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코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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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리 코뮌은 1871년 프랑스 제3공화국 수립 직후 파리에서 일어난 급진적인 사회주의 혁명으로, 72일간 지속되었다.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의 패배와 사회적 혼란 속에서 파리 시민들이 자치 정부를 수립하면서 시작되었다. 코뮌은 10시간 노동제, 정교 분리 등 진보적인 개혁을 추진했으나, 베르사유 정부군의 공격으로 붕괴되었다. 코뮌은 다양한 사회주의적 사상들이 공존하며 혁신적인 정책들을 제시했지만, 무력 진압으로 실패했다. 코뮌은 사회주의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여성 참정권, 아동 야간 노동 금지 등 후대 사회 운동의 모티브가 되었다. 코뮌에 대한 평가는 다양한 시각으로 갈리고 있으며, 레닌은 세계 최초의 노동계급 사회주의 혁명으로 평가했다.
1870년 9월 2일, 프랑스는 세당 전투에서 패배하였고, 나폴레옹 3세 황제는 포로로 잡혔다. 다음 날 파리에 소식이 전해지자 충격과 분노에 찬 군중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섭정을 대행하던 외제니 황후는 파리를 탈출했고, 제2제정 정부는 급속히 붕괴되었다. 국민의회의 공화파와 급진파 의원들은 새로운 프랑스 공화국을 선포하고, 전쟁을 계속할 의도로 국방정부를 구성했다. 프로이센 군대는 파리로 신속하게 진군했다.
2. 역사적 배경
1871년 프랑스는 농촌 지역의 광대한 가톨릭 보수층과 파리, 마르세유, 리옹 등 몇몇 도시의 공화주의적이고 급진적인 시민들 사이에 심각한 분열을 겪고 있었다. 프랑스 제2제정 하에 치러진 1869년 의회 선거 1차 투표에서 나폴레옹 3세를 지지하는 보나파르트파 후보들은 4,438,000표를 얻은 반면, 공화파 또는 왕정복고파 후보들은 3,350,000표를 얻었다. 그러나 파리에서는 공화파 후보들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어 234,000표를 얻은 반면 보나파르트파는 77,000표에 그쳤다.
1869년 공식 인구 조사에 따르면, 200만 명의 파리 시민 중 약 50만 명이 산업 노동자였는데, 이는 프랑스 전체 산업 노동자의 15%에 해당한다. 다른 사업체의 노동자는 30만~40만 명에 달했다. 공장이나 대기업에 고용된 노동자는 약 40,000명에 불과했고, 대부분은 섬유, 가구, 건설 등의 소규모 산업에 종사했다. 또한 11만 5천 명의 하인과 4만 5천 명의 관리인이 있었다. 프랑스 국민 외에도 이탈리아와 폴란드 출신이 가장 많은 약 10만 명의 이민 노동자와 망명 정치인들이 있었다.
프랑스-프로이센 전쟁과 파리 공방전 동안 중산층과 상류층의 여러 구성원들이 파리를 떠났다. 동시에 독일군이 점령한 프랑스 지역에서 피난민들이 유입되었다. 전쟁과 공방전으로 인한 산업 활동 부족으로 노동 계급과 이민자들이 가장 큰 고통을 겪었고, 그들은 코뮌의 대중적 지지를 위한 기반을 형성했다.
2월, 국민정부가 보르도에서 조직되는 동안 파리에서는 새로운 경쟁 정부가 조직되었다. 휴전 협정에 따라 무장 해제되지 않은 프랑스 방위군은 명목상 1,500명씩 260개 대대, 총 39만 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2월 15일부터 24일까지, 방위군이 선출한 약 500명의 대표가 파리에서 회의를 시작했다. 3월 15일, 방위군과 정규군 간의 대포를 둘러싼 충돌 직전에, 방위군이 만든 여러 단체의 1,325명의 대표가 주세페 가리발디(당시 이탈리아에 있었으며 이 직책을 정중하게 거절했다)를 선출하고 38명의 중앙위원회를 구성했는데, 이 위원회는 바스티유 광장과 사이의 바스프루아 거리에 있는 학교에 본부를 두었다. 새로운 중앙위원회의 첫 번째 투표는 티에르가 임명한 방위군의 공식 사령관인 도렐 드 팔라딘 장군이나 파리의 군사 총독인 비누아 장군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었다.
3월 18일 늦은 시간, 정규군이 파리를 떠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방위군 부대는 신속하게 도시를 장악하기 위해 움직였다. 가장 먼저 행동에 나선 것은 블랑키의 추종자들이었는데, 그들은 곧 라탱 지구로 가서 팡테옹에 보관된 화약과 오를레앙 기차역을 장악했다. 4개 대대가 센 강을 건너 경찰본부를 점령했고, 다른 부대는 방돔 광장에 있는 방위군의 전 본부와 사법부를 점령했다. 그날 밤, 방위군은 정부가 비운 사무실을 점령했고, 재무부, 내무부, 국방부를 신속하게 장악했다. 다음 날 오전 8시, 중앙위원회는 오텔 드 빌에서 회의를 열었다. 그날이 끝날 무렵, 2만 명의 방위군이 오텔 드 빌 앞 광장에 수십 개의 대포와 함께 승리의 행진을 벌였다. 건물 위에는 붉은 깃발이 게양되었다.
블랑키스트들이 이끄는 극좌 중앙위원회 위원들은 티에르 정부를 해산하고 프랑스 전역에 그들의 권위를 부과하기 위해 베르사유로 즉각 진격할 것을 요구했지만, 대다수는 먼저 파리에 더욱 확고한 법적 권위의 기반을 마련하기를 원했다. 위원회는 공식적으로 포위 상태를 해제하고 정부를 운영하기 위한 위원회를 임명하고 3월 23일 선거를 실시했다. 또한 클레망소가 이끄는 파리 시장 대표단을 베르사유에 있는 티에르와 협상하여 파리에 특별한 독립적 지위를 얻기 위해 파견했다.
1871년 3월 22일, "평화의 친구들"이라고 선언하는 깃발을 든 시위대가 방돔 광장으로 들어가는 것을 경비병들이 저지했고, 경비병들은 총격을 받은 후 군중에게 발포했다. 최소 12명이 사망하고 많은 사람들이 부상을 입었다.[10] 이 사건은 라페 거리 학살로 불렸다.
