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비츠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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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몰비츠 전투는 1741년 4월 10일,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중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간에 벌어진 전투이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는 슐레지엔을 점령하기 위해 이 전투를 벌였고, 그의 첫 주요 전투였다. 프로이센은 수적으로 열세였지만, 쿠르트 크리스토프 그라프 폰 슈베린의 지휘와 프로이센 보병의 뛰어난 훈련으로 승리했다. 이 전투는 프리드리히 2세에게 군사적 교훈을 주었으며, 프로이센을 유럽의 군사 강국으로 인정받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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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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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 몰비츠 전투 |
부분 | 제1차 슐레지엔 전쟁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
날짜 | 1741년 4월 10일 |
장소 | 슐레지엔 몰비츠, 현재 폴란드 마우요비체 |
결과 | 프로이센의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파일:Flag of the Kingdom of Prussia (1701-1750).svg|22px]]프로이센 왕국 |
교전국 2 | [[파일:Flag of the Habsburg Monarchy.svg|22px]]오스트리아 |
지휘관 및 지도자 | |
프로이센 | [[파일:Flag of the Kingdom of Prussia (1701-1750).svg|22px]] 프리드리히 2세 [[파일:Flag of the Kingdom of Prussia (1701-1750).svg|22px]] 슈베린 백작 쿠르트 크리스토프 |
오스트리아 | [[파일:Flag of the Habsburg Monarchy.svg|22px]] 빌헬름 라인하르트 폰 나이페르크 |
병력 규모 | |
프로이센 | 21,600명 58문 |
오스트리아 | 15,800 - 19,000명 19문 |
사상자 및 피해 | |
프로이센 | 4,850명 사망, 부상 또는 실종/포로 |
오스트리아 | 4,550명 사망, 부상 또는 실종/포로 |
2. 배경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은 1740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6세가 사망하면서 촉발되었다.[1] 카를 6세는 딸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왕위를 물려주기 위해 1713년 국사 조칙을 발표했지만, 이는 살리카법에 위배되는 것이었고, 주변국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2] 이러한 상황을 틈타 프리드리히 2세는 1740년 12월, 풍부한 자원을 가진 슐레지엔을 침공하여 제1차 슐레지엔 전쟁을 일으켰다.[3]
1740년 12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6세가 사망하자 프리드리히 대왕이 이끄는 프로이센군은 실레지아를 침공했다. 이들은 단 1개월 반 만에 글로가우, 브리크, 나이세 요새와 메렌 국경 지역을 제외한 대부분의 실레지아를 점령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슐레지엔 탈환을 위해 빌헬름 라인하르트 폰 나이페르크에게 군대를 맡겨 파견했다.[4]
3. 양측의 준비
마리아 테레지아는 실레지엔을 넘겨주면 동맹을 맺겠다는 프리드리히 2세의 제안을 거절하고, 나이페르크에게 군대를 주어 즉각 반격하도록 명령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오스트리아군의 행동 개시가 해빙 후일 것으로 예상하고 부대를 분산시켰다.
나이페르크군은 눈 덮인 산지를 넘어 츠크만텔에 진입하여 저항 없이 실레지엔에 들어왔다. 오스트리아군 후사르 부대 때문에 프로이센군 경계 부대는 활동이 제한되었고, 프리드리히 2세는 산을 넘은 후에야 나이페르크군의 행동을 알게 되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즉시 부대를 집결시키고 나이세와 브리크 포위 부대에게 철수하여 본대와 합류하라고 명령했다.
4월 5일, 나이페르크군은 나이세를 구원하고 북상하여 브리크와도 연락을 취했다. 이후 서진하여 프로이센군과 본국과의 연락을 완전히 끊고, 브레슬라우 직전의 프로이센군 기지인 오라우를 목표로 했다. 프로이센군은 아군과 합류하며 오스트리아군을 추격했고, 4월 8일 그라처 나이세 강 서안을 건너 오라우를 구원하기 위해 나이페르크군과 전투를 벌이기로 했다.
4월 9일, 나이페르크군은 브리크 남서쪽 모르비츠에 도착하여 숙영했다. 나이페르크는 프로이센군이 접근해도 1, 2일의 여유가 있다고 생각했고, 병사들에게 휴식을 주려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프로이센군이 바로 코앞인 모르비츠 남동쪽의 포갈렐에 있었다.
