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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부치 게이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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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부치 게이조는 1937년 군마현에서 태어나 와세다 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한 일본의 정치인이다. 1963년 26세의 나이로 중의원 의원에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했으며, 자민당 간사장, 외무대신 등을 거쳐 1998년 일본 총리로 취임했다. 총리 재임 기간 중에는 일본 경제 부흥을 위해 노력했으나, 2000년 뇌경색으로 사망했다. 그는 관방장관 시절 새 연호 '헤이세이'를 발표하여 '헤이세이 오지상'으로 불렸으며, 오키나와 정상회담을 개최하는 등 외교적 업적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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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부치 게이조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오부치 게이조의 공식 초상화
1998년 촬영된 공식 초상화
이름오부치 게이조
원어 이름小渕 恵三
로마자 표기Obuchi Keizō
출생일1937년 6월 25일
출생지일본 군마현 아가쓰마군 나카노조정
사망일2000년 5월 14일
사망지일본 도쿄도 분쿄구 순천당대학 의학부 부속 순천당 병원
배우자오부치 지즈코 (1967년 결혼)
자녀3명 (장녀: 오부치 아키코, 차녀: 오부치 유코 포함)
학력와세다대학교 문학사 졸업, 와세다대학교 정치경제학술원 대학원 수료 (정치학 석사)
정당자유민주당 (헤이세이 연구회)
종교불교와 신토
칭호 및 훈장정2위
대훈위 국화대수장
군마현 명예 현민
나카노조정 명예 정민
오부치 게이조 서명
오부치 게이조 서명
가족 관계 (정치인)아버지: 오부치 고헤이
형: 오부치 고헤이
별명헤이세이 아저씨
사메피
주요 직책
내각총리대신제84대
재임 기간1998년 7월 30일 ~ 2000년 4월 5일
내각오부치 내각
오부치 제1차 개조 내각
오부치 제2차 개조 내각
외무대신제121대
외무대신 재임 기간1997년 9월 11일 ~ 1998년 7월 30일
외무대신 내각제2차 하시모토 개조 내각
내각관방장관제49대
내각관방장관 재임 기간1987년 11월 6일 ~ 1989년 6월 3일
내각관방장관 내각다케시타 내각
다케시타 개조 내각
총리부 총무 장관 및 오키나와 개발청 장관제27대 총리부총무장관, 제10대 오키나와 개발청 장관
총리부총무장관 및 오키나와 개발청 장관 재임 기간1979년 11월 9일 ~ 1980년 7월 17일
총리부총무장관 및 오키나와 개발청 장관 내각제2차 오히라 내각
중의원 의원구 군마 3구
군마 5구
중의원 의원 재임 기간1963년 11월 21일 ~ 2000년 5월 14일
당선 횟수12회
정당 관련 직책
자유민주당 총재제18대
자유민주당 총재 재임 기간1998년 7월 24일 ~ 2000년 4월 5일
자유민주당 부총재(총재: 고노 요헤이)
자유민주당 부총재 재임 기간1994년 7월 ~ 1995년 10월
자유민주당 간사장(총재: 가이후 도시키)
자유민주당 간사장 재임 기간1991년 4월 ~ 1991년 10월
기타 정보
천황상황 (아키히토)

2. 생애

군마현 나카노조정 출신으로, 와세다 대학 문학부 영문학과를 졸업했다.[1][2][3][4] 1961년에는 훗날 수필가가 되는 오부치 지즈코와 결혼했는데, 두 사람을 소개해 준 사람은 당시 의원이었던 하시모토 도미사부로였다.

1963년 제30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군마현 제3구에 자민당 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26세로, 일본 헌정사상 최연소 중의원 의원 당선 기록을 세웠다. 이후 같은 지역구에서 연속 12번 당선되었다.

정계 입문 후 자민당 내에서 부간사장, 총무 등을 거쳤으며, 1979년 제2차 오히라 내각에서 총리부 총무장관 겸 오키나와 개발청 장관으로 처음 입각했다. 1987년 다케시타 내각에서 내각관방장관을 맡았고, 재임 중이던 1989년 1월 7일 쇼와 천황의 서거 이후 새로운 연호인 '헤이세이'를 발표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이 발표 장면으로 인해 '헤이세이 아저씨'라는 별명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새로운 연호 "헤이세이"를 발표하는 기자회견에 참석한 오부치 게이조 (1989년 1월 7일)


이후 1991년 자민당 간사장, 1992년 다케시타파(헤이세이 연구회) 회장, 1994년 자민당 부총재 등을 역임하며 당내 입지를 다졌다. 1997년 제2차 하시모토 내각 개조 내각에서는 외무대신으로 임명되어 러시아와의 영토 문제 협상 등을 담당했다.

1998년 7월, 하시모토 류타로 총리가 참의원 선거 패배의 책임을 지고 사임하자, 그의 뒤를 이어 자유민주당 총재내각총리대신으로 선출되었다.

