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바데니야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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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담바데니야 왕국은 1220년경부터 1341년까지 스리랑카에 존재했던 왕국이다. 비자야바후 3세가 담바데니야를 수도로 정하며 건국되었으며, 파라크라마바후 2세 시기에 문학이 발전했다. 야파후와로 천도 후 판디아의 침입을 받아 치아 사리를 빼앗기기도 했다. 이후 수도는 폴론나루와, 쿠루네갈라로 옮겨졌으며, 쿠루네갈라 시대에 파라크라마바후 4세가 불교, 교육, 문학 발전에 기여했다. 싱할라 문학의 황금기를 이루었으며, 다양한 문학 작품과 석비가 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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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바데니야 왕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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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국명 | 담바데니야 왕국 |
현지 이름 | දඹදෙණිය රාජධානිය |
일반 명칭 | 담바데니야 왕국 |
역사 | |
성립 | 폴론나루와 왕국 멸망 이후 |
성립 연도 | 1220년 |
멸망 | 수도 감폴라로 이전 |
멸망 연도 | 1345년 |
영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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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 |
수도 목록 | 담바데니야 (1226년–1271년) 야파후와 (1271년–1283년) 폴론나루와 (1302년–1310년) 쿠루나갈라 (1310년-1345/6년) |
정치 | |
정치 체제 | 군주제 |
군주 칭호 | 라자 |
언어 및 종교 | |
공용어 | 싱할라어 |
국교 | 상좌부 불교 |
통화 | |
통화 | 마사 (동전) |
역대 군주 | |
군주 목록 | 비자야바후 3세 (1220년–1224년) 파라크라마바후 2세 (1234년–1269년) 비자야바후 4세 (1269년–1271년) 부바나이카바후 1세 (1271년–1283년) 공위시대 (1283년–1302년) 파라크라마바후 3세 (1302년–1310년) 부바나이카바후 2세 (1310년–1325/6년) 파라크라마바후 4세 (1325/6년) 부바나이카바후 3세 (1325/6년) 비자야바후 5세 (1325/6년–1344/5년) |
2. 역사
담바데니야 왕국은 13세기 초 스리랑카가 칼링가 마가의 침략으로 혼란을 겪던 시기에 비자야바후 3세에 의해 건국되었다. 그는 흩어진 불교 승려 집단을 통합하고 불교 부흥에 힘썼다. 그의 뒤를 이은 파라크라마바후 2세는 스리랑카 내 세 왕국을 통일하며 왕국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그러나 파라크라마바후 2세 사후, 왕위 계승을 둘러싼 내부 갈등과 남인도 판디아 왕국의 지속적인 침입으로 왕국은 불안정한 시기를 맞이했다. 이로 인해 수도는 담바데니야에서 야파후와, 폴론나루와, 쿠루네갈라 등으로 여러 차례 옮겨졌다. 특히 왕권의 중요한 상징이었던 불치사리는 판디아 군대에 의해 약탈되었다가 다시 찾아오는 등 수난을 겪었다.
쿠루네갈라 시대에는 파라크라마바후 4세와 같은 군주들이 불교 문화를 장려하고 사원을 건립하는 등 문화적 업적을 남기기도 했으나, 정치적 불안정은 계속되었다. 결국 14세기 중반 파라크라마바후 5세가 감폴라 왕국을 세우면서 담바데니야 왕국 시대는 막을 내렸다.
2. 1. 담바데니야 왕국의 성립 (1220년경 - 1270년)
담바데니야를 수도로 삼은 첫 번째 왕은 비자야바후 3세였다. 그는 침략자 칼링가 마가의 활동으로 인해 여러 곳으로 흩어졌던 상가(승려 집단)의 통합을 이끌었다. 또한 1226년에는 불교 회의를 성공적으로 개최하여 불교계의 화합을 도모했다.비자야바후 3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이는 파라크라마바후 2세였다. 그는 뛰어난 시인이자 다작 작가로 천재로 여겨졌으며, 그가 저술한 ''카우실루미나''는 중요한 문학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파라크라마바후 2세의 가장 큰 업적은 당시 스리랑카 내에 존재했던 세 개의 왕국을 통일한 것으로 여겨진다.
파라크라마바후 2세의 장남인 비자야바후 4세 (보사트 비자야바후)는 1270년에 즉위했다. 그는 겸손한 태도와 종교 활동으로 알려졌으나, 재위 2년째 되던 해에 미타라는 이름의 대신에게 살해당했다.
형 비자야바후 4세가 사망하자, 그의 동생인 부바네카바후 1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부바네카바후 1세는 치안 문제로 수도를 야파후와로 옮겼다. 그는 아버지 파라크라마바후 2세처럼 작가로서 활동했으며, 형 비자야바후 4세가 시작했던 종교 활동을 이어갔다.
