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악사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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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키악사레스는 그리스어로 Κυαξαρης, 메디아어로 ᴴuvaxšϑra로 불리며 "훌륭한 통치자"를 의미하는 이름을 가진 인물로, 프라오르테스의 뒤를 이어 메디아의 왕이 되었다. 그는 군제 개혁을 통해 메디아 군을 강화하고, 스키타이의 지배에서 벗어나 아시리아 제국을 공격하여 멸망에 기여했다. 이후 리디아와 5년간의 전쟁을 벌였으며, 일식을 징조로 화해하여 아들 아스티아게스와 리디아 공주 아리에니스의 결혼으로 평화를 맺었다. 키악사레스는 파르티아를 정복하고, 기원전 585년 일식 전투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사후 다리우스 1세 시대에 그의 유산을 주장하는 반란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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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악사레스 | |
---|---|
기본 정보 | |
칭호 | 메디아 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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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위 기간 | 기원전 625년 – 기원전 585년 |
즉위 | 기원전 625년 |
이전 | 프라오르테스 |
이후 | 아스티아게스 |
출생 | 기원전 675년 |
출생지 | 엑바타나 |
사망 | 기원전 585년 |
매장지 | 시로메디아 (현재의 키즈카판, 쿠르디스탄 지역) |
배우자 | 나보폴라사르의 딸 (또는 손녀) |
자녀 | 아스티아게스 아미티스 |
왕조 | 메디아 왕조 |
아버지 | 프라오르테스 |
종교 | 고대 이란 종교 |
모국어 | 메디아어 |
이름 | (메디아어: ) (고대 페르시아어: }}}} ) (|translit=Waksatar}}) (프리기아어: ) (고대 그리스어: ) (라틴어: ) |
2. 이름
키악사레스(Cyaxares)라는 이름은 그리스어 Κυαξαρης|Kuaxarēsgrc를 라틴어화 한 것이며, 이는 다시 "훌륭한 통치자"를 의미하는 메디아어 이름 𐎢𐎺𐎧𐏁𐎫𐎼|ᴴuvaxšϑraxme를 헬레니즘화 한 것이다.
키악사레스는 아버지 프라오르테스가 아시리아 제국과의 전투에서 전사하자 메디아의 왕위를 물려받았다. 키악사레스는 군제 개혁을 시도해 메디아 군에 병종 제도와 부대 제도를 도입했다. 그 결과 메디아 군은 강군으로 거듭나 아시리아 제국을 물리쳐 아나톨리아 동쪽 대부분을 점령한다.
키악사레스는 메디아와 여러 동맹들을 이끌고 아시리아 제국을 공격하던 중 국왕 마디우스가 이끄는 스키타이족의 공격을 받았다. 급작스러운 후방 공격에 메디아 군대는 대응할 수 없었고, 메디아는 28년간 스키타이족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키악사레스는 비밀리에 메디아 인들을 모아 힘을 키웠고, 스키타이족을 잔치에 초대하여 기습해 죽인 뒤 메디아를 다시 독립시켰다.[8]
그리스 작가 디오도루스 시쿨루스는 키악사레스를 Αστιβαρας|Astibarasgrc라고 명명했는데,[6] 이는 "창을 가진 자"를 의미하는 메디아어 이름 *R̥štibara를 헬레니즘화 한 것이다. 이 이름은 그의 아들인 아스티아게스의 메디아어 형태인 *R̥štivaigah와 유사하며, "창을 던지는 자"를 의미한다.[7]
3. 즉위 초기
기원전 580년 경 스키타이족 출신 망명자가 키악사레스에게 모욕을 당하자 키악사레스의 아들을 살해하고 리디아로 망명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에 키악사레스는 리디아의 왕 알리아테스에게 아들을 살해한 스키타이인을 메디아로 다시 넘겨줄 것을 요구했지만 거부당했고, 이에 키악사레스는 리디아에 전쟁을 선포하고 리디아와 5년 넘게 전쟁을 벌였다.
