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루사스 2세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루사 2세는 울라르투 왕국의 왕으로, 아르기슈티 2세의 아들이다. 재위 기간 동안 아시리아 제국에 패하여 영토를 빼앗기고 조공을 바치는 상황이었으나, 아시리아의 내분으로 인해 울라르투 부흥의 기회를 얻었다. 루사 2세는 할디 신앙 부활을 위해 새로운 종교 도시를 건설하고, 아나톨리아 반도로의 원정을 시도했지만, 슈프리아국의 독립 움직임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또한 트란스코카서스 지역에서 테이슈바니 시를 건설하고 수로를 건설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울라르투의 쇠퇴는 멈추지 않았으며, 루사 2세 이후의 왕위 계승 순서에 대한 논란이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우라르투의 왕 - 사르두리 2세
    사르두리 2세는 우라르투의 왕으로 아르기슈티 1세의 뒤를 이어 즉위하여 영토를 확장하고 최대 세력권을 구축했으나, 아시리아의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에게 패배하며 왕국은 쇠퇴하고 그의 아들 루사 1세에게 왕위가 넘어갔다.
  • 우라르투의 왕 - 사르두리 1세
    사르두리 1세는 우라르투의 왕으로, 아라마를 계승하여 왕위에 올라 울라르투를 최초로 통일 국가로 이끌었으며, 수도를 투쉬파에 정하고 군대를 재편성하는 등 왕국의 기틀을 다지고 우라르투어를 쐐기 문자로 기록하기 시작했다.
  • 기원전 7세기 통치자 - 키악사레스
    키악사레스는 메디아 왕국의 왕으로서 군제 개혁, 아시리아 제국 멸망 기여, 스키타이족 지배에서의 독립, 신바빌로니아 제국과의 협력, 리디아와의 전쟁을 통해 메디아의 세력을 확장했다.
  • 기원전 7세기 통치자 - 프삼티크 1세
    프삼티크 1세는 아시리아의 지원으로 이집트 제26왕조를 창건한 파라오로, 이집트 통일, 경제 재건, 군사력 강화, 활발한 군사 활동을 펼쳤다.
루사스 2세
기본 정보
칭호우라르투
재위 기간기원전 680년–기원전 639년
이전 통치자아르기슈티 2세
후임 통치자사르두리 3세
아버지아르기슈티 2세
어머니하 시스

2. 국제 정세

아르기슈티 2세의 아들 루사 2세가 즉위할 당시, 울라르투아시리아에 패해 영토 일부를 잃고 조공을 바쳐야 했다. 북동쪽 트란스캅카스에서는 킴메르인과 스키타이인 같은 기마 민족이 나타나 위협이 되었다. 그러나 아시리아에서 내분이 일어나고 메디아인의 반란이 일어나는 등 정세가 울라르투에게 유리하게 바뀌었다. 기원전 680년에는 아시리아 왕 센나케리브가 암살되었고, 암살자들이 울라르투로 도망치면서 울라르투는 아시리아를 신경 쓸 여유가 없어졌다.

2. 1. 아시리아의 혼란

아르기슈티 2세의 아들이다. 루사 2세 즉위 당시의 울라르투아시리아 제국에 패하여 영토의 일부를 빼앗긴 데다 조공 의무를 지고 있었다. 게다가 북동쪽의 트란스캅카스에는 기마 민족인 킴메르인과 스키타이인이 나타나 큰 위협이 되었다. 울라르투는 이 북방에서 온 흉포한 신래자를 달래야 했다.

하지만 정세는 울라르투에게 호전되었다. 눈엣가시였던 아시리아 제국에서는 내분이 일어났다. 새롭게 정복한 메디아인에 의한 반란이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게다가 기원전 680년에는 아시리아 왕 센나케리브가 암살되었고, 암살자들은 울라르투 영내로 도망쳤다. 이 사실은 아시리아의 기록과 구약성서의 열왕기에도 기술되어 있다. 울라르투는 아시리아를 신경 쓸 여유가 없어지자 루사는 울라르투의 부흥에 힘쓸 수 있게 되었다.

