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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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은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단절로 인해 발생한 유럽의 주요 전쟁이다. 1700년 스페인 왕위 계승 문제를 둘러싸고 프랑스의 부르봉 왕가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가 대립했으며, 영국, 네덜란드 등 여러 국가들이 참전했다. 전쟁은 1713년 위트레흐트 조약과 1714년 라슈타트 조약으로 종결되었으며, 스페인의 펠리페 5세는 왕위를 유지했지만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포기했다. 영국은 지브롤터와 미노르카를 획득하고 아메리카 무역권을 강화했으며, 오스트리아는 이탈리아와 스페인령 네덜란드를 확보했다. 이 전쟁은 유럽의 세력 균형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프랑스의 헤게모니를 억제하고 영국, 프로이센, 하노버 등의 부상을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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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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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분쟁 명칭 |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
일부 | 프랑스-합스부르크 경쟁; 영국-프랑스 전쟁 |
기간 | 1701년 3월 – 1714년 9월 7일 (13년) |
장소 | 유럽, 대서양, 지중해, 카리브해 |
결과 | 위트레흐트 조약, 라슈타트 조약, 바덴 조약 체결 |
영토 변화 | |
주요 변화 | 펠리페 5세가 스페인 국왕으로 인정받으나, 프랑스 왕위 계승권 포기. 스페인이 밀라노 공국, 스페인령 네덜란드, 나폴리 왕국, 사르데냐 왕국을 오스트리아에 할양하고, 시칠리아 왕국을 사보이아에, 지브롤터와 메노르카 섬을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에 할양. 프랑스 왕국이 이프르, 투르네, 메넨, 뵈르네, 크노케 요새, 와르네통을 오스트리아에 할양하는 대신, 오랑주 공국과 위베 계곡을 획득. 네덜란드 공화국이 장벽 요새와 상 헬데른 일부 획득. |
교전 세력 | |
프로-부르봉 스페인 | 포르투갈 (1702년까지) 사보이아 공국 (1703년까지) 쿠루츠 (1703–1711) |
프로-합스부르크 스페인 | (1707년까지) (1707년부터) (1702년부터) 포르투갈 (1702년부터) 사보이아 공국 (1703년부터) |
지휘관 | |
프로-합스부르크 스페인 | 카를 6세 레오폴트 1세 # 요제프 1세 외젠 바덴 변경백 루이 구이도 슈타렘베르크 윌리엄 3세 (1702년까지) 앤 (1702년부터) 로버트 할리 말버러 오먼드 조지 루크 안토니 헤인시우스 애슬론 나소-오우베르케르크 틸리 필립스 반 알몬데 프리드리히 1세 레오폴트 페드루 2세 # 주앙 5세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 |
프로-부르봉 스페인 | 펠리페 5세 루이 14세 빌라르 방돔 베릭 부플레르 빌레루아 탈라르 자크 바쟁 드 베종 보드뢰유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 요제프 클레멘스 라코치 |
병력 규모 | |
프로-합스부르크 스페인 | : 260,090명 : 119,000명 : 70,000명 : 40,000명 : 28,000명 |
프로-부르봉 스페인 | : 255,000–400,000명 : 70,000명 : 20,000명 |
사상자 | |
프로-합스부르크 스페인 | : 250,000명 전사 및 부상 : 200,000명 전사 및 부상 : 50,000명 전사 및 부상 : 50,000명 전사 및 부상 |
프로-부르봉 스페인 | : 400,000–500,000명 전사 및 부상 : 약 100,000명 전사 및 부상 |
총 사상자 | 총 전투 사망자 (양측): 400,000명 질병 포함 총 사망자: 700,000명 ~ 1,251,000명 |
주요 전투 | |
유럽 전역 | 미델뷔르흐 아커런 블렌하임 라미예 알만사 오데나르데 말플라케 드나이 |
북미 전역 | 세인트존스 포트 로열 |
서인도 제도 | 산타마르타 과달루프 나소 콜로니아델사크라멘토 제1차 카르타헤나 제1차 리우데자네이루 제2차 카르타헤나 제2차 리우데자네이루 카사르 |
2. 배경
스페인의 카를로스 2세는 어릴 적부터 몸과 마음이 약해 후계자를 낳지 못할 것이 확실시되었다. 이로 인해 스페인, 이탈리아, 저지대 국가, 아메리카의 주도권을 물려받는 스페인 왕위 계승 문제는 중요한 이슈가 되었다. 스페인 왕권을 주장한 두 왕조는 프랑스의 부르봉 왕가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였으며, 이들은 스페인 왕위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가장 유력한 후계자는 루이 14세와 카를로스 2세의 이복 누나인 마리아 테레사 사이에서 태어난 프랑스의 왕세자 루이(1661~1711)였다. 루이 14세는 오스트리아의 앤(1601~66)을 어머니로 두었는데, 그녀는 펠리페 4세(1605~1665)와 남매지간이었기에 루이 14세는 마리아 테레사 및 카를로스 2세와 사촌 관계였다. 그러나 프랑스 왕세자가 스페인 왕위까지 계승하는 것은 유럽의 힘의 균형을 위협할 수 있다는 문제가 있었다. 앤과 마리아는 결혼으로 인해 스페인 계승권을 포기했지만, 이는 제대로 지불되지 않은 지참금 문제로 인해 의미가 없어 보였다.[53]
또 다른 경쟁자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레오폴트 1세(재위 1658~1705)였다. 그는 스페인 왕과 사촌 관계였고,[53] 펠리페 4세는 그의 의지로 오스트리아의 계승권을 지지했었다. 그러나 레오폴트의 계승은 16세기의 강력한 스페인-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의 재결합을 의미하기에 문제가 있었다. 1689년 영국의 윌리엄 3세가 황제에게 프랑스에 대항하는 대동맹 전쟁에 참여할 것을 요청했을 때, 윌리엄 3세는 스페인 제국 전 영토에 대한 황제의 권리 주장을 도울 것을 약속했다.
새로운 경쟁자는 1692년에 태어난 바이에른의 선제후 요제프 페르디난트(1692~1699)였다. 그는 비텔스바흐 왕가 소속으로, 어머니 마리아 안토니아(1669~1692)는 레오폴트 1세와 그의 첫 번째 부인 마르가리타 테레사(1651~1673)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었다.[54] 요제프 페르디난트는 부르봉 왕가나 합스부르크 왕가가 아니었기에 스페인이 프랑스나 오스트리아와 합병될 가능성이 낮았고, 영국과 네덜란드가 선호하는 계승자가 되었다. 펠리페 4세의 의지에 따라 스페인 왕위의 적법한 계승자이기도 했다.
대동맹 전쟁(1688~)이 1697년에 끝났을 때, 영국과 프랑스는 제1차 분할 조약(1698)을 체결하여 요제프 페르디난트를 스페인 왕위 계승자로, 이탈리아와 저지대의 스페인 영토는 프랑스와 오스트리아가 분할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스페인은 이 결정에 격렬히 반대했고, 카를로스 2세는 요제프 페르디난트를 전 스페인 제국의 계승자로 인정했다.
1699년 요제프 페르디난트가 천연두로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스페인 왕위 계승 문제는 다시 불거졌다. 영국과 프랑스는 제2차 분할 조약을 체결하여 카를 대공에게 스페인 왕위를, 프랑스에게 이탈리아 영토를 주기로 했다. 오스트리아는 이에 불만을 품었고, 스페인은 분할에 반대했지만, 왕위를 부르봉 가문이 계승할지 합스부르크 가문이 계승할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열되었다. 1700년 10월, 카를로스 2세는 프랑스 왕세자의 둘째 아들 앙주 공작에게 영토를 물려주기로 결정했다. 그는 프랑스와 스페인이 합병되는 것을 막기 위해 앙주 공작이 프랑스 왕위를 계승할 경우 스페인 왕위는 앙주 공작의 동생 베리 공작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2. 1. 프랑스의 야망

프랑스 왕 루이 14세는 영토 확장을 꾀하며 여러 차례 전쟁(네덜란드 독립 전쟁, 네덜란드-프랑스 전쟁, 대동맹 전쟁)을 일으켰으나, 잉글랜드 왕 겸 네덜란드 총독 윌리엄 3세를 중심으로 한 주변국의 반발로 소규모 목표만 달성하는 데 그쳤다.
1697년 대동맹 전쟁을 종결지은 라이스바이크 조약에서 프랑스는 영토를 거의 얻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요구를 수용하여 실질적인 패전을 면치 못했다. 하지만 루이 14세는 혈족 관계인 스페인 왕위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기에 타협한 결과였다.
카를로스 2세의 유언을 접한 루이 14세의 조언자들은 스페인 전토에 대한 계승권을 주장하며 전쟁의 위험을 감수하는 것보다는 1700년 체결된 제2차 분할 조약을 받아들이는 것이 안전하다고 설득했다. 그러나 프랑스 외무장관 투르시 후작 장바티스트 콜베르(Jean-Baptiste Colbert de Torcy)는 프랑스가 스페인의 전토 또는 일부를 계승하더라도 1700년 체결된 제2차 분할 조약에 명시된 분할을 받아들이지 않는 오스트리아와 전쟁은 불가피하다고 주장했다. 카를로스 2세의 유언에는 앙주 공 필리프가 스페인 전토를 계승하지 않으면 다른 어느 곳도 계승하지 못한다고 명시되어 있었다. 만약 앙주 공 필리프가 거절한다면, 그의 동생 베리 공작 샤를에게 스페인 전토의 계승권이 주어지고, 샤를도 거부하면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대공이 계승하게 되어 있었다.
영국과 네덜란드는 프랑스가 오스트리아, 스페인과 전쟁을 벌이더라도 분할 조약을 강요하기 위해 참전하지 않을 것임을 알고, 루이 14세는 손자의 스페인 왕위 계승을 받아들였다. 카를로스 2세는 1700년 11월 1일 사망했고, 11월 24일 루이 14세는 앙주 공작을 스페인의 왕으로 선언했다. 펠리페 5세는 제2차 분할 조약에 반대하며 전 스페인 제국의 지배자로 선언되었다. 윌리엄 3세는 영국과 네덜란드 엘리트 계층의 지지를 얻지 못해 전쟁을 선언하지 못하고, 1701년 4월 펠리페를 왕으로 인정했다.

그러나 루이 14세는 유럽에서 프랑스의 헤게모니를 확고히 하려는 공세를 강화했다. 그는 스페인과의 교역에서 영국과 네덜란드를 배제하여 양국의 상업적 이익을 침해했다. 윌리엄 3세는 네덜란드, 오스트리아와 함께 덴 하그 조약을 체결(1701년 9월 7일)하여 펠리페 5세를 스페인 왕으로 인정하되, 오스트리아에 이탈리아 내 스페인 영토를 할양하고 스페인령 네덜란드에 오스트리아 군대를 주둔시켜 프랑스 확장을 저지했다. 영국과 네덜란드는 스페인에 대한 상업적 권리 탈환을 합의했다.
조약 체결 직후 전 영국 왕 제임스 2세가 프랑스에서 사망했다.[57] 루이 14세는 라이스바이크 조약에서 윌리엄을 영국 왕으로 인정한 약속을 어기고 제임스 2세의 아들 제임스 프랜시스 에드워드 스튜어트를 정당한 왕위 계승자로 인정했다. 영국과 네덜란드는 이미 군대를 일으킬 준비가 되어 있었고, 루이 14세의 행동은 영국 정계를 자극하여 윌리엄 3세에게 전쟁 명분을 주었다. 사부아 공자 외젠이 지휘하는 오스트리아군이 밀라노 공국을 침공하면서 무력 충돌이 시작되었다. 영국, 네덜란드, 대부분의 독일 국가[58]는 오스트리아 편에 섰고, 바이에른과 쾰른의 비텔스바흐 선제후 가문, 포르투갈 왕국, 사보이아 공국은 프랑스와 스페인을 지지했다. 스페인에서는 아라곤, 발렌시아, 카탈루냐 왕가[59]가 카를 대공 지지를 선언했다. 1702년 윌리엄 3세 사후, 앤 여왕은 고돌핀과 말버러 공작의 지도하에 전쟁을 계속했다.