그러던 기원전 585년 5월 28일에 있었던 일식을 계기로 쉬엔네시스(킬리키아의 국왕의 호칭)와 바빌론의 라비네토스의 중재를 통해 리디아와 화친을 하고 자신의 아들 아스티아게스를 리디아의 공주 아리에니스와 결혼시켰다.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키악사레스는 스키타이 지배 하에서 메디아의 지배를 안정시키고, 근본적인 군제 개혁을 실시하여 보병대, 궁병대를 나누었으며, 스키타이의 기동적인 기마 전술을 채용했다. 게다가 이 시대 메디아의 유물이 보여주듯이 스키타이의 미술 요소도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키악사레스는 오르미아 호 지방까지 지배를 확대하여, 스키타이인의 경계심을 불러일으켰다. 결전에서 키악사레스는 스키타이군을 격파하고, 스키타이의 세력을 만나 지방까지 후퇴시켰다.
4. 스키타이의 지배와 독립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키악사레스는 스키타이 지배 하에서 메디아의 지배를 안정시켰다. 이 시대 메디아의 유물은 스키타이의 미술 요소를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키악사레스는 오르미아 호 지방까지 지배를 확대하여, 스키타이인의 경계심을 불러일으켰다. 결전에서 키악사레스는 스키타이군을 격파하고, 스키타이의 세력을 만나 지방까지 후퇴시켰다.
4. 1. 군제 개혁
키악사레스는 스키타이의 속박에서 메디아를 해방시킨 후, 아시리아와의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메디아 군대를 재편성했다.[8] 이전의 메디아 군대는 친족 집단으로 나뉜 부족 민병대로 싸웠고 각 전사는 가장 숙련된 무기를 사용했지만, 키악사레스는 아시리아 및 우라르투 군대를 모델로 한 정규군을 창설하여 국가가 완전히 장비를 갖추고 전략 및 전술 부대로 나눴다.[8] 또한,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키악사레스는 보병대와 궁병대를 나누고, 스키타이의 기마 전술을 채용하는 등 군제를 개혁했다.
키악사레스는 스키타이 통치를 전복시킨 후 스키타이인들과 동맹을 맺었을 가능성이 있다. 기원전 615년부터 바빌론 기록에 스키타이인들이 메디아의 동맹으로 언급되기 때문이다.[8]
5. 아시리아 제국과의 전쟁
키악사레스는 스키타이의 공격으로 멸망했던 메디아를 재건하고 왕위에 오른 뒤, 빠르게 영토를 회복했다. 이후 아시리아 제국을 다시 공격하여 수도 니네베를 점령하고 완전히 멸망시켰으며, 과거 아시리아 영토 대부분을 합병했다. 기원전 609년에는 아르메니아 고원에 위치한 우라르투 왕국의 수도를 공격했는데, 이는 바빌로니아와의 동맹을 통해 수행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바빌로니아 기록에는 기원전 608년 메디아-바빌로니아 연합군이 우라르투의 비트 하누니아를 공격했다는 내용이 언급되어 있다.[1] 이 침략으로 우라르투는 멸망하지 않았지만, 메디아의 속국이 되었다.[2] 메디아 병력은 기원전 605년 카르케미시 전투에서 아시리아-이집트 연합군에 맞선 바빌로니아의 승리에 기여했을 수 있으며, 이후 메디아군은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진 바빌로니아 원정에는 참여하지 않았다.[3]
5. 1. 바빌로니아와의 동맹
기원전 614년, 키악사레스는 아버지의 유지를 이어 아시리아 토벌에 나섰다. 프라오르테스와는 달리 키악사레스는 직접 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로 향하지 않고, 7월 12일에 디야라 강변의 아시리아 지방 거점 도시 타르비슈를 공략한 후, 거기에서 대공세에 나설 참이었다. 마침 신 바빌로니아를 건국한 나보폴라사르가 남쪽에서 아시리아에 대한 공세에 나서 아시리아의 패권은 흔들리고 있었다.키악사레스는 니네베를 공략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아시리아에는 스키타이의 원군이 도착했다. 메디아 군은 니네베를 포기하고 아슈르로 공격 방향을 돌려 이를 공략·약탈했으며(), 이어서 키악사레스는 나보폴라사르와의 회견에 임했다. 메디아와 바빌로니아는 동맹을 체결했고, 키악사레스의 딸 Amytis of Media|아뮤티스영어와 나보폴라사르의 황태자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5. 2. 니네베 함락