총리 재임 중에는 경제 회복과 러시아와의 평화 조약 체결 등을 주요 과제로 추진했으나, 과도한 업무와 스트레스가 누적되었다. 특히 연립 정권을 구성했던 자유당이 2000년 4월 연정에서 이탈하면서 정신적 부담이 가중된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2000년 4월 초 뇌경색으로 쓰러져 의식 불명 상태에 빠졌고, 같은 해 5월 14일 6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46][47][48]

2. 1. 출생과 성장

오부치 게이조는 1937년 6월 25일 군마현 아즈마군 나카노조정에서 태어났다.[1][2] 아버지는 양잠업을 경영하며 중의원 의원을 지낸 오부치 코헤이, 어머니는 코산샤 임원이었던 오부치 치요이다. 그는 차남으로 태어났다.

전시 중에는 키타카루이자와로 소개되었는데, 그곳에서 가쿠슈인대학 교수와 친분을 맺게 되었다. 아버지의 권유로 13세 때 나카노조정립 나카노조중학교 1학년에서 도쿄의 가쿠슈인 중등과로 편입했다.[3][4] 이후 도쿄도 기타구 오지로 이주하여 생애 대부분을 도쿄에서 보냈다. 하지만 가쿠슈인은 명문가 자제들이 많아 지방 출신인 오부치에게는 편안한 환경이 아니었고, 반 친구들에게 '군마'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왕따를 당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중등과 졸업 후에는 외부 고등학교인 도쿄도립 북고등학교(현 도쿄도립 아스카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2년간의 재수 끝에 1958년 와세다 대학 제1문학부 영문학과에 입학했다.[3][4] 처음에는 작가를 지망했으나, 같은 해 아버지가 중의원 의원 재직 중 뇌졸중으로 사망하자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정치가가 되기로 결심했다.[3][4] 1961년에는 훗날 수필가가 되는 오부치 지즈코와 결혼했는데, 그녀를 소개해 준 사람은 당시 의원이었던 하시모토 도미사부로였다.

1962년 영문학 학사 학위를 받은 후 정치학 석사 과정에 진학했다.[3][4] 정치인이 되기 위한 기술 습득을 목표로 대학 시절 다양한 서클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웅변회, 후키류 합기도(일본합기도협회)의 합기도부(오부치는 합기도 4단), 시긴 서클인 이나긴회, 서도회, 쓰쓰미 요시아키가 주재한 관광학회, 아시아친우회, 오키나와 도쿄 학생 문화 협회 등 수많은 서클에 소속되었다. 또한 선거 기반을 다지기 위해 아즈마 청년 정치 연구회 회장, 군마 와세다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1963년 1월부터 9월까지는 돈이 부족했음에도 세계 일주를 감행하여 38개국을 여행했다. 이 기간 동안 설거지, 합기도 조교, 베를린에서의 TV 카메라 크루 보조 등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했다. 미국 체류 중에는 와세다 대학 재학 시절 강연을 했던 로버트 F. 케네디 당시 미국 법무장관을 만나기도 했다.[5]

2. 2. 정치 입문

군마현 나카노죠시에서 1937년 6월 25일 태어났다. 아버지 오부치 미쓰헤이는 군마현을 지역구로 둔 중의원 의원이었다.[1][2] 13세 때 도쿄의 사립 중학교로 전학하여 이후 도쿄에서 주로 생활했다. 1958년 작가를 지망하며 와세다 대학 영문학과에 입학했으나, 같은 해 아버지가 사망하자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정치인이 되기로 결심했다. 1962년 영문학 학사 학위를 받고 와세다 대학 대학원 정치학 연구과에 진학했다.[3][4]

대학원 재학 중이던 1963년 1월부터 9월까지, 당시 미국의 시정권 하에 있던 오키나와를 시작으로 총 38개국을 여행하며 세계 일주를 했다. 경비 마련을 위해 접시닦이, 합기도 조교, TV 카메라 크루 보조 등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했다.[12] 미국 체류 중에는 와세다 대학 재학 시절 강연을 했던 로버트 F. 케네디 당시 미국 법무장관을 만나기도 했다.[5]

케네디와의 만남에 영향을 받아[5], 같은 해 11월 제30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자민당 공인으로 구 군마 3구에 출마했다. 아버지의 사망 후 1960년 총선에서는 오부치 본인이 피선거권이 없어 출마하지 못했고, 대신 추대된 후보가 낙선하면서 오부치의 정계 진출 기반이 마련되었다. 1963년 선거에서 오부치는 47,350표를 얻어 4석 중 3위로 당선되었는데, 당시 나이 26세로 일본 역사상 최연소 국회의원이 되었다. 대학원 과정을 이수하며 첫 의원 임기를 시작했다. 그의 중의원 동기로는 하시모토 류타로, 나카가와 이치로, 오이데 슌, 타나카 로쿠스케, 이토 마사요시, 와타나베 미치오 등이 있다.

