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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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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관중은 일반적으로 소설 《삼국지연의》의 작가로 알려져 있으나, 생애와 작품에 대한 논란이 존재한다. 출생지와 출생 연도에 대한 다양한 설이 있으며, 《삼국지연의》와 《수호전》의 작가 여부에 대해서도 학계에서 논쟁이 있다. 또한, 《삼수평요전》, 《잔당오대사연의전》 등 다른 작품의 저자로도 언급되지만, 나관중의 작품이 아닐 가능성도 제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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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관중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나관중의 조각상
나관중의 조각상
본명나본 (羅本, Lo Beon)
관중 (貫中, Gwanjung)
호해산인 (湖海散人, Hohae Sanin)
직업극작가, 시인, 소설가
국적
국가원나라, 명나라
활동 시기
시기14세기
작품
주요 작품삼국지연의
수당양조지전
잔당오대사연의
평요전

2. 생애 및 정체성 논란

나관중의 생애와 정체성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고 많은 부분이 논란의 대상이다. 특히 그의 출생지와 출생 연도, 그리고 사대기서 중 『삼국지연의』와 『수호전』의 실제 작가인지에 대한 논쟁이 오랫동안 이어져 왔다.

신뢰할 만한 사료는 드물며, 나관중의 친구였던 동시대 극작가 가중명(賈仲明)의 『록귀보속편』(錄鬼簿續編)이 거의 유일하게 비중 있게 다뤄진다. 가중명은 이 기록에서 나관중을 태원 출신의 '호해산인'(湖海散人)이라 칭하며, 그가 사람들과 어울리기보다 홀로 지내며 청신한 악부(원나라 잡극)를 썼다고 묘사했다. 또한 가중명은 1364년에 마지막으로 나관중을 만났다고 기록했다.[12][13] 나관중의 구체적인 출신지와 출생 연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존재하며 논란이 있다.

나관중이 『삼국지연의』와 『수호전』의 작가라는 설의 주요 근거 중 하나는 명나라 무장 고유(高儒)의 장서 목록인 『백천서지』(百川書誌)이다. 이 목록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16]

:「『삼국지통속연의』 204권 진나라 평양후 진수의 사전, 명나라 나본관중의 편」


:「『충의수호전』 100권 전당의 시내암적(의) 책, 나관중 편차」

그러나 이 기록 외에는 나관중과 두 소설의 관련성을 직접적으로 증명할 만한 명확한 증거가 부족하다. 명나라 때의 소문을 모은 『칠수류고』(七修類稿) 등에서 간략하게 언급될 뿐이다.[14]

이러한 근거 부족과 여러 문제점으로 인해, 특히 일본 학계에서는 나관중 단독 저자설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이 많다. 일본의 중국문학 연구자 다카시마 도시오와 우에다 노조무 등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며, 두 소설이 여러 사람에 의해 창작되었을 가능성(복수 저자설)을 제기한다.[18]


  • 시대적 불일치: 원나라 말기의 인물인 나관중(가중명이 언급한 '라본')이 명나라 중기에 발견된 정교한 형식의 소설들을 썼다고 보기에는 시대적으로 간극이 크다.[19]
  • 공동 필명 가능성: 『삼국지연의』와 『수호전』의 편자로 기록된 '나관중'은 실제 원말의 극작가 '라본'과는 다른, 창작 집단의 공동 필명일 수 있다.[19]
  • 기록의 모순: 기록마다 나관중의 출신지가 다르게 나타나는 등 모순이 발견된다. 또한 친구 가중명의 기록에 대표작으로 알려진 『삼국지연의』가 전혀 언급되지 않는 점도 의문이다.
  • 사료 접근의 어려움: 가중명의 기록에 따르면 나관중('라본')은 여기저기를 떠돌던 여행 극작가였다. 반면 『삼국지연의』는 정사 『삼국지』와 그 주석, 『후한서』, 『자치통감』 등 방대한 역사서를 깊이 참고하여 쓰였다. 당시 서적은 매우 귀하고 비쌌기 때문에, 방랑하는 작가가 이러한 자료들에 접근하여 방대한 소설을 집필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웠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일부에서는 나관중이 정사 『삼국지』 대신 요약본인 『십칠사상절』(十七史詳節)을 사용했다고 주장하지만,[15] 『삼국지연의』에는 『십칠사상절』에는 없고 정사 『삼국지』에만 있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어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비판이 있다.[20]


