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북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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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거북선은 고려 시대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조선 시대의 군함으로, 특히 임진왜란에서 이순신 장군이 개량하여 실전에 투입, 혁혁한 전공을 세우며 한국 해군의 상징이 되었다. 거북선은 1413년과 1415년의 조선왕조실록에 처음 등장하며, 임진왜란 당시에는 판옥선과 함께 운용되었다. 뛰어난 방어력과 공격력을 갖춘 거북선은 1808년까지 군사적으로 중요하게 여겨졌으며, 이후에도 복원 및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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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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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 | |
이름 | 귀선(龜船)·거북선 |
이름 유래 | 거북의 모양을 본뜸 |
함종 | 전투선·전함 |
운영자 | 조선 수군 |
자매함 | 판옥선 |
제원 | |
전장 | 26-28m |
선폭 | 9-10m |
무장 | |
무장 | 대포 |
2. 역사 기록
거북선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413년(태종 13년)과 1415년(태종 15년)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며, 초기 거북선은 귀선(龜船)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1990년 10월 서울특별시는 한강 개조 사업의 일환으로 호국정신 계승과 소년 교육을 목적으로 185t 규모의 거북선을 원형 그대로 복원하여 한강이촌동 거북선나루터에 배치하였다. 복원된 거북선은 기존 거북선 사양과 유사하나, 안에 창문을 달고 겉에는 가짜 대포를 위한 나무틀(낙창식 창문처럼 열 수는 없다.)을 단 것과 시속 15~20km로 달릴 수 있는 모터가 설치된 점이 다르다. 이 거북선은 2005년 11월까지 이촌동 거북선나루에 전시되어 있었다가, 이명박 서울특별시장 때 통영시에 기증되어 한강하구를 통과해 통영으로 운반되었다. 이후 민물에서 바닷물 전용으로 개조되어 현재 통영에서 전시되고 있다.
2. 1. 임진왜란 이전
1415년(태종 15년) 조선왕조실록에서 거북선에 대한 기록이 처음 나온다.[14] 초기 거북선에 대한 최초의 언급은 1413년과 1415년의 조선왕조실록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여기에는 ''귀선'' (귀선|龜船한국어)과 일본 군함 간의 모의 전투가 언급되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초기 거북선들은 한동안의 평화로운 시기 동안 한국의 해군 준비가 감소하면서 곧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1595년에는 비변사에서 건의하기를 거북선이야말로 해전에서의 승리에 요긴한 것이고 적이 가장 꺼리는 것이라고 보고하며 경상도와 전라도의 방어를 위해 거북선의 제조를 서둘러야 한다고 건의하였다.[24]
2. 2. 임진왜란 시기
1592년 이순신 장군은 거북선을 개량하여 실전에 투입하였고, 사천 해전, 당포 해전, 한산도 대첩 등 주요 해전에서 활약했다.[23] 이순신의 《난중일기》에 따르면 1592년 음력 3월 27일 여수 앞바다에서 거북선을 진수하고, 음력 4월 12일에 지자포·현자포를 시험 발사하여 실전용으로 완성했다.임진왜란 당시 본영귀선, 방답귀선, 순천귀선 등 3척의 거북선이 운용되었다. 거북선은 판옥선에 비해 적은 인원을 수용했기 때문에 주로 각 영에 1척씩 배치되어 선봉 역할을 맡았다. 일본 해군과의 모든 전투에서 승리한 이순신 제독은 개량된 거북선을 설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천 해전에서 처음 등장한 이순신의 거북선은 주로 서일본 출신의 다양한 다이묘의 지휘 하에 있던 일본 함대에 맞서 16번의 전투에서 승리하는 데 기여했지만, 원균의 지휘 하에 있던 조선 해군은 칠천량 해전에서 참패를 겪었다.