오부치가 속한 군마 3구는 후쿠다 다케오, 나카소네 야스히로, 일본 사회당 서기장을 지낸 야마구치 츠루오 등 거물 정치인들이 경쟁하는 격전지로, 이른바 ‘조슈 전쟁’이라 불렸다. 오부치는 스스로를 “'''빌딩 틈새의 라면집'''”[13][14] 또는 “ 양대국의 틈바구니에서 피는 백합”에 비유하며 어려운 정치 환경 속에서도 이후 연속 12회 당선되며 의석을 지켰다.

1967년 환경보호 운동가로 활동하는 오오노 치즈코와 결혼했으며, 주례는 하시모토 도미사부로가 맡았다.

자민당 내에서는 사토파 → 다나카파 → 타케시타파 → 오부치파로 이어지는 보수 본류 파벌에 속했다. 와타나베 코조, 오자와 이치로, 하시모토 류타로 등과 함께 ‘타케시타파 칠봉행’ 중 한 명으로 꼽혔으며, 타케시타 노보루의 직계로서 정치적 영향력을 키워나갔다.

1970년 1월 제3차 사토 내각에서 우정 정무차관에 임명되었다. 그는 현장 업무를 이해하겠다며 직접 우편 배달에 나서 우체국 직원들의 지지를 얻고 화제가 되기도 했다.[15] 1972년 자민당 총재 선거(각복 전쟁)에서는 같은 군마현 출신인 후쿠다 다케오 대신 파벌 수장인 다나카 가쿠에이를 지지했다. 이 때문에 지역구 유권자들의 반발을 사 같은 해 제33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고전했으나 전국 최저 득표로 간신히 당선되었다. 이후 1972년 7월 제1차 다나카 내각에서 건설 정무차관, 1973년 11월 제2차 다나카 개조 내각에서 총리부 총무부장관을 맡는 등 이례적으로 정무차관직을 세 번 역임했다.

1979년 11월 제2차 오히라 내각에서 총리부 총무장관 겸 오키나와 개발청 장관으로 임명되어 처음으로 국무대신이 되었다. 이는 중의원 동기들 중 가장 늦은 입각이었다.

이후 타케시타 노보루의 자유민주당 총재 당선을 위해 노력했으며, 1987년 11월 타케시타 내각이 출범하자 내각관방장관에 임명되어 내각총리대신 임시대리를 겸임했다. 당시 내각관방부장관이었던 오자와 이치로와의 조합은 타케시타 총리에 의해 "고·오 콤비"(스몰 콤비)로 불렸다. 관방장관 재임 중이던 1989년 1월 7일, 쇼와 천황의 서거를 공식 발표하고 새로운 천황 아키히토의 연호인 '헤이세이'를 발표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후 1991년 자민당 간사장, 1992년 타케시타파(헤이세이 연구회) 회장, 1994년 자민당 부총재를 거쳐 1997년 하시모토 류타로 내각에서 외무상을 역임하며 러시아와의 쿠릴 열도 문제 협상, 한국 통일 관련 논의 등 외교 무대에서도 활동했다. 1986년 7월부터는 자민당 군마현 지부 연합회 회장을 맡기도 했다.[16]

2. 3. 주요 정치 경력

군마현 출신으로 와세다 대학을 졸업했다. 1963년 26세의 나이로 중의원 의원(군마현 제3구)에 당선되어 당시 일본 역사상 최연소 국회의원이 되었다. 와세다 대학 대학원 과정을 이수하며 첫 임기를 수행했고, 이후 중의원에서 12선 의원을 지냈다. 정치 경력 초기에 자민당 부간사장, 총무 등을 역임했다.

1979년 총리 관저 장관 겸 오키나와 개발청 장관으로 첫 내각직을 맡았다. 1987년 내각관방장관에 임명되었고, 1989년 1월 7일, 쇼와 천황 서거 후 새로운 연호로 '헤이세이'를 발표하면서 "'''헤이세이 아저씨'''"(平成おじさん)라는 별명으로 널리 알려졌다.[17] 오부치가 '헤이세이'라고 적힌 색지를 드는 장면은 쇼와에서 헤이세이로의 시대 전환을 상징하는 모습으로 남았다.

관방장관 시절, 각료 명단 발표 시 이름을 잊는 등 실수가 잦아 "수정 장관"이라는 조롱을 받기도 했다.

1991년 오자와 이치로의 사임 후 자민당 간사장에 취임했다. 1992년 도쿄 사가와 급편 사건으로 가네마루 신이 의원직을 사퇴하자, 다케시타 노보루가 이끌던 파벌(경세회)의 회장직을 맡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오자와 이치로 파와 격렬하게 대립했으며, 다케시타의 지원을 받은 오부치가 회장으로 결정되자 이에 반발한 오자와, 하타 쓰토무 등은 탈당하여 신생당을 결성, 자민당 분열로 이어졌다.

