요한 수출품이었고, 원사 수출은 엄청난 성장을 하여 중국을 제쳤다. 원사 수출 수익은 일본 산업 장비와 원자재 구입에 사용되었다. 최고급 실크는 중국에서 생산되었고, 일본 실크 산업 현대 기계 도입은 더뎠지만, 일본은 표준화된 실크 생산으로 세계 실크 시장을 장악했다. 누에알 재배 표준화는 기계화된 실크 직조에 중요한 품질 일관성을 가져왔다. 경제 새 부문은 세금 부과가 어려워 산업화 비용과 현대화 투자는 농민에게 부담이었다. 농민들은 세계 다른 지역보다 높은 지방세율(수확량 약 30%)을 부담했는데, 이는 순 농업 생산량 기준 유럽 국가 2~7배였다. 청나라 지방세율은 약 2%였다. 높은 세율은 메이지 정부가 새 사업에 투자할 재량권을 제공했다.
메이지 유신은 일본의 산업화 과정을 가속화시켜 1895년까지 일본이 군사 강국으로 부상하는 결과를 가져왔다("부국강병(富國强兵, fukoku kyōhei)" 슬로건). 일본 급속 산업화와 근대화는 생산, 인프라 대규모 증가를 가능하게 하고 요구했다. 일본은 조선소, 제철소, 방적 공장 등 산업을 건설하여 기업가에게 매각했다. 국내 기업들은 서구 기술을 소비하여 국제 시장에서 저렴하게 판매할 품목을 생산했다. 이는 산업 지역 성장, 농촌에서 산업화 중심지로 대규모 이주를 가져왔다. 산업화는 국가 철도 시스템, 현대 통신 발전과 함께 진행되었다.
| 연도 | 생산량 | 수출량 |
|---|---|---|
| 1868–1872 | 1026 | 646 |
| 1883 | 1682 | 1347 |
| 1889–1893 | 4098 | 2444 |
| 1899–1903 | 7103 | 4098 |
| 1909–1914 | 12460 | 9462 |
산업화와 함께 석탄 수요가 발생했다. 아래 표에서 보듯이 생산량이 급증했다.
| 연도 | 백만 톤 |
|---|---|
| 1875 | 0.6ton |
| 1885 | 1.2ton |
| 1895 | 5ton |
| 1905 | 13ton |
| 1913 | 21.3ton |
석탄은 증기선과 철도에 필요했다. 이들 부문의 성장은 아래에 나와 있다.
| 연도 | 증기선 수 |
|---|---|
| 1873 | 26 |
| 1894 | 169 |
| 1904 | 797 |
| 1913 | 1,514 |
| 연도 | 마일(mi) | 킬로미터(km) |
|---|---|
| 1872 | 약 28.97km |
| 1883 | 약 386.24km |
| 1887 | 약 1029.98km |
| 1894 | 약 3379.61km |
| 1904 | 약 7563.90km |
| 1914 | 약 11426.31km |
4.1. 근대 국가로의 전환
메이지 정부는 구미 열강을 따라잡기 위해 개혁을 추진했다. 부국강병 기치 아래 유럽과 미국의 근대 국가를 모델로 삼아, 학제, 징병령, 지조개정 등 일련의 개혁을 단행했다. 그러나 민주화와 인권 운동을 탄압하고 천황 주도로 자본주의 육성과 군사적 강화에 힘썼다.
폐번치현과 태정관 제도 개혁으로 중앙집권 체제가 갖춰지면서 막부 시대 제도를 개혁할 준비가 완료되었다. 궁중 개혁도 함께 이루어져 궁녀 폐지, 사족 중심 시종들이 메이지 천황을 개혁 군주에 걸맞은 천황으로 양육했다. 병약했던 메이지 천황은 건강을 회복하고 서양식 입헌 군주로서의 마음가짐을 배워 '메이지 국가' 원수로서의 존재가 되었다. 헌법 제정 과정에서 추밀원 심의에 모두 참석했고, 국회 개설 전후 미성숙한 입헌 정치 시기에 수상이 빈번하게 교체되는 상황에서도 정국 조정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신분 제도에서는 에도 막부의 사농공상 구별을 폐지하고 구 무사 계급을 사족, 그 외 평민으로 하여 '사민평등'을 내세웠다. 한편, 구 구게, 다이묘나 일부 승려 등을 화족으로 삼아 특권 계급화하고 궁내성 지배 아래 두었다.