프로이센군도 상황이 좋지 않았지만, 프리드리히 2세는 오스트리아군을 공격할 의지를 굳히고 준비를 했다.
3. 1. 프로이센의 준비
나이페르크의 군대가 몰비츠에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오스트리아 군인 포로가 프리드리히에게 알려주었고, 아침 안개와 눈 덕분에 프리드리히의 군대는 나이페르크의 야영지에서 2,000보 이내로 감지되지 않고 진격할 수 있었다.[2] 대부분의 지휘관들은 즉시 야영지를 공격하여 오스트리아 군대를 격파하라는 명령을 내렸겠지만, 프리드리히는 이전까지 어떠한 작전이나 전투도 수행한 적이 없었기에 대신 군대를 전투 대형으로 배치하기로 결정했다.[2] 땅에는 매우 많은 눈이 쌓여 설맹을 유발했고, 프리드리히는 그의 우측에 있는 강까지의 거리를 잘못 계산했다. 그는 전투에 참여할 수 없는 강가 굽이 뒤에 여러 부대를 배치했고, 더 많은 부대가 그의 두 전투 대형에 직각으로 우익에 배치되었다. 슈베린은 초기에 프리드리히가 거리를 잘못 계산했다고 언급했지만 무시당했다.[2]
4월 10일, 전날과는 달리 쾌청했다. 오전 5시, 프로이센군은 진을 정리하고, 오스트리아군을 발견하면 즉시 회전에 돌입할 수 있도록 종대를 편성하여 오라우로 향했다.
오전 10시쯤, 몰비츠 남동쪽 노이도르프에서 프로이센군 선봉인 로텐부르크의 기병 부대가 오스트리아군 초계 기병과 접촉하여 이를 격퇴했다. 대왕은 현지 주민으로부터 오스트리아군이 몰비츠에 숙영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회전을 벌이기 위해 몰비츠로 향했다. 한편 오스트리아군은 이날을 휴양일로 정했기에 몰비츠에서 움직이지 않았고, 느긋하게 점심 준비 등을 하고 있었는데, 프로이센군이 접근 중이라는 보고를 접하고 나이페르크는 황급히 자군 부대에 전개를 명령했지만, 예상치 못한 적의 출현에 병사들은 격렬하게 혼란했다.
노이도르프를 통과한 프로이센군 본대는 몰비츠에 접근을 시작했고, 대왕은 자군에 전열 전개를 명령했다. 프로이센군은 이때 평소의 훈련에 따라 정형대로 이중 전열을 형성했지만, 어렵게 적의 전투 준비가 갖춰지지 않았는데도 줏대 없이 전열을 구축하는 것에 얽매였고, 또한 프로이센군은 한동안 실전에서 멀어져 있었기 때문에 전개 시에 꽤나 지체되었다.[2] 그 결과 오스트리아군은 완전한 기습을 받는 것을 면했다. 이때 프로이센군은 우익 끝을 마을에, 좌익 끝을 강에 각각 맡겨 전진하기로 결정했지만, 거리 측정을 잘못하여 슐렌부르크의 우익 기병과 헬름스도르프 사이에 간격이 생겼다. 한편 제1전열의 보병이 다 수용되지 못하고 넘쳐흘러, 전열 간의 연결에 배치되기도 했다. 전자는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했지만, 후자는 결과적으로 잘 작용했다.
오후 1시쯤, 프로이센군은 전개를 완료하고, 몰비츠를 향해 북서쪽으로 공격 전진을 시작했다. 포병의 전진 사격이 시작되자 오스트리아군은 맹렬하게 공격받았고, 이에 대해 오스트리아군 포병은 수가 적은 데다 배치가 혼란스러워 유효한 반격을 할 수 없었다. 프로이센군 전열 중, 대왕은 전열 우익의 지휘를 맡았고, 좌익은 슈베린에게, 후열은 젊은 데사우가 지휘했다. 대왕은 오스트리아군 기병의 능력이 자군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지금까지의 소규모 전투의 양상에서 느끼고 있었기에, 이번 전투에서는 그들의 돌격 위력을 깎기 위해 기병 군단 안에 척탄병 대대를 편입하는 다소 특이한 배치를 채택했다.[3]
3. 2. 오스트리아의 준비
나이페르크는 잠을 자던 도중 자신의 막사 창문을 통해 프리드리히의 군대를 발견했다. 당시 휘하 병사들은 대부분 잠들어 있었다. 당시 오스트리아군 전군은 북서쪽으로 프로이센군과 마주 보고 있었다. 오스트리아군은 재빨리 일어나 진영에서 나와 밀집 진형을 구축했다. 결과적으로 오후 1시쯤 양측은 전열을 구축하고 전투 준비를 마쳤다.
