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웅산 묘역 테러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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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웅산 묘역 테러 사건은 1983년 10월 9일, 미얀마 양곤의 아웅산 묘역에서 일어난 테러 사건이다. 전두환 대통령의 동남아 순방 중, 북한 공작원들이 아웅산 묘소를 방문할 예정이던 대한민국 고위 관료들을 노리고 설치한 폭탄이 터져, 서석준 부총리, 이범석 외무부 장관 등 17명의 한국 정부 관계자와 4명의 미얀마인이 사망하고, 이기백 합참의장 등 14명이 부상당했다. 이 사건으로 미얀마는 북한과 단교했고, 미국은 북한을 테러 지원 국가로 지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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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직 사건 - 6.25 전쟁
6.25 전쟁은 1950년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되어 1953년 휴전 협정으로 종결되었으며, 한반도의 분단과 막대한 인명 피해를 초래한 한국 전쟁을 의미한다.
아웅산 묘역 테러 사건 | |
---|---|
위치 정보 | |
장소 | 미얀마 양곤 아웅산 묘역 |
사건 개요 | |
사건명 | 라웅군 폭탄 테러 |
다른 이름 | 라웅군 사건 |
발생일 | 1983년 10월 9일 |
시간 | 10시 25분 (MST) |
사건 유형 | 암살 미수, 폭탄 테러 |
수단 | 폭파 |
사용된 무기 | 클레이모어 지뢰 |
표적 | 대한민국 대통령전두환 |
피해 상황 | |
사망자 | 21명 (서석준 부총리 외) |
부상자 | 47명 |
가해자 정보 | |
범인 | 북한 공작원 3명 (실행범), 말레이시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사관 (사령부) |
동기 | 한국의 무력 병합, 북한의 외교적 고립 예방 |
사건 처리 | |
대응 | 실행범 1명 총살, 2명 체포, 버마 정부의 북한과의 국교 단절, 국가 승인 취소 |
유죄 판결 | 강민철: 무기징역 다른 2명: 사형 |
추가 정보 | |
관련 분쟁 | 한국 전쟁 |
연관 사건 | 김포국제공항 폭탄 테러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 |
참고 자료 | 라웅군 사건이란? 북한의 폭격이 양곤을 뒤흔들었을 때 |
2. 역사적 배경
1980년 5·18 민주화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집권한 전두환 정권은 국제적 고립을 탈피하고, 1988년 서울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위해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다. 1982년 전두환 대통령은 아프리카 순방을 통해 서방 및 비동맹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을 시도했다.[1]
이에 북한은 한국의 외교적 행보에 위협을 느끼고, 전두환 대통령 암살을 통해 한국의 정세를 불안정하게 만들고 국제적 고립을 심화시키려 했다.
2. 1. 북한의 암살 시도
1982년, 김정일은 전두환 대통령의 아프리카 순방 당시 암살을 지시했다. 김중린은 저격수를 아프리카에 파견하여 전두환 대통령을 저격하고 자폭하도록 지시했으나, 저격수들이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어 실패했다.[1] 김일성은 이 암살 계획을 소련에 통보했으나, 소련은 미소 대결로 이어질 수 있다고 판단하여 암살 중지를 통보했고, 김일성은 암살을 포기했다.[2]이후 유리 안드로포프가 소련 서기장에 취임하고 소련의 지원을 약속받자, 김일성은 전두환의 동남아시아 순방 시 암살을 다시 계획했다.[3] 이 계획은 김정일이 수립하고, 총 지휘는 장성택의 형인 장성우가 맡았다.[4] 암살팀은 김진수 소령, 강민철 대위, 김치호 대위 3명으로 구성되었다.[5]
3. 경과
1983년 10월 8일, 전두환 대통령은 동남아시아 및 오세아니아 순방의 첫 방문지인 미얀마에 도착했다. 10월 9일, 아웅 산 묘소에서 참배 행사가 예정되어 있었으나, 북한 공작원들이 전두환 대통령 도착 전에 폭탄을 터뜨려 다수의 한국 및 미얀마 인사들이 사망했다.[1]
전두환은 사건 직후 모든 순방 일정을 취소하고 특별기편으로 귀국했다. 미얀마는 자국의 독립 영웅인 아웅산 묘역에서 발생한 테러에 분노하여 북한과의 외교 관계를 단절하고 국가 승인을 취소했으며, 전 세계 60여 개국도 북한과의 외교 관계를 축소하거나 단절하는 조치를 취했다.[38] 미얀마 경찰은 범인 3명 가운데 신기철 상위를 사살하고 김진수 소좌와 강민철 상위를 체포했다.
