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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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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도는 에미시의 곡선 칼에서 유래한 일본의 전통적인 칼로, 칼의 형태, 제작 연도, 장비 방법에 따라 분류된다. 일본도는 무기, 예술 작품, 그리고 일본의 종교, 명예, 신화와 관련된 문화적, 사회적 의미를 지니며, 칼날, 장식, 제작 방식 등을 통해 평가된다. 일본도는 시대에 따라 무사들의 주무기, 예술 작품, 군도 등으로 사용되었으며, 현재는 다양한 문화적, 사회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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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도
일본도 정보
카타나와 코시라에
카타나와 코시라에
명칭
일본어일본도 (日本刀, 니혼토)
로마자 표기nihontō
다른 명칭카타나 (刀)
개요
유형전통적으로 만들어진 일본의 칼
특징날짜=2008-7-29
추가 정보
참고 문헌The Connoisseur's Book of Japanese Swords

2. 일본 사회에서의 칼

일본 사회의 역사에서 일본도 제작 기술은 여러 사건의 영향을 받았으며, 일본도 역시 일본 문화와 사회 발전에 영향을 주었다.

미술관(Museum of Fine Arts)에 따르면, 장인이 새로 제작한 칼을 차가운 물에 담글 때 그의 정신, 도덕성, 마음가짐의 일부가 칼에 전달되어 칼의 특징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99]

조몬 시대(기원전 10,000~1000년)의 칼은 철로 만든 칼날과 비슷했으며, 사냥, 낚시, 농사에 사용되었다. 조몬 시대에 칼이 단순한 도구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는 견해가 있지만, 이를 뒷받침할 만한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야요이 시대(기원전 1000년~서기 300년)에는 일본에 마을이 생기고 벼농사가 시작되었다. 벼농사는 중국한국의 영향으로 시작되었으며, 이들은 일본 열도에 칼을 처음으로 전파한 집단이었다. 그 후 청동검은 종교 의식에 사용되었다. 야요이 시대에 칼은 주로 종교적, 의례적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고훈 시대(250~538년)에는 일본 사회에 아니미즘이 도입되었다. 아니미즘은 모든 생명체에 신성한 영혼이 담겨 있거나 연결되어 있다는 믿음이다. 이 시기에 중국은 한국 반도의 강철 검을 갈망했고, 일본은 이를 국가 안보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여 군사 기술 개발의 필요성을 느꼈다. 그 결과, 씨족 지도자들이 군사 엘리트로 권력을 장악하고, 권력과 영토를 놓고 서로 싸웠다. 지배적인 인물들이 권력을 잡으면서 충성심과 봉사가 일본 생활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고, 이는 일본인과 관련된 명예 문화의 촉매제가 되었다.

에도 시대(1603~1868년)에 칼은 무사의 무장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일상생활에서 중요성을 얻었다. 에도 시대에 칼은 다이묘(大名)와 사무라이(侍) 사이의 유대를 맺는 수단이었다. 다이묘는 사무라이에게 공로에 대한 표시로 칼을 선물했고, 사무라이는 존경의 표시로 다이묘에게 칼을 선물했으며, 대부분의 다이묘는 이 칼을 가보로 간직했다. 이 시대에 칼은 군사적 업적의 증거를 나타내는 정신적 의미와 귀중한 전쟁 무기이자 외교 선물이라는 실제적 의미를 동시에 지닌 다기능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에도 시대의 평화로 인해 칼에 대한 수요가 감소했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1719년 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徳川吉宗)는 "가장 유명한 칼" 목록을 작성했다. 마사무네, 아와타구치 요시미츠, 고 요시히로는 "3대 명장(三名工)"으로 불리게 되었고, 그들의 칼은 다이묘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이러한 지위 상징에 대한 명성과 수요가 높아짐에 따라 명품 칼의 가격이 급등했다.

소슈덴(蘇州伝)의 3대 명장. 고 요시히로(上), 마사무네(中), 아와타구치 요시미츠(下)


후기 에도 시대에 스이신시 마사히데(水心子正秀)는 칼이 덜 화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칼은 단순화되고 변형되어 내구성이 강하고 튼튼하며 잘 베도록 만들어졌다. 1543년 총(무기)이 일본에 전래되어 군사 역학과 칼, 그리고 사무라이의 실용성을 바꾸었다. 이 시대에는 무술이 정령 세계와 연결되는 수단으로 도입되어 일반인도 사무라이 문화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메이지 시대(1868~1912년)에는 외세가 일본에 국제 무역을 개방할 것을 요구함에 따라 사무라이 계급이 해체되었다. 300년 동안 이어진 일본의 쇄국이 끝을 맺은 것이다. 1869년과 1873년에 정부에 칼 착용 관습을 폐지해야 한다는 두 건의 청원이 제출되었는데, 사람들은 외국이 칼을 "유혈 사건을 위한 도구"로 보고 일본인을 폭력적인 사람들로 연상할까 우려했기 때문이다.[100] 폐도령(廃刀令, 1876년)은 군인과 정부 관리를 제외하고는 공개적으로 칼을 차는 것을 금지했으며, 칼은 사회에서 그 의미를 잃었다. 메이지 천황은 미국의 기술과 과학 발전의 영향을 받아 일본을 서구화하려고 했지만, 일본도 제작 예술을 높이 평가했다. 메이지 시대는 서양식 화기를 사용하도록 훈련받은 징집병들이 사무라이를 능가하면서 사무라이 문화가 종말을 맞이했음을 보여준다. 일부 사무라이는 특권을 빼앗기면서 새로운 문화에 적응하기 어려워했지만, 다른 일부는 계층이 덜 뚜렷한 이러한 삶의 방식을 선호했다.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청일 전쟁(1894년)에서 일본군은 실용적인 목적이 아니라 상징적인 이유로 칼을 차고 전투에 참여했다.

메이지 시대에는 불교신토 신앙과 통합되었다. 전쟁이나 생활에서 더 이상 칼이 필요하지 않게 되었고, 무술을 연마하는 사람들이 "현대 사무라이"가 되었다. 이러한 급속한 발전 시대에는 충성스럽고 성실한 사람이 필요했기에 어린아이들은 천황을 섬기고 충성과 명예를 모든 것보다 우선시하도록 교육받았다. 일본도 제작은 금지되었고, 메이지 시대의 칼은 쓸모없는 것이 되어 단지 지위의 상징에 불과했다. 칼들은 녹슬거나 팔리거나 더 '실용적인' 일상 용품으로 녹여졌다.

제2차 세계 대전 이전과 전쟁 기간 동안, 군대의 현대화에도 불구하고 칼에 대한 수요는 여전히 칼을 만들 수 있는 칼 장인의 수를 초과했다. 그 결과 이 시대의 칼은 품질이 떨어진다. 1933년 쇼와 시대(1926~1989년)에 일본도 제작 예술을 통해 "일본의 정신"을 재건하기 위해 설계된 칼 제작 공장이 세워져 칼 장인과 칼 제작의 유산과 예술을 보존했다. 당시 정부는 무사 정신(충성심과 명예)이 일본에서 사라지고 칼의 완전성과 품질도 함께 사라지고 있다고 우려했다.

미국의 일본 점령 기간 중 일부는 일본도 제작, 칼 장인, 그리고 칼 사용이 금지되었다. 일본의 무사 문화를 보존하기 위한 수단으로 무술이 학교 교육 과정에 포함되었다. 1953년 미국은 일본도 제작이 일본의 역사와 유산을 보존하는 데 중요한 문화적 자산이라는 것을 깨닫고 마침내 칼에 대한 금지령을 해제했다.

일본도의 기원과 사회에 미친 영향, 그리고 그 효과는 어떤 이야기를 따르느냐에 따라 다르다.

  • 칼과 무사는 일본 문화의 신도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신도는 "신들의 길"을 의미하며, 세상의 모든 요소에는 신과 같은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한다.[101] 신도는 자기 정화, 조상 숭배, 자연 숭배 및 천황의 신성을 지지한다. 칼은 지혜의 원천이며 사용자에게 영감을 주는 "에너지를 발산한다"고 한다. 신도가 일본의 팽창주의와 국제 관계의 발전을 형성한 것처럼, 칼 또한 변화의 수단이 되었다.[102]
  • 일본 전설에 따르면, 거울과 보석과 함께 칼은 3종의 신기 중 하나를 이룬다. 3종의 신기는 모든 훌륭한 황제가 천상의 권위를 가진 지도자로서 가져야 할 세 가지 가치와 성격적 특징을 나타낸다.[103]
  • 일본 신화는 칼을 "진리의 상징"이자 "미덕의 표시"라고 말한다. 전설에 따르면 아마테라스와 그의 남동생 스사노오노미코토(스사노) 사이의 싸움에서 유래한다. 아마테라스는 스사노를 물리치기 위해 열 자 길이의 칼을 쪼개어 자신을 세 조각으로 나누었다. 전설에 따르면 칼은 사물을 두 개 이상으로 자르고 조각의 모양과 크기를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회 질서를 부과함으로써 통합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한다.
  • 신화에 따르면 짐무 천황이 군대를 이끌고 땅을 지나갈 때, 신이 독가스로 그들의 길을 막아 무기한 수면 상태에 빠지게 했다. 이를 본 아마테라스는 천둥의 신에게 그 신을 벌하고 황제가 진행할 수 있도록 간청했다. 천둥의 신은 그녀의 명령을 따르는 대신, 황제에게 땅을 진압할 칼을 보냈다. 황제는 칼을 받자 군대와 함께 깨어나 임무를 계속했다. 이 전설에 따르면 칼은 필요할 때 황실(신성한) 혈통을 구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 무술 훈련에서 칼 안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가 있다고 믿어진다: "칼날은 지도자와 신들의 지혜가 평민과 교차하는 지점을 나타낸다. 칼은 사회가 관리되는 도구를 나타낸다. 도구로서의 칼의 효과와 그것을 둘러싼 사회적 신념은 모두 칼을 무사 상징의 정점으로 끌어올린다."
  • 칼은 일본의 명예와 백병전에 대한 존중을 상징한다. 다른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것은 명예롭게 해야 하며, 원거리 전투(화기)는 다른 사람의 생명을 끝내는 비겁한 방법이라는 생각을 나타낸다. 이것은 또한 일본의 자기 희생 신념과 연결되는데, 무사는 자신의 국가(천황)를 위해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104]


칼, 일본 문화, 사회 발전 사이에는 풍부한 관계가 있다. 칼의 기원과 영혼 세계와의 관계에 대한 다양한 해석은 과거와 현재의 일본 사회에서 각자의 가치를 지닌다. 어떤 해석을 선택하고 현대 사무라이가 칼의 역사를 어떻게 해석하는지에 따라 그들이 선택하는 사무라이와 무사의 유형에 영향을 미친다.

2. 1. 사무라이와 칼

19세기에 대사에게 수여된 카타나의 손잡이.


일본도의 특징은 곡선인데, 이는 일본 동북 지방의 에미시(蝦夷)가 사용하던 케누키가타와라비테토(毛抜形蕨手刀)에서 기원한다. 칼과 관련된 다양한 문화가 발달했는데, 칼을 차는 법, 청소하는 법, 보관하는 법, 칼을 쥐는 법 등이 시대를 따라 변화했다. 사무라이는 남의 집에 들어갈 때 칼을 놓는 위치에 따라 의심과 적대감을 나타낼 수 있었으므로, 칼을 놓는 방식은 중요한 에티켓으로 여겨졌다.[108] 자신의 집에서는 가타나 진열대의 와키자시 윗자리에 가타나의 날이 위를 향하도록 올려놓고, 손잡이는 항상 보는 입장에서 왼쪽을 향하도록 놓았다. 칼을 세워 놓을 때는 손잡이를 밑으로, 칼집을 위로 향하게 했다.