한편, 중국 문학 연구자 김문경은 나관중 복수 저자설에 대해 중립적인 입장을 보인다. 그는 원나라 시대의 활발한 인구 이동을 고려하면 여러 출신지 기록이 반드시 모순되는 것은 아니라고 보면서도, 나관중의 이름이 사칭되었을 가능성도 열어두었다. 또한 나관중이 『십칠사상절』 외에도 『고문진보』(古文眞寶) 등 다른 요약본들을 활용했을 가능성을 제시했다.[21]

2. 1. 출신지 논쟁

나관중의 출생지와 출생 연도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아 여러 논란이 있다.

가장 유력한 설 중 하나는 그가 태원 출신이라는 것이다. 동시대 극작가 가중명(賈仲明)은 1364년에 나관중을 만났다고 기록했으며, 이를 통해 그가 원나라 말기와 명나라 초기에 활동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멍판런(孟繁仁)은 나씨 가문의 족보를 근거로 태원 출신설을 지지하지만, 해당 족보에 나관중의 이름이 직접적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아 증명력이 부족하다는 반론도 있다.[4][5][6] 일부 연구자들은 나관중이 산둥성 지역의 삶을 매우 상세하게 묘사한 점을 들어, 만약 태원 출신이라면 왜 고향 대신 산둥 지역 묘사에 집중했는지 의문을 제기하며, 가중명이 기록한 '태원'이 필사 과정에서의 오류일 가능성을 제시하기도 한다.[7]

다른 설로는 그가 산둥성 동평현(과거 동원현) 출신이라는 주장이 있다. 이는 『삼국지연의』 장대기(蔣大器) 서문 등에 근거하며, 대략 1280년에서 1360년 사이에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한다.[2] 중국 학자 왕리기는 나관중이 주자학자 조개(趙偕)의 문하생이었음을 밝혀내고, 조개가 동평 인근에서 서당을 열었다는 점을 들어 가중명이 기록한 '태원'은 '동원'의 오기일 것이라고 주장했다.[21]

이 외에도 명나라 시대의 기록인 『칠수류고』(七修類稿)에는 "세상에서 인기가 있는 『삼국지연의』와 『수호전』은 항주의 나관중의 작품이다"라는 기록이 있어 항저우 출신설도 제기되며, 강남 출신이라는 설도 있다.

최근 연구에서는 나관중이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이 두 명 존재했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한다. 한 명은 태원 출신의 극작가이고, 다른 한 명은 동평 출신의 소설 작가라는 것이다.[2]

출생 연도 역시 불분명하여, 최근 연구에서는 1315년에서 1318년 사이로 추정하지만,[8] 다른 자료에서는 1330년경으로 보기도 한다.

나관중의 는 '''본'''(本), 는 '''관중'''(貫中)[11]이며, 호는 '''호해산인'''(湖海散人)이다. 그에 대한 신뢰할 만한 사료는 매우 드물며, 친구였던 가중명이 쓴 『녹귀보속편』(錄鬼簿續編)이 거의 유일하다. 가중명은 이 책에서 "나관중은 태원 출신으로 호는 호해산인이라 불렸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었지만, 청신한 악부(원나라 잡극)를 쓰고 있었다. 나와는 망년지교(忘年之交, 나이를 잊은 사귐)를 맺은 친한 친구였지만, 여러 문제로 인해 서로 멀어지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원나라 지정 24년(1364년)으로, 이 책을 쓰고 있는 지금으로부터 60년 이상 전이다. 어디서 죽었는지 알 수 없다"라고 기록했다.[12] 중국 문학 연구자인 김문경과 다카시마 도시오는 사료로서 확인할 수 있는 나관중에 대한 정보는 이것이 전부라고 지적한다.[13]

그 외에 원나라 말기 주자학자 조해(趙偕)의 문인 중에 '나본'(羅本)이라는 인물이 있어 나관중과 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제기되며,[14] 나관중이 방랑하는 작가였기에 정사 『삼국지』 원본 대신 그 요약본인 『십칠사상절』(十七史詳節)을 주로 참고했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실제로 『삼국지연의』의 초기 판본에서는 『십칠사상절』에서 인용한 부분이 종종 발견된다.[15]

2. 2. 출생 연도 논쟁

나관중의 출생지와 출생 연도는 명확하지 않아 여러 논란이 있다.