1994년 자민당 부총재에 취임했다. 1995년 자민당 군마현 지부 연합회 회장 선거에서 나카소네 야스히로, 후쿠다 야스오 등의 반대로 연임에 실패하고 회장직에서 물러나 정치적 위기를 맞기도 했다.

1997년 9월, 제2차 하시모토 내각 개조 내각에서 외무대신으로 임명되어 다시 중앙 정치 무대의 전면에 나섰다. 외무대신으로서 대인 지뢰 전면 금지 조약(오타와 조약) 체결을 주도하여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19] 또한 러시아쿠릴 열도 문제한반도 통일 문제에 관한 협상을 진행했다.

1998년 7월 30일, 참의원 선거 패배의 책임을 지고 하시모토 류타로 총리가 사임하자, 그의 뒤를 이어 자유민주당 총재내각총리대신에 취임했다. 하시모토와 같은 파벌 소속이었기에 당내 비판과 낮은 국민적 지지 속에서 총리직을 시작했다. 참의원에서는 총리 지명을 받지 못했으나, 중의원에서 자민당이 다수 의석을 확보하고 있어 일본국 헌법 규정에 따라 총리로 선출되었다.

적을 만들지 않는 온화한 성격으로 "인품의 오부치(人柄の小渕)"라는 평을 받기도 했으나, 지나치게 일에 몰두하는 성향과 연립 파트너였던 자유당의 연정 이탈 등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건강 악화로 이어졌다. 2000년 4월 뇌경색으로 쓰러져 투병하다 5월 14일 사망했다.[46][47][48]

2. 4. 총리 재임과 사망

1998년 하시모토 류타로참의원 선거 패배의 책임을 지고 총재직에서 사임하자, 오부치가 후임으로 지명되었다. 국회에서 총리 지명 시 참의원의 지지를 얻지 못했으나, 일본국 헌법 규정에 따라 중의원의 다수 의석을 확보한 자민당의 지지로 7월 30일 공식적으로 총리로 임명되었다.

총리 재임 기간 동안 오부치는 러시아와의 평화 조약 체결 문제와 잃어버린 10년으로 불리는 일본의 경제 침체 극복이라는 두 가지 주요 과제에 집중했다. 경제 문제 해결을 위해 정부 지출 확대와 소득세 인하 정책을 추진했으며, 이는 일시적으로 경기 침체를 완화하는 효과를 보였으나 근본적인 경제 회복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소비 활성화를 위해 3,500만 명의 시민에게 쇼핑 쿠폰을 지급하는 정책을 시행하기도 했다. 또한 금융 기관의 핵심 자본 요건 강화를 추진하는 한편, 공공 인프라 투자를 위해 일본 정부 채권 발행을 늘렸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일본의 국가 부채를 증가시키는 요인이 되었다.[6] 러시아와의 평화 조약 체결 노력은 그의 임기 중 결실을 보지 못했다.

정권 초기에는 지지율이 낮았으나("저공비행"), 자유당, 공명당과 연립 정권(자자공 연립)을 구성하여 거대 여당을 확보했다. 이를 바탕으로 안정적인 정권 운영 기반을 마련하고 경제의 점진적 회복 및 외교적 성과를 이루면서 지지율이 회복되어(1999년 8월 NHK 여론조사: 지지율 53%, 반대율 25%) 장기 집권 가능성도 제기되었다.

그러나 과도한 업무량과 휴식 부족으로 건강 관리에 소홀했으며, 특히 2000년 4월 1일 연립 파트너였던 자유당이 연정을 이탈하면서 극심한 정신적 스트레스를 겪었다. 실제로 연정 이탈 다음 날인 4월 1일 기자들의 질문에 제대로 답하지 못하고 10초가량 말을 잇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이는 뇌졸중의 전조 증상인 일과성 뇌허혈 발작으로 추정된다. 평소 심장 질환이 있었던 데다 총리로서의 격무, 밤늦게까지 서류 검토와 전화 통화, 휴일 없는 일정과 잦은 해외 순방 등이 건강 악화를 가속화한 것으로 보인다.[20] 장기요양보험 시행일인 4월 1일에는 기념식에 함께 참석한 다니와 유키야 당시 후생대신에게 "최근 말이 잘 나오지 않는다"고 토로하기도 했다.[21]

결국 오부치는 2000년 4월 2일 새벽[22] 심각한 뇌졸중으로 쓰러져 의식 불명 상태로 도쿄 준텐도대학 의학부 부속 준텐도병원에 긴급 입원했다. 총리가 직무 수행 불능 상태에 빠질 경우를 대비한 임시 대리 지명이 사전에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4월 3일, 오부치가 아오키 미키오 당시 내각관방장관을 총리대신 임시 대리로 지명했다고 발표되었으나, 당시 오부치의 의식 상태를 고려할 때 지명이 가능한 상태였는지에 대해 야당과 언론으로부터 강한 의혹이 제기되었다. 이후 모리 요시로 간사장이 후임 총리 및 총재로 선출되는 과정과 맞물려, 아오키 관방장관, 모리 간사장 등 소수 실력자에 의한 밀실 정치라는 비판("5인조")을 받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후 내각에서는 반드시 총리 임시 대리 예정자를 미리 지정하게 되었다. 4월 4일, 아오키 총리 임시 대리가 주재한 각의에서 오부치 내각은 총사퇴를 결정했고,[23] 4월 5일 자민당모리 요시로를 후임 총재로 선출했으며,[24] 같은 날 국회에서 모리 요시로가 차기 총리로 지명되었다.[25]

