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스라투르 전투와 그라블로트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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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르스라투르 전투와 그라블로트 전투는 1870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중 벌어진 전투로, 프로이센군의 승리로 끝났다. 마르스라투르 전투는 프랑스군과 프로이센군 간의 격렬한 전투였으나, 결정적인 승패를 가리지 못하고 종료되었다. 이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은 프랑스군의 포병대를 향해 기병 돌격을 감행했으나 큰 피해를 입었다. 그라블로트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은 프랑스군을 생프리바라몽타뉴에서 그라블로트로 유인하는 데 성공했고, 이는 이후 스당 전투에서 프랑스군의 패배로 이어지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이 전투들로 인해 프랑스는 전략적 주도권을 상실했고, 프로이센은 독일 통일의 발판을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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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스라투르 전투와 그라블로트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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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개요 | |
전투 | 마르스라투르 전투 |
일부 |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
날짜 | 1870년 8월 16일 |
장소 | 프랑스 마르스라투르 |
좌표 | 북위 49.103095, 동경 5.872536 |
결과 | 결론 없음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북독일 연방 |
교전국 2 | 프랑스 제국 |
지휘관 및 병력 | |
사령관 1 | 프리드리히 카를 |
사령관 2 | 프랑수아 아쉴 바젠 |
부대 1 | 제2군 |
부대 2 | 라인 방면군 |
병력 1 | 80,000명 |
포 1 | 210문 이상 |
병력 2 | 80,000명 |
피해 규모 | |
피해 1 | 15,799명 |
사망 1 | 4,421명 |
부상 1 | 10,411명 |
실종 1 | 967명 |
말 피해 1 | 2,736필 |
피해 2 | 17,007명 |
사망 2 | 1,367명 |
부상 2 | 10,120명 |
실종 2 | 5,472명 |
관련 전투 | |
관련 전투 | 마르스라투르 전투와 그라블로트 전투 |
이미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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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배경
스페인 왕위 계승 문제를 둘러싼 갈등과 1870년 7월 7일의 엠스 전보 사건은 결국 1870년 7월 14일, 프랑스가 프로이센에 전쟁을 선포하는 결과를 낳았고, 이로써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이 발발했다. 프로이센은 남독일 국가들과 연합하여 프랑스를 침공했으며, 프로이센군은 불과 4주 만에 라인 지방에 주둔하던 프랑수아 아쉴 바젠 장군의 프랑스 라인군 병력 13만 명을 메츠 요새에 가두는 데 성공했다.
스피헤렌 전투가 8월 6일에 끝난 후, 대 몰트케 백작 휘하의 독일 최고 사령부는 프랑스 라인군이 모젤강 동쪽에서는 전투를 벌이지 않을 것이라고 초기에 판단했다. 그러나 8월 12일 이후, 독일 기병의 정찰 활동을 통해 프랑스군이 결국 전투를 벌일 의사가 있다는 점이 분명해졌다. 이에 8월 14일 18시에 몰트케는 프리드리히 카를 공이 지휘하는 제2군에게 모젤강을 건너 모든 가용 기병을 동원하여 메츠와 베르됭 사이 지역으로 보내 프랑스군의 움직임을 파악하라고 명령했다. 한편, 8월 15일 아침 빌헬름 1세 국왕은 참모총장 포트비엘스키의 주장에 따라 프랑스군이 메츠 동쪽에서 싸우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카를 프리드리히 폰 슈타인메츠 장군 휘하의 제1군에게 모젤강 서쪽으로 진격하도록 지시했다.
프로이센의 헬무트 폰 몰트케 장군이 이끄는 군대에 막혀 라인강 지방의 메츠 요새에 갇혀 있던 바젠 장군의 프랑스 라인군은 구원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크 마옹 장군이 구원군을 이끌었으나 스당 전투에서 패배했다. 프랑스 라인 주둔군이 베르됭으로 후퇴하자, 1870년 8월 12일 바젠 장군이 라인군 전체 지휘권을 맡게 되었다.
스피헤렌 전투가 8월 6일에 끝난 후, 대 몰트케 백작이 이끄는 독일 최고 사령부는 프랑스 라인군이 모젤강 동쪽에서 교전하지 않으리라 판단했다. 그러나 8월 12일 이후 독일 기병대의 정찰 결과, 프랑스군이 전투를 준비하고 있음이 명확해졌다. 이에 8월 14일 18시에 몰트케는 프리드리히 카를 공 휘하의 제2군에게 모젤강을 건너 메츠와 베르됭 사이 지역으로 모든 기병을 투입하여 프랑스군의 움직임을 파악하라고 명령했다. 다음 날인 8월 15일 아침, 빌헬름 1세는 참모총장 오이겐 안톤 테오필 폰 포트비엘스키의 건의를 받아들여 프랑스군이 메츠 동쪽에서 싸우지 않을 것이라 확신하고, 카를 프리드리히 폰 슈타인메츠 장군이 지휘하는 제1군에게 모젤강 서쪽으로 진격하라고 지시했다.
한편, 프리드리히 카를 공은 이미 8월 14일에 제3군단과 제12군단에게 8월 15일에 모젤강을 건너 세유 강으로 진격하도록 명령했고, 나머지 4개 군단도 뒤따르도록 했다. 8월 15일 11시, 몰트케는 프리드리히 카를에게 프랑스군이 메츠에서 베르됭으로 지체 없이 후퇴할 것이라는 내용의 전보를 보냈다. 프리드리히 카를은 콘스탄틴 폰 알벤슬레벤 장군 휘하의 제3군단에게 즉시 모젤강을 건너라고 명령했다. 제3군단 소속 사단들은 식사할 시간도 없이 17시에 행군을 시작했다. 제5보병사단은 프랑스군이 파괴하지 않은 노베앙의 다리를 이용했고, 제6보병사단은 샹페이에 경량 부교를 설치하고 포병과 보급 열차를 퐁 아 무송을 통해 건너게 했다. 이들 사단은 자정 무렵에야 목적지에 도착하여 짧은 휴식을 취했다.