한 가지 주장은 그가 태원시 출신이라는 것이다. 동시대 극작가 가중명(賈仲明)이 1364년에 나관중을 만났다는 기록에 근거하여, 그가 원나라 말기와 명나라 초기에 활동했다고 본다. 다른 주장은 나관중이 대략 1280년에서 1360년 사이에 산둥성 동평현에서 태어났다는 것이다.[2] 이 외에도 문학 역사가들은 항저우나 강남 등을 그의 고향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멍판런(孟繁仁)은 나씨 가문의 족보를 근거로 태원이 그의 고향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족보에는 나관중의 이름이 없으며, 일부에서는 이 족보만으로 나관중이 삼국지의 작가임을 증명할 수 없다고 본다.[4][5][6] 또한, 만약 나관중이 태원 출신이라면 왜 산둥 사람들의 삶에 대해 그렇게 자세히 묘사했는지에 대한 의문도 제기된다. 가중명이 남긴 기록의 '태원' 부분이 필사 과정에서 잘못 기록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7]

최근 연구에서는 이 시기에 '나관중'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두 명 있었다는 주장이 나왔다. 한 명은 태원 출신의 극작가이고, 다른 한 명은 동평 출신의 소설가라는 것이다. (陈辽|천랴오중국어[2])

출생 연도에 대해서도 여러 추정이 있다. 최근 연구에서는 1315년에서 1318년 사이로 보기도 하지만,[8] 1330년경으로 보는 자료도 있다.

3. 작품 논란: 《삼국지연의》와 《수호전》

나관중은 중국 사대기서 중 두 작품인 《삼국지연의》와 《수호전》의 작가 또는 편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특히 《수호전》의 경우, 본래 여러 이야기꾼들이 구전하던 이야기를 시내암이 처음 하나의 작품으로 엮었고, 이후 나관중이 이를 현재 전해지는 100장본 형태로 편집했다는 설이 있다.

나관중이 이 두 소설의 작가 혹은 편자라는 주장의 주요 근거 중 하나는 명나라의 무장 고유가 남긴 장서 목록 『백천서지』이다. 이 목록에는 『삼국지통속연의』가 "진나라 평양후 진수의 사전에, 명나라 나본관중의 편"으로, 『충의수호전』(현재의 수호전)은 "전당의 시내암적(의) 책, 나관중 편차"로 기록되어 있다.[16] 이 외에도 《삼국지연의》의 오래된 판본 기록[17]이나 명나라 낭영이 세간의 소문을 기록한 『칠수류고』 등에서도 나관중과의 관련성이 언급되지만, 이는 비교적 간단한 기록에 그친다.

그러나 이러한 기록만으로는 나관중이 실제 저자라고 단정하기 어렵다는 비판적인 견해가 존재하며, 실제 작가 혹은 편저자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한중 학계와 일본 학계 사이에서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특히 일본의 중국문학 연구자 다카시마 도시오는 중국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와 달리 나관중을 두 소설의 작가로 보기 어렵다고 주장했으며[18], 일본 학계에서는 여러 명의 공동 저작이라는 설(복수명설)도 제기된다.[18] 이러한 비판은 주로 기록상의 모순점, 나관중의 생애와 작품 집필에 필요한 환경 사이의 괴리 등을 근거로 한다.[19][20]

한편, 나관중은 《삼수평요전》(이후 펑멍롱이 40장으로 확장), 《잔당오대사연의전》(殘唐五代史演義傳), 《수당지전》(隋唐志傳), 《수당양조지전》(隋唐兩朝志傳) 등의 다른 작품들의 저자로도 알려져 있다. 하지만 중국 문학 연구자 김문경 등은 이 작품들이 나관중의 저작일 가능성은 《삼국지연의》보다 훨씬 낮다고 보며, '나관중 편차'라는 표기가 단순히 '나관중의 《삼국지연의》 스타일을 따른 역사 소설' 정도의 의미일 수 있다고 지적한다.[21]

3. 1. 《삼국지연의》 작가/편집자 논쟁

소설 《삼국지연의》는 일반적으로 나관중이 저술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11][12][13][15], 실제 작가 혹은 편저자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학계에서 논쟁이 있다.