이순신의 조카 이분이 저술한 『이순신 행록』과 『이충무공전서』(난중일기)에는 거북선의 구조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
- 이순신 행록*
- :"거북선의 크기는 판옥선(당시의 주력 전함)과 거의 같고, 위를 판자로 덮었으며, 그 판 위에는 십자형의 좁은 길이 생겨서, 겨우 사람이 다닐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외에는, 모조리 칼과 송곳(칼 모양의 송곳)을 꽂아, 발을 들여놓을 여유도 없었다", "전방에는 용머리를 만들고, 그 입 아래에는 총구가, 용 꼬리에도 또한 총구가 있었다. 좌우에는 각각 6개의 총구가 있었고, 배의 모양이 거북이 같아서 거북선이라고 불렀다", "전투가 시작되면, 띠풀로 짠 자리를 칼과 송곳 위에 덮어 위장했으므로, 적병이 그것도 모르고 뛰어들면 모두 찔려 죽었다. 또한, 적선이 거북선을 포위하면, 좌우 전후에서 일제히 포화를 퍼부었다"
2. 3. 임진왜란 이후
1606년(선조 39년)에는 판옥선과 거북선의 장점을 결합하여 칼과 창을 빽빽이 꽂아 만든 창선이 개발되었는데, 격군 42명이 저었으며 판옥선보다 훨씬 빨랐다.[24]1622년 광해군은 수군 재정비를 위해 거북선을 다시 만들라는 명을 내렸다.
1687년 영의정 김수항은 기존 전선 3~4척을 개조하여 거북선으로 만들되, 임진왜란 때와 가능한 한 같은 크기로 만들어 크기가 커지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1735년 별군직 윤필은과 이삼은 거북선을 개조하여 3층 구조로 만들고, 가장 위층에 설치된 방패를 탈착식으로 개조했다. 또한, 선두에 곡목을 덧붙여 뾰족하게 만들어 풍랑을 뚫고 가기에 용이하게 만들었다. 이들은 개조된 거북선의 모형을 내전에 가지고 와 선보였다.
1751년 영남 균세사 박문수는 전선을 개조할 때마다 길이가 길어지고 커져서 운용하기 어렵다고 지적하며, 이순신의 기록에는 거북선 좌우에 각각 6개의 총구가 있었으나 당시에는 8개가 있어 원래대로 줄일 것을 주장하였다.[23]
1808년 순조는 전 통제사 이당에게 거북선에 대해 물었고, 이당은 ‘통영의 수군에 아직 거북선이 있으며 천여 명을 수용할 수 있고 노 없이 떠다닐 때는 마치 거북이 떠있는 듯한 모습이며 입과 코에서 연기가 나오는데 아직도 왜인들이 이를 보면 사람 잡는 기계라며 놀란다.’고 보고하였다.[23]
1867년 의정부에서 거북선의 재배치에 관한 정책을 건의하였다.
3. 구조와 성능
거북선은 상하부 구조로 나뉘며, 상부에는 십자형 통로를 제외하고는 칼과 송곳을 꽂아 적의 접근을 막았다. 이분(李芬)의 〈이순신행록〉(李舜臣行錄)에는 '위에는 판자를 덮고 그 위에 십자로 좁은 길을 내어 다닐 수 있게 하였고 나머지는 칼과 송곳을 총총히 꽂아서 사방으로 적이 기어올라 발붙일 곳이 없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14]
전방에는 거북 머리를 달았고 그 입에는 총구멍을 만들었으며, 뒤에는 거북 꼬리를 달았다. 이러한 모양 때문에 거북선(龜船)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또한, 적에게 위압감을 주고 배를 숨길 수 있도록 거북머리에서 유황 연기를 내었다는 기록이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 남아있다.
선체 좌우에는 포혈(砲穴)과 출입문이 있었다. 배 좌우의 노를 이용해 운행하여 속력이 빨랐다. 내부는 2층 구조로, 대포가 있는 층과 노를 젓는 층으로 나뉘어 있었다. 그 밑에 물을 채우고 양수기로 뺄 수 있는 창고가 있었다는 설과 3층 구조였다는 학설도 있다.