나이페르크는 프리드리히의 군대가 오고 있다는 것을 알고도 전투에 대비하지 못했다.[8] 오스트리아군은 야영지에서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고,[9] 3개의 마을에 흩어져 있었으며,[10] 전선은 프로이센군의 진격 방향과 반대였다.[11] 이때 프로이센군이 공격했다면 혼란스러운 저항에 직면했을 것이다.[12] 프리드리히가 전투 대형을 갖추느라 2시간이나 지체했기 때문에,[9] 오스트리아군은 오후 2시 직전에 교전이 벌어질 때까지 병력을 집중시키고 전투 대형을 갖출 수 있었다.[13]
4. 전투
프로이센군은 양 측면에서 오스트리아군을 향해 진군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기병대가 프로이센군 우익 기병대를 공격하여 무너뜨렸다. 이로 인해 프로이센군의 측면 방어가 뚫렸고, 오스트리아 기병대는 무방비 상태의 보병대에 돌격했다. 슈베린은 프리드리히 2세에게 전장에서 물러날 것을 조언했고, 왕은 이를 받아들여 간신히 퇴각했다.
프리드리히 1세가 철저하게 훈련시킨 프로이센 보병대는 오스트리아 기병대의 공격에 맞서 일제사격을 퍼부었으나, 아군을 오인사격하는 등 혼란스러운 상황이 벌어졌다. 오스트리아 기병 사령관 뢰머는 프로이센군이 쏜 유탄에 맞아 전사했다. 슈베린은 "우리는 적의 시체 위로 퇴각한다."라고 말하며, 프로이센군의 지휘를 맡아 상황을 역전시켰다.
오스트리아군이 좌측에 감행한 두 번째 공격은 격퇴되었고, 슈베린은 프로이센 전군에 전진 명령을 내렸다. 프로이센 보병대는 플린트록 머스킷총(flintlock muskets)으로 분당 4~5발의 사격을 퍼부으며 오스트리아군을 압도했다. 결국 오스트리아군은 전장에서 무너져 궤주했고, 프리드리히 2세는 승리했다.
4. 1. 프로이센군 기병의 열세
오스트리아 기병대는 프로이센 기병대보다 수적으로 우세했다. 오스트리아 전열의 가장 왼쪽 측면에 위치한 6개 기병 연대는 4,500명에서 5,000명에 달했으며, 프로이센군의 포격에 자극받아 나이페르크의 명령 없이 프로이센 우익을 공격했다. 이 돌격으로 완전히 정지해 있던 프로이센 기병대는 궤멸되었다. 프리드리히는 프로이센 기병대와 함께 있다가 궤멸에 휘말렸다. 이로 인해 프로이센 측면이 공격에 노출되었고, 오스트리아 기병대는 보호받지 못하는 보병을 공격했다.오후 1시 30분경, 뢰머 기병 군단은 한 번 북동쪽으로 기동한 후 오른쪽으로 급선회하여 프로이센군 우익에 돌격했다. 슐렌부르크의 기병 군단은 이를 회피하거나 대항 돌격을 할 수 없어 궤멸되었다. 슐렌부르크는 오스트리아군 기병에게 검으로 얼굴을 베여 한쪽 눈알이 안구에서 굴러 떨어졌다. 슐렌부르크는 계속 전투를 벌였지만 곧 머리를 맞아 전사했다.
오스트리아군 기병은 그대로 프로이센군 기병을 몰아내거나, 보병 전열에 돌격했다. 보병 전열 앞에 있던 프로이센군 포병은 기병에게 습격당해 전사하거나, 포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대왕은 우익 군단 중 빈터펠트 척탄병 대대에 있어 기병의 통솔을 되찾으려 했고, 중대 단위로 재편성한 기병을 잇따라 보냈지만,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 프로이센군 기병은 패주했고, 일부는 자군 좌익까지 도망쳤다. 오스트리아군 기병은 계속해서 프로이센군 보병 전열에 쇄도했다.
