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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우스 자코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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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리우스 자코브는 1879년 프랑스에서 태어난 아나키스트로, "밤의 노동자"라는 조직을 이끌며 약 150건의 절도 행각을 벌였다. 그는 사회 불평등에 저항하며, 훔친 돈을 아나키스트 운동에 기부했다. 자코브는 경찰과의 충돌 끝에 체포되어 종신 강제 노동형을 선고받았지만, 석방 후에도 아나키스트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행위를 사회에 대한 저항으로 여겼으며, "삶의 권리는 구걸하는 것이 아니라 쟁취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자코브는 말년에 불법주의의 효용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며, 1954년 사망했다.

2. 어린 시절과 방황

마리우스 자코브는 1879년 마르세유의 노동자 계급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제빵사였다. 11세에 선원 견습생으로 등록했다.[1]

자코브는 약 150건의 절도 행위에 연루되었고, 갱단이 남긴 조롱 섞인 메모로도 유명했다. 1901년 루앙의 생 세베르 교회에 남긴 메모에는 "italics=no|Dieu des voleurs, recherche les voleurs de ceux qui en ont volé d’autres프랑스어" ("도둑의 신이여, 다른 사람에게서 훔친 자들의 도둑을 찾아라")라고 적혀 있었다.[1]

오를레앙에서 경찰관에게 총격을 가하고 탈출한 사건, 아베빌에서 경찰관 살해 후 체포된 사건 등 갱단은 경찰과 여러 차례 충돌했다. 아미앵 재판에서 자코브는 "삶의 권리는 구걸할 수 없고, 빼앗아야 한다"(italics=no|Le droit de vivre ne se mendie pas, il se prend프랑스어)라고 주장하며 자신의 사상을 표명했다. 그는 사제들의 금고를 털었다고 말했다.[1]

2. 1. 출생과 해상 생활

마르세유의 노동계급 가정에서 태어난 자코브는 12살에 견습 선원으로 등록하여 시드니로 가는 배에 올랐다. 그는 이 항해에 대해 "나는 세계를 보았지만, 아름답지 않았다."라고 회상했다. 짧은 해적 생활을 경험했지만, 너무 잔인하다고 여겨 그만두고 1897년 마르세유로 돌아와 선원 생활을 포기했다.[1]

2. 2. 범죄의 시작과 아나키즘

마르세유의 노동계급 가정에서 태어난 자코브는 12살에 항해 견습 선원으로 등록하여 시드니로 가는 배에 탔다. 그는 이 항해에 대해 "나는 세계를 보았지만, 아름답지 않았다."라고 회상했다. 짧은 해적 생활을 너무 잔인하다고 여겨 거부하고, 1897년 마르세유로 돌아와 선원 생활을 포기했다. 견습 조판공으로 일하면서 아나키스트 모임에 참석했고, 미래의 아내 로즈를 만났다.[1]

19세기 후반, 의회 사회주의자들은 종종 폭력적으로 노동계의 아나키스트들에게 반대했다. 사회주의자들은 선거를 통해 합법적으로 권력을 얻으려 했지만, 아나키스트들은 사회 정의가 기존 권력 구조를 통해서는 달성될 수 없으며, 노동 계급의 직접 통제를 통해 얻어지는 것이라고 믿었다. 파리 코뮌의 억압 이후 벨 에포크 시대의 아나키스트들은 개인의 폭력이라는 형태를 띠기 시작했으며, 국왕, 정치인, 군인, 경찰관, 독재자, 치안판사 등이 그 목표였다. 많은 아나키스트들이 감금되어 기요틴형에 처해졌다. 라바콜과 같은 인물은 사형에 처해졌다.[1]

사소한 절도 행위로 체포되어 6개월 형을 선고받은 후, 자코브는 재적응에 어려움을 겪었고, 일종의 평화적 불법주의 태도를 취하기로 결심한다.[1] 1899년 3월 31일, 마르세유에서 전당포 절도를 저지른 것이 그의 첫 불법 행위였다. 이후 툴롱에서 체포되었으나, 5년 징역을 피하기 위해 정신 이상을 위장했다. 1900년 4월 19일, 간호사 로이에르의 도움을 받아 엑상프로방스의 몽페린 정신 병원에서 탈출하여 세트로 피신했다. 그곳에서 "밤의 노동자"라는 남성 단체를 조직했다. 이들의 원칙은 자신의 생명과 경찰로부터의 자유를 보호하기 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살인을 하지 않고, 훔친 돈의 일정 비율을 아나키스트 대의를 위해 투자하는 것이었다.[1]