희생자들의 시신은 수습된 뒤 합동 국민장이 거행되었으며, 이 사건으로 미얀마, 사모아, 코스타리카 등의 국가들이 북한과 단교 조치하였고 비동맹국 회의에서 북한의 발언권이 약화되었다. 한편, 대한민국의 대학들은 가을 축제를 모두 취소하거나 연기했고, KBS, MBC 등의 방송국은 쇼 및 오락 프로그램을 포함한 모든 방송 일정을 취소하고 보도 프로그램을 방송하였다.[38]
3. 1. 테러 발생
1983년 10월 9일, 미얀마의 독립 영웅 아웅 산 장군 묘소에서 참배 행사가 예정되어 있었다. 서석준 부총리를 비롯한 수행 공무원들과 경호원들은 행사 준비 및 예행 연습을 하고 있었다. 같은 시각 오전 10시 23분경 전두환은 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영빈관에서 출발했다.[3]오전 10시 26분경, 예행연습을 마치고 대통령을 맞이할 채비를 마친 서석준 부총리를 비롯한 수행원들은 대통령 측근으로부터 '''"차량 정체로 인해 대통령이 약 30분 뒤에 지연 도착"'''한다는 연락을 받고 애국가 예행 연습을 한 번 더 한다.
북한에서 파견한 폭탄 테러 용의자 중 한 명인 신기철은 전두환이 오전 10시 30분에 도착한다는 정보를 첩보를 통해 미리 파악하고 있었다. 신기철은 예행연습 중에 나온 음악을 듣고 전두환이 도착했다고 오인하여, 오전 10시 28분에 미리 설치해 두었던 폭탄 스위치를 작동시켰다.[1]
이때 이계철 주미얀마 대한민국 대사가 입장했는데, 공교롭게도 이계철 대사 역시 대머리였기 때문에 신기철은 이계철 대사를 전두환으로 착각했다. 이 폭발로 예행 연습 중이던 서석준 부총리, 이범석 외무부 장관을 포함하여 17명이 현장에서 사망하고 이기백 합동참모의장을 비롯한 14명이 부상을 당했다.[4][5]
사건 당시 이기백 합참의장은 장교 정복을 입고 있었는데, 육군 대장답게 각종 약장과 휘장들을 엄청나게 많이 달고 있었다. 이 약장과 휘장들이 방탄복 역할을 한 덕분에 겨우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고 직접 밝힌 바가 있다.