4. 2. 슈베린의 활약과 프로이센 보병의 반격
프리드리히 2세가 전장을 떠난 후, 노련한 장군인 슈베린이 직접 군대를 지휘했다.[5] 슈베린은 프로이센군이 패배할 것 같아 보이자 왕에게 전장을 떠날 것을 권고했고, 프리드리히는 이 조언에 따랐다.[5]
전투 상황은 혼란스러웠다.[5] 프로이센 기병대를 흩뜨린 오스트리아 기병대는 프로이센 보병을 반복적으로 공격했다.[5] 오스트리아군을 막으려던 제2열의 프로이센 병사들의 사격은 제1열의 프로이센 병사들 또한 죽였다.[5] 프로이센군이 후퇴할 것이냐는 질문에 슈베린은 "적의 시체 위로"라고 대답했다.[5]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아래에서 엄격한 훈련을 받은 프로이센 보병은[5] 굳건히 자리를 지키며 오스트리아 기병대에 빠른 속도로 일제 사격을 가해 막대한 손실을 입히고 사령관 뢰머 장군을 죽였다.[5]
오스트리아 기병대가 격퇴된 후, 슈베린은 보병을 재정비하고 탄약이 부족한 보병 부대에 죽은 자들의 탄약을 빼앗으라고 명령했다.[5] 그런 다음 그는 프로이센 보병의 우익에 오스트리아 보병선을 향해 진격하라고 명령했고,[5] 몇 분 후 좌익에도 진격 명령을 내렸다.[5] 이로 인해 프로이센군의 우익이 오스트리아군의 좌익을 겹치는 사선 공격이 오스트리아 보병선에 가해졌다.[5] 프로이센 보병은 철제 장전봉을 사용했기 때문에,[5] 화승총으로 분당 4~5발을 발사할 수 있었는데, 이는 당시 다른 유럽 군대보다 3배나 빠른 속도였다.[5] 이러한 규율과 화력의 조합은 훈련받지 못한 미숙한 신병들로 구성된 오스트리아 보병을 빠르게 압도했다.[5] 곧 오스트리아 전열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무너졌고,[5] 오스트리아군은 전장에서 패주했다.[5]
슈베린은 자군 보병이 여전히 건재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프로이센군 보병은 오스트리아군 기병의 돌격을 번번이 격퇴하고 매번 큰 손해를 입혔다. 오스트리아군 기병은 보병 전열의 정면은 물론 측면까지 덮쳐 공격했으며, 한 번은 제2전열의 후방까지 돌입하여 공격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두 열의 전열 사이로 돌입하려는 시도는 측면을 막는 2개 대대에 의해 저지되었다.[6]
슈베린은 다시 우익 보병 부대에 교대 일제 사격으로 오스트리아군 기병을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이때 레머는 이미 프로이센 용기병의 총탄을 맞아 전사했으며, 프로이센군의 화력 공격이 활발해지자 오스트리아군 기병은 흩어졌다. 같은 시기에 레머 군단을 지원하기 위해 늦게나마 전진해 온 게르뒤의 좌익 제1보병 전열이 프로이센군 보병과 교전에 들어갔지만, 그 움직임은 매우 완만했으며, 프로이센군의 활동이 활발하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주저앉았고, 게르뒤가 전사하자 원래 위치로 후퇴했다.[6]
나이페르크는 자군 보병에게 여러 차례 전진을 명령했지만, 그들은 시체로 가득한 전장을 일사불란하게 행군하며 전진하는 프로이센군 보병을 보고 두려워하여 명령을 거부했다. 프로이센군의 신속한 포격을 받자 오스트리아군 전열은 동요했고, 이어서 사격전에 돌입하자, 우세한 프로이센군의 화력에 직면했다. 오스트리아군 보병은 2번째 일제 사격을 마치기도 전에 프로이센군 보병으로부터 5번의 일제 사격을 받았다고 하며, 조금이라도 그 속도를 따라잡기 위해 탄약 다지기 동작 없이 발포했지만, 당연하게도 발사된 탄환은 위력을 갖지 못했다.[6]
5. 전투의 결과 및 영향
몰비츠 전투는 프로이센 군의 근소한 승리로 끝났지만, 이 승리는 슈베린 원수의 지휘와 프로이센 보병의 뛰어난 훈련 덕분이었다. 전투 후 오스트리아군은 추격당하지 않고 온전하게 남았으며, 네이페르크는 라이세로 물러나 지원군을 기다리며 슐레지엔에 머물렀다. 프리드리히 2세는 전투 다음 날 아침 군대로 돌아와 통신선을 복구한 후 브리크 포위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7]
프리드리히 2세는 이 전투를 통해 많은 교훈을 얻었다. 그는 "몰비츠는 나의 학교"라고 말하며, 자신의 실수를 통해 배우고 군대를 교육했다고 썼다. 특히, 프로이센 기병대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훈련을 통해 조직적인 행동과 정확성을 갖추도록 개선했다. 또한, 프로이센 보병의 뛰어난 훈련과 규율을 재확인하고, 이후 전투에서 사선 대형 전술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전투는 프리드리히 2세의 직접적인 지휘로 승리한 것은 아니었지만, 유럽에서 그의 위상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프로이센의 승리는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슐레지엔 탈환이 쉽지 않음을 알리고, 프로이센을 군사 강국으로 인정하게 만들었다.