이와쿠라 도모미를 정사, 오쿠보 도시미치, 기도 다카요시, 이토 히로부미 등을 부사로 하는 이와쿠라 사절단을 구미에 파견하여 서양 제도를 연구하게 했다. 일본에 남은 사이고 다카모리, 이노우에 가오루, 오쿠마 시게노부, 이타가키 다이스케, 에토 신페이, 오키 다카토 등은 개혁을 추진했다.
주요 개혁으로는 학제 개혁, 지조 개정, 징병령, 그레고리력 채용, 사법 제도 정비, 단발령 등이 있다. 그러나 급격한 개혁으로 사족과 농민의 불만을 사 정한론으로 이어졌다는 평가도 있다. 구미 사절에서 귀국한 이와쿠라와 오쿠보는 정한론을 지지하지 않았고, 오쿠보 아래 내무성이 설립되어 개혁이 정리되었다.
같은 시기 민간에서 문명 개화 움직임, 육식 보급, 철도 개통 등이 일어나 '메이지' 시대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경제 산업 분야에서는 부국강병, 식산흥업 슬로건 아래 도미오카 제사장 등 관영 공장이 만들어져 정부 주도 산업 육성이 시작되었고, 서양식 공업 기술이 도입되었다. 금융 제도에서는 통화 단위로 '엔'을 도입하고(1871년), 국립은행 조례에 따른 국립은행을 거쳐 통화 발행권을 독점하는 중앙은행인 일본 은행을 설립하여(1882년) 자본주의적 금융 제도를 정비했다. 유통 분야에서는 우편 제도, 전신망, 철도 및 선박 운수(일본 유센) 등이 정비되었다. 화족의 자산에 의한 투자 활동도 이러한 자본 활동의 배경이었다.
고용 외국인이라 불리는 외국인들이 기술 지도, 교육, 관제, 군제 정비 등 여러 분야에서 고용되어 근대 국가 건설을 도왔다.
모리 아리노리 지도 아래 1873년 저명한 일본 지식인들이 메이로쿠샤를 결성하여 근대 윤리와 사상을 통해 "문명과 계몽"을 증진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메이지 유신 기간 동안 정치 권력은 도쿠가와 막부에서 사쓰마 번(오쿠보 도시미치, 사이고 다카모리)과 조슈 번(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 기도 다카요시) 출신 지도자들의 과두 정치로 이동했다. 이는 일본 천황이 국가의 정신적 지도자 역할만 하고 신하들이 그의 이름으로 국가를 통치한다는 전통적인 제왕 통치 관습에 대한 믿음을 반영했다.
천황 통치하 정부를 구성한 메이지 과두 정치는 막부, 다이묘, 사무라이 계급 등 에도 시대 정부 잔재에 맞서 권력 강화를 위한 조치를 도입했다.
당시 일본 전역에는 190만 명의 사무라이가 있었다. 이는 1789년 프랑스 혁명 이전 프랑스 특권 계급 규모의 10배가 넘는 수치였다. 일본의 사무라이는 영주뿐 아니라 고급 가신, 즉 실제로 일하는 사람도 포함되었다. 사무라이에게 지급된 고정 봉록은 막대한 재정 부담이었고, 이는 과두 정치가들의 행동 원인 중 하나였을 것이다.
과두 정치가들은 사무라이 계급 폐지를 위한 느리고 신중한 과정에 착수했다. 1873년 사무라이 봉록에 대한 누진세 부과가 발표되었다. 1874년 사무라이는 봉록을 국채로 전환할 수 있게 되었고, 1876년 전환이 강제되었다.