루이 14세는 외교를 통해 목표를 달성한 후 일련의 행동으로 전쟁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57] 영국 의회 토리당 다수당은 프랑스의 시칠리아 획득에 반대했다. 시칠리아는 레반트 무역의 요충지였기 때문이다.[58] 루이 14세는 이를 무시했고, 그의 행동은 토리당의 반대를 약화시켰다.[59]
1701년 초, 루이 14세는 파리 의회에 필리프의 프랑스 왕위 계승 청구를 등록하여, 샤를 2세 유언과 달리 스페인과의 연합 가능성을 제기했다. 2월, 스페인이 지배하는 밀라노 공국과 만토바 공국은 북부 이탈리아에서 필리프를 지지하고 프랑스군을 받아들였다. 슈바벤과 프랑코니아에서 프랑스와 신성 로마 제국 주들 간 동맹 구축 시도는 레오폴트 1세에게 무시할 수 없는 도전이었다.[57]
바이에른의 막스 에마누엘 총독의 도움으로 프랑스군은 라이스바이크 조약에서 허용된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장벽' 요새에서 네덜란드 주둔군을 대체했다. 이는 1648년 뮌스터 조약으로 보장된 쉘트 강에 대한 네덜란드의 독점을 위협했고, 프랑스가 앤트워프와 오스텐더를 장악하면 영국 해협 봉쇄가 가능했다.[58] 영국 무역을 위협하는 프랑스의 행동은 전쟁 명분을 만들었고, 1701년 5월 의회는 윌리엄 3세에게 반프랑스 동맹 협상을 촉구했다.[59]
9월 7일, 레오폴트 1세, 네덜란드 공화국, 영국은 헤이그 조약에 서명하여 1689년 대동맹을 갱신했다. 조약 내용은 스페인 네덜란드에서 네덜란드 장벽 확보,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프로테스탄트 계승 보장, 독립적인 스페인 유지를 포함했지만, 샤를 대공의 스페인 왕위는 언급되지 않았다.[57] 1701년 9월 16일 제임스 2세 사망 후, 루이 14세는 윌리엄 3세를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인정했던 약속을 어기고 제임스 프랜시스 에드워드 스튜어트를 지지했다. 전쟁은 불가피해졌고, 1702년 3월 윌리엄 3세 사망 후 앤 여왕은 헤이그 조약 지지를 확인했다.[58] 대펜셔너 안토니 헤인시우스가 이끄는 네덜란드도 마찬가지였다.[59] 5월 8일 네덜란드 공화국이 프랑스에 선전포고했고, 영국과 황제는 5월 15일, 국회는 9월 30일 뒤따랐다.[57]
2. 2. 스페인 왕가의 단절 위기
스페인의 카를로스 2세는 어릴 적부터 몸과 마음이 약해 후계자를 낳지 못할 것이 확실시되었다. 이로 인해 스페인, 이탈리아, 저지대 국가, 아메리카의 주도권을 물려받는 스페인 왕위 계승 문제는 중요한 이슈가 되었다. 스페인 왕권을 주장한 두 왕조는 프랑스의 부르봉 왕가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였으며, 이들은 스페인 왕위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가장 유력한 후계자는 루이 14세와 카를로스 2세의 이복 누나인 마리아 테레사 사이에서 태어난 프랑스의 왕세자 루이(1661~1711)였다. 루이 14세는 오스트리아의 앤(1601~66)을 어머니로 두었는데, 그녀는 펠리페 4세(1605~1665)와 남매지간이었기에 루이 14세는 마리아 테레사 및 카를로스 2세와 사촌 관계였다. 그러나 프랑스 왕세자가 스페인 왕위까지 계승하는 것은 유럽의 힘의 균형을 위협할 수 있다는 문제가 있었다. 앤과 마리아는 결혼으로 인해 스페인 계승권을 포기했지만, 이는 제대로 지불되지 않은 지참금 문제로 인해 의미가 없어 보였다.[53]
또 다른 경쟁자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레오폴트 1세(재위 1658~1705)였다. 그는 스페인 왕과 사촌 관계였고,[53] 펠리페 4세는 그의 의지로 오스트리아의 계승권을 지지했었다. 그러나 레오폴트의 계승은 16세기의 강력한 스페인-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의 재결합을 의미하기에 문제가 있었다.
새로운 경쟁자는 1692년에 태어난 바이에른의 선제후 요제프 페르디난트(1692~1699)였다. 그는 비텔스바흐 왕가 소속으로, 어머니 마리아 안토니아(1669~1692)는 레오폴트 1세와 그의 첫 번째 부인 마르가리타 테레사(1651~1673)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었다.[54] 요제프 페르디난트는 부르봉 왕가나 합스부르크 왕가가 아니었기에 스페인이 프랑스나 오스트리아와 합병될 가능성이 낮았고, 영국과 네덜란드가 선호하는 계승자가 되었다. 펠리페 4세의 의지에 따라 스페인 왕위의 적법한 계승자이기도 했다.
대동맹 전쟁이 1697년에 끝났을 때, 영국과 프랑스는 제1차 분할 조약(1698)을 체결하여 요제프 페르디난트를 스페인 왕위 계승자로, 이탈리아와 저지대의 스페인 영토는 프랑스와 오스트리아가 분할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스페인은 이 결정에 격렬히 반대했고, 카를로스 2세는 요제프 페르디난트를 전 스페인 제국의 계승자로 인정했다.
하지만 1699년 요제프 페르디난트가 천연두로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스페인 왕위 계승 문제는 다시 불거졌다. 영국과 프랑스는 제2차 분할 조약을 체결하여 카를 대공에게 스페인 왕위를, 프랑스에게 이탈리아 영토를 주기로 했다. 오스트리아는 이에 불만을 품었고, 스페인은 분할에 반대했지만, 왕위를 부르봉 가문이 계승할지 합스부르크 가문이 계승할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열되었다. 1700년 10월, 카를로스 2세는 프랑스 왕세자의 둘째 아들 앙주 공작에게 영토를 물려주기로 결정했다.
2. 3. 스페인의 분할안

스페인 왕위 계승 문제는 여러 차례의 조약을 통해 해결을 시도했지만, 결국 전쟁으로 이어졌다.
- 1698년 제1차 분할 조약: 잉글랜드 왕 윌리엄 3세와 프랑스 왕 루이 14세는 요제프 페르디난트를 스페인 왕위 계승자로 지명하고, 나폴리와 시칠리아는 루이 왕세자에게, 밀라노 공국은 카를 대공에게 할양하기로 합의했다.[3] 그러나 스페인은 영토 할양을 거부했다.[4]
- 1699년 요제프 페르디난트 사망: 요제프 페르디난트가 6세의 나이로 요절하면서 스페인 왕위 계승 문제는 다시 불거졌다.[5]
- 1700년 제2차 분할 조약: 영국과 프랑스는 카를 대공에게 스페인 본토를, 루이 왕세자에게는 나폴리, 시칠리아, 토스카나, 기푸스코아, 로렌을 할양하는 데 동의했다.[5] 그러나 황제 레오폴트 1세와 스페인은 반발했다.[5]
- 1700년 11월 카를로스 2세 사망: 카를로스 2세는 유언으로 앙주 공 필립을 후계자로 지명하고, 스페인 영토의 일괄 상속을 전제로 했다.[5] 루이 14세는 이를 지지했고,[6] 앙주 공 필립은 펠리페 5세로 즉위했다.
이러한 일련의 조약과 사건들은 결국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의 발발로 이어졌다.
2. 3. 1. 카를로스 2세 사망과 대립 심화
스페인의 카를로스 2세는 어릴 적부터 몸이 약했고 후계자를 낳지 못할 것이 확실했다. 이로 인해 스페인, 이탈리아, 저지대 국가, 아메리카의 주도권을 물려받는 스페인 왕위 계승 문제는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스페인 왕위를 주장한 왕조는 프랑스의 부르봉 왕가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였다.가장 유력한 후계자는 루이 14세와 카를로스 2세의 이복 누나인 마리아 테레사 사이에서 태어난 프랑스의 왕세자 루이(1661~1711)였다. 루이 14세는 오스트리아의 앤과 펠리페 4세의 아들이었으므로, 자신의 아내 및 카를로스 2세와는 사촌 관계였다. 그러나 프랑스 왕세자가 스페인 왕위까지 계승하면 유럽의 힘의 균형을 위협할 수 있었다. 앤과 마리아는 결혼으로 인해 스페인 계승권을 포기했지만, 이는 큰 의미가 없었다.
다른 경쟁자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레오폴트 1세였다. 그는 스페인 왕과 사촌 지간[53]이었고, 펠리페 4세는 오스트리아의 계승권을 지지했었다. 그러나 레오폴트의 계승은 16세기의 강력한 스페인-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의 재결합을 의미했다. 1689년 윌리엄 3세는 황제에게 프랑스에 대항하는 대동맹 전쟁에 참여를 요청하며 스페인 제국 전 영토에 대한 황제의 권리 주장을 도왔다.
새로운 경쟁자는 바이에른의 선제후 요제프 페르디난트(1692~1699)였다. 그는 비텔스바흐 왕가 소속으로, 마리아 안토니아와 마르가리타 테레사[54]의 딸이었다. 그는 부르봉 왕가도 합스부르크 왕가도 아니었기에 스페인이 프랑스나 오스트리아와 합병될 가능성은 낮았다. 그는 영국과 네덜란드가 선호하는 계승자였고, 펠리페 4세의 의지에 따라 스페인 왕위의 적법한 계승자였다.
대동맹 전쟁이 1697년에 종결되었을 때, 영국과 프랑스는 제1차 분할 조약(1698)에 합의하여 요제프 페르디난트를 스페인 왕위 계승자로, 이탈리아와 저지대의 스페인 영토는 프랑스와 오스트리아가 분할하기로 했다. 그러나 스페인은 제국 분할에 격렬히 저항했고, 카를로스 2세는 요제프 페르디난트를 전 스페인 제국의 계승자로 인정하였다.
1699년 요제프 페르디난트가 천연두로 사망하자, 영국과 프랑스는 제2차 분할 조약을 체결하여 카를 대공에게 스페인 왕권을 넘기고, 이탈리아 영토는 프랑스가 차지하기로 했다. 오스트리아는 불쾌해했고, 스페인은 분할에 반대했으나 왕위를 부르봉이 계승할 것인가, 합스부르크가 계승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분열되었다. 1700년 10월 카를로스 2세는 그의 영토를 앙주 공작에게 물려주기로 하고, 프랑스와 스페인이 합병되는 것을 막기 위해 앙주 공작이 프랑스 왕위를 계승할 경우 스페인 왕위는 베리 공작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루이 14세의 조언자들은 제2차 분할 조약을 받아들이는 것이 안전하다고 설득했지만, 프랑스 외무장관 투르시 후작 장바티스트 콜베르는 오스트리아와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했다. 카를로스 2세의 유언은 앙주가 스페인 전토를 계승하지 않으면 다른 곳도 계승하지 못한다고 명시했다. 루이 14세는 그의 손자가 스페인 왕위를 계승하는 것을 받아들였다. 카를로스 2세는 1700년 11월 1일 사망했고, 11월 24일 앙주 공작은 스페인의 왕으로 선언되었다. 새로운 왕 펠리페 5세는 제2차 분할 조약에 반대하여 전 스페인 제국의 지배자로 선언되었다. 윌리엄 3세는 1701년 4월 펠리페를 왕으로 인정하였다.
루이 14세는 스페인과의 교역에서 영국과 네덜란드를 배제했고, 윌리엄 3세는 덴 하그 조약을 체결하였다. 1701년 9월 7일의 합의는 펠리페 5세를 스페인의 왕으로 인정하나 오스트리아에게 이탈리아의 스페인 영토를 할양하고, 스페인령 네덜란드에 오스트리아 군대를 받아들이게 했다.