나관중이 《삼국지연의》의 작가 혹은 편저자라는 주장의 주요 근거 중 하나는 명나라 무장 고유의 장서 목록인 『백천서지』이다. 이 목록에는 『삼국지통속연의』가 "진나라 평양후 진수의 사전에, 명나라 나본관중의 편"으로, 『충의수호전』(현재의 수호전)은 "전당의 시내암적(의) 책, 나관중 편차"로 기록되어 있다.[16] 또한, 《삼국지연의》의 오래된 판본 기록[17]이나 명나라 낭영이 세간의 소문을 모아 기록한 『칠수류고』[14] 등에서도 나관중과의 관련성이 언급되지만, 이는 비교적 간단한 기록에 그친다.

그러나 이러한 기록만으로는 나관중이 실제 저자라고 단정하기 어렵다는 비판적인 견해가 존재하며, 특히 일본 학계를 중심으로 여러 명의 공동 저작이라는 설(복수명설)이 제기된다.[18] 중국 문학 연구자인 다카시마 도시오와 우에다 노조무 등은 다음과 같은 문제점을 지적하며 나관중 단독 저자설에 의문을 제기한다.[18]

  • 원나라 말기 인물인 나관중(본명 라본)이 살았던 시대에 《삼국지연의》와 같이 정교하게 구성된 소설 형식이 존재했다고 보기 어려우며, 작품의 등장 시기와 시간적 간극이 크다는 점.[19]
  • 《삼국지연의》와 《수호전》의 편자로 언급되는 '나관중'은 실제 역사 인물 라본과는 관련 없는 창작 집단의 공동 필명일 가능성이 있다는 점.[19]
  • 기록상 나관중으로 지칭되는 인물의 출신지가 여러 곳으로 나타나 모순되며, 친구였던 가중명의 기록(『록귀보속편』)에 대표작인 《삼국지연의》가 전혀 언급되지 않는 점이 부자연스럽다는 점.
  • 가중명의 기록에 따르면 라본은 각지를 떠돌던 극작가였는데, 《삼국지연의》는 정사 《삼국지》와 그 주석, 《후한서》, 《자치통감》 등 방대한 사료를 깊이 이해해야 저술할 수 있는 작품이다. 나관중=라본 설을 지지하는 측에서는 라본이 정사 《삼국지》의 요약본인 『십칠사상절』을 이용했다고 주장하지만[15], 《삼국지연의》에는 『십칠사상절』에는 없고 정사 《삼국지》 원문에만 있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어 설득력이 떨어진다. 당시 서적은 매우 귀했고 방대한 사료를 열람하는 것은 여행 중인 극작가에게는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므로, '''즉 원말의 라본이 《삼국지연의》를 저술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웠을 것'''이라는 주장이다.[20]


한편, 중국 문학 연구자 김문경은 나관중 복수명설에 대해 다른 해석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는 원나라 시대의 활발한 인구 이동을 고려하면 여러 출신지 기록이 반드시 모순되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한다. 또한 나관중의 아호 '호해산인'이 정사 《삼국지》에 등장하는 유비의 부하 진등과 관련 있을 가능성을 제기하며, 《삼국지연의》 성립 이전에 나관중의 이름이 다른 사람에 의해 사용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는다. 김문경은 나관중이 『십칠사상절』 외에도 『고문진보』 등 다양한 역사 요약본을 활용했을 수 있다고 보며, 이 논쟁에 대해 중립적인 입장을 취한다.[21]

3. 2. 《수호전》 작가/편집자 논쟁

소설수호전》의 이야기는 본래 여러 이야기꾼들에 의해 구전되던 것을 시내암이 처음 하나의 작품으로 엮었고, 이후 나관중이 현재 전해지는 100장본 형태로 편집했다고 알려져 있다.[16]

나관중이 《수호전》의 작가 혹은 편자라는 주장의 주요 근거 중 하나로 명나라의 무장 고유가 남긴 장서 목록인 『백천서지』가 있다. 이 책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16]