군대 개혁을 위해 1873년 전국 징병제를 실시하여 모든 남성이 21세가 되면 4년간 군 복무 후 3년간 예비역으로 복무하게 했다. 사무라이와 농민 계급의 주요 차이점 중 하나인 무기 소지권이 모든 남성에게 확대되었다. 사무라이는 더 이상 지위 과시를 위해 칼이나 무기를 휴대하고 마을을 돌아다닐 수 없었다.
이는 불만을 품은 사무라이들의 폭동으로 이어졌다. 사쓰마 반란을 주도한 사이고 다카모리의 반란은 내전으로 번졌으나, 서구식 전술과 무기로 훈련된 일본 제국 육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새 군대의 핵심은 전직 사무라이로 구성된 도쿄 경찰이었다. 이는 사무라이들에게 시대가 끝났음을 알리는 메시지였다. 이후 사무라이 봉기는 줄었고, 사무라이들이 새로운 사회에 합류하면서 구분은 이름만 남게 되었다. 사무라이의 군국주의 정신은 미화되어 일본 제국의 20세기 초 전쟁에서 선전으로 이용되었다.
대다수 사무라이는 지위 폐지에도 만족했다. 많은 이들이 정부 관료 조직에 취업했다. 사무라이는 교육 수준이 높아 교사, 총기 제작자, 정부 관리, 군 장교가 되었다. 사무라이 직함은 폐지되었지만, 사무라이 계급의 엘리트 정신은 계속 살아남았다.
과두 정치가들은 토지 개혁에 착수했다. 도쿠가와 시대부터 계속된 소작 제도를 합법화했다. 막부가 사회 네 계급을 고정시키려 했지만, 통치 기간 동안 마을 사람들은 다른 농부에게 토지를 임대하여 부유해졌다. 이는 막부가 구상했던 계급 제도를 혼란시켜 막부 몰락으로 이어졌다.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 승리로 강화된 일본군은 성장하는 세계 강국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중앙집권 국가 건설과 국가 정체성 확립을 위해 일본 사회 구조가 급격히 변화하는 가운데, 정부는 지방 방언을 대체하는 를 제정했다. 도쿄 사무라이 계급 언어 패턴을 기반으로 한 표준어는 교육, 언론, 정부, 사업 등 모든 영역에서 표준어가 되었다.
메이지 유신과 일본 근대화는 서구 모델 기반 근대화된 최초 아시아 국가가 되면서 아시아 이웃 국가와 관련된 일본인 자아 정체성에 영향을 미쳤다. 이는 중국 주도 전통 유교 계층 질서를 근대성 기반 질서로 대체했다.
계몽사상 이상인 보편적 교육을 채택하여 일본 정부는 전국 공립학교 제도를 수립했다. 이 무상 교육기관에서는 읽기, 쓰기, 수학을 가르쳤다. 학생들은 황제와 일본 국가에 대한 의무를 강화하는 "도덕 교육" 과정도 이수했다. 메이지 시대 말 공립학교 학생 수가 증가하여 숙련 노동자 수가 늘고 일본 산업 성장에 기여했다.
일본 개방은 무역항 개항뿐 아니라 사회 구성원 융합 과정을 시작하게 했다. 서구 교사와 고문들이 일본으로 이주하고, 일본 국민들이 교육 목적으로 서구 국가로 이주했다. 이는 일본인들의 서구 관습, 기술, 제도 지식 확장에 기여했다. 많은 사람들은 강대국이 되기 위해 서구 "정신" 습득이 필수라고 믿었다.
메이지 유신은 일본 산업화 과정을 가속화시켜 1895년까지 일본 군사 강국 부상으로 이어졌다("부국강병(富國强兵, fukoku kyōhei)" 슬로건).