2. 1. 나폴레옹 3세의 실정
2월 혁명 이후 제2공화정이 수립되었으나, 정치적 불안정이 계속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폴레옹의 조카 루이 나폴레옹이 국민의 압도적인 지지로 대통령에 취임하였다.[89][90] 1850년대에 들어서면서 경기 회복이 진행되고 정권은 안정되어 갔다. 루이 나폴레옹은 산업혁명을 강력하게 추진하는 한편, 적극적인 사회 정책을 실시하여 프랑스의 근대화를 추진해 나갔다. 같은 시대, 미국에서는 골드러시의 영향으로 농산물 가격이 상승하여 농업 국가 프랑스를 지탱하는 농민들의 생활 수준이 향상되었다.[91][92]
1851년, 루이 나폴레옹은 국민적 인기를 배경으로 쿠데타를 단행하고, 이듬해 황제에 즉위하여 나폴레옹 3세가 되었다. 이로써 제2제정이 수립되었다.[93][94]
제2제정은 성인 남성 보통선거에 기초한 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지만, 의원 취임에는 반동적인 내용의 1852년 헌법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헌법에 대한 선서가 필요하여, 실질적으로 황제의 신하를 민선하는 정도에 불과했다. 제2제정기 정치의 실태는 황제의 권한이 매우 강하여, 장관 임명에서 행정관 임용에 이르기까지 인사권이 황제에게 집중되어 황제 전제 정치의 색채를 띠고 있었다.[95][96]
하지만 1850년대는 서유럽 여러 나라가 안정된 시대였기 때문에 시대의 순풍을 타고 있었기에, 반동 정치에 대한 국민의 반발도 적었다. 나폴레옹은 즉위 초기에 매우 의욕적이었고, 적극적으로 자유주의 정책을 전개하여 1860년에는 Cobden–Chevalier Treaty|영불 통상 조약영어을 체결했다. 이러한 무역 자유화 정책의 결과, 프랑스에서는 농산물 수출이 증가하여 농민들의 생활은 향상되었다.[97][98] 또한 황제는 여러 계급 위에 군림하는 존재로 여겨졌기 때문에 사회주의(생 시몽주의에 가까운)에 대해서도 수용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고, 황제의 사촌인 샤를 보나파르트의 지도하에 노동자에 대한 혜택적인 정책도 실시되었다. 제2제정기 프랑스 정치는 보나파르티즘이라는 민주주의와 전제주의의 독특한 공존 상태였다고 말할 수 있다.[99]
나폴레옹 3세는 호황을 배경으로 조르주 오스만에 의한 파리 개조와 철도 건설 사업 등 대규모 공공 사업(오스마니자시옹)을 전개하였다. 파리 개조는 관청가와 주택가 등의 구획 정비를 추진하여 서부에 고급 주택가를 조성하고, 하수도 정비 등 공중 위생 시설을 개선하여 불결한 파리를 보다 청결한 도시로 바꾸는 것이었다. 역사적 건축물 주변에 광대한 광장을 조성하는 한편, 광장과 광장을 직선적인 간선도로로 방사형으로 연결하여 도시 과밀을 해소하려 했다. 중세 이래의 파리를 근대 도시로 다시 태어나게 한 것이다. 파리는 20개의 구역으로 구획되어 재편되어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근대 도시 파리가 형성되게 된다.[100][101] 하지만, 이러한 파리 개조 때문에 일반 민중은 가혹한 이주를 강요받았고, 익숙한 중심부에서 쫓겨나 멀리 떨어진 교외로 이주해야 했다. 그 결과, 파리 시 근교에는 중심부를 둘러싸는 형태로 "붉은 벨트"라고 불리는 빈민가가 형성되었다.[102]
1860년대 파리 노동자들은 공장 노동자라기보다는 전근대적인 성격이 강했다. 공예품 제조를 비롯한 전통적인 수공업 생산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았고, 노동자라기보다는 장인이라고 해야 할 유형의 사람들이었다.[103] 이들은 자신의 직업과 기술에 자부심을 가진 장인 기질이 높았고, 프랑스 혁명기 생퀴로트 운동의 역사적 경험을 배경으로 한 민중 주권 사상과 그 연장선상에 형성된 프루동적인 장인 사회주의 사상에 기반하고 있었다.[104] 프랑스 혁명 이래 파리 시민들은 상부에 대한 직소(直訴)나 협상 등의 직접 행동을 중시해왔고, 자코뱅적인 직접 민주주의의 전통이 남아 있었다. 그들은 술집 등에서의 노동자들 간의 교류를 계기로 강한 연대감과 독립적인 계급 의식을 형성하고, 현실 세계에 대한 비판적인 정신을 키워왔다. 산업화·근대화가 진행되는 파리에서는 더욱더 불평등과 계급 분리가 심화되었고, 단순한 강권 정치에 불과한 제2제정에 대한 불만도 이러한 생활 세계 속에서 형성되었다.[105]
이러한 가운데, 시대가 내려감에 따라 제2제정에 대한 역풍이 불기 시작한다.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공황은 곧 나폴레옹 3세의 제정에 대한 사람들의 불만을 강화시켜 간다. 나폴레옹 3세는 사태 타개를 위해 대외 정책을 적극화시키지만, 멕시코 원정의 실패로 인해 황제로서의 권위를 잃는다. 이를 배경으로 강권 정치의 허점이 드러나기 시작하고, “권위 제정”에서 제정은 다음 단계로 과도적인 “자유 제정”으로, 그리고 제권 실추의 최종 단계인 “의회 제정”으로 이행해 간다.[106]
2. 2.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비스마르크의 외교 정책으로 프랑스는 고립되었다. 1868년 스페인 혁명정부가 프로이센 빌헬름 1세의 친척 레오폴트 공에게 왕위 계승을 제안하자 프랑스는 강하게 반대했다.[279][280][283] 16세기 카를 5세 시절처럼 스페인과 독일에 둘러싸이는 상황을 우려했기 때문이다.[281][283] 레오폴트 공은 왕위 계승을 거절했고[282] 빌헬름 1세도 반대했지만, 비스마르크는 엠스 전보 사건 등을 통해 프랑스와의 전쟁을 유도했다.[283]
이에 프랑스 국민 감정이 격해지자 나폴레옹 3세는 1870년 7월 프로이센에 선전포고했다. 그러나 프로이센은 철저한 전쟁 준비를 해왔고, 프랑스는 세당 전투에서 패배하여 나폴레옹 3세가 포로로 잡혔다.[284] 이 소식에 파리에서는 공화주의자들이 제정 폐지와 공화정을 선포했다.[285]
2. 3. 제3공화국 수립
1870년 9월 2일, 세당 전투에서 프랑스가 패배하고 나폴레옹 3세 황제가 포로로 잡혔다.[138][139] 다음 날 파리에 이 소식이 전해지자, 분노한 군중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제2제정은 붕괴되었다. 강베타 등 공화파 의원들은 새로운 프랑스 공화국을 선포하고, 국민의회에서 국방정부를 구성했다.[142][143][144] 이들은 비스마르크의 무리한 요구에 종전 협상을 결렬시키고 전투를 계속하기로 결정했다.[286]
그러나 프랑스는 계속 패배하여 9월 18일 파리가 포위되었고, 이듬해 1월 28일 항복했다.[287] 프로이센은 대표성 있는 정부와의 종전 협상을 요구했고,[288] 1871년 2월 8일 독일군 점령 하에 치러진 선거에서 왕당파가 의회를 장악했다. 아돌프 티에르가 행정 수반으로 선출되어 새 정부를 조직했으나, 파리 시민들은 제2제정의 실패에 대한 심판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선거와 정부에 대해 강한 반감을 가졌다.[289]
티에르 정부는 독일에 유리한 조약을 체결하며 기득권 유지를 추구했다.[289] 2월 26일, 알자스-로렌 할양, 50억 프랑의 전쟁 배상금, 독일군의 파리 입성을 조건으로 하는 종전 협약을 체결했다.[290] 이는 파리 시민들의 분노를 샀다.