제임스 2세[57]가 사망하자, 루이 14세는 제임스 프란시스 에드워드 스튜어트를 정당한 왕위 계승자로 인식했다. 영국과 네덜란드는 군대를 일으킬 준비가 되어 있었고, 루이 14세의 행동은 영국의 정계를 더욱 프랑스와 소원하게 했다. 오스트리아군이 밀라노 공국을 침범하면서 무장 교전이 시작되었다. 영국과 네덜란드, 대부분의 독일 국가[58]는 오스트리아 편에 붙었으나 바이에른과 쾰른의 비텔스바흐 선제후가문과 포르투갈 왕국, 사보이아 공국은 프랑스와 스페인을 지지했다. 스페인에서는 아라곤과 발렌시아, 카탈루냐 왕가[59]는 카를 대공의 지지자로 선언했다. 1702년 윌리엄 3세가 죽은 후에도 앤 여왕은 전쟁을 계속했다.
카를로스 2세는 1665년 아버지 필리페 4세의 뒤를 이었다. 그의 건강 문제로 계승 문제는 수십 년 동안 논쟁거리였다. 1670년 찰스 2세는 루이 14세의 권리를 지지하기로 했고, 1689년 대동맹은 잉글랜드와 네덜란드 공화국이 레오폴트 1세의 권리를 지지하도록 했다.
1700년 카를로스가 사망했을 때, 스페인 제국은 이탈리아, 아메리카, 스페인령 네덜란드, 필리핀과 같은 식민지를 포함하고 있었다. 루이와 레오폴트 황제 사이의 협상은 이 영토들을 분할하는 데 집중되었지만, 스페인은 이를 허용하지 않았다. 1700년에서 1721년까지의 대북방 전쟁은 관련된 분쟁으로 간주된다.
1688년부터 1697년까지의 아홉 해 전쟁에서 군대의 수는 종종 10만 명을 넘었다. 1690년대는 소빙하기의 최저점을 기록했다. 1695년-1697년 대기근은 스코틀랜드, 스칸디나비아 및 발트 국가의 인구의 약 15~25%를, 프랑스와 북부 이탈리아에서 200만 명을 더 죽였다.
재정적 고갈과 기근이 결합되어 1697년 10월 리스위크 조약이라는 타협이 이루어졌고, 이는 계승 문제를 미해결 상태로 남겨두었다.

프랑스 왕국이나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와는 달리 스페인 왕위는 여자 계통으로도 계승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카를로스 2세의 누이 마리아 테레사와 마르가레타 테레사는 루이 14세와 레오폴트 1세와의 결혼을 통해 얻은 자녀들에게 자신의 권리를 넘겨줄 수 있었다.
레오폴트 1세와 마르가레타 테레사의 딸 마리아 안토니아는 1685년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과 결혼했고, 1692년 10월 28일 아들 요제프 페르디난트를 낳았다. 1698년 10월 프랑스, 영국, 네덜란드 공화국 간에 체결된 헤이그 조약에 따라 다섯 살짜리 요제프 페르디난트는 카를로스 2세의 상속자로 지정되었고, 그 대가로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는 스페인의 유럽 영토 일부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카를로스 2세는 이를 거부했고, 1698년 11월 14일 유언을 발표하여 스페인 왕국을 요제프 페르디난트에게 통째로 남겼다. 하지만 요제프 페르디난트가 1699년 2월 천연두로 사망하면서 이러한 계획은 무산되었다.
1685년 마리아 안토니아는 스페인 왕위 계승권을 레오폴트 1세의 아들들인 요제프 1세와 카를 대공에게 넘겼다. 루이 14세와 윌리엄 3세는 이를 이용하여 1700년 런던 조약을 체결했다. 카를 대공이 새로운 상속자가 되었고, 프랑스, 사보이아 공국, 오스트리아는 영토 보상을 받았다. 1700년 10월 초 카를로스 2세는 죽어가고 있었고, 그의 최종 유언은 왕위를 루이 14세의 손자인 앙주 공 필립에게 넘겼다. 그가 거부하면 그의 동생 베리 공작에게, 그다음 카를 대공에게 왕위가 넘어가게 되어 있었다.
카를로스 2세는 1700년 11월 1일에 사망했고, 9일 스페인 대사들은 공식적으로 필립에게 왕위를 제안했다. 루이 14세는 잠시 거절하는 것을 고려했다. 그러나 그의 아들 루이 대왕태자는 그 생각을 거부했다. 프랑스 외교관들은 또한 오스트리아가 어쨌든 전쟁을 할 것이라고 조언했고, 영국과 네덜란드는 전쟁을 피하기 위한 합의를 위해 전쟁을 벌이지 않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따라서 루이 14세는 그의 손자를 대신하여 왕위를 승낙했고, 그는 1700년 11월 16일 필리페 5세로 즉위했다.
외교를 통해 대부분의 목표를 달성한 루이 14세는 이제 일련의 행동을 취했고, 그 결과 전쟁은 불가피해졌다. 영국 의회의 토리당 다수당은 분할 조약에 반대했는데, 주로 프랑스가 시칠리아를 획득한 것에 반대했다. 시칠리아는 수익성이 높은 레반트 무역의 중요한 연결 고리였기 때문이다. 루이 14세는 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거나 무시하기로 결정했고, 그의 행동은 점차 토리당의 반대를 약화시켰다.
1701년 초, 루이 14세는 파리 의회에 필리프의 프랑스 왕위 계승 청구를 등록하여, 샤를 2세의 유언과는 달리 스페인과의 연합 가능성을 제기했다. 2월, 스페인이 지배하는 밀라노 공국과 동맹을 맺은 만토바 공국은 북부 이탈리아에서 필리프를 지지하고 프랑스군을 받아들였다. 슈바벤과 프랑코니아에서 프랑스와 신성 로마 제국의 여러 주들 사이의 동맹을 구축하려는 노력과 결합하여 이는 레오폴트 1세가 무시할 수 없는 도전이었다.
바이에른의 막스 에마누엘 총독의 도움으로 프랑스군은 리스비크 조약에서 허용된 스페인 네덜란드의 '장벽' 요새에서 네덜란드 주둔군을 대체했다. 이는 또한 1648년 뮌스터 조약에 의해 보장된 쉘트 강에 대한 네덜란드의 독점을 위협했으며, 프랑스가 앤트워프와 오스텐드를 장악하면 자유롭게 영국 해협을 봉쇄할 수 있게 되었다. 영국 무역을 위협하는 다른 프랑스의 행동과 결합하여 이는 전쟁을 위한 명확한 다수당을 만들었고, 1701년 5월 의회는 윌리엄 3세에게 반프랑스 동맹을 협상할 것을 촉구했다.
9월 7일, 레오폴트 1세, 네덜란드 공화국, 그리고 영국은 헤이그 조약에 서명하여 1689년 대동맹을 갱신했다. 이 조약의 조항에는 스페인 네덜란드에서 네덜란드 장벽을 확보하고,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에서 프로테스탄트 계승을 보장하며, 독립적인 스페인을 만드는 것이 포함되었지만, 샤를 대공을 스페인 왕위에 앉히는 것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망명 중이던 잉글랜드의 제임스 2세가 1701년 9월 16일에 사망하자, 루이 14세는 프로테스탄트인 윌리엄 3세를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국왕으로 인정했던 약속을 어기고 제임스의 아들인 제임스 프랜시스 에드워드 스튜어트의 주장을 지지했다. 전쟁은 불가피해졌고, 1702년 3월 윌리엄 3세가 사망하자 그의 후계자인 앤 여왕은 헤이그 조약에 대한 지지를 확인했다. 대펜셔너 안토니 헤인시우스가 이끄는 네덜란드도 마찬가지였다. 5월 8일 네덜란드 공화국이 프랑스에 선전포고했고, 영국과 황제는 5월 15일, 국회는 9월 30일에 뒤따랐다.

1700년 스페인은 영토 지배 측면에서 여전히 강대국으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이는 주요 구조적 약점을 감추고 있었다. 이러한 수입의 대부분은 부채를 충당하거나 외국 상인들에게 지불하는 데 사용되었다. 1701년 새로운 부르봉 왕조가 정권을 잡자, 그들은 제국이 파산 직전에 있으며 사실상 방어력이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스페인 자체에는 1만 5천 명이 채 안 되는 병력이 있었고, 해군은 총 20척의 배로 구성되어 있었다.
17세기 동안 거의 끊임없는 전쟁으로 인해 스페인 경제는 오랜 기간 생산성 저하와 불황을 겪었고, 번영을 위해서는 다른 나라에 크게 의존했다. 프랑스는 1667년부터 1697년까지 스페인과 일련의 전쟁을 벌였음에도 불구하고, 스페인의 가장 중요한 경제 파트너였으며, 노동력을 공급하고 스페인 대외 무역의 상당 부분을 통제했다. 이러한 고려 사항은 필립을 상속자로 지명하는 결정에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정치적 또는 경제적 개혁을 시행하는 것은 매우 복잡했다. 합스부르크 스페인은 카스티야와 아라곤의 왕관이 개인 동군연합을 이루고 있었고, 각각 매우 다른 정치 문화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필립의 지지는 대부분 카스티야 엘리트로부터 나왔다. 마드리드에서는 아라곤 지역 국가들의 특권 또는 ''푸에로''를 제거하는 것을 포함한 포괄적인 개혁이 독립적인 스페인 제국을 보존하는 데 필요하다는 것이 널리 받아들여졌다. 대공 카를이 카탈루냐와 발렌시아를 포함한 아라곤 왕관에 속한 지역에서 강력한 지지를 받았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3. 전개
루이 14세는 외교로 대부분의 목표를 달성했지만, 이후 일련의 행동으로 전쟁은 불가피해졌다.[7] 1701년 초, 루이 14세는 파리 고등법원에 필리프의 프랑스 왕위 계승 청구를 등록하여 스페인과의 연합 가능성을 제기했다.[7] 2월, 스페인이 지배하는 밀라노 공국과 동맹을 맺은 만토바 공국은 필리프를 지지하고 프랑스군을 받아들였다. 이는 신성 로마 제국의 레오폴트 1세에게 무시할 수 없는 도전이었다.
바이에른의 막스 에마누엘의 도움으로 프랑스군은 스페인 네덜란드의 '장벽' 요새에서 네덜란드 주둔군을 대체했다. 이는 영국 해협 봉쇄를 가능하게 했고, 영국 무역을 위협하여 전쟁을 위한 명확한 다수당을 만들었다. 1701년 5월 영국 의회는 윌리엄 3세에게 반프랑스 동맹을 협상할 것을 촉구했다.
1701년 9월 7일, 레오폴트 1세, 네덜란드 공화국, 영국은 헤이그 조약을 체결하여 1689년 대동맹을 갱신했다. 1701년 9월 16일 잉글랜드의 제임스 2세가 사망하자, 루이 14세는 제임스 프랜시스 에드워드 스튜어트의 주장을 지지했다. 1702년 3월 윌리엄 3세가 사망하자 앤 여왕은 헤이그 조약 지지를 확인했다. 1702년 5월 8일 네덜란드 공화국이 프랑스에 선전포고했고, 영국과 황제는 5월 15일, 국회는 9월 30일에 뒤따랐다.
당시 사람들은 합스부르크를 지지하는 네덜란드와 영국의 행동을 주로 아메리카 대륙의 스페인 시장 접근을 위한 것으로 보았다. 당시 지배적인 중상주의 이론은 시장을 상대적으로 정적인 것으로 보았고, 시장 점유율을 높이려면 다른 누군가로부터 빼앗아야 한다고 여겼다. 국가는 상대방의 상선과 식민지를 공격함으로써 이를 촉진했다.
전쟁은 북아메리카, 인도 및 아시아의 다른 지역으로 빠르게 확대되었고, 관세가 정책 무기로 사용되었다. 1690년부터 1704년 사이에 영국의 외국 상품 수입 관세는 400% 증가했다. 1700년 9월 6일, 프랑스는 영국산 제조품 수입을 금지하고 다른 상품에 대해 금지적인 관세를 부과했다.
9년 전쟁과 달리,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동안 군대 규모는 계속 증가했다. 대규모 군대는 전근대 경제에 큰 부담을 주었다. 군대는 보급을 위한 수상 운송에 의존했기에 라인강과 아다 강 등을 중심으로 작전이 진행되었고, 그 부재는 북부 스페인 등에서의 작전을 제한했다. 더 나은 물류, 통합된 지휘 체계 및 단순화된 내부 통신망은 부르봉 군대에게 이점을 제공했다.