1860년대 요코하마와 고베 국제 거류지에는 서구인과 일부 지역 영주들에 의해 수입 기술을 사용한 공장이 설립되었지만, 영향은 미미했다. 수입 기술이 중요해진 것은 1870년대부터였고, 상당 생산량을 기록한 것은 1880년대였다. 메이지 시대 일본에서 원사는 가장 중요한 수출품이었고, 원사 수출은 엄청난 성장을 하여 중국을 제쳤다. 원사 수출 수익은 일본 산업 장비와 원자재 구입에 사용되었다. 최고급 실크는 중국에서 생산되었고, 일본 실크 산업 현대 기계 도입은 더뎠지만, 일본은 표준화된 실크 생산으로 세계 실크 시장을 장악했다. 누에알 재배 표준화는 기계화된 실크 직조에 중요한 품질 일관성을 가져왔다. 경제 새 부문은 세금 부과가 어려워 산업화 비용과 현대화 투자는 농민에게 부담이었다. 농민들은 세계 다른 지역보다 높은 지방세율(수확량 약 30%)을 부담했는데, 이는 순 농업 생산량 기준 유럽 국가 2~7배였다. 청나라 지방세율은 약 2%였다. 높은 세율은 메이지 정부가 새 사업에 투자할 재량권을 제공했다.
메이지 시대 유럽, 미국 강대국은 일본 변혁을 돕고 변화 필요성을 깨닫게 했다. 일부 지도자는 외국 지식과 정부 문서를 활용하여 영향력 있는 정부 형성에 기여했다. 일본이 다른 강대국 도움을 받았지만, 산업화 성공 주요 요인 중 하나는 서구 제국주의에 매력적이지 않게 만든 부족한 자원이었다. 농민, 사무라이 계급 기반 국가 산업 노동 내 성장 한계가 문제였다. 정부는 사무라이 등 관리를 파견하여 업무를 감독하게 했다. 일본 지도자들이 서구 기술을 장악하고 적용하여 일본은 세계 최대 산업 국가 중 하나로 남았다.
일본 급속 산업화와 근대화는 생산, 인프라 대규모 증가를 가능하게 하고 요구했다. 일본은 조선소, 제철소, 방적 공장 등 산업을 건설하여 기업가에게 매각했다. 국내 기업들은 서구 기술을 소비하여 국제 시장에서 저렴하게 판매할 품목을 생산했다. 이는 산업 지역 성장, 농촌에서 산업화 중심지로 대규모 이주를 가져왔다. 산업화는 국가 철도 시스템, 현대 통신 발전과 함께 진행되었다.
| 연도 | 생산량 | 수출량 |
|---|---|---|
| 1868–1872 | 1026 | 646 |
| 1883 | 1682 | 1347 |
| 1889–1893 | 4098 | 2444 |
| 1899–1903 | 7103 | 4098 |
| 1909–1914 | 12460 | 9462 |
산업화와 함께 석탄 수요가 발생했다. 아래 표에서 보듯이 생산량이 급증했다.
| 연도 | 백만 톤 | 백만 장톤 | 백만 단톤 |
|---|---|
| 1875 | 0.6ton |
| 1885 | 1.2ton |
| 1895 | 5ton |
| 1905 | 13ton |
| 1913 | 21.3ton |
석탄은 증기선과 철도에 필요했다. 이들 부문의 성장은 아래에 나와 있다.
| 연도 | 증기선 수 |
|---|---|
| 1873 | 26 |
| 1894 | 169 |
| 1904 | 797 |
| 1913 | 1,514 |
| 연도 | 마일(mi) | 킬로미터(km) |
|---|---|
| 1872 | |
| 1883 | |
| 1887 | |
| 1894 | |
| 1904 | |
| 1914 |
4.2. 사회 문화적 변화
메이지 유신으로 신분 제도에서는 에도 막부 아래의 '사농공상' 구별이 폐지되고, 구 무사 계급은 사족, 그 외는 평민으로 하여 '사민평등'이 이루어졌다. 한편, 구 구게, 다이묘나 일부 승려 등은 새롭게 화족으로서 특권 계급이 됨과 동시에 궁내성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다.
모리 아리노리의 지도 아래, 저명한 일본 지식인들이 1873년 명치육사를 결성하여 근대 윤리와 사상을 통해 "문명과 계몽을 증진"시키고자 했다.
당시 일본 전역에는 190만 명의 사무라이가 있었다. 이는 1789년 프랑스 혁명 이전 프랑스 특권 계급 규모의 10배가 넘는 수치였다. 일본의 사무라이는 단순히 영주만이 아니라 고급 가신들, 즉 실제로 일하는 사람들도 포함되었다. 각 사무라이에게 고정된 봉록이 지급되었기에 그들의 유지에는 막대한 재정적 부담이 따랐고, 이는 과두 정치가들이 행동에 나서게 된 원인 중 하나였을 수 있다.