후기 거북선은 초기 버전에 비해 구조가 변화했다. 예를 들어, 더 높은 함벽을 갖게 되어 더 많은 함벽 슬롯을 추가할 수 있었고, 이는 추가 무기나 선박 탑승자를 위한 환기에 사용될 수 있었다. 초기 그림은 갑판 구조에 겹쳐진 판자로 구성된 초기 버전을 보여주는 반면, 후기 그림은 나무 또는 철로 만들어진 평평한 육각형 판으로 덮인 갑판을 보여준다. 초기 버전과 후기 버전 모두 노와 돛을 이용하여 빠른 속도를 낼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거북선이 금속판으로 덮여 있었다는 비동시대 출처가 있다.[1][2] 이는 거북선을 역사상 최초의 장갑선으로 만들 수 있다.[3][4][5] 배의 지붕이 백병전을 막기 위해 철제 가시로 덮여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지만,[6] 거북선이 철갑선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역사가들 사이에 의견이 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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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 규모 및 승선 인원
초기 거북선은 약 100~150명이 승선하는 비교적 작은 배였으나, 임진왜란 이후 대형화되어 2층에서 3층으로 확장되고 선체도 길어지는 경향이 생겨났다.[26] 거북선 1척에는 약 150명이 승선했으며, 세부 구성은 다음과 같다.[26]직책 | 인원 |
---|---|
선장 | 1명 |
좌·우 포도장 (대대 작전과장급 장교) | 각 1명 |
장령 (오늘날의 소위~대위급 장교) | 5~6명 |
선직 (전함 수리공) | 2명 |
무상 (군악대) | 2명 |
타공 (조타수) | 2명 |
요수 (돛 관리) | 2명 |
정수 (닻 관리) | 2명 |
사부 (무기 관리) | 14명 |
화포장 (분대장) | 8명 |
화포 포수 | 24명 |
노군 | 90명 |
3. 2. 구조
《충무공전서(忠武公全書)》의 귀선도안설(龜船圖按說)에 따르면, 거북선은 저판(底板), 좌우현판, 노판, 유판(釉板)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저판은 널판 10장을 이은 것으로 길이가 64자 8치, 뱃머리 너비 12자, 배허리 너비 14자 5치, 배꼬리 너비 12자 6치였다. 좌우현의 판은 각각 널판 7장을 이은 것으로 높이 7자 5치, 맨 아래 널은 길이 68자, 그 위 널은 길이를 차례로 더하여 맨 위 널은 길이 113자, 두께 4치였다. 노판은 널 4장을 연이어 높이 4자, 유판은 널 7장을 붙여 높이 7자 5치, 윗너비 14자 5치, 밑너비 10자 6치였다.선체 좌우에는 각각 22개의 포혈(砲穴)과 12개씩의 출입문이 있었다. 선내 왼편 포판 위에는 함장실, 오른편 포판 위에는 장교실이 있었고, 좌우 포판 아래에는 24개의 방을 두어 철물고, 무기고, 사병 휴게실 등으로 사용했다. 배 좌우에는 10개씩의 노가 있어 빠른 속력을 낼 수 있었다고 한다.
내부는 2층 구조로, 대포가 있는 층과 노를 젓는 층으로 나뉘어 있었다. 그 밑에는 물을 채우고 양수기로 뺄 수 있는 창고가 있었다는 설과 3층 구조였다는 학설도 있다.
후기 거북선은 초기 버전에 비해 구조적인 변화를 보였다. 예를 들어 더 높은 함벽을 가지고 있어 더 많은 함벽 슬롯을 추가할 수 있었고, 이는 추가 무기나 선박 탑승자를 위한 환기에 사용될 수 있었다. 초기 그림에는 갑판 구조에 겹쳐진 판자로 구성된 초기 버전이 묘사되어 있는 반면, 후기에는 나무 또는 철로 만들어진 평평한 육각형 판으로 덮인 갑판이 묘사되어 있다. 초기 버전과 후기 버전 모두 노와 돛을 이용하여 빠른 속도를 낼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이충무공전서』에는 2장의 도면과 694자의 기재가 있다. 배는 선체 상부와 하부로 나뉘며, 상부는 11~13척(조선 척), 하부는 7.5척, 전체 높이는 18.5~20.5척 정도이다. 상부에는 완만한 아치형 지붕이 있고, 하부와는 14개의 가목이라는 보로 연결되어 있다. 상부 덮개 판 위에는 칼날이 빽빽하게 박혀 있다. 신채호 등 조선 측의 후세 기술에서는 철갑선 설이 있지만, 『이충무공전서』에는 철판에 관한 기재는 없다.
재질은 소나무가 사용되었는데, 당시 조선에서는 소나무를 군선용으로만 사용하도록 국가에서 관리했다. 일본 측 군선에서는 노송나무나 삼나무가 주로 사용되었지만, 송재는 이들보다 튼튼했다. 전부에는 용의 머리, 후부에는 꼬리 같은 구조물이 부착되어 있다.