오부치는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채 입원 약 한 달 반 만인 5월 14일 오후 4시 7분에 사망했다. 향년 62세였다. 공교롭게도 아버지 오부치 미쓰헤이와 같은 뇌졸중으로 쓰러져 같은 병원에서 사망했다. 다만, 사망 직전 총리직에서 사임했기 때문에 현직 총리 사망은 아니다. 62세 10개월의 나이로 사망한 것은 역대 일본 총리 중 5번째로 젊은 나이이며,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총리 경험자 중에서는 가장 젊은 나이에 해당한다.

5월 15일, 사망일자로 대훈위 국화대수장이 추서되었다. 밀장은 5월 16일 도쿄 아오야마 장례식장에서 거행되었으며, 법명은 '혜주원전덕정신보대거사(恵住院殿徳政宸輔大居士)'이다. 6월 8일 일본무도관에서 내각·자민당 합동 국장이 거행되었으며,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 김대중 한국 대통령을 비롯한 156개국 및 22개 국제기구의 대표단이 참석하는 대규모 조문 외교가 이루어졌다.

5월 30일 중의원 본회의에서는 무라야마 도미이치 전 총리가 추도 연설을 했다.[26] 본래 야당 제1당 대표가 추도 연설을 하는 관례에 따라 하토야마 유키오 당시 민주당 대표가 예정되었으나, 하토야마가 생전 오부치의 NTT 도코모 주식 보유 의혹[27]을 강하게 비판했던 전력 때문에 유족 측의 반대로 무산되고, 예외적으로 총리 경험자인 사회민주당 소속 무라야마 전 총리가 연설을 맡게 되었다.

사망 2개월 후 치러진 제4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는 오부치의 조문 선거 양상이 나타나, 차녀 오부치 유코군마현 제5구에서 압도적인 표 차이로 당선되어 정치 가업을 이었다. 공교롭게도 이 선거의 투개표일(6월 25일)은 오부치 전 총리의 생일이기도 했다. 같은 해 그의 정치적 스승이었던 다케시타 노보루와 총재 선거 경쟁자였던 가지야마 세이로쿠도 세상을 떠났다.

3. 정치적 업적

1998년 참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참패하자 하시모토 내각은 총사퇴하였고, 당시 외무대신이었던 오부치는 자민당 총재 선거에 출마했다. 가지야마 세이로쿠, 고이즈미 준이치로와의 경쟁 끝에 당 총재로 선출되어 7월 30일 제84대 내각총리대신에 취임했다.

그러나 참의원 선거 패배의 책임이 있는 하시모토와 같은 파벌 출신이라는 점, 여소야대 상황에서 참의원에서는 민주당 대표 간 나오토가 수반으로 지명되는 등 초기 정권 기반은 매우 불안정했다. 언론에서는 "무시된 국민의 목소리"라며 비판했고, 뉴욕 타임스는 그를 "식어버린 피자"에 비유하기도 했다.[28] 또한 경제 전문가가 아니라는 점 때문에 경제 회생에 대한 기대감도 낮았다.[49]

이러한 부정적인 평가에도 불구하고 오부치는 각계 인사들과 소통하고 국민들의 의견을 직접 듣는 등 적극적인 행보를 보였다. 정권 기반 안정을 위해 야당인 공명당, 자유당과의 연립을 모색하여, 1999년 1월 자유당과의 자유 연립정권을 발족시켰고, 같은 해 10월에는 공명당까지 참여하는 자자공 연립정권을 구성했다.

안정된 정권 기반을 바탕으로 오부치 내각은 여러 중요 법안 통과를 추진했다. 새로운 미일 방위협력 지침(일미 가이드라인) 관련 법안인 주변사태법, 헌법조사회 설치법, 국기·국가법, 통신감청법, 주민등록번호 부가법(국민총배번호제) 등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정치 운영 방식에 대해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는 그를 "진공 총리"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1999년 3월에는 노토반도 앞바다 불심선 사건이 발생하자 해상자위대에 처음으로 해상경비행동을 발령하는 등 안보 문제에 대응했다.[29] 또한 제26차 주요국 정상회의(오키나와 서밋) 개최와 서기 2000년(밀레니엄)을 기념하여 2000엔 지폐 발행을 결정하고,[30][31] 정보화, 고령화, 환경 대책 등을 담은 "밀레니엄 프로젝트"를 추진했다.[35]

2000년 4월 1일, 자유당이 연립에서 탈퇴한 다음 날 뇌졸중으로 쓰러져 입원했고, 4월 4일 내각은 총사퇴했다. 오부치의 후임으로는 모리 요시로가 선출되었다. 재임 기간은 616일이었다.