2. 2. 야파후와 천도와 판디아의 침입 (1270년 - 1293년)
비자야바후 4세가 암살된 후, 그의 형제인 부바네카바후 1세는 여러 반대파 장군들과의 갈등 끝에 왕위에 올랐다. 그는 기존 수도였던 담바데니야가 불안정하다고 판단하여, 1272년 남인도로부터 드라비다인 세력의 침입에 대비해 수도를 야파후와로 옮기고 이곳을 견고한 암석 요새로 만들었다.[4] 야파후와는 1273년부터 1284년까지 약 11년간 스리랑카의 수도 역할을 했다.야파후와 요새는 시기리야의 암석 요새처럼 거대한 90m 높이의 바위 위에 1273년 부바네카바후 1세(1272년 ~ 1284년 재위)에 의해 건설되었다. 이곳은 왕궁이자 외적의 침입에 맞서는 군사적 요충지였다. 고대 전투 방어 시설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으며, 특히 화려하게 장식된 계단이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이다. 바위 꼭대기에는 스투파, 보리수 울타리, 승려들이 머물렀던 동굴 등이 남아 있어, 이곳이 오래전부터 불교 수도원으로 사용되었음을 보여준다. 바위 아래쪽에도 여러 동굴이 있으며, 그중 하나에는 불상이 모셔진 사당이 있고, 다른 동굴에는 브라흐미 문자 비문이 새겨져 있다. 바위 남쪽 기슭에는 두 개의 해자와 성벽으로 둘러싸인 요새 구역이 있으며, 이곳에는 불교 사원을 포함한 여러 건물의 유적이 남아있다. 또한 칸디 시대에 지어진 야파와 라자마하 비하라(Yapawwa Rajamaha Vihara)라는 사찰도 있다.
신성한 불치사리는 담바데니야에서 옮겨와 야파후와 요새의 세 번째 계단 위에 특별히 지어진 사원에 봉안되었다. 그러나 1284년 부바네카바후 1세가 사망하자, 남인도의 판디아 군대가 다시 스리랑카를 침공하여 야파후와를 함락시키고 불치사리를 약탈하는 데 성공했다.[4] 야파후와는 함락 이후 수도로서의 기능을 잃고 대부분 버려졌지만, 많은 불교 승려와 수행자들은 이곳에 계속 머물렀다.[4] 약탈당한 불치사리는 1288년 파라크라마바후 3세(1287년 ~ 1293년 재위)가 판디아로부터 되찾아와 폴론나루와에 임시로 안전하게 보관했다.
야파후와는 중세 스리랑카의 일시적인 수도 중 하나였으며, 마타라와 갈레 사이에 위치한다. 요새는 주변 저지대에서 거의 100m 높이로 솟아오른 거대한 화강암 바위를 중심으로 건설되었다.
2. 3. 폴론나루와와 쿠루나갈라 시대 (1293년 - 1341년)
비자야바후 3세의 아들이자 파라크라마바후 2세의 손자인 파라크라마바후 3세는 폴론나루와에서 왕위에 올랐다. 그는 판디아 왕국과의 외교를 통해 스리랑카에서 반출되었던 부처의 치아 사리를 다시 섬으로 가져오고자 노력했다. 그는 성공적으로 치아 사리를 돌려받아 폴론나루와의 치아 사리 사원에 봉안했다. 파라크라마바후 3세는 5년간의 통치 끝에 1303년에 사망했다.그의 사촌이자 부바네카바후 1세의 아들인 부바네카바후 2세가 1303년 왕위를 계승했다. 그는 수도를 인근의 쿠루네갈라로 옮겼으며, 1305년 사망할 때까지 2년간 통치했다. 이 천도로 약 반세기 동안(1300년경 ~ 1341년) 지속된 쿠루네갈라 시대가 시작되었다. 쿠루네갈라는 현재 스리랑카 와얌바 주의 주도이며, 당시 싱할라 왕조의 다섯 왕(부바네카바후 2세, 파라크라마바후 4세, 부바네카바후 3세, 비자야바후 5세, 부바네카바후 4세)이 차례로 이곳을 수도로 삼아 통치했다.
쿠루네갈라는 과거 하스티샤일랴-푸라(Hastishailya-purasa) 또는 문학 작품에서 아투갈-푸라(Athugal-purasi, 에타갈라)로 불리기도 했다. 이는 "코끼리 바위의 도시"라는 의미로, 실제로 도시 주변 풍경을 이루는 코끼리 모양의 거대한 바위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다른 큰 바위들과 함께 전해지는 민간 전설에 따르면, 옛날 극심한 가뭄 때 동물들이 물을 너무 많이 마셔 수원지가 위협받자, 한 지역 마녀가 일부 동물을 바위로 만들었다고 한다. 원숭이 바위, 거북이 바위 등 다른 바위들도 비슷한 유래를 지닌다. 오늘날 코끼리 바위 정상에는 약 26.82m 높이의 거대한 불상이 세워져 있다.
