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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항포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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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당항포 해전은 임진왜란 중 이순신이 지휘한 해전으로, 1592년 7월 당항포에서 벌어졌다. 이순신은 당포 해전 이후 전력을 재정비하고, 이억기의 합류로 함선 51척을 이끌고 당항포에 정박한 일본군 함대 26척을 공격했다. 조선 수군은 일본군을 유인하여 포위, 격멸하는 전술을 사용하여 승리했으며, 이 전투의 결과로 일본군의 해상 활동에 큰 타격을 입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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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항포 해전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정보
분쟁임진왜란
날짜1592년 7월 13일 (음력 6월 5일)
장소고성 당항포 또는 진해
결과조선 수군의 승리
교전 세력
교전국 1조선
교전국 2도요토미 정권
지휘관
조선이순신
이억기
원균
권준
무의공 이순신
정운
김완
어영담
기효근
신호
이언량
이영남
이운룡
우치적
황세득
송희립
배흥립
일본가토 기요마사
이코마 가즈마사
고요제이 천황
모리 무라하루†
병력
조선 수군전선 51척
일본 수군전선 26척
피해 규모
조선불명
일본전선 26척 모두 격침

2. 배경

임진왜란 초기, 일본군은 육지에서 승승장구했지만,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남해안에서 연전연승하며 일본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당항포 해전은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 수군이 주도권을 더욱 확고히 한 전투였다.

2. 1. 조선 수군의 상황

당포 해전 이후, 이순신은 며칠 동안 일본군 함선을 수색했다. 1592년 7월 12일, 이억기가 합류하여 조선 수군의 함선은 총 51척으로 늘어났다.[1] 같은 날, 이순신은 일본 함대가 '''당항포''' 부근에서 발견되었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는 즉시 당항포로 가서 직접 확인했다. 당항포 항구에는 또 다른 기함(旗艦)을 포함한 26척의 일본군 함선이 정박해 있었다.[1]

2. 2. 일본군의 상황

당포 해전 이후, 이순신은 며칠 동안 일본군 함선을 수색했다. 1592년 7월 12일, 이억기가 합류하여 조선 수군의 함선은 총 51척으로 늘어났다. 같은 날, 이순신은 일본 함대가 '''당항포''' 부근에서 발견되었다는 보고를 받았으며, 당항포 항구에는 또 다른 기함(旗艦)을 포함한 26척의 일본군 함선이 정박해 있었다.

3. 전투 경과

이순신은 거제도 주민들로부터 일본 함대가 당항포에 정박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즉시 출동했다. 당항포에서 일본 함대를 발견한 조선 수군은 공격을 개시했다. 왜 함대가 포구 밖으로 나오자, 조선 수군은 신속히 진형을 바꾸어 퇴로를 차단하고 반격했다. 거북선을 뒤따르던 판옥선의 군사들이 불화살을 쏘아 누각선이 화염에 휩싸이자, 당황한 적장은 우왕좌왕하다가 조선군의 화살에 사살되었고, 전의를 상실한 왜군의 대다수는 당항포 먼바다에서 격침되었으며, 일부 함선은 포구 안으로 도피했다.[1] 그러나 이튿날 새벽, 도망간 왜군도 탈출을 시도하던 중 해협 입구를 지키고 있던 조선 수군에게 모두 격침되었다.[1]

이틀 후 거제도 동쪽 율포 앞바다에서 율포 해전이 벌어져 큰 배 2척과 작은 배 1척을 불살랐다. 당포 해전 이후, 이순신은 며칠 동안 일본군 함선을 수색했다. 1592년 7월 12일, 이억기가 합류하여 조선 수군의 함선은 총 51척으로 늘어났다. 같은 날, 이순신은 일본 함대가 당항포 부근에서 발견되었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는 즉시 당항포로 가서 직접 확인했고, 당항포 항구에는 또 다른 기함을 포함한 26척의 일본군 함선이 정박해 있었다.

3. 1. 초반 기습

거제도 주민들로부터 "일본 함선들이 고성의 당항포에 정박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조선 수군이 포구로 접근하자, 당항포 포구에 정박하고 있던 왜군 함대는 일제히 조총을 사격하면서 대응하였다.[1] 이순신은 일본 수군을 넓은 바다로 유인하기 위해 거짓 후퇴 작전을 펼쳤다.[1] 왜군은 해안에 대기 중이던 병력까지 승선시켜 조선 수군을 추격하였다.[1]

3. 2. 유인 작전과 반격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거제도 주민들로부터 "일본 함선들이 고성의 당항포에 정박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포구로 접근하자, 당항포 포구에 정박하고 있던 왜군 함대는 일제히 조총을 사격하면서 대응 태세를 취하였다. 이순신은 일본 수군의 육지 탈출을 봉쇄하기 위해 그들을 바다 가운데로 유인하기로 하고, 함대를 서서히 철수시켰다. 왜군은 해안에 대기 중이던 병력까지 승선시켜 조선 수군을 추격하였다.[1]

왜 함대가 포구 밖으로 나오자, 조선 수군은 신속히 진형을 바꾸어 퇴로를 차단하고 반격을 시작하였다. 거북선을 뒤따르던 판옥선에 탄 군사들이 불화살을 쏘아 누각선이 화염에 휩싸이자, 당황한 적장은 우왕좌왕하다가 조선군의 화살에 사살되었고, 전의를 상실한 왜군의 대다수는 당항포 먼바다에서 격침되었다.[1]

3. 3. 일본군의 패배

거제도 주민들로부터 "일본 함선들이 고성의 당항포에 정박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조선 수군이 포구로 접근하자, 당항포 포구에 정박하고 있던 왜군 함대는 일제히 조총을 사격하면서 대응태세를 취하였다. 이순신은 일본 수군의 육지 탈출을 봉쇄하기 위해 그들을 바다 가운데로 유인하기로 하고, 함대를 서서히 철수시켰다. 왜군은 해안에 대기 중이던 병력까지 승선시켜 조선 수군을 추격하였다.[1]

왜 함대가 포구 밖으로 나오자, 조선 수군은 신속히 진형을 바꾸어 퇴로를 차단하고 반격을 시작하였다. 거북선을 뒤따르던 판옥선에 탄 군사들이 불화살을 쏘아 누각선이 화염에 휩싸이자, 당황한 적장은 우왕좌왕하다가 조선군의 화살에 사살되었고, 전의를 상실한 왜군의 대다수가 당항포 먼바다에서 격침되었으며, 일부 함선은 포구 안으로 도피했다.[1]

그러나, 도망간 왜군도 이튿날 새벽에 탈출을 시도하던 중 해협 입구를 지키고 있던 조선 수군에게 모두 격침되었다.[1]

4. 전투 결과 및 영향

며칠 동안 일본 함대를 찾지 못한 조선 수군은 7월 18일 함대를 해산했고, 각 지휘관은 각자의 항구로 돌아갔다.[1]

4. 1. 율포 해전으로 이어지는 승리

율포 해전은 당항포 해전 이틀 후, 조선 수군이 거제도 동쪽 율포 앞바다에서 일본 함대를 다시 격파한 해전이다. 이 해전에서 조선 수군은 큰 배 2척과 작은 배 1척을 불태우는 승리를 거두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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