에도 시대 이전에는 사무라이들이 칼을 주무기로 사용하지 않고 을 먼저 사용했다. "부러진 칼과 빈 화살통"이라는 속담은 그들이 모든 무기를 활용해 싸웠음을 보여준다.

센고쿠 시대를 거치면서 칼이 크게 발달했고, 에도 시대에는 검술이 정신 문화로 자리 잡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가타나가리(刀狩り)를 통해 사무라이만 칼을 소지하게 하고 농민의 칼을 몰수하여 병농분리를 시행했다.

칼은 특별한 선물로 사용되기도 했는데, 주로 쇼군이 총애를 표시하기 위해 선물했다.

닌자는 사무라이와 대등한 관계였기 때문에 일본도 소지가 가능했지만, 닌자 전용의 곧은 칼을 사용했다. 가마쿠라 시대에는 타치(太刀)가 기병의 주요 무기였고, 에도 시대에는 무사들이 갑옷을 입지 않고 도보로 이동하면서 근접전 무기의 필요성이 커져 다이쇼(大小)를 휴대하게 되었다.

타메시기리(試し斬り)는 검의 날카로움과 베는 기술을 시험하는 방법으로, 사형수의 시체를 사용하기도 했다.

켄주츠(剣術)는 일본도를 사용하는 무술이다. 일본도는 주로 베는 무기이지만 찌르기에도 효과적이었다. 양손으로 잡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한손 기술도 존재했다. 바토주츠(抜刀術)와 아이주츠(居合術)는 칼을 뽑아 공격하는 훈련을 위한 무술이다.

베는 기술 중 텐우치(天打ち)는 팔과 손목을 조직적으로 사용하여 검을 휘두르는 기술이다. 일본도는 썰기에 적합하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에, 텐우치 후 썰기 동작을 통해 큰 피해를 입힌다.

켄주츠 스타일은 추단노카마에(中段の構え), 조단노카마에(上段の構え), 게단노카마에(下段の構え), 핫소노카마에(八相の構え), 와키가마에(脇構え)의 5가지 기본 자세를 공유한다.

일본도의 날은 매우 단단하여 다른 검날과 부딪히면 깨질 위험이 있어, 날끼리 부딪히는 것을 피하고 회피하거나 검의 평평한 부분으로 방어하는 스타일이 많았다. 우산 방어는 내려치는 공격을 막는 효과적인 방법이었다.[108]

「일본도(日本刀)」라는 명칭은 일본 국외의 도검과 구별하기 위한 것으로, 11세기 초 중국 문헌(歐陽脩의 「일본도 가」)에서 이미 확인된다.[138] 일본 내에서는 막말(幕末) 이후에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고, 이전에는 「刀(카타나)」, 「剣(츠루기/켄)」 등으로 불렸다.

일본도는 아시아에서 「왜도(倭刀)」로 불렸지만, 현지에서 일본도를 본떠 만든 것을 가리키기도 했다. 현대 한문권에서는 「화도(和刀)」라고 표기하기도 한다.

구미에서는 「Japanese sword」, 「katana」, 「Samurai sword」 등으로 불린다.[139][140]

2. 2. 닌자와 칼

닌자사무라이와 상호 고용 상태 또는 대등한 상태였기 때문에 사무라이와 마찬가지로 일본도를 소지할 수 있었다.[138] 하지만 닌자들은 사무라이용 일본도처럼 날이 휘어진 일본도가 아니라 날이 일직선으로 곧게 뻗은 닌자 전용 일본도를 사용했다.

3. 일본도의 역사

일본도는 에도 시대부터 제2차 세계 대전까지 전투용으로 사용됐다가 20세기 이후부터 장식/취미용으로 사용됐다.

일본도는 시대에 따라 다음과 같이 구분된다.


  • 조코토(上古刀): ~ 서기 900년경
  • 고토(古刀): 서기 900년경 ~ 1596년
  • 신토(新刀): 1596년 ~ 1780년
  • 신신토(新々刀): 1781년 ~ 1876년
  • 겐다이토(現代刀): 1876년 ~ 현재[22]


18세기에는 "교호명물장(Kyoho Meibutsucho)"이라는 편찬물에 검 명작들이 등재되었다. 등재된 검들은 여러 지방의 고토(Koto) 검이며, 166자루 중 100자루가 현재까지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소슈(Sōshū) 검이 많이 등재되어 있다. "교호명품장"에는 요시미츠(Yoshimitsu), 마사무네(Masamune), 요시히로(Yoshihiro), 사다무네(Sadamune) 등의 검을 포함하여 명품(Meibutsu)의 별칭, 가격, 역사, 길이가 기록되어 있으며, 이들 검은 매우 높은 가격으로 평가되었다.[3]

다치(太刀)는 카타나(刀)보다 일반적으로 크며, 날이 아래쪽을 향하도록 착용했다. 이는 수세기 동안 검을 휴대하는 표준적인 형태였으며, 결국 칼날이 위쪽을 향하도록 벨트에 꽂아 차는 카타나 스타일로 대체되었다. 다치(太刀)는 왼쪽 엉덩이에 걸쳐 착용했다. 칼날의 자루(중심, 中茎)에 새겨진 서명은 착용할 때 항상 칼의 바깥쪽에 오도록 새겨져 있었다.

완전한 갑옷을 착용할 때 다치(太刀)는 코시가타나(腰刀)라고 알려진 형태의 더 짧은 칼과 함께 사용되었다. 코시가타나는 손가드가 없는 일종의 짧은 검이며, 손잡이와 칼집이 만나 아이쿠치(合口)라고 하는 장착 스타일을 형성한다.

헤이안 시대(平安時代)(794년~1185년)의 11세기까지 일본도는 이미 아시아의 이웃 국가로 수출되었다. 예를 들어, 중국 송나라(宋)의 정치가인 오양수(歐陽修)의 시 "일본도의 노래(日本刀の歌)"에서 일본도는 "향기로운 나무로 만든 칼집에 생선 가죽으로 덮여 있고, 놋쇠와 구리로 장식되어 있으며, 악령을 쫓을 수 있는 귀중한 검이다. 막대한 비용을 들여 수입된다"라고 묘사되어 있다.[67][50]

가마쿠라 시대(鎌倉時代)의 13세기 몽골의 일본 원정(元寇)은 일본도의 발전을 더욱 촉진시켰다. 마사무네(正宗)를 중심으로 한 소슈(相州)파의 검 제작자들은 전투에서 부러지거나 휘어진 다치(太刀)를 연구하고 새로운 생산 방법을 개발하여 혁신적인 일본도를 만들었다. 그들은 칼날의 가열 및 냉각 온도와 시간을 최적화하기 위해 연강과 경강을 조합하여 칼날을 단조하여 더 가볍지만 더 견고한 칼날을 만들었다. 또한 칼날의 곡선을 부드럽게 하고, 끝을 직선으로 길게 하고, 칼날의 날 부분에서 반대쪽으로 너비를 넓히고, 단면을 얇게 하여 칼날의 관통력과 절단력을 향상시켰다.[53][54][55]

역사적으로 일본에서는 가마쿠라 시대의 고토(古刀)가 일본도의 이상적인 칼날로 여겨져 왔으며, 에도 시대(江戸時代)(1603년~1868년)부터 현재까지 신도(新刀) 시대의 검 제작자들은 가마쿠라 시대에 만들어진 일본도의 칼날을 재현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일본 국보(国宝)로 지정된 일본도는 100개가 넘으며, 그 중 가마쿠라 시대의 고토(古刀)가 80%, 다치(太刀)가 70%를 차지한다.[23][24]

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 후반의 오닌의 난(応仁の乱)은 아시가루(足軽)라고 불리는 고용된 농민들이 대규모로 동원된 대규모 내전으로 확대되었다. 그들은 다치(太刀)보다 짧은 카타나(刀)를 사용하여 도보로 싸웠다. 센고쿠 시대(戦国時代)(1467년~1615년)에는 전쟁이 더욱 커졌고, 아시가루(足軽)는 그들에게 빌려준 야리(槍)(창)를 사용하여 밀집대형으로 싸웠다. 또한 16세기 후반에는 포르투갈에서 타네가시마(種子島)(조총)가 도입되어 일본 검 제작자들은 개량된 제품을 대량 생산했으며, 아시가루(足軽)는 임대된 총으로 싸웠다. 일본 전장에서는 활 외에 총과 창이 주요 무기가 되었다. 이러한 전쟁에서 전투 스타일의 변화로 인해 사무라이들 사이에서 다치(太刀)와 나기나타(薙刀)는 쇠퇴하고, 휴대가 간편한 카타나(刀)가 주류가 되었다.[66][62][63]

15세기부터 대규모 전쟁의 영향으로 저품질의 검이 대량 생산되었다. 이러한 대량 생산된 검을 카즈우치모노(数打ち物)라고 하며, 비젠(備前)파와 미노(美濃)파의 검 제작자들이 분업으로 생산했다.[66][32] 일본도의 수출은 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에 정점에 달했는데, 적어도 20만 자루의 검이 일본 무기 생산을 흡수하고 해당 지역의 왜구(倭寇)가 무장하는 것을 어렵게 하려는 시도로 명나라(明) 중국으로 공식 무역을 통해 수출되었다. 중국 명나라(明)에서는 일본도와 그 전술을 연구하여 해적을 격퇴했고, 일본도를 기반으로 하여 왜도(倭刀)와 표도(苗刀)가 개발되었다.[67][68][69]

아즈치모모야마 시대(安土桃山時代)인 1588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검 수색(刀狩)을 실시하여 농민이 무기를 소지하는 것을 금지했다.[58]

3. 1. 고대

"카타나(katana)"라는 단어는 고대 일본에서 사용되었으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반면 "니혼토(nihontō)"라는 단어의 옛 용법은 송나라 시인 오양수(歐陽修)의 시, 「니혼토가(Nihontō)」에서 찾아볼 수 있다.[2]

일본도 제작은 특정 시대로 구분된다. 죠코토(上古刀, 900년경까지), 코토(古刀, 900년경~1596년), 신토(新刀, 1596년~1780년), 신신토(新々刀, 1781년~1876년), 겐다이토(現代刀, 1876년~현재)로 나뉜다.[22]

8세기 나라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지는 초쿠토(直刀). 쇼소인(正倉院)에 보관되어 있다. 칼몸의 칼목은 1800년대 가노 나츠오(加納夏雄)가 만들었으며, 중요문화재도쿄 국립박물관(東京国立博物館)에 소장되어 있다.


초기 철검의 예로는 직선 형태의 츠루기(剣), 초쿠토(直刀) 등 독특한 형태의 검이 있으며, 일부 양식과 기술은 중국도(刀)에서 유래되었고, 일부는 무역을 통해 직접 수입되었다.[35][36] 이 시대의 검은 일본 고유의 양식과 한반도와 동중국해를 통해 일본으로 들어온 중국식 검이 혼합된 것이었다. 이러한 초기 검의 칼날 단면 형태는 이등변 삼각형의 히라즈쿠리(平造)였으며, 평면 칼날의 날 부분 가까이만 날카롭게 만든 키리하즈쿠리(切刃造) 검이 점차 등장했다.[37][38][39] 이 시대의 검은 조코토(上古刀)로 분류되며, 종종 일본도와 구분하여 언급된다.[22]

8세기 헤이안 시대(平安時代), 사쓰몬 문화(薩摩文化), 도쿄 국립박물관에 소장된 와라비테토(蕨手刀).


