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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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덴베에는 1696년 오사카의 전당포 아들로, 에도로 향하던 중 표류하여 캄차카 반도에 표착한 일본인이다. 1701년 또는 1702년 러시아 탐험가 블라디미르 아틀라소프에게 발견되어 러시아로 보내졌다. 러시아에서 표트르 1세에게 일본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러시아인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쳐 '러시아의 일본어 교육의 아버지'로 불렸다. 그는 러시아 정교회로 개종하여 가브리엘이라는 세례명을 받았으며, 캄차카와 쿠릴 열도 탐험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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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덴베에 | |
|---|---|
| 인물 정보 | |
![]() | |
| 이름 | 덴베에 |
| 로마자 표기 | Denbē |
| 출생 | 일본 센다이 번 |
| 사망 |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 |
| 직업 | 어부, 상인 |
| 국적 | 일본 (에도 시대), 러시아 제국 |
| 표류 및 러시아 도착 | |
| 표류 시작 | 1695년경 |
| 러시아 도착 | 1697년 캄차카 |
| 표류 원인 | 태풍 |
| 러시아에서의 활동 | |
| 주요 활동 | 러시아어 교육, 일본 문화 전파 |
| 러시아 정착 | 상트페테르부르크 |
| 러시아 이름 | 데미안 폼페예비치 |
| 로마자 표기 | Dem'ian Pompei'evich |
| 기타 정보 | |
| 관련 인물 | 표트르 1세, 블라디미르 아틀라소프 |
| 참고 자료 | 일본어-러시아어 사전 편찬 참여 |
2. 생애
덴베에는 1696년 오사카 다니마치의 전당포 아들로 태어나 상인 점원으로 일했다. 에도로 향하던 중 폭풍을 만나 표류하여 캄차카 반도에 표착했고, 그곳 현지인에게 붙잡혔다. 1701년 또는 1702년에 러시아 탐험가 블라디미르 아틀라소프에게 발견되었다.[1] 일본으로 돌아가기를 간청했으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보내졌다.[2]
표트르 1세에게 일본에 대해 이야기했고, 몇몇 러시아인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쳐 러시아의 일본어 교육의 아버지로 불리게 되었다. 그는 가브리엘이라는 세례명을 받고 정교회 신자가 되어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여생을 보냈다.[4] 1714년과 1719년 사이, 여행가 존 벨을 만나 자신의 표류 경험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덴베이가 일본의 정치, 군사 조직 등에 대해 특별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가 제공한 정보는 러시아의 일본 정책 수립에 영향을 주었다.[1]
2. 1. 일본에서의 초기 생애
덴베에는 1696년 오사카 다니마치의 전당포 아들로 태어났다. 상인 점원이었던 그는 에도로 향하던 중 폭풍을 만나 표류하여 캄차카 반도에 표착했으나 현지인에게 붙잡혔다. 1701년 또는 1702년에 러시아 탐험가 블라디미르 아틀라소프에게 발견되었다.[1]2. 2. 러시아에서의 삶
덴베에는 상인 점원으로, "에도로 향하는 30척의 수송선"에 타고 있었다. 1696년 해로로 에도로 가던 중 폭풍을 만나 캄차카 반도에 표류하게 되었고, 1701년 또는 1702년에 아틀라소프에게 발견되었다.[1] 일본으로 돌아가기를 간청했으나, 덴베이와 다른 젊은 일본인(오래 살지 못함)은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보내졌다.[2] 덴베에는 그곳에서 표트르 1세에게 일본에 대해 이야기했고, 몇몇 러시아인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쳐 러시아의 일본어 교육의 아버지로 불리게 되었다. 그는 가브리엘이라는 세례명을 받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여생을 보냈다.덴베이가 일본의 정치, 군사 조직 등 러시아에 전략적으로 도움이 될 만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은 낮지만, 그의 존재는 캄차카와 쿠릴 열도 탐험에 대한 러시아의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일본과의 무역 개시를 시도하게 했다.
오사카다니마치의 전당포 아들이었던 덴베에는 캄차카 반도에 표착한 후 현지인에게 붙잡혔으나, 1697년 러시아인 블라디미르 아틀라소프(Владимир Васильевич Атласов|블라디미르 바실리예비치 아틀라소프ru)의 탐험대에 발견되었다. 이후 러시아 제국의 모스크바로 끌려가 표트르 1세를 알현했다. 그는 러시아 최초의 일본어 교사이자 일본인 최초의 정교회 신자가 되었다.[4]
1714년과 1719년 사이, 덴베에는 여행가 존 벨을 만나 자신의 표류 경험을 이야기했다.
2. 3. 사망과 이후
덴베에는 일본의 정치, 군사 조직 등에 대해 তেমন কোনো বিশেষ জ্ঞান রাখতেন না। তবে, তিনি যেসব তথ্য দিয়েছিলেন, সেগুলো রাশিয়ার জাপান-নীতি তৈরিতে প্রভাব ফেলেছিল।[1]1714 থেকে 1719 সালের মধ্যে, ভ্রমণকারী জন বেল-এর সাথে 덴베에-এর দেখা হয়েছিল। বেল লিখেছেন:
3. 평가
덴베에는 일본과 러시아 양국 관계에서 초기 가교 역할을 한 인물이다. 비록 일본의 정치, 군사에 대한 전문 지식은 부족했지만, 표트르 1세에게 일본 정보를 제공하고 러시아인에게 일본어를 가르쳐 러시아의 일본어 교육의 아버지로 불린다.[1][2] 이는 캄차카 반도와 쿠릴 열도 탐험, 나아가 일본과의 무역 시도라는 러시아의 극동 진출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2]
존 벨의 기록에 따르면, 덴베이는 나가사키 출신 상인으로, 항해 중 폭풍을 만나 캄차카 반도에 표류했다. 러시아 장교의 도움을 받았으나, 동료 일부는 피로와 식량 부족으로 사망했다. 이후 덴베이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보내져 러시아 과학 아카데미에서 생활하며 일본어와 러시아어를 읽고 쓰게 되었다.[2]
3. 1. 긍정적 평가
덴베이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극동 지역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데 기여했다.[1] 덴베이는 캄차카 반도와 쿠릴 열도 탐험에 대한 러시아의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일본과의 무역 개시를 시도하게 했다.[2]참조
[1]
서적
East of the Sun: The Conquest and Settlement of Siberia
Heinemann
[2]
서적
Travels From St. Petersburg In Russia To Diverse Parts Of Asia: In Two Volumes
https://books.google[...]
Foulis
[3]
웹사이트
でんべえ【伝兵衛】
https://japanknowled[...]
2022-01-15
[4]
문서
[[みなもと太郎]]의 만화 작품 『[[풍운아들]]』에서, 표트르 1세는 일본과의 교역을 모색하고 있었고, 일본어 통역을 원했기 때문에, 그 육성을 위해 전병위를 일본으로 귀국시키는 것을 막는다는 이유로, 당시 기독교는 일본에서는 금교였기 때문에, 귀국할 수 없도록 세례를 받게 하여 정교도로 만들었을 것이라고 묘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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