3. 파리 코뮌
독일군이 파리를 포위하자, 급진적인 단체들은 국방정부의 방어 능력 부족을 인지하고 시위를 시작했다. 1870년 9월 19일, 주요 노동자 계급 지역 척후병 부대가 시 중심부로 행진하여 코뮌(Commune) 선출을 요구했으나, 국방정부에 충성하는 정규군에 의해 해산되었다. 10월 5일, 5,000명의 시위대가 파리 시청(Hôtel de Ville)으로 행진하여 즉각적인 시 선거와 소총을 요구했고, 10월 8일에는 제1인터내셔널의 외젠 바를랭이 이끄는 수천 명이 "코뮌 만세!"를 외치며 행진했지만, 이들 역시 해산되었다.
10월 후반, 루이 쥘 트로슈 장군은 독일군의 포위를 돌파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9월 27일, 파리와 프랑스 다른 지역을 연결하는 전신이 독일군에 의해 두절되었고, 10월 6일, 국방장관 레옹 갬베타는 열기구를 타고 파리를 떠나 저항을 조직하려 했다.
1871년 2월, 국립정부가 보르도에서 조직되는 동안 파리에서는 새로운 경쟁 정부가 조직되었다. 프랑스 방위군은 휴전 협정에 따라 무장 해제되지 않아 상당한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2월 15일부터 24일까지, 방위군 대표들은 주세페 가리발디를 지도자로 선출하고 38명의 중앙위원회를 구성했다. 중앙위원회는 아돌프 티에르가 임명한 방위군 사령관 등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3월 18일, 방위군 부대는 정규군이 파리를 떠난다는 소식을 듣고 도시를 장악했다. 블랑키 추종자들이 라탱 지구와 오를레앙 기차역을 장악했고, 다른 부대는 센 강을 건너 경찰본부, 방돔 광장의 방위군 본부와 사법부를 점령했다. 그날 밤, 방위군은 재무부, 내무부, 국방부를 장악했다. 다음 날, 중앙위원회는 오텔 드 빌에서 회의를 열었고, 2만 명의 방위군이 붉은 깃발 아래 승리 행진을 벌였다.
블랑키스트들은 베르사유로 즉각 진격할 것을 요구했지만, 대다수는 파리에 법적 권위 기반을 마련하기를 원했다. 위원회는 포위 상태를 해제하고 3월 23일 선거를 실시하기로 했다. 조르주 클레망소가 이끄는 파리 시장 대표단은 베르사유의 아돌프 티에르와 협상하여 파리에 특별한 독립적 지위를 얻으려 했다.
3월 22일, "평화의 친구들" 시위대가 방돔 광장으로 들어가려다 경비병들에게 저지당하고 총격을 받아 12명 이상이 사망했다. 이 사건은 라페 거리 학살로 불렸다.[10]
파리에서는 조르주 클레망소를 포함한 공화파 시장들과 국민군 중앙위원회 사이에 적대감이 커졌다. 3월 22일, 중앙위원회는 자신들이 파리의 합법적인 정부라고 선언하고, 조르주 클레망소를 몽마르트르 시장에서 해임하고, 몽마르트르 시청 등을 장악했다.
3월 26일, 주민 2만 명당 1명을 선출하는 방식으로 92명의 코뮌 의회 의원들이 선출되었다. 중앙위원회와 제1인터내셔널 지도자들은 극좌 성향 후보 명단을 발표했고, 베르사유의 아돌프 티에르 정부는 투표 기권을 촉구했다. 투표율은 48%였으며, 상류층 지역에서는 기권이 많았고 노동 계급 지역에서는 투표율이 높았다.
블랑키를 포함한 몇몇 후보들이 여러 지역구에서 당선되었으나, 약 20명의 온건 공화파와 5명의 급진파는 의원직을 거부했다. 의회는 60명으로 구성되었으며, 블랑키스트, "독립 혁명가", 제1인터내셔널 출신 등 다양한 단체 출신이었다. 조르주 클레망소는 752표를 받았다. 의회에는 노동자, 소규모 사업가, 사무직원, 언론인, 자유 예술 분야 종사자 등이 대표되었고, 20명은 프리메이슨이었다.[11] 여성은 투표할 수 없었다. 3월 27일, 당선자가 발표되었고 다음 날 시청 앞에서 대규모 행사와 퍼레이드가 열렸다.
새로운 파리 코뮌은 3월 28일 첫 회의를 열고, 블랑키 명예 의장 추대, 사형제도 폐지, 징병제 폐지 등 12개 제안을 채택했다. 파리 2구의 공화파 시장 티라르 등 약 20명의 공화파는 코뮌에서 사임했다. 코뮌은 베르사유 정부와 전쟁 상태였으므로 의회 논의는 비밀로 하기로 결의했다.
새 정부는 대통령, 시장, 총사령관을 두지 않았다. 코뮌은 9개 위원회를 설립하고 집행위원회에 보고했다. 최초 조치 중 하나는 징병제 폐지, 국민군대 이외의 군대 결성 금지, 건강한 남성 시민의 국민군대 편입이었다. 이 시스템에서 국민군대는 중앙위원회와 집행위원회에 보고하는 두 명의 사령관을 두어, 아돌프 티에르 정부와의 전쟁에서 책임 소재가 불분명했다.
파리 코뮌은 폐기되었던 프랑스 공화력[12]을 채택하고, 삼색기 대신 붉은 깃발을 사용했다. 내부 의견 차이에도 불구하고, 파리 시에 대한 공공 서비스를 조직하고, 진보적이고 세속적이며 사회민주주의 경향을 띤 정책에 합의했다.