3. '밤의 노동자들'과 일리걸리즘

1900년부터 1903년까지 자코브는 2명에서 4명으로 구성된 그룹으로 활동하며 파리와 그 주변 지역, 그리고 더 먼 지역에 걸쳐 150번가량 빈집을 털었다.[1] 1901년 2월 27일 오를레앙에서는 탈출을 위해 경찰관에게 총격을 가하기도 했으며, 이 과정에서 그의 친구이자 공범인 로이에르가 체포되기도 했다.[1]

3. 1. 조직 결성과 활동 원칙

1899년, 자코브는 툴롱에서 5년의 감금 생활을 피하기 위해 환각을 경험하는 척했다. 1900년 4월 19일, 그는 남성 간호사의 도움으로 엑상프로방스의 정신병원에서 탈출하여 세트로 도망쳤다. 그곳에서 그는 "밤의 노동자들(the workers of the night)"이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이 조직의 활동 원칙은 다음과 같았다.[1]

  • 경찰에게서 자신의 삶과 자유를 지켜야 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살인을 하지 않는다.
  • 오직 사회의 기생충(보스, 판사, 군인, 사제)에게서만 훔친다. 건축가, 의사, 예술가 등 유용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에게서는 훔치지 않는다.
  • 훔쳐낸 돈의 일부는 아나키스트적 활동과 관계된 것에 투자한다.


자코브는 이상주의적 아나키스트들과 활동하는 것을 피했고 대신 범죄자들과 동료 일리걸리스트들과 함께했다.

그가 표적한 집에 주인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자코브와 그의 갱단은 문틈에 종이를 끼워 넣고 그것이 제자리에 아직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다음날 돌아오곤 했다. 추가적으로 자코브는 문과 자물쇠를 따는 전문가가 되었다. 또 다른 영리한 범죄 수단은 윗층에서 아파트에 진입하는 방법이었다. 자코브는 작은 구멍을 통해 목표 아파트의 천장에 우산을 넣었고, 우산이 삽입된 뒤에 펼쳐서 천장을 뚫으면서 발생하는 잔해에 의한 소음을 줄였다.

3. 2. 범죄 수법과 대상

자코브는 자신의 삶과 자유를 경찰로부터 지켜야 하는 상황이 아니면 살인을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웠다. 그는 사회의 기생충(보스, 판사, 군인, 사제)에게서만 훔치고, 건축가, 의사, 예술가 등 유용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대상으로 삼지 않았다. 또한 훔친 돈의 일부는 아나키스트적 활동에 투자했다.[1] 그는 이상주의적 아나키스트들과는 거리를 두고 범죄자, 일리걸리스트들과 함께 활동했다.

자코브와 그의 갱단은 표적한 집에 주인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문틈에 종이를 끼워 넣고 다음 날 돌아와 종이가 그대로 있는지 확인했다. 자코브는 문과 자물쇠를 따는 전문가이기도 했다. 또 다른 범죄 수법은 윗층에서 아파트에 진입하는 것이었다. 자코브는 목표 아파트 천장에 작은 구멍을 뚫고 우산을 넣어 펼침으로써 천장을 뚫을 때 나는 소음을 줄였다.

