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덕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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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맹덕신서는 소설 《삼국지연의》에 등장하는 가상의 병법서로, 조조가 저술한 것으로 묘사된다. 소설 속에서 촉군의 장송이 조조를 방문했을 때, 조조의 신하 양수가 이 책을 보여주자 장송은 이를 비웃고 조조를 조롱한다. 이에 조조는 격노하여 맹덕신서를 불태우게 하고, 장송을 처벌한다. 역사적으로는 맹덕신서가 병서접요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며, 조조의 군사적 재능을 보여주는 책으로 여겨졌다. 송나라 시대에 조조의 저작으로 여겨지는 조공신서가 등장하며, 조공을 경칭 없이 부르는 맹덕신서라는 이름으로 변화했다는 설이 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맹덕신서가 장송에 의해 폄하되는 내용이 묘사된다. 촉군의 장송은 유장의 사자로 조조를 방문했는데, 면회를 위해 뇌물을 요구받자 분노하여 조조를 조롱했다. 이후 장송은 양수에게 이끌려 조조의 현명함을 보여주는 맹덕신서를 보게 되었으나, "촉에서는 아이들도 아는 내용"이라며 폄하했고,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암송까지 하였다. 이 일로 조조는 격노하여 맹덕신서를 불태우게 되고, 장송은 벌을 받아 허도에서 추방되었다.
원래 《맹덕신서(孟徳新書)》는 《병서접요(兵書接要)》라고 불렸으며, 조조군의 실전 지침서로 활용되었다. 이 병법서는 오, 촉 등 다른 나라나 후계 정권인 서진에 널리 퍼졌다는 견해가 있으며, 《삼국지연의》에서 사용되었다.
2. 삼국지연의
2. 1. 장송의 비판
촉군의 장송은 유장의 사자로 조조를 방문했을 때, 면회를 위해 뇌물을 요구받았다. 이에 분노한 장송은 면회에서 조조를 조롱했고, 주인을 얕잡아 본 신하 양수에게 이끌려 조조의 현명함을 증명하는 『맹덕신서』를 보게 되었다.
장송은 "촉에서는 이런 내용 정도는 아이들도 알고 있소. 옛날에 비슷한 책이 있었지만, 저자가 불분명하여 널리 알려지지 않았는데, 그 점을 이용하여 조조는 모방하여 '신서' 따위로 이름을 붙여 무학한 아이들에게 가르친 것이 아니오?"라고 지적했다. 양수는 장송에게 암송을 시켰고, 장송은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모두 암송했다.
양수가 조조에게 이 사실을 전하자, 조롱당한 조조는 격노하여 『맹덕신서』를 불태우라고 명령했다.
훗날 장송은 그 벌로 군의 연병장에서 백 대의 형벌을 받고 허도에서 추방되었다.
2. 2. 맹덕신서 소각
촉군의 장송이 유장의 사자로 조조를 방문했을 때, 장송은 면회를 위해 뇌물을 요구받았다. 이에 분노한 장송은 면회 시 조조를 조롱했고, 주인을 얕잡아 본 신하 양수에게 이끌려 조조의 현명함을 증거하는 것으로 『맹덕신서』를 보여주었다.
그러자 장송은 "촉에서는 이런 내용 정도는 아이들도 알고 있다. 또한 옛날에 비슷한 책이 있었지만, 저자가 불분명하여 널리 알려지지 않았는데, 그 점을 이용하여 조조는 모방하여 '신서' 따위로 이름을 붙여 무학한 아이들에게 가르친 것이 아닌가"라고 지적했고, 이에 양수는 장송에게 암송하게 했다. 장송은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암송했다.
양수가 조조에게 이 사실을 전하자, 조롱당한 조조는 격노하여 『맹덕신서』를 불태우도록 명령했다.
훗날 장송은 그 벌로 군의 연병장에서 백 대의 형벌을 받고 허도에서 추방되었다.
3. 역사적 사실
3. 1. 병서접요
어환(魚豢)의 《위략(魏略)》에 따르면, 조조의 부하 장수들은 《병서접요》에 따라 임기응변으로 제시된 작전에 따라 전투에 임했다고 한다. 이 병법서는 조조가 부재한 동안에도 군대가 강했던 한 요인으로 여겨진다.
3. 2. 명칭 변화
송대 당대의 명장 이위공(이정)에게 가탁하여 제작된 위서 《이위공문대(李衛公問對)》에는 조조의 저작으로 《조공신서(曹公新書)》라는 병법서가 등장한다. '조공(曹公)'을 경칭 없이 하면 '맹덕신서'가 된다. 조조의 군사적 재능은 《조공신서》라는 위서를 낳았고, 이후 《조공신서》는 《병서접요》와 동일시되어 동화되었으며, 조조를 폄하하려는 자들에 의해 《맹덕신서》가 형성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3. 3. 현대의 평가 및 전승
《맹덕신서(孟徳新書)》는 《병서접요(兵書接要)》라고도 불렸으며, 어환(魚豢)의 《위략(魏略)》에 따르면, 조조의 부하 장수들은 병서접요에 따라 임기응변으로 제시된 작전에 따라 전투에 임했다고 한다. 이 병법서는 조조가 부재한 동안에도 군대가 강했던 한 요인으로 여겨진다.
《맹덕신서》가 현재까지 전해졌는지에 대해서는, 어떤 형태로든 오·촉 등의 다른 나라로 건너갔거나, 후계 정권인 서진에 전해지는 등 널리 퍼졌다는 견해가 있다.
또한, 일설에는 《맹덕신서》(별명·병서접요)는 《손자(孫子)》에 대한 해설·주석과 같은 형태의 '주석집'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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