다치(太刀)의 직접적인 전신은 도호쿠 지방(東北地方)의 에미시(蝦夷, 아이누와 혼동하지 말 것)에 의해 와라비테토(蕨手刀)라고 불렸다. 『일본도명감(日本刀銘鑑)』에 따르면, 8세기 초부터 압도적으로 가장 많은 오슈(奥州)의 검 제작자 그룹은 모쿠사(舞草)파였으며, 가마쿠라 시대(鎌倉時代) 초까지 100명이 넘는 모쿠사파 검 제작자가 기록되어 있다. 오슈(奥州) 도호쿠 지방의 고고학적 발굴 조사에서는 나라 시대 초기에 해당하는 철광석 제련 유적이 발견되었다. 도호쿠 지방, 특히 8세기의 오슈(奥州) 지역 전체는 에미시가 지배하고 거주하고 있었다. 발굴된 와라비테토(蕨手刀)는 오슈와 홋카이도 지방의 매장 유물에서 높은 농도로 발견된다. 모쿠사 지방은 헤이안 시대(794년~1185년)의 전설적인 검 제작자로 유명했다. 그들은 6세기에서 8세기에 이르는 "와라비테토"로 알려진 일본도의 원래 제작자로 여겨진다. "와라비테토"는 8세기 후반 에미시(蝦夷)와 야마토 조정(大和朝廷) 정부 사이의 일련의 전투를 통해 명성을 얻었다. 소수의 에미시 병사들은 "와라비테토"를 사용하여 38년 전쟁(三十八年戦争, 770년~811년)에 걸쳐 수많은 야마토 조정 군대에 저항할 수 있었다.

『일본도명감』에는 예전부터 간치인(観智院)의 도코 메이칸(刀工銘鑑)에 42명의 유명한 검 제작자 목록이 있었다고 설명되어 있다. 이 목록에 있는 검 제작자 중 8명은 오슈 파 출신이었다. 모쿠사 출신 5명은 오니마루(鬼丸), 요야스(世安), 모리후사(森房), 하타후사(幡房), 간안(瓦安)이고, 타마츠쿠리 후주(諷誦) 출신 2명은 호우지(寶次), 가산(月山) 출신 1명은 가산(月山)이라는 서명을 남겼다. 『일본도명감』에 따르면, 오슈 검 제작자 그룹은 모쿠사(舞草), 가산(月山), 타마츠쿠리(玉造)로 구성되며, 후에 호주(寶壽)파가 되었다. 오슈 검은 이 시대의 여러 고서에 등장하는데, 예를 들어 『헤이지 이야기』(平治物語), 『곤자쿠 이야기』(今昔物語), 『고지단』(古事談), 『기케이키』(義経記, 미나모토노 요시쓰네(源義経)와 그의 추종자들의 전설에 초점을 맞춘 전쟁 이야기) 등이 있다. 오슈 검 제작자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상당히 이른 시기에 책에 등장한다. 이 책에 나오는 이야기는 수도에 있는 에미시토(蝦夷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으며, 이 검은 무사들에게 상당히 인기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포획된 무기가 명예의 훈장이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니혼키랴쿠』(日本紀略, 983년)에는 "재미있는 모양의 다치(太刀)를 차고 다니는 사람들의 수가 늘고 있다"라고 적혀 있다. "카우야고카우(高野御幸, 1124년)"에는 "시라카와 법황(白河法皇)이 고야산(高野山)을 방문했을 때, 후지와라노 미치스에(藤原左衛門通季)는 후슈(扶州) 검을 차고 있었다"라고 적혀 있다. 헤이안 후기에 에미시토가 교토에서 인기를 얻고 있었던 것 같다.[40][41]

이세 신궁(伊勢神宮), 헤이안 시대의 케누키가타 다치(毛抜形太刀). 중요문화재.


헤이안 시대(794년~1185년) 중반, 사무라이는 와라비테토를 개량하여 초기 일본도인 케누키가타 다치(毛抜形太刀)를 개발했다.[42][40] 보다 정확히 말하면, 에미시가 와라비테토를 개량하여 손잡이에 구멍이 있는 케누키가타 와라비테토(毛抜形蕨手刀)와 손잡이 끝에 장식이 없는 케누키가타토(毛抜形刀)를 개발했고, 사무라이가 이 검을 바탕으로 케누키가타 다치를 개발했다고 생각된다.[43] 10세기 전반에 개발된 케누키가타 다치는 일본도의 전형적인 특징인 신오기즈쿠리(鎬造)라고 불리는 길쭉한 오각형 또는 육각형의 칼날 단면 형태와 부드럽게 휘어진 단면 칼날을 가지고 있다. 케누키가타 다치에는 나무 손잡이가 부착되어 있지 않고, 칼날과 일체형인 자루(중심, 中茎)를 직접 잡고 사용한다. 케누키가타라는 용어는 자루의 중앙 부분이 고대 일본의 족집게(毛抜) 모양으로 파여 있는 데서 유래한다.[44]

카네히라(兼平)가 만든 다치(太刀), 오카네히라(大包平). 고비젠(古備前)파. 12세기, 헤이안 시대, 국보, 도쿄 국립박물관. 오카네히라(大包平)는 도지기리(童子切)와 함께 예술적으로 최고의 일본도 중 하나로 여겨지며, 일본도의 요코즈나(横綱, 스모 레슬러의 최고 계급)에 비견된다.


케누키가타 다치 이후에 개발된 다치에서는 메쿠기(柄釘)라고 하는 핀으로 자루(중심, 中茎)에 손잡이를 고정하는 구조가 채택되었다. 그 결과 일본도의 세 가지 기본적인 외관 요소, 즉 신오기즈쿠리(鎬造)의 단면 형태, 부드럽게 휘어진 단면 칼날, 그리고 자루(중심, 中茎)의 구조를 갖춘 검이 완성되었다.[2][46] 그 형태는 일본 전쟁의 변화하는 양상을 반영하는 것일 수 있다. 기병이 주된 전투 부대가 되었고, 이전의 직선형 초쿠토(直刀)는 특히 말을 타고 싸우는 데 적합하지 않았다. 휘어진 검은 기수가 휘두를 때 훨씬 효율적인 무기이며, 칼날의 곡선은 베는 동작의 하향력을 상당히 증가시킨다. 초기 모델은 곡선이 고르지 않았으며, 곡선의 가장 깊은 부분은 손잡이에 있었다. 시대가 변함에 따라 곡선의 중심은 칼날 위쪽으로 이동하는 경향이 있었다.[47]

3. 2. 중세

"카타나(katana)"라는 단어는 고대 일본에서 사용되었으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반면 "니혼토(nihontō)"라는 단어의 옛 용법은 송나라 시인 오양수(歐陽修)의 시, 「니혼토가(Nihontō)」에서 찾아볼 수 있다.[2] "니혼토(nihontō)"라는 단어는 막부 말기(late Tokugawa shogunate) 일본에서 더욱 흔해졌다. 서양 검의 수입으로 인해 서양 검과 구분하기 위해 "니혼토(nihontō)"라는 단어가 채택되었다.

일본도의 제작은 특정 시대로 구분된다.

  • 죠코토(上古刀, 죠코토)(서기 900년경까지)
  • 코토(古刀, 코토)(서기 900년경~1596년)
  • 신토(新刀, 신토)(1596년~1780년)
  • 신신토(新々刀, 신신토)(1781년~1876년)
  • 겐다이토(現代刀, 겐다이토)(1876년~현재)[22]


화려한 마키에칠과 금속 조각으로 장식된 ''타치'' 장식. 이토마키노타치 스타일 검 장식(위아래). 에도 시대. 도쿄 국립 박물관.


헤이안 시대 후기, 특히 무가 세력이 활발해진 전구년의 역이나 후삼년의 역 무렵부터 무가의 세력이 증대하여, 이에 따라 태도가 발달하여, 일반적으로 이 이후의 것을 일본도로 한다.

양질의 사철이 나는 운백 국경 지역과 비젠국과, 정치 문화의 중심인 야마시로국야마토국 등에 도공의 각 유파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미나모토노 라이코가 오에야마의 슈텐도지를 베었다고 하는 「도지키리」(호키국의 야스츠나 작, 국보)나 여우에게 합치를 쳐들였다는 전설이 있는 「코키츠네마루」(야마시로국의 산죠 무네치카 작, 제2차 세계 대전 때 소실) 등이 이 시대를 대표하는 일본도이다.

헤이안 시대 태도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 조립은 능조(鎬造り), 안동(庵棟)으로, 신폭(身幅)은 총체적으로 좁고, 봉(鋒)이 꽉 차서 소절선(小切先)이 된다.
  • 모습은 허리에서 동측(棟側)에 마치 기울어지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으며, 휨이 높고, 물치(物打)는 휨이 엎드리는 마음이다.
  • 버티는(원폭에 비해 선폭이 좁아지는 형태) 우아한 모습을 하고 있다.[144]
  • 하문(刃文)은 직날(直刃) 또는 소정자(小丁子)・소란(小亂)이 들어가 있으며, 비(沸)됨이다.
  • 구이폭(焼幅)은 별로 넓지 않고, 하구(刃区)에서 약간 앞쪽부터 하문이 시작되는 것이 많다. 이것은 연마 감소의 관계이기도 하지만, 「구이오토시」(焼き落とし)라고도 부르며, 붕고국 유키히라 등, 규슈 대장간에는 후세에도 보인다.
  • 경(莖)은 휨이 있고, 기지모모(雉股)형이 주류이다.


드물게 원선의 신폭(身幅)에 차이가 거의 없는 호쾌한 태도도 존재하고, 고비젠파의 후쿠히라의 오후쿠히라(大包平 도쿄 국립박물관 소장), 진항(真恒 쿠노산 도쇼구 소장), 토모나리(友成 이쓰쿠시마 신사 소장), 규슈의 미이케 미쓰요(三池光世)의 오덴타(大典太 마에다 이쿠토쿠카이 소장)가 유명하고 모두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3. 3. 근대

"카타나(katana)"라는 단어는 고대 일본에서 사용되었으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반면 "니혼토(nihontō)"라는 단어의 옛 용법은 송나라 시인 오양수(歐陽修)의 시, 「니혼토가(Nihontō)」에서 찾아볼 수 있다.[2] "니혼토(nihontō)"라는 단어는 막부 말기(late Tokugawa shogunate) 일본에서 더욱 흔해졌다. 서양 검의 수입으로 인해 서양 검과 구분하기 위해 "니혼토(nihontō)"라는 단어가 채택되었다.

일본도의 제작은 특정 시대로 구분된다.