3. 2. 사망자
- 서석준: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15]
- 이범석: 외무부 장관[15]
- 김동휘: 상공부 장관[15]
- 서상철: 동력자원부 장관[15][16]
- 함병춘: 청와대 대통령 비서실장[15]
- 이계철: 주미얀마 대한민국 대사[15]
- 김재익: 청와대 대통령 비서실 경제수석비서관[15]
- 하동선: 해외협력위원회 기획단 단장
- 이기욱: 재무부 차관[37]
- 강인희: 농수산부 차관
- 김용한: 과학기술처 차관
- 심상우: 민주정의당 총재 비서실 실장 (희극인 심현섭의 아버지)[22]
- 민병석: 청와대 대통령 비서실 주치의무보좌관 (대통령 주치의)[15]
- 이재관: 청와대 대통령 비서실 공보비서관[15]
- 한경희: 청와대 대통령 경호실 경호원[15]
- 정태진: 청와대 대통령 경호실 경호원[15]
- 이중현: 동아일보 사진기자[15]
3. 3. 부상자
이기백 합참의장 등 14명이 이 사건으로 부상을 입었다.[1] 부상자 중에는 최재욱 등 언론인 출신 정치인과, 최금영, 윤국병 등 기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1]
4. 범인 체포 및 수사
범인은 강민철, 신기철, 김진수로 이루어진 북한 공작원 3인조였다. 이들은 양곤강을 건너 중국 방향으로 도주하려 했으나, 북한이 배를 보내주기로 한 약속을 어기면서 각자 도주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주민과 어부의 신고로 미얀마 경찰에 체포되거나 사살되었다. 체포 과정에서 이들이 사용한 수류탄은 조선인민군이 제공한 자살용 수류탄으로, 안전핀을 뽑자마자 바로 폭발하도록 개조된 것이었다.[6]
미얀마 경찰 수사 결과, 북한 공작원 3명은 궁지에 몰려 총격전 끝에 체포되었다. 김진수는 사살되었고, 강민철과 신기철은 중상을 입었다. 강민철은 경찰에 작전 전모를 자백했고, 11월 4일 미얀마 정부는 이 사건을 북한의 소행으로 단정하고[25] 3명의 조선인민군 군인을 실행범으로 기소했다.[17]
일본이나 미국 등에서는 실행범에 관해 여러 추측이 난무했다.[17] 일본사회당은 북한을 변호했고, 공명당도 사건 직후에는 진상 조사가 더 필요하다는 입장을 밝혔다.[17] 그러나 미얀마는 재판 과정을 공개하여 국제사회의 신뢰를 얻었고, 비동맹 중립국이었던 미얀마가 내린 결론은 국제적으로 인정되었다.
사건 당시 미얀마는 균형외교를 펼치고 있었고, 북한과 우호적인 관계였다. 그러나 아웅산 묘소 폭파와 요인 암살 시도에 미얀마 정부는 분개하여 11월 4일, 북한과의 국교를 단절하고 국가 승인을 취소하는 강경 조치를 취했다.[26] 1985년 네 윈 의장에 의해 아웅산 사당이 재건되었다.[27][28] 이후 양국 국교가 회복되는 2007년까지 24년이 걸렸다.
4. 1. 범인 체포 과정
북한 공작원 3인조 강민철, 신기철, 김진수는 범행 후 양곤강을 건너 중국 방향으로 도주하려 했다. 그러나 북한은 접선지인 양곤강에 배를 보내주기로 한 약속을 어겼고, 이에 3명은 각자 도주하기로 했다. 김진수는 따로 도주했다.[6]새벽에 김진수가 양곤강을 헤엄치는 것을 수상하게 여긴 주민들의 신고로 미얀마 경찰이 출동했다. 김진수는 체포 과정에서 수류탄을 꺼냈으나, 안전핀을 뽑자마자 바로 폭발하여 애꾸눈에 외팔이가 된 채로 체포되었다.[6]
같은 시각, 신기철과 강민철은 양곤강에서 어부 2명에게 돈을 주고 배를 탔다. 이때 어부 중 한 명이 복통을 호소하는 척하며 배에서 내려 경찰에 신고했다. 양곤강 건너편에서 기다리고 있던 경찰에 의해 신기철과 강민철은 체포되었다. 경찰서 심문 도중 신기철과 강민철은 가방에서 권총을 꺼내 경찰과 총격전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신기철은 그 자리에서 사살되었고, 강민철은 도주했으나 얼마 못 가 포위당했다. 강민철 역시 김진수처럼 수류탄 안전핀을 뽑았으나, 바로 폭발하여 외팔이가 된 채로 체포되었다.[6]
조선인민군 당국에서 준 수류탄은 공격용이 아니라 안전핀을 뽑자마자 바로 폭발하도록 개조된 자살용 수류탄이었다. 공작원들은 이를 모르고 안전핀을 뽑아 폭발로 인해 외팔이와 애꾸가 되었다.[6]
