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베드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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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더베드 왕국은 360년부터 1100년까지 존재했던 웨일스의 왕국이다. 현재의 펨브로크셔, 카마던셔 서부, 카마던 지역을 포함했으며, 7개의 칸트레프로 구성되었다. 초기에는 아일랜드, 앵글로색슨, 픽트족의 습격과 오검 문자 비문, 라틴어-아일랜드어 이중 언어 비문 등이 발견되었다. 국력이 강성했을 때는 이스트라드 티위 지역까지 확장했으나, 케레디지온 왕국에 빼앗기기도 했다. 바이킹 시대에는 잦은 습격을 받았고, 904년에는 통치자 리워흐 압 히파이드의 딸 엘렌 페르흐 리워흐가 호웰 다와 결혼하여 데헤우바르스에 통합되었다. 1068년에서 1100년 사이 노르만족의 침공으로 멸망했으며, 1284년 루들란 법에 의해 펨브룩셔와 카마던셔로 분할되었다. 1974년에는 다페드라는 행정 구역이 설치되었으나 1996년에 해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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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베드주는 1974년부터 1996년까지 웨일스 서부에 존재했던 행정 구역으로, 과거 다페드 왕국에서 유래되었으며 현재는 일부 지역 단체에서 세레디기온, 카마던셔, 펨브룩셔를 포함하는 지역을 지칭하는 명칭으로 사용된다. - 웨일스계 왕국 - 글러워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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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베드 왕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현지 이름 | 웨일스어: Teyrnas Dyfed |
일반 명칭 | 더베드 왕국 |
시대 | 중세 |
정치 체제 | 군주제 |
존속 기간 시작 | 410년경 |
존속 기간 끝 | 920년 |
이전 국가 | 후로마 브리튼 |
계승 국가 | 데허이바르스 |
![]() | |
수도 | 알려지지 않음 |
공용어 | 웨일스어, 라틴어, 아일랜드어 |
역사 | |
사건 시작 | 알려지지 않음 |
사건 종료 | 알려지지 않음 |
인구 | |
민족 | 웨일스인 |
지리 | |
위치 | 더베드 주 |
문화 | |
종교 | 웨일스 전통 종교, 켈트 기독교 |
2. 역사
더베드 왕국의 초기 역사는 360년, 아일랜드인, 앵글로색슨족, 픽트족의 연합 공격으로 시작되었다. 아일랜드인들은 맨 섬을 식민지화했고, 5세기까지 짧은 기간 동안 이 지역에서 고대 아일랜드어가 사용되었다. 이 시기에는 오검 문자 비문이 새겨진 20개의 돌이 제작되었다.[2] 나버스, 펨브로크셔 인근 캐스텔드위란에서 발견된 라틴어-아일랜드어 이중 언어 비문에는 보테코리가스라는 이름과 함께 "Memoria Voteporigis Protictoris"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귀족에게 주어진 후기 로마 제국의 칭호인 "보호자"를 의미한다.[2]
디페드는 원래 테이피 강, 구일리 강, 토위 강에 접해 있는 지역, 즉 오늘날의 펨브로크셔, 카마던셔 서부, 카마던 마을을 포함하는 지역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케마이스, 도글레드, 엠린, 칸트레프 과르타프, 페비디오그, 펜프로, 로스 등 최소 7개의 칸트레프로 구성되었으며, 면적은 약 2284km2였다. 왕국의 세력이 강성했을 때는 이스트라드 티위 ("토위 계곡") 지역까지 확장되어 키드웰리와 거워 (아마도 아에르고일 라우히르 통치 하), 심지어 브리체이니오그와 경계를 이루기도 했다. 그러나 디페드는 7세기 말에 케레디지온에게 이스트라드 티위 지역을 빼앗겼다.
