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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대포 무장간첩 침투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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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대포 무장간첩 침투 사건은 1983년 북한의 공작선과 소형 잠수정을 이용한 간첩 침투 시도로, 부산 다대포 해안에서 발생했다. 북한은 115톤급 공작 모선과 소형 잠수정을 이용하여 간첩을 침투시키려 했으며, 침투조는 통신 장비, 변장 도구, 무기 등을 소지하고 있었다. 1983년 10월 9일 해군에 의해 간첩선이 격침되었고, 12월에는 침투한 간첩 5명 중 2명이 발각되어 교전 끝에 사살 또는 생포되었다. 이 사건은 아웅 산 묘역 테러 사건과 함께 남북 관계를 악화시켰으며, 다대포 해안에 군 철조망 설치를 야기했다. 이후 남북 화해 분위기 속에서 철조망이 철거되었고, 2002년 부산 아시안 게임 당시 북한 여객선 만경봉 92호가 다대포항에 입항하는 등 사회적 변화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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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대포 무장간첩 침투 사건
사건 개요
사건명다대포 무장간첩 침투 사건
발생 날짜미상
발생 시간미상
발생 장소부산광역시 다대포 해안
유형무장간첩 침투
배경
목적대한민국 내 게릴라 양성 및 지령 하달
국군 및 경찰의 전력 파악
경과
침투무장간첩 5명 다대포 해안 침투
발견해안 경계 근무 중이던 해군 병력에 의해 발견
간첩들은 사살 또는 생포됨
잔당 수색국군, 경찰, 향토예비군 합동 작전으로 잔당 수색 실시
결과
간첩 사살3명 사살
간첩 생포1명 생포
잔당 도주1명 도주 (이후 행적 불명)
아군 피해없음
영향
사회적 영향반공 의식 고취 및 안보 경각심 강화
군사적 영향해안 경계 강화 및 대침투 작전 능력 향상

2. 배경

다대포 무장간첩 침투 사건은 북한 인민무력부 정찰국이 1983년 당시 대한민국 대통령이었던 전두환을 살해할 목적으로 일으킨 사건이다. 이 사건은 같은 해 10월에 발생한 아웅 산 묘역 테러 사건 발생 55일 만에 일어난 사건이었다.[1]

2. 1. 아웅 산 묘역 테러 사건

다대포 무장간첩 침투는 1983년 10월 미얀마에서 발생한 아웅 산 묘역 테러 사건 발생 55일 만에 일어난 사건으로, 북한 인민무력부 정찰국이 당시 대한민국 대통령이었던 전두환을 살해하기 위해 폭탄 테러를 일으켜 수행원 17명을 사망하게 하였다.[1]

2. 2. 공작 모선 및 자선

구분제원무장
공작 모선길이 28m, 80톤급, 최고 속력 50노트, 20~22명 승선 가능열추적 휴대용 지대공 미사일 4발, 107mm 로켓포 2문, 7.62mm 기관총 2문, 40mm 측탄총 2문, 고사기관총 2문, 레이다, 송수신 무전기[7]
공작 자선길이 8m, 5톤급, 최고 속력 35노트, 8~10명 승선 가능107mm 로켓포 2문, 7.62mm 기관총 1문, 측탄총 2문, 시한폭탄 1~2개, 레이다, 야시경, 송수신 무전기[7]


2. 3. 안내공작원

안내공작원은 체코제 권총 1정, 실탄 120발, 무성권총, 수류탄 2~4발, 단검, 무전기 등을 소지하였다.[7]

3. 사건 경위

1983년 12월 3일, 그믐날 밤 10시 30분경 부산 다대포 해안으로 무장간첩이 침투했다. 이들은 원산항에서 출발하여 대마도를 거쳐 다대포로 침투를 시도했다. 해안 상륙을 시도하던 간첩 2명은 초병에게 생포되었고, 도주하던 무장간첩선은 해군공군의 추격 끝에 영도 남방 해상에서 격침되었다.

3. 1. 첫 보도

1983년 12월 4일 오전 5시 30분, 대간첩대책본부는 국방부 기자실에서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3일 밤 10시 40분경 부산 다대포 해안으로 침투하던 간첩 2명을 근무 중이던 육군 초병이 발견하고 유인, 교전 끝에 생포하였고, 도주하던 무장간첩선 1척을 밤 11시경 영도 남방 9km 해상에서 격침시켰다."[2]

3. 2. 간첩 포획

1983년 12월 3일 밤 10시 30분경, 30m 전방에서 개펄을 지나 백사장으로 침투하던 간첩 2명을 발견, 10m 전방까지 접근하기를 기다려 조명탄을 터뜨리고 5명의 초병이 5분간 격투 끝에 생포하였다.[3] 간첩들이 소지했던 장비들은 아웅 산 폭파 사건의 범인들이 소지했던 것과 동일한 것으로 확인되었다.[4]

그러나 당시 보도와는 달리, 2003년 9월 25일 국가보훈처 국정감사에서 국회 정무위원회 엄호성 의원은 무장공비를 생포한 것은 육군 초병이 아닌 HID 소속 특수요원이었으며, 정보기관에서 침투 정보를 미리 입수하여 한 달 전부터 특수훈련을 시켜 생포에 성공한 것이라고 주장했다.[5]