시행된 법령법령 내용 포위 기간 동안의 모든 임대료 면제 제빵업체의 아동 노동 및 야간 작업 폐지 현역 사망 국민군인의 미혼 동거인과 자녀에 대한 연금 지급 담보로 맡겨진 노동자 연장 및 가정 용품(20프랑 이하)의 전당포 무료 반환 상업적 부채 의무 연기 및 이자 폐지 직원의 기업 인수 및 운영 권리(소유주가 버린 경우); 코뮌은 이전 소유주의 보상 권리 인정 고용주의 노동자 벌금 부과 금지[13]
3. 1. 파리 시민의 반발
파리 시민들은 티에르 정부가 체결한 굴욕적인 강화 조약에 크게 반발하며 항전을 요구했다.[291] 1871년 3월 1일, 독일군이 승전 행사를 위해 파리 시내로 입성하자 시민들의 분노는 더욱 커졌다.[291] 시민들은 검은 조기를 게양하고 밤에 불을 켜지 않는 방식으로 저항 의지를 표현했다.[291]
티에르 정부는 구체제의 상징인 베르사유로 이동하여[292] 파리 시민들의 고통을 외면했고, 이에 대한 불신은 커져만 갔다. 1871년 2월 26일, 강화 조약이 체결되면서 알자스-로렌 지방 할양, 50억 프랑의 배상금 지불, 프로이센 군에 의한 파리 점령 등이 결정되자[197][198][199] 파리 시민들과 정부의 갈등은 더욱 깊어졌다.[200]
티에르 정부에 반대하는 병사, 장교들로 구성된 "국민군 중앙 위원회"는[201] 중앙 정부의 통제를 벗어나 국민군을 혁명군으로 만들었다.[202] 국민군은 프로이센에 무기가 압수되는 것을 막기 위해 대포를 몽마르트르, 벨빌 등 노동자 지역으로 이전했다.[206][207]
1871년 3월 18일, 티에르는 파리를 무력으로 제압하기 위해 친정부 군대에 대포 철거를 명령했다. 그러나 국민군 여성 병사들의 저항과 병사들의 명령 불복종으로 실패하고, 르콩트 장군과 클레망 토마 장군은 군중에 의해 살해되었다.[208][209][210] 이 사건을 계기로 파리에서 봉기가 일어나 파리 코뮌 혁명이 시작되었고, 티에르는 베르사유로 도망쳤다.[211][212]
3. 2. 중앙위원회
1871년 3월 18일, 행정수반 티에르는 파리 시민들의 무장 봉기를 막기 위해 국민방위대(시민 의용군)가 보유한 227문의 대포를 회수하고 국민방위대를 강제 해산하려 했다.[292] 대포는 대부분 시민들의 기부로 구매한 것이었기에[292] 파리 시민들은 강하게 반발했다. 정부군 병사들은 몽마르트 언덕에서 국민방위대와 군중의 저항에 직면했다. 일부 병사들은 지휘관의 발포 명령에 불복종했고, 일부는 국민방위대에 합류했다.[293]
이러한 혼란 속에서 르콩트와 토마 장군이 총살당하자, 티에르와 정부는 베르사유로 퇴각했다.[294] 이로써 파리는 사실상 시민들의 손에 넘어갔다.
3. 3. 인민의 단결
파리 시민들과 노동자들은 중앙위원회를 조직하고 코뮌 평의회 선거를 통해 자치 정부인 파리 코뮌을 수립했다.[218] 코뮌은 10시간 노동, 노동자의 건강권을 침해하는 제빵 노동자의 야간 노동 철폐, 종교와 정치의 분리 등 사회 개혁을 주장했다.[266] 파리 코뮌 기간 동안 파리에서는 민중들에 의해 질서가 유지되었다.
파리 코뮌은 자코뱅파, 블랑키파, 무정부주의자, 제1인터내셔널파, 프루동파 등 다양한 이념을 가진 분파로 나뉘었는데, 대체로 무정부주의와 사회주의로 나눌 수 있다.[266] 이들은 야간 이념 학습을 통해 단결하여 70일간 자치 정부를 유지할 수 있었다.
1869년 의회 선거에서 보나파르트파는 443만 8천 표, 공화파 또는 왕정복고파는 335만 표를 얻었으나, 파리에서는 공화파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1869년 공식 인구 조사에 따르면, 파리 시민 200만 명 중 약 50만 명이 산업 노동자였고, 대부분은 소규모 산업에 종사했다. 프랑스-프로이센 전쟁과 파리 공방전 동안 중산층과 상류층은 파리를 떠났고, 독일군 점령 지역에서 피난민들이 유입되었다. 산업 활동 부족으로 노동 계급과 이민자들이 가장 큰 고통을 겪었고, 이들이 코뮌의 대중적 지지 기반을 형성했다.
독일군이 파리를 포위하자 급진적인 단체들은 국방정부에 대한 시위를 시작했다. 9월 19일, 주요 노동자 계급 지역의 척후병 부대가 시 중심부로 행진하여 코뮌(Commune) 선출을 요구했으나, 국방정부에 충성하는 정규군 부대에 의해 해산되었다. 10월 5일, 5,000명의 시위대가 벨빌에서 파리 시청으로 행진하여 즉각적인 시 선거와 소총을 요구했다. 10월 8일, 제1인터내셔널의 외젠 바를랭이 이끄는 수천 명의 척후병이 "코뮌 만세!"를 외치며 시 중심부로 행진했지만, 이들 또한 해산되었다.
10월 후반, 루이 쥘 트로슈 장군은 독일군의 포위를 돌파하기 위해 일련의 무장 공격을 감행했지만 실패했다. 10월 6일, 국방장관 레옹 갬베타는 열기구를 타고 파리를 떠나 독일군에 대한 전국적인 저항을 조직하려고 했다. 9월과 10월, 아돌프 티에르는 유럽을 순방하며 영국, 러시아, 오스트리아-헝가리와 협의했지만, 어느 누구도 독일을 상대로 프랑스를 지원할 의향이 없었다. 그는 휴전 협상 외에는 대안이 없다고 보고했고,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알자스 전체와 로렌 일부의 할양, 그리고 막대한 배상금을 요구했다. 프랑스 국방 정부는 전쟁을 계속하기로 결정했고, 11월 10일 쿨미에르에서 단 한 번의 승리를 거두었지만, 11월 29일 빌리에르에서 파리를 탈출하려는 시도는 실패했다.
파리 시민들의 일상생활은 포위 기간 동안 점점 더 어려워졌다. 12월에는 기온이 -15°C까지 떨어졌고, 센 강이 3주 동안 얼어붙었다. 식량, 땔나무, 석탄, 의약품 부족으로 고통받았고, 밤에는 도시가 거의 완전히 어둠에 잠겼다. 외부 세계와의 유일한 소통 수단은 기구, 전서구, 또는 센 강에 띄워 보낸 철구슬에 담긴 편지였다. 굶주린 시민들은 도시 동물원의 동물들을 거의 다 먹어 치우고, 쥐를 잡아먹는 지경에 이르렀다.