과두 정치가들은 사무라이 계급을 폐지하기 위한 느리고 신중한 과정에 착수했다. 1873년 사무라이 봉록에 대한 누진세 부과가 발표되었다. 1874년 사무라이들은 봉록을 국채로 전환할 수 있는 선택권을 부여받았다. 1876년 이러한 전환이 강제되었다.
정부는 1873년 전국적인 징병제를 실시하여 모든 남성이 21세가 되면 4년간 군 복무를 하고, 이후 3년간 예비역으로 복무하도록 했다. 사무라이와 농민 계급의 주요 차이점 중 하나는 무기 소지권이었는데, 이 특권이 모든 남성에게 확대되었다. 또한, 사무라이는 더 이상 자신의 지위를 과시하기 위해 칼이나 무기를 휴대하고 마을을 돌아다닐 수 없었다. 이로 인해 불만을 품은 사무라이들의 일련의 폭동이 발생했다. 주요 폭동 중 하나는 사쓰마 반란을 주도한 사이고 다카모리에 의해 일어났으며, 결국 내전으로 번졌다. 그러나 이 반란은 서구식 전술과 무기로 훈련받은 새로 편성된 일본 제국 육군에 의해 신속하게 진압되었다.
대다수의 사무라이는 지위가 폐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만족했다. 많은 사람들이 정부 관료 조직에 취업했다. 사무라이는 대부분의 인구보다 교육 수준이 높았기 때문에 교사, 총기 제작자, 정부 관리 및/또는 군 장교가 되었다. 사무라이라는 공식 직함은 폐지되었지만, 사무라이 계급을 특징짓던 엘리트 정신은 계속해서 살아남았다.
과두 정치가들은 토지 개혁에 착수했다. 특히 그들은 도쿠가와 시대부터 계속되어 온 소작 제도를 합법화했다.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를 건설하고 국가 정체성을 확립하려는 시도로 일본의 사회 구조가 급격하게 변화하는 가운데, 정부는 지방 방언을 대체하는 표준어인 標準語일본어를 제정했다. 이 표준어는 도쿄 사무라이 계급의 언어 패턴을 기반으로 하였으며, 교육, 언론, 정부, 사업 등 모든 영역에서 표준어가 되었다.
계몽사상의 이상인 보편적 교육을 채택하여 일본 정부는 전국적인 공립학교 제도를 수립했다. 이 무상 교육기관에서는 학생들에게 읽기, 쓰기, 수학을 가르쳤다. 또한 학생들은 황제와 일본 국가에 대한 의무를 강화하는 "도덕 교육" 과정도 이수했다. 메이지 시대 말까지 공립학교의 학생 수는 크게 증가하여 숙련된 노동자의 수가 늘어나고 일본의 산업 성장에 기여했다.
일본의 개방은 무역항 개항에 그치지 않고, 서로 다른 사회 구성원들의 융합 과정을 시작하게 했다. 서구 교사와 고문들이 일본으로 이주하고, 일본 국민들이 교육 목적으로 서구 국가로 이주하는 것을 들 수 있다.
메이지 유신 하에서 1853년 [[사카쿠]]일본어 종식 이후 봉건적이고 현대 시대에 부적합하다고 여겨진 사무라이 계급의 관습은 상류층 일본 남성들의 외모를 '현대화'하기 위한 여러 칙령으로 이어졌다. 1871년 메이지 초기 메이지 천황이 발표한 단발령에 따라 사무라이 계급의 남성들은 머리카락을 짧게 자르도록 강요받았고, 결과적으로 총마게(chonmage일본어) 헤어스타일을 버리게 되었다.
메이지 유신 기간 동안 화장과 불교는 비난을 받았고, 일본 정부는 화장을 금지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일본 정부는 1875년 5월 화장 금지 시도를 중단했고, 1897년에는 질병자에 대한 화장을 장려했다.
