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블린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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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더블린 전투는 1922년 6월 28일부터 7월 5일까지 아일랜드 내전 중 더블린에서 벌어진 일련의 전투를 의미한다. 로리 오코너가 이끄는 반(反)조약 IRA 대원들이 더블린의 사법궁을 점령하면서 시작되었으며, 영국 정부의 압력과 임시 정부의 결정에 따라 국군이 사법궁을 포격하면서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었다. 전투는 사법궁, 오코넬 거리 등 더블린 시내 여러 곳에서 벌어졌으며, IRA는 패배하고 더블린은 자유국 정부의 통제 하에 놓였다. 이 전투로 최소 80명이 사망하고 280명 이상이 부상을 입었으며, 반조약 세력은 전국으로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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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블린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
| 전투 개요 | |
| 일부 | 아일랜드 내전 |
![]() | |
| 날짜 | 1922년 6월 28일 – 7월 5일 |
| 장소 | 더블린 중심부 (주로) |
| 결과 | 임시 정부 승리 |
| 교전 세력 | |
| 교전국 1 | 반 조약 IRA 아일랜드 시민군 |
| 교전국 2 | 임시 정부 아일랜드 국군 |
| 지휘관 및 지도자 | |
| 지휘관 1 | 캐털 브루가 오스카 트레이너 패디 오브라이언 어니 오말리 |
| 지휘관 2 | 마이클 콜린스 패디 데일리 톰 에니스 |
| 병력 규모 | |
| 병력 1 | 사법관 200명, 도시 약 500명 |
| 병력 2 | 4,000명 |
| 사상자 및 피해 | |
| 사상자 1 | 최소 15명 사망, 부상자 수 불명, 450명 이상 포로 |
| 사상자 2 | 최소 29명 사망, 150명 부상 |
| 민간인 사상자 | 최소 35명의 민간인 사망, 100명 이상 부상 |
2. 배경
1922년 4월 14일, 로리 오코너가 이끄는 영국-아일랜드 조약 반대파 IRA 병력 약 200명이 더블린의 사법궁을 점령하면서 긴장된 대치 상황이 발생했다.[11] 이들은 영국과의 새로운 무력 충돌을 일으켜 조약을 무너뜨리고, IRA 양 진영을 이전의 공동의 적이었던 영국에 맞서 하나로 규합하여 아일랜드 공화국 건설을 위한 투쟁을 재개하고자 했다. 당시 영국군은 수천 명의 병력을 더블린에 집결시켜 철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이클 콜린스를 중심으로 한 임시정부는 윈스턴 처칠과 영국으로부터 사법궁에 있는 반군을 제거하라는 압력을 받았다. 1922년 6월, 임시 정부는 임박한 내전을 피하려는 헌법 초안을 놓고 영국 내각과 격렬한 협상을 벌였다. 특히 더블린 정부의 모든 구성원이 영국 왕실에 충성 서약을 해야 한다는 조항을 없애려 했으나, 보수적인 영국 내각은 협조를 거부했다.[1] 친조약파 신 페인은 6월 16일 선거에서 승리했다.