부바네카바후 2세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파라크라마바후 4세(1302년 ~ 1326년)가 왕위에 올랐다. 그는 쿠루네갈라 시대의 가장 위대한 왕으로 평가받는다. 불교, 교육, 문학에 대한 기여로 인해 '판디타 파라크라마바후 2세'로 알려지기도 했다. 그의 주요 업적은 다음과 같다.
- 불교 자타카 이야기를 싱할라어로 번역하도록 지원했다.
- 케갈라구의 알루트누와라 데왈레(Alutnuwara Dewalesi)를 포함한 여러 사원의 건축을 의뢰했다.
- 치아 사리와 관련된 의례를 체계적으로 정비했으며, 이는 《달라다 시리타》(Dalada Siritasi)라는 책에 기록되었다. 파라크라마바후 4세 자신이 이 책을 저술했다.
- 캔디에 아스가리야 비하라야(Asgiriya Viharayasi)를 건설했다.
그의 영향력과 업적은 쿠루네갈라를 넘어 캔디, 케갈레, 콜롬보, 라트나푸라, 칼루타라, 갈레 등 스리랑카 남부 지역 대부분에서 확인된다.
파라크라마바후 4세 시대에는 강력한 종교 부흥이 일어났으며, 쿠루네갈라는 치아 사리가 보관되고 숭배되던 중요한 장소 중 하나였다. 13세기에 이 도시는 주요 성채를 가지고 있었으며, 당시 치아 사리 사원이 있었으나 현재는 일부 돌계단과 문 등 약간의 유적만 남아 있다.
파라크라마바후 4세 이후로는 부바네카바후 3세(9년간 통치), 비자야바후 5세(사불루 비자야바후), 부바네카바후 4세가 차례로 왕위를 이었다. 그러나 이들 후대 왕들의 통치나 수도가 곧 다시 옮겨진 구체적인 이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많지 않다.
쿠루네갈라 시대는 부바네카바후 4세의 형제인 파라크라마바후 5세 왕이 감폴라 왕국(1344년 ~ 1408년)이라는 새로운 왕국을 세우고 통치를 시작하면서 막을 내렸다.
3. 문화
(내용 없음)
3. 1. 교육
부바네카바후 2세의 아들인 파라크라마바후 4세는 '판디타 파라크라마바후'라고도 불릴 만큼 매우 현명하고 지적인 왕이었다. 그는 학문과 문학 발전에 기여했으며, 특히 '달라다 시리타'(Dāṭhavaṃsa|달라다 시리타pi)를 저술했다. 그는 또한 팔리어로 된 서적들을 싱할라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지원하거나 직접 수행했다. 대표적인 번역서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싱할라 보디완사 (සිංහල බෝධිවංශය|싱할라 보디왕사si)
- 산다 킨두루 다 카바 (සඳ කිඳුරු දා කව|산다 킨두루 다아 카바si)
이 외에도 파라크라마바후 4세는 마하누와라의 이름을 센카다갈레로 바꾸기도 했다.
3. 2. 문학
담바데니야 시대는 싱할라 문학의 황금기로 평가받는다. 이 시기에는 싱할라 투파밤사(Sinhala Thupavamsa), 달라다 시릿타(Dalada Siriththa), 사라조티 말라이(Sarajothi malai)와 같은 중요한 문학 작품들이 쓰여졌다. 또한 싱할라어, 팔리어, 산스크리트어로 다양한 책들이 집필되었는데, 대표적인 시집으로는 카우실루미나(Kausilumina), 무와데우다와타(Muwadewdawatha), 시다트 상가라와(Sidath sangarawa), 부스라나(Buthsarana), 사드하르마 라트나왈리야(Saddharma Rathnawaliya) 등이 있다.파라크라마바후 2세는 비수디 마르가 산나사(Visuddi Marga Sannasa)와 카비실루미나(Kavisilumina)라는 두 권의 책을 직접 저술하기도 했다.
이 시대의 주요 석비(비문)는 다음과 같다.
석비 (비문) 명칭 | 로마자 표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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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울가마 마빌리피티야 | keulgama mavilipitiya |
나람바데 우두둠바라 리피야 | Narambadde Ududumbara Lipiya |
람부카나 데왈라 리피야 | Rambukana Dewala Lipiya |
알루트누와라 데왈라 리피야 | Aluthnuwara Dewala Lipiya |
갈라파타 비하라야 실라 리피야 | Galapatha Viharaya Shila Lipiya |
참조
[1]
웹사이트
Sri Lankan History - Kings - Governors - Prisidents - Ministers
https://www.mahawans[...]
2022-05-12
[2]
문서
Culavamsa
[3]
웹인용
Sri Lankan History - Kings - Governors - Prisidents - Ministers
https://www.mahawans[...]
2022-05-12
[4]
문서
Culavam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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