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쓰쿠라 시게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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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쓰쿠라 시게마사는 1574년 태어나 1630년 사망한 인물로, 일본 센고쿠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에 걸쳐 활약한 무장이다. 그는 도요토미 가문을 섬기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공을 세워 야마토 고조 후타미 성주가 되었고, 이후 히젠 히노에 번주를 거쳐 시마바라 번주가 되었다. 시마바라 성 축성, 성하 마을 정비 등 업적을 남겼지만, 과도한 세금 징수와 기독교 탄압으로 백성들에게 고통을 안겨주었다. 특히 기독교 탄압은 가혹하여 운젠 지옥에서 고문을 가하는 등 잔혹한 행위를 자행했으며, 루손 섬 공략을 막부에 제안하기도 했다. 그는 출병을 앞두고 급사하였고, 그의 아들 마쓰쿠라 가쓰이에가 가문의 뒤를 이었으나 아버지의 가혹한 정책으로 인해 시마바라의 난이 발발, 마쓰쿠라 가문은 멸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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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쿠라 가쓰이에는 아버지와 함께 시마바라성을 건설하고 가혹한 수탈과 기리시탄 탄압을 자행했으며, 시마바라의 난 발발 후 개역되어 참수형에 처해진 에도 시대 초기의 다이묘이다. - 마쓰쿠라씨 - 시마바라번
시마바라 번은 에도 시대 히젠 국을 중심으로 존재했던 번으로, 아리마 씨의 지배를 거쳐 마츠쿠라 가문, 고리키 가문, 후코즈 마츠다이라 가문, 토다 가문 등이 번주를 역임했으며, 특히 후코즈 마츠다이라 가문은 학문 장려에 힘썼으나 척박한 토지로 인한 재정난에 시달렸다. - 야마토국의 번주 - 오다 나가마스
오다 나가마스는 센고쿠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의 무장, 다이묘이자 오다 노부나가의 동생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섬겼으며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공을 세웠고, 센노 리큐에게 다도를 배워 유라쿠류를 창시한 다인으로도 유명하며, 그의 호 유라쿠는 도쿄도 유라쿠초 지명의 유래 설이 있다. - 야마토국의 번주 - 나가이 나오야
나가이 나오야는 구지라 번의 마지막 번주이자 오와리 도쿠가와 가문의 시조인 도쿠가와 요시나오의 남계 자손이다. - 시마바라번주 - 아리마 하루노부
아리마 하루노부는 센고쿠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의 기리시탄 다이묘로, 히젠 아리마 씨의 당주이자 히노에 번 번주였으며, 가톨릭 개종 후 덴쇼 소년사절단 파견, 임진왜란 참전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으나, 이후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 후 처형되었고, 그의 죽음은 에도 막부의 기독교 탄압 강화와 시마바라의 난의 배경이 되었다. - 시마바라번주 - 마쓰쿠라 가쓰이에
마쓰쿠라 가쓰이에는 아버지와 함께 시마바라성을 건설하고 가혹한 수탈과 기리시탄 탄압을 자행했으며, 시마바라의 난 발발 후 개역되어 참수형에 처해진 에도 시대 초기의 다이묘이다.
마쓰쿠라 시게마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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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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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 전국 시대 - 에도 시대 전기 |
출생 | 덴쇼 2년 (1574년)? |
사망 | 간에이 7년 11월 16일 (1630년 12월 19일) |
계명 | 류주인덴 운겐 소세키 다이코지 |
묘소 | 나가사키현시마바라시 나카호리정의 고토지 |
관위 | 종5위 하, 분고 수 |
막부 | 에도 막부 |
주군 | 쓰쓰이 준케이 → 사다쓰구 → 도쿠가와 이에야스 → 히데타다 → 이에미쓰 |
번 | 야마토고조 번주 → 히젠히노에 번주 |
씨족 | 마쓰쿠라 씨 |
부모 | 아버지: 마쓰쿠라 시게노부, 어머니: 하타라쿠라지 씨 |
형제자매 | 시게마사、시게쓰구 |
배우자 | 쓰쓰이 사다요리의 딸 |
자녀 | 가쓰이에、시게토시、산야、딸 (후지도 다카요시 정실)、딸 (보조 도시마사 실) |
로마자 표기 | |
씨명 | Matsukura |
이름 | Shigemasa |
2. 생애
마쓰쿠라 시게마사는 쓰쓰이 준케이를 섬겼으나, 준케이 사후 도요토미 가문의 직신이 되었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공을 세워 야마토 고조 후타미 성주가 되었고, 1615년 오사카 전투에서의 공으로 1616년 히젠 시마바라 4만 3천 석으로 이봉되었다. 1618년부터 시마바라성 축성을 시작했는데, 녹봉에 비해 과도한 규모로 백성들에게 가혹한 세금을 징수했다. 에도성 개축 공사에도 참여하여 재정 부담이 더욱 커졌다.