1922년 6월 22일, 런던에서 헨리 윌슨 경이 암살되고, 사법궁 부대가 자유국군 참모차장 J.J. 오코넬 장군을 체포하자, 영국은 아일랜드 전역을 침공하여 재점령하겠다고 위협했다. 결국 6월 27일, 임시 정부 내각은 사법궁 수비대에 철수 최후통첩을 전달하고, 이를 거부하면 즉각적인 군사 작전을 개시하기로 합의했다.[2]
2. 1. 영국 정부의 압력
1922년 4월 14일, 로리 오코너가 이끄는 영국-아일랜드 조약에 반대하는 약 200명의 IRA 병력들이 더블린의 사법궁을 점령하면서 긴장된 대치 상황이 발생했다. 그들은 영국과의 새로운 무력 충돌을 일으켜 조약을 무너뜨리고, 두 진영의 IRA를 이전 공동의 적에 맞서 하나로 규합하여 아일랜드 공화국 건설을 위한 투쟁을 재개하고자 했다. 당시 영국군은 수천 명의 병력을 더블린에 집결시켜 철수를 기다리고 있었다.윈스턴 처칠과 영국 내각은 사법궁에 있는 반군을 제거하라는 압력을 임시 정부에 가했다. 그들은 반군의 존재가 조약 위반이라고 간주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압력은 임시 정부 내각의 대통령이자 국군의 실질적 수반이었던 마이클 콜린스에게 가장 크게 가해졌다. 아일랜드 독립 전쟁 당시 IRA의 주요 전략가였던 콜린스는 반조약 무장 세력이 전년 4월 사법궁을 처음 점령했을 때부터 공개적인 전투를 피해왔다. 아서 그리피스를 포함한 임시 정부 내각의 동료들은 콜린스가 그들에 대해 결정적인 군사 작전을 펼쳐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1]
1922년 6월, 임시 정부는 임박한 내전을 피하려는 헌법 초안을 놓고 영국 내각과 격렬한 협상을 벌였다. 특히 그들은 더블린 정부의 모든 구성원이 영국 왕관에 대한 충성 서약을 해야 하는 요구 사항을 없애고자 했다. 이는 반조약 지지자들과의 주요 쟁점이었다. 그러나 보수적인 영국 내각은 협조를 거부했다.[1] 친조약파 신 페인은 6월 16일 선거에서 승리했다.
1922년 6월 22일 런던에서 헨리 윌슨 경이 암살당하고 사법궁 부대가 자유국군 참모차장 J.J. 오코넬 장군을 체포함에 따라 영국 정부의 임시 정부에 대한 압력이 강화되었다. 영국은 이제 아일랜드 전역을 침공하여 재점령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6월 27일, 임시 정부 내각은 사법궁 수비대에 철수 최후통첩을 전달하고, 이를 거부할 경우 즉각적인 군사 작전을 개시할 것이라고 합의했다.[2]
처칠은 국군이 사용할 영국 포병 대출과 킬메이넘에 있는 1만 발 중 200발의 포탄을 제공했다. 킬메이넘은 3마일 떨어져 있었다. 일부 영국 특수 부대가 은밀히 지원되었을 가능성도 있다.[3] 두 대의 18파운드 야포가 리피 강 건너 사법궁 단지 맞은편인 브리지 스트리트와 와인태번 스트리트에 배치되었다. 6월 27일 밤에서 28일 새벽 사이에 반조약 수비대에 최후통첩이 전달된 후, 국군은 사법궁 포격을 시작했다.[4]
포격 개시 명령에 대한 권위 있는 기록(명령이 언제, 누구에 의해, 어디서 발부되었는지 등)은 존재하지 않는다. 역사가들은 콜린스가 명령을 내렸다고 보는 경향이 있지만, 일부 전기 작가들은 이를 반박한다. 반조약 생존자들은 포격이 새벽 4시에 시작되었을 때 오전 8시 철수를 준비하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2. 2. 임시정부의 결정
1922년 4월 14일, 로리 오코너가 이끄는 영국-아일랜드 조약 반대파 IRA 병력 약 200명이 더블린의 포 코츠를 점령하면서 긴장된 대치 상황이 벌어졌다. 이들은 영국과의 새로운 무력 충돌을 일으켜 영국-아일랜드 조약을 무너뜨리고, IRA 양 진영을 통합하여 아일랜드 공화국 건설을 위한 투쟁을 재개하고자 했다. 당시 영국군은 수천 명의 병력을 더블린에 집결시켜 철수를 기다리고 있었다.윈스턴 처칠과 영국 내각은 임시 정부에 포 코츠의 반군을 제거하라는 압력을 가했다. 그들은 반군의 존재가 조약 위반이라고 간주했다. 이러한 압력은 마이클 콜린스에게 가장 크게 가해졌다. 아일랜드 독립 전쟁 당시 IRA의 주요 전략가였던 콜린스는 반조약 무장 세력이 포 코츠를 처음 점령했을 때부터 공개적인 전투를 피해왔다. 그러나 아서 그리피스를 포함한 임시 정부 내각의 동료들은 콜린스가 그들에 대해 결정적인 군사 작전을 펼쳐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
1922년 6월, 임시 정부는 임박한 내전을 피하려는 헌법 초안을 놓고 영국 내각과 격렬한 협상을 벌였다. 특히 더블린 정부의 모든 구성원이 영국 왕실에 대한 충성 서약을 해야 하는 요구 사항을 없애고자 했다. 그러나 보수적인 영국 내각은 협조를 거부했다.[1] 친(親)조약파 신 페인은 6월 16일 선거에서 승리했다.