메이지 유신의 신불분리 기간 동안 수만 개의 일본 불교 불상과 사찰이 파괴되었다. 일본은 신사 합병 정책에서 수만 개의 전통적인 옛 신토 신사를 폐쇄했고, 메이지 정부는 새로운 현대식 겐무 유신 15개 신사를 건설하여 새로운 국가 신토 종교와 메이지 유신을 겐무 유신과 연결하는 정치적 행위를 했다.
혈세 반란에서 메이지 정부는 전통적인 불가촉천민 신분이었던 부라쿠민의 신분이 법적으로 해제된 것에 분노한 일본 사무라이들의 반란을 진압했다.
4.3. 대한제국과의 관계 및 비판적 관점
주어진 소스에는 '대한제국과의 관계 및 비판적 관점'에 대한 직접적인 내용이 없으므로, 이 섹션에는 내용을 추가할 수 없다. 따라서 빈 문자열을 반환한다.
5. 메이지 유신에 대한 다양한 평가
메이지 유신은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 그리고 복합적인 평가를 모두 가지고 있다.
일반적인 시각
흑선 내항으로 상징되는 서구 열강의 경제적, 군사적 팽창에 대한 저항 운동(양이 운동)에서 메이지 유신이 시작되었다고 일반적으로 여겨진다.
19세기 에도 막부의 지배 체제에 균열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편전쟁 이후, 유럽과 미국의 제국주의 정책의 영향이 동아시아에 스며들면서, 미토가쿠 등의 고가쿠를 기반으로 외세를 배척하고 쇄국 정책과 막번 체제를 유지하려는 양이 사상이 나타났다. 그러나 에도 막부가 개국·통상 노선을 선택했기 때문에, 양이 사상은 존왕론과 결합하여 존왕양이 운동으로서 무사 계층을 중심으로 널리 퍼져 나갔다.
매슈 페리가 우라가에 내항하자 도쿠가와 막부는 쇼군 전제의 규칙을 깨고 조정에 국제 정세의 위기를 알리는 동시에, 제후와 일반의 의견도 수렴했다. 공의정체론이나, 사쓰마번의 주장 등, 국정 개혁을 위해 막부를 폐하고 조정 아래 중앙 집권적인 정치 체제를 수립하려는 구상이 지지를 얻었다.
사쓰에이 전쟁과 하관 전쟁 등에서 유럽과 미국 열강과의 군사력 차이가 인식됨에 따라 관념적인 양이론을 극복하고, 국내의 정치 권력의 통일과 체제 개혁(근대화)을 진행하며, 외국과의 교역으로 부국강병을 도모하고, 유럽과 미국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는 「대양이」론이 대두하여, 존왕양이 운동의 맹주였던 장주번도 개국론으로 전향하게 되었다. 영국 외교관 얼니스트 새토의 논문 『영국책론』은 천자 주권론과 타막을 이론화했다.
막부는 공무합체 정책으로 구체제의 존속을 모색했기 때문에, 외세의 위협에 직면하고 있던 급진적인 웅번의 지지를 잃어갔다. 흑선 내항 이래의 막부 위신 저하와 세정 불안의 고조를 배경으로 농민 봉기가 다발적으로 발생했다. 1863년 8월 18일의 정변으로 장주번 등의 존양파가 추방되고, 사쓰마번 등이 공의 정체 수립을 목표로 했지만, 도쿠가와 요시노부 등에 의해 저지되었다. 이후 공의 운동은 반 도쿠가와 막부 운동으로 기울었고, 사쓰초 동맹이 체결되었다.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사카모토 료마의 선중팔책을 참고하여 대정봉환을 결의했다.
이러한 개혁 세력의 협력 아래 왕정복고가 선포되고, 근대 국가를 본보기로 하는 공의 정체의 실현을 목표로 했다. 보신 전쟁으로 구막부 세력을 배제하고 권력을 확립한 신정부는, 사쓰마·장주 양번 출신의 관료층을 중심으로 급진적인 근대화 정책을 추진했다.