1621년부터 기리시탄 탄압을 시작, 1625년 이후 도쿠가와 이에미쓰의 질책을 받고 더욱 가혹하게 탄압했다. 운젠 지옥에서 끓는 물을 이용한 고문 및 처형을 자행하는 등 잔혹한 행위가 기록에 남아 있다. 기리시탄 근거지인 루손섬 공격을 막부에 제안하고 원정 준비를 하던 중, 1630년 오바마 온천에서 급사했다.
2. 1. 초기 생애와 쓰쓰이 가문 섬김
마쓰쿠라 시게마사는 1574년 야마토국에서 쓰쓰이 준케이의 가신 마쓰쿠라 시게노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준케이를 섬겼으나, 준케이 사후 양자인 사다쓰구가 이가로 전봉되자 야마토에 남아 도요토미 가문을 섬겼다. 게이초 5년(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단신으로 참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인정받아 야마토 고조 후타미 성주가 되었다. 고조에서는 제반 임무를 면제하고 상업 진흥을 도모하는 등 성시를 정비했다.[1]2. 2. 도쿠가와 가문 섬김과 고조 번주 시절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공을 세워 야마토 고조 후타미 성주가 되었다.[1] 고조에서는 제반 임무를 면제하고 상업을 진흥하는 등 성시를 정비했다.[1]2. 3. 시마바라 번주 시절
1615년 오사카 여름 전투에서 야마토고리야마성 구원, 도묘지 방면 전투 등의 공으로 이듬해 1616년 히젠 시마바라 4만 3천 석으로 이봉되었다.[1] 1618년 일국일성령에 따라 하라성과 히노에성을 폐하고 시마바라성 축성을 시작했다. 녹봉에 비해 과도한 규모의 성을 축성하며 백성들에게 가혹한 세금을 징수했으며, 검지를 실시하여 영내의 석고를 실제보다 높게 평가하여 세금을 징수했다.[1] 지지이시 해안에 방풍림을 조성하는 등 일부 산업 진흥 정책도 시행했다.[1]에도 막부의 기리시탄 탄압 정책에 따라 1621년부터 기리시탄 탄압을 시작하였는데, 처음에는 완만했지만, 1625년 도쿠가와 이에미쓰에게 기리시탄 대책의 허술함을 지적받자 철저한 탄압을 개시했다. 얼굴에 "기리시탄"이라는 글자의 낙인을 찍고 손가락을 잘라내는 등 갖은 고문을 가했으며, 1627년에는 운젠 지옥에서 끓는 물을 이용한 기리시탄 고문 및 처형을 자행했다.[1] 1629년에는 나가사키 봉행 다케나카 시게요시에게 권하여 나가사키의 기리시탄을 운젠으로 연행하였다.[1]
기리시탄 탄압에 대한 노력을 막부에 과시하기 위해 기리시탄의 근거지인 루손섬 공략을 막부에 제안했다. 도쿠가와 이에미쓰를 비롯한 막부 일부도 이에 동조하여 선발대를 파견하는 등 원정 준비에 착수했고, 시게마사는 이를 위한 전비를 더욱 많이 영민에게 부과했다.[1]
2. 4. 기독교 탄압
마쓰쿠라 시게마사는 남만 무역의 이익을 위해 처음에는 기리시탄을 묵인했다. 그러나 에도 막부의 기독교 탄압 정책에 따라 겐나 7년(1621년)부터 탄압을 시작했다.[1] 처음에는 완만했지만, 간에이 2년(1625년)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에게 기독교 대책이 허술하다는 지적을 받자 철저한 탄압을 시작했다.[1] 얼굴에 '기리시탄'이라는 글자를 낙인찍고, 손가락을 자르는 등 가혹한 고문을 가했다.[1] 간에이 4년(1627년)에는 운젠 지옥에서 끓는 물을 이용해 기독교인을 고문하고 처형했는데,[1] 이러한 잔혹한 고문과 처형은 네덜란드 상관장과 포르투갈 선장의 기록에도 남아 있다.[1] 간에이 6년(1629년)에는 나가사키 봉행 다케나카 시게요시와 협력하여 나가사키의 기독교인들을 운젠으로 연행했다.[1]2. 5. 루손 원정 계획