: 「『충의수호전』 100권 전당의 시내암적(의) 책, 나관중 편차」


: — 고유, 『백천서지』

그러나 나관중과 《수호전》의 관련성을 직접적으로 증명하는 자료는 고유의 기록 외에는 명확하지 않다. 명나라 때 낭영이 쓴 『칠수류고』에 세간의 소문을 모아 기록한 내용 정도가 있을 뿐이며, 이마저도 매우 간략하다.[17] 이러한 근거 부족 때문에, 특히 일본 학계에서는 나관중이 《수호전》의 단독 저자 또는 편자라는 설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이 많다. 일본의 중국문학 연구자 다카시마 도시오는 중국 학계와 달리 나관중을 두 소설(삼국지연의, 수호전)의 작가로 보기 어렵다고 주장했다.[18] 일본 학계에서는 《수호전》이 여러 사람에 의해 공동으로 창작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한다.

다카시마 도시오나 우에다 노조무와 같은 학자들은 나관중 단독 저자설에 대해 다음과 같은 비판을 제기한다. (이해를 돕기 위해 원말 명초의 극작가 '라본'과 《수호전》의 편자로 추정되는 '나관중'을 구분하여 설명한다.)[18]

  • 시대적 불일치: 『백천서지』를 근거로 원나라 말기의 인물인 라본(나관중)이 쓴 소설이 명나라 중기에 발견되었다고 보는 것은 시대적으로 너무 동떨어져 있으며, 원말 명초에 《수호전》과 같이 체계적인 소설 형식이 완성되었다고 보기 어렵다.[19]
  • 공동 필명 가능성: 《수호전》의 편자로 기록된 '나관중'은 실제 원말의 극작가 라본과는 관련 없는, 여러 창작자가 사용한 공동 필명일 가능성이 있다.[19]
  • 기록의 모순: 나관중이라는 인물에 대해 여러 다른 출신지가 기록되어 있어 혼란을 준다. 또한 그의 친구 가중명의 기록에는 대표작으로 알려진 《삼국지연의》나 《수호전》에 대한 언급이 없어 의문을 자아낸다.
  • 사서 접근의 어려움: 기록에 따르면 원말의 라본은 여러 지역을 떠돌던 여행 극작가였다. 반면 《수호전》은 방대한 자료 조사를 바탕으로 쓰인 것으로 보인다. 당시 서적은 매우 귀했고, 특히 방대한 역사서는 상당한 재력가나 장서가가 아니면 접근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여행 극작가였던 라본이 《수호전》 편찬에 필요한 자료를 접하고 이를 집필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주장이다.[20]


한편, 금문경은 나관중이 여러 명이라는 설에 대해, 원나라 시대에는 사람들의 이동이 활발했기 때문에 출신지가 여러 곳으로 기록된 것은 충분히 설명 가능하다고 보았다. 또한 나관중의 아호 '호해산인'이 정사 『삼국지』에 등장하는 진등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을 제시하며, 나관중이라는 이름이 《수호전》 성립 이전에 다른 사람에 의해 사용되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언급하며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기도 했다.[21]

이처럼 《수호전》의 작가 및 편자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학계에서 논쟁이 진행 중이다.

4. 기타 작품

수호전》은 여러 이야기꾼들이 발전시킨 이야기를 시내암이 처음으로 통일된 작품으로 묶었고, 나관중은 이를 현재의 100장본 형태로 편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나관중의 저작으로 전해지거나 그에게 귀속되는 다른 작품들은 다음과 같다.


  • 《삼수평요전》(平妖傳): 북송 말기 반란을 소재로 한 20장 구성의 선마 소설. 나관중의 작품으로 여겨지며, 이후 펑멍롱(馮夢龍)이 40장으로 내용을 확장했다.
  • 《잔당오대사연의전》(殘唐五代史演義傳): 당나라 말기와 오대 십국 시대를 다룬 연대기로, 주온의 반란 이야기를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 《세 개의 수나라가 악마의 반란을 진압하다》(三遂平妖傳): 나관중에게 귀속되는(attributed) 작품이다. (《삼수평요전》의 다른 제목 또는 관련 작품으로 추정됨)


이 외에도 다음과 같은 역사 소설들이 "나관중 편차(羅貫中 編次)"로 여겨진다.