오부치 내각은 적극적인 재정 정책을 통해 경기 부양을 시도했으나, 이는 막대한 국가 부채를 남겼다는 비판을 받는다. 또한 공명당의 제안으로 시행된 지역진흥권 사업은 실효성 논란과 함께 예산 낭비라는 비판을 받았으며, 근로자 파견법 개정은 이후 비정규직 문제 심화의 원인 중 하나로 지적되기도 한다.

3. 1. 경제 정책

1998년 7월 오부치 내각이 출범할 당시, 일본 국민들은 침체된 경제를 살릴 수 있는 지도자를 원했지만, 관방장관과 외무장관 경력만 있을 뿐 경제 전문가가 아니었던 오부치에 대해 싸늘한 시선을 보냈다.[49] 정치권에서조차 "3일이면 오래간다"는 평가를 받았고, 뉴욕 타임즈에 실린 한 전문가의 비판으로 인해 '식은 피자'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까지 얻었다.[49][28]

그러나 오부치는 이러한 부정적인 여론에 크게 개의치 않고, 각계각층의 의견을 듣기 위해 노력했으며 직접 거리로 나가 국민들의 목소리를 듣는 등 적극적인 소통 행보를 보였다. 강력한 경제 회생 정책을 추진하면서 최악의 위기에 빠졌던 경제가 점차 살아나기 시작했고, 취임 1년 만에 지지율이 50%를 넘어서는 반전을 이루었다.[50]

오부치 내각의 주요 경제 목표는 잃어버린 10년으로 불리는 장기 경제 침체를 극복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정부 지출을 늘리고 소득세를 인하하는 정책을 펼쳤다.[6] 또한 소비를 활성화시키기 위해 3,500만 명의 시민에게 쇼핑 쿠폰을 제공하기도 했다.[6] 금융 부문에서는 금융 기관의 핵심 자본 요건을 강화하는 조치를 취했으며, 공공 인프라 투자를 위해 일본 정부 채권 발행을 늘렸다.[6]

이러한 정책들은 단기적으로 경기 침체를 완화하는 효과를 보였고,[6] 임기 후반에는 경제가 비교적 순조로운 추이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근본적인 경제 회복을 이끌어내지는 못했으며,[6] 특히 국채 발행 증가는 일본 공공 부채를 더욱 늘리는 결과를 가져왔다.[6]

한편, 오부치 내각 시기 이루어진 파견법 개정은 파견 가능 업종을 크게 확대했는데, 이는 이후 남성 정규직의 감소와 여성 비정규직의 증가를 초래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이러한 정책은 신자유주의적 구조 개혁의 일환으로 평가되며, 고용 불안정 심화라는 문제점을 낳았다는 지적이 있다.[38]

3. 2. 외교 정책

총리 취임 이전인 1997년 하시모토 류타로 내각에서 외무대신을 지낸 오부치 게이조는 러시아와의 쿠릴 열도 문제 협상 및 한반도 통일 관련 논의에 참여했다.

총리 재임 기간 동안 오부치는 러시아와의 평화 조약 체결과 일본 경제 부흥이라는 두 가지 주요 문제에 집중했다.[6] 그러나 러시아와의 평화 조약 체결은 임기 중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6] 1998년 10월에는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과 회담하였다.

1998년 장쩌민 당시 중국 국가주석의 일본 방문 시에는 일중공동선언을 발표하였으나, 장 주석이 요구한 과거사 문제에 대한 명확한 사과는 거부했다.

미국과의 관계에서는 주일미군 재편 문제, 특히 푸텐마 기지 이전 문제와 관련하여 오키나와현 나고시의 헤노코 해안(캠프 슈와브)으로 기지를 이전하는 안을 각의에서 결정했다. 또한 1999년에는 새로운 미일 방위협력 지침(일미 가이드라인)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한 주변사태법을 성립시켰다. 미국의 빌 클린턴 대통령과는 여러 차례 정상회담을 가졌다.