프랑스군의 서쪽으로의 철수는 8월 13일에 명령되었으나, 8월 14일 보르니-콜롬베이 전투로 인해 중단되었다가 8월 15일에 재개되었다. 8월 15일 하루 동안 메츠 남서쪽에서는 독일 기병과 프랑스 기병 간의 교전이 벌어졌고, 결국 프랑스군은 메츠 방향으로 후퇴했다. 같은 날 18시 30분, 몰트케는 제2군에게 메츠-베르됭 도로를 따라 프랑스군의 퇴로를 차단하라고 명령하며, 구체적인 실행 방법은 프리드리히 카를의 판단에 맡겼다. 프리드리히 카를은 이미 11시에 제3군단으로부터 받은 보고를 토대로 프랑스군이 뫼즈 강을 향해 전속력으로 후퇴하고 있으며, 제2군이 서둘러 그들을 차단해야 한다고 왕실 사령부에 보고한 상태였다. 저녁 7시, 프리드리히 카를은 제3군단에게 마르스라투르와 비온빌로 진격하라고 명령했다. 콘스탄틴 베른하르트 폰 포이그츠-레츠 장군 휘하의 제10군단과 2개 기병 사단이 이 공격을 지원하기로 했다.
하지만 프랑스군은 실제로는 전속력으로 후퇴하지 않고 있었다. 독일군과의 기병전, 보급 열차로 인한 도로 정체, 그리고 프랑스 군단들의 분산 배치 문제로 인해 라인군 사령관 프랑수아 아쉴 바젠 원수는 8월 16일 새벽 4시부터 정오까지 철수를 늦추기로 결정했다. 마르스라투르 전투가 시작된 8월 16일 오전 9시에도 프랑스 참모 장교들은 여전히 보급 열차와 도로 교통 문제를 해결하느라 분주했다. 반면, 몰트케와 독일 왕실 사령부는 전투가 뫼즈 강 근처에서나 벌어질 것이라고 잘못 예측하고, 독일군에게 지체 없이 강을 향해 진격하라고 지시했다.
독일군의 계속된 서쪽 진군은 결과적으로 마르스라투르에 있던 독일군을 수적으로 심각한 열세에 놓이게 만들었으며, 필요한 지원을 제때 받을 수 없게 만들었다. 몰트케의 이러한 오판으로 인해, 프랑스군은 15개 사단을 보유한 반면 독일군은 단 4개 사단만으로 맞서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로 인해 독일 제3군단과 제10군단은 8월 16일에 전멸할 수도 있었고, 다음 날에는 추가로 8개 독일 사단이 위험에 처할 수 있었다. 프랑스는 8월 16일 마르스라투르 전투에서 승리하여 뫼즈 강으로 돌파할 절호의 기회를 잡았으나, 프로이센군의 뛰어난 전술적 능력과 대조적으로 프랑스 최고 사령부의 활력과 결단력이 부족하여 결국 이 기회를 살리지 못했다.
3. 전투 준비
프리드리히 카를 공은 이미 8월 14일에 제3군단과 제12군단에게 8월 15일에 모젤강을 건너 세유 강으로 진격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다른 4개 군단이 그 뒤를 따르도록 했다. 8월 15일 11시에 몰트케는 프리드리히 카를에게 전보를 보내 프랑스군이 메츠에서 베르됭으로 지체 없이 후퇴할 것이라고 알렸다. 이에 프리드리히 카를은 콘스탄틴 폰 알벤슬레벤 장군 휘하의 제3군단에게 모젤강 도하를 명령했다. 제3군단의 사단들은 17시에 행군을 시작했는데, 병사들은 식사할 시간조차 부족했다. 제5보병사단은 프랑스군이 파괴하지 않은 노베앙의 다리를 이용해 강을 건넜고, 제6보병사단은 샹페이에 경량 부교를 설치하고 포병과 보급 열차는 퐁 아 무송을 통해 건너게 했다. 이들 사단은 자정 무렵에야 목적지에 도착하여 짧은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프랑스군의 서쪽 방면 철수는 8월 13일에 명령되었으나, 8월 14일 보르니-콜롬베이 전투로 인해 중단되었다가 8월 15일에 다시 시작되었다. 8월 15일 하루 동안 메츠 남서쪽에서는 독일 기병과 프랑스 기병 사이에 교전이 벌어졌고, 결과적으로 프랑스군은 메츠 방향으로 후퇴했다. 8월 15일 18시 30분, 몰트케는 제2군에게 메츠-베르됭 도로를 따라 이동하는 프랑스군의 퇴로를 차단하라고 명령했으며, 이 임무를 수행하는 구체적인 방법은 프리드리히 카를의 판단에 맡겼다. 프리드리히 카를은 이미 11시에 왕실 사령부에 보낸 전보를 통해 제3군단으로부터 받은 보고를 근거로 프랑스군이 전속력으로 뫼즈강을 향해 후퇴하고 있으며, 제2군이 서둘러 그들을 차단해야 한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19시에 프리드리히 카를은 제3군단에게 마르스라투르와 비온빌로 진격하라고 명령했다. 콘스탄틴 베른하르트 폰 포이그츠-레츠 장군 휘하의 제10군단과 2개 기병 사단이 메츠-베르됭 도로를 향한 공격에서 제3군단을 지원하도록 계획되었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실제로는 전속력으로 후퇴하지 않았다. 