1922년 6월 22일 런던에서 헨리 윌슨 경이 암살당하고 포 코츠 부대가 자유국군 참모차장 J.J. 오코넬 장군을 체포함에 따라 영국 정부의 임시 정부에 대한 압력이 강화되었다. 영국은 이제 아일랜드 전역을 침공하여 재점령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6월 27일, 임시 정부 내각은 포 코츠 수비대에 철수 최후통첩을 전달하고, 이를 거부할 경우 즉각적인 군사 작전을 개시할 것이라고 합의했다.[2]
처칠은 국군이 사용할 영국 포병 대출과 킬메이넘에 있는 1만 발 중 200발의 포탄을 제공했다. 킬메이넘은 약 4.83km 떨어져 있었다. 일부 영국 특수 부대가 은밀히 지원되었을 가능성도 있다.[3] 두 대의 18파운드 야포가 리피 강 건너 포 코츠 단지 맞은편인 브리지 스트리트와 와인태번 스트리트에 배치되었다. 6월 27일 밤에서 28일 새벽 사이에 반조약 수비대에 최후통첩이 전달된 후, 국군은 포 코츠 포격을 시작했다.[4]
포격 개시 명령에 대한 권위 있는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역사가들은 콜린스가 명령을 내렸다고 보는 경향이 있지만, 일부 전기 작가들은 이를 반박한다. 반조약 생존자들은 포격이 새벽 4시에 시작되었을 때 오전 8시 철수를 준비하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3. 전투의 전개


전투 첫날, 자유국군의 포격은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영국군은 자유국에 18파운드포 두 대를 추가 제공하고, 60파운드포와 공중 폭격을 제안했으나, 마이클 콜린스는 민간인 사상자를 우려하여 거절했다.[5]
6월 29일, 자유국군은 포 코츠 동쪽 건물을 공격, 3명 사망, 14명 부상, 33명을 포로로 잡았다. 아일랜드 공화국군(IRA) 장갑차 "반란자"는 파손되어 승무원들이 버리고 도주했다. 다음 날 새벽, 패디 오브라이언 부상으로 어니 오멀리가 지휘권을 인계받았고, 포격으로 포 코츠에 화재가 발생했다.[5]
오스카 트레이너는 지원 불가를 이유로 포 코트 주둔군에 항복을 명령했으나, 오멀리는 총사령부 작전임을 들어 거부했다.[5] 6월 30일 오후 3시 30분, 오멀리는 패디 댈리 준장에게 항복, 포위 공격 중 공화군 3명이 사망했다.[5]
자유국군의 포 코츠 점령에도 불구, 더블린 전투는 7월 5일까지 이어졌다. 6월 29일, 오스카 트레이너의 더블린 여단 반조약 IRA 부대는 자유국군의 주의 분산을 위해 오코넬 거리 등을 점령했다. 더블린 내 IRA 병력은 약 500명, 시민군 150명이 합류했다.[11]
반정부군은 오코넬 거리 북동쪽 건물들을 거점으로, 그레샴, 크라운, 그랜빌, 하맘 호텔을 점령했다. 거리 서쪽 YMCA 건물, 리피 강 남쪽 엉기어 거리 스완 펍에도 전초기지를 두었다. 트레이너는 증원을 기대했으나 벨파스트와 티퍼러리 부대만 응답, 이마저도 늦게 도착했다.[12]
톰 에니스 지휘 자유국군은 외곽 반조약군 주둔지 제거 후, 오코넬 거리 포위망을 좁혔다. 포병은 파넬 거리와 가디너 거리 반조약군 진지를 공격, 오코넬 거리 사격로를 확보했다.