마쓰쿠라 시게마사는 기리시탄 탄압에 대한 노력을 막부에 알리기 위해, 기리시탄의 근거지인 루손 공격을 막부에 제안했다.[1] 시게마사는 로주에게 루손이 스페인의 통치 하에 있으며, 남만(포르투갈)과 함께 일본을 침략할 기회를 항상 엿보고 있어 일본에 위협이 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의 군대로 루손을 정복하고 대리인을 배치하여 서양인의 기지를 파괴하면 일본이 안정될 것이라며, 주인장을 수여해 줄 것을 요청했다.[1]시게마사는 자신의 영토 확장 야심에 더해, 스페인에 의한 일본 침략 위협을 주장하며 필리핀 침략을 정당화하려 했다. 그러나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 시대에는 이미 영토 확장에 부정적이었고, 스페인은 영토 방어책으로 방향을 전환한 상태였다.[2]
장군 도쿠가와 이에미쓰는 마닐라에 일본군 파견을 확약하는 것을 보류했지만, 시게마사에게 그 가능성을 조사하고 군비를 정비하는 것을 허락했다. 1630년 12월 14일, 시게마사는 나가사키 봉행 다케나카 시게요시의 협력을 얻어 요시오카 구로에몬과 기무라 곤노조라는 두 가신을 마닐라로 보내 스페인의 수비를 탐색하게 했다.[3] 이들은 상인으로 변장하여 루손 섬으로 건너갔으나, 폭풍 속에서 기무라의 부하 10명이 모두 사망했다.[4] 마닐라에 파견된 선발대는 1631년 7월에 일본으로 귀국했지만, 1632년 7월까지 스페인 측은 엄계 태세를 유지했다.[5][6]
도쿠가와 이에미쓰를 비롯한 막부의 일부도 적극적으로 나서서 선발대를 파견하는 등 원정 준비에 착수했으며, 시게마사는 이를 위한 더 많은 전비를 영민에게 부과했다. 그는 군비로서 3,000개의 활과 조총을 모았다고 한다.[7]
그러나 출병 직전인 1630년, 시게마사는 오바마 온천에서 급사했다. 향년 57세. 사인에 대해서는 암살설이 있다.[8] 지휘관인 시게마사의 급사로 인해 필리핀 침략 계획은 좌절되었다.[9]
3. 사망 이후
1630년 오바마 온천(小浜温泉)에서 급사하기 전까지, 마쓰쿠라 시게마사는 기리시탄 탄압을 위한 루손 원정을 계획하고 있었다. 도쿠가와 이에미쓰를 비롯한 막부 각료 일부도 이에 동조하여 선발대를 파견하는 등 원정 준비에 착수했고, 시게마사는 이를 위한 전비를 마련하기 위해 더욱 가혹한 징수를 했다.[10]
시게마사의 급사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는데, 백성들을 지나치게 핍박한 혐의로 막부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설이 있지만 진실은 불분명하다.[10]
시게마사 사후, 마쓰쿠라 가문은 아들 마쓰쿠라 가쓰이에가 시마바라의 난으로 인해 참수당하면서 멸망했다. 이후 시마바라 번은 미마사카국의 쓰야마 번 영주였던 모리 나가쓰구에게 맡겨졌다가, 도토미국의 하마마쓰에서 전봉된 고리키 가문에게 넘어갔다.[10]
3. 1. 사망과 가독 상속
1630년 오바마 온천(小浜温泉)에서 급사했다. 향년 57세였다.[10] 사인은 암살설이 존재하지만, 진실은 불분명하다. 아들 마쓰쿠라 가쓰이에가 가독을 상속했으나, 가쓰이에가 아버지의 가혹한 정책을 이어가자 영내의 농민과 낭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시마바라의 난이 발발했다.[10]3. 2. 시마바라의 난
마쓰쿠라 시게마사의 아들 마쓰쿠라 가쓰이에는 아버지의 가혹한 정책을 이어갔다. 시게마사는 4만 3천 석의 녹봉에도 불구하고 10만 석 다이묘의 성에 필적하는 시마바라성을 축성하여 백성들에게 가혹한 세금을 징수했다. 또한 에도성 개축 공사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착취를 일삼았다.[10]도쿠가와 이에미쓰에게 그리스도교 대책의 허술함을 지적받은 시게마사는 기리시탄에 대한 철저한 탄압을 시작했다. 얼굴에 낙인을 찍고 손가락을 자르는 등 고문을 가했으며, 운젠지옥에서 끓는 물을 이용한 고문 처형을 자행했다. 이러한 가혹한 탄압과 과도한 세금 징수는 결국 1637년 시마바라의 난의 원인이 되었다.[10]
시마바라의 난 이후, 마쓰쿠라 가쓰이에는 막부의 명령에 의해 참수되었고, 마쓰쿠라 가문은 멸망했다.
