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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카이 도시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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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무카이 도시아키는 일본 제국의 군인으로, 1930년대 후반 중일 전쟁에 참전했다. 그는 보병 소위로 임명된 후, 난징으로 진격하는 부대에 배속되었다. 전쟁 중, 무카이는 노다 쓰요시 소위와 함께 '백인 참수 경쟁'을 벌였다는 보도로 인해 논란의 중심에 섰다. 이 사건은 일본 언론에 의해 대대적으로 보도되었으나, 그 진실성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이 존재한다. 무카이는 전후 극동군사재판에서 심문을 받고 석방되었으나, 1947년 체포되어 난징 군사법정에서 사형 판결을 받았다. 그는 주민 포로 학살 혐의로 기소되었으며, 1948년 총살형으로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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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카이 도시아키
기본 정보
씨명향이 민명 (向井 敏明)
출생일1912년 6월 3일
사망일1948년 1월 28일
미군에 의해 촬영된 머그샷 (1947년 9월)
미군에 의해 촬영된 머그샷 (1947년 9월)
출생지일본, 야마구치현
사망지중화민국, 난징, 위화타이구
소속일본 육군
최종 계급육군 소좌

2. 약력


  • 1933년 12월 1일: 보병 예비 소위로 임명되었다.
  • 1936년 3월 31일: 보병 소위로 임명(특별 지원 장교)되었고, 같은 해 9월 1일 보병 제9연대에 배속되었다.
  • 1937년
  • * 11월 13일: 소속된 제16사단이 양자강 하류에 상륙했고, 제16사단 보병 제9연대 제3대대 제3보병포 소대 소대장이었다. 소속 부대는 난징으로 패주하는 중국군을 추격했다.
  • * 11월 29일: 창저우의 우시 교외에서 도쿄일일신문의 아사우미 기자 및 사토 카메라맨과 만나, 노다 쓰요시 소위와 백인 참수 경쟁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 * 11월 30일: 도쿄일일신문과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에서 노다 쓰요시 소위와 벌인 백인 참수 경쟁이 처음 보도되었다.
  • * 12월 4일, 6일, 13일: 백인 참수 경쟁 보도가 이어졌다.
  • * 12월 11일: 아사우미 기자 및 스즈키 기자와 만나 백인 참수 경쟁 경과에 대해 이야기했다고 한다.
  • 1939년 5월 19일: 도쿄일일신문은 무카이가 전사한 노다 소위와의 약속인 오백인 참수 약속을 실행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당시 노다 소위는 일본 국내에 있었다.)
  • 1946년 7월 1일: 극동군사재판 검사 측의 출두 요청으로 미국 파킨슨 검사에게 심문을 받았다. 무카이는 백인 참수 경쟁 보도가 창작임을 설명하고 석방되어 일당과 여비를 받고 귀가했다.
  • 1947년
  • * 9월 2일: GHQ에 체포되어 난징으로 이송되었다.
  • * 12월 4일: 주민 포로 학살 혐의(백인 참수 경쟁)로 기소되었다.
  • * 12월 18일: 난징 군사법정 첫 공판에서 당일 사형 판결을 받았다. 도쿄일일신문 기사 및 사진, 할롤드 J. 팀펄리가 해당 기사를 살인 경쟁으로 소개한 영문 서적 등이 증거로 채택되었으나, 증인 심문은 없었다. 무카이와 노다는 무죄 증명 서류 도착을 위한 공판 연기 및 문제 기사를 쓴 기자와 당시 직속 상관의 증인 소환을 요구했으나 기각되었다. 사형 판결 후에도 기자와 당시 상사의 증명서로 재심을 요구했으나 인정되지 않았다.
  • 1948년 1월 28일: 난징 위화타이에서 총살형이 집행되었다.[1]

2. 1. 초기 군 복무

1933년 12월 1일 보병 예비 소위로 임명되었다. 1936년 3월 31일 보병 소위로 임명(특별 지원 장교)되었고, 같은 해 9월 1일 보병 제9연대에 배속되었다.[1]

1937년 11월 13일, 무카이가 소속된 제16사단은 양자강 하류에 상륙했다. 당시 무카이는 제16사단 보병 제9연대 제3대대 제3보병포 소대 소대장이었다. 그의 소속 부대는 난징으로 패주하는 중국군을 추격했다.[1]

2. 2. 중일 전쟁 참전

1937년 11월 13일, 무카이가 소속된 제16사단은 양쯔강 하류에 상륙했다. 무카이는 제16사단 보병 제9연대 제3대대 제3보병포 소대 소대장이었다. 소속 부대는 난징으로 패주하는 중국군을 추격했다.[1]