도면에 따르면 20개의 노 (1정 30척)가 있으며, 1정당 4명의 사공과 1명의 반장이 종사했다. 조성도와 사쿠라이 겐로의 고증과 추정에 따르면, 6노트 정도의 속도는 여유 있게 낼 수 있었으며, 이는 당시 일본에서 사용되던 쾌속정 고바야센에 필적하는 것이었다. 다만, 노의 마주보는 각도가 커서 사공의 출력에 비해 실속 상태에 있었다고 보인다.
3. 3. 공격력
거북선은 전후좌우에 화포를 설치하고, 거북머리에도 화포를 설치하여 강력한 공격력을 갖추었다. 또한 배 아래쪽에 도깨비 모양을 한 충각전술용 돌기가 설치되어 있어, 함대의 선두에서 적진을 돌파하는 돌격선 역할을 수행했다. 이러한 거북선의 역할은 현대전에서 전차의 역할에 비견할 수 있다.[9]
거북선에는 ''천자'', ''지자'', ''현자'', ''황자'' 유형의 총통과 ''승자총통''으로 알려진 조총이 탑재되었다. ''승자총통''의 사거리는 200m였고, ''황자총통''은 가장 가벼웠지만 사거리는 1200m였다.[9]
배 앞부분에는 용의 머리가 놓였는데, 여러 가지 다른 버전의 용머리가 사용되었다. 용머리는 일본군을 겁주기 위한 일종의 심리전의 초기 형태로 처음 사용되었다. 한 버전은 시야를 가리고 일본군의 기동과 제대로 된 협력을 방해하기 위해 만들어진 짙은 독성 연기를 뿜어낼 수 있었다.
3. 4. 방어력
거북선 지붕은 철못이나 칼을 박은 목갑으로 덮여 있었기 때문에 일본군의 조총이나 화살 등을 사용한 근접 공격을 막는 데 뛰어났다.[1][2] 일본 군함에 비해 튼튼한 구조와 재질을 가지고 있어, 충돌 전법 시에도 충분히 버틸 수 있었다.거북선이 철갑선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역사가들 사이에 의견이 갈린다.[6] 이순신 시대의 한국 측 자료에는 철갑에 대한 언급이 없으나,[6] 한 일본 연대기에는 1592년 8월 "철로 덮인" 세 척의 한국 거북선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6] 이는 지붕의 철제 가시를 가리키는 것일 수 있다.[6]
3. 5. 기동성
거북선은 배 밑 부분이 평평한 평저형 구조를 가지고 있어 한반도의 남해, 서해와 같이 조수간만의 차가 심한 곳에서 기동하기에 적합했다. 또한, 이동 중에도 180도 회전이나 좌우 방향 전환이 빠르게 가능했다. 이러한 특징 덕분에 학익진과 같은 다양한 해상 진법을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었다.대포가 설치된 선창 아래층에는 노와 격군이 배치되었다. 격군은 노를 젓는 승무원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보통 좌우 각각 10착(捉, 노의 단위)이 배치되고, 1착의 노에 4명씩의 격군이 배치되었다. 그리고 사공(沙工)과 무상(舞上)이 각각 1명씩 배치되어 총 82명이 한 조를 이루었다.
사쿠라이 겐로의 고증 및 추정에 따르면, 거북선은 6노트 정도의 속도를 여유 있게 낼 수 있었다. 이는 당시 일본에서 사용되던 쾌속정 고바야센에 필적하는 수준이었다.
4. 임진왜란 이후의 거북선
거북선은 임진왜란 이후에도 군사적으로 중요하게 여겨졌다. 만기요람에 따르면, 거북선은 삼도통어사영에 1척, 경상좌수영에 1척, 속진에 2척, 충청수영에 1척, 속진에 4척, 전라좌수영 속진에 1척, 우수영에 2척, 속진에 5척이 배치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거북선의 형태는 변화했다. 용 머리는 거북 머리로 바뀌었고, 크기(척도)는 전반적으로 커졌다. 총안과 노의 수가 늘어나고, 거북선 복판에는 귀갑 무늬를 그리게 되었다.