루이 14세 치하 프랑스는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였으며, 수입 창출 능력이 경쟁국들을 능가했다. 프랑스는 해군을 보유했고, 국경을 방어할 수 있었다. 9년 전쟁은 프랑스가 지원 없이는 목표를 달성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스페인과 바이에른과의 동맹은 성공적인 결과를 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이전 전쟁들은 프랑스에 심각한 경제적 문제를 남겼다. 루이의 목표는 신성 로마 제국과의 국경 확보, 오스트리아 약화, 아메리카와의 무역 접근을 통한 프랑스의 상업적 강점 증진이었다.
루이 14세는 펠리페 5세의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유보하여 프랑스와 스페인의 합병을 암시했다.[7] 네덜란드를 견제하기 위해 스페인령 네덜란드 총독이자 펠리페 5세의 외삼촌인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의 승인을 얻어 프랑스 군대를 주둔시키고, 스페인의 무역 특권을 프랑스 무역 회사에 양도했다.[7]
이러한 행동은 영국을 전쟁으로 몰아넣었고, 1701년 9월 7일 헤이그에서 오스트리아, 네덜란드와 '''대프랑스 동맹(헤이그 조약)'''을 맺고 펠리페 5세의 즉위에 반대했다.[8][9][10]
스페인 전역이 펠리페 5세를 지지한 것은 아니었고, 카스티야에 비해 카탈루냐, 아라곤, 발렌시아는 중앙 정부에 대한 반감을 가졌다. 나바라와 바스크는 부르봉가를 지지했다.
전쟁 초기 영국-네덜란드 동맹군과 오스트리아군은 프랑스-스페인-바이에른 연합군에 맞서 싸웠다. 주요 전장은 저지대 국가,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이었다. 포르투갈,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하노버 등 독일 영방 국가들도 동맹에 가담하여 프랑스는 고립되었다.
전쟁 중반 프랑스군은 블렌하임 전투, 라미예 전투, 토리노 전투에서 연패하며 위기에 몰렸지만, 알만사 전투에서 승리하며 스페인 전선을 유지했다. 1708년 오우데나르데 전투와 1709년 말플라케 전투에서 연합군이 승리했지만, 큰 피해를 입어 전선은 교착되었다.
1710년 이후, 영국에서 토리당 정권이 들어서면서 평화 협상이 시작되었다. 1711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요제프 1세가 사망하고 카를 6세가 즉위하면서, 오스트리아 세력 확장을 우려한 영국은 프랑스와 단독 강화 조약을 맺었다.
유럽에서 전쟁이 벌어지는 동안,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영국과 프랑스 간 식민지 전쟁인 앤 여왕 전쟁이 발발했다. 영국은 프랑스령 캐나다의 퀘벡을, 프랑스는 뉴잉글랜드의 영국 식민지를 노렸으나 모두 실패했다. 영국은 프랑스령 아카디아 점령에 성공했다.[20]
3. 1. 초기 전투: 1701년-1703년
1701년, 오스트리아는 스페인령 밀라노 공국 탈환을 목표로 오이겐이 이끄는 군대를 북이탈리아에 진격시켰다.[11]1702년 이탈리아에서 외젠 공작은 프랑스군을 지휘하는 빌레루아 공작을 2월 1일 크레모나 전투에서 패배시키고 그를 사로잡았다. 빌레루아를 대신해 방돔 공작이 지휘를 맡아 8월 루차라 전투에서 대등한 승부를 벌였으나, 상당한 수적 우위를 지녔음에도 외젠 공작을 이탈리아에서 몰아내지는 못했다.
저지대 국가 지역에서 말버러 공작 존 처칠은 영국, 네덜란드, 독일 군대로 구성된 군대를 지휘하여, 리에주를 포함한 몇 개의 요새를 점령했다. 라인 강가에서 바덴의 루트비히 휘하의 황제군은 란다우를 점령했으나, 바이에른의 선제후가 프랑스 측에 가담하여 알자스에 대한 위협이 커졌다. 바덴의 루트비히는 라인강을 건너 퇴각해야 했으며, 프리들링겐에서 클로드 루이 엑토르 드 빌라르가 지휘하는 프랑스군에게 패배하였다. 영국의 제독 조지 루크(George Rooke)는 비고 만 해전에서 승리하여 스페인의 보물 운송선을 모두 파괴하고 많은 은을 획득했다.
1703년, 말버러 공작이 본을 점령하여 쾰른의 선제후를 추방하였지만, 앤트워프를 함락하는 데는 실패했고, 프랑스군은 독일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빌라르와 바이에른의 막시밀리안 에마누엘이 지휘하는 프랑스-바이에른 연합군은 바덴의 루트비히와 헤르만 스티럼(Hermann Styrum)이 지휘하는 황제군을 격파하였으나, 선제후는 빈으로 진군하는 것을 망설였고, 이로 인한 갈등으로 빌라르는 사직하게 되었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남부 독일의 팔츠에서 카미유 드 탈라르가 지휘하는 지원 부대가 계속 승리를 거두었다.
3. 2. 중기: 1704년-1709년
1704년 프랑스군은 네덜란드에 있는 빌레루아의 군대가 말버러 공작의 군대를 붙잡아 두는 동안, 페르디낭 드 마르생 휘하의 프랑스-바이에른 연합군은 빈으로 진군하기로 작전을 계획했다.저지대에 자신들의 군세를 머물게 하고 싶어하던 네덜란드 정부의 소망을 무시한 채, 말버러 공작은 영국과 네덜란드군을 독일을 향해 남쪽으로 돌렸다. 그러는 동안 외젠 공작은 이탈리아에서 오스트리아군을 이끌고 북상했다. 말버러 공작과 외젠 공작의 이러한 움직임은 프랑스-바이에른 연합군이 빈으로 진격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두 군세는 합류한 후에 탈라르가 지휘하는 프랑스군과 블레넘 전투에서 대결을 벌였다. 이 전투는 말버러 공작과 외젠 공작의 공적을 널리 알렸고, 바이에른 선제후국을 전쟁에서 이탈하게 만들었다. 이 해에 영국은 카를 대공의 원조로 헤센-다름슈타트의 게오르그 공작 휘하의 네덜란드 군의 지원을 받아 스페인의 지브롤터를 점령하는 또 다른 중요한 군사적 성공을 거두었다.
블레넘 전투 이후, 말버러 공작과 외젠 공작은 다시 헤어져서 말버러 공작은 저지대로, 외젠 공작은 이탈리아로 향했다. 1705년, 동맹군과 프랑스군 사이에 어떤 전역에서도 별다른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 말버러 공작은 모젤 강을 따라 프랑스를 공격하려 했지만,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 그는 빌레루아의 군대를 기습하고 브라반트 방어선을 돌파했지만, 프랑스의 장군을 전장에 나오도록 도발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빌라르와 바덴의 루트비히는 라인 강 유역에서 결정적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고, 이는 이탈리아에서 방돔과 외젠 공작 역시 마찬가지였다. 1706년 이러한 상황은 급변한다. 말버러 공작은 5월 라미예 전투에서 빌레루아 휘하의 프랑스군을 결정적으로 격파하고 잇달아 앤트워프와 됭케르크를 점령함으로써, 스페인령 네덜란드에서 프랑스군을 몰아내었다. 외젠 공작도 승리를 거두었다. 9월, 방돔이 라미예 전투 이후 궤주당한 네덜란드의 프랑스군을 집합시키기 위해 이탈리아를 떠나자 그와 사보이아 공작은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2세와 마르생이 지휘하는 프랑스군을 토리노 전투에서 격파하여 심각한 피해를 주고 그해 말, 이들을 이탈리아에서 쫓아내었다.
이제 프랑스군은 독일, 저지대, 이탈리아에서 격퇴 당하였고, 다음 해에 스페인이 전쟁의 중심 지역이 되었다. 1706년 포르투갈의 장군 미나스 후작은 포르투갈에서 스페인을 침략하여 마드리드를 점령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해 말, 마드리드는 국왕 펠리페 5세와 베릭 공작[60]에 의해 점령되어 있었다. 골웨이는 1707년 다시금 마드리드를 점령하려 하였다. 그러나 베릭은 4월 25일 알만사 전투에서 그를 완전히 격멸하였다. 그러므로 스페인에서의 전쟁은 더 이상 대규모의 전투는 벌어지지 않고, 결정적이지 않은 소규모 교전들만이 계속되었다.
1707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은 잠시 북부 유럽에서 동시에 벌어진 대북방 전쟁과 교차된다. 칼 12세 휘하의 스웨덴 군은 작센에 도착했고, 여기서 그는 아우구스트 2세를 격파하고, 폴란드의 왕위에 대한 그의 주장을 철회할 것을 강요했다. 프랑스와 동맹군은 카를의 진영에 사절을 보냈다. 그리고 프랑스군은 그로 하여금 아우구스트에 대해 황제가 지원한 것에 대하여 카를이 별로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던, 황제 요제프 1세에 대하여 군대를 일으켜주길 바랐다. 그러나 카를은 스스로를 프로테스탄트의 수호자로 자처했기 때문에 프랑스의 신교도인 위그노에 대한 처우 때문에 루이 14세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고 일반적으로 서방의 전투에 대해서 대해서 별 흥미가 없었다. 그는 러시아로 그의 관심을 돌려버렸고, 스웨덴의 전쟁 개입 가능성은 사라졌다.
1707년 후반, 외젠 공작은 이탈리아로부터 남프랑스에 대한 동맹군의 공격을 주도하였으나, 프랑스군에 의해 저지되었다. 이때 말버러 공작은 저지대에 머물러 있었는데, 그곳에서 그는 끝없이 무수한 요새들을 점령하고 있었다. 1708년 말버러 공작의 군세는 프랑스군과 마주쳤는데 이들은 심각한 지도력 문제를 지니고 있었다. 프랑스군의 사령관 부르고뉴 공작[61]과 방돔 공작은 부르고뉴 공작이 종종 어리석은 군사적 결정을 내렸기 때문에, 자주 불화를 일으켰다. 부르고뉴의 존재는 프랑스군이 말버러 공작과 외젠 공작이 다시 합류하는 동안 단 한 번의 공격도 하지 못하게 만들었고 이는 동맹군이 릴의 요새를 함락하기 전, 오우데나르데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하게 하였다. 이탈리아에서 오스트리아는 1708년 포를리 시를 공략하였다.
오우데나르데와 릴의 재난은 프랑스로 하여금 파국에 직면하게 하였다. 루이 14세는 협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외무장관 투르시 후작을 보내 헤이그에서 동맹군의 사령관들을 만나게 하였다. 루이 14세는 그에게 이탈리아의 나폴리 왕국을 제외한 다른 모든 영토를 동맹에게 양도하고, 스페인을 포기하는 데 동의했다. 게다가 그는 스페인에서 추방당한 펠리페 5세를 지원할 자금을 준비했다. 그러나 동맹군은 굴욕적인 조건을 제시했다. 그들은 루이 14세에게 프랑스군을 투입해 그의 손자를 폐위하라고 요구하였다. 이러한 제안을 거절하고 루이 14세는 끝까지 싸울 것을 선택했다. 그는 수천의 새로운 군대를 모집하기 위해 프랑스의 국민들에게 간청했다.
1709년 동맹군은 세 루트로 프랑스에 대한 공격을 시도했다. 그러나 두 방향은 단순히 견제를 하기 위한 움직임이었기 때문에 규모가 작았다. 가장 심각한 위협은 말버러 공작과 외젠 공작이 파리를 향해 출진시킨 군대였다. 그들은 빌라르 공작 휘하의 프랑스군과 말플라크 전투에서 마주쳤다. 비록 동맹군은 프랑스군을 격파하였지만, 그들은 프랑스군이 겨우 10000 정도의 피해를 입었음에 반해 20000이 넘는 병사를 잃었다. 동맹군은 몽스를 점령하였으나, 그들의 승리를 이어갈 수 없었다. 이 전투는 전쟁의 전환점으로 여겨진다. 동맹군은 비록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사상자로 인해 프랑스를 계속 공격할 수 없었다.
