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케시타 내각 (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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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케시타 내각 (개조)는 1988년 12월 소비세 도입을 골자로 하는 세제 개혁 법안이 통과된 후, 리크루트 사건으로 인한 여론 악화에 대응하기 위해 단행된 내각 개조를 통해 출범했다. 그러나 각료들의 리크루트 연루 및 소비세 도입에 대한 반발로 지지율이 급락하여, 1989년 6월 총사퇴하고 우노 내각으로 이어졌다. 주요 사건으로는 쇼와 천황 서거와 헤이세이 시대 개막, 소비세 도입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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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8년 일본 - 리크루트 사건
리크루트 사건은 1980년대 일본에서 리크루트 그룹이 정치인과 관료에게 뇌물을 제공한 혐의로 발생하여, 다케시타 노보루 총리의 사임과 정치 개혁 논의를 촉발한 대규모 정경유착 사건이다. - 1988년 일본 - 스가모 아동 방치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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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케시타 노보루가 주도한 창정회는 다나카 가쿠에이 파벌 내 정책 연구 모임으로, 다케시타의 정치적 기반이 되었으나 다나카의 반발로 해산 후 경세회로 이어졌으며 일본 정치 파벌 형성과 권력 투쟁의 사례로 평가받는다. - 1989년 일본 - 헤이세이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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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후쿠오카시 시제 시행 100주년을 기념하여 개최된 아시아 태평양 박람회는 '새로운 세계의 만남을 찾아서'라는 주제로 700만 명 이상의 관람객을 동원했으나, 예산 낭비 및 환경 문제 등에 대한 비판도 있었다.
다케시타 내각 (개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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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내각 이름 | 다케시타 개조내각 |
일본어 이름 | 竹下改造内閣 |
대수 | 74 |
수상 이름 | 다케시타 노보루 |
성립 년도 | 1988년 |
성립 월일 | 12월 27일 |
종료 년도 | 1989년 |
종료 월일 | 6월 3일 |
여당 | 자유민주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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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단 | |
각료 명단 | 내각 각료 명단 |
2. 성립 배경 및 정치 상황
1988년 12월 24일, 소비세 도입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세제 개혁 법안이 성립되었다. 리크루트 사건으로 다케시타 내각 각료들이 책임을 추궁받는 상황에서, 내각 개조를 단행했으나 한 달 만에 하세가와 다카시, 하라다 겐 두 각료가 리크루트와의 부적절한 금전 문제로 사임했다.
1989년 1월 7일, 쇼와 천황이 사망하고 아키히토가 황위를 계승하면서 다음 날 새 연호인 ‘헤이세이 원년’(平成元年일본어)이 시작되어, 쇼와·헤이세이 두 시대에 걸친 내각이 되었다. 소비세 도입과 리크루트 사건에 대한 여론의 반발로 내각 지지율은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고, 결국 1989년 6월 내각 총사퇴로 이어져 우노 소스케가 이끄는 우노 내각이 출범했다.
다케시타 개조내각 시대의 주요 사건은 다음과 같다.
- 1989년 2월 24일: 쇼와 천황의 장례식 거행
2. 1. 소비세 도입 논란
1988년 12월 24일, 소비세 도입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세제 개혁 법안이 통과되었다.[3][4] 이는 다케시타 내각의 주요 정책 중 하나였으며, 간접세 도입을 통해 세수를 확보하고 재정 건전성을 강화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러나 소비세 도입은 서민 경제에 부담을 줄 수 있다는 비판을 받았으며, 리크루트 사건과 함께 여론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다.1989년 4월 1일, 소비세가 도입되었다. 이는 다케시타 내각 (개조)의 주요 사건 중 하나로 기록되었으며, 이후 일본 경제와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다케시타 총리는 소비세 도입으로 인해 지지율이 급락하였고, 결국 1989년 6월 내각이 총사퇴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당시 내각관방장관이었던 오부치 게이조는 "이러면 소비세율과 같아져 버리잖아"라고 말하며 당시의 낮은 지지율을 언급했고, 다케시타는 사퇴를 결심했다고 한다.[5]
2. 2. 리크루트 사건과 정치 개혁 요구
1988년 리크루트 사건으로 다케시타 내각 각료들이 책임을 추궁받는 상황이 발생했다.[3] 이에 내각 개조를 단행했으나, 한 달 만에 하세가와 다카시 법무대신과 하라다 겐 경제기획청 장관이 리크루트로부터 정치자금을 받은 사실이 드러나 경질되었다.[4]이는 다케시타 내각의 도덕성에 큰 타격을 주었으며, 소비세 도입과 함께 여론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1989년 3월 일본경제신문 조사에서 내각 지지율은 13%까지 떨어졌고,[4] 말기에는 5% 전후의 매우 낮은 지지율을 기록했다. 당시 교도통신 정치부 다케시타 담당이었던 고토 겐지에 따르면, 1989년 3월 여론조사에서 내각 지지율이 3.9%를 기록하자 고부치 게이조 내각관방장관이 "이러면 소비세율과 같아져 버리잖아"라고 말했고, 다케시타는 사퇴를 결심했다고 한다.[5]
대한민국에서도 전두환 정권의 비리 문제로 정치 개혁 요구가 높아지고 있었기 때문에, 리크루트 사건은 한국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3. 주요 각료 명단
자유민주당
(아베파)

자유민주당
(나카소네파)
자유민주당
(미야자와파)
자유민주당
(미야자와파)

자유민주당
(아베파)
자유민주당
(다케시타파)
자유민주당
(아베파)
자유민주당
(다케시타파)
자유민주당
(나카소네파)
자유민주당
(고모토파)
자유민주당
(나카소네파)
자유민주당
(다케시타파)
국가공안위원회 위원장
자유민주당
(다케시타파)

자유민주당
(다케시타파)
자유민주당
오키나와 개발청 장관
자유민주당
(고모토파)
자유민주당
(미야자와파)
자유민주당
(다케시타파)
자유민주당
(다케시타파)
자유민주당
(미야자와파)
자유민주당
(나카소네파)
자유민주당
(다케시타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