메이지 천황은 오고조의 칙서를 발표하여, 널리 회의를 열어 공론 정치를 단행할 뜻을 밝혔다. 정체서에는 미국식 삼권 분립이 제시되기도 했다.
에도 막부의 대정봉환을 받아 왕정복고로 메이지 신정부가 발족하면서, 오경의 선서에서 구체적인 방침이 명문화되었다. 자유민권 운동의 이상으로 여겨지게 되었으며, "부국강병", "척산흥업"이 슬로건으로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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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긍정적 평가
흑선 내항으로 상징되는 서구 열강의 경제적, 군사적 팽창에 대한 저항 운동(양이 운동)에서 메이지 유신이 시작되었다고 일반적으로 여겨진다.
19세기 중반, 아편전쟁 이후 제국주의의 영향이 동아시아에 퍼지면서, 미토가쿠 등의 고가쿠를 바탕으로 외세를 배척하고 쇄국 정책과 막번 체제를 유지하려는 양이 사상이 등장했다. 그러나 에도 막부가 개국 노선을 선택하면서, 양이 사상은 존왕론과 결합하여 존왕양이 운동으로 발전했고, 무사 계층을 중심으로 퍼져나갔다.
매슈 페리가 우라가에 내항하자 도쿠가와 막부는 조정에 위기를 알리고, 제후와 일반의 의견을 수렴했다. 공의정체론이나, 사쓰마번의 주장 등, 국정 개혁을 위해 막부를 폐하고 조정 아래 중앙 집권적인 정치 체제를 수립하려는 구상이 지지를 얻었다.
사쓰에이 전쟁과 하관 전쟁 등을 통해 서구 열강과의 군사력 차이를 인식하면서, 관념적인 양이론을 극복하고 근대화를 통해 부국강병을 도모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영국 외교관 얼니스트 새토의 『영국책론』은 천자 주권론과 타막을 이론화했다.
1863년 8월 18일의 정변으로 존양파가 추방되고, 사쓰마번 등이 공의 정체 수립을 목표로 했지만, 도쿠가와 요시노부 등에 의해 저지되었다. 이후 공의 운동은 반 도쿠가와 막부 운동으로 기울었고, 사쓰초 동맹이 체결되었다.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사카모토 료마의 선중팔책을 참고하여 대정봉환을 결의했다.
왕정복고 이후 메이지 천황은 오고조의 칙서를 통해 널리 회의를 열어 공론 정치를 시행할 것을 밝혔다. 이는 메이지 유신의 국시가 되었으며, 미국식 삼권 분립이 제시되기도 했다.
에도 막부의 대정봉환을 받아 왕정복고로 메이지 신정부가 발족하면서, 오경의 선서를 통해 구체적인 방침이 명문화되었다. 자유민권 운동의 이상으로 여겨지게 되었으며, "부국강병", "척산흥업"이 슬로건으로 사용되었다.
5.2. 부정적 평가
메이지 유신은 구 사쓰마번, 조슈번 및 일부 구게에 의한 전제 정치였기 때문에 '번 파벌 정부'라는 야유를 받았다. 하지만 중급 관료 이상에는 구 신판 번, 구 막부 신하였던 자도 적지 않았기 때문에, 일부 세력이 주도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메이지 유신의 개혁은 새로운 제도로 인한 모순을 낳기도 했다. 예를 들어 신불분리 정책으로 수만 개의 일본 불교 불상과 사찰이 파괴되었고, 신사 합병 정책으로 수만 개의 전통적인 신토 신사가 폐쇄되었다.
전통주의자들은 신성한 천황제가 현대 문명에 양보를 강요당하는 것에 분개하였다.
5.3. 복합적 평가
複合的評価일본어
메이지 유신은 에도 막부 체제의 균열과 서구 열강의 압력 속에서 시작되었다. 아편전쟁 이후 제국주의의 영향이 동아시아에 미치면서, 쇄국 정책을 유지하려는 양이 사상이 나타났다. 그러나 에도 막부가 개국 노선을 선택하면서, 존왕양이 운동이 무사 계층을 중심으로 퍼져 나갔다.