독일군과의 기병전, 보급 열차로 인한 도로 정체, 그리고 프랑스 군단의 분산 배치 등의 문제로 인해 라인군 사령관 프랑수아 아실 바젠 원수는 8월 16일 새벽 4시부터 정오까지 철수를 늦추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으로 인해 마르스라투르 전투가 8월 16일 오전 9시에 시작될 때, 프랑스 참모 장교들은 여전히 보급 열차 이동과 도로 교통 정리에 몰두하고 있었다. 몰트케와 독일 왕실 사령부는 프랑스군이 이미 뫼즈 강 인근에 도달했을 것이며, 전투는 그곳에서 벌어질 것이라고 잘못 판단했다. 이 오판에 근거하여 독일군에게 지체 없이 강을 향해 진격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독일군의 이러한 서쪽으로의 진군은 마르스라투르에 집결한 독일군을 수적으로 심각한 열세에 놓이게 했고, 필요한 지원을 제때 받을 수 없게 만들었다. 몰트케의 이러한 판단 착오로 인해 프랑스군은 15개 사단을 동원할 수 있었던 반면, 독일군은 단 4개 사단만으로 맞서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론적으로 독일 제3군단과 제10군단은 8월 16일에 전멸될 수도 있었으며, 다음 날에는 추가로 8개 독일 사단이 위험에 처할 수 있었다. 프랑스는 8월 16일 마르스라투르 전투에서 승리하여 뫼즈 강으로 돌파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그러나 프로이센군의 우수한 전술적 능력과 대조적으로 프랑스 최고 사령부의 활력 부족과 결단력 부재가 결국 프랑스군의 노력을 좌절시키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4. 마르스라투르 전투
그러나 8월 16일, 바젠의 군대가 베르됭으로 향하던 중 마르스라투르 동쪽 비옹빌 근처에서 프로이센의 콘스탄틴 폰 알펜슬레벤 장군이 이끄는 제3군단에게 가로막혔다. 알펜슬레벤의 군단은 약 3만 명으로, 13만 명에 달하는 프랑스군 병력의 1/4에 불과했지만 비옹빌을 점령하며 프랑스군의 서진을 막았다.
이후 벌어진 마르스라투르 전투는 서유럽 역사상 마지막 대규모 기마전 중 하나로 기록된다. 이 격렬한 전투에서 양측은 각각 약 1만 6,000명의 사상자를 냈다.
4. 1. 전투 상세 과정
8월 15일 저녁, 프로이센 제2군 참모장 포이츠-레츠는 파울 폰 라인바벤 장군 휘하의 제5 기병 사단에게 레존빌 인근 프랑스군 진지를 향해 무력 정찰을 명령했다. 8월 16일 아침 8시 30분경, 비옹빌 서쪽에 있던 뮈라의 프랑스 용기병 여단은 야영지에서 음식을 준비하느라 바빴고, 경계 병력을 제대로 배치하지 않았다. 이 틈을 타 레데른의 독일 흉갑기병 여단이 손쉽게 접근했다. 독일 포병대는 인근 고지에 자리를 잡고 기습적으로 프랑스군을 향해 포격을 시작했다. 더 많은 독일 포병대가 합류하여 포격을 가하자 프랑스 여단 전체는 큰 혼란에 빠졌다. 프랑스 기병대는 즉시 동쪽으로 달아나 레존빌 고원에 다시 모였다. 독일 기마 포병은 계속 전진하여 레존빌 근처에 있던 그라몽의 흉갑기병 여단에게도 포격을 가했다. 그러나 9시 30분이 되자 독일 기병대는 포병을 더 이상 지원할 수 없었다. 프랑스 보병이 이미 대열을 갖추고 비온빌로 진격하며 독일군에게 사격을 가했기 때문이다. 독일 기마 포병은 프랑스 보병에게 포격을 가했고, 프랑스군 역시 포격으로 응수했다.
콘스탄틴 폰 알펜슬레벤 장군은 새벽 2시에 제6 기병 사단에게 5시 30분까지 모젤강을 건너 제3 군단의 선두에 서라고 명령했다. 이 명령은 7시가 되어서야 완료되었고, 사단은 제5 보병 사단으로부터 레존빌 인근 프랑스 기병대의 위치 정보를 받았다. 9시, 알벤슬레벤은 다시 제6 기병 사단에게 레존빌 고지를 확보하라고 지시했다. 라우흐 중령이 이끄는 기병 여단이 고지를 향해 진격했지만, 부아 드 비온빌에서 가해진 프랑스군의 포격으로 큰 손실을 입고 후퇴해야 했다. 반면 9시 15분경 그뤼터의 여단은 프랑스 산개병들을 몰아내고 포병대가 부아 드 생 아르놀드 인근 프랑스 보병 야영지를 공격하는 등 일부 성공을 거두었다.
프랑스군은 강력하게 반격했다. 프랑수아 세르탱 캉로베르 원수의 제6 군단은 두 개 사단을 비온빌과 플라비니로 보냈고, 샤를 오귀스트 프로사르 장군의 제2 군단은 바타이유 사단을 비온빌 점령에, 베르주 사단을 고르즈 북쪽 고지 통제에, 라파세 여단을 부아 드 생 아르놀드 점령에 투입했다. 비온빌의 독일 포병대는 프랑스 포병과 산개병의 공격을 받고 후퇴했다. 10시까지 독일 기병대는 수적으로 우세한 프랑스군에 밀려 전선 전체에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바로 이때 프로이센 제5 및 제6 보병 사단이 전장에 도착하기 시작했다.