몰비츠 전투의 패배는 다른 통치자들이 1713년 국사 조칙을 거부하고 합스부르크 영토를 차지하려는 움직임을 부추겼다. 프랑스, 스페인, 바이에른, 작센, 사보이 그리고 프로이센은 님펜부르크 조약을 통해 동맹을 맺고,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을 확대시켰다.
군사적으로는 양측의 손실이 비슷하거나 프로이센군의 손실이 더 컸지만, 정치적으로는 프로이센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여러 나라가 프로이센을 유력한 국가로 인정했고, 프로이센은 프랑스와 바이에른 선제후 카를 알브레히트와 동맹을 맺었다.
6. 평가
몰비츠 전투는 프리드리히 2세가 처음으로 자신의 군사적 역량을 시험한 전투였으며, 프로이센군의 강점을 드러낸 전투였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2세는 초기에 지휘 실수를 범하기도 했다. 슈베린의 노련한 지휘와 프로이센 보병의 뛰어난 훈련은 전투 승리의 핵심 요인으로 꼽힌다.[7]
이 전투는 사실상 야전 사령관 슈베린의 덕분이었다.[7] 프로이센 왕은 오스트리아의 승기가 보이자 전장을 이탈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이후 자신의 군대를 남겨두고 전장을 떠나지 않겠다고 맹세했고, 18세기 말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 맹세를 지켰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슐레지엔 지방을 합병하는 데 성공하였고, 몰비츠에서 귀중한 교훈을 얻었다. "몰비츠는 나의 학교"라는 프리드리히 대왕의 말은 후세에 자주 인용된다.[7]
프리드리히는 몇 가지 실수를 하였으나, 정예화된 병사들의 활약으로 승리했다. 이후 프리드리히는 공세적인 전략을 취했고, 전군이 공세적인 움직임을 보일 수 있도록 훈련시켰다. 그는 기병대에게 항상 빠른 돌격 명령을 내렸고, 소규모 교전과 정찰에 활용되는 경기병인 후사르(Hussars)를 다양하게 활용하였다. "프로이센군은 항상 공격한다."라는 프리드리히 대왕의 말 역시 자주 인용된다.
프로이센군은 수적으로 열세였지만, 슈베린 원수의 지휘와 프로이센 보병의 뛰어난 훈련 덕분에 근소한 승리를 거두었다. 전투 후 오스트리아군은 추격당하지 않고 온전하게 남았다. 네이페르크는 라이세로 물러나 지원군을 기다리며 슐레지엔에 머물렀다. 프리드리히는 전투 다음 날 아침 군대로 돌아와 통신선을 복구한 후 브리크 포위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전투 후 프리드리히는 자신의 실수에 대해 자책하며 이를 통해 배우고, 몰비츠가 자신과 그의 군대를 교육했다고 썼다. 이 전투는 프리드리히가 프로이센 보병의 뛰어난 훈련에 의존할 수 있다는 것과 오스트리아 기병의 돌격을 견뎌낼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는 오스트리아 기병에 맞서 기병대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는 개혁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프로이센 기병을 정찰과 전투에서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조직적인 행동과 정확성을 갖추도록 훈련하는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몰비츠는 또한 프리드리히가 이후의 주요 전투에서 대부분 사용할 사선 대형 전술의 효과를 보여주었다.