자유국군은 YMCA 건물 아래 터널을 파고 폭탄을 터뜨려 전초기지를 제거했다. 트레이너 부대는 "블록"에서 포병, 장갑차 공격을 받다 건물 화재로 탈출, 블레싱턴으로 향했다.
캐털 브루가와 15명은 하맘 호텔에 남아 저항했다. 7월 5일 오후 5시, 화재로 브루가는 항복을 명령했지만, 자신은 남아 권총을 들고나와 자유국군에 총상을 입고 출혈로 사망했다.
캐털 브루가는 더블린 전투 마지막 희생자였다. 최소 80명(반조약파 IRA 15명, 국군 29명, 영국 왕립 공군 1명, 민간인 35명) 사망, 280명 이상 부상, 자유국은 450명 이상 포로를 확보했다. 높은 민간인 사상자는 시가전, 중화기 사용 결과였다.
3. 1. 포 코츠 공격 (1922년 6월 28일 ~ 6월 30일)
1922년 4월, 로리 오코너가 이끄는 200여 명의 아일랜드 공화국군(IRA) 반(反)조약파 병력은 더블린의 포 코츠를 점령했다. 이들은 영국과의 군사적 대립을 통해 영국-아일랜드 조약을 철회하고자 했다.[11] 그러나 아일랜드 자유국 임시정부는 영국-아일랜드 조약에 반대하여 포 코츠를 점령한 이들을 반란 세력으로 규정했다. 특히, 아일랜드 자치령 총독 J.J. 오코넬이 포 코츠 군에 의해 체포되면서, 아일랜드 정부는 이들에 대한 강경 대응에 나섰다.[12]
포 코츠 안에는 조 맥켈비, 로리 오코너, 리엄 멜로스, 어니 오멀리 등 12명의 아일랜드 공화군 지휘부가 있었다. 주둔군은 패디 오브라이언 사령관이 지휘하는 제1더블린 여단 제1, 제2대대 출신 약 180명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대부분 소화기로 무장했고, 롤스로이스 장갑차 1대를 노획하여 "반란자"라고 명명했다.[5] 반조약측은 포 코츠 주변에 지뢰를 매설하고 문과 창문을 봉쇄하는 등 방어 시설을 구축했지만, 먼저 발포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아 자유국군에게 포위당했다.[5]
첫날 포격이 효과가 없자 영국군은 자유국에 18파운드포 두 대를 추가 제공하고, 60파운드포 곡사포와 포 코츠 공중 폭격을 제안했다. 그러나 마이클 콜린스는 많은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할 위험을 우려하여 후자 두 제안을 거절했다.[5] 29일, 자유국군은 포 코트 동쪽 건물을 공격하여 사망 3명, 부상 14명의 손실을 보았고, 33명을 포로로 잡았다. 또한 공화군의 장갑차 "반란자"는 파손되어 승무원이 버리고 도망쳤다. 다음 날 새벽, 오브라이언이 파편에 부상당하자 오멀리가 포 코트의 군사 지휘권을 이어받았다.[5] 이때 포격으로 포 코트에 화재가 발생했다. 또한 더블린의 반조약측 아일랜드 공화군 사령관 오스카 트레이너로부터 포 코트 주둔군에게 항복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는데, 그가 그들의 위치에 도착하여 도울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오멀리는 포 코트가 총사령부 작전이었기 때문에 이 명령이 무효라고 판단했다.[5] 그러나 상황이 급격히 악화되자 6월 30일 오후 3시 30분, 오멀리는 자유국 더블린 경비대 패디 댈리 준장에게 포 코츠를 항복했다. 포위 공격 중 공화군 3명이 사망했다.[5]