미얀마 경찰은 용의자 3명(조선인민군 소령 1명, 대위 2명)을 확인했다. 이들은 랑군 항구에 정박한 배에서 내려 북한 외교 공관에서 폭발물을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강민철은 자폭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체포되어 오른팔을 잃었고, 김진수는 눈과 팔을 잃었다. 김진수는 다 싼 예(Darr Sann Ye)라는 여성과 보기(Bo Gyi), 쉐 민 타(Shwe Min Thar)를 포함한 네 명의 남성에게 체포되었다.[6] 세 번째 용의자 신기철은 사망하기 전 3명의 군인을 살해했다. 강민철은 자신의 임무와 북한과의 연관성을 자백하여 사형을 면하고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반면 자백을 거부하고 조사에 협조하지 않은 김진수는 교수형으로 사형당했다. 북한은 강민철과의 연관성을 부인했다.[7]
미얀마 경찰의 수사와 추적으로 북한 공작원 3명은 궁지에 몰려 총격전 끝에 체포되었다. 김 상위는 사살되었고, 김 소좌와 강 상위는 중상을 입었다. 2명은 경찰에게 작전의 전모를 자백했고, 11월 4일 미얀마 정부는 범행을 북한에 의한 것으로 단정하고[25] 3명의 조선인민군 군인을 실행범으로 기소했다.[17]
4. 2. 미얀마 정부의 수사
미얀마 경찰은 용의자 3명을 조선인민군 소령 1명과 대위 2명으로 확인했다. 경찰 조사 결과, 이들은 랑군 항구에 정박한 배에서 내려 북한 외교 공관에서 폭발물을 받았던 것으로 드러났다.[6] 경찰의 수사와 추적에 의해 북한 공작원 3명은 궁지에 몰려 총격전 끝에 체포되었다. 신기철 상위는 사살되었고, 김진수 소좌와 강민철 상위는 중상을 입었다. 강민철은 자신의 임무와 북한과의 연관성을 자백하여 사형을 면하고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반면 자백을 거부하고 조사에 협조하지 않은 김진수는 교수형으로 사형당했다.11월 4일, 미얀마 정부는 이 사건을 북한의 소행으로 단정하고[25] 3명의 조선인민군 군인을 실행범으로 기소했다.[17] 미얀마는 북한과의 국교를 단절했을 뿐만 아니라 국가 승인을 취소하는 강경 조치를 취했다.[26]
5. 사건의 영향
미국은 희생자 유해와 살아남은 대표단을 한국으로 안전하게 귀환시키기 위해 군사 및 물류 지원을 제공했다. 빅터 차(Victor Cha) 전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아시아 담당 국장에 따르면, 한 한국 관리가 그에게 "이것은 미국과 같은 진정한 동맹국만이 할 수 있는 일이며, 공개되지는 않겠지만 기억될 것"이라고 말했다.[8]
이 사건으로 미얀마는 북한과의 외교 관계를 단절했다. 사건 직전 북한을 대신해 북한과 한국, 미국 간의 3자 회담을 요청하는 외교문을 전달했던 중국은 국영 언론을 통해 북한을 질책했다. 중국 관리들은 이후 몇 달 동안 북한 관리들과의 만남이나 대화를 거부했다.[9]
1994년, 유엔총회에 참석한 한국 대표는 이 사건을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과 연관시키며, 같은 정부가 처벌받지 않고 자행했다고 주장했다.[10] 그 결과, 북한은 2008년부터 2017년 11월까지를 제외하고는 그 이후로 줄곧 미국이 지정한 테러 지원 국가 목록에 포함되었다.[11]
사건 당시 미얀마는 균형외교를 펼치고 있었다. 양곤에는 남북한 양측의 대사관이 있었지만, 미얀마는 남북한에 대사관을 설치하지 않았다. 북한 주재 대사는 주중 미얀마 대사가, 한국 주재 대사는 주일 미얀마 대사가 각각 겸임하고 있었다. 비동맹 중립을 표방했고 북한과 같은 사회주의 국가였던 미얀마와 북한의 관계는 사건 전 상당히 우호적이었다. 그러나 "국부"인 아웅산의 묘소를 폭파하고 요인 암살에 이용했다는 행위에 미얀마 정부는 분개하여, 1983년 11월 4일[17] 북한과의 국교를 단절하고 국가 승인을 취소하는 강경 조치를 취했다.[26] 1985년에는 당시 최고 지도자였던 미얀마 사회주의 계획당(BSPP)의 네 윈 의장에 의해 아웅산 사당이 재건되었다.[27][28] 양국 국교는 2007년에 회복되어, 단절 기간은 24년간 지속되었다.