기원전 614년, 키악사레스는 아버지의 유지를 이어 아시리아 토벌에 나섰다. 프라오르테스와는 달리 키악사레스는 직접 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로 향하지 않고, 7월 12일에 디야라 강변의 아시리아 지방 거점 도시 타르비슈를 공략한 후, 거기에서 대공세에 나설 참이었다. 마침 신 바빌로니아를 건국한 나보폴라사르가 남쪽에서 아시리아에 대한 공세에 나서 아시리아의 패권은 흔들리고 있었다.키악사레스는 니네베를 공략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아시리아에는 스키타이의 원군이 도착했다. 메디아 군은 니네베를 포기하고 아슈르로 공격 방향을 돌려 이를 공략·약탈했으며(), 이어서 키악사레스는 나보폴라사르와의 회견에 임했다. 메디아와 바빌로니아는 동맹을 체결했고, 키악사레스의 딸 Amytis of Media|아뮤티스영어와 나보폴라사르의 황태자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키악사레스는 스키타이인에 맞서 이를 격파했다. 이어서 메디아 군과 바빌로니아 군은 다시 합류하여 기원전 612년 5월 30일, 니네베 공격이 시작되어 7월 28일에 함락되었다(니네베 전투). 나보폴라사르에 따르면 "니네베는 완전히 파괴되어 단시간 안에 폐허가 되었다"고 한다. 9월 7일, 메디아 군은 개선했다. 아시리아 왕 신-샤르-이슈쿤은 니네베 함락 시에 살해되었다.[4]
5. 3. 아시리아 멸망
기원전 614년, 키악사레스는 아버지 프라오르테스의 유지를 이어 아시리아 토벌에 나섰다. 키악사레스는 니네베로 바로 향하지 않고, 7월 12일에 디야라 강변의 아시리아 거점 도시 타르비슈를 공략했다. 신 바빌로니아의 나보폴라사르가 남쪽에서 아시리아를 공격하여 아시리아의 패권이 흔들리고 있었다.키악사레스는 니네베 공략에 실패하고, 스키타이 원군이 아시리아에 도착하자 아슈르로 공격 방향을 돌려 공략·약탈했다(). 이후 키악사레스는 나보폴라사르와 회견하여 메디아와 바빌로니아는 동맹을 맺었다. 키악사레스의 딸 와 나보폴라사르의 아들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키악사레스는 스키타이인을 격파하고, 메디아 군과 바빌로니아 군은 연합하여 기원전 612년 5월 30일 니네베 공격을 시작, 7월 28일에 함락했다(니네베 전투). 나보폴라사르는 "니네베는 완전히 파괴되어 단시간 안에 폐허가 되었다"고 기록했다. 9월 7일, 메디아 군은 개선했다. 아시리아 왕 신-샤르-이슈쿤은 이때 살해되었다. 기원전 610년, 이집트의 지원을 받은 아슈르-우발리트 2세가 있는 하란을 공략하여 아시리아 제국을 완전히 멸망시켰다().
6. 우라르투 정복
기원전 609년, 메디아는 아르메니아 고원에 위치한 우라르투 왕국의 수도를 공격했다. 이 공격은 바빌로니아와 동맹을 맺고 수행되었을 가능성이 있는데, 바빌로니아 기록에는 기원전 608년 메디아-바빌로니아 연합군이 우라르투의 비트 하누니아를 공격한 사실이 언급되어 있다.[1] 분열된 스키타이 집단이 메디아에 합류하여 우라르투 정복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높다.[2] 이 침략으로 우라르투가 멸망하지는 않았지만, 새로운 메디아의 속국이 되었다.[3] 메디아 병력은 기원전 605년 카르케미시 전투에서 아시리아-이집트 연합군에 맞선 바빌로니아의 최종 승리를 도왔을 수 있으며, 이때 메디아와 바빌로니아 원정군과의 군사적 협력이 종료되었고, 메디아군은 이후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진 바빌로니아 원정에는 참여하지 않았다.[4]
7. 리디아와의 전쟁
아시리아 제국이 멸망한 후, 대부분의 스키타이족들은 기원전 600년대에 서아시아에서 폰토스 스텝으로 추방되었다.[15] 메디아와 바빌로니아 사이의 관계는 590년대에 일시적으로 악화되었지만, 둘 사이에는 적대 행위가 일어나지 않았다.[16]
메디아와 또 다른 스키타이 집단 사이에 전쟁이 발발했다. 이 스키타이인들은 메디아 통치 하의 자캅카스를 떠나 리디아 왕국으로 도망쳤다. 리디아 왕 알리아테스가 스키타이 난민을 넘겨달라는 키악사레스의 요구를 거부하자, 기원전 590년에 메디아와 리디아 제국 사이에 전쟁이 발발했다.