1871년 1월 초, 비스마르크와 독일군은 장기간의 포위 공격에 지쳐 있었다. 그들은 파리 주변 요새에 포를 설치하고 1월 5일부터 밤낮으로 도시를 포격하기 시작했다. 매일 300~600발의 포탄이 시내 중심부를 강타했다. 1871년 1월 11일부터 19일까지 프랑스군은 4개 전선에서 패배했고, 파리는 기근에 직면해 있었다.
1월 22일 정오 무렵, 3, 4백 명의 국가방위군과 급진주의 단체(주로 블랑키스트) 구성원들이 파리 시청 밖에 모였다. 시위대는 군대를 민간 통제하에 두고 코뮌을 즉각 선출할 것을 요구했다. 긴장감이 고조된 가운데 오후 중반에 양측 간에 총격전이 벌어졌고, 시위대 6명이 사망했다. 정부는 두 가지 출판물을 금지하고 혁명가 83명을 체포했다.
파리에서 시위가 벌어지는 동시에 보르도에 있는 국방정부 지도자들은 전쟁을 계속할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 1월 26일, 그들은 파리에 특별 조건을 적용한 휴전 협정을 체결했다. 파리는 독일군의 점령을 받지 않았고, 정규군은 무기를 내려놓았지만 포로로 잡히지는 않았다. 파리는 2억 프랑의 배상금을 지불했다. 쥘 파브르의 요청에 따라 비스마르크는 도시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국가방위군의 무장 해제에 동의하지 않았다.
2월, 국립정부가 보르도에서 조직되는 동안 파리에서는 새로운 경쟁 정부가 조직되었다. 휴전 협정에 따라 무장 해제되지 않은 프랑스 방위군은 명목상 1,500명씩 260개 대대, 총 39만 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2월 15일부터 24일까지, 방위군이 선출한 약 500명의 대표가 파리에서 회의를 시작했다. 3월 15일, 방위군과 정규군 간의 대포를 둘러싼 충돌 직전에, 방위군이 만든 여러 단체의 1,325명의 대표가 주세페 가리발디(당시 이탈리아에 있었으며 이 직책을 정중하게 거절했다)를 선출하고 38명의 중앙위원회를 구성했는데, 이 위원회는 바스티유 광장과 Rue de la Roquette|뤼 드 라 로케트프랑스어 사이의 바스프루아 거리에 있는 학교에 본부를 두었다. 새로운 중앙위원회의 첫 번째 투표는 티에르가 임명한 방위군의 공식 사령관인 도렐 드 팔라딘 장군이나 파리의 군사 총독인 비누아 장군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었다.
3월 18일 늦은 시간, 정규군이 파리를 떠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방위군 부대는 신속하게 도시를 장악하기 위해 움직였다. 가장 먼저 행동에 나선 것은 블랑키의 추종자들이었는데, 그들은 곧 라탱 지구로 가서 팡테온에 보관된 화약과 오를레앙 기차역을 장악했다. 4개 대대가 센 강을 건너 경찰본부를 점령했고, 다른 부대는 방돔 광장에 있는 방위군의 전 본부와 사법부를 점령했다. 그날 밤, 방위군은 정부가 비운 사무실을 점령했고, 재무부, 내무부, 국방부를 신속하게 장악했다. 다음 날 오전 8시, 중앙위원회는 오텔 드 빌에서 회의를 열었다. 그날이 끝날 무렵, 2만 명의 방위군이 오텔 드 빌 앞 광장에 수십 개의 대포와 함께 승리의 행진을 벌였다. 건물 위에는 붉은 깃발이 게양되었다.
블랑키스트들이 이끄는 극좌 중앙위원회 위원들은 티에르 정부를 해산하고 프랑스 전역에 그들의 권위를 부과하기 위해 베르사유로 즉각 진격할 것을 요구했지만, 대다수는 먼저 파리에 더욱 확고한 법적 권위의 기반을 마련하기를 원했다. 위원회는 공식적으로 포위 상태를 해제하고 정부를 운영하기 위한 위원회를 임명하고 3월 23일 선거를 실시했다. 또한 클레망소가 이끄는 파리 arrondissements|아롱디스망프랑스어 시장 대표단을 베르사유에 있는 티에르와 협상하여 파리에 특별한 독립적 지위를 얻기 위해 파견했다.
1871년 3월 22일, "평화의 친구들"이라고 선언하는 깃발을 든 시위대가 방돔 광장으로 들어가는 것을 경비병들이 저지했고, 경비병들은 총격을 받은 후 군중에게 발포했다. 최소 12명이 사망하고 많은 사람들이 부상을 입었다.[10] 이 사건은 라페 거리 학살로 불렸다.
파리에서는 클레망소를 포함한 공화파 시장들과 파리 국민군 중앙위원회 사이에 적대감이 고조되고 있었다. 선거 전날인 3월 22일, 중앙위원회는 시장들이 아닌 자신들이 파리의 합법적인 정부라고 선언했다. 중앙위원회는 클레망소가 더 이상 몽마르트 시장이 아니라고 선언하고, 몽마르트 시청과 더욱 급진적인 국민군 병사들이 점거하고 있던 1구와 2구 arrondissements|아롱디스망프랑스어 시청을 장악했다. 클레망소는 "우리는 두 무리의 미친 사람들, 즉 베르사유에 있는 사람들과 파리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 끼어 있다"고 불평했다.
3월 26일 선거에서 주민 2만 명당 1명씩 선출하는 방식으로 92명의 코뮌 의회 의원들이 선출되었다. 선거를 앞두고 중앙위원회와 인터내셔널 지도자들은 대부분 극좌 성향의 후보 명단을 발표했으며, 후보들은 선거 운동 기간이 며칠밖에 되지 않았다. 베르사유의 티에르 정부는 파리 시민들에게 투표를 기권할 것을 촉구했다. 투표가 끝난 후 48만 5천 명의 등록 유권자 중 23만 3천 명, 즉 48%가 투표에 참여했다. 상류층 지역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투표를 기권했다. 7구와 8구에서는 77%, 15구에서는 68%, 16구에서는 66%, 6구와 9구에서는 62%가 기권했다. 하지만 노동 계급 지역에서는 투표율이 높았다. 20구에서는 76%, 19구에서는 65%, 10구, 11구, 12구에서는 55~60%였다.