  • 죠코토(ancient swords, 죠코토)(서기 900년경까지)
  • 코토(old swords, 코토)(서기 900년경~1596년)
  • 신토(new swords, 신토)(1596년~1780년)
  • 신신토(new new swords, 신신토)(1781년~1876년)
  • 겐다이토(modern or contemporary swords, 겐다이토)(1876년~현재)[22]


1596년 이후 게이초 시대(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 만들어진 검은 신토(新刀)로 분류된다. 신토 이후의 일본도는 제련 방법과 강철(다마하가네)에서 고토(古刀)와 다르다. 이는 일본도 제작 집단 중 가장 컸던 비젠파가 1590년 대홍수로 멸망하고 주류가 미노파로 바뀌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사실상 통일하여 균일한 강철이 일본 전역에 분포되기 시작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특히 가마쿠라 시대에 만들어진 비젠파의 고토는 하몬과 시노기 사이에 흰 안개와 같은 미다레우츠리를 가지고 있었지만, 신토 이후의 검에서는 거의 사라졌다. 또한, 칼날 전체가 희고 단단해졌다.[75][76]

신토 시대 이후의 일본도는 종종 칼날에 화려한 장식이 새겨져 있고, 칼집에는 마키에 칠 장식이 되어 있다. 이는 센고쿠 시대가 끝나고 평화로운 에도 시대가 시작되면서 경제 발전과 예술 공예품으로서의 검의 가치가 높아졌기 때문이다.[77] 신토의 창시자로 여겨지는 우메타다 미오주가 이끄는 우메타다파는 이 시대 일본도의 예술성 향상을 이끌었다. 그들은 검 제작자이자 금속 세공사였으며, 칼날에 조각을 하고, 츠바(손잡이 보호대)와 같은 금속 장식을 만들고, 타치에서 카타나로 개조(수리아게)하며, 금으로 상감된 글씨를 새기는 것으로 유명했다.[78]

검은 칼집, 손잡이 감개 실, 흰 가오리 가죽 손잡이로 도쿠가와 막부가 규정한 정장용 다이쇼. 우에스기 가문 소유. 에도 시대 말기.


이 시대에 도쿠가와 막부는 사무라이가 카타나와 짧은 검을 한 쌍으로 차도록 요구했다. 이 짧은 검은 와키자시와 탄토였으며, 주로 와키자시가 선택되었다. 이 두 개의 세트를 다이쇼라고 한다. 다이쇼는 사무라이만이 착용할 수 있었으며, 그들의 사회적 권력과 개인적 명예를 나타냈다.[9][79][65][11] 사무라이는 일상생활에서 장식적인 검 장식을 할 수 있었지만, 도쿠가와 막부는 성에 방문할 때 사무라이가 착용하는 정식 검을 검은 칼집, 흰 가오리 가죽과 검은 실로 감싼 손잡이로 만든 다이쇼로 규정함으로써 규제했다.

평민(쵸닌)과 농민은 짧은 와키자시를 장비할 수 있었고, 일반 대중은 여행 중 종종 와키자시를 장비했다.[80][81] 도쿠가와 막부 시대에는 검 제작과 총기 사용이 감소했다.[82] 이 시대에 만들어진 일본도는 신토로 분류된다.[83]

미나모토 키요마로가 제작한 탄토. 에도 시대 말기. (왼쪽) 탄토 장식, 에도 시대 말기. (오른쪽)


18세기 후반, 검 제작자 수이신시 마사히데는 당시 카타나 칼날이 장식만 강조하고 강도에 문제가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가마쿠라 시대부터 남북조 시대까지의 대담하고 강인한 고토 칼날이 이상적인 일본도라고 주장하며, 제작 방법을 복원하여 카타나에 적용하려는 운동을 시작했다. 이후에 만들어진 카타나는 신신토(新々刀, new revival swords) 즉 "새로운 새로운 검"으로 분류된다.[83] 오늘날 일본에서 가장 인기 있는 검 제작자 중 한 명은 이 신신토 시대에 활동했던 미나모토 키요마로이다. 그의 인기는 "요츠야의 마사무네"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의 시대를 초월한 뛰어난 기술과 불운한 삶 때문이다. 그의 작품은 고가에 거래되었으며, 2013년부터 2014년까지 일본 전역의 박물관에서 전시회가 열렸다.[84][85][86]

1853년 매슈 페리의 도착과 그 후의 가나가와 조약은 일본 사회에 혼란을 야기했다. 도쿠가와 막부를 타도하고 천황에 의한 통치를 원하는 존왕양이파(손노죠이파)와 도쿠가와 막부의 계속을 원하는 사막파(사바쿠파) 세력 간에 갈등이 빈번하게 발생하기 시작했다. 시시(시시)(志士)라고 불리는 이러한 정치 활동가들은 긴노토(勤皇刀) 또는 바쿠마츠토(幕末刀)라고 불리는 실용적인 카타나를 사용하여 싸웠다. 그들의 카타나는 칼날 길이가 90cm 이상으로 길고 곡선이 적었으며, 크고 날카로운 첨단을 가지고 있어 실내 전투에서 찌르기에 유리했다.[83]

3. 4. 현대

"카타나(katana)"라는 단어는 고대 일본에서 사용되었으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반면 "니혼토(nihontō)"라는 단어의 옛 용법은 송나라 시인 오양수(歐陽修)의 시, 「니혼토가(Nihontō)」에서 찾아볼 수 있다.[2] "니혼토(nihontō)"라는 단어는 막부 말기(late Tokugawa shogunate) 일본에서 더욱 흔해졌다. 서양 검의 수입으로 인해 서양 검과 구분하기 위해 "니혼토(nihontō)"라는 단어가 채택되었다.

일본도의 제작은 특정 시대로 구분된다.

  • 죠코토(上古刀, 죠코토)(서기 900년경까지)
  • 코토(古刀, 코토)(서기 900년경~1596년)
  • 신토(新刀, 신토)(1596년~1780년)
  • 신신토(新々刀, 신신토)(1781년~1876년)
  • 겐다이토(現代刀, 겐다이토)(1876년~현재)[22]


1596년 이후 게이초 시대(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 만들어진 검은 신토(新刀)로 분류된다. 신토 이후의 일본도는 제련 방법과 강철(다마하가네)에서 고토(古刀)와 다르다. 이는 일본도 제작 집단 중 가장 컸던 비젠파가 1590년 대홍수로 멸망하고 주류가 미노파로 바뀌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사실상 통일하여 균일한 강철이 일본 전역에 분포되기 시작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특히 가마쿠라 시대에 만들어진 비젠파의 고토는 하몬과 시노기 사이에 흰 안개와 같은 미다레우츠리를 가지고 있었지만, 신토 이후의 검에서는 거의 사라졌다. 또한, 칼날 전체가 희고 단단해졌다.[75][76]

신토 시대 이후의 일본도는 종종 칼날에 화려한 장식이 새겨져 있고, 칼집에는 마키에 칠 장식이 되어 있다. 이는 센고쿠 시대가 끝나고 평화로운 에도 시대가 시작되면서 경제 발전과 예술 공예품으로서의 검의 가치가 높아졌기 때문이다.[77] 신토의 창시자로 여겨지는 우메타다 미오주가 이끄는 우메타다파는 이 시대 일본도의 예술성 향상을 이끌었다. 그들은 검 제작자이자 금속 세공사였으며, 칼날에 조각을 하고, 츠바(손잡이 보호대)와 같은 금속 장식을 만들고, 타치에서 카타나로 개조(수리아게)하며, 금으로 상감된 글씨를 새기는 것으로 유명했다.[78]

이 시대에 도쿠가와 막부는 사무라이가 카타나와 짧은 검을 한 쌍으로 차도록 요구했다. 이 짧은 검은 와키자시와 탄토였으며, 주로 와키자시가 선택되었다. 이 두 개의 세트를 다이쇼라고 한다. 다이쇼는 사무라이만이 착용할 수 있었으며, 그들의 사회적 권력과 개인적 명예를 나타냈다.[9][79][65][11] 사무라이는 일상생활에서 장식적인 검 장식을 할 수 있었지만, 도쿠가와 막부는 성에 방문할 때 사무라이가 착용하는 정식 검을 검은 칼집, 흰 가오리 가죽과 검은 실로 감싼 손잡이로 만든 다이쇼로 규정함으로써 규제했다.

평민(쵸닌)과 농민은 짧은 와키자시를 장비할 수 있었고, 일반 대중은 여행 중 종종 와키자시를 장비했다.[80][81] 도쿠가와 막부 시대에는 검 제작과 총기 사용이 감소했다.[82] 이 시대에 만들어진 일본도는 신토로 분류된다.[83]

18세기 후반, 검 제작자 수이신시 마사히데는 당시 카타나 칼날이 장식만 강조하고 강도에 문제가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가마쿠라 시대부터 남북조 시대까지의 대담하고 강인한 고토 칼날이 이상적인 일본도라고 주장하며, 제작 방법을 복원하여 카타나에 적용하려는 운동을 시작했다. 이후에 만들어진 카타나는 신신토(新々刀, new revival swords) 즉 "새로운 새로운 검"으로 분류된다.[83] 오늘날 일본에서 가장 인기 있는 검 제작자 중 한 명은 이 신신토 시대에 활동했던 미나모토 키요마로이다. 그의 인기는 "요츠야의 마사무네"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의 시대를 초월한 뛰어난 기술과 불운한 삶 때문이다. 그의 작품은 고가에 거래되었으며, 2013년부터 2014년까지 일본 전역의 박물관에서 전시회가 열렸다.[84][85][86]

1853년 매슈 페리의 도착과 그 후의 가나가와 조약은 일본 사회에 혼란을 야기했다. 도쿠가와 막부를 타도하고 천황에 의한 통치를 원하는 존왕양이파(손노죠이파)와 도쿠가와 막부의 계속을 원하는 사막파(사바쿠파) 세력 간에 갈등이 빈번하게 발생하기 시작했다. 시시(시시)(志士)라고 불리는 이러한 정치 활동가들은 긴노토(勤皇刀) 또는 바쿠마츠토(幕末刀)라고 불리는 실용적인 카타나를 사용하여 싸웠다. 그들의 카타나는 칼날 길이가 90cm 이상으로 길고 곡선이 적었으며, 크고 날카로운 첨단을 가지고 있어 실내 전투에서 찌르기에 유리했다.[83]

4. 일본도의 분류

몇 자루의 타도와 협차. 길이와 곡선의 다양한 변화를 보여준다. '나카고'도 잘 보인다.


일본도는 제작 시기, 칼날의 길이, 모양, 장비 방법에 따라 다양하게 분류된다.

'''길이에 따른 분류'''는 을 기준으로 하며, 1척은 약 30cm이다. 칼날이 1척보다 짧으면 단도, 1척보다 길지만 2척보다 짧으면 소도(협차, 소태도 포함), 2척보다 길면 대도(大刀) 혹은 장도(長刀)(타도, 태도 포함), 3척보다 길면 대태도(大太刀) 혹은 야태도(野太刀)로 분류한다. 협차보다 길지만 타도보다는 짧은 칼은 지사카타나라고 불리는데, 흔하지 않다.

'''날의 모양에 따른 분류'''는 흔히 알려진 사무라이용 일본도는 초승달처럼 휘어진 형태를 하고 있지만, 닌자용 일본도처럼 날이 곧게 뻗은 직도(直刀)도 존재한다.

'''장비 방법에 따른 분류'''는 1500년 이전에는 칼날을 아래로 향하게 끈으로 묶어 허리에 차는 '''진다치-주크리''' 방식을 사용했고, 이 방식으로 차는 모든 장도는 타치라고 불렸다. 1500~1867년 사이에는 칼날이 위를 향하게 허리띠(오비)에 꽂아 차는 '''부케-주크리''' 방식을 사용했고, 다이쇼(대소 한 쌍)를 이루는 경우가 많았으며, 이 방식으로 차는 모든 장도는 카타나라고 불렸다. 1867년 이후 군율과 사무라이 계급 해체로 대부분 군인은 진다치-주크리 방식으로 칼을 찼으며, 1953년 이후 시연용으로 부케-주크리 스타일이 다시 나타나고 있다. 닌자는 칼을 허리가 아닌 등에 멨다.

'''생산 연도에 따른 분류'''는 다음과 같다.