1999년 3월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공작선으로 추정되는 선박이 일본 영해를 침범한 노토반도 앞바다 불심선 사건이 발생하자, 해상자위대에 처음으로 해상경비행동을 발령하는 등 안보 문제에 대응했다.[29]

3. 3. 기타 정책

오부치 내각은 침체된 일본 경제를 되살리기 위해 정부 지출 확대와 소득세 인하 정책을 추진했다.[6] 이는 단기적으로 경기 침체를 완화하는 효과를 보였으나, 경제를 근본적으로 회복시키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6] 소비 진작을 위해 약 3,500만 명의 시민에게 쇼핑 쿠폰을 지급하기도 했다.[6] 또한, 금융 기관의 핵심 자본 요건을 강화하고 공공 인프라 투자를 늘리기 위해 국채 발행을 확대했는데, 이는 국가 부채를 증가시키는 결과를 낳았다.[6] 오부치 스스로 "일본 제일의 빚쟁이"라고 자조할 정도였다. 재임 중 일본은행의 제로금리 정책, 미국의 호황, 적극적인 재정 정책 등에 힘입어 경제는 비교적 호조를 보였고 IT 버블이 발생했으며 닛케이 평균 주가도 2만 엔대까지 회복했다. 총액 약 42조의 경제 대책 중 공공 사업이 약 4할을 차지했으며, 감세와 금융 대책 등에도 충당되었다.

공명당의 제안을 받아들여 지역 경제 활성화를 명목으로 지역진흥권을 국민에게 배포했으나, 이는 효과가 미미하고 예산 낭비라는 혹평을 받았다. 또한 근로자 파견법을 개정하여 파견 가능 업종을 대폭 확대하는 규제 완화를 단행했는데, 이는 이후 파견 노동자의 증가와 워킹푸어 문제 심화의 원인이 되었다.

1999년 자유당, 공명당과의 연립 정권(자자공 연립 정권)을 구성하여 정권 기반을 안정시킨 후에는 여러 중요 법안들을 통과시켰다. 대표적으로 주변사태법(일미 가이드라인), 헌법조사회 설치 관련 법, 국기·국가법, 통신감청법, 주민등록번호 부가법(국민총배번호제) 등이 있다. 이러한 정치 운영 방식에 대해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는 "진공 총리"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외교적으로는 1998년 방일한 장쩌민 당시 중국 국가주석과 일중공동선언을 발표했으며, 이 과정에서 장 주석의 과거사 사과 요구는 수용하지 않았다. 또한 주일미군 푸텐마 비행장의 이전 문제와 관련하여 오키나와현 나고시의 헤노코 앞바다로 이전하는 안(캠프 슈와브)을 각의에서 결정했다. 1999년 3월에는 노토반도 앞바다 불심선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사회·문화적으로는 제26차 주요국 정상회의(오키나와 서밋) 개최와 서기 2000년(밀레니엄)을 기념하여 2000엔 지폐 발행을 결정했다.[30][31] 또한 정보화, 고령화, 환경 문제 등을 주요 과제로 하는 "밀레니엄 프로젝트"를 추진했으며,[35] 이는 이후 모리 내각의 "e-Japan 구상"으로 이어졌다. 2000년 3월에는 교육개혁 국민회의를 발족시켰다. 오부치는 이상적인 국가상으로 "부국유덕(富国有徳)"을 제시하기도 했다.

4. 평가

1998년 7월 내각 출범 당시에는 경제 전문가가 아니라는 이유로 "식은 피자"라는 별명을 얻는 등[49] 부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했으나, 이후 적극적인 소통과 경제 회생 정책 추진으로 지지율을 회복하는 모습을 보였다.[50]

그의 딸 오부치 유코는 아버지의 선거구를 물려받아 아베 신조 내각에서 장관을 역임했다.

또한 하시모토 정권으로부터 이어받은 과제 중 하나인 중앙성청 재편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다만 중앙성청 재편에 따라 신설된 총무성, 재무성, 문부과학성, 후생노동성, 경제산업성, 국토교통성의 명칭을 최종적으로 결정한 것은 후임 고이즈미 준이치로였다.[39]

4. 1. 긍정적 평가

1998년 7월 내각이 발족할 당시 일본 국민들의 시선은 싸늘했다. 국민들은 침체된 경제를 살릴 수 있는 총리를 원했지만, 오부치는 그동안 맡은 관직이 관방장관(정부 대변인)과 외무장관이 고작일 뿐 경제 전문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49] 이 때문에 정치권에서조차 "3일이면 오래간다"는 소리를 듣는 한편, "식은 피자"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까지 얻었다.

그러나 오부치 본인은 이런 부정적인 의견에 별로 개의치 않고 각계각층에게 수시로 전화를 걸어 의견을 듣는가 하면, 빼곡한 일정 속에서도 거리로 나가 국민들의 의견을 듣는 적극적인 행보를 보였다. 그 결과 부정적인 의견이 점차 사라져갔으며, 강력한 경제 회생 정책이 빛을 발하면서 최악의 위기에 빠졌던 경제가 살아나기 시작해 취임 1년 만에 지지율이 50%를 넘는 반전을 이루었다.[50]

한편, 오부치는 당시 총무성이 관할하는 아마추어 무선에 조예가 깊었고, 자신도 열렬한 아마추어 무선기사(콜사인 JI1KIT)였다.[40] 일본 국회의원으로 구성된 "국회 아마추어 무선 클럽" 회장도 역임했다. 1986년 8월 13일, 일본 최초 아마추어 위성 JAS-1의 발사에 크게 기여했다. 또한, 아마추어 위성 JAS-1b, 아마추어 위성 JAS-2의 발사에도 기여했다.