3. 대외 팽창과 내정

루사 2세는 우라르투의 주신 할디 신앙을 부활시키려 했으나, 아시리아를 상대로 한 군사 원정은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우라르투 본국 근처의 슈프리아국조차 독립 움직임을 보이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루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라르투의 장기적인 쇠퇴는 멈추지 않았다. 아시리아 측 기록 등 관련 사료가 부족해지면서, 우라르투가 남긴 비문을 통해서만 왕들의 업적을 알 수 있게 되었고, 그 연대 결정도 어려워졌다. 루사 2세 이후의 왕위 계승 순서에 대해서는 혼란이 있으며, 사르두리 3세, 엘리메나, 루사 3세 등이 후계자 후보로 거론되나, 엘리메나의 경우 혈연관계가 아닐 가능성도 제기된다.

3. 1. 트란스코카서스 지역 개발

루사 2세는 아시리아의 사르곤 2세에 의해 파괴된 무사시르를 대신하여 반 호 근처에 새로운 종교 도시를 건설했다(현재의 아딜제바즈 유적). 그는 아시리아에 대해 우위를 점하기 위해 아나톨리아 반도로 가는 교통의 요충지인 유프라테스강 유역으로 여러 차례 원정을 실시했다. 그러나 이 원정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thumb

한편 루사의 활동은 트란스코카서스 지방에서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이미 우라르투에 의해 건설된 예레반 근처에 새롭게 테이슈바 신의 이름을 딴 4ha 이상의 크기의 테이슈바니 시를 건설했다(현재의 카르미르-블루르 유적). 아르메니아 공화국에서는 라즈단강에서 쿠알리니 시로 수로를 건설한 루사 2세의 비문이 발견되었다.

4. 우라르투의 쇠퇴와 계승 문제

루사 2세는 아시리아의 사르곤 2세에 의해 파괴된 무사시르를 대신하여 반 호 근처에 새로운 종교 도시(현재의 아딜제바즈 유적)를 건설하여 우라르투의 주신 할디 신앙을 부활시키려 했다.[1] 루사는 아시리아에 대해 우위를 점하기 위해 아나톨리아 반도로 가는 교통의 요충지인 유프라테스강 유역으로 여러 차례 원정을 실시했으나, 이 원정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1] 우라르투 본국에 가까운 슈프리아국조차 독립 움직임을 보였다.[1]

트란스 코카서스 지방에서도 루사의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1] 이미 우라르투에 의해 건설된 예레반 근처에 새롭게 테이슈바 신의 이름을 딴 4ha 이상의 크기의 테이슈바니 시(현재의 카르미르-블루르 유적)를 건설했다.[1] 아르메니아 공화국에서는 라즈단강에서 쿠알리니 시로 수로를 건설한 루사 2세의 비문이 발견되었다.[1]

이러한 루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라르투의 장기적인 쇠퇴 경향은 멈출 수 없었다.[1] 아시리아 측 기록 등 비교사료가 극단적으로 줄어들면서, 우라르투 스스로 남긴 비문을 통해 각 왕의 업적을 알 수 있지만, 그 연대 결정이 어려워지고 있다.[1] 루사 2세 이후의 왕위 계승 순서에 대해서는 혼란이 있어, 연구자에 따라 견해가 크게 다르다.[1] 루사 2세 다음 왕이 된 것은 아들 사르두리 3세 외에 엘리메나, 루사 3세의 세 사람이 후보로 거론되고 있는데, 이 중 엘리메나에 대해서는 혈연관계가 아닐 가능성이 있다.[1]

5. 참고 문헌


  • 보리스 보리소비치 피오트로프스키, 埋もれた古代王国の謎 幻の国ウラルトゥを求めて|보리스 보리소비치 피오트로프스키|가토 규조일본어 역, 이와나미 서점, ISBN 9784000001601 (4000001604)
  • 멜리키슈빌리 G.A. ''우라르투 쐐기 문자'', 소련 과학 아카데미 출판사, 모스크바, 1960
  • 아르투니안 N.V. ''비아이닐리(우라르투)'', 아르메니아 SSR 과학 아카데미 출판사, 예레반, 1970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