3. 3. 말기: 1710년-1714년
1710년, 동맹군은 스페인에서 마지막 군사 작전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제임스 스태너프가 이끄는 군대는 카를 대공과 함께 마드리드에 도착했지만, 프랑스로부터 원군이 도착하자 브리우에가에서 항복해야 했다. 한편, 동맹군은 약화되고 있었다. 영국(3년 전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합병으로 성립)에서 말버러 공작의 정치적 영향력은 줄어들었는데, 이는 그가 권력을 가질 수 있었던 근원인 앤 여왕과 그의 아내 말버러 공작부인 사라 처칠 사이의 우정이 끝났기 때문이다. 앤 여왕은 사라 처칠을 궁정에서 쫓아냈다. 또한 전쟁을 지원하던 휘그당이 정권을 잃고 토리당이 정권을 잡아 평화 절차를 밟기 시작했다.[60]1711년, 카를 대공이 그의 형 요제프 1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6세로 즉위했다. 이 상황에서 오스트리아의 결정적인 승리는 프랑스의 승리만큼이나 유럽의 힘의 균형을 뒤엎을 우려가 있었다. 말버러 공작은 네 플레스 울트라 방어선을 돌파하고 부섕을 함락시켜 빌라르 원수에게 전략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나,[61] 그해 말 영국으로 소환되어 오먼드 공작에게 지휘권을 넘겨야 했다.
볼링브록 자작 1세 헨리 St 존 내각이 이끌던 영국은 네덜란드와 오스트리아를 협상에서 제외하고 비밀리에 프랑스와 교섭하기 시작했다. 오먼드 공작은 영국군을 이끌고 전투에 참여하는 것을 거절했으며, 이에 따라 빌라르 원수 휘하의 프랑스군은 1712년 드냉 전투에서 실지를 회복하는 데 성공하였다.
영국과 네덜란드는 1713년 위트레흐트 조약이 체결되자 프랑스와의 전쟁을 멈추었다. 1705년부터 스페인의 왕위를 주장하던 카를 대공과 동맹군의 지원을 받던 바르셀로나는 1714년 9월 11일 긴 공성전 끝에 항복하여 스페인에서의 전쟁은 종결되었다. 오늘날 이 날짜는 카탈루냐의 국경일로 기억되고 있다.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의 적대 관계는 1714년 라슈타트 조약과 바덴 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계속되었고, 이 조약으로 두 나라의 적대 행위가 종결되면서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막을 내렸다. 스페인은 좀 더 늦게 평화 조약에 서명했는데, 오스트리아와의 싸움은 4국 동맹 전쟁 (1718년)에서 열강들에게 패한 후 1720년에 공식적으로 끝났다.
4. 각 전선의 공방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은 네덜란드,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등 여러 전선에서 복잡하게 전개되었다.
- '''이탈리아 전선:''' 17세기 동안 사보이아 공국은 북부 이탈리아에서 스페인을 대체하여 최강 세력이 되고자 했다. 사보이아는 토리노가 있는 피에몬테 공작령과, 알프스 이탈리아 쪽에 있는 아오스타 공국, 그리고 알프스 산맥을 넘어 프랑스 쪽에 있는 사보이 공국과 니스 백작령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프랑스 쪽에 있는 지역은 방어하기 어려워, 사보이아는 대체로 프랑스 편을 들었다. 그러나 비토리오 아마데오 2세는 밀라노 공국 획득을 위해 1703년 영국-네덜란드 함대가 서지중해의 지배권을 획득한 후 동맹군에 가담했다. 전쟁 초기 오이겐이 이끄는 오스트리아군이 북이탈리아를 침공하여 프랑스군을 격퇴했으나,[11] 프랑스군의 반격으로 전세가 역전되었다. 1706년 토리노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이 승리하면서 이탈리아 전선은 동맹군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 '''스페인 전선:''' 1704년 영국군이 지브롤터를 점령하고,[60] 1705년 카탈루냐가 카를 대공을 지지하면서 스페인 내전이 격화되었다. 1706년 동맹군이 마드리드를 점령하기도 했으나, 펠리페 5세와 베릭 공작이 이끄는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이 반격하여 전세는 교착 상태에 빠졌다. 1707년 알만사 전투에서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이 대승을 거두면서, 이후 스페인 전선은 소규모 교전 위주로 진행되었다.[60] 1710년 동맹군이 다시 마드리드를 공략했으나 실패했고, 1714년 바르셀로나 공방전을 끝으로 스페인 전선은 종결되었다.
4. 1. 네덜란드 방면

이 전장에서 대동맹의 첫 번째 목표는 네덜란드 국경을 확보하는 것이었는데, 이 국경은 프랑스, 바이에른, 그리고 리에주와 쾰른 통치자인 바이에른의 요제프 클레멘스 간의 동맹에 의해 위협받고 있었다. 1702년 동안 대동맹은 나이메헌 공격을 격퇴하고, 네덜란드 공화국 동쪽에 있는 강력한 도시인 카이저스베르트를 점령하고, 벤로, 뢰르몬트, 스테번스베르트 및 마스 강을 따라 리에주를 점령했다.[11] 1703년 작전은 동맹국 전략에 대한 갈등으로 훼손되었다. 본을 점령했음에도 불구하고, 앤트워프를 점령하지 못했고, 네덜란드 부대는 6월 에케렌에서 간신히 재앙을 피했다.[12]
상 라인에서 바덴-바덴 변경백 루이 빌헬름 지휘하의 제국군은 방어적인 입장을 유지했지만, 1702년에는 란다우를 점령했다. 바이에른군 지원을 받은 프랑스군은 1703년 작전에서 란다우를 탈환하고, 프리들링겐, 회흐슈테트, 슈파이어바흐에서 승리를 거두고, 케를과 브라이삭을 점령했다. 헝가리에서 라코치의 독립 전쟁에 오스트리아 자원이 흡수됨에 따라, 1704년 프랑스-바이에른 계획은 비엔나로 진군하는 것이었다.[13] 압력을 완화하기 위해 말보로는 라인 강을 따라 진군하여 바덴의 루이와 오이겐 왕자와 합류하여 7월 2일 도나우 강을 건넜다. 8월 13일 블렌하임 전투에서 동맹군 승리는 바이에른을 전쟁에서 탈퇴시켰고, 일베르샤임 조약은 바이에른을 오스트리아 통치하에 두었다.[14]
1705년 승리를 이용하려는 동맹군 노력은 부족한 조정, 전술적 분쟁 및 지휘부 경쟁으로 실패했다.[15] 네덜란드 공화국과 잉글랜드 사이의 외교적 위기는 슬랑겐부르크 장군 프레데릭 요한 반 바어의 해임으로 간신히 피했다.[16] 바이에른에서 오스트리아 통치 강요는 짧지만 잔혹한 농민 반란을 일으켰다.[17] 1706년 5월, 프랑스는 말보로 지휘하의 동맹군에 의해 라밀리 전투에서 완패했고, 그 후 2주 만에 스페인령 네덜란드 대부분을 점령했다.[18] 프랑스는 전쟁 나머지 기간 동안 대체로 방어적인 자세를 취했다.[19]
1707년 작전은 양측이 다른 전선에 집중했기 때문에 중요한 사건이 없었다. 뱅돔 원수 지휘하에 있는 프랑스는 전투를 피했고, 말보로는 그들에게 전투를 강요하지 않았다. 1708년이 되자 양측 초점은 다시 낮은 국가들 전투에 거의 전적으로 집중되었다. 동맹군은 다시 한번 프랑스 요새 지대를 돌파하는 것을 목표로 했고, 프랑스군은 대규모 반격을 계획했다. 이 반격은 프랑스가 겐트와 브뤼헤의 동맹군 수비대를 기습했을 때 처음에는 성공했지만,new|새로운영어 영국-네덜란드 통치자들에게 불만을 품은 플랑드르 시민들 도움 덕분이었다.[20] 동맹군이 오이덴나르데 전투에서 그들을 물리친 후 실패했다. 그 여파로 동맹군은 프랑스 요새 지대 가장 강력한 요새인 릴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고, 브뤼셀에 대한 프랑스 공격은 격퇴되었고 겐트와 브뤼헤는 탈환되었다.[21][22] 그러나 릴과 다른 요새와 같은 손실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는 동맹군이 국경에서 결정적인 돌파구를 만드는 것을 막을 것이다.[23]
4. 2. 독일 방면
프랑스는 독일에도 군대를 파병하여 알자스를 거점으로 라인강 유역(라인란트)에서 동진을 노리고 있었다. 이에 대해 바덴 변경백 루트비히 빌헬름은 스트라스부르에서 슈톨호펜에 이르는 방어선을 구축하고 프랑스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1702년 빌라르는 바이에른의 막시밀리안 2세에 호응하여 라인강 도하를 결심하고, 남하하여 프리틀링겐 전투에서 황제군에 승리하였으나,[35] 스트라스부르로 철수했다. 1703년 다시 남하하여 라인강을 건너 바이에른 군과 합류, 오스트리아 수도 빈을 위협했다.그러나 빌라르와 막시밀리안 2세는 방침을 둘러싸고 대립했고, 빌라르는 프랑스로 소환되었다. 타라르 백작 카미유 드 스튄과 페르디낭 드 마르상이 빌라르의 후임으로 독일 방면을 맡았으나, 1704년 블렌하임 전투에서 말버러 공작과 외젠이 이끄는 연합군에게 대패하여 타라르는 포로가 되고, 마르상은 라인강으로 후퇴했으며, 막시밀리안 2세는 네덜란드로 망명하였다. 도나우 강의 프랑스군은 소멸되었고 라인강 전선도 열세에 놓였다.[35]
빌라르는 1705년 라인강 방면군에 복귀하여 말버러 공작의 남하를 저지하고 라인강 전선을 재정비하였다.[35]
1707년 루트비히 빌헬름이 사망하고 바이로이트 변경백 크리스티안 에른스트가 라인강 사령관이 되었다. 빌라르는 크리스티안 에른스트가 지키는 슈톨호펜을 공격하여 그가 버린 슈톨호펜 방어선을 돌파하고, 바덴·뷔르템베르크를 약탈하며 큰 전과를 올렸다. 크리스티안 에른스트는 실책으로 파면되었고, 하노버 선제후 게오르크 루트비히(후의 영국 왕 조지 1세)가 라인강으로 향하자, 빌라르는 알자스로 철수하였다.
1708년, 빌라르와 막시밀리안 2세가 다시 대립하여 빌라르는 남프랑스로 좌천되었다. 스페인 방면에서 활약하던 베릭 공작 제임스 피츠제임스가 스페인에서 라인강으로 전임하여 막시밀리안 2세를 보좌한 후, 코블렌츠에서 병력을 모아 네덜란드로 향하는 외젠을 추격하여 북상하였고, 네덜란드에서 부르고뉴 공작과 방돔과 합류하여 오데나르데 전투에서 손해를 입은 프랑스군의 재건과 연합군의 격퇴에 임하였다. 이후 라인강 전선은 전황 변화 없이 종전을 맞이하게 된다.[36]
4. 3. 이탈리아 및 남프랑스 방면
17세기 내내, 사보이아 공국은 북부 이탈리아에서 스페인을 대체하여 최강의 세력이 되고자 했다. 사보이아는 토리노가 있는 피에몬테 공작령과, 알프스 이탈리아 쪽에 있는 아오스타 공국, 그리고 알프스 산맥을 넘어 프랑스 쪽에 있는 사보이 공국과 니스 백작령의 주요 두 지역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프랑스 쪽에 있는 지역은 방어하기가 어려웠고, 루이 14세 등이 추구한 반합스부르크 정책과 결합되어 사보이아는 일반적으로 프랑스 편을 들었다. 그러나 피에몬테는 외세에게 반항적인 남부 프랑스 지방인 도피네와 보뉴주로의 접근을 허용했다. 이곳들은 예전 위그노의 거점으로 오랜 반란의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이는 비토리오 아마데오 2세에게 일정한 영향력을 제공하여, 상대 진영 사이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영토를 확장할 수 있게 했다.1690년 9년 전쟁 동안 사보이아는 대동맹에 참여한 후 1696년 프랑스와 별도의 평화 조약을 맺었다. 1701년 펠리페 5세의 즉위는 오랜 전략 정책의 역전을 초래했는데, 프랑스는 이제 롬바르디아에서 스페인의 입장을 지지하기 시작했고, 오스트리아는 그 반대를 했다. 비토리오 아마데오는 처음에 사보이아를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지만, 그의 장기적인 목표는 밀라노 공국을 획득하는 것이었는데, 어느 왕가도 자발적으로 포기하지 않을 것이었다. 이탈리아의 국경을 확보하는 것이 스페인 자체보다 레오폴트 황제에게 더 큰 관심사였다. 즉, 영국만이 비토리오 아마데오가 이 목표를 달성하도록 돕고자 하는 세력이었고, 그는 1703년 영국-네덜란드 함대가 서지중해의 지배권을 획득한 후 편을 바꿨다.