  • 987년 이전: '''조고토(上古刀)''' 또는 '''조쿠토'''. 칼의 형태가 일직선이었다.
  • 987년~1597년: '''고토(古刀)'''. 초기에는 곡선이 고르지 않고 손잡이 근처에 곡률 중심이 있었으나, 점차 칼날 쪽으로 이동하며 더욱 휘어졌다.
  • 1597년~1760년: '''신토(新刀)'''. 칼 제조 기법의 실전과 퇴화로 인해 대부분 고토보다 질이 떨어진다고 평가받는다.
  • 1761년~1876년: '''신신토(新々刀)'''. 다시 고토 형태로 제작되었으며, 신토보다는 뛰어나지만 진짜 고토보다는 질이 떨어진다고 평가받는다.
  • 1876년 이후: '''군토(軍刀)'''. 제2차 세계 대전 군수품으로 공장에서 대량 생산되었다. 초기에는 서구 기병도와 유사하거나 타치를 모방했으나, 대량 생산으로 인해 칼날 길이가 짧아지는 경향을 보였다. 전쟁 후기로 갈수록 형태와 품질이 조잡해졌다.


가마쿠라 시대의 고토가 이상적인 일본도 형태로 여겨졌으며, 에도 시대부터 현대까지 신토 시대의 검 제작자들은 가마쿠라 시대 일본도의 형태를 재현하는 데 주력해 왔다. 일본 국보로 지정된 일본도는 100자루가 넘는데, 그중 가마쿠라 시대의 고토가 80%, 타치가 70%를 차지한다.[23][24]

신도 이후의 일본도는 제련 방법과 강철에서 고토와 다르다. 이는 비젠파의 대홍수로 인한 멸망, 미노파의 확산, 그리고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 의한 일본의 사실상 통일로 각 파의 강철 사용에 거의 차이가 없어졌기 때문이다.[75][76][25] 신도 시대 이후의 일본도는 칼날에 화려한 장식이 새겨지고, 칼집에는 칠기 마키에(蒔絵) 장식이 되는 경우가 많다. 이는 전국 시대가 끝나고 평화로운 에도 시대가 시작되면서 경제 발전과 예술 공예품으로서의 검의 가치 상승 때문이었다.

오늘날에도 골동품과 현대 제작 일본도를 찾아볼 수 있다. 현대의 진짜 일본도(日本刀)는 수백 명의 검 제작자가 제작한다. 전일본검제작협회가 주최하는 연례 경쟁에서 많은 예시를 볼 수 있다.[26] 이는 일본도 문화 진흥회(Nihontō Bunka Shinkō Kyōkai)의 후원 하에 이루어진다.[27] 그러나 일본도의 품질을 유지하기 위해 일본 정부는 검 제작자가 1년에 만들 수 있는 일본도의 수를 24자루(월 2자루 이내)로 제한하고 있다. 따라서 세계적으로 유통되는 "일본도" 중 상당수는 중국에서 제작되었으며, 제조 공정과 품질은 인증되지 않았다.[92][93]

4. 1. 길이에 의한 분류

일본도는 다양한 방법으로 제작되는데, 그중 하나가 길이로 구분하는 방법이다. 일본도의 길이는 으로 나타내며, 1척은 약 30cm이다.

  • 칼날이 1척보다 짧으면 단도로 분류된다.
  • 칼날이 1척보다 길지만 2척보다 짧으면 소도로 분류되며, 협차와 소태도가 여기에 속한다.
  • 칼날이 2척보다 길면 대도(大刀) 혹은 장도(長刀)로 분류되며, 타도와 태도가 여기에 속한다. 타도는 칼날이 위로 향하게 허리띠에 꽂지만, 태도는 칼날이 아래로 향하게 끈으로 묶어 허리에 찬다.
  • 칼날이 3척보다 길면 대태도(大太刀) 혹은 야태도(野太刀)라고 불린다.


지사카타나는 협차보다는 길지만 타도보다는 짧은 칼로, 흔하지 않다.

4. 2. 날의 모양에 따른 분류

일본도는 날의 모양에 따라 다양한 종류로 나뉜다. 흔히 알려진 사무라이용 일본도는 초승달처럼 휘어진 형태를 하고 있지만, 닌자용 일본도처럼 날이 곧게 뻗은 직도(直刀)도 존재한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나기나타, 검(켄), 단도, 카타나(우치가타나), 타치(축척 아님) 등 다양한 일본 검의 종류.


'''타치'''. 칼날은 마사츠네(Masatsune)가 만들었다. 칼날, 12세기; 장식, 18세기. 도쿄 국립 박물관


히젠 다다요시(Hizen Tadayoshi) 1세가 만든 '''카타나'''. ('''최상급 와자모노''')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위) 카타나 장식, 에도 시대 후기. (아래)


'''와키자시'''. 칼날은 후사무네(Fusamune)가 만들었다. 소슈 학파. 칼날, 15세기 후반 또는 16세기 초; 장식, 18세기.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신토고 쿠니미츠(Shintōgo Kunimitsu)의 명(銘, 메이)이 새겨진 '''단도'''. 완전한 '''아이쿠치''' 스타일 '''코시라에'''(장식)와 칼날. 칼날, 13세기 또는 14세기. 소슈 학파. 중요 문화재


현대에 가장 널리 알려진 일본도는 15세기 이후 사무라이들이 사용했던 한쪽 날이 있는 휘어진 카타나이다.[14]

다른 유형의 일본도는 다음과 같다.

  • 츠루기/켄:[18] 직선형 양날검. 10세기 이후에는 무기로서 완전히 사라지고 신사와 불교 사찰에 제물로만 만들어졌다.
  • 초쿠토: 직선형 한쪽 날 검. 10세기 이후에는 무기로서 사라지고 신사와 불교 사찰에 제물로만 만들어졌다.
  • 타치: 일반적으로 후대의 카타나보다 더 길고 휘어져 있으며, 곡률은 종종 중간 또는 칼자루쪽에서 중심을 이루고 종종 칼자루를 포함한다. 타치는 날이 아래로 향하게 매달아 착용했다. 15세기 이전에 유행했다.
  • 코다치: 타치의 짧은 버전이지만, 유사한 장식과 의도된 용도를 가지며, 대부분 13세기 이전에 발견된다.
  • 오다치/노다치: 타치의 긴 버전으로, 일반적으로 칼날 길이가 90cm 이상이며, 대부분 14세기 이후에 발견된다.
  • 우치가타나: 60cm보다 긴 휘어진 칼날을 가진 검(상한 길이 제한은 없지만 일반적으로 90cm보다 짧다)으로, 띠에 날이 위로 향하게 착용했다. 약 14세기경 '''사스가'''라는 일종의 '''단도'''에서 발전하여 15세기 이후 '''타치'''를 대체하는 주류가 되었다.
  • 와키자시: 현대 측정으로 30cm 에서 60cm인 검에 대한 일반적인 용어로, 1600년 이후에 주로 만들어졌다. 일반적으로 전통적인 사무라이 '''다이쇼''' 검 쌍에서 카타나와 함께 하는 짧은 칼이지만, 사무라이 이외의 계층이 단일 칼날로 착용할 수도 있으며, 카타나와 마찬가지로 날이 위로 향하게 착용한다.
  • 단도: 30cm보다 짧은 칼날을 가진 검. '''단도'''는 일반적으로 검으로 분류되지만, 그 용도는 칼과 같다. 일반적으로 한쪽 날이지만, 비대칭이기는 하지만 양날인 것도 있었다.


일본도와 같은 전통적인 방식으로 만들어졌지만 검이 아닌 다른 날붙이 무기는 제작 방식이 일본도와 유사하기 때문에 일본도('''니혼토''')("도"는 특정 "검"이 아니라 "칼날"을 의미함)로 분류된다.

  • 나가마키: 일반적으로 칼날만큼 긴 손잡이가 매우 긴 검. 이름은 손잡이 감김의 길이를 나타낸다.[1]
  • 나기나타: 휘어진 한쪽 날 칼날을 가진 창. 나기나타 장식은 긴 나무 막대기로 구성되어 있으며, 더 짧고 감겨 있는 나가마키 장식과 다르다.
  • 야리: 창 또는 창과 같은 무기. 야리는 간단한 양날 평평한 칼날에서 삼각형 단면의 양날 칼날, 대칭형 가로대(주몬지야리) 또는 비대칭형 가로대가 있는 것까지 다양한 칼날 형태를 가지고 있다. 주 칼날은 나기나타와 달리 대칭적이고 직선이며, 일반적으로 더 작지만 일부 나기나타 칼날만큼 크거나 더 클 수도 있다.
  • 나기나타, 나가마키, 야리: 창과 같은 무기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검으로 간주되는데, 이는 일반적인 오해이다. 나기나타, 나가마키, 야리는 검과 다르다.[1][19]


일본도의 유형은 칼날과 그 장식의 조합으로 결정되는데, 이는 칼날의 사용 방식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타치로 만들어졌던 칼날은 타치 코시라에(tachi koshirae)와 카타나 코시라에(katana koshirae)에 번갈아 장착될 수 있다. 따라서 현재 장착된 장식의 스타일로 구분하는 것이 적절하다. 긴 단도는 30cm를 초과하기 때문에 와키자시로 분류될 수 있지만, 원래 단도로 장착되어 사용되었을 수 있으므로, 장착되지 않은 짧은 칼날을 언급할 때는 길이 구분이 다소 임의적이지만 필요하다.[20]

일본도와 같은 방법으로 만들어진 다른 날붙이 무기 또는 도구는 다음과 같다.

  • 전쟁용 화살촉, 야지리(또는 야노네).
  • 코가타나: 칼집의 옆면에 있는 주머니에 장착되는 경우가 있는 보조 또는 유틸리티 나이프. 일반적인 칼날은 약 10cm 길이이고 1cm 너비이며, 더 큰 칼날과 같은 기술을 사용하여 제작된다. "코즈카"(小柄)라고도 하는데, 문자 그대로 "작은 손잡이"를 의미하지만 이 용어는 손잡이와 칼날을 함께 지칭할 수도 있다.

4. 3. 생산 연도에 따른 분류


  • 987년 이전: '''조고토(上古刀)''' 또는 '''조쿠토'''라 불리며, 칼의 형태가 일직선이었다.
  • 987년~1597년: '''고토(古刀)'''라 불린다. 초기에는 곡선이 고르지 않고 손잡이 근처에 곡률 중심이 있었으나, 점차 칼날 쪽으로 이동하며 더욱 휘어졌다.
  • 1597년~1760년: '''신토(新刀)'''라 불린다. 칼 제조 기법의 실전과 퇴화로 인해 대부분 고토보다 질이 떨어진다고 평가받는다.
  • 1761년~1876년: '''신신토(新々刀)'''라 불린다. 다시 고토 형태로 제작되었으며, 신토보다는 뛰어나지만 진짜 고토보다는 질이 떨어진다고 평가받는다.
  • 1876년 이후: '''군토(軍刀)'''라 불린다. 제2차 세계 대전 군수품으로 공장에서 대량 생산되었다. 초기에는 서구 기병도와 유사하거나 타치를 모방했으나, 대량 생산으로 인해 칼날 길이가 짧아지는 경향을 보였다. 전쟁 후기로 갈수록 형태와 품질이 조잡해졌다.


가마쿠라 시대의 고토가 이상적인 일본도 형태로 여겨졌으며, 에도 시대부터 현대까지 신토 시대의 검 제작자들은 가마쿠라 시대 일본도의 형태를 재현하는 데 주력해 왔다. 일본 국보로 지정된 일본도는 100자루가 넘는데, 그중 가마쿠라 시대의 고토가 80%, 타치가 70%를 차지한다.[23][24]

신도 이후의 일본도는 제련 방법과 강철에서 고토와 다르다. 이는 비젠파의 대홍수로 인한 멸망, 미노파의 확산, 그리고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 의한 일본의 사실상 통일로 각 파의 강철 사용에 거의 차이가 없어졌기 때문이다.[75][76][25] 신도 시대 이후의 일본도는 칼날에 화려한 장식이 새겨지고, 칼집에는 칠기 마키에(蒔絵) 장식이 되는 경우가 많다. 이는 전국 시대가 끝나고 평화로운 에도 시대가 시작되면서 경제 발전과 예술 공예품으로서의 검의 가치 상승 때문이었다.

