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르두리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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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르두리 2세는 우라르투 왕국의 왕으로, 아버지 아르기슈티 1세를 이어 우라르투의 영토를 확장했다. 그는 북동쪽 트란스코카서스 지역과 시리아 북부 지역을 정복하여 우라르투의 세력을 최대 규모로 만들었지만, 아시리아의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의 등장으로 인해 우라르투는 쇠퇴하기 시작했다. 기원전 735년 유프라테스강 서안 전투에서 패배한 후 수도 투슈파로 도망쳤으며, 아시리아에 의해 살해당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의 뒤는 아들 루사 1세가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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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사 2세는 우라르투의 왕으로, 쇠퇴해가는 나라를 부흥시키기 위해 여러 활동을 펼쳤으나 쇠퇴를 막지 못했으며, 그의 사후 왕위 계승 논란이 있었다. - 우라르투의 왕 - 사르두리 1세
사르두리 1세는 우라르투의 왕으로, 아라마를 계승하여 왕위에 올라 울라르투를 최초로 통일 국가로 이끌었으며, 수도를 투쉬파에 정하고 군대를 재편성하는 등 왕국의 기틀을 다지고 우라르투어를 쐐기 문자로 기록하기 시작했다. - 기원전 8세기 통치자 - 센나케립
센나케립은 신아시리아 제국의 왕으로, 즉위 후 바빌로니아와 레반트 지역에서 전쟁을 치렀고, 수도를 니네베로 옮겨 개조했으며, 아들들에게 살해당했다. - 기원전 8세기 통치자 - 나보나사르
나보나사르는 기원전 747년부터 기원전 734년까지 바빌로니아를 통치한 왕으로, 바빌론 달력 개혁을 단행하고 아시리아의 침공에도 경제 활동을 회복시켰다.
사르두리 2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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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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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 칭호 | 우라르투 왕 |
재위 기간 | 기원전 764년–기원전 735년 |
전임자 | 아르기슈티 1세 |
후임자 | 루사 1세 |
배우자 | 알려진 바 없음 |
자녀 | 루사 1세 |
아버지 | 아르기슈티 1세 |
어머니 | 바게나 |
2. 즉위와 계승
사르두리 2세는 우라르투 왕 아르기슈티 1세의 아들로, 아버지를 이어 왕위에 올라 확장 정책을 계승했다.[1] 사르두리 2세의 왕위 계승 과정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사르두리 3세'라는 왕이 기록되어 있으며[1], 사르두리 2세의 아들인 루사 1세가 왕위를 이은 것으로 추정되지만, 확실한 증거는 부족하여 논쟁의 여지가 있다.[2]
사르두리 2세는 아버지 아르기슈티 1세의 확장 정책을 계승하여, 콜키스 북부 지역, 멜리드, 유프라테스강 계곡의 쿰무흐를 정복하여 우라르투의 영토를 확장했다.[3] 또한 "바빌루"라고 불리는 지역으로 원정을 떠났는데, 이곳은 이전 바빌론 제국의 일부였던 카시트 지역으로 추정된다.[3]
3. 군사적 업적
사르두리 2세는 자신의 힘에 매우 자신감을 가지고 투슈파(오늘날의 반)에 거대한 벽을 세우고 다음과 같은 비문을 새겼다.
> 웅대한 왕, 강대한 왕, 우주의 왕, 나이리 땅의 왕, 그와 동등한 자가 없는 왕, 경이로운 목자, 전투를 두려워하지 않는 왕, 그의 권위에 굴복하지 않는 자들을 굴복시킨 왕.
아시리아와의 대립에서, 우라르투는 아시리아의 철과 말의 공급원인 아나톨리아 반도와의 연락로를 장악하고 있었다. 사르두리는 이 정세를 틈타 북시리아의 소국을 복속시켜, 그 세력권은 우라르투 역사상 최대가 되었다.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가 기원전 745년경 아시리아 왕으로 즉위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티글라트-필레세르는 오리엔트에서의 패권을 위협하는 우라르투에 무력으로 대항하기로 결의하고 군제 개혁에 나섰다. 기원전 743년, 쿰무흐 인근 전투에서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의 아시리아군은 사르두리와 반아시리아 연합군을 격파하고 우라르투군을 유프라테스강 너머로 몰아냈다.[4] 기원전 735년, 우라르투군은 아시리아군과 유프라테스강 서안에서 결전을 벌였으나 패배했고, 사르두리는 수도 투슈파(반)로 도망쳤다.