블랑키(파리 외곽에서 체포되어 브르타뉴 감옥에 수감 중이었음)를 포함한 몇몇 후보들이 여러 arrondissements|아롱디스망프랑스어에서 당선되었다. 약 20명의 온건 공화파와 5명의 급진파를 포함한 다른 당선자들은 의원직을 거부했다. 결국 의회는 60명으로 구성되었다. 당선자 중 9명은 블랑키스트(일부는 인터내셔널 출신이기도 함)였고, 델레슐즈와 피아트를 포함한 25명은 "독립 혁명가"로 분류되었으며, 약 15명은 인터내셔널 출신이었고, 나머지는 다양한 급진주의 단체 출신이었다. 가장 유명한 후보 중 한 명인 클레망소는 752표만 받았다. 의회에 대표된 직업은 노동자 33명, 소규모 사업가 5명, 사무직원 19명, 언론인 12명, 자유 예술 분야 종사자 등이었다. 20명은 프리메이슨이었다.[11] 모든 당선자는 남성이었으며, 여성은 투표할 수 없었다. 당선자는 3월 27일에 발표되었고, 다음 날 국민군이 주최하는 대규모 행사와 퍼레이드가 붉은 깃발로 장식된 시청 앞에서 열렸다.
새로운 파리 코뮌은 3월 28일 열광적인 분위기 속에서 첫 회의를 열었다. 회원들은 블랑키를 명예 의장으로 추대하는 것, 사형제도 폐지, 징병제 폐지, 다른 도시에 코뮌을 설립하는 것을 돕기 위해 대표를 파견하는 제안, 그리고 파리 코뮌 회원이 동시에 국민의회 회원이 될 수 없다는 결의안 등 12개의 제안을 채택했다. 이는 특히 파리 2구(2nd arrondissement|2e 아롱디스망프랑스어)의 공화파 시장이자 코뮌과 국민의회 모두에 선출된 티라르를 겨냥한 것이었다. 새로운 코뮌의 더욱 급진적인 정치적 방향을 목격한 티라르와 약 20명의 공화파는 코뮌에서 사임하는 것이 가장 현명하다고 판단했다. 또한 장시간의 논쟁 끝에, 코뮌이 베르사유 정부와 사실상 전쟁 상태에 있었고 적에게 의도를 알려서는 안 되었기에, 의회의 논의 내용을 비밀로 할 것이라는 결의안도 통과되었다.
급진적인 회원들이 제안한 모델을 따르면서, 새 정부는 대통령, 시장, 총사령관을 두지 않았다. 코뮌은 파리의 행정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국민의회와 유사한 9개의 위원회를 설립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위원회들은 다시 집행위원회에 보고했다. 통과된 최초 조치 중 하나는 징병제 폐지, 국민군대 이외의 군대를 수도에 결성하거나 들여올 수 없다는 것, 그리고 모든 건강한 남성 시민은 국민군대의 일원이라는 내용이었다. 이 새로운 시스템에는 중요한 약점이 하나 있었다. 국민군대는 이제 두 명의 다른 사령관을 두게 되었는데, 그들은 국민군대 중앙위원회와 집행위원회 모두에 보고했고, 티에르 정부와의 불가피한 전쟁에서 누가 책임자인지 명확하지 않았다.
파리 코뮌은 짧은 기간 동안 폐기되었던 프랑스 공화력[12]을 채택했고, 공화국 삼색기 대신 사회주의적인 붉은 깃발을 사용했다. 내부적인 의견 차이에도 불구하고, 당시 2백만 명의 주민이 거주하던 파리 시에 대한 공공 서비스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또한 진보적이고 세속적이며 사회민주주의 경향을 띤 특정 정책에 대한 합의에 도달했다. 코뮌이 진압되기 전 60일도 채 되지 않아 회합했기 때문에 실제로 시행된 법령은 몇 가지에 불과했다.
시행된 법령
법령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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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위 기간(지불이 중단된 기간) 동안의 모든 임대료 면제 |
제빵업체의 아동 노동 및 야간 작업 폐지 |
현역에서 사망한 국민군인의 미혼 동거인과 자녀에 대한 연금 지급 |
포위 기간 동안 담보로 맡겨진 모든 노동자의 연장 및 가정 용품(20프랑 이하의 가치)에 대한 전당포의 무료 반환 |
상업적 부채 의무 연기 및 부채에 대한 이자 폐지 |
직원이 기업을 인수하여 운영할 권리(소유주가 버린 경우);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뮌은 이전 소유주의 보상 권리를 인정했다. |
고용주가 노동자에게 부과한 벌금 금지[13] |
4. 무력 충돌
1871년 5월 21일, 마크 마옹의 지휘 아래 프랑스 정부군은 파리 코뮌을 진압하기 위해 파리로 진입하였다.[297]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네덜란드, 벨기에, 러시아 제국, 영국 등은 프랑스 정부군을 지지하였다.
당시 파리 시민들은 튈르리 궁전 정원에서 코뮈나르(코뮌 지지자) 전사자 가족을 지원하기 위한 대규모 음악회에 참석하고 있었다. 이 틈을 타 베르사유 정부군이 파리의 방어선을 뚫고 들어왔다. 미리 심어놓은 간첩으로부터 생클루 문 인근에 수비대가 없다는 하얀 손수건 신호를 받은 베르사유군은 일차 선발부대를 보내 일대를 장악했다. 긴박한 소식이 코뮌 평의회에 알려지자 평의원들은 서둘러 산회한 뒤 방위태세를 갖추기 위해 사방으로 흩어졌다. 코뮌 군사위원회 대표 샤를 들레클뤼즈는 호소문을 발표했다.
밤이 되면서 시내에 들이닥친 정부군 본대 2만 명은 눈에 띄는 비무장 시민들에게 닥치는 대로 발포했다. 파리의 거리마다 바리케이드를 사이에 두고 치열한 시가전이 벌어졌다. 파리 코뮌의 마지막 "피의 일주일(5월 21일~28일)"은 이렇게 시작되었다.[297] 죽은 사람의 수는 오랜 세월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고 있는데, 적게는 1만 명 부터, 많게는 5만 명까지로 다양한 설이 있다. 진압 후 파리 코뮌의 연루자 10만여 명이 체포되어 그 중 4만여 명이 군사재판에 기소되었다.
5월 21일, 베르사유 정부군은 스파이가 된 뒤카텔(Ducatel)의 안내로 밤에 생클루 문을 통해 파리 시내에 침입하여 시가전을 시작했다.[242] 대포 진지를 우회하면서 각 진지를 고립시켜 후방에서 공격하는 전술로 하나하나 대포 진지를 공략, 15구와 16구를 순식간에 점령하고 국민군을 점점 몰아붙였다.[243]
23일에는 베르사유군이 파리 서부에서 침입하여 동부로 공세를 퍼부었고, 몽마르트르 언덕을 점령하여 파리 중심가를 장악했다.[244] 적의 압도적인 공세에 맞서 코뮌 측은 노인과 아이들은 바리케이드를 만들기 위해 도로의 돌을 뜯어내어 대포 진지를 보강하고, 여성들은 무기를 들고 진지에서 필사적으로 저항했으며, 전투 중간중간 부상자를 치료하고 간호하는 등 남성 못지않은 활약을 보였다.[255]
하지만 이때 베르사유군은 주요 고지를 장악하여 승리 조건을 거의 충족했다고 할 수 있다. 베르사유군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상황이었기에 불필요한 유혈 사태를 피하고 동포에게 관대한 조치를 취할 수도 있었지만, 포로들을 잇달아 처형하고 티에르 정부의 묵인 아래 시민을 대상으로 한 본격적인 대량 학살을 시작했다.