오늘날에도 골동품과 현대 제작 일본도를 찾아볼 수 있다. 현대의 진짜 일본도(日本刀)는 수백 명의 검 제작자가 제작한다. 전일본검제작협회가 주최하는 연례 경쟁에서 많은 예시를 볼 수 있다.[26] 이는 일본도 문화 진흥회(Nihontō Bunka Shinkō Kyōkai)의 후원 하에 이루어진다.[27] 그러나 일본도의 품질을 유지하기 위해 일본 정부는 검 제작자가 1년에 만들 수 있는 일본도의 수를 24자루(월 2자루 이내)로 제한하고 있다. 따라서 세계적으로 유통되는 "일본도" 중 상당수는 중국에서 제작되었으며, 제조 공정과 품질은 인증되지 않았다.[92][93]

제작 시기에 따른 분류는 다음과 같다.[22]

  • 상고도 (上古刀일본어 "고대의 검", 서기 900년경까지)
  • 고도 (古刀일본어 "오래된 검", 서기 900년~1596년)
  • 신도 (新刀일본어 "새로운 검", 1596년~1780년)
  • 신신도 (新々刀일본어 "새로운 새로운 검", 1781년~1876년)
  • 현대도 (現代刀일본어 "현대의 검", 1876년~현재)

4. 4. 장비 방법에 의한 분류

일본도는 칼을 차는 방식에 따라 여러 종류로 나뉜다.

1500년 이전에는 대부분 허리에 끈으로 묶어 칼날을 아래로 향하게 차는 '''진다치-주크리''' 방식을 사용했다. 이 방식으로 차는 모든 장도(긴 칼)는 '''타치'''라고 불렸다.

1500~1867년 사이에는 대부분 칼날이 위를 향하게 허리띠(오비)에 꽂아 차는 '''부케-주크리''' 방식을 사용했다. 이때는 대부분 다이쇼(대소 한 쌍)를 이루었다. 이 방식으로 차는 모든 장도는 카타나라고 불렸다.

1867년 이후 군율과 사무라이 계급 해체로 대부분 군인은 진다치-주크리 방식으로 칼을 찼다. 1953년 이후 최근까지 시연용으로 부케-주크리 스타일이 다시 나타나고 있다.

닌자는 칼을 허리가 아닌 등에 멨다.

칼을 허리에 찼을 때 장인의 표식이 보이는 방향으로 차면 되기 때문에, 장인이 다치 식 아니면 오비 식으로 칼을 만들었는지 쉽게 판별할 수 있다. 다치로 제작된 칼은 주로 신토보다 고토 쪽이라서 훨씬 강하고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다. 그러나 부케-주크리 식 가타나도 제작되고 있다.

5. 일본도의 제작

10세기 말 무네치카(宗次) 대장장이가 여우 요괴의 도움을 받아 고기츠네마루(小狐丸)라는 칼을 만들고 있는 모습.


일본도는 보통 6~8명의 장인이 분업하여 제작한다.[105][106] 각 장인의 역할은 다음과 같다.

장인역할설명
도장(刀匠)칼날 제작도코(刀工) 또는 가타나카지(刀鍛冶)라고도 불리며, 칼날을 제련한다. 견습 대장장이들을 조수로 둔다.
도기시(砥師)칼날 연마칼날을 연마한다.
킨코시(金工師)금속 장식초킨시(彫金師)라고도 불리며 칼의 금속 장식을 만든다. 현대에는 시로가네시와 쓰바시의 역할을 겸하는 경우도 있다.
시로가네시(白銀師)하바키 제작칼날 목가리(하바키)를 만든다.
사야시(鞘師)칼집 제작칼집을 만든다.
누리시(塗師)칼집 옻칠칼집에 옻칠을 한다.
쓰카마키시(柄巻師)손잡이 제작손잡이에 끈을 감는다.
쓰바시(鍔師)쓰바 제작손잡이 가드(쓰바)를 만든다.



무로마치 시대 이전에는 도장과 무기 제작자(甲冑師)가 남는 금속으로 쓰바를 만들었지만, 이후부터는 전문 장인이 쓰바 제작을 맡았다.[105][106]

일본도의 특징은 칼날과 칼자루(나카고(刀身))가 통합되어 메쿠기(目釘)라는 핀으로 손잡이(쓰카(柄))에 고정되는 방식, 부드러운 곡선, 그리고 시노기즈쿠리(鎬造り)라는 칼날의 3차원 단면 형태이다. 시노기즈쿠리 칼을 옆에서 보면 날카로운 쪽과 칼등 사이에 능선인 시노기(鎬)가 있는데, 이는 칼날의 경량화, 강화, 높은 절삭력에 기여한다.[107] 와키자시(脇差)와 단토(短刀)는 히라즈쿠리(平造り)라는 형태로 제련되는 등, 다양한 형태와 칼날 두께, 연마량으로 제련되었다.[107]

일본 칼날 제련은 몇 주 또는 몇 달이 걸리는 신성한 예술로 여겨졌다.[108] 대장장이는 대략적인 형태를 제련하고, 견습생은 금속을 접는 작업을 했으며, 전문 연마사(토기(砥ぎ))와 여러 장인들이 칼날과 장식을 만들었다. 칼날 연마 및 광택 과정은 칼날 제련만큼이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에도 시대 제련 장면


정통 일본도는 "타마하가네"라는 일본 강철로 만들어진다.[109] 칼날은 단단한 외피 강철(하다가네)이 부드러운 내부 강철 코어(신가네)를 감싸는 방식으로 만들어진다.[110] 하다가네는 원강철 블록을 가열, 펴기, 식히기, 작은 블록으로 부수기, 재조립, 재련 등의 과정을 거친다. 강철 빌릿을 여러 번 접고 두드리고 용접하여 수천 개의 층으로 구성된 복잡한 구조를 만드는데, 이 과정에서 칼날의 독특한 결 무늬인 지하다(地肌)가 만들어진다. 신가네는 하다가네보다 탄소 함량이 낮은 부드러운 강철로, 하다가네와 유사하게 제작되지만 접는 횟수는 적다. 하다가네 블록을 ‘U’자 모양으로 접고 신가네를 삽입한 후, 복합 강철 빌릿을 가열하고 두드려 최종 칼날 모양에 가깝게 만든다.

스노베는 부분적으로 가열하고 두들겨 칼날의 특징을 만들고, 대장장이의 기술로 칼날에 곡률을 준다. 이후 파일링과 스크래핑 과정을 거쳐 경화 과정을 준비한다. 스노베 전체에 점토 혼합물을 바르는데, 칼등과 측면에는 날보다 두껍게 바른다.

야키이레(焼き入れ, 단련)는 어두운 대장간에서 밤에 이루어지며, 대장장이는 눈으로 칼의 색깔과 온도를 판단하여 칼날을 물탱크에 담근다. 이 과정에서 칼날에 두께가 다른 점토를 바르면, 얇게 코팅된 날은 빠르게 식어 마르텐사이트라는 단단한 강철이 되고, 두껍게 코팅된 칼등은 천천히 식어 부드럽고 유연한 펄라이트 강철이 된다. 점토를 바르는 방법과 긁어내는 것에 따라 하몬(刃紋)이라는 결정 구조의 모양과 특징이 형성된다.



칼날에서 하몬까지 형성되는 마르텐사이트 강철은 두 가지 강철 사이의 전이선이며, 일본도 강철의 아름다움이 발견되는 곳이다. 하몬의 형태와 구조는 칼의 제작 시대, 대장장이, 유파 등을 나타낸다. 칼날이 식고 진흙을 긁어낸 후에는 홈(히(樋) 또는 보히(棒樋))이나 한자, 신, 용 등을 묘사하는 호리모노(彫物, 조각)를 새길 수 있다. 칼날에서 가장 중요한 표시는 칼자루 부분에 새겨지는 파일 표시이다. 칼자루는 절대로 청소해서는 안 된다.

흙 얹기는 평지용, 날문용(刃文用), 능지용 구장토(焼場土)를 칼날에 얹는 작업이다. 평지에 평지용 구장토를 얇게 바르고, 날문에 붓으로 날문용 구장토를 그린 후, 날문에서 능선까지 능지용 구장토를 두껍게 얹는다. 담금질 시 급랭할 때 날쪽은 빠르게, 능선쪽은 완만하게 식는다.

담금질(焼入れ) 시에는 작업장 조명을 어둡게 하여 강의 온도를 광량으로 판단한다. 흙을 얹은 칼날을 화로에 넣어 약 800℃까지 가열한 후, 수조에 담가 급랭시킨다. 담금질로 칼 표면에 마르텐사이트라는 단단한 조직이 나타나는데, 이에 따라 날문이 둥근 입자 모양으로 보이는 니에(錵/沸)와 고운 흰색 선 모양으로 보이는 니오이(匂い)로 구분된다. 냉각수는 섭씨 10~30도, 기름은 60~80도 정도이다.

맞추기(合い取り)는 뜨임(焼戻し) 공정으로, 화로 불 위에서 칼날을 약 150도 정도로 가열하여 강을 안정화시키고 인성을 강화한다. 칼 제작자가 모든 작업을 완료하면, 연사(硏師)에 의해 최종적인 연마가 이루어진다.[123]

5. 1. 접철 방식

일본도는 대부분 접철 방식으로 제작되었다. 접철 방식은 금속을 가열하고 접고 두드리는 과정을 반복하는 것이다. 당시 사용되던 철은 불순물이 많아 일반적인 방식으로 주조하면 칼 표면에 균열이 생기고 쉽게 깨지는 문제가 있었다. 접철 방식은 노동 집약적이지만, 불순한 철로 인한 균열을 막고 철의 탄소 함유량을 칼 전체에 고르게 분배하는 효과가 있어 널리 사용되었다. 접철 방식의 특징은 칼날에 각 칼마다 다른 독특한 접철 무늬가 새겨진다는 것이다.

가타나와 와키자시는 일반적으로 다른 특성, 칼날 두께, 연마도로 만들어진다. 와키자시는 히라-주크리 방식으로 제작되거나, 가타나의 길이를 줄여(스리아게) 제작되기도 했다.

또한 탄소 성분이 다른 두 종류의 철을 사용했다. 경강을 U자로 구부려 연강을 안에 넣어 단단하면서도 부러지지 않게 제작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여러 겹으로 덧대어 만들기도 했다.

5. 2. 재료

일본도와 다른 날 달린 무기들은 대부분 접철 방식으로 제작되었다. 접철 방식은 금속을 가열하고 접고 망치로 두들기는 과정을 반복하는 방식이다. 당시 사용되던 철은 불순물이 많아 일반적인 방식으로 주조하면 칼 표면에 균열이 생기고 쉽게 깨지는 문제가 있었다. 접철 방식은 노동 집약적이지만 불순물로 인한 균열을 막고 철의 탄소 함유량을 칼 전체에 고르게 분배하는 효과가 있어 널리 사용되었다. 이 방식은 칼날에 특이한 접철 무늬를 새기는 특징이 있다.

카타나와 와키자시는 일반적으로 다른 특성, 칼날 두께, 연마도를 가진다. 와키자시는 히라-주쿠리 방식으로 제작되거나, 가타나의 길이를 줄여(스리아게) 제작되기도 했다.