3. 3. 간첩선 격침

5톤급의 소형 간첩선은 속도가 빨랐다. 조명탄이 터지자 다대포 앞 해상 300m에 있던 무장 간첩선이 도주하였고, 연락을 받고 출동한 해군과 공군이 추격하다가 밤 11시경 영도 남방에서 고속정으로 들이받아 격침시켰다. 간첩선에 남아 있던 3명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었다.[3][6]

3. 4. 침투 경로

1983년 11월 30일 오후 1시, 간첩들은 일본 어선을 가장한 공작모선을 타고 원산항의 해상 연락소를 출발하여 공해를 따라 남쪽으로 이동했다. 12월 3일 오후 5시경 대마도 동북방 해상에 머물렀고, 5명이 공작자선을 타고 모선에서 분리, 오후 9시 40분경 다대포 인근 해상에 도착하였다.[7]

4. 인양

1983년 12월 20일, 대간첩대책본부는 격침된 간첩선에 타고 있던 무장간첩의 시신 1구를 다대포 해수욕장 인근 해상에서 발견하여 인양했다고 발표하였다.[8] 1984년 4월 9일, 태종대 북서쪽 30m 해저에 침몰된 간첩선은 사건 발생 128일 만에 대한민국 해군 구조단에 의해 인양되었다. 선내 조종실에서는 시신 1구가 발견되었다.[9]

5. 원인 분석

북한이 무장간첩을 침투시킨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분석이 있다. 일부 언론에서는 대한민국의 후방에 혼란을 조성하고, 내부에서 무장봉기가 일어난 것처럼 위장하기 위한 것으로 추측했다.[10] 1968년 12월 8일 대간첩대책본부 발표에 따르면, 생포된 간첩들은 이미 침투한 간첩과 만나 부산 일대 주요 국가 기관시설을 폭파하고 인명을 살상하여 사회 혼란을 조성한 뒤 함께 월북할 계획이었다.[11]

5. 1. 침투 이유

일부 언론에서는 북한이 무장간첩을 침투시킨 것은 대한민국의 후방에 혼란을 조성하여 내부에서 무장봉기가 일어난 것처럼 위장하기 위한 것으로 추측하기도 하였다.[10] 1968년 12월 8일 대간첩대책본부 발표에 따르면, 생포된 간첩들은 이미 침투한 간첩과 만나 부산 일대 주요 국가 기관시설을 폭파하고 인명을 살상하여 사회 혼란을 조성한 뒤 함께 월북할 계획이었다.[11]

6. 사후 처리 및 사회적 여파

사건 이후 다대포 해수욕장 주변에는 군 철조망이 설치되었으나, 2002년과 2007년에 걸쳐 철거되었다. 북한은 이 사건을 남한의 자작극이라고 주장했다.[12] 2002년 부산 아시안 게임 당시 북한 응원단을 태운 만경봉호가 다대포항에 입항하여 이목을 끌었다.[15]

6. 1. 북한의 반응

북한은 사건 발생 7일 후인 12월 11일, 로동신문평양방송을 통해 이 사건이 남한 측에 의해 조작된 자작극이라고 주장했다.[12]

6. 2. 군 철조망 설치와 제거

침투 사건 이후 다대포 해수욕장 주변에는 군 철조망이 설치되었다. 3.37km 구간의 철조망은 군 경비 병력이 철수한 후 방치되다가 2002년에 1.33km 구간이, 2007년에 나머지 구간이 철거되었다.[13][14]

6. 3. 만경봉호의 입항

1968년 무장간첩 침투 사건 이후 19년 만인 2002년, 부산 아시안 게임에 참가한 북한 선수단의 응원단을 태운 만경봉호다대포에 입항하면서 큰 주목을 받았다.[15]

참조

[1] 뉴스 아웅산蠻行 55일만에 또 이런짓을" 온國民이 치떨어 동아일보 1983-12-05
[2] 뉴스 北傀무장간첩2명 生捕 對間諜本部 발표 매일경제 1983-12-05
[3] 뉴스 빈틈없는「번개肉彈작전」 동아일보 1983-12-05
[4] 뉴스 생포間諜장비「아웅산」것과 同種 경향신문 1983-12-07
[5] 뉴스 국감 파일 / “83년 다대포 무장간첩 북파공작원들이 생포” 동아일보 2003-09-26
[6] 뉴스 釜山침투間諜 北傀黨조사부서 南派 경향신문 1983-12-06
[7] 뉴스 日漁船위장 對馬島근해 잠입 경향신문 1983-12-07
[8] 뉴스 무장간첩 시체引揚 多大浦 인근해상서 매일경제 1983-12-20
[9] 뉴스 多大浦간첩선 인양 경향신문 1984-04-10
[10] 뉴스 北傀의 자포자기적 도발 매일경제 1983-12-05
[11] 뉴스 釜山침투間諜 주요施設폭파 混亂조성 任務 경향신문 1983-12-08
[12] 뉴스 多大浦 간첩사건 北傀서 발뺌선전 동아일보 1983-12-12
[13] 뉴스 [부산/경남]낙동강하구 軍철조망 23년만에 철거 동아일보 2006-10-17
[14] 뉴스 부산 다대포·낙동강변 군 철책 내달 철거 한겨레 2007-01-13
[15] 뉴스 [현장기자] 통일마당된 다대포항 국민일보 2002-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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