이 전투는 프리드리히에게 거의 재앙에 가까웠고 그의 직접적인 지휘로 승리한 것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승리는 프리드리히가 합스부르크 왕가를 상대로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유럽에서 그의 위상을 높였다. 프로이센의 승리는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슐레지엔에 대한 통제권을 쉽게 되찾을 수 없으며 프로이센이 더 신중하게 고려해야 할 군사 강국임을 분명히 했다. 몰비츠에서 마리아 테레지아의 군대가 패배한 것은 다른 통치자들이 국사 조칙을 거부하고 합스부르크 영토를 차지하도록 장려했다. 몇 달 안에 프랑스, 스페인, 바이에른, 작센, 사보이, 프로이센은 님펜부르크 동맹으로 알려진 느슨한 연합의 동맹국이 되어 이 분쟁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으로 알려지게 될 더 큰 유럽 문제로 확대했다.
전투 패배 후, 나이페르크 군은 나이세까지 철수했지만, 늦게 프랑켄슈타인에서 온 홀슈타인-베크 부대가 나이페르크 군의 바로 서쪽을 지나가고 있었다. 나이페르크는 협격을 받을 뻔했지만, 홀슈타인-베크는 나이페르크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대로 북상했기 때문에 이를 면했다.
한편, 전장을 이탈한 대왕은 나이세강 동쪽 기슭을 건너 밤중에 오펠른에 도착하여 그곳으로 피신하려 했다. 그러나 오펠른은 이미 바라냐이의 분견대에 의해 점령되어 있었고, 도시에 개문을 요구하자 문 안쪽에서 발포하여 당황하여 그곳에서 도망쳤다. 결국 대왕은 마을에 잠복해 있었는데, 슈베린이 파견한 장교가 그를 찾아내어 자군의 승리를 알렸다.
대왕은 "이 전투는 나와 나의 군대에게 학교였다"라고 썼고[7], 승패가 명확해질 때까지 결코 전장을 떠나지 않겠다고 결심했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대왕은 공로자인 슈베린을, 자신을 전장에서 제거하려 했다고 비난했다. 한편, 이 전투에서 "나와 나이페르크 원수, 어느 쪽이 더 많은 실수를 저질렀다고 말하기는 어렵다"[7]는 것을 인정했다. 대왕은 군대의 문제점 개선에 전쟁 중부터 적극적으로 임했다.
대왕은 "아버지는 나에게 형편없는 기병을 남겼다"라고 썼다[8]。당시 프로이센군 기병은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취향에 따라 대형 말을 많이 사용했지만, 움직임이 느리고 쉽게 체력을 소모했다. 반면 오스트리아군은 대터키전에서 단련된 우수한 기병을 많이 보유하고 있었고, 그 차이가 이 전투에서 드러났다.
오스트리아군은 전군의 약 절반을 기병이 차지하는 이례적인 편성이었다. 이는 헝가리로부터의 보병 부대 전진이 늦어졌기 때문이지만, 프로이센군은 전군 중 기병이 차지하는 비율은 2할 정도였고, 이것이 당시의 평균적인 비율이었다.
한편 보병에 대해서는 프로이센군이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클라우제비츠는 "몰비츠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은 화전의 위력을 최고도로 발휘했고, 이래로 이를 능가하는 업적이 나타나지 않았다"라고 평했다[10]。 오스트리아군 장교는 프로이센군 보병의 전투 모습을 강력하게 인상받아 기록했다. "그들은 훌륭한 전열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갔다. 포병은 포탄과 산탄을 끊임없이 쏘았고, 일단 머스킷 사정거리에 들어서면 사격은 한순간도 멈추지 않았다"[11] "나는 이런 뛰어난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들은 전혀 훌륭한 통제 속에서, 주형과 같이 똑바로, 열병 행진처럼 행진했다. 햇빛에 빛나는 그들의 무기는 훌륭한 효과를 발휘했고, 그들의 사격은 끝나지 않는 천둥소리였다"[12]
이에 대항하는 오스트리아군 보병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시대부터 별로 진보하지 않아, 각 연대의 훈련 방식에 통일성이 없었다. 당시 프로이센군은 오스트리아군이 3발 쏠 동안 5발을 쏜다고 말했고[9], 이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 보병의 화력 발휘는 당시 전 유럽에서 가장 빈약했다고 평가된다[13]。
몰비츠 전투 후 오스트리아군은 나이세 동쪽 지역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지만, 프로이센군이 브리크를 공략하는 것을 방해하지 못했다. 대왕은 브리크 공격 중부터 자군 기병에게 맹훈련을 가해 그 개선에 힘썼다.