제3 군단 소속 제5 보병 사단은 8월 16일 아침 7시 30분, 노베앙에서 고르즈로 이어지는 도로를 따라 비온빌을 목표로 행군을 시작했다. 선봉 부대인 뢸링 장군의 제9 보병 여단은 9시에 고르즈에 도착하여 제6 기병 사단과 합류했다. 이들은 레존빌 고지를 따라 고르즈로 진격하는 프랑스군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 프로이센군은 9시경 고지를 오르기 시작했으나, 프로이센 용기병 2개 중대는 프랑스 보병의 사격에 후퇴했다. 가렐츠 대령 지휘 하의 제48 보병 연대 제1, 2 머스킷총 대대가 부아 드 비온빌을 점령하기 위해 언덕을 올랐고, 10시 15분까지 제1 경포병대가 측면에 포진하여 뢸링 장군이 나머지 병력을 지원할 수 있도록 진격했다. 제48 보병 연대의 사총병 대대는 포대 좌측에 배치되었고, 제3 소총 대대는 인근 안콩빌 농가를 확보했다.
제5 보병 사단장 폰 쉴프나겔은 처음에는 제9 보병 여단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으나, 전투 상황을 직접 보고 생각을 바꾸어 사단 소속 포 24문을 모두 갈루스 소령 지휘 하에 집중 투입하도록 명령했다. 베르주 장군 휘하의 프랑스 제1 보병 사단은 고지에 배치되어 프로이센군의 양 측면을 포위하려 했다. 제48 보병 연대의 두 머스킷총 대대는 제3 소총 대대의 3개 중대와 함께 백병전까지 벌이며 격렬하게 싸워 11시까지 부아 드 비온빌 대부분을 점령했다. 동쪽에서는 프로이센 근위 연대가 고르즈에서 북쪽으로 진격하여 라파세 여단을 부아 드 생 아르놀드에서 서서히 밀어냈다.
서쪽에서는 제48 보병 연대 사총병 대대가 고지의 프랑스군 진지를 측면 공격하려 했으나, 오히려 수적으로 우세한 프랑스군에게 역으로 측면을 공격당해 큰 피해를 입고 패주했다. 제10 보병 여단의 제52 보병 연대 제1 대대(슐리펜바흐 백작 소령 지휘)가 이 틈을 막고 노출된 독일 포병을 구하기 위해 전진했다. 이들은 초반에 프랑스군을 밀어냈지만, 압도적인 프랑스 보병 화력에 결국 희생되었고 대대의 모든 장교가 전사하거나 부상당했다. 하지만 이들의 희생은 더 많은 독일군 증원이 도착할 시간을 벌어주었다. 뢸링 장군은 이 시점에 좌익으로 이동하다 전사했다. 프랑스군이 제5 보병 사단의 무너진 좌익을 격파하기 위해 진격하자, 뷘아우 대령 휘하의 제52 보병 연대 제2 대대와 사총병 대대가 고지를 올라 사격과 총검으로 프랑스군을 플라비니로 몰아냈다. 이 과정에서 독일군의 손실도 컸다. 사총병 대대장 헤르바르트 폰 비텐펠트 소령이 전사하고 제2 대대장 뷘아우 소령이 부상을 입었으며, 사총병 대대는 탄약을 거의 소진했다. 트론빌 인근 제3 군단의 다른 포병대가 화력 지원을 제공하여 제52 연대의 성공에 기여했다. 독일 포병대는 이제 좌익으로 전진할 수 있었다. 제10 군단에서 파견된 2개 보병 대대, 2개 용기병 중대, 1개 포병대가 제5 보병 사단을 지원하기 위해 도착하여 포병 전력을 30문으로 늘렸고, 12시까지 독일 포병대를 위한 강력한 진지를 구축했다. 독일 포병대의 강력한 포격은 프랑스군이 예비대에서 포병을 차출하여 제2 군단을 지원하도록 만들었다.
알벤슬레벤 장군과 함께 제6 보병 사단과 군단 포병대는 새벽 5시에 아르나빌에서 마르스라투르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6시 30분, 비온빌과 트론빌 사이에 프랑스군이 있다는 기병 정찰 보고를 받았다. 8시에는 프랑스군 야영지를 발견했고, 알벤슬레벤은 직접 프랑스군 진지를 정찰했다. 그는 자신이 프랑스군 후위 부대와 마주쳤다고 판단하고, 제6 보병 사단에게 마르스라투르를 지나 북쪽으로 이동하여 프랑스군의 서쪽 후퇴를 차단하라고 명령했다. 뷜로 소장 휘하의 사단 포병대는 10시 30분까지 포열을 형성하여 비온빌과 플라비니 사이의 프랑스 보병에게 포격을 가하며 독일 보병의 공격을 준비시켰다. 그러나 보병 지원 없이 노출된 독일 포병대는 프랑스 보병의 사격으로 사상자를 냈다.
제6 보병 사단은 트론빌과 나란히 배치되었다. 사단장 구스타프 폰 부덴브로크 중장은 비온빌-플라비니 지역을 직접 정찰하고, 두 마을 모두 상당수의 프랑스군이 점령하고 있음을 확인한 후 가용 병력을 집중하여 점령하기로 결정했다. 제12 여단은 마르스라투르-비온빌 도로 양쪽으로, 제11 여단은 트론빌에서 출발하는 도로를 따라 진격했다. 제35 및 제64 독일 연대는 잘 조직된 대열로 협곡과 숲을 이용해 엄폐하며 비온빌을 향해 공격을 개시했다. 300m 지점에서 화력 우위를 확보한 후 11시 30분, 북쪽, 서쪽, 남쪽에서 마을을 공격하여 30분 만에 점령하고 프랑스 샤쇠르 연대를 패주시켰다. 이 승리는 독일 보병의 철저한 평시 훈련과 장교들의 주도권 발휘 덕분이었다.