일본도는 탄소 성분이 다른 두 가지 종류의 철을 사용했다. 경강을 U자로 구부려 속에 연강을 넣어 만드는 방식을 채택하여 단단하면서도 부러지지 않게 제작하였다. 경우에 따라서는 여러 겹으로 덧대어 만들기도 한다.

다이쇼가 항상 함께 주조된 것은 아니다. 사무라이가 다이쇼를 구매할 여유가 있다면 한 쌍의 맞춤식 칼을 가질 수 있었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다른 장인이 다른 형식으로 만든 두 자루 칼을 사용했다. 다이쇼가 한 명의 장인에 의해 완성되었다 하더라도 꼭 그 둘이 같이 주조되거나 장식된 것은 아니었다. 다이쇼가 동시에 주조, 장식, 판매, 사용되는 것은 굉장히 희귀한 예로써 높은 가치를 지녔다.

1800년대, 마키에(蒔絵)칠로 장식된 카타나(刀)의 장식. 메이지 시대에 일본도 제련 수는 감소했지만, 예술적으로 뛰어난 많은 장식들이 만들어졌다.


진품 일본도는 대부분 비싼 가격에 팔린다. 현대식 카타나, 와키자시는 소수의 공인 제작자들에 의해서만 만들어진다. 제2차 세계 대전에 사용되었던 "98식 군토"는 상대적으로 비싸지 않다.

일본어로 칼집을 사야라고 부른다. 개별적으로도 중요한 예술품으로 취급되는 손잡이 보호대는 쓰바라고 부른다. 칼의 다른 장식적 측면도 비슷하게 예술품 취급을 받았다. 메누키는 손잡이 장식, 하바키는 칼날의 끝단과 칼집의 쐐기 모양, 후치와 가시라는 손잡이의 끝단과 마무리, 고즈카는 작은 다용도칼 손잡이, 고가이는 장식적인 코르크 따개 모양의 도구를 뜻한다.

가타나에 사용된 강철 합금은 장인에 따라, 철 광석이 산출된 광맥에 따라 모두 달랐다. 제2차 세계 대전때 주조된 신군도의 성분을 분석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무기물 조성
95.22% ~ 98.12%
탄소0.10% ~ 3.00%
구리1.54%
망간0.11%
텅스텐0.05%
몰리브덴0.04%
티타늄0.02%
규소다양하게 변화
기타 성분나머지



높은 탄소 함유량은 칼날을 강하게 만들었고, 규소는 칼날에 인장력에 대한 내구성과 유연성을 주었다.

5. 2. 1. 타마하가네(玉鋼)

일본도 칼날의 단면을 보여주는 적층 유형


정통 일본도는 일본 강철인 "타마하가네"로 만들어진다.[109] 일본도 칼날은 더 단단한 외피 강철(하다가네)이 더 부드러운 내부 강철 코어(신가네)를 감싸는 방식으로 제작된다.[110] 이러한 방식은 단단하고 날카로운 절삭날을 만들면서도, 전투 중 칼날이 부러질 가능성을 줄이는 충격 흡수 기능을 제공한다.

하다가네는 원강철 블록을 가열하여 막대 모양으로 편 후, 식혀서 작은 블록으로 부수어 불순물을 제거하고 다시 조립하여 재련한다. 이 과정에서 강철 빌릿을 가열, 두드리기, 분할, 접기, 재용접하는 과정을 반복하여 수천 개의 층으로 구성된 복잡한 구조를 만든다. 강철을 접고 두드리는 방식에 따라 칼날의 독특한 결 무늬인 지하다(地肌, 강철 칼날 표면은 지가네(地金))가 결정되며, 이는 칼날의 제작 시대, 장소, 제작자를 나타내는 특징이 된다. 접는 과정은 강철 내 탄소 분포를 균일하게 하고, 칼날 파손의 원인이 될 수 있는 공극을 없앤다.

신가네는 하다가네보다 탄소 함량이 낮은 부드러운 강철이다. 하다가네와 유사하게 두드리고 접고 용접하지만, 접는 횟수는 적다. 하다가네 블록을 다시 가열하고 펴서 'U'자 모양으로 접은 후, 신가네를 칼끝 바로 전까지 삽입한다. 이후 복합 강철 빌릿을 가열하고 두드려 두 강철 층 사이에 공기나 먼지가 들어가지 않도록 한다. 이 과정에서 막대의 길이가 늘어나 최종 칼날 크기에 가까워진다. 막대 끝에서 삼각형 부분을 잘라내어 키사키(칼끝)를 만들고, 직사각형 단면의 스노베(밑그림) 형태가 된다.[111][112][113]

5. 3. 강철 조합

일본도와 다른 날 달린 무기들은 대부분 접철 방식으로 제작되었다. 접철 방식은 금속을 가열하고 접고 망치로 두들기는 과정을 반복하는 것이다. 당시 사용되던 철은 불순물이 많아 일반적인 방식으로 주조하면 칼 표면에 균열이 생기고 쉽게 깨지는 문제가 있었다. 접철 방식은 노동 집약적이지만 불순한 철로 인한 균열을 막고 철의 탄소 함유량을 칼 전체에 고르게 분배하는 효과가 있어 널리 사용되었다. 접철 방식의 특징은 칼날에 각각 다른 특이한 접철 무늬를 새긴다는 것이다.

카타나와 와키자시는 일반적으로 다른 특성, 다른 칼날 두께, 다른 연마도로 만들어진다. 와키자시는 히라-주크리 방식으로 제작되기도 하고, 때로는 카타나의 길이를 줄여(스리아게) 제작되기도 했다.

또한 탄소 성분이 다른 두 가지 종류의 철을 사용했다. 경강을 U자로 구부려 속에 연강을 넣어 만드는 방식을 채택하여 단단하면서도 부러지지 않게 제작하였다. 경우에 따라서는 두 겹이 아닌 여러 겹으로 덧대어 만들기도 한다.

제2차 세계 대전 때 주조된 신군토의 성분을 분석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무기물 조성
95.22%에서 98.12%
탄소0.10%에서 3.00%
구리1.54%
망간0.11%
텅스텐0.05%
몰리브덴0.04%
티타늄0.02%
규소다양하게 변화
기타 성분나머지



높은 탄소 함유량은 칼날을 강하게 만들었고, 규소는 칼날에 인장력에 대한 내구성과 유연성을 주었다.

일본도의 재료가 되는 (鋼)을 와강(和鋼) 또는 탐강(玉鋼)이라고 부른다. 탐강은 일본 고유의 제강법인 "다다라 불기"(たたら吹き)로 만들어진다. 외국의 철광석을 원료로 하는 제강법과 달리, 원료에 사철을 사용함으로써 저온에서 고속 환원을 실현하고, 또한 근대적인 제강법에 비해 불순물이 적은 사철을 원료로 사용하기 때문에, 고품질의 을 얻을 수 있다.[174]

일본도 제작 과정은 다음과 같다.


  • '''물감소(水減し)''': 달군 탐강을 망치로 두들겨 얇고 납작한 판을 만든다. 이것을 물에 넣어 급냉각시키면, 과도한 탄소가 포함된 부분이 떨어져 나간다.
  • '''적불가시(積沸かし)''': 물감소를 통해 구워서 단단하게 만든 덩어리(헤시가네)를 망치로 두들겨 작은 철 조각으로 부순다. 탄소 함량이 많은 단단한 철과 적은 부드러운 철로 나누어, 이러한 철 조각들을 '테코'라고 하는 단련용 도구 끝에 쌓아 올리고 일본 종이로 감싼다. 짚재와 점토즙을 묻혀 화로에 넣고 가열하여 굳힌다.
  • '''단련(下鍛え)''': 달구어진 블록을 망치로 두들겨 늘인 후 중앙에 주름을 넣어 접는 "접어 겹치는 단련"(折り返し鍛練)을 세로 가로 방향으로 반복한다. 이 단계에서는 5-6회 정도 접어 겹치기를 한다.

5. 4. 담금질

일본도는 다른 도검류와 달리 통강(桶鋼)을 그대로 담금질하지 않고, 탄소 성분이 다른 두 종류의 철을 사용한다. 경강을 U자로 구부려 연강을 안에 넣는 방식으로, 단단하면서도 부러지지 않게 제작한다. 경우에 따라 두 겹 이상으로 덧대기도 한다.

담금질 과정에서 칼날에 두께가 다른 점토를 바르면, 얇게 코팅된 날 부분은 빠르게 식어 마텐자이트(martensite영어)라는 단단한 강철이 되어 면도날처럼 날카롭게 갈 수 있다. 두껍게 코팅된 칼등은 천천히 식어 펄라이트(pearlite영어)라는 비교적 부드럽고 유연한 강철이 된다. 점토를 바르고 긁어내는 방법에 따라 하몬(刃紋)이라는 결정 구조의 모양과 특징이 나타난다.[116][117] 이 독특한 담금질 선은 칼날 검사 시 주요 평가 대상 중 하나이다.

칼날에서 하몬까지 형성되는 마텐자이트 강철은 두 종류 강철 사이의 전이선이며, 일본도 강철의 모양, 색상, 아름다움이 드러나는 곳이다. 하몬의 형태와 구조는 칼의 제작 시대, 대장장이, 유파 등을 나타낸다. 또한, 경화된 날은 전투 중 손상이 발생하는 곳으로, 여러 번 갈고 날카롭게 할 수 있지만, 이 과정에서 칼날 모양이 변하며 이는 근접전에서 더 많은 저항을 허용한다.

5. 5. 연마

일본도는 대부분 접철 방식으로 제작되었는데, 이는 금속을 가열하고 접고 두드리는 과정을 반복하는 방식이다. 당시 사용되던 철은 불순물이 많아 일반적인 주조 방식으로는 칼이 쉽게 깨지는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접철 방식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 철의 탄소 함량을 고르게 분배하는 효과가 있었다. 접철 방식은 칼날에 특유의 무늬를 새기는 특징이 있다.

가타나와 와키자시는 일반적으로 다른 특성, 칼날 두께, 연마도로 만들어진다. 와키자시는 히라-주크리 방식으로 제작되거나, 가타나의 길이를 줄여(스리아게) 제작되기도 했다. 일본도는 탄소 성분이 다른 두 종류의 철을 사용했는데, 경강을 U자로 구부려 속에 연강을 넣어 단단하면서도 부러지지 않게 제작했다. 경우에 따라 여러 겹으로 덧대어 만들기도 했다.

다이쇼가 항상 함께 주조된 것은 아니다. 사무라이가 한 쌍의 맞춤식 칼을 구매할 여유가 없을 경우에는 다른 장인이 다른 형식으로 만든 두 자루 칼을 사용했다. 다이쇼가 한 명의 장인에 의해 완성되었다 하더라도 꼭 같이 주조되거나 장식된 것은 아니었다. 다이쇼가 동시에 주조, 장식, 판매, 사용되는 것은 매우 희귀한 예로써 높은 가치를 지녔다.

진품 일본도는 대부분 비싸게 팔린다. 현대식 가타나, 와키자시는 소수의 공인 제작자들에 의해서만 만들어진다. 제2차 세계 대전에 사용되었던 "98식 군도"는 그에 비해 비싸지 않은 편이다. 일본어로 칼집을 사야라고 부른다. 손잡이 보호대는 쓰바라고 부르며, 개별적인 예술품으로 취급된다. 칼의 다른 장식적 측면(메누키, 하바키, 후치, 가시라, 고즈카, 고가이)도 예술품 취급을 받았다.