이 사건으로 미얀마뿐 아니라 다른 비동맹 중립 국가들로부터도 북한은 비난을 받게 되었고, 북한의 의도와는 반대로 많은 아프리카 국가들이 서울 올림픽에 참가하게 되었다. 한편, 동유럽 국가들은 1987년의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으로 서울 올림픽 참가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6. 논란
이 사건을 둘러싸고 몇 가지 논란이 제기되었다. 주범 강민철의 소속에 대한 논란과, 북한의 전두환 인식에 대한 내용이 그것이다.
6. 1. 테러범의 소속에 대한 논란
일부에서는 아웅산 묘역 테러 사건의 주범인 강민철이 북한의 공작원이 아니라 북파공작원이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2017년 《1983 버마》를 펴낸 연합뉴스 기자 강진욱은 이 책에서 아웅산 묘역 테러사건의 주범으로 알려진 강민철이 사실은 북파공작원이라고 주장했다.
전두환은 사건 직후 이 사건이 "북한 김일성 집단의 소행"임을 주장했고 남은 일정을 모두 취소하고 귀국한 뒤 비상경계태세를 발동했으며, 이에 전국적으로 북한 만행 규탄 대회가 열렸고 보복과 응징 분위기가 고조됐다.
미얀마 정부는 사건 발생 후 3주가 지나도록 북한을 특정하지 않은 채 '코리언'이 범인이라는 입장이었지만, 범인으로 지목되어 체포된 강민철은 자신이 북한 공작원임을 시인했다. 미얀마 경찰은 용의자 3명, 즉 조선인민군 소령 1명과 대위 2명을 확인했다. 경찰 조사 결과, 이들은 랑군 항구에 정박한 배에서 내려 북한 외교 공관에서 폭발물을 받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용의자 강민철과 다른 한 명의 공격자는 같은 날 수류탄으로 자폭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체포되었는데, 강민철은 오른팔을 잃었고 다른 한 명인 김진수는 눈과 팔을 잃었다.[6] 북한은 랑군 북쪽 인세인 교도소(Insein Prison)로 이송된 강민철과의 연관성을 부인했다.[7]
6. 2. 북한의 전두환 인식
1980년 광주 민주화 운동에서 공수부대를 투입한 전두환은 북한에서 "우직하고 폭력적인 인물"로 평가받았다.[20] 북한 국가보위부(현 국가정보원) 간부들은 박정희가 죽은 뒤 "사자가 나타났다"며 전두환을 경계했다. 아웅산 묘소 테러 사건 이후 작성된 북한 보위부 보고서는 이 사건이 “전두환의 교활한 계략 때문에 실패했다”고 결론지었다. 보고서는 전두환이 암살 방지를 위해 고의로 도착을 늦추고, 환영곡을 연주하게 했다고 분석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북한 국가보위부에서는 전두환이 잔혹할 뿐만 아니라 교활함까지 갖춘 인물이라는 인식이 확산되었다.[20]7. 이후 소식
끝까지 입을 열지 않은 김진수는 1985년 4월 사형이 집행되었고, 강민철은 미얀마 인세인 감옥에서 복역하다가[39] 2008년 5월 18일 53세를 일기로 중증 간질환으로 사망했다.[40] 강민철은 수사에 협조하여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지만, 2008년 옥중 사망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다.[41]
강민철은 미얀마에서 가장 오랫동안 수감되었던 수감자였다. 그는 미얀마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고, 한 팔로 망고 나무를 타는 법을 익혔으며, 기독교로 개종하여 "마태"라는 세례명을 받았다.[12] 북한과의 관계 개선 움직임 속에서 강민철은 무국적자로 간주될 수 있었다. 그는 북한의 범죄 행위를 폭로했기 때문에 반역자로 여겨질 북한으로 돌아가거나, 암살 시도 가담 혐의로 재판받을 수 있는 한국으로도 가고 싶어하지 않았고, 북한에 있는 가족의 안전을 걱정했다.[12]