D. 비엘주 그림
전투 중 코뮌은 시가가 적에게 점령되어 거점으로 이용되는 것을 막기 위해 건물에 불을 질렀고, 튀르리궁과 재무부 등 관공서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파리 전역으로 번졌다.[246] 파리 시청이 소실되면서 파리 개조 이전에 작성된 파리 지도를 포함한 많은 역사적 문서가 유실되었다.[247] 베르사유군은 계속 진격하여 프랑스 은행, 증권거래소, 루브르 박물관을 점령했다. 보복으로 코뮌 경시위원장 리고(Rigault)는 정부 측 스파이 세 명을 처형했고, 리고 자신은 다음 날 정부군에 붙잡혀 현장에서 처형되었다.[248]
5월 24일, 코뮌은 시청 방어를 포기하고 동부 11구청으로 피신했다. 코뮌은 물량이 압도적으로 많은 베르사유군에게 패배를 거듭했고, 무기와 탄약도 부족하여 조직적인 저항이 불가능해졌다. 중앙 경비대는 항복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여 드레클뤼즈(Cluseret)를 비롯한 대표단을 파견하여 베르사유군에 화의를 청했지만, 배신으로 간주한 시민들에게 저지당하여 협상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249] 코뮌 지도자들은 각자 죽음을 결심하고 각자의 죽음을 선택했다. 죽음을 직감한 드레클뤼즈는 정장을 차려입고 실크햇과 턱시도를 입고 적군으로 나아가 적군의 일제 사격을 받고 화려한 최후를 맞았다.[250]
또한 베르사유군의 학살은 심화되었고, 형식적인 군사 재판이라는 의미 없는 처형극이 반복되었다. “시민의 생명은 새의 깃털만큼 가볍다. 누구든 체포되면 총살당한다”는 상황이었다. “피의 주간(Semaine sanglante)”이라고 불리는 이 끔찍한 시가전으로 인해 무차별 살인이 발생하여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많은 시민들이 살해당했다.[251] 시민들도 달보아(Darboy) 대주교, 도제리(Dojieu) 대주교, 은행가 자켈(Jacquel) 등 인질을 총살하는 등 양측 모두 무의미한 살육을 반복했다.[252] 벨빌 지구에 남은 코뮌은 군사위원이 된 바를랭(Varlin)과 빌레트(Villette)에 의한 최후의 저항을 시도하고 있었다.
A. 로비다 그림
27일, 코뮌의 최후의 결전은 일방적인 학살의 양상을 띠게 된다. 바를랭의 최후의 항복 결정도 “항복하지 말고 싸우면서 죽는 것, 이것이야말로 코뮌의 위대함을 만든다”고 말하는 콘스탕 마르탱(Constant Martin)의 반대로 무산되었다.[254] 최종적으로 파리 침입부터 최종 국면까지 3만 명에 달하는 전사자를 내고 파리 코뮌은 와해되었고, 페르 라셰즈 묘지에서의 병사와 시민들의 필사적인 저항과 학살을 끝으로 5월 28일, 파리 전역이 진압되고 코뮌은 붕괴되었다.[255]
전투 종료 후에도 베르사유 정부군이 주장하는 “법과 정의”에 의한 백색 테러는 수그러들지 않았고, 많은 국민군과 시민들이 즉결 재판으로 처형당했다.[256] 땅 속에서는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전사들의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바를랭은 지쳐 앉아 있는 곳에서 베르사유군에 체포되었고, 클레망-토마(Clément-Thomas) 장군, 르콩트(Leconte) 장군 살해의 주범으로 돌팔매질과 욕설을 퍼붓는 시중끌림의 굴욕을 당했다. 린치로 인해 안구가 빠져나오는 등 죽기 직전에 이르러 바를랭은 “공화국 만세! 코뮌 만세!”라는 마지막 외침을 남기고 사망했다. 그 후 바를랭의 시체에서 시계 등 소지품이 약탈당했다.[257]
M. 뤼스 그림
다른 코뮌 전사들도 전투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잇달아 체포되어 좁은 감옥에 가득 채워져 방치되었고, 초여름 더위에 약해진 자부터 차례로 처형되었다. 재판에 따라 370명이 사형되었고, 410명이 강제 노역, 4000명이 요새 감금, 3500명이 뉴칼레도니아 등 원거리 해외 영토로 유형되었다.[258] 관련 없는 시민들도 현장에 있었다는 불합리한 이유로 살해되었고, 베르사유군 장군들은 포로에게 핑계를 대고 처형하는 등 파리 전역은 코뮌 토벌을 명분으로 한 학살의 무대가 되었다. 파리 코뮌의 진압은 온건 공화파와 왕당파에게는 “위험한 급진적 사상을 선동하는 반역자”를 제거할 절호의 기회였다. 역설적으로 이 “공적”으로 티에르가 이끄는 공화파는 농민, 부르주아, 왕당파로부터 제3공화정이라는 정치 체제의 지지를 얻게 되었다.
5. 성과
파리 코뮌은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프랑스 사회주의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코뮌의 이상은 1936년 인민전선 내각 수립과 1981년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 당선으로 이어졌으며, 노동자의 권리, 사회 정의, 민주주의적 자치와 같은 가치들을 강조했다. 파리 코뮌은 여성 참정권, 아동 야간 노동 금지, 정교 분리 등 혁신적인 정책을 주장하였고, 이는 후대 사회 운동의 영감이 되었다.
6. 평가
레닌은 파리 코뮌을 "세계 역사상 최초로 벌어진 노동계급의 사회주의 혁명의 예행연습"이라고 평가했다.[299] 이는 사회주의 운동에서 파리 코뮌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카를 마르크스는 코뮌 붕괴 이틀 후, 『프랑스 내전』을 집필하여 코뮌 투사들의 명예를 옹호했다. 하지만 마르크스의 코뮌에 대한 직접적인 영향력은 없었고, "프랑스 내전"에서 코뮌을 변호했기 때문에 유명해지고, 관련지어지게 되었다. 코뮌의 대부분은 제1인터내셔널에 참가했지만, 가장 호전적인 혁명가들은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라 자코뱅파나 블랑키주의자였다.