전투 당시 양측 병사들은 대부분 아일랜드 독립 전쟁 참전자로서 서로에게 유대감을 느꼈다. 이러한 이유로, 포로로 잡힌 사법궁전 수비대 내의 여러 반조약 지도자들, 특히 어니 오멀리와 션 레머스는 탈출하여 계속 싸울 수 있었다.[5]
3. 1. 1. 아일랜드 공공기록보관소 폭발
항복 몇 시간 전, 아일랜드 공공기록보관소(PRO) 건물이 폭발했다. 이 건물은 사법궁전 서쪽 건물에 위치해 있었으며, 사법궁전 수비대가 탄약고로 사용하고 있었다. 이 엄청난 폭발로 노르만 정복 이후부터 이어져 내려온 아일랜드 국가 기록물이 파괴되었다.[6] 진격하던 자유국군 40명이 중상을 입었다.[7]
폭발의 책임을 누구에게 돌릴지는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있다. 국군 본부는 반조약파가 자유국군을 죽이기 위해 고의로 PRO에 폭탄을 설치했다고 주장했다.[7] 정부 지지자인 팀 힐리는 나중에 이 폭발이 항복 전에 매설된 지뢰가 나중에 폭발한 결과라고 주장했다.[8] 반면, 마이클 피워가 2018년에 실시한 연구에서는 IRA가 폭발을 일으켰다는 증거를 찾지 못했다. 이 연구는 사법궁전 포격으로 인한 화재가 PRO에 보관된 폭발물에 번지면서 폭발이 발생했다고 제시한다.[7] 1996년 사법궁전 200년 역사에 대해 저술한 로난 케인 판사는 공화파가 폭발에 대한 책임을 질 증거가 없다고 언급했으며, 존 리건 학자는 내전 당시 작성된 선전 문서(반조약파의 책임을 주장)는 "신뢰할 만한 증거"가 아니라고 주장했다.[9]
사법궁전 위로 거대한 버섯구름이 약 60.96m 높이로 치솟았다. 캘턴 영거는 세 번의 폭발을 확인했다. "오후 2시 15분경 기록 보관소 아래에서 두 번, 그리고 오후 5시경 건물 뒤편에서 한 번의 폭발이 있었다."[9]
PRO 폭발(그리고 1921년 관세청 방화 사건)로 인한 대체 불가능한 역사 기록의 파괴는 아일랜드 역사학에 손상을 입혔다. 일부 기록은 다양한 정도로 연표가 작성되어 있었다. 아일랜드 국가기록원과 아일랜드 필사본 위원회는 손실을 줄이기 위해 다른 출처의 원본 문서를 수집하고 공개했다. 더블린 트리니티 칼리지가 주도하는 컨소시엄은 폭발 100주년을 기념하여 PRO와 그 내용물을 "가상으로 재현"하는 웹사이트 "Beyond 2022"를 만들고 있다.[10]
3. 2. 오코넬 거리 전투 (1922년 6월 29일 ~ 7월 5일)