1901년 2월 14일, 루앙의 생 세베르 교회에 "italics=no|Dieu des voleurs, recherche les voleurs de ceux qui en ont volé d’autres프랑스어" ("도둑의 신이여, 다른 사람에게서 훔친 자들의 도둑을 찾아라")라는 메모를 남기기도 했다.[1] 그는 사제를 털었고, 각 사제가 교구민이 교회에 기부했지만 사제 자신이 보관하고 있던 돈이 든 금고를, 때로는 여러 개를 발견했다고 말했다.[1]

3. 3. 아브빌 사건과 체포

1899년 7월 3일, 툴롱에서 자코브는 5년 감금형을 피하기 위해 환각 증세를 가장했다. 1900년 4월 19일, 남성 간호사의 도움으로 엑상프로방스의 정신병원에서 탈출해 세트로 도망쳤다.[1] 그는 그곳에서 "밤의 노동자들(the workers of the night)"이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이 조직의 원칙은 다음과 같았다. 경찰로부터 자신의 삶과 자유를 지켜야 할 때를 제외하고는 살인하지 않고, 사회의 기생충(보스, 판사, 군인, 사제)에게서만 훔치며, 건축가, 의사, 예술가 등 유용한 직업을 가진 사람에게서는 훔치지 않으며, 훔친 돈의 일부는 아나키스트 활동에 투자하는 것이었다.[1]

1903년 4월 21일, 아브빌에서 범행을 저지르다 탈출 과정에서 경찰을 살해했고, 자코브와 공범 두 명은 체포되었다.[1] 2년 후, 자코브는 아미앵 법정에 출두했다. 아나키스트 지지자들이 도시에 몰려들었고, 그는 이 기회를 통해 자신의 사상을 밝혔다. "당신은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 반역한 사람, 강도질로 살아온 자." 그는 사형은 면했지만, 카옌에서 종신 강제 노동형을 선고받았다.[1]

4. 재판과 투옥, 그리고 이후의 삶

1905년 3월 22일, 법원은 자코브에게 종신 강제 노동을 선고했고, 그는 구제 섬으로 보내졌다.[1] 그는 탈옥을 시도하여 자주 교도소 법정에 소환되었으며, 1908년에는 동료 죄수 카펠레티를 살해한 혐의로 Île Saint-Joseph에서 3년을 보냈다.[1] 수감 중에도 자코브는 어머니 마리와 계속 편지를 주고받았고, 마리는 아들의 석방을 위해 노력했다.[1] 1925년 7월 14일, 가스통 두메르그 프랑스 대통령은 그의 형량을 프랑스에서 복역하는 5년 징역으로 감형했다.[1] 자코브는 1927년 12월 31일에 석방되었다.[1]

석방 후, 자코브는 파리에서 일하다가 1931년에 여행 판매원이 되었다.[1] 1936년에는 바르셀로나로 가서 CNT를 돕고자 했으나, 곧 프랑스로 돌아왔다.[1] 1941년에는 그의 어머니가 사망했다.[1] 그는 노환으로 죽기보다는 "건강하게 죽고 싶어"했으며,[1] 1954년 8월 17일자 편지에서 "J'ai vécu, je puis mourir|나는 살았고, 죽을 수 있다프랑스어"라고 썼다.[1] 그는 1954년 8월 28일 뢰이이쉬르인드르에서 사망했다.[1] 자코브는 아나키스트반파시스트 신념을 굳게 지켰지만, 인생의 마지막에는 불법주의의 장점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2]

4. 1. 아미앵 재판과 사상

자코브는 1879년 마르세유의 노동자 계급 가정에서 태어났다. 1899년 3월 31일, 마르세유에서 전당포 절도를 저지른 후, 툴롱에서 체포되어 5년 징역을 피하기 위해 정신 이상을 위장했다. 1900년 4월 19일, 간호사의 도움을 받아 엑상프로방스의 정신 병원에서 탈출하여 세트로 피신했다. 그곳에서 그는 "밤의 노동자"라는 단체를 조직했다. 이들의 원칙은 자신의 생명과 경찰로부터의 자유를 보호하기 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살인을 하지 않고, 훔친 돈의 일정 비율을 아나키스트 대의를 위해 투자하는 것이었다.[1]

자코브는 약 150건의 절도 행위에 연루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절도 행위뿐만 아니라 갱단이 남긴 조롱 섞인 메모로도 유명했다. 1901년 2월 14일, 루앙의 생 세베르 교회에 남겨진 메모에는 "Dieu des voleurs, recherche les voleurs de ceux qui en ont volé d’autres|도둑의 신이여, 다른 사람에게서 훔친 자들의 도둑을 찾아라프랑스어"라고 적혀 있었다.[1]

