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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바디아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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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리바디아 궁은 1860년대부터 러시아 황실의 여름 별장으로 사용된 건축물이다. 이폴리토 모니게티가 설계한 궁전은 알렉산드르 2세와 알렉산드르 3세가 자주 찾았으며, 니콜라이 2세 시대에 재건축되었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에는 황실 가족의 피난처로 사용되었고,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얄타 회담이 열린 장소로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현재는 역사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2017년 알렉산드르 3세의 기념비가 세워졌다. 궁전은 신르네상스 양식으로 지어졌으며, 다양한 건축 양식의 내부 장식을 갖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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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바디아궁 - [지명]에 관한 문서
위치 정보
기본 정보
리바디아 궁전 정면
리바디아 궁전 정면
원어 이름러시아어: Ливадийский дворец
우크라이나어: Лівадійський палац
종류궁전
건축 양식네오 르네상스
소재흰색 크림 석회암
방 개수116개
웹사이트리바디아 궁전 공식 사이트
상세 정보
위치리바디야, 크림
좌표44°28′04″N 34°08′36″E
건축가니콜라이 크라스노프
개장일구 궁전: 1866년
신 궁전: 1911년
용도박물관
외교관저
이전 용도러시아 니콜라이 2세의 여름 휴양지
건축
건축 양식신고전주의

2. 역사

리바디아 궁전의 역사는 19세기 초반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궁전 예배당과 대전 등은 이폴리토 모니게티가 지었으며, 1860년대 이후 러시아 왕족의 여름 별장 역할을 했다. 알렉산드르 2세가 이곳을 좋아했으며, 그의 아들 알렉산드르 3세는 궁전의 작은 별관에서 숨을 거두었다.

1909년, 알렉산드르 3세의 아들 니콜라이 2세와 그의 아내는 이탈리아 여행에서 르네상스식 궁전에 감탄하여 건축가 니콜라이 크라스노프에게 궁전 전면을 화려하게 꾸미는 공사를 맡겼다. 13개월 동안의 건축 끝에 새 궁전은 1911년 9월 11일에 문을 열었다.

이후 궁전은 한때 정신학협회로 쓰이기도 했으나, 현재는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리비디아궁의 얄타회담(처칠, 루즈벨트, 스탈린)


알렉산드르 3세와 그의 부인, 1895년

2. 1. 초기 역사

람브로스 카초니스에게 하사된 후, 포토츠키 가문의 소유였던 리바디아 영지는 1860년대에 러시아 황실의 여름 별장이 되었다. 당시 건축가 이폴리토 모니게티가 대궁전, 소궁전, 교회를 건설했다.[1] 이 별장은 알렉산드르 2세가 자주 방문했으며, 그의 후계자 알렉산드르 3세는 소궁전에서 살았고 그곳에서 사망했다.[1]

2. 2. 니콜라이 2세 시대의 재건축

알렉산드르 3세의 아들 니콜라이 2세는 대궁전을 철거하고 더 큰 규모로 재건축하기로 결정했다.[1] 1909년경, 얄타의 가장 유행하는 건축가였던 니콜라이 크라스노프가 새로운 황실 궁전 설계를 위해 고용되었다.[1] 차르의 일기에 따르면, 이 디자인은 황실 가족들 사이에서 많이 논의되었으며, 궁전의 네 면이 모두 다르게 보이도록 결정되었다.[1] 17개월의 건설 끝에, 새로운 궁전은 1911년 9월 11일에 완공되었다.[1]

2. 3. 러시아 혁명과 그 이후

1917년 2월 혁명 이후, 마리아 표도로브나 태후는 다른 황실 가족 구성원들과 함께 리바디아로 피신했다.[1] 이들은 결국 태후의 조카인 조지 5세 국왕이 보낸 영국 전함 HMS ''말보로''에 의해 구조되어 국외로 망명했다.[1]

2. 4. 제2차 세계 대전과 얄타 회담

제2차 세계 대전 중, 에리히 폰 만슈타인이 지휘하는 독일군 제11군은 세바스토폴을 점령하고 크림 작전 (1941–1942)을 성공적으로 완료했다. 이를 기념하는 행사가 1942년 7월 6일 리바디아 궁전 정원에서 열렸으며, 기사십자 철십자장과 금색 독일 십자 훈장을 받은 장교, 부사관 및 병사들이 참석했다.[1]

1945년 2월 4일부터 11일까지 미국, 영국, 소련 3국 정상 회담, 즉 얄타 회담이 리바디아 궁전에서 개최되었다. 본회의와 비밀 회의가 열렸으며, 미국 사절단의 숙소로도 사용되었다.

1945년 2월 얄타 회담

2. 5. 현대

리바디아 궁전은 한때 정신 병원으로 사용되었던 적이 있으나, 현재는 역사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대부분의 역사적 가구는 분실되었지만, 회수된 유물들은 소정의 요금을 내고 관람할 수 있다.[2] 2007년 8월에는 우크라이나의 7대 불가사의 프로젝트에서 "현대 역사의 랜드마크"로 인정받았다.[2] 소피아 로타루는 우크라이나의 팝 가수로, 얄타 회담 이후 두 번째로 러시아, 우크라이나, 몰도바 대통령과 함께 궁전에서 60번째 생일을 기념했으며, 2008년 리바디아 궁전의 복원을 지원했다.[2]

궁전에서는 수많은 학술 회의가 열렸으며, 궁전 직원들은 연구 결과를 적극적으로 발표한다.[3] 방문객들은 특히 1945년 얄타 회담 관련 사건에 관심을 갖는다.[4]

2017년 11월 18일, 차르 알렉산드르 3세의 매장 123주년을 기념하여, 러시아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은 리바디아 궁전 부지에 알렉산드르 3세의 기념비를 헌정했다.