제35 연대의 한 대대가 플라비니를 초기에 공격했으나, 프랑스 보병의 사격에 막혀 조직력을 잃고 실패했다. 그러나 프로이센 포병의 집중 포격으로 플라비니는 잿더미가 되었고, 12시까지 제6 및 제5 보병 사단 연대들이 서쪽과 남쪽에서 마을을 공격하여 점령했다. 이로써 제3 군단 전선의 중앙은 하루 종일 굳건히 유지되었다. 제5 보병 사단의 2개 대대가 플라비니에서 북쪽으로 진격하여 전방 지역을 점령했고, 제6 보병 사단은 레존빌로 가는 도로를 따라 프랑스군을 밀어냈다.
비옹빌과 플라비니를 잃고 프랑스 제2군단이 레존빌로 후퇴하자, 바젠과 프로사르는 12시 30분에 기병에게 전투 흐름을 안정시키라고 명령했다. 레존빌에 있던 제3 창기병 연대는 명확한 공격 목표가 제시되지 않아 돌격하지 않았다. 근위 기갑 기병대는 공격을 위해 이동했지만, 프로이센 보병 중대의 사격에 200m 거리에서 큰 피해를 입고 230명의 병력과 243마리의 말을 잃은 채 흩어졌다. 제10군단 참모장 레오 폰 카프리비 중령은 라우흐의 제17 훌란 기병대에게 12시 45분에 흩어진 프랑스 기갑 기병대를 공격하라고 조언했다. 라우흐는 즉시 공격했고, 에버스타인의 제11 훌란 기병대는 프랑스 보병 낙오병들을 추격했다. 이들은 프랑스 근위 포병대를 공격하여 대포를 점령했지만, 견인할 말이 없어 가져가지 못했다. 프랑스 제3 소총 대대와 두 개의 프랑스 기병 연대가 도착하여 독일군을 후퇴시켰다.
제2군단의 패배가 확실해지자, 알벤슬레벤은 제6 기병 사단에게 추격을 명령했다. 동시에 바젠은 척탄병 사단과 볼티제어 사단을 제2군단 지원을 위해 전진시켰다. 13시, 제6 기병 사단은 레존빌 고원에서 프랑스 보병과 포병의 맹렬한 공격에 막혀 제대로 배치되지도 못한 채 엄청난 사상자를 내고 철수해야 했다. 이 기병 공격은 독일 포병대가 더 유리한 위치로 전진할 시간을 벌어주었다. 독일 포병은 프랑스 보병을 지속적으로 공격하여 프랑스군의 공세를 늦추고, 독일 보병의 탄약 부족이나 기병의 손실을 이용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제6 프로이센 보병 사단이 레존빌로 진격하던 중, 북쪽의 로마 도로를 따라 캉로베르의 제6군단으로부터 측면 공격을 받아 진격을 멈추고 북쪽을 향해야 했다. 프로이센군은 프랑스 포병에게 큰 손실을 입었지만, 프랑스군의 공격을 격퇴하는 데는 성공했다. 제5 보병 사단 제10 여단은 남쪽에서 레존빌로 진격하여 메츠-베르됭 도로에 도달했지만, 압도적인 프랑스 보병 화력에 격퇴당했고 여단의 거의 모든 장교가 사상했다. 탄약이 떨어지고 거의 전멸 상태가 된 제10 여단은 비옹빌과 플라비니로 후퇴했다.
바젠은 모젤 계곡을 따라 자신의 좌측면으로 더 많은 프로이센군이 도착하는 것을 가장 큰 위협으로 간주했다. 이에 따라 정오에 황실 근위대, 볼티제어 사단, 재편성된 제2군단 잔여 병력을 자신의 좌측으로 이동시켰다. 다른 모든 가용 병력에게는 프로이센 좌익을 우회하도록 지시했다. 13시 30분, 두 개의 프랑스 사단이 비온빌 서쪽으로 독일 좌익을 향해 진격했고, 제4군단도 이동 중이었다. 제10군단 소속 반여단이 11시 45분에 독일군을 지원하기 위해 도착하여 12시 30분까지 트롱빌 근처 숲을 확보했다. 이들은 곧 프랑스 샤세포 소총의 장거리 사격에 노출되었지만, 드라이제 니들 건의 짧은 사거리 때문에 효과적으로 응사하지 못했다. 독일군의 사격이 약해지자 캉로베르는 비온빌을 다시 점령하기 위해 움직였다. 14시까지 알벤슬레벤의 제3군단은 4개의 프랑스 군단과 맞서게 되었다. 모든 보병과 포병을 투입하고 거의 소모한 상태에서, 그의 기병만이 캉로베르의 맹공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예비 전력이었다. 알벤슬레벤은 제5 기병 사단의 두 개 여단에게 군단 좌익을 확보하도록 지시하고, 아달베르트 폰 브레도우 소장 휘하의 세 번째 중기병 여단은 자신의 지휘 하에 남겨두었다. 독일군의 위태로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알벤슬레벤은 참모장 폰 보이츠 레츠 대령을 브레도우에게 보내 로마 도로를 따라 있는 캉로베르의 포대를 침묵시키라는 명령을 전달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라는 명령과 함께, 브레도우는 제7 흉갑기병대와 제16 울란으로 구성된 여단을 이끌고 돌격을 준비했다(제13 용기병대는 다른 곳에 배치되어 참여하지 못했다). "폰 브레도우의 죽음의 질주"로 알려지게 된 이 돌격은 14시에 시작되었다. 브레도우는 지형과 포연을 이용하여 프랑스 관측병들의 눈을 피해 마지막 순간까지 기병대의 움직임을 숨겼다. 프랑스군 진지 약 1000m 앞에서 모습을 드러낸 프로이센 기병대는 일제히 돌격하여 두 줄의 프랑스 포병 진지를 돌파하며 포병들을 베고 캉로베르 휘하 병사들을 흩어지게 만들었다. 포르통의 프랑스 기병 사단(약 3,100명)이 브레도우 여단의 측면과 후방으로 반격하려 했으나, 아군인 캉로베르의 보병대가 돌격하는 모든 기병에게 무차별 사격을 가하는 바람에 일부 흩어졌다. 브레도우의 여단은 간신히 포위망을 빠져나와 15시까지 아군 진지로 후퇴했다. 프랑스 기병대는 추격하지 않았다. 돌격에 나섰던 800명의 기병 중 420명만이 돌아왔다.