2006년, 한국의 한나라당 소속 정형근은 강민철 송환 법안을 발의했다.[13] 강민철은 2008년 5월 18일 53세의 나이로 간암으로 사망했다.[14] 그의 유골은 어떻게 되었는지 알려지지 않았다.[12]
일본 자료에 따르면 김진수는 1985년에 사형되었고[17], 범행을 자백한 강민철은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강민철은 1990년대 후반 심경 변화를 보여 한국행을 희망했지만, 실현되지 않았다.[31] 2008년 5월 18일, 강민철은 간암으로 사망했고, 이로써 실행범 전원이 사망했다. 총지휘를 맡았던 장성우도 2009년 8월 사망했다.[20]
대한민국의 대통령은 29년간 미얀마를 방문하지 않다가 2012년 5월 14일 이명박 대통령이 방문했고, 같은 해 10월 8일 테인 세인 미얀마 대통령이 방한했다.
박근혜 정부 때인 2014년 대한민국 순국사절 추모비가 건립되었으며, 가로 9m, 높이 1.5m, 두께 1m 크기로 제주 무덤 형식인 '산담'을 본떠 'ㅁ'자로 만들어졌다. 벽 한쪽에 있는 틈으로 100m 정도 떨어진 테러 발생 현장이 보이도록 설계되었고, 2019년 9월 4일 문재인 대통령이 추모비를 방문했다.
2006년 4월, 미얀마는 북한과의 외교 관계를 전면 회복하기로 합의했다. 2007년 4월 26일, 24년 만에 양국 국교가 회복되었다. 이는 양국에 대한 국제적 비난을 견제하려는 목적이었다고 여겨진다.
8. 관련 미디어
-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SBS)[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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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ラングーン爆弾テロ工作員「北に騙された」
2003-09-24
[32]
뉴스
アウン・サン廟を一般公開 ラングーン事件現場
https://www.nikkei.c[...]
日本経済新聞社
2013-06-01
[33]
웹사이트
アウン・サン将軍の霊廟、20年の時を経て一般公開へ
http://www.myanmar-n[...]
2016-04-28
[34]
뉴스
【共産党研究(2)】日本共産党はまだ朝鮮労働党や金正恩委員長との関係正常化を目指しているのか 正直に話してほしい(2/2ページ)
https://www.sankei.c[...]
2017-05-10
[35]
웹사이트
92、北朝鮮 拉致、核・ミサイル問題|総選挙政策|日本共産党の政策
https://www.jcp.or.j[...]
日本共産党
2024-10
[36]
문서
범인까지 포함하면 25명
[37]
문서
사고 발생 당시 부상을 입고 생존했으나, 4일 후 사망
[38]
뉴스
韓-헝가리 代表部설치 의미와 波長
http://dna.naver.com[...]
동아일보
1988-09-13
[39]
뉴스
“남·북 어느 곳도 가기 싫다” - 미얀마서 24년째 복역 아웅산테러 주범 강민철
http://www.munhwa.co[...]
문화일보
2007-11-05
[40]
뉴스
‘아웅산 테러범’ 유일 생존자 사망
http://www.hani.co.k[...]
한겨레
2009-07-24
[41]
저널
1983 버마
https://book.naver.c[...]
박종철출판사
2017-06-10
[42]
문서
[[KBS 2TV]], [[KBS 제2라디오]]에서 예능 프로그램을 제외한 대체 편성하였다.
[43]
문서
일간지에 뒷면 편성표의 KBS와 MBC 통째로 삭제되었으며, KBS 3TV으로 방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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