이탈리아 전쟁은 주로 스페인이 지배하는 밀라노 공국과 프랑스와 동맹을 맺은 만투아 공국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는데, 이 두 지역은 오스트리아 남부 국경의 안보에 필수적이었다. 1701년, 프랑스군은 두 도시를 점령했고, 사보이아 공작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는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으며, 그의 딸 마리아 루이자는 펠리페 5세와 결혼했다.[16] 1701년 5월, 프린츠 외젠이 이끄는 황제군이 이탈리아 북부로 진격했고, 1702년 2월까지 카르피 전투, 키아리 전투, 크레모나 전투에서의 승리로 프랑스군은 아다 강 이남으로 후퇴하게 되었다.
프랑스 최고의 장군 중 한 명인 루이 조제프 드 뱅돔 공작이 지휘권을 잡고 대규모 증원을 받았다. 프린츠 외젠은 루차라 전투에서 무승부를 기록했지만, 프랑스는 대부분의 영토를 회복했고 전년보다 손실이 컸다. 1703년 10월, 비토리오 아메데오는 프랑스에 선전포고했고, 1706년 5월까지 프랑스는 토리노를 제외한 사보이아 대부분을 장악했으며, 카사노와 칼치나토에서의 승리는 황제군을 트렌티노 계곡으로 몰아넣었다.
그러나 1706년 7월, 라미이 전투에서 패배한 후, 뱅돔과 이용 가능한 모든 병력은 프랑스 북부 국경을 강화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안할트데사우의 레오폴트가 이끄는 독일 보조군의 지원을 받은 프린츠 외젠은 9월에 토리노 포위전을 돌파했다. 카스티글리오네에서 프랑스의 소규모 승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 전쟁은 끝났다. 1707년 밀라노 조약에서 황제 요제프는 동맹국의 분노를 사면서 롬바르디아에 있는 프랑스군에게 남부 프랑스로의 자유로운 통행을 허용했다.
4월에 계획된 프랑스 기지 툴롱에 대한 사보이아-황제군의 합동 공격은 황제군이 스페인 부르봉 왕조의 나폴리 왕국을 점령하기 위해 돌려지면서 연기되었다. 8월에 툴롱을 포위했을 때는 프랑스군이 너무 강해서 철수해야 했다. 1707년 말까지 비토리오 아메데오가 니스와 사보이아를 회복하려는 소규모 시도를 제외하고 이탈리아의 전투는 중단되었다.
4. 4. 스페인 방면
1704년 영국은 카를 대공의 원조로 헤센-다름슈타트의 게오르그 공작 휘하의 네덜란드 군의 지원을 받아 스페인의 지브롤터를 점령하는 중요한 군사적 성공을 거두었다.[60]1706년 포르투갈의 장군 미나스 후작은 포르투갈에서 스페인을 침략하여 마드리드를 점령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해 말, 마드리드는 국왕 펠리페 5세와 베릭 공작에 의해 점령되어 있었다.[60] 1707년 골웨이는 다시금 마드리드를 점령하려 하였으나, 베릭은 4월 25일 알만사 전투에서 그를 완전히 격멸하였다.[60] 이후 스페인에서의 전쟁은 더 이상 대규모의 전투는 벌어지지 않고, 결정적이지 않은 소규모 교전들만이 계속되었다.
1710년 동맹군은 스페인에서 최종적인 전역을 벌였으나, 어떤 시도도 다 실패했다. 제임스 스태너프의 군대는 카를 대공과 함께 마드리드에 도착했으나, 적들의 원군이 프랑스로부터 도착했을 때 브리우에가에서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1705년부터 스페인의 왕위를 주장하던 카를 대공과 동맹군의 지원을 받던 바르셀로나는 1714년 9월 11일 긴 공성전 끝에 최종적으로 항복하여 스페인에서의 전쟁은 종결되었다. 오늘날 이 날짜는 카탈루냐의 국경일로 기억되고 있다.


당시 스페인은 카스티야와 아라곤 왕관의 동군연합이었다. 후자는 카탈루냐, 아라곤, 발렌시아, 마요르카, 시칠리아, 나폴리, 사르데냐로 구성되었다. 1701년 마요르카, 나폴리, 시칠리아, 사르데냐는 펠리페를 지지했지만, 반(反)카스티야 및 반프랑스 정서가 혼합되어 다른 지역들은 대공 찰스를 지지했으며, 가장 중요한 곳은 카탈루냐였다. 1702년 10월 비고 만 해전에서 동맹군의 승리는 포르투갈의 페드로 2세가 편을 바꾸도록 설득하여 이 지역에 작전 기지를 제공했다.
1704년 3월 카를 대공은 리스본에 상륙하여 육상 작전을 시작했고, 영국-네덜란드 연합군의 지브롤터 점령은 부르봉 왕가의 명성에 큰 타격을 입혔다. 지브롤터를 탈환하려는 시도는 8월 벨레스-말라가 전투에서 패배했으며, 1705년 4월 육상 포위 공격이 포기되었다. 1705년 카탈루냐 대표와 영국 사이의 제노바 조약은 북동부에 제2 전선을 열었다. 바르셀로나와 발렌시아의 함락으로 툴롱이 서지중해에서 부르봉 왕가가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주요 항구로 남았다. 1706년 5월 필리페는 바르셀로나 탈환을 시도했지만 격퇴되었고, 그의 부재로 포르투갈에서 온 동맹군이 마드리드와 사라고사에 진입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중의 지지 부족과 물류 문제로 인해 동맹군은 해안선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을 유지할 수 없었고, 11월까지 필리페는 카스티야, 무르시아, 발렌시아 일부를 장악했다. 1707년 4월 동맹군이 주도권을 되찾으려는 노력은 알만사 전투에서 패배로 끝났고, 8월 툴롱 포위 공격이 실패했다. 지브롤터와 1708년 메노르카 점령으로 영국 왕립 해군이 서지중해를 지배할 수 있게 되었다.
5. 평화 조약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은 1713년 위트레흐트 조약, 1714년 라슈타트 조약과 바덴 조약으로 종결되었다.
1708년 말, 프랑스는 이탈리아 북부에서 철수했고, 해양 강국들은 스페인령 네덜란드를 장악하고 네덜란드 공화국의 국경을 확보했다. 지중해에서는 해양 강국들이 해상 주도권을 확보했고, 영국은 지브롤터와 미노르카에 영구 기지를 확보했다. 그러나 프랑스 국경은 대부분 그대로였고, 프랑스 군대는 패배의 징후를 보이지 않았으며, 펠리페 5세는 스페인 국민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1701년 대동맹이 설정한 목표 중 많은 부분이 달성되었지만, 1708년의 성공은 그들을 지나치게 자신감에 차게 만들었다.[15]
라인 강에서 전투는 계속되었지만, 오스트리아는 재정적으로 고갈되었다. 1713년 11월 란다우와 프라이부르크를 잃은 후, 샤를 6세는 1714년 3월 7일에 라슈타트 조약을 체결하여 평화를 맺었다. 합스부르크 군주국은 위트레흐트 조약의 조건을 수용하고, 남부 이탈리아에서의 이득을 확정하고, 브라이작, 켈, 프라이부르크를 반환받았으며, 헝가리 반란에 대한 프랑스의 지원을 종식시키고, 네덜란드 방어 요새에 대한 조건에 동의했다. 샤를 6세는 스트라스부르와 알자스에 대한 주장을 포기하고, 바이에른과 쾰른의 비텔스바흐 선제후인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과 요제프 클레멘스의 복위에 동의하여 그들에 대한 제국 금지령을 해제했다. 조약 제19조는 스페인 네덜란드에 대한 주권을 오스트리아로 이전했다.[15]
1714년 9월 7일, 신성 로마 제국은 바덴 조약을 통해 라슈타트 조약의 내용에 합류했다. 비록 카탈루냐와 마요르카는 1715년 6월까지 부르봉 왕가에 의해 완전히 정복되지 않았지만, 이로써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15]
이 전쟁의 결과, 프로이센과 사보이아가 부상했으며, 많은 참가국들이 1700년부터 1721년까지 이어진 대북방전쟁에 참전했고, 그 결과 러시아가 처음으로 주요 유럽 강국으로 부상했다. 식민지 분쟁은 비교적 미미했고 북미 지역에 국한되었지만, 소위 여왕 앤 전쟁은 미래 전쟁의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1] 한편, 전쟁 종식으로 인한 해상 실업은 많은 선원들이 전쟁 당사국 해군에서 일자리를 잃고 생존을 위해 해적질에 나서면서 황금시대의 해적의 세 번째 단계를 불러왔다.[1]
5. 1. 위트레흐트 조약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필리프는 스페인의 펠리페 5세로 즉위했지만, 그의 가문은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박탈당하여 프랑스와 스페인의 왕위가 한 명에게 계승되는 위협은 사라졌다. 프랑스인들은 이러한 계승 포기가 불법적이라고 생각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두 왕조의 분리가 이루어졌다. 펠리페 5세는 스페인의 해외 영토를 획득했지만, 스페인령 네덜란드, 나폴리, 밀라노, 사르데냐를 오스트리아에게 양도하고, 시칠리아와 밀라노의 일부를 사보이아에게, 지브롤터와 미노르카를 영국에게 주어야만 했다.[59] 게다가, 그는 30년간 아시엔토(asiento)라 불린 스페인령 아메리카에서의 독점적인 노예 무역권을 영국에게 양도해야만 했다.[59]펠리페 5세는 왕국을 통합하기 위해 누에바 플란타 법령(Nueva Planta decrees)를 발행하여 전쟁 중 카를 대공을 지지했던 아라곤 연합 왕국의 지방 자치를 종결시키려 하였다. 반면에 나바라 왕국이나 바스크 지방처럼 국왕을 도와 합스부르크의 카를 대공에 대항하여 싸운 지방은 자치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59]
유럽에서의 프랑스 영토는 큰 변동이 없었다. 신성로마제국은 프랑스의 영토를 17세기 중반의 영토로 축소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프랑스는 영국의 왕위를 노리는 스튜어트 왕가에 대한 지원을 하지 않고, 앤 여왕을 정당한 왕으로 인정하였다. 프랑스는 북아메리카의 루퍼츠랜드와 뉴펀들랜드에 대한 영국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세인트키츠섬의 반과 아르카디아를 양도하였다. 네덜란드는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많은 항구를 손에 넣었으며, 스페인령 헬데를란트를 합병하는 것이 허가되었다.[59]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17세기에 주도적이었던 프랑스의 헤게모니를 억제하려는 전쟁은 당분간 사라지게 되었다. 부르봉 왕가의 프랑스와 스페인은 동맹자로 남았지만, 이탈리아와 저지대의 영토를 상실한 스페인은 대륙 정계에서 이류국가가 되어 버렸다.[59]



5. 2. 라슈타트 조약과 바덴 조약
1714년 3월 7일 체결된 라슈타트 조약에서 합스부르크 군주국은 유트레흐트 조약의 조건을 수용했다. 합스부르크 군주국은 남부 이탈리아에서의 이득을 확정하고, 브라이작, 켈, 프라이부르크를 반환받았으며, 헝가리 반란에 대한 프랑스의 지원을 종식시키고, 네덜란드 방어 요새에 대한 조건에 동의했다. 샤를 6세는 스트라스부르와 알자스에 대한 주장을 포기하고, 바이에른과 쾰른의 비텔스바흐 선제후인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과 요제프 클레멘스의 복위에 동의하여 그들에 대한 제국 금지령을 해제했다. 조약 제19조는 스페인 네덜란드에 대한 주권을 오스트리아로 이전했다.[15]1714년 9월 7일, 신성 로마 제국은 바덴 조약을 통해 라슈타트 조약의 내용에 합류했다. 비록 카탈루냐와 마요르카는 1715년 6월까지 부르봉 왕가에 의해 완전히 정복되지 않았지만, 이로써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15]
6. 영향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은 유럽 각국과 국제 질서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 위트레흐트 조약과 라슈타트 조약 이후 서유럽의 국경선이 재편되었고, 각국의 세력 균형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
- 스페인: 펠리페 5세는 스페인 왕위를 유지했지만, 스페인령 네덜란드, 나폴리, 밀라노, 사르데냐 등을 오스트리아에, 시칠리아와 밀라노 일부를 사보이아에, 지브롤터와 미노르카를 영국에 양도해야 했다. 또한, 영국에 30년간 스페인령 아메리카에서의 독점 노예 무역권(아시엔토)을 넘겨주었다.[1] 펠리페 5세는 누에바 플란타 법령을 통해 중앙집권화를 추진했지만, 나바라 왕국과 바스크 지방은 자치권을 유지했다.[1]
- 프랑스: 위트레흐트 평화 조약으로 프랑스의 헤게모니는 억제되었지만, 프랑스와 스페인은 동맹을 유지했다. 그러나 스페인은 유럽 정치에서 2류 국가로 전락했다.[1] 루이 14세 사후 프랑스는 영국과의 격차가 벌어지면서 세력균형에 대한 위협을 느끼게 되었고, 이는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참전의 주요 요인이 되었다.[4]