이 패전으로 우라르투는 국경 지대를 빼앗겼고, 우라르투에서 이탈하는 총독도 나타났으며, 사르두리는 아시리아군에게 살해당했다는 설도 있다. 사르두리의 치세에 우라르투 왕국은 절정기에서 쇠퇴기로 전환했다.
3. 1. 초기 원정
요셉 오르벨리가 1912년 반에서 발견한 사르두리 2세의 비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 I went to the land of the Mannai, conquered the country, burned the cities, ravaged the countryside, and deported the inhabitants to Biaina. In the same year, my army went to Eriakhini (or Eriakh) in the Transcaucasus, north of Mount Ararat, conquered the country, set fire to the city, and ravaged the countryside.영어
: In the same year, for the third time, I went to Eriakhini, burned the city, ravaged the countryside, and deported the inhabitants to Biaina. I built a fortress in Eriakhini and annexed the country. I praised the god Khaldi. I captured prisoners: 6436 men, 15,553 women. In all, I took 21,989 people [from their country], some were killed, some were captured alive. 1613 horses, 115 camels, 16,529 cattle, 37,685 sheep [were taken].영어
사르두리 2세는 비문을 통해 만나이를 정복하고 도시를 불태우고 약탈했으며, 같은 해에 아라라트 산 북쪽 자캅카스의 에리아히니(또는 에리아흐)를 정복하고 도시를 불태웠으며, 주민들을 비아이나로 추방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같은 해에 세 번째로 에리아히니를 공격하여 도시를 불태우고 약탈했으며, 주민들을 비아이나로 추방하고 에리아히니에 요새를 건설하여 그 나라를 병합했다는 내용도 기록되어 있다. 비문에는 포로로 잡은 사람(남자 6436명, 여자 15,553명, 총 21,989명)과 빼앗은 가축(말 1613마리, 낙타 115마리, 소 16,529마리, 양 37,685마리)의 수도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3. 2. 북방 및 동방 원정
요셉 오르벨리가 1912년 반에서 발견한 사르두리 2세의 비문에 따르면, 사르두리 2세는 만나이를 정복하고 도시를 불태웠으며 주민들을 비아이나로 추방했다. 같은 해에 군대를 아라라트 산 북쪽 자캅카스의 에리아히니(또는 에리아흐)로 보내 그곳을 정복하고 도시와 시골을 약탈했다. 이러한 정복 활동은 반복적으로 이루어졌다.[1]
사르두리 2세는 에리아히니에 요새를 건설하고 그 나라를 병합했으며, 포로로 남자 6436명, 여자 15,553명, 총 21,989명을 잡아갔다.[1] 일부는 죽이고 일부는 생포했으며, 말 1613마리, 낙타 115마리, 소 16,529마리, 양 37,685마리를 빼앗았다.[1]
우라르투 왕 아르기슈티 1세의 아들인 사르두리 2세는 아버지의 확장 정책을 계승했다.[2] 북동쪽 트란스코카서스 방면에서 비아이니리국 등의 저항을 받았지만, 군사적 재능으로 이를 격파했다.[2]
3. 3. 아시리아와의 대립
사르두리 2세는 아버지 아르기슈티 1세의 확장 정책을 계승하여 북쪽의 콜키스, 유프라테스강 계곡의 쿰무흐와 멜리드를 정복했다. 또한, 이전 바빌론 제국의 일부였던 카시트 지역으로 추정되는 "바빌루" 지역으로 원정을 떠나기도 했다.[3]
그러나 남쪽의 숙적 아시리아와의 대립은 계속되었다. 우라르투는 아시리아의 철과 말 공급원인 아나톨리아 반도와의 연락로를 장악하고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북시리아의 소국들을 복속시켜 우라르투 역사상 최대의 세력권을 확보했다.
이러한 상황은 기원전 745년경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가 아시리아 왕으로 즉위하면서 전환점을 맞이했다.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는 오리엔트에서의 패권을 위협하는 우라르투에 무력으로 대항하기로 결의하고 군제 개혁을 단행했다. 그는 교통의 요충지인 북시리아에 출병하여 우라르투 세력을 몰아내려 했다.