바로 이 시점에 바젠은 캉로베르의 제6 군단에게 공격을 중단하라고 명령했고, 프로이센 제6 보병 사단에 가해지던 압박은 멈추었다. 메츠-베르됭 도로 주변의 레존빌 서부 전투는 포격전으로 발전했다. 독일군 좌익에서는 바르비의 제11 기병 여단이 트롱빌 북쪽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프랑스와 독일 포병은 처음에는 포탄을 교환했고, 제4 군단의 그르니에 사단이 도착하자 프랑스군은 14시 45분에 진격을 시작했다. 프랑스 산개병대의 사격과 미트라유즈 기관총에 의해 바르비의 기병대는 500m 거리에서 압도당했고, 독일군은 트롱빌로 천천히 후퇴했다. 제3 군단에서 두 개 사단, 랑드미로 장군의 제4 군단에서 그르니에 사단, 제6 군단에서 트리시에 사단 등 4개 프랑스 사단이 독일군 좌익에 집결하여 측면을 포위하려 했다. 프랑스 포병 사격에 직면한 비옹빌 북쪽의 모든 독일군은 천천히 후퇴하기 시작했고, 프랑스군의 진격을 한 시간 동안 지연시켰다. 질퍽한 지면은 프랑스군의 움직임을 방해하여 이들을 도왔다. 프랑스군의 반격 포격으로 인해 탄약이 거의 소진된 프로이센 포병대는 진지를 포기하고 비옹빌 남서쪽에서 탄약을 보급해야 했다.
4. 2. Von Bredow의 죽음의 질주
14시 경, 알벤슬레벤 장군이 이끄는 프로이센 제3군단은 수적으로 훨씬 우세한 프랑스군 4개 군단과 맞서 싸우며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 제3군단의 보병과 포병 전력은 격렬한 전투로 거의 소진되었고, 알벤슬레벤에게 남은 예비 병력은 기병뿐이었다. 특히 프랑스 캉로베르 장군이 이끄는 제6군단이 프로이센군 좌익을 강하게 압박해오면서 전선 붕괴의 위험이 커지고 있었다.
이러한 절박한 상황에서 알벤슬레벤은 최후의 수단으로 기병 돌격을 명령했다. 그는 참모장인 폰 보이츠 레츠(von Voigts Rhetz) 대령을 통해 프리드리히 빌헬름 아달베르트 폰 브레도우 소장에게 휘하의 중기병 여단(제5기병사단 소속)을 이끌고 로마 도로를 따라 배치된 캉로베르 군단의 포병 진지를 공격하여 무력화시키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 명령은 프로이센 보병과 포병이 재정비할 시간을 벌기 위한 것이었지만, 강력한 프랑스 포병 진지를 향한 정면 돌격은 엄청난 희생이 예상되는 위험한 작전이었다.
브레도우 소장이 이끈 이 용맹한 돌격은 훗날 "폰 브레도우의 죽음의 질주(Von Bredow's Death Ride)"로 불리게 된다. 이 기병 돌격은 프랑스 포병대에 큰 혼란을 주며 잠시나마 포격을 멈추게 하는 데 성공했다. 덕분에 위기에 처했던 프로이센 보병과 포병은 귀중한 시간을 확보하여 전열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돌격을 감행한 브레도우 여단 역시 프랑스군의 집중적인 사격으로 인해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비록 전술적으로는 큰 손실을 입었지만, 폰 브레도우 여단의 희생적인 돌격은 프로이센 제3군단이 완전한 붕괴를 피하고 전선을 유지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이는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프로이센군이 마르스라투르 전투에서 프랑스군의 진격을 저지하는 데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4. 3. 독일군의 증원군 도착
수적으로 열세였던 프로이센 제3군단이 프랑스군에게 압도당할 위기에 처하자, 독일 제10군단의 증원이 시작되었다. 11시 45분, 제10군단의 선발대 격인 반(半)여단 병력이 전장에 도착하여 12시 30분까지 트롱빌 근처 숲을 확보했다. 그러나 이들은 곧 프랑스군의 우수한 샤스포 소총의 장거리 사격에 노출되었고, 사거리가 짧은 드라이제 니들 건으로는 효과적인 대응이 어려웠다.
11시 30분경, 포성을 듣고 상황 파악에 나선 제10군단 사령관 폰 보이츠-레츠 장군은 트롱빌에서 참모장 레오 폰 카프리비 중령으로부터 제3군단의 위태로운 상황을 보고받았다. 그는 즉시 제3군단을 지원하기 위해 제10군단 전체를 이동시키기로 결정했다. 트롱빌에서는 폰 데어 골츠 남작 휘하의 제10군단 포병대 2개 포대가 기존의 2개 사단 포병대와 합류하여 그르니에가 이끄는 프랑스 포병대에 매우 효과적인 포격을 가했다. 인근에서는 쾨르버 소령의 4개 포대에 기병 포병대 1개 포대가 가세했고, 이들 독일 포병대는 750m 거리에서 프랑스 산병들에게 집중 포격을 가해 혼란에 빠뜨리며 북쪽으로 후퇴시켰다.