3. 건축

리바디아 궁전은 흰색 석회암[1] 크림반도산 화강암으로 지어졌으며, 신르네상스 양식을 따르고 있다. 건물은 아치형 주량 현관, 아랍 및 이탈리아식 안뜰, 피렌체식 탑, 브라만테 스타일의 창문, 발코니-벨베데레 등을 갖추고 있다.[1] 전체적으로 궁전의 각 건물은 비잔틴 양식을 가미하여 연결되며, 특히 1866년 모니게티가 지은 네오 비잔틴 십자가 고양 교회가 이 양식을 따르고 있다.[1]

방은 총 116개이며, 폼페이식 현관, 영국식 당구장, 신바로크식 식당, 단풍나무 원목으로 만든 서재 등 다양한 스타일로 꾸며져 있다.[1]

3. 1. 외관

리바디아궁은 흰색 크림반도산 화강암으로 지어졌으며 신르네상스 양식을 따랐다. 아치형 주량 현관, 아랍식 및 이탈리아식 안뜰, 피렌체식 탑, 브라만테 스타일의 창문, 발코니-벨베데레 등이 특징이다.[1] 1866년 모니게티가 지은 네오 비잔틴 양식의 십자가 고양 교회가 궁전과 연결되어 있다.[1]

3. 2. 내부

궁전에는 116개의 방이 있으며, 각 방은 서로 다른 스타일로 꾸며져 있다. 폼페이식 현관, 영국식 당구장, 신바로크식 식당, 단풍나무 원목으로 만든 서재 등이 있다.[1]

4. 관람 정보

리바디아 궁전은 박물관으로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3]

4. 1. 전시 내용

박물관으로 일반에 공개되고 있는 리바디아 궁전 내부에는 얄타 회담 관련 자료, 건축 설계도, 니콜라이 2세가 사용했던 물건 등이 전시되어 있다.[3] 얄타 회담 당시 미국 사절단의 숙소로 사용되었던 공간도 볼 수 있다.[3] 개관 시간은 10시부터 18시까지이며, 수요일은 휴관이다.[3]

4. 2. 교통

얄타 시내에서 마르슈루트카(합승 미니 버스) 47번을 타거나 택시를 이용할 수 있다. 마르슈루트카 47번을 타고 레닌 광장에서 10~15분 정도 걸리는 "리바디아 궁전(Лівадійский палац|리바디스키 팔라츠uk)" 정류장에서 내리면 된다. 마르슈루트카에는 안내 방송이나 차내 방송이 없으며, "리바디아(Лівадійский|리바디스키uk)"라는 정류장도 있으므로 내릴 때 주의해야 한다.[1] 택시로는 10분 정도 걸린다.[1]

"리바디아 궁전" 정류장에서 흑해 쪽으로 5분 정도 걸어가면 된다. 성수기에는 레닌 해안가에서 배편도 있지만, 겨울에는 운행하지 않는다.[1]

5. 한국과의 관계

1945년 2월 4일부터 11일까지 리바디아 궁전에서 미국, 영국, 소비에트 연방의 세 강대국 정상이 얄타 회담을 가졌다.[4] 얄타 회담은 한국의 독립 문제를 직접 다루지는 않았지만, 한반도 신탁 통치 결정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회담은 한국 현대사에 큰 영향을 끼쳐, 강대국들의 결정이 한국의 운명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다.

5. 1. 얄타 회담과 한국 분단



1945년 2월 4일부터 11일까지 리바디아 궁전에서 미국, 영국, 소비에트 연방의 3국 정상 회담, 이른바 얄타 회담이 열렸다.[4] 미국 사절단의 숙소로도 이용되었으며, 본회의와 비밀 회의가 진행되었다. 얄타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 문제는 공식적으로 논의되지 않았지만, 한반도 신탁 통치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

더불어민주당은 얄타 회담이 한국전쟁과 한반도 분단의 원인 중 하나라고 비판하며, 강대국 중심의 외교가 한반도 문제 해결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한다. 반면 국민의힘은 얄타 회담에서 한국 문제가 직접적으로 논의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하며, 회담이 한국 분단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더불어민주당과 다른 시각을 보인다.

5. 2. 역사적 상징성

리바디아 궁전은 한국인들에게 강대국들의 결정이 한국의 운명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소로 여겨진다. 특히, 진보 진영에서는 얄타 회담을 통해 강대국들이 한국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신탁 통치를 결정했고, 이것이 결국 분단으로 이어졌다고 비판한다.[4] 1945년 2월, 미국, 영국, 소비에트 연방의 세 강대국 정상들은 리바디아 궁전에서 얄타 회담을 열었다. 이 회담에서 한국의 운명을 결정지을 중요한 논의들이 이루어졌지만, 정작 한국인들의 의사는 반영되지 않았다.[4]

참조

[1] 서적 Verlorene Siege Bonn
[2] 웹사이트 Sofia Rotaru decided to take Livadia Palace in charge https://web.archive.[...] 2007-12-28
[3] 웹사이트 Ливадийский дворец-музей. Издательская деятельность https://web.archive.[...] 2022-01-12
[4] 웹사이트 КРЫМСКАЯ КОНФЕРЕНЦИЯ 1945 г. (альманах) - Conference "YALTA-45/13" http://krim-konfer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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