기원전 743년, 쿰무흐 인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가 이끄는 아시리아군은 사르두리 2세와 그의 반(反) 아시리아 연합군을 격파하고 우라르투군을 유프라테스강 너머로 몰아냈다.[4] 기원전 735년에는 우라르투군이 아시리아군과 유프라테스강 서안에서 결전을 벌였으나 패배했고, 사르두리 2세는 수도 투슈파(반)로 도망쳤다. 아시리아군은 투슈파를 공격했고, 이 패전으로 우라르투는 국경 지대를 빼앗기고, 우라르투에서 이탈하는 총독도 나타났다. 사르두리 2세는 아시리아군에게 살해당했다는 설도 있다.
사르두리 2세는 자신의 힘에 대한 자신감을 과시하며 투슈파에 거대한 벽을 세우고 다음과 같은 비문을 새겼다.
> 웅대한 왕, 강대한 왕, 우주의 왕, 나이리 땅의 왕, 그와 동등한 자가 없는 왕, 경이로운 목자, 전투를 두려워하지 않는 왕, 그의 권위에 굴복하지 않는 자들을 굴복시킨 왕.
사르두리 2세의 치세 동안 우라르투 왕국은 절정기에서 쇠퇴기로 전환했으며, 그의 뒤는 아들 루사 1세가 이었다.[2]
4. 아시리아와의 전쟁과 쇠퇴
우라르투 왕 아르기슈티 1세의 아들인 사르두리 2세는 아버지의 확장 정책을 계승했다. 북동쪽 트란스코카서스 방면에서는 비아이니리국 등의 저항을 받았지만, 뛰어난 군사적 재능으로 이를 격파했다. 남쪽의 숙적 아시리아와는 대립이 계속되었는데, 아시리아의 철과 말 공급원인 아나톨리아 반도와의 연락로를 우라르투가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르두리 2세는 이 정세를 틈타 북시리아의 소국을 복속시켜, 그 세력권은 우라르투 역사상 최대가 되었다.
이후 아시리아에 국경 지대를 빼앗기는 등 쇠퇴기에 접어들었으며, 사르두리 2세의 뒤는 아들 루사 1세가 이었다.
4. 1.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의 등장
기원전 745년경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가 아시리아 왕으로 즉위하면서 전환점을 맞았다. 선왕 아슈르-단 3세나 아슈르-니라리 5세와는 대조적으로, 티글라트-필레세르는 오리엔트에서의 패권을 위협하는 우라르투의 위협에 무력으로 대항하기로 결의하고 군제 개혁에 나섰다.[4] 그는 교통의 요충지인 북시리아에 출병하여 우라르투 세력을 몰아내려 했다. 우라르투에 속했던 북시리아의 아르파드는 3년에 걸쳐 아시리아군의 공격을 막았지만, 기원전 735년에 지원 온 우라르투군은 아시리아군과 유프라테스강 서안에서 결전을 벌여 패배했고, 사르두리 2세 자신은 수도 투슈파(반)로 도망쳤다. 아시리아군은 이를 추격하여 투슈파를 공격했다고 한다.[4]4. 2. 아르파드 공방전과 유프라테스 전투
사르두리 2세는 콜키스 북부 지역, 멜리드, 유프라테스강 계곡의 쿰무흐를 정복하여 우라르투의 영토를 넓혔다. 우라르투 자료에는 "바빌루" 지역에 대한 원정도 언급되어 있는데, 이곳은 이전 바빌론 제국의 일부였던 카시트 지역으로 추정된다.[3]그러나 기원전 745년경,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가 아시리아 왕으로 즉위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는 오리엔트에서의 패권을 위협하는 우라르투에 맞서 군사력을 강화했다. 그는 북시리아에 출병하여 우라르투 세력을 몰아내려 했다.
우라르투에 속했던 북시리아의 아르파드는 3년간 아시리아군의 공격을 막아냈지만, 기원전 743년, 쿰무흐 근처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가 이끄는 아시리아군은 사르두리 2세와 그의 반(反)아시리아 연합군을 격파하고 우라르투군을 유프라테스강 너머로 몰아냈다.[4]
기원전 735년에는 우라르투군이 아시리아군과 유프라테스강 서안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패배했고, 사르두리 2세는 수도 투슈파(반)로 도망쳤다. 아시리아군은 투슈파까지 공격했다고 한다.