파리 코뮌은 사회 변혁을 위한 민중의 자발적인 힘을 보여주었으며, 그 이상은 현대 사회에도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공산주의자, 좌파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 등은 파리 코뮌을 해방된 사회의 모델이거나 전조로 보았으며, 풀뿌리에서부터 시작되는 참여 민주주의에 기반한 정치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다.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 미하일 바쿠닌, 그리고 후대의 레닌은 코뮌의 제한적인 경험으로부터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국가의 소멸"에 관한 이론적 교훈을 이끌어내려고 했다.
마르크스는 ''프랑스 내전''(1871)에서 코뮌의 업적을 칭찬하고, 미래 혁명 정부의 원형이자 프롤레타리아 해방을 위한 "마침내 발견된 형태"로 묘사하며, "코뮌을 세운 파리의 노동자들은 새로운 사회의 영광스러운 선구자로 영원히 기념될 것이다. 그들의 순교자들은 노동 계급의 위대한 심장 속에 봉헌되어 있다. 그들의 학살자들은 역사가 이미 영원한 칼주에 못 박았으며, 그들의 사제의 모든 기도로도 구원받을 수 없을 것이다."라고 썼다.[54]
하지만 사적으로 마르크스는 코뮌에 대해 더 비판적인 견해를 표명했다. 1881년 네덜란드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코뮌은 단순히 특수한 상황에 처한 도시의 반란이었고, 코뮌의 대다수는 결코 사회주의적이 아니었으며, 그럴 수도 없었다. 하지만 약간의 상식만 있었다면, 그들은 대중에게 유리한 베르사유와의 타협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사실상 그것은 유일한 실질적인 가능성이었다."라고 썼다.
엥겔스는 코뮌이 상비군 부재, "구역"의 자치 경찰 등의 특징으로 인해 낡고 억압적인 의미에서의 "국가"가 아니었으며, 국가 자체의 폐지를 향해 나아가는 과도기적인 형태였다고 주장했다. 그는 레닌과 볼셰비키가 사용한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코뮌은 노동자들이 운영하고 노동자들의 이익을 위한 국가였다고 말했다. 그러나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프랑스 국민 전체와의 연대 실패, 국가 기계의 완전한 재조직 실패, 중앙위원회가 권력을 대의회에 너무 빨리 이양한 것, 후퇴하는 부르주아에 대한 즉각적인 추격 실패, 프랑스와 프로이센이 코뮌에 맞서 연합할 가능성을 인식하지 못한 것 등을 코뮌의 약점이나 오류로 분석했다.[55]
반권위주의 사회주의자들은 공산주의적 권력 장악 개념과 일시적인 과도 국가에 반대하며, 무정부주의자들은 코뮌에서 볼 수 있었던 것처럼 분권화된 노동자 평의회의 구성을 통해 총파업과 국가의 즉각적인 해체를 옹호했다.
레닌은 마르크스처럼 코뮌을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예로 간주했지만, 코뮌 사람들이 자신의 입지를 확보하기 위해 충분히 노력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그는 코뮌 사람들이 "...국가 내에 더 높은 [자본주의적] 정의를 세우는 꿈에 현혹되어... 중도에서 멈추었다... 예를 들어 은행과 같은 기관은 인수되지 않았다."는 점과 "과도한 관용"이 계급 적을 "파괴"하는 것을 막았다고 지적했다. 레닌에게 코뮌 사람들은 "내전에서 직접적인 군사 작전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했고, 파리에서 승리할 베르사유에 대한 단호한 공세를 시작하는 대신, 주저하며 베르사유 정부가 어두운 세력을 모아 5월의 피비린내 나는 일주일을 준비할 시간을 주었다." [56]
1926년 마오쩌둥은 ''파리 코뮌 기념의 중요성''을 발표하며,[57] 레닌의 분석과 유사하게 코뮌의 실패 이유로 지도력 있는 통일된 당의 부족과 적에게 너무 관대했던 점을 꼽았다.[57]
파리 코뮌은 1905년 모스크바 봉기, 헝가리 소비에트 공화국, 광저우 봉기, 페트로그라드(1917년), 1927년 상하이 코뮌, 상하이 인민공사 등 다른 봉기들에 영감을 주었다. 코뮌은 이후 공산주의자 및 좌익 지도자들에게 존경받았다. 레닌은 러시아 소비에트를 코뮌의 현대적 형태로 규정[67]하고 "우리는 거인들의 어깨 위에 올라탄 난쟁이일 뿐이다"라고 썼다. 그는 볼셰비키 정부가 코뮌보다 두 달 이상 오래 지속된 날 모스크바의 눈 속에서 춤을 추며 축하했다. 볼셰비키 정부 장관들과 관리들은 코뮌의 Commissaires프랑스어에서 빌려온 ''인민위원''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레닌 묘소는 1924년 프랑스 공산당원들이 가져온 코뮌의 붉은 깃발로 장식되었다. 조세프 스탈린은 "1917년 우리는 공산주의 사회, 노동자들의 협회를 건설하고 관료주의에 종지부를 찍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아직 달성하기에는 먼 목표입니다."라고 썼다. 볼셰비키들은 전함 세바스토폴을 Parizhskaya Kommunaru로 개명했고, 소비에트 연방 시절 보스호드 1호 우주선은 코뮌의 깃발 일부를 탑재했다.
프랑스 국민의회는 1873년 7월 24일 몽마르트에 사크레쾨르 대성당 건설 법령을 공포했다. 페르 라셰즈 묘지 벽에는 147명의 코뮌 참여자들이 처형된 코뮌 참여자들의 벽이 있다.[71] 매년 5월에는 이 묘지에서 코뮌을 기리는 추모 행사가 열린다. 파리 시청 뒤편에는 군인들에게 총살당한 코뮌 참여자들의 집단 무덤 자리를 표시하는 기념비가 있다.
파리 코뮌은 중국의 문화 대혁명 기간 동안 되풀이되는 주제였다.[57]
7. 관련 논문
저자 | 제목 | 학술지 | 발행 기관 | 발행 연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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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열 | 1871년의 파리 코뮌과 결사(association)의 원칙 | 《프랑스사 연구》 3 | 한국프랑스사학회 | 200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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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대균 | 랭보와 파리 코뮌 -1871년 5월의 시 분석- | 《프랑스문화예술연구》 34 | 프랑스문화예술학회 | 2010년 |
현재열 | 1871년 파리 코뮌의 "아쏘시아시옹주의(Associationisme)": 이념과 실천 | 《서양사 연구》 51 | 한국서양사연구회 | 2014년 |
김종원 | 자유의 공간, 일상의 변화, 새로운 정치: 1871년 파리 | 《역사 연구》 35 | 역사학연구소 | 2018년 |
현재열 | 파리 코뮌의 분열과 제3공화국 초기의 통합 -1880년의 코뮌 사면을 중심으로- | 《역사와 경계》 111 | 부산경남사학회 | 201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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