4. 2. 부정적 평가

1998년 7월 내각이 발족할 당시 일본 국민들의 시선은 싸늘했다. 국민들은 침체된 경제를 살릴 수 있는 총리를 원했지만, 오부치는 그 동안 맡은 관직이 관방장관(정부 대변인)과 외무장관이 고작일 뿐 경제 전문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49] 이 때문에 정치권에서조차 "3일이면 오래간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식은 피자"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까지 얻었다.

5. 기타

1999년 10월 고무로 데쓰야와 오부치 게이조


1967년 환경 에세이스트인 오노 치즈코와 결혼했다. 두 사람은 중의원 의원이자 하시모토 류타로 총리의 친척인 하시모토 도미사부로의 소개로 만났다. 슬하에 아들 1명과 딸 2명을 두었으며, 막내딸인 오부치 유코는 2000년 총선에서 오부치의 지역구를 물려받아 당선되었다.

역사 소설가 고(故) 시바 료타로의 작품을 매우 좋아했으며, 특히 메이지 유신의 주요 인물인 사카모토 료마를 존경했다. 또한 자신이 소띠 해에 태어난 것과 관련하여 모형을 수집하는 취미가 있었다. 1963년 중의원에 처음 당선된 이후 수집을 시작하여 35년 후에는 수천 점의 컬렉션을 보유하게 되었다. 합기도 수련에 열심이었고, 골프도 즐겼다.

역대 총리 중 처음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신장은 168cm, 체중은 68kg이며, 혈액형은 A형이다.

도요타자동차 고문인 오쿠다 세키(奥田碩)는 그를 "겉으로는 느긋해 보이지만, 남의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총리 재임 중 개봉한 애니메이션 영화 《극장판 짱구는 못말려: 폭발! 온천 부글부글 대작전》(クレヨンしんちゃん 爆発!温泉わくわく大決戦)에는 오부치를 모델로 한 것으로 보이는 총리 캐릭터가 등장한다.
수상 및 서훈

  • 황색 리본 훈장 최우수 아버지상 (1999)[7]
  • 욱일장 대훈장 (2000년 5월 14일, 사후 추서)[7]
  • 종이품 (2000년 5월 14일, 사후 추서)[7]
  • 일본 스카우트 협회 금상 (1998)[8]
  • 페루 태양 훈장 대십자장 (1999)[9]

6. 역대 선거 결과

선거나이선거구정당득표수선거 결과
1963년 일본 총선26군마현 제3구자유민주당47,350당선
1967년 일본 총선29군마현 제3구자유민주당61,543당선
1969년 일본 총선32군마현 제3구자유민주당50,185당선
1972년 일본 총선35군마현 제3구자유민주당37,258당선
1976년 일본 총선39군마현 제3구자유민주당76,012당선
1979년 일본 총선42군마현 제3구자유민주당62,375당선
1980년 일본 총선42군마현 제3구자유민주당59,647당선
1983년 일본 총선46군마현 제3구자유민주당49,028당선
1986년 일본 총선49군마현 제3구자유민주당75,289당선
1990년 일본 총선52군마현 제3구자유민주당76,932당선
1993년 일본 총선56군마현 제3구자유민주당89,440당선
1996년 일본 총선59군마현 제5구자유민주당127,052당선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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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웹사이트 Profile of Foreign Minister Keizo Obuchi https://www.mofa.go.[...] Japanese Ministry of Foreign Affairs 2021-01-19
[4] 웹사이트 Keizo Obuchi Chronology http://japan.kantei.[...] Cabinet Secretariat (Japan) 2021-01-19
[5] 웹사이트 Obuchi To Visit Ex-Kennedy Secretary https://apnews.com/a[...] 1999-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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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웹사이트 前橋市長選候補者の横顔(上) https://www.sankei.c[...] 産経デジタル 2020-02-05
[44] 웹사이트 ODAとは? 国別援助実績(1991年~1998年の実績) II 南西アジア [7] モルディヴ https://www.mofa.go.[...]
[45] 간행물 平成4年度 JICA国別協力情報 モルディヴ https://openjicarepo[...]
[46] 뉴스 일본,오부치 총리 혼수상태 가운데 후임 선정 논의 http://imnews.imbc.c[...] MBC
[47] 뉴스 모리 요시로 총리로 일본 새 내각 내일 출범 http://imnews.imbc.c[...] MBC
[48] 뉴스 일본 오부치 게이조 전 총리 타계 http://imnews.imbc.c[...] MBC
[49] 뉴스 일본 집권 자민당 총재로 오부치 선출. 국민 불만 표출 http://imnews.imbc.c[...] MBC
[50] 뉴스 일본 오부치 총리 단명 예상 깨고 인기. 취임 1년 http://imnews.imbc.c[...]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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