성도 시대 동안 디페드는 각 칸트레프마다 하나씩 라틴어로 ''sacerdotes''라고 불리는 최대 7명의 주교를 가졌을 수 있으며, 그들의 관할구역은 ''parochia''라고 불렸다.[2][3] 중세 성기에는 성 다윗 교구가 웨일스에서 3개의 주교 교구 중 하나로 부상하여 성 다윗은 서부 웨일스 전체와 중부 웨일스의 일부를 관할하게 되었다.[4]
8세기에서 11세기 사이 바이킹 시대에 디페드는 광범위한 습격을 받아 사회적, 정치적 불안정을 겪었으며, 바이킹은 디페드 남부에 정착지를 건설했다.[5] 9세기 후반까지 디페드의 통치자들은 로드리 대왕의 아들들의 영향력을 경계하여 잉글랜드의 알프레드 대왕의 동맹과 후원을 구했다.[5] 역사적으로 이 관계는 이교도 데인족에 맞서 알프레드의 지도 아래 섬의 기독교 연합으로 묘사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이 관계에는 상당한 정도의 강압이 존재했다.[5]
904년경, 디페드의 통치자 리워흐 압 히파이드가 사망하여 그의 딸 엘렌 페르흐 리워흐 (893-943)를 상속녀로 남겼다.[5] 엘렌은 이웃한 세이실루그의 통치자이자 로드리 대왕의 둘째 아들 카델 압 로드리의 손자인 호웰 다와 결혼했다.[5] 엘렌과의 결혼을 통해 호웰은 디페드를 "남부"를 의미하는 ''데헤우바르스''라고 알려진 확장된 왕국에 통합했고, 나중에 포위스와 기네드를 정복했다.[5] 그러나 950년 호웰이 사망하자 포위스와 기네드는 본래의 왕조로 돌아갔다. 호웰의 손자 마레두드 압 오와인은 그의 할아버지의 왕국을 재건했지만, 그의 통치는 10세기 후반에 증가하는 바이킹 습격으로 시달렸다.[5] 이 기간 동안 바이킹 정착지가 증가했는데, 특히 펨브로 칸트레프 지역에서 헤이버퍼드웨스트, 피시가드, 캘디 아일랜드에도 다른 바이킹 정착지와 교역소가 있었다.[5]
2. 1. 초기 역사 (360년 ~ 7세기)
360년에 아일랜드인, 앵글로색슨족, 픽트족이 연합하여 습격해 오면서 더베드 왕국의 초기 역사가 시작되었다. 아일랜드인들은 맨 섬을 식민지화했고, 5세기까지 짧은 기간 동안 이 지역에서 고대 아일랜드어가 사용되었다. 이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20개의 돌에는 오검 문자 비문이 새겨져 있다. 나버스, 펨브로크셔 인근 캐스텔드위란에서 발견된 라틴어-아일랜드어 이중 언어 비문에는 보테코리가스라는 이름과 함께 "Memoria Voteporigis Protictoris"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보호자"라는 칭호로 귀족에게 주어진 후기 로마 제국의 칭호였다.[2]디페드는 원래 테이피 강, 구일리 강, 토위 강에 접해 있는 지역, 즉 오늘날의 펨브로크셔, 카마던셔 서부, 카마던 마을을 포함하는 지역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디페드는 케마이스, 도글레드, 엠린, 칸트레프 과르타프, 페비디오그, 펜프로, 로스 등 최소 7개의 칸트레프로 구성되었으며, 면적은 약 2284km2였다.
왕국의 세력이 강성했을 때는 이스트라드 티위 ("토위 계곡") 지역까지 확장되어 키드웰리와 거워 (아마도 아에르고일 라우히르 통치 하), 심지어 브리체이니오그와 경계를 이루기도 했다. 그러나 디페드는 7세기 말에 또 다른 소왕국인 케레디지온에게 이스트라드 티위 지역을 빼앗겼다.
2. 2. 중세 (7세기 ~ 11세기)
디페드는 원래 테이피 강, 구일리 강 및 토위 강에 접해 있는 지역을 점유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오늘날의 펨브로크셔, 오늘날의 카마던셔 서부, 그리고 카마던 마을을 포함했다. 디페드는 결국 최소 7개의 칸트레프: 케마이스, 도글레드, 엠린, 칸트레프 과르타프, 페비디오그, 펜프로 및 로스로 구성되었으며, 대략 2284km2의 면적을 차지했다.국력이 강성했을 때, 왕국은 이스트라드 티위 ("토위 계곡") 지역까지 확장되어 키드웰리와 거워 (고어, 아마도 아에르고일 라우히르 통치 하), 심지어 브리체이니오그와 경계를 이루기도 했다. 디페드는 7세기 말에 또 다른 소왕국인 케레디지온에게 이스트라드 티위 지역을 잃었다.