4. 평가
쓰쓰이 준케이를 섬기다가 준케이 사후 도요토미 가문의 직신이 되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인정받아 야마토 5조 후타미 성주가 되었다. 5조에서는 상업 진흥을 도모하는 등 성시를 정비했다.[13] 오사카 전투에서의 공으로 겐나 2년(1616년) 히젠 시마바라번 4만 3천 석의 영주가 되었다.
겐나 4년(1618년)부터 시마바라성 축성을 시작했는데, 4만 3천 석의 녹봉에도 불구하고 10만 석 다이묘의 성에 필적하는 규모로 쌓아 백성들에게 가혹한 착취를 했다. 영내의 이시타카(石高, 토지 생산량)를 실제의 배 가까이로 추측해, 영민의 한계를 넘는 세금을 징수했다. 에도성 개축 공사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가혹한 착취를 거듭했다.[14]
남만 무역의 이익을 얻고 있어 처음에는 그리스도를 묵인했지만, 에도 막부의 그리스도교 탄압 정책에 따라 겐나 7년(1621년)부터 그리스도교 탄압을 시작하였다. 간에이 2년(1625년)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에게 그리스도교 대책의 허술함을 지적받자 더욱 철저한 탄압을 시작했다.[14]
4. 1. 긍정적 평가
나라현 고조시에서는 시게마사를 신마치 지구의 기반을 다진 명군으로 칭송하고 있다. 에도 시대에는 시게마사에게 감사하는 "마쓰쿠라 축제"가 열렸다는 기록이 있으며, 고조시 신마치의 사이호지 경내에는 시게마사 추도비가 세워져 있다. 2008년(헤이세이 20년)에는 신마치 창설 4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도 열렸으며, 시게마사 현창비가 신마치 거리를 따라 건립되었다.[13]4. 2. 부정적 평가
나가사키현 시마바라시에서는 시마바라성 축성과 성하 마을 정비, 산업 기반 조성 등의 업적이 있으나, 가혹한 세금 징수와 기독교 탄압으로 인해 백성들에게 고통을 안겨준 폭군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통치는 시마바라의 난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된다.[14]도쿠가와 이에미쓰에게 그리스도교 대책의 허술함을 지적받자, 얼굴에 '기리시탄'이라는 글자를 새기는 낙인을 찍고 손가락을 자르는 등 가혹한 고문을 했다. 운젠지옥|운젠 지옥일본어에서 끓는 물을 이용한 고문 처형을 자행하는 등 기독교인과 연공을 바치지 못한 농민을 잔혹하게 고문하고 처형한 사실이 네덜란드 상관장과 포르투갈 선장의 기록에 남아있다.[14]
5. 계보
항목 | 내용 |
---|---|
아버지 | 마쓰쿠라 시게노부 |
어머니 | 하타 라쿠지 씨 |
정실 | 쓰쓰이 사다요시의 딸 |
적남 | 마쓰쿠라 가쓰이에 |
생모 불명의 자녀 |
참조
[1]
서적
A History of Japan
Kegan Paul, Trubner
1903
[2]
서적
The Grand Strategy of Philip II
Yale University Press
1998
[3]
논문
松倉重政の呂宋島遠征計画
1934
[4]
간행물
"Wars and Rumours of Wars: Japanese Plans to Invade the Philippines, 1593–1637"
2016
[5]
간행물
“Events in Filipinas, 1630–32”
1632-07-02
[6]
간행물
"Wars and Rumours of Wars: Japanese Plans to Invade the Philippines, 1593–1637"
2016
[7]
서적
島原半島史
長崎県南高来郡市教育会
1954
[8]
기타
島原半島史
長崎県南高来郡市教育会
1954
[9]
논문
松倉重政の呂宋島遠征計画
1934
[10]
간행물
"Wars and Rumours of Wars: Japanese Plans to Invade the Philippines, 1593–1637"
2016
[11]
서적
The Company and the Shogun: The Dutch Encounter with Tokugawa Japan
Columbia Univ. Press
2014
[12]
간행물
"Wars and Rumours of Wars: Japanese Plans to Invade the Philippines, 1593–1637"
2016
[13]
웹사이트
松倉豊後守重政
http://www.gojo.ne.j[...]
[14]
서적
島原まちを創ったひと 私家版 島原の歴史 松倉重政、松平忠房、植木元太郎ほか
自由空間きた田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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