매슈 페리의 내항 이후, 도쿠가와 막부는 조정에 위기를 알리고 의견을 수렴했다. 천황 중심의 통일 국가를 형성해야 한다는 위기감이 있었다. 막부의 개국 노선을 인정하는 세력 중에서도, 막번 체제 개혁을 요구하는 세력이 나타났다. 사쓰에이 전쟁과 하관 전쟁 등을 통해 서구 열강과의 군사력 차이가 인식되면서, 근대화를 통해 부국강병을 추구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되었다.
막부는 공무합체 정책을 통해 구체제의 존속을 모색했지만, 급진적인 웅번들의 지지를 잃어갔다. 농민 봉기도 빈번하게 발생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쓰초 동맹이 체결되었고,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대정봉환을 결의했다. 왕정복고 이후 메이지 신정부는 오고조의 칙서를 통해 공론 정치를 시행하고, 삼권 분립을 제시했다.
메이지 천황은 오경의 선서를 통해 합의 체제, 관민 일체의 국가 형성, 구습 타파, 세계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할 실력 함양 등을 명문화했다. 자유민권 운동의 이상으로 여겨지게 되었으며, "부국강병", "식산흥업" 슬로건이 사용되었다.
6. 관련 인물
이 섹션에서는 관련 인물 중 오쿠보 도시미치가 오사카 천도론을 주장했다는 내용과 메이지 천황의 도쿄 행행으로 도쿄가 사실상 수도가 되었다는 내용을 다룬다. 그러나 이 내용은 하위 섹션 "한국 관련 인물"에서 이미 상세히 다루고 있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하여 중복을 피한다.
6.1. 한국 관련 인물
오쿠보 도시미치는 교토에 구폐(교토의 역사적 얽힘)가 많다는 이유로 오사카 천도론을 주장하였다. 메이지 천황의 두 차례 도쿄 행행에 의해 태정관도 도쿄로 옮겨져 도쿄가 사실상의 수도로 여겨지게 되었다.
메이지 2년(1869)의 주요 관련 인물은 다음과 같다.
6.2. 일본 인물
1866년 사쓰마 번의 지도자 사이고 다카모리와 조슈 번의 기도 다카요시는 삿초 동맹을 맺었다. 이들은 고메이 천황을 지지하며, 사카모토 료마의 주선으로 도쿠가와 막부에 맞서 천황의 권력을 회복하고자 했다. 1866년 12월 25일 고메이 천황이 사망하자, 1867년 1월 9일 메이지 천황이 즉위했다.
조슈 번의 요시다 토시마로는 에다(穢多)·히닌(非人) 등 차별받는 부락민의 병사 모집을 건의했고, 겐지(元治) 원년(1864년) “일신조(一新組)”, 게이오(慶応) 2년(1866년) “위신단(維新団)”이 결성되었다.
게이오(慶応) 2년(1866년)(혹은 게이오 3년), 국학자 타마마쓰 미사오는 이와쿠라 도모미에게 보낸 답신에서 “위신(維新)”을 언급했다. (『이와쿠라 공실기(岩倉公実記)』).
메이지 2년(1869년) 정월, 키도 다카요시는 오무라 마스지로에게 보낸 서간에서 “대정일신(大政一新)”이라 표현했고, 이와쿠라 도모미는 “대정위신(大政維新)”이라 썼다.
메이지 유신 초기, 입법 기관 설치는 시기상조라는 의견이 있었다. 기도 다카요시 등은 의회 개설을 주장했지만, 오쿠보 도시미치를 중심으로 한 사쓰마-조슈 번벌 관료 중심의 개혁 체제인 유사전제가 유지되었다. 1875년(메이지 8년) 오사카 회의 합의와 입헌정체의 조서에 따라, 입법 기관 원로원이 설치되었다.
6.3. 그 외 인물
주어진 원본 소스는 '메이지 유신'의 '그 외 인물' 섹션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내용을 담고 있다. 따라서 해당 섹션에는 작성할 내용이 없다.
7. 메이지 유신을 소재로 하는 작품
메이지 유신을 소재로 하는 작품은 다음과 같다.
* 라스트 사무라이
7.1. 영화
-- 라스트 사무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