1903년 4월 21일, 아베빌에서 작전 실패 후, 탈출하기 위해 경찰관을 살해한 자코브와 그의 두 공범이 체포되었다. 2년 후, 아미앵에서 자코브는 23명의 공동 피고인과 함께 법정에 출두했다. 그는 재판에서 자신의 사상을 표명했는데, 그중 하나는 "Le droit de vivre ne se mendie pas, il se prend|삶의 권리는 구걸할 수 없고, 빼앗아야 한다프랑스어"였다. 그는 사제를 털었고, 각 사제가 교구민이 교회에 기부했지만 사제 자신이 보관하고 있던 돈이 든 금고를, 때로는 여러 개를 발견했다고 말했다.[1]

4. 2. 강제 노동과 석방

카옌에서 그는 아들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던 어머니 마리(Marie)와 연락을 유지했다. 그는 이곳에서 17번의 탈출을 감행했다.[1]

1925년 7월 14일, 당시 프랑스 대통령 가스통 두메르그는 그의 형량을 프랑스에서 복역하는 5년 징역으로 감형했다. 그는 1927년 12월 31일에 석방되었다.[1] 강제노동형에 대한 전국적인 금지조치로 인하여 자코브는 도시로 돌아왔으며 1927년까지 우울증에 시달렸다. 이후 루아르 계곡(Loire Valley)으로 이주하여 행상인이 되었고, 재혼을 하게 된다.[1]

4. 3. 말년과 죽음

카옌에서 그는 아들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던 어머니 마리(Marie)와 연락을 유지했다. 그는 이곳에서 17번의 탈출을 감행했다.[1]

강제노동형에 대한 전국적인 금지 조치로 자코브는 도시로 돌아왔으며 1927년까지 우울증에 시달렸다. 이후 루아르 계곡(Loire Valley)으로 이주하여 행상인이 되었고, 재혼을 하게 된다.[1]

1929년 자코브는 아나키스트 신문인 리베르테르(Libertaire)의 편집자인 루이 루크앙(Louis Lecoin)에게 소개되었다. 두 사람은 서로 닮은 점이 있었으며, 지속적인 우정을 이어갔다. 아나키스트 죄수인 사코와 반제티를 위한 국제적 지원 노력 이후, 그들은 스페인에서 사형당할 운명이었던 두루티의 인도를 막기 위해 지지를 표했다. 1936년 자코브는 스페인의 CNT를 도우려는 희망을 품고 바르셀로나로 향했지만, 곧 스페인에서의 투쟁은 희망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프랑스로 돌아왔다.[1]

만약 그가 프랑스 레지스탕스 운동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면 파르티잔들은 그의 집을 피난처로 이용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어머니는 1941년에 죽었고, 그의 아내는 1947년에 친구들과 동지들에 둘러싸여 죽었다. 자코브는 결코 그의 범죄적 생활양식이나 의견을 포기하지 않았다.[1]

그는 노환으로 죽기보다는 "건강하게 죽고 싶어"했다. 1954년 8월 17일자 편지에서 그는 "J'ai vécu, je puis mourir|나는 살았고, 죽을 수 있다프랑스어"라고 썼으며, 8월 28일 뢰이이쉬르인드르에서 사망했다.[1] 그는 아나키스트 및 반파시스트 신념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지만, 인생의 마지막에 불법주의의 장점에 대해 의문을 표했다.[2]

5. 자코브의 철학과 유산

Pourquoi j'ai cambriolé|자코브가 강도질을 한 이유프랑스어[3]에서 마리우스 자코브는 자신이 도둑질을 선택한 이유를 설명한다.

참조

[1] 간행물 JACOB Alexandre, Marius [dit Georges, Escande, Férau, Jean Concorde, Attila, Barrabas] https://maitron.fr/s[...] Maitron/Editions de l'Atelier 2021-10-13
[2] 웹사이트 Illegalism: Why Pay for a Revolution on the Installment Plan…When You Can Steal One? https://theanarchist[...]
[3] 웹사이트 Why I Was a Burglar http://theanarchist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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