이 전쟁은 5년 동안 지속되었으며, 일식 전투(할리스 전투)에서 양측은 일식을 전쟁을 종식시키라는 징조로 해석하여 종전하였다.
7. 1. 일식 전투 (할리스 전투)
기원전 590년, 메디아와 리디아 제국 사이에 전쟁이 발발했다. 이 전쟁은 스키타이족 출신 망명자가 키악사레스에게 모욕을 당하자 그의 아들을 살해하고 리디아로 망명한 사건이 발단이 되었다. 키악사레스는 리디아의 왕 알리아테스에게 망명자를 넘겨줄 것을 요구했지만, 알리아테스는 이를 거부했다.전쟁은 5년 동안 지속되었으며, 기원전 585년 5월 28일에 탈레스의 일식으로 알려진 일식이 발생하면서 리디아군과 메디아군 사이에 전투가 중단되었다. 이 전투는 일식 전투로 알려지게 되었다. 양측은 일식을 전쟁을 종식시키라는 징조로 해석했다. 바빌론과 킬리키아 왕국의 왕들이 평화 조약의 중재자 역할을 했으며, 이 조약은 키악사레스의 아들 아스티아게스와 알리아테스의 딸 아리에니스의 결혼으로 마무리되었다.[15][16][17]
리디아와 메디아 사이의 국경은 할리스 강으로 설정되었다는 것이 전통적인 설명이지만, 이는 그리스인들이 할리스 강에 부여한 상징적인 역할에 기초한 소급 서술 구성으로 보인다.[15][16][17]
8. 파르티아와의 전쟁
키악사레스는 통치 기간 중 어느 시점에 메디아의 바로 동쪽에 위치한 히르카니아와 파르티아를 정복했다.[11]
디오도로스 시쿨루스에 따르면, 파르티아인들은 한때 키악사레스에 반란을 일으켰고, 그들의 국가와 수도를 사카족[6] 또는 다해족에게 맡겼다. 그 후 메디아인과 사카족 사이에 전쟁이 발발했는데, 사카족은 여왕 자리나이아가 이끌었다. 자리나이아는 여러 도시를 건설했다.[6] 디오도로스에 따르면 자리나이아는 사카족 왕 키드라에우스의 여동생이자, 처음에는 그의 아내였지만, 그가 죽은 후 파르티아 왕 마르마레스와 결혼했다. 메디아와의 전쟁 중 자리나이아는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키악사레스의 사위 스트린가에우스에게 사로잡혔는데, 스트린가에우스는 그녀의 간청을 듣고 그녀를 살려주었다. 이후 마르마레스가 스트린가에우스를 사로잡자 자리나이아는 마르마레스를 죽이고 스트린가에우스를 구출했다.[12] 이 전쟁의 끝에 파르티아인들은 메디아의 지배를 받아들였고,[6] 메디아인과 사카족 사이에 평화가 맺어졌다.[13]
디오도로스의 설명은 파르티아 지역이 서쪽의 메디아인과 카스피해 및 아랄해 지역의 사카 유목민의 영향을 받았음을 시사한다.[6]
9. 죽음
키악사레스는 기원전 585년 일식 전투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아들 아스티아게스가 뒤를 이었다. 러시아 역사학자 이고르 디아코노프는 현재 이라크 쿠르디스탄 술라이마니야 산맥에 위치한 Qyzqapan이라는 곳이 키악사레스의 묘소일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했다.
10. 유산
다리우스 1세가 아케메네스 제국의 권력을 장악한 후, 키악사레스의 유산을 주장하며 반란이 일어났다. 이러한 반란이 진압된 후, 다리우스는 베히스툰 비문에서 두 건의 반란을 언급했다.
"다른 하나는 메디아인 프라오르테스였다. 그는 거짓으로 '나는 키악사레스 왕조의 크샤스리타이다.'라고 말하며 메디아를 반란시켰다. 또 다른 하나는 사가르티아인 트리탄타에크메스였다. 그는 거짓으로 '나는 사가르티아의 왕이며 키악사레스 왕조 출신이다.'라고 말하며 사가르티아를 반란시켰다."[18]
키악사레스의 통치와 관련하여 깊은 논쟁을 불러일으킨 주제 중 하나는 조로아스터교이다. 예언자 조로아스터가 언제 살았는지, 그리고 아베스타가 어느 시대에 속하는지에 대한 질문은 여전히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1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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