O'Connell Street|오코넬 거리영어에서 벌어진 전투는 1922년 6월 29일부터 7월 5일까지 이어졌다. 오스카 트레이너가 이끄는 반(反)조약파 IRA 더블린 여단은 포 코츠 공격에서 자유국군의 주의를 분산시키기 위해 오코넬 거리, 파넬 광장, 요크 거리 등을 점령했다. 그러나 더블린 내 모든 IRA 부대가 새 아일랜드 정부에 맞설 준비가 된 것은 아니었고, 도시 전체 IRA 병력은 약 500명 정도였다. 여기에 1916년 부활절 봉기 이후 버려진 무기와 탄약을 가져온 시민군 남녀 약 150명이 합류했다.[11]반(反)정부군은 오코넬 거리 북동쪽을 점령하고, 벽을 뚫어 연결한 건물들을 주요 거점으로 삼았다. 그들은 그레샴, 크라운, 그랜빌, 하맘 호텔도 점령했다. 거리 서쪽의 유일한 거점은 YMCA 건물이었다. 또한 리피 강 남쪽 엉기어 거리에 있는 스완 펍에 전초기지를 두었다. 오스카 트레이너는 전국에서 증원군을 기대했지만, 벨파스트와 티퍼러리의 반(反)조약파 부대만 응답했고, 이들은 전투에 참여하기에는 너무 늦게 도착했다.[12]
톰 에니스 장군이 지휘하는 자유국군은 먼저 외곽의 반(反)조약군 주둔지를 제거했다. 7월 1일까지 이 작업을 완료한 후, 오코넬 거리 주변에 더욱 좁은 포위망을 형성했다. 포병은 파넬 거리와 가디너 거리에 있는 반(反)조약군 진지를 공격하여 자유국군에게 오코넬 거리를 향한 사격로를 확보해 주었다.
자유국군은 YMCA 건물 아래로 터널을 파고 폭탄을 터뜨려 YMCA의 반(反)정부군 전초기지를 제거했다. 트레이너 부대는 "블록"에서 장갑차의 지원을 받는 포병의 근접 포격을 받을 때까지 버텼다. 건물에는 소이탄도 설치되었다. 트레이너와 부대원 대부분(남자 70명, 여자 30명)은 점령 건물이 불타자 탈출, 민간인과 섞여 블레싱턴으로 향했다.
캐털 브루가와 15명의 후위 부대는 트레이너와 IRA 대원들이 떠난 후 하맘 호텔에 남았다. 7월 5일 오후 5시, 화재로 호텔에 머물 수 없게 되자 브루가는 부하들에게 항복을 명령했다. 그러나 그는 남아 권총을 들고 혼자 건물에서 나왔다. 그는 자유국군에게 다리에 총을 맞고 출혈로 사망했다. 자유국군이 반(反)조약파 IRA 부대를 해산시키면서 도시 주변에서 산발적인 전투가 이어졌다.
캐털 브루가는 더블린 전투의 마지막 희생자가 되었다. 이 전투로 최소 80명(반(反)조약파 IRA 15명, 국군 병사 29명, 영국 왕립 공군 군인 1명, 민간인 35명)이 사망하고 280명 이상이 부상당했다. 또한 자유국은 반(反)정부군 포로 450명 이상을 사로잡았다. 높은 민간인 사상자는 인구 밀도가 높은 도시 지역에서 포병과 같은 중화기를 사용한 결과였을 것이다.
4. 영향
더블린 전투의 결과, 자유국 정부는 아일랜드 수도 더블린을 확고하게 장악했고, 반(反)조약 세력은 전국으로 흩어졌다. 전투 후 체포 작전으로 더 많은 공화파 수감자가 발생했고, 7월 31일 더블린 주 스케리스에서 저명한 반조약 활동가 해리 볼랜드가 총에 맞아 사망했다.
오스카 트레이너, 어니 오말리 등 더블린 전투에서 탈출한 반조약 전투원들은 블레싱턴에 재집결했다. 티퍼러리 주 출신의 반조약 IRA 부대가 도착했지만 더블린 전투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이 부대는 남쪽으로 이동하여 에니스코티와 칼로우를 점령했지만, 자유국군에 밀려 곧 포기했다.[11] 대부분의 공화파는 먼스터 공화국으로 후퇴했으나, 1922년 7월부터 8월까지 자유국군의 공세에 함락되었다.