5. 복원 및 탐사
1980년 1월 31일, 해군 공창에서 이충무공 전서와 옛 선박 관련 기록을 참고하고 노산, 이은상 등 전문가 16명의 고증을 거쳐 거북선을 복원하여 해군사관학교에 전시하였다.[23] 1999년 12월 31일에는 남해 충렬사 인근 남해대교 아래로 옮겨져 이충무공의 호국정신과 창의 정신을 기리는 교육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1990년 10월, 서울특별시는 한강 개조 사업의 일환으로 호국정신 계승과 소년 교육을 목적으로 185t 규모의 거북선을 원형 그대로 복원하여 한강 이촌동 거북선나루터에 배치하였다.[23] 이 거북선은 기존 사양과 유사하지만, 창문과 가짜 대포를 위한 나무틀, 모터가 설치된 점이 달랐다. 2005년 11월까지 전시되었다가 이명박 서울특별시장 때 통영시에 기증되어 한강하구를 거쳐 통영으로 옮겨져 현재 통영에서 전시되고 있다.
현재 경상남도청과 21세기 이순신 연구회 등에서는 400여 년 전 칠천도 앞바다에 수장된 것으로 추정되는 거북선을 발굴하기 위한 탐사 작업을 지속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그러나 양식장으로 인한 주민 생업 지장, 막대한 탐사 비용, 장비 부족, 정확한 위치 추정 불가능 등 여러 이유로 난항을 겪고 있다. 한 고등학생의 거북선 탐사 비용 모금 운동이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지만, 발굴 가능성에 대한 회의적인 반응이 많아 원활하게 진행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북선 탐사 단체들은 여전히 탐사를 포기하지 않고 있다.
경상남도창원시진해구의 해군 사관학교박물관에는 연구자들의 추정으로 제작된 거북선이 전시되어 있다. 처음에는 진수시키려 했으나 실패하여 육상에서 전시되고 있으며, 매년 군항제 기간 동안 일반에 공개된다.
경상남도는 2011년 말까지 거북선을 복원하여 관광 상품화할 것이라고 밝혔으며, 새로운 설에 따라 3층 구조의 거북선과 판옥선 등 4척을 새로 건조하였다.[15]
2013년 1월, 거제도로 옮겨져 수상 전시될 예정이었던 재현선이 예인 중 침수되는 사고가 발생하여 긴급 수리에 들어갔다. 제작비는 7억원 이상이 소요된 것으로 알려졌다.[16][17]
사설 상업 회사인 거북선연구원은 거북선의 원래 설계에 대한 광범위한 연구를 바탕으로 상업적 용도의 실물 크기 거북선을 재건했다.[10] 이 거북선들은 한국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 등장했다.[11] 여러 박물관에서 거북선을 전시하고 있으며, 여수시에는 1:1 규모의 거북선이 정박되어 있어 내부를 둘러볼 수 있다.[12]
6. 현대적 의의
거북선은 한국사에서 중요한 군사적, 문화적 상징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순신 장군과 함께 호국 정신의 상징으로 여겨지며, 1990년 10월 서울특별시는 한강 개조 사업의 일환으로 거북선을 원형 복원하여 한강 이촌동 거북선나루터에 배치하기도 했다.[23] 이는 2005년 11월까지 전시되었다가 통영시에 기증되어 현재 통영에서 전시되고 있다.[23]
신채호는 1908년경 이순신을 민족 영웅으로 추앙하며 거북선을 세계 철갑선의 원조로 높이 평가했고, 박은식도 1915년에 쓴 『이순신전』에서 거북선의 독자성을 높이 평가했다. 이러한 영향으로 한국 사회에서는 임진왜란 해전 승리의 주요 요인을 이순신의 해전술과 거북선으로 보는 인식이 강하게 자리 잡았다.
거북선은 게임, 드라마 등 다양한 창작물에 등장하며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특히,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시리즈와 같은 역사 시뮬레이션 게임에서는 강력한 군함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거북선 연구는 여전히 진행 중이며, 특히 임진왜란 시기 거북선의 정확한 규모와 구조에 대한 논쟁은 계속되고 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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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 오던 ‘거북선’ 여수 앞바다서 침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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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후] 이순신 장군 창피하게 만든 ‘거북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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