이 전투는 군사적으로는 양군의 손실이 비슷하거나, 오히려 프로이센군의 손실이 더 많았으므로 프로이센의 신승이지만, 정치적으로는 큰 효과가 있었다. 이 승리로 인해 여러 나라는 프로이센을 유력한 국가로 인정했고, 오스트리아와 분쟁 중이던 각국의 사절이 대왕의 진지를 방문했다.
6. 1. 한국의 관점에서의 평가
몰비츠 전투는 강대국 간의 세력 균형 변화와 군사력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역사적 사건으로, 한국의 국방력 강화와 외교 전략 수립에 중요한 교훈을 준다.군사력 강화와 외교적 노력의 조화:몰비츠 전투는 군사력이 국가 안보에 필수적이지만, 평화적인 외교적 노력 또한 병행해야 함을 보여준다. 특히, 프로이센이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으로 큰 효과를 얻어 여러 국가로부터 유력한 국가로 인정받게 된 점은 외교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지도자의 자질과 리더십의 중요성:프리드리히 대왕은 전투 초반에 전장을 이탈하는 실수를 저질렀지만, 이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군대 개선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는 지도자의 자질과 리더십이 국가 안보에 얼마나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준다.
군비 경쟁의 위험성과 평화적 해결책 모색:몰비츠 전투는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간의 군비 경쟁이 격화되는 상황에서 발생했다. 이는 군비 경쟁의 위험성을 경고하며, 평화적인 해결책 모색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특히, 당시 프로이센군 기병은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취향에 따라 대형 말을 많이 사용했지만, 오스트리아군은 대터키전에서 단련된 우수한 기병을 보유하여 전투에서 차이가 드러났다.
프로이센군과 오스트리아군 비교:
구분 | 프로이센군 | 오스트리아군 |
---|---|---|
기병 |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취향에 따라 대형 말을 많이 사용, 움직임이 느리고 쉽게 체력 소모. 기수는 덩치가 큰 자가 많고 마술보다 보병 훈련에 능숙. 훈련과 전법은 종래의 것에서 진보하지 않음. | 대터키전에서 단련된 우수한 기병을 많이 보유. |
보병 | 규율과 훈련이 잘 되어 있었고, 뢰머가 5차례[9]에 걸친 돌격을 감행했지만 버팀. 클라우제비츠는 "몰비츠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은 화전의 위력을 최고도로 발휘했고, 이래로 이를 능가하는 업적이 나타나지 않았다"라고 평가.[10] 철제 창 채택. |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시대부터 별로 진보하지 않음. 각 연대의 훈련 방식에 통일성이 없었고, 장비는 목재 창 사용. 당시 프로이센군은 오스트리아군이 3발 쏠 동안 5발을 쏜다고 평가.[9] |
참조
[1]
서적
The Art of Warfare in the Age of Marlborough
[2]
서적
Frederick the Great The Magnificent Enigma
[3]
문서
グスタフ・アドルフがリュッツェンの戦いで行った例
[4]
서적
世界の戦史6 ルイ十四世とフリードリヒ大王
[5]
서적
Frederick the Great The Magnificent Enigma
[6]
서적
The Army of Maria Theresa
[7]
서적
HISTOIRE DE MON TEMPS.
[8]
서적
The Army of Frederick the Great
[9]
서적
世界の戦史6 ルイ十四世とフリードリヒ大王
[10]
서적
戦争論
[11]
서적
Frederick the Great The Magnificent Enigma
[12]
서적
Frederick the Great The Magnificent Enigma
[13]
서적
The War of Frederick the Great
[14]
백과사전
National Flags
1911 Encyclopedia Britannica
[15]
서적
The Art of Warfare in the Age of Marlboroug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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