11월 29일, 창저우의 우시 교외에서 도쿄일일신문의 아사우미 기자 및 사토 카메라맨과 만나, 무카이 소위가 노다 쓰요시 소위와 백인 참수 경쟁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고 전해진다.[1] 11월 30일, 도쿄일일신문과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은 노다 쓰요시 소위와 벌인 백인 참수 경쟁을 처음 보도했다.[1] 이후 12월 4일, 6일, 13일에 걸쳐 백인 참수 경쟁 보도가 이어졌다.[1] 12월 11일에는 아사우미 기자 및 스즈키 기자와 만나 백인 참수 경쟁의 경과에 대해 이야기했다고 한다.[1]

1939년 5월 19일, 도쿄일일신문은 무카이가 전사한 노다 소위와의 약속인 오백인 참수 약속을 실행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이 시기 실제로는 노다 소위는 일본 국내에 있었다.[1]

2. 3. 전후 체포 및 재판

1946년 7월 1일, 극동군사재판 검사 측의 출두 요청으로 미국 파킨슨 검사에게 심문을 받았다. 무카이는 백인 참수 경쟁 보도가 창작임을 설명하고 석방되어 일당과 여비를 받고 귀가했다. 1947년 9월 2일, GHQ에 체포되어 난징으로 이송되었다. 12월 4일, 주민 포로 학살 혐의(백인 참수 경쟁)로 기소되었다. 12월 18일, 난징 군사법정 첫 공판에서 당일 사형 판결을 받았다. 도쿄일일신문 기사 및 사진, 할롤드 J. 팀펄리가 해당 기사를 살인 경쟁으로 소개한 영문 서적 등이 증거로 채택되었으나, 증인 심문은 없었다. 무카이와 노다는 무죄 증명 서류 도착을 위한 공판 연기 및 문제 기사를 쓴 기자와 당시 직속 상관의 증인 소환을 요구했으나 기각되었다. 사형 판결 후에도 기자와 당시 상사의 증명서로 재심을 요구했으나 인정되지 않았다. 1948년 1월 28일, 난징 위화타이에서 총살형이 집행되었다.

3. '백인 참수 경쟁' 보도 내용

1937년 11월 30일자 도쿄일일신문은 일본군 소위 무카이 도시아키와 노다 쓰요시가 중일전쟁 기간 중 누가 먼저 100명의 중국인로 베는가 경쟁을 했다는 "'백인 참수 경쟁'"을 보도했다.[1]

두 소위의 '백인 참수 경쟁'은 도쿄일일신문에 총 4회에 걸쳐 보도되었다. 첫 보도에서 무카이 소위는 56명, 노다 소위는 25명을 참수했다고 보도되었다.[1] 12월 4일자 신문에서는 무카이 소위가 86명, 노다 소위가 65명을 참수했다고 보도했다.[2] 12월 6일자 신문에서는 무카이 소위가 89명, 노다 소위가 78명을 참수했다고 보도했다.[3] 12월 13일자 신문에서는 무카이 소위가 106명, 노다 소위가 105명을 참수했으며, 두 소위가 경쟁을 150명으로 연장하기로 합의했다고 보도했다.

이 보도는 일본에서 큰 화제가 되었으며, 두 소위는 전쟁 영웅으로 칭송받았다. 그러나 이 보도는 일본군의 잔혹 행위를 보여주는 사례로 비판받기도 한다.

날짜신문무카이 소위노다 소위
1937년 11월 30일도쿄일일신문 (제1보)56명25명
1937년 12월 4일도쿄일일신문 (제2보)86명65명
1937년 12월 6일도쿄일일신문 (제3보)89명78명
1937년 12월 13일도쿄일일신문 (제4보)106명105명


4. 유서

辞世|사세일본어[3]

나는 천지신명께 맹세코 포로와 주민을 살해한 일은 전혀 없다. 난징 대학살 사건 등의 죄는 절대로 받지 않겠다. 죽음은 천명이라 생각하며 일본 남자로서 훌륭하게 중국의 흙이 되겠다. 그러나 혼은 대팔주(大八州, 일본)로 돌아가리라.

나의 죽음으로써 중국 항전 8년의 쓴 잔의 유한(遺恨)이 흘러가고, 중일 친선, 동양 평화의 원인이 된다면 버려지는 돌이 되어 다행이다.

중국의 분투를 기원한다.

일본의 감투(敢鬪)를 기원한다.

중국 만세.

일본 만세.

천황 폐하 만세.

죽어서는 호국의 귀신이 되리라.

12월 31일 10시에 쓰다. 무카이 토시아키

5. 역사적 평가 및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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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1] 뉴스 東京日日新聞과 大阪毎日新聞에서 보도 毎日新聞
[2] 뉴스 아사미 기자와 스즈키 지로 기자 및 사토 후리히사 카메라맨은 2 소위의 백인 베기 행위를 보지 못함
[3] 서적 世紀の遺書 講談社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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