- 오스트리아와 신성 로마 제국: 오스트리아는 이탈리아와 헝가리에서 지위를 확보하고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를 획득하여 재정적으로 강화되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남유럽으로 영향력을 확대했지만,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서는 바이에른, 하노버, 프로이센, 작센 등의 도전을 받았다.[5]
- 영국: 영국은 위트레흐트 조약을 통해 해상 우위, 지중해 전략 항구, 스페인 아메리카 무역권을 확보하며 가장 큰 이득을 보았다. 특히 아시엔토 획득은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주었지만 윤리적 비판을 받았다. 프랑스와의 조약을 통해 왕위 계승 문제를 해결하고, 효율적인 재정 운용으로 유럽 주요 상업 강국으로 부상했다.[46]
- 네덜란드 공화국: 네덜란드는 남부 네덜란드에서 지위를 회복하고 프랑스의 확장을 저지하는 데 성공했지만, 전쟁으로 인해 재정적으로 파산하고 상선에 큰 피해를 입었다. 영국이 해상 강국으로 부상하면서 네덜란드의 영향력은 감소했다.[7]

전쟁은 유럽뿐만 아니라 북아메리카(앤 여왕 전쟁), 서인도 제도, 남아메리카, 인도, 아시아 등 전 세계로 확대되었다. 특히 서인도 제도에서는 사탕수수 생산과 관련된 막대한 이윤 때문에 분쟁이 격화되었다. 재정적 압박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1]
1709년의 대 한파는 프랑스와 스페인에 기근을 야기했고, 말플라케 전투는 연합군에게 큰 피해를 입혀 평화에 대한 열망을 증가시켰다. 1710년 영국 총선에서 토리당이 승리하면서 영국의 전쟁 정책이 변화했고, 비밀 협상을 통해 프랑스와 평화 조건을 합의했다. 1711년 황제 선거에서 카를 대공이 황제로 선출되면서 스페인과 오스트리아의 연합 가능성이 제기되자, 영국은 프랑스와의 협상을 더욱 가속화했다.


기타 국가들 관련 분쟁으로는 라코치의 독립 전쟁, 카미자르 봉기 등이 있었으며, 프로이센과 사보이가 부상하고 러시아가 유럽 강국으로 떠오르는 등 국제 질서에 큰 변화가 나타났다. 영국의 왕위 계승법 제정과 프로이센 왕국 성립은 유럽의 세력 구도를 바꾸는 중요한 사건이었다.[46]
6. 1. 스페인
펠리페 5세는 스페인의 왕위를 유지했지만, 스페인령 네덜란드, 나폴리, 밀라노, 사르데냐를 오스트리아에, 시칠리아와 밀라노 일부를 사보이아에, 지브롤터와 미노르카를 영국에 양도해야 했다. 또한, 30년간 아시엔토(asiento)라 불리는 스페인령 아메리카에서의 독점 노예 무역권을 영국에 넘겨주었다.[1]펠리페 5세는 왕국 통합을 위해 누에바 플란타 법령(Nueva Planta decrees)을 시행하여 아라곤 연합 왕국의 자치를 종결시키려 했다. 그러나 나바라 왕국과 바스크 지방은 국왕을 도와 합스부르크의 카를 대공에 대항하여 싸웠기 때문에 자치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1]
1700년, 스페인은 여전히 강대국이었지만, 구조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아메리카에서 유입된 금은 수입은 최고조에 달했지만,[17] 대부분 부채 상환이나 외국 상인에게 지불되었다. 1701년 부르봉 왕조는 제국이 파산 직전이며 방어력이 약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스페인 자체 병력은 1만 5천 명이 채 되지 않았고, 해군은 20척에 불과했다.[18]
스페인은 오랜 기간 생산성 저하와 불황을 겪었고, 번영을 위해 다른 나라에 의존했다. 프랑스는 스페인의 가장 중요한 경제 파트너였으며, 노동력을 공급하고 대외 무역의 상당 부분을 통제했다. 이러한 이유로 필립이 상속자로 지명되었다.[19] 1703년, 프랑스 대사는 루이 14세에게 네덜란드와 영국 상인들이 스페인 농민들로부터 양모를 구입하도록 허용할 것을 촉구했다.[20]
합스부르크 스페인은 카스티야와 아라곤의 동군연합이었고, 각각 다른 정치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21] 필립의 지지는 대부분 카스티야 엘리트에게서 나왔다.[22] 스페인 네덜란드는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이 통치했으며, 이탈리아와의 관계는 수십 년간의 방치와 과도한 과세로 약화되었다. 마드리드에서는 아라곤 지역 국가들의 특권(푸에로) 제거를 포함한 포괄적인 개혁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있었다. 카를 대공이 카탈루냐와 발렌시아를 포함한 아라곤 왕관 지역에서 강력한 지지를 받은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23]
1701년, 마요르카, 나폴리, 시칠리아, 사르데냐는 필립을 지지했지만, 반카스티야 및 반프랑스 정서로 인해 다른 지역들은 대공 찰스를 지지했으며, 가장 중요한 곳은 카탈루냐였다. 1702년 10월 비고 만 해전에서 동맹군의 승리는 포르투갈의 페드로 2세가 편을 바꾸도록 설득하여 작전 기지를 제공했다.[26]
1705년 제노바 조약으로 북동부에 제2 전선이 열렸다. 바르셀로나와 발렌시아의 함락으로 툴롱이 서지중해에서 부르봉 왕가가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주요 항구로 남았다. 필립은 1706년 5월 바르셀로나 탈환을 시도했지만 격퇴되었고, 그의 부재로 포르투갈에서 온 동맹군이 마드리드와 사라고사에 진입할 수 있었다.[28]
그러나 대중의 지지 부족과 물류 문제로 인해 동맹군은 해안선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을 유지할 수 없었고, 11월까지 필립은 카스티야, 무르시아, 그리고 발렌시아 일부를 장악했다. 동맹군의 노력은 1707년 4월 알만사 전투에서 패배로 끝났다.[29]
필립 5세는 스페인 국왕으로 확정되었고, 스페인은 독립과 제국 대부분을 유지했지만, 스페인 네덜란드, 이탈리아령 대부분, 지브롤터와 미노르카 섬을 할양했다. 나폴리 왕국과 시칠리아 왕국은 1735년에, 미노르카 섬은 1782년에 되찾았지만, 지브롤터는 영국이 계속 점령했다. 1707년의 누에바 플란타 법령은 마드리드에 권력을 집중시켰고, 아라곤 왕관을 포함한 지역 정치 구조를 폐지했지만, 카탈루냐와 마요르카는 1767년까지 이 체제 밖에 남아 있었다.[35] 스페인 경제는 빠르게 회복되었고, 부르봉 왕가는 이후로 스페인 왕위를 계속 유지하고 있다.[36]
6. 2. 프랑스
위트레흐트 평화 조약으로 17세기에 주도적이었던 프랑스의 헤게모니를 억제하려는 전쟁은 당분간 사라지게 되었다.[1] 부르봉 왕가의 프랑스와 스페인은 계속 동맹 관계를 유지했지만, 이탈리아와 저지대 영토를 상실하여 약화된 스페인은 유럽 정치에서 2류 국가로 전락했다.[1]루이 14세 치하 프랑스는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였으며, 수입 창출 능력이 경쟁국들을 훨씬 능가했다.[2] 지리적 위치는 엄청난 전술적 유연성을 제공했고, 해군을 보유하고 있었다.[2] 1708년부터 1710년까지의 전투에서 증명되었듯이, 심한 압박에도 불구하고 국경을 방어할 수 있었다.[2] 9년 전쟁은 프랑스가 지원 없이는 목표를 달성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스페인과 바이에른과의 새로운 동맹은 성공적인 결과를 더욱 가능하게 했다.[2] 그러나 이전 전쟁들은 프랑스에 심각한 경제적 문제를 남겼다.[2]
루이 14세는 1715년 9월 1일에 사망했고, 그의 5살 난 증손자 루이 15세가 계승했다.[3] 임종 직전 그는 "나는 전쟁을 너무 사랑했다"고 말했다고 전해진다.[3] 최종 합의는 1709년 연합군의 조건보다 훨씬 유리했지만, 루이 14세가 1701년 2월 외교를 통해 이미 달성하지 못한 것을 얻었다고 보기는 어렵다.[3] 1666년부터 프랑스의 정책은 라이벌들에 대한 군사적, 경제적 우위를 전제로 했지만, 영국이 군사 및 경제 양면에서 프랑스를 앞지른 1714년에는 더 이상 그렇지 않았다.[3] 위트레흐트 조약 이후 영국의 무역이 확장되면서 이러한 격차가 계속 벌어지자 루이 14세의 후계자들은 이를 유럽의 세력균형에 대한 영구적인 위협으로 간주했다.[4] 이를 줄이려는 것이 프랑스가 1740년에서 1748년까지의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 참전한 주요 요인이었다.[4]
6. 3. 오스트리아와 신성 로마 제국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서 오스트리아는 가장 강력한 세력이었지만, 그들의 이익이 항상 제국의 이익과 일치하지는 않았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카를 대공을 스페인 왕위에 앉히려 했지만, 동맹국들은 부르봉 가문이나 합스부르크 가문이 스페인을 지배하는 것을 막으려 했다. 이러한 갈등과 1703년 오스트리아의 재정 붕괴로 인해 스페인에서의 군사 작전은 영국-네덜란드 해군의 지원과 영국의 자금 지원에 의존하게 되었다.[1] 요제프 1세 통치 기간 동안 합스부르크 가문의 주요 목표는 북부 이탈리아에서 프랑스의 개입으로부터 남쪽 국경을 보호하고, 헝가리에서 일어난 라코치의 독립 전쟁을 진압하는 것이었다.[1]
많은 스페인 귀족들은 오스트리아인들의 오만함을 싫어했고, 이는 1700년 필립을 왕위 계승 후보로 선택하는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 카를은 영국의 지원을 받는 대가로 제국 내에서 중요한 상업적 양보를 하고, 지브롤터와 메노르카에 대한 영국의 통치를 인정해야 했다. 이로 인해 그는 스페인 사회 모든 계층에서 인기가 없었고, 영국-네덜란드 해군이 보급할 수 있는 해안 지역 밖에서는 세력을 유지할 수 없었다.[2]
비텔스바흐 가문이 통치하는 바이에른, 리에주, 쾰른은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지만, 제국의 대다수는 중립을 지키거나 용병 공급에만 참여했다. 바이에른과 같이 더 큰 세력들은 독자적인 정책을 추구했다. 폴란드 왕위에 대한 작센의 아우구스트의 주장은 그가 대북방 전쟁에 집중하게 만들었고, 프리드리히 1세는 프로이센을 왕국으로 인정하고 대동맹의 동등한 회원으로 만들어 주는 것을 조건으로 지원했다. 하노버 선제후 조지는 영국 왕위 계승자였기 때문에 그의 지원은 더욱 확실했지만, 하노버의 이익이 우선시된다는 의심이 남아 있었다.[3]
스페인에서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는 이탈리아와 헝가리에서 지위를 확보하고 스페인 네덜란드의 대부분을 획득했다.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에서 증가한 수입은 오스트리아 군대의 확장을 지원했다.[4] 합스부르크 가문은 또한 밀라노 공국과 만토바 공국, 나폴리 왕국과 사르데냐 왕국(1720년 시칠리아와 교환)을 획득하여, 나폴레옹에 의해 중단될 때까지 1859년까지 이탈리아를 지배했다. 1716년-1718년 오스트리아-튀르크 전쟁에서의 승리로 합스부르크 가문의 초점은 독일에서 남유럽으로 이동했다.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서 오스트리아의 지배적 지위는 바이에른, 하노버, 프로이센, 작센에 의해 도전받았고, 이들은 점점 독립적인 세력으로 행동했다. 1742년, 바이에른의 카를 알브레히트는 300년 만에 처음으로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이 아닌 황제가 되었다.[5]
6. 4. 영국
영국은 위트레흐트 조약을 통해 가장 큰 이득을 본 국가로 평가받는다. 이 조약으로 영국은 경쟁국들보다 해상에서 우위를 확보하고, 지브롤터와 미노르카 같은 지중해의 전략적 항구를 얻었으며, 스페인 아메리카 지역과 무역할 권리를 획득했다.[46] 특히 30년간 스페인령 아메리카에서 노예 무역을 독점하는 아시엔토를 획득하여 경제적으로 큰 이익을 얻었지만, 윤리적인 면에서는 비판받을 수 있다.전쟁 이전에 잉글랜드는 1701년 왕위 계승법을 제정해 스튜어트 왕조가 끊길 경우, 독일의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에서 새 국왕을 맞이하기로 결정했다. 전쟁 후, 프랑스는 1716년 영불 조약을 통해 스튜어트 왕조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기로 합의했다.[46]
전쟁으로 모든 참전국이 막대한 빚을 졌지만, 영국만이 효율적으로 재정을 조달해 경쟁국들보다 상대적 우위를 점했다.[46] 이는 영국이 유럽의 주요 상업 강국으로 떠오르는 계기가 되었다.