포 코트에서 체포된 로리 오코너, 리엄 멜로우스, 조 맥켈비, 리처드 배럿 등 공화파 지도자 4명은 션 헤일스 살해에 대한 보복으로 처형되었다. 카탈 브루가가 사망한 거리는 카탈 브루가 거리로 개명되었다.
4. 1. 주요 인물 (한국의 관점)
더블린 전투는 아일랜드 독립 투쟁의 중요한 사건 중 하나로, 한국의 관점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현재 이 전투에 참여한 주요 인물에 대한 정보는 부족한 상황이다. 따라서, 문서 내용을 보강하기 위해 추가적인 정보 제공이 필요하다.5. 전투 이후
더블린 전투 이후 자유국 정부는 아일랜드 수도를 확고하게 장악했고, 반조약 세력은 전국으로 흩어졌다. 1922년 7월 31일 더블린 주 스케리스에서 해리 볼랜드가 총에 맞아 사망하는 등 더 많은 공화파 수감자가 발생했다. 오스카 트레이너, 어니 오말리 등은 블레싱턴에 재집결 후 남쪽으로 이동하여 에니스코티와 칼로우를 점령했지만 곧 포기했다. 대부분의 공화파는 먼스터 공화국으로 후퇴했지만, 1922년 7월부터 8월까지 자유국군의 공세에 함락되었다.
포 코트에서 체포된 로리 오코너, 리엄 멜로우스, 조 맥켈비, 리처드 배럿 4명은 션 헤일스 살해에 대한 보복으로 처형되었다. (아일랜드 내전 중 처형(Executions during the Irish Civil War) 참조) 카탈 브루가가 사망한 거리는 나중에 그의 명예를 기리기 위해 카탈 브루가 거리로 개명되었다.[11]
5. 1. 먼스터 공화국
더블린 전투가 끝나자 자유국 정부는 아일랜드 수도를 확고하게 장악했고, 반조약 세력은 전국으로 흩어졌다. 전투 후 체포 작전으로 더 많은 공화파 수감자가 발생했고, 7월 31일 더블린 주 스케리스에서 저명한 반조약 활동가 해리 볼랜드가 총에 맞아 사망했다.오스카 트레이너, 어니 오말리와 더블린 전투에서 탈출한 다른 반조약 전투원들은 도시 남서쪽 약 30km 지점인 블레싱턴에 재집결했다. 티퍼러리 주 출신의 반조약 IRA 부대가 도착했지만 더블린 전투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대신 이 부대는 남쪽으로 이동하여 에니스코티와 칼로우를 포함한 일련의 도시를 점령했지만, 우월한 자유국군에 맞서 곧바로 이들을 포기했다. 대부분의 공화파는 다시 남쪽으로 후퇴하여 리머릭에서 워터포드까지 이어지는 선의 남서쪽 지역인 소위 먼스터 공화국으로 이동했다. 이 지역은 1922년 7월부터 8월까지 자유국군의 공세에 의해 함락되었다.
참조
[1]
간행물
British Cabinet proceedings 1922
Public Records Office
1922
[2]
간행물
Provisional Government Cabinet proceedings 1922
Dáil na hÉireann
[3]
방송
The British Gunner and the Irish Civil War
2012-10-29
[4]
영상매체
An Léigear 1922 / The Siege of 1922 (documentary)
TG4 (Téiliflis na Gaeltachta)
2013
[5]
웹사이트
Remembering the past: The Four Courts attack
http://www.anphoblac[...]
[6]
웹사이트
The Four Courts
https://www.courts.i[...]
Courts Service of Ireland
2020-09-16
[7]
잡지
The Civil War Begins
https://www.historyi[...]
2022-05-01
[8]
서적
Letters and Leaders of my Day (memoir)
1928
[9]
서적
Modern Ireland and Revolution: Ernie O'Malley in Context
[10]
웹사이트
Vision
https://beyond2022.i[...]
[11]
서적
Ireland's Civil War
Muller
1968
[12]
서적
The Civil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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