  • 《잔당오대사연의》(残唐五代史演義)
  • 《분장루》(粉妝樓)
  • 《수당지전》(隋唐志傳)
  • 수당양조지전》(隋唐兩朝志傳)


그러나 학자 금문경(金文京)은 이 작품들이 나관중의 저작일 가능성은 《삼국지연의》보다 훨씬 낮다고 평가한다. 그는 이 소설들이 《삼국지연의》를 모방하여 쓰였으며, 등장인물 이름 등 고유명사를 바꾸면 《삼국지연의》와 유사한 이야기가 되는 부분이 많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금문경은 "'나관중 편차'라는 표기는 '나관중의 《삼국지연의》 스타일을 따른 역사 소설' 정도의 의미일 뿐, 이 작품들을 직접 나관중이 썼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주장했다.

5. 전설

『서호유람지여』에는 나관중이 "소설 수십 종을 편찬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현재 나관중이 편자임을 확정할 수 있는 소설은 사실상 없다. 또한, 이 책에 따르면 나관중이 통속 소설 같은 속된 것을 썼기 때문에 자손 삼대가 벙어리가 되었다는 악평을 받았다고 한다.

청대의 문인 고령(顧令)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원나라 말기의 나본(羅本, 나관중)은 혼란기에 장사성 밑에서 벼슬을 했으며, 『수호전』은 장사성에게 간언할 목적으로 쓴 것이라는 전설이 있다.[22] 또한, 『삼국지연의』의 적벽 대전 묘사는 주원장과 진우량 사이의 파양호 전투를 모델로 삼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참조

[1] 웹사이트 Luo Guanzhong http://www.britannic[...]
[2] 간행물 Two Luo Guanzhong 2007
[3] 서적 Sanguo yanyi: Three Kingdoms Foreign Languages Press 2000
[4] Citation Discuss the pedigree of the Luo family
[5] 간행물 That Luo Ben is not the author of Three Kingdoms 2000
[6] 간행물 The case of wrong research about the author of "three kingdoms 2002
[7] 간행물 Luo Guanzhong who had written "Three Kingdoms" came from DongPing 2002
[8] 문서 Ouyang Jian, referenced in Roberts 1991, pg. 938
[9] 서적 Out of the Margins: The Rise of Chinese Vernacular Fiction https://www.jstor.or[...] University of Hawai'i Press 2001
[10] 문서 一説に1320 - 1400年、陳遼,『江蘇社会科学』 2007年第4期179-182
[11] 문서 『続文献通考』は[[諱]]を貫、字を本中とする
[12] 문서 金文京『三国志演義の世界』「5 羅貫中の謎」東方書店1993。金の本には原文書き下しが掲載されている。ここでは著作権に配慮し原文の大意をとった。
[13] 문서 金前掲書および高島『水滸伝の世界』「11 誰が水滸伝を書いたのか?」筑摩書房(ちくま文庫)2001
[14] 문서 金文京『三国志演義の世界』「5 羅貫中の謎」東方書店1993。
[15] 문서 芦田正昭『物語三国志』社会思想社の解説
[16] 문서 「編」の意味について、『七修類稿』は「もともと原作があって、それをまとめたので『編した』というのだ」と説明する。『施耐庵墓志』では、施耐庵の原作を羅貫中がまとめたから「編」というのだ、としている。ただし高島2001はこれを疑問視し、『施耐庵墓志』を偽書としている。
[17] 문서 基本的に中国の商業出版の刊記はいい加減で、著名な学者や文人の名前を騙っているケースが多い。例えば[[司馬光]]の『資治通鑑』と無関係な小説に「按鑑」(『[[資治通鑑]]』によった)と書かれていたり、[[李卓吾]]と無関係な書に「李卓吾先生批評」などの記載があり、余り当てにならない。ひどい場合は書物の再版時に刊記を差し替えてしまうケースも存在していたと高島2001は指摘している。
[18] 간행물 講史小説と歴史書 (1) : 『三国演義』,『隋唐両朝史伝』を中心に 東京大学東洋文化研究所 1996-03
[19] 문서 高島2001
[20] 문서 上田1996
[21] 문서 金1993
[22] 웹사이트 浦玉生《水滸伝》与張士诚起義再探 http://zhcchina.com/[...] 2000
[23] 문서 둘다 [[주유]]의 후손인데 주서는 직계, 나관중은 방계에 해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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