영국의 대외 정책은 16세기부터 20세기까지 세 가지 원칙을 따랐다. 첫째는 유럽의 세력 균형을 유지하는 것, 둘째는 네덜란드가 적대 세력의 통제를 받지 않도록 하는 것, 셋째는 무역을 보호하고 해군력을 유지하여 해상을 통제하는 것이었다. 당시 토리당은 해군을 이용한 중상주의 전략을, 휘그당은 대륙 전략을 주장하며 의견이 달랐지만, 결과적으로 영국의 재정적 힘은 프랑스에 맞서는 동맹국 중 유일하게 모든 전선에서 작전할 수 있게 했다.
6. 5. 네덜란드 공화국
네덜란드는 1672년 '재앙의 해(Rampjaar)' 이후 프랑스를 견제하는 싸움에 휘말렸다. 당시 네덜란드 공화국은 프랑스군에 의해 거의 함락될 뻔했다. 네덜란드는 세력 균형에 대한 우려 외에도 오랫동안 프랑스에 대한 전략적 완충지대로 여겨온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운명에 대해 우려했다. 프랑스와 동맹을 맺은 기간에도 이러한 인식은 지속되었는데, 네덜란드 공화국 내에서 "Gallicus amicus non vicinus"(프랑스는 좋은 친구이지만 좋은 이웃은 아니다)라는 모토가 인기를 얻은 것이 이를 증명한다.[1] 합스부르크 왕위 계승 전쟁(1667~1668)과 네덜란드-프랑스 전쟁(1672~1678)은 스페인이 남부 네덜란드를 방어할 수 없음을 보여주었고, 1697년 라이슈비크 조약은 네덜란드가 8개 주요 도시에 주둔군을 배치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네덜란드는 이러한 장벽이 암스테르담 주변의 상업 및 인구 중심지를 남쪽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는 데 필요한 전략적 심도를 제공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1701년 스페인령 네덜란드 총독인 막시밀리안 바이에른 선제후의 도움으로 네덜란드 주둔군은 프랑스군으로 교체되었다. 네덜란드의 우선 순위는 장벽 요새를 재건하고 강화하며, 경제적으로 중요한 스헬트 강 하구에 대한 통제권을 유지하고, 스페인 제국 무역에 대한 접근권을 확보하는 것이었다.[2]영국의 존 처칠 몰버러 공작이 네덜란드에서 연합군 사령관이었지만, 네덜란드는 대부분의 병력과 보급품을 제공했다. 따라서 이 지역의 전략은 네덜란드의 현장 대표와 장군들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3] 네덜란드군이 스페인령 네덜란드 외부에서 작전을 수행한 경우는 종종 영국 동맹국에 대한 양보였다.[4][5]
네덜란드는 남부 네덜란드에서 성공적으로 자국의 위치를 회복했고, 네덜란드 군대는 1792년에 새로운 국면이 시작될 때까지 유럽에서 프랑스의 영토 확장을 저지한 동맹의 중심이었다.[6] 그러나 전쟁으로 인해 네덜란드는 사실상 파산했고, 네덜란드 상선에 영구적인 피해를 입혔다. 네덜란드는 극동에서 여전히 주요 경제 대국으로 남아 있었지만, 영국이 최고의 세계 무역 및 해양 강국으로 자리 잡았다.[7] 네덜란드 해군성의 고갈은 또한 알제의 해적들이 수많은 네덜란드 상선을 노획할 수 있게 했고, 네덜란드는 장기간의 분쟁 후에야 이를 막을 수 있었다. 방벽 조약 요새는 1713년 이후 수십 년 동안 네덜란드의 외교 정책의 중심 동력이 되었으며,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중에 시험대에 올랐다.[8]
6. 6. 기타 국가

전쟁과 무역의 밀접한 관계는 유럽을 넘어 특히 북아메리카(여기서는 앤 여왕 전쟁으로 알려짐)와 사탕수수를 생산했던 서인도 제도로 전쟁이 확대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시 사탕수수는 엄청난 이윤을 가져다주는 상품이었다. 또한 남아메리카, 인도, 아시아에서도 소규모 무역 분쟁이 발생했다. 전쟁으로 인한 재정적 압박은 특히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 이는 부족한 해군 자원의 엄청난 소모였기 때문이다.[1]
관련 분쟁으로는 프랑스의 자금 지원을 받고 전쟁 내내 합스부르크가에게 심각한 우려를 안겨준 헝가리(1526-1867)에서 일어난 라코치의 독립 전쟁이 있다. 프랑스 남동부에서는 영국이 1704-1710년 위그노 카미자르 봉기를 지원했다. 1707년 이탈리아 북부와 프랑스 남부에서의 군사 작전의 목표 중 하나는 1620년대부터 시작된 일련의 반란 중 하나인 이 봉기를 지원하는 것이었다.
더 넓은 의미에서, 프로이센과 사보이의 부상이 포함되며, 많은 참가국들이 1700년부터 1721년까지 이어진 대북방전쟁에 참전했고, 그 결과 러시아가 처음으로 주요 유럽 강국으로 부상했다. 마지막으로, 식민지 분쟁은 비교적 미미했고 북미 지역에 국한되었지만, 소위 여왕 앤 전쟁은 미래 전쟁의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한편, 전쟁 종식으로 인한 해상 실업은 많은 선원들이 전쟁 당사국 해군에서 일자리를 잃고 생존을 위해 해적질에 나서면서 황금시대의 해적의 세 번째 단계를 불러왔다.[1]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시작되기 전, 잉글랜드에서는 1701년에 왕위 계승법이 제정되었다. 이에 따라, 공동 군주 연합에 저항했던 스페인과는 대조적으로, 스튜어트 왕조가 단절된 후에는 독일(신성 로마 제국)의 영방이자 선제후 중 한 명인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에서 새로운 국왕을 맞이하기로 결정했다.
마찬가지로 선제후인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겸 프로이센 공 프리드리히 3세도 전쟁 지원 약속과 맞바꿔 레오폴트 1세로부터 왕호를 허락받아 "프로이센의 왕" 프리드리히 1세로 즉위했고, 프로이센 왕국이 성립했다.
하노버와 프로이센은 전쟁 후 열강의 일원이 되어 유럽의 세력을 바꾸게 된다.[46]
7. 계보
스페인의 카를로스 2세는 어릴 적부터 몸이 약했기 때문에 후계자를 낳지 못할 것이 확실했다. 스페인 왕위 계승 문제는 스페인뿐 아니라 이탈리아, 저지대 국가, 아메리카의 주도권과 관련된 중요한 문제였다. 스페인 왕위를 주장한 왕조는 프랑스의 부르봉 왕가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였다.
가장 유력한 후계자는 루이 14세와 카를로스 2세의 이복 누나인 마리아 테레사 사이에서 태어난 프랑스의 왕세자 루이(1661~1711)였다. 루이 14세의 어머니 오스트리아의 앤(1601~1666)은 카를로스 2세의 아버지인 펠리페 4세와 남매지간이므로, 루이 14세는 마리아 테레사와 카를로스 2세와 사촌이었다. 그러나 프랑스 왕세자가 스페인 왕위까지 계승하면 유럽의 힘의 균형을 위협할 수 있었다.
다른 후보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레오폴트 1세(재위 1658~1705)였다. 그는 카를로스 2세와 사촌[53]이었고, 펠리페 4세는 오스트리아의 계승권을 지지했었다. 그러나 레오폴트의 계승은 16세기 스페인-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의 재결합을 의미할 수 있었다.
새로운 경쟁자는 1692년에 태어난 바이에른의 선제후 요제프 페르디난트(1692~1699)였다. 그는 비텔스바흐 왕가 소속으로, 레오폴트 1세의 외손자였다. 그의 어머니 마리아 안토니아(1669~1692)는 레오폴트 1세와 마르가리타 테레사(1651~1673)[54] 사이에서 태어났다. 요제프 페르디난트는 부르봉 왕가도 합스부르크 왕가도 아니었기 때문에 스페인이 프랑스나 오스트리아와 합병될 가능성이 낮아 영국과 네덜란드가 선호하는 계승자였다.
그러나 1699년 요제프 페르디난트가 천연두로 사망하자, 스페인 왕위 계승 문제는 다시 불거졌다. 영국과 프랑스는 제2차 분할 조약을 체결하여 스페인 왕위를 카를 대공에게 넘기고, 이탈리아 영토는 프랑스가 차지하도록 했다. 오스트리아는 이에 불만을 품었고, 스페인은 분할에 반대했지만, 왕위를 부르봉 가문이 계승할지 합스부르크 가문이 계승할지에 대해서는 분열되었다. 1700년 10월 카를로스 2세는 프랑스 왕세자의 둘째 아들 앙주 공작에게 영토를 물려주기로 결정했다.
범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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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합스부르크가 인물 |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 인물 |
부르봉 왕가(오를레앙 왕가 포함) 인물 |
비텔스바흐가(바이에른 계열) 인물 |
8. 관련 작품
- 조지프 미란다의 "말버러"(Marlborough), 스트래티지 & 택틱스(Strategy & Tactics) 238호, 디시전 게임즈(Decision Games), 2006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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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lden Age of Piracy – Post Spanish Succession Peri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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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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