이 패배로 우라르투는 국경 지대를 빼앗겼고, 일부 총독들이 우라르투에서 이탈했다. 사르두리 2세는 아시리아군에게 살해당했다는 설도 있다. 사르두리 2세의 통치 기간 동안 우라르투 왕국은 전성기에서 쇠퇴기로 접어들었다.
4. 3. 우라르투의 쇠퇴
사르두리 2세의 치세에 우라르투 왕국은 절정기에서 쇠퇴기로 전환했다. 사르두리 2세는 콜키스 북부 지역, 멜리드와 유프라테스강 계곡의 쿰무흐를 정복하여 우라르투 영토를 확장했지만, 기원전 745년경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가 아시리아 왕으로 즉위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3][4]티글라트-필레세르 3세는 오리엔트에서의 패권을 위협하는 우라르투에 무력으로 대항하기로 결의하고 군제 개혁에 나섰다. 그는 북시리아에 출병하여 우라르투 세력 배제에 힘썼다. 기원전 735년, 우라르투군은 아시리아군과 유프라테스강 서안에서 결전을 벌여 패배했고, 사르두리 2세는 수도 투슈파(반)로 도망쳤다. 아시리아군은 투슈파를 공격했고, 이 패전으로 아시리아에 국경 지대를 빼앗기고 우라르투에서 이반하는 총독도 나타났다. 사르두리 2세는 아시리아군에게 살해당했다는 설도 있다.[4]
사르두리 2세는 자신의 힘에 매우 자신감을 보여 투슈파에 다음과 같은 비문이 새겨진 거대한 벽을 세웠다.
> 웅대한 왕, 강대한 왕, 우주의 왕, 나이리 땅의 왕, 그와 동등한 자가 없는 왕, 경이로운 목자, 전투를 두려워하지 않는 왕, 그의 권위에 굴복하지 않는 자들을 굴복시킨 왕.
사르두리 2세의 계승에 대해서는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사르두리 3세라는 왕이 기록되어 있어[1], 그의 아들인 루사 1세가 왕위를 계승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확실한 증거가 부족하여 논쟁의 여지가 있다.[2]
5. 건설 업적
사르두리 2세는 투슈파(오늘날의 반)에 거대한 벽을 세우고 자신의 힘을 과시했다.[4]
5. 1. 투슈파 성벽 비문
사르두리 2세는 자신의 힘에 매우 자신감을 보여 투슈파(오늘날의 반)에 다음과 같은 비문이 새겨진 거대한 벽을 세웠다.: NA4.DU8.A.MEŠ ḪI.A ša A.NA.KU a-mur-ú-ni a-šu-ši-ni ša KUR.BI.A.NI.MEŠ-ni i-na ŠU.2-ia ú-za-iz-zu-ni a-na LUGAL-ti PAP-hi-ia a-gu-nu-ni|아카드어 원문 표기akk
: LUGAL GAL LUGAL dan-nu LUGAL KUR.KUR LUGAL KUR (나이리) KIŠ LUGAL la-a ša-na-an-nu mu-tir gim-ri a-šar taḫ-zu la a-du-ú LUGAL mu-še-me-e EN.NAM.MEŠ ša a-na qa-ti-šú la ma-ag-ru-u-ni|아카드어 원문 표기akk
: 웅대한 왕, 강대한 왕, 우주의 왕, 나이리 땅의 왕, 그와 동등한 자가 없는 왕, 경이로운 목자, 전투를 두려워하지 않는 왕, 그의 권위에 굴복하지 않는 자들을 굴복시킨 왕.
5. 2. 카야르데레성
사르두리 2세는 아들인 루사 1세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여러 이론이 존재하며 확실한 증거가 부족하여 논쟁의 여지가 있다.[2] 카야르데레성은 우라르투 왕의 통치 기간 동안 건설된 중요한 검문소 중 하나이다.참조
[1]
논문
Could Rusa son of Erimena have been king of Urartu during Sargon's eight campaign?
2012
[2]
간행물
Sarduri II – One of the most unfortunate rulers of the 8th century B.C.E
https://www.academia[...]
Jagiellonian University
2014
[3]
서적
The Cambridge Ancient History
[4]
서적
The Ancient Near East: History, Society and Economy
Routledge
2014
[5]
백과사전
ウラルトゥ王国
平凡社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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