룩셈부르크 공녀 마리아델라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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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룩셈부르크 공녀 마리아델라이드는 룩셈부르크의 공주로, 룩셈부르크 대공 샤를로트와 파르마 공작 펠릭스의 딸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가족과 함께 망명 생활을 했으며, 영국과 캐나다에서 교육을 받았다. 1958년 카를 요제프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 백작과 결혼하여 3남 1녀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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룩셈부르크 공녀 마리아델라이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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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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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위 | 카를 요제프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 백작부인 |
출생일 | 1924년 5월 21일 |
사망일 | 2007년 2월 28일 |
출생지 | 룩셈부르크, 콜마르-베르크, 베르크 성 |
사망지 | 룩셈부르크, 메르슈, 피슈바흐 |
배우자 | 카를 요제프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 백작 (1958년 결혼) |
자녀 | 안드레아스 백작 펠릭스 백작 하인리히 백작 샤를로트, 크리스토프 요하네스 폰 메란 백작부인 |
가문 | 부르봉-파르마 가문 |
가족 관계 | |
아버지 | 펠릭스 드 부르봉-파르마 |
어머니 | 샤를로트 폰 룩셈부르크 여대공 |
2. 생애
룩셈부르크 공녀 마리아 아델라이드는 룩셈부르크 여대공 샤를로트와 부르봉-파르마의 펠릭스 공자 사이에서 셋째이자 차녀로 태어났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독일의 침공을 피해 가족과 함께 망명길에 올랐으며, 전쟁 기간 동안 영국과 캐나다 등지에서 교육을 받았다. 전쟁이 끝난 후 1958년 백작 카를 요제프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와 결혼하여 슬하에 3남 1녀를 두었다.
2. 1. 유년 시절 및 교육
룩셈부르크 공녀 마리아 아델라이드는 룩셈부르크 베르그 성에서 룩셈부르크 여대공 샤를로트와 그의 남편인 펠릭스 공자 사이에서 셋째이자 차녀로 태어났다.제2차 세계 대전 중 1940년 5월 10일 독일의 침공을 받자, 룩셈부르크 대공가는 망명길에 올랐다. 가족은 포르투갈을 거쳐 미국으로 피난했으며, 이후 마리아 아델라이드 공녀는 영국과 캐나다에서 지냈다.
전쟁 중 망명 기간 동안 언니인 엘리자베트 공주와 함께 영국 서리 주에 있는 가톨릭계 여자 기숙학교인 월딩엄 학교와 캐나다 퀘벡 시 근처의 Collège Jésus-Marie de Sillery|콜레주 제쥐-마리 드 실레리fra에서 공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