16시, 약 43.45km를 행군한 폰 크라츠 장군 휘하의 제10군단 제20보병사단 본대가 트롱빌 근처 전장에 도착했다. 크라츠 장군과 참모들은 직접 트롱빌과 플라비니 주변을 정찰하여 제3군단 중앙부가 매우 취약하다는 것을 확인하고 즉시 해당 지역을 강화하도록 명령했다. 이로써 16시까지 제3군단과 제10군단은 총 210문의 포병 지원을 확보하게 되었다. 제20보병사단의 제79연대 2개 대대는 15시 30분에 트롱빌 근처 숲 동쪽 가장자리에 배치되어 프랑스군의 사격을 견뎌냈고, 제40여단은 16시 30분에 트롱빌에 배치되어 동쪽과 북쪽 지역 확보에 나섰다.
독일군의 증원에도 불구하고 프랑스군은 여전히 수적으로 우세했지만, 총사령관 바젠 원수는 계속해서 프랑스군 좌익에 병력을 집중시키는 데 주력했다. 그는 르뵈프 휘하의 제3군단에게 단순히 현 위치를 사수하라고 명령했으며, 15시에는 제3군단을 레종빌 보호를 위해 좌익으로 이동시켰다. 결과적으로 르뵈프 군단의 대부분은 8월 16일 전투에 거의 참여하지 않았는데, 이는 역설적으로 수세에 몰린 알벤슬레벤의 제3군단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14시경 크라츠 장군의 보고를 받고서야 제3군단의 위태로운 상황을 인지한 프리드리히 카를 왕자는 참모들과 함께 약 22.53km를 말을 달려 16시에 레종빌 고원에 도착했다. 그는 강력한 포병 지원을 받는 고원의 제3군단과 프랑스 보병 진지가 너무 견고하여 정면 공격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대신 제10군단이 도착하는 대로 좌익에서 공세를 펼치고, 제3군단은 제10군단 제20보병사단의 지원을 받아 주로 포병으로 방어하도록 지시했다. 제5, 제16사단, 제20보병사단의 포병대는 폰 뷜로 장군의 지휘 아래 플라비니 동쪽에 집중 배치되어 메츠-베르됭 도로 북쪽의 프랑스 포병대를 향해 지속적인 포격을 가했다. 프랑스 보병의 산발적인 공격은 프로이센 보병의 니들 건 사정거리에 들어오기도 전에 프로이센 포병에 의해 격퇴되었다. 레종빌 남쪽 고지(989고지)를 점령하려는 프로이센 보병(제78연대, 제12척탄병연대, 제20사단 일부)의 시도는 프랑스군의 격렬한 저항으로 여러 차례 실패했으며, 양측 모두 큰 피해를 입었다. 이러한 공방전에도 불구하고 제3군단의 전선은 17시까지 대체로 안정되었다.
한편, 에밀 폰 슈바르츠코펜 장군 휘하 제19보병사단의 절반이 트롱빌에 도착하자 크라츠 장군은 이들에게 북동쪽의 프랑스군 우익을 공격하도록 요청했다. 17시, 제39여단 보병 중대가 프랑스 진지를 향해 돌격을 감행했으나, 프랑스군의 강력한 샤스포와 미트라외즈 사격, 그리고 시세이 사단의 측면 공격에 막혀 큰 피해를 입고 후퇴했다. 이 과정에서 약 43.45km를 행군한 직후 전투에 투입된 약 300명의 지친 프로이센 병사들이 포로로 잡히기도 했다.
18시경, 프랑스군은 로마 도로 북쪽 협곡을 건너 마르스라투르 방향으로 진격을 시도했다. 보이츠-레츠 장군은 기병대를 투입하여 반복적인 돌격으로 프랑스군의 진격을 저지하고 협곡 너머로 후퇴시켰다. 이 과정에서 프랑스 제13전열보병연대가 큰 피해를 입었고 제2 아프리카 샤쇠르 기병 연대도 후퇴했다. 독일군은 확보한 시간과 공간을 활용해 더 많은 포병을 배치하여 좌익을 강화했다. 18시 45분, 마르스라투르 북쪽에서 양측의 대규모 기병 부대(약 5,000 기병, 40개 기병대)가 충돌했다. 격렬한 백병전 끝에 독일 기병 연대가 프랑스군의 측면과 후방을 제압하는 데 성공했고, 프랑스 기병대는 궤멸되어 브루빌 방향으로 패주했다. 이는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중 가장 크고 중요한 기병전 중 하나로 기록되었으며, 이 승리로 프로이센 좌익에 대한 위협은 사라졌다. 어둠이 내리자 프랑스 란미로 사단은 마르스라투르와 트롱빌 점령 시도를 포기했고, 19시까지 트롱빌 북쪽의 프로이센군은 프랑스 포병의 산발적인 포격 외에는 별다른 교전 없이 안정을 유지했다.