성도 시대 동안 디페드는 각 칸트레프마다 하나씩 라틴어로 ''sacerdotes''라고 불리는 최대 7명의 주교를 가졌을 수 있으며, 그들의 관할구역은 ''parochia''라고 불렸다.[2][3] 그러나 중세 성기에는 성 다윗 교구가 웨일스에서 3개의 주교 교구 중 하나로 부상하여 성 다윗은 서부 웨일스 전체와 중부 웨일스의 일부를 관할하게 되었다.[4]
디페드는 8세기에서 11세기 사이에 바이킹 시대에 광범위한 습격을 받아 사회적, 정치적 불안정을 야기했으며, 바이킹은 디페드 남부에 정착지를 건설했다.[5] 9세기 후반까지 디페드의 통치자들은 로드리 대왕의 아들들의 영향력을 경계하여 잉글랜드의 알프레드 대왕의 동맹과 후원을 구했다.[5] 역사적으로 이 관계는 이교도 데인족에 맞서 알프레드의 지도 아래 섬의 기독교 연합으로 묘사되려는 시도가 있었다.[5] 그러나 데이비스에 따르면 이 관계에는 상당한 정도의 강압이 존재했다. 데이비스는 "웨일스 통치자들이 잉글랜드 왕이 그들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웨일스의 이후 정치사에서 핵심적인 사실이 될 것"이라고 언급했다.[5]
904년경, 디페드의 통치자 리워흐 압 히파이드가 사망하여 그의 딸 엘렌 페르흐 리워흐 (893-943)를 상속녀로 남겼다.[5] 엘렌은 이웃한 세이실루그의 통치자이자 로드리 대왕의 둘째 아들 카델 압 로드리의 손자인 호웰 다와 결혼했다.[5] 엘렌과의 결혼을 통해 호웰은 디페드를 "남부"를 의미하는 ''데헤우바르스''라고 알려진 확장된 왕국에 통합했고, 나중에 포위스와 기네드를 정복했다.[5] 그러나 950년 호웰이 사망하자 포위스와 기네드는 본래의 왕조로 돌아갔다. 호웰의 손자 마레두드 압 오와인은 그의 할아버지의 왕국을 재건했지만, 그의 통치는 10세기 후반에 증가하는 바이킹 습격으로 시달렸다.[5] 이 기간 동안 바이킹 정착지가 증가했는데, 특히 펨브로 칸트레프 지역에서 헤이버퍼드웨스트, 피시가드, 캘디 아일랜드에도 다른 바이킹 정착지와 교역소가 있었다.[5] 데이비스에 따르면 웨일스에 대한 바이킹의 습격은 "끊임없었다"며, 마레두드는 993년에 웨일스 인질의 몸값을 지불하기 위해 세금을 징수해야 했고, 999년에는 바이킹 습격대가 성 다윗을 공격하여 주교 모르가나우를 살해했다.[5]
3. 고고학
이 시기(왕국 이전 및 이후 포함)의 고고학적 증거와 이론은 다이페드 고고학 신탁(Dyfed Archaeological Trust)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다.[6]
4. 현대
1974년 펨브로크셔, 카디건셔, 카마던셔를 포함하는 웨일스 남서부에 다페드라는 행정 구역이 설치되었다. 이 구역은 1996년에 해체되었지만, 일부 의례적인 목적을 위해 유지되었으며, 다페드-포위스 경찰서 및 다페드 텔레콤과 같은 일부 지역 기구의 명칭으로 남아있다.[1]
참조
[1]
서적
Kings, Chronologies, and Genealogies: Studies in the Political History of Early Medieval Ireland and Wales
https://books.google[...]
Occasional Publications UPR
2003
[2]
서적
An Introduction to the History of Wales
UoWP
1941
[3]
서적
The Celts
[4]
서적
A History of Wales
Penguin
1994
[5]
서적
A History of Wales
Penguin
1994
[6]
웹사이트
Dyfed Archaeological Trust
http://www.dyfedarch[...]
2016-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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