프로이센군 우익에서는 알브레히트 구스타프 폰 만슈타인 장군 휘하의 제9군단이 16시에 전장에 도착했다. 17시부터 제16보병사단 예하 연대들(제72, 40, 11연대)이 부아 드 생 아르눌 북쪽 고지(970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반복적으로 공격을 감행했으나, 프랑스군의 완강한 저항과 예비대 투입으로 번번이 격퇴당하며 큰 손실을 입었다. 18시경에는 바젠 원수가 직접 근위 보병 제2여단에게 989고지 확보를 명령하여 한때 프로이센 보병을 밀어내는 데 성공했으나, 프로이센 포병의 정확한 사격으로 다시 고지를 포기해야 했다. 19시 이후에도 970고지 남쪽에서는 치열한 공방전이 계속되었지만, 양측 모두 결정적인 우위를 점하지 못했다.
제9군단 병력이 좌익에 배치되자 프리드리히 카를 왕자는 19시경 제3군단과 제10군단에게 레종빌을 향해 전진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포병대를 앞세운 프로이센군의 진격은 샤를-드니 부르바키 장군 휘하 프랑스 제국 근위대의 54문 포 집중 사격에 저지당했고, 프로이센 포병대는 짧은 응사 후 후퇴해야 했다. 프리드리히 카를 왕자는 제6기병사단을 투입하여 레종빌 도로를 따라 프랑스 산병들에게 돌격을 감행했지만, 프랑스 보병의 강력한 화력 앞에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프랑스군의 전력이 여전히 막강했기 때문에 레종빌에 대한 전면 공격은 결국 실행되지 못했다.
12시간에 걸친 치열한 전투는 21시에 끝났다. 양측 병사들은 피로 물든 전장에서 밤을 맞이했다.
4. 4. 전투 종료
전술적으로 양측 모두 이날 전투에서 상대방을 결정적으로 몰아내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 밤이 되자 프랑스군은 철수했다.
그러나 이 전투는 프로이센의 전략적 승리로 평가된다. 프랑스 바젠 장군은 베르됭으로 향하려던 계획에 차질을 빚게 되었다. 이후 8월 18일 벌어진 그라블로트 전투를 거쳐, 프로이센군은 8월 19일 바젠의 군대를 메츠에 고립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는 10월 27일 프랑스 라인군의 항복으로 이어진 메츠 공방전의 시작이었다.
5. 그라블로트 전투
8월 17일, 프랑스군 사령관 바젠 장군은 군대를 메츠 서쪽 몇 km 떨어진 생프리바라몽타뉴와 그라블로트 사이의 언덕으로 철수시켰다. 이는 마르스라투르 전투 이후 프랑스군의 탄약과 식량이 부족했고, 병사들이 지쳐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젠은 메츠 요새의 강력한 방어력을 이용해 프로이센군에게 큰 피해를 입힐 수 있다고 판단했으며, 보급을 마친 후 8월 19일이나 8월 20일에 뫼즈 방면으로 다시 행군을 시작할 계획이었다. 프랑스군은 퇴각로인 서쪽을 바라보며 포진했으나, 프로이센군은 8월 18일 아침까지도 프랑스군의 이동 방향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
한편, 프로이센군은 8월 17일에 있을지 모를 프랑스군의 공격에 대비해 가용한 모든 병력을 집결시키고 있었다. 프리드리히 카를 왕자는 근위대와 제12군단에게 마르스라투르 집결 명령을 내렸고, 슈타인메츠 장군 휘하의 제1군은 모젤강 좌안으로 이동할 준비를 마쳤다. 제7군단과 제8군단을 위한 부교도 설치되었다. 그러나 프로이센군은 이날 프랑스군을 본격적으로 추격하지는 않았으며, 프랑스군은 하루 동안 그라블로트 동쪽의 플라프빌(Plappeville) 고원으로 후퇴하여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
8월 18일, 그라블로트 전투가 벌어졌다. 프랑스군의 배치 상태를 파악한 프로이센군은 동쪽으로 방향을 전환하여 정면 공격을 시도했다. 생프리바 주변에서는 프랑스군이 매복해 있던 프로이센군을 효과적으로 공격했으며, 남쪽 전선에서는 깊은 계곡과 참호를 이용해 프로이센군의 공세를 막아냈다. 전투는 격렬하게 진행되었으나, 바젠은 안전을 우선시하는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는 베르됭으로 가는 길을 확보하기 위한 반격을 시도하지 않고, 밤이 되자 메츠로 군대를 철수시켰다.
그라블로트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약 13,000명, 프로이센군은 약 20,000명의 사상자를 냈다. 프로이센군의 피해가 더 컸지만, 전략적으로는 프로이센의 승리였다. 그들은 프랑스 주력군을 메츠에 고립시키는 데 성공했으며, 이는 이후 9월 1일 스당 전투에서의 결정적인 승리로 이어지는 발판이 되었다.
6. 결과 및 영향
마르스라투르 전투는 바젠 장군이 이끄는 프랑스 라인 주둔군의 베르됭 방면 후퇴를 프로이센군이 성공적으로 저지한 전투이다. 8월 16일, 콘스탄틴 폰 알펜슬레벤 장군이 지휘하는 프로이센 제3군단은 약 3만 명의 병력으로 13만 명에 달하는 프랑스 대군을 비옹빌 근처에서 성공적으로 차단했다. 이는 프로이센군이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거둔 중요한 전술적 승리였다.
이 전투의 결과, 프랑스군은 메츠 요새 방면으로의 퇴로가 차단되었고, 결국 몰트케 장군이 이끄는 프로이센군에게 포위되는 상황에 놓였다. 바젠의 군대가 메츠에 고립된 것은 이후 마크 마옹 장군이 이끄는 구원군이 스당 전투에서 패배하는 결정적인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마르스라투르 전투는 서유럽 최후의 대규모 기병전 중 하나로 기록되며, 양측 모두 약 1만 6000명에 달하는 큰 피해를 입었다.
7. 분석
사상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