1876년 폐도령으로 일본도 시장은 사라졌고, 많은 검 제작자들이 직업을 잃었다. 폐도령 이후 제작된 검은 근대도(現代刀, gendaitō)로 분류된다. 미야모토 카네노리(宮本包則), 가산 사다카즈(月山貞一) 등의 노력으로 일본도 제작 기술은 유지될 수 있었다. 사업가 미츠무라 토시모(光村利藻)는 일본도와 장식을 주문하여 기술 보존에 노력했다.

일본도는 경찰 등 일부 직업에서 계속 사용되었다. 검도(剣道)가 경찰 훈련에 통합되어 일본도 사용 훈련을 받게 되었다. 20세기 초, 군인들이 일본도로 무장해야 한다는 것이 재발견되어 검 제작자들은 다시 일자리를 찾았다. 군도(軍刀, guntō)는 기름 담금질을 하거나 강철을 찍어내어 일련 번호를 매겼다. 1934년 일본 정부는 신군도(新軍刀, shin guntō)에 대한 군사 규격을 발표했는데, 첫 번째 버전은 94식 카타나(刀)였으며,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사용된 많은 검은 이후의 신군도 규격을 준수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말 미국의 점령 하에 일본의 모든 군대는 해산되었고, 날카로운 일본도의 생산이 금지되었다. 본마 준지(本間順治) 박사의 호소로 금지는 뒤집혔다.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과의 회의에서 본마는 여러 시대의 일본도 날을 선보였고, 맥아더는 예술적 가치가 있는 일본도를 소유하고 보존할 수 있도록 금지령을 수정했다.

에도 시대 이후, 검 제작자들은 민간 용품 생산으로 전환했다. 점령과 규정은 일본도 생산을 거의 끝내버렸다. 소수의 장인들이 직업을 계속했고, 본마는 일본 미술 도검 보존 협회(日本美術刀剣保存協会)를 창립하여 옛 기술과 칼날을 보존했다.

오늘날, 이아이토(居合刀, iaitō)는 이아이도(居合道)에 사용된다. 현대 미디어의 인기로 전시용 일본도가 널리 퍼져 있다. 작은 편지칼부터 축소 복제 벽걸이 장식까지, 이러한 물품은 스테인리스강으로 만들어지며 무딘 날이나 조잡한 날을 가지고 있다. 고품질 스테인리스강 일본도에 대한 기록도 있지만 매우 드물다.[90] 일부 복제 일본도는 현대의 무장 강도에 사용되었다.[91] 일본 국회의원들이 조직한 일본도 보존 및 홍보 의원 연맹에 따르면, 21세기 현재 전 세계에 유통되는 많은 일본도는 중국에서 만든 가짜 일본식 검이다. 산케이 신문(産經新聞)은 일본 정부가 검 제작자 1인당 연간 24자루의 일본도만 제작하도록 허용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92][93]

일본에서는 진품 수제 일본도는 예술품으로 분류되며, 합법적으로 소유하려면 증명서가 있어야 한다.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일본에는 150만 자루의 일본도가 있었는데, 그중 20만 자루는 메이지 유신 시대에 공장에서 제작된 것이었다. 2008년 현재 일본에는 10만 자루의 일본도만 남아 있다. 일본군 장교들이 소유했던 대도(大刀, daito)(긴 칼)의 70%가 미국으로 수출되거나 반입되었다.[94]

일본도는 6~8명의 장인이 분업하여 제작한다. 도장(刀匠)은 칼날을 제련하고, 도기시(砥師)는 칼날을 연마하며, 킨코시(金工師)는 칼의 금속 장식을, 시로가네시(白銀師)는 하바키(柄卷)를, 사야시(鞘師)는 칼집을, 누리시(塗師)는 칼집에 칠을 하고, 쓰카마키시(柄巻師)는 손잡이를, 쓰바시(鍔師)는 쓰바(鍔)를 만든다.[105][106]

일본도의 특징은 시노기즈쿠리(鎬造り)라는 칼날의 3차원 단면 형태, 칼날과 칼자루(나카고(刀身))가 통합되어 메쿠기(目釘)라는 핀으로 손잡이(쓰카(柄))에 고정되는 방식, 그리고 부드러운 곡선이다. 시노기즈쿠리 칼을 옆에서 보면, 날카로운 쪽과 칼등 사이에 칼날에서 가장 두꺼운 부분의 능선인 시노기(鎬)가 있다. 이 시노기는 칼날의 경량화와 강화, 그리고 높은 절삭력에 기여한다.[107]

일본도는 종종 다른 형태, 칼날 두께, 그리고 다양한 연마량으로 제련되었다. 와키자시(脇差)와 단토(短刀)는 히라즈쿠리(平造り)라는 형태로 제련되었다.[107]

일본 칼날의 제련에는 몇 주 또는 몇 달이 걸렸으며, 신성한 예술로 여겨졌다.[108] 대장장이는 대략적인 형태를 제련하고, 견습생은 금속을 접는 작업을 했다. 전문 연마사(토기(砥ぎ))와 여러 장인들이 칼날과 장식을 만들었다. 칼날의 연마 및 광택 과정은 칼날 제련 자체만큼이나 오랜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정통 일본도는 일본 강철인 "타마하가네(玉鋼)"로 만들어진다.[109] 일본도 칼날은 단단한 외피 강철이 부드러운 내부 강철 코어를 감싸는 방식으로 만들어진다.[110] 칼날의 외피를 위한 하다가네(肌鋼)는 원강철 블록을 가열, 펴기, 식히기, 작은 블록으로 부수기, 재조립, 재련 등의 과정을 거친다. 강철 빌릿을 가열하고 두들겨서 분할하고 여러 번 접어서 다시 용접하여 수천 개의 층으로 구성된 복잡한 구조를 만든다. 강철을 접고, 두들기고, 다시 용접하는 방법은 칼날의 독특한 결 무늬인 지하다(地肌)를 결정하며, 이는 칼날의 제작 시대, 장소, 제작자를 나타내는 특징이다.

신가네(芯鋼, 칼날의 내부 코어)는 하다가네보다 탄소 함량이 낮은 부드러운 강철이다. 하다가네와 유사한 방식으로 두들기고 접고 용접하지만, 접는 횟수는 적다. 하다가네 블록을 ‘U’자 모양으로 접고, 신가네를 삽입한다. 복합 강철 빌릿을 가열하고 두들겨서 최종 칼날의 크기와 모양에 가깝게 만든다. 막대 끝에서 삼각형 부분을 잘라내어 키사키(キスサキ, 칼끝)를 만든다.

스노베는 부분적으로 가열하고 두들겨서 칼등(무네(棟)), 날(하(刃)), 칼끝(키사키(鋒)), 날(하마치(刃磨))과 칼등(무네마치(棟磨))에 있는 홈 등 칼날의 특징을 만든다. 대장장이의 기술로 칼날에 위쪽 곡률을 준다. 스노베는 파일링과 스크래핑 과정을 거쳐 거친 상태로 경화 과정을 준비한다. 스노베 전체에 점토 혼합물을 바르는데, 칼등과 측면에는 날보다 두껍게 바른다.

야키이레(焼き入れ, 단련)는 어두운 대장간에서 밤에 이루어지며, 대장장이는 눈으로 칼의 색깔과 온도를 판단한다. 칼날을 물탱크에 담근다. 칼을 가열하는 시간, 칼날의 온도, 물의 온도는 대장장이에 따라 다르며, 비밀로 유지되어 왔다.

칼날에 두께가 다른 점토를 바르면 물탱크에 담글 때 날을 따라 강철이 더 빠르게 식어 마르텐사이트라는 단단한 강철로 발전하여 날카롭게 갈 수 있다. 두껍게 코팅된 칼등은 천천히 식어 부드럽고 유연한 펄라이트(펄라이트) 강철 특성을 유지한다. 점토를 바르는 방법과 날 부분에서 긁어내는 것은 하몬(刃紋)이라고 하는 결정 구조의 모양과 특징을 형성하는 요소이다.

칼날의 날에서 하몬까지 형성되는 마르텐사이트 강철은 두 가지 강철 사이의 전이선이며, 일본도 강철의 모양, 색상, 아름다움이 발견되는 곳이다. 하몬의 형태와 구조의 변화는 칼의 제작 시대, 대장장이, 학교, 장소를 나타낸다.

거의 모든 칼날은 장식되어 있지만, 모든 칼날이 보이는 부분에 장식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칼날이 식고 진흙을 긁어낸 후에는 홈과 표시(히(樋) 또는 보히(棒樋))를 새길 수 있다. 칼날에서 가장 중요한 표시 중 하나는 파일 표시이다. 이것은 칼날의 칼자루 부분에 새겨진다. 칼자루는 절대로 청소해서는 안 된다.

칼날의 다른 표시는 한자로 된 헌정과 신, 용 등을 묘사하는 호리모노(彫物, 조각)가 있다. 홈(히(樋))은 칼의 무게를 줄이지만 구조적 무결성과 강도는 유지된다.

; 흙 얹기

: 평지용, 날문용(刃文用), 능지용의 3종류의 구장토(焼場土)를 칼날에 얹는 「흙 얹기(土置き)」를 한다. 평지에 평지용 구장토를 얇게 바르고, 날문에 붓으로 날문용 구장토를 그린다. 날문에서 능선까지 능지용 구장토를 두껍게 얹는다. 능지의 구장토를 두껍게 하여 담금질 시 급랭할 때 날쪽은 빠르게 식고, 능선쪽은 완만하게 식는다. 날문 부분에만 흙을 얹고, 흙을 얹은 부분의 기포 발생을 억제하여 날끝만을 급랭시키고, 능선 부분은 자연 발생하는 기포로 완만하게 냉각하는 방법이나, 흙을 얹지 않고 날이 얇아진 부분이 먼저 식는 것을 이용한 담금질 방법 등도 있다. 열처리에 의해 부피가 팽창하면서 단단해지고, 일본도 특유의 날쪽이 튀어나온 곡선을 만든다. 능선쪽은 팽창이 적고 경도보다 인성이 풍부한 강이 되어 단단하지만 약한 날쪽의 강을 지지한다.

; 담금질(焼入れ)

: 일본도 장인은 담금질 시 작업장의 조명을 어둡게 하여, 강의 온도를 광량으로 판단한다. 흙을 얹은 칼날을 화로에 깊이 넣고, 끝에서부터 뿌리까지 전체를 고르게 약 800℃까지 가열한다. 가열 온도는 중요하며, 최적의 가열 상태를 판단하고, 칼날을 수조에 담가 급랭시킨다. 칼날은 물속에서 휨이 생기고, 충분히 냉각한 후에 들어 올려져, 거친 숫돌로 갈리고 담금질된 날이 확인된다. 창이나 칼 등의 양날 형태의 경우에는 다락로(田楽炉)라는 전용 화로를 사용한다.

: 담금질에 의해, 칼의 표면에는 마르텐사이트라고 불리는 매우 단단한 조직이 나타난다. 마르텐사이트의 생성 상태에 따라, 육안으로 지철의 표면에 날문이 둥근 입자 모양으로 보이는 것을 니에(錵/沸)라고 부르고, 입자가 구별되지 않고 고운 흰색 선 모양으로 보이는 것을 니오이(匂い)라고 구별한다.

냉각수의 온도는 섭씨 10도에서 30도 정도, 기름의 경우는 60도에서 80도 정도이다.

: 일본도의 경우 전쟁 중의 군도 등에서 기름으로 담금질을 했지만, 현재는 기름으로 일본도에 담금질을 하는 것은 적다. 기름으로 담금질을 하면 급랭하지 않으므로 날이 부러지는 등의 실패는 적지만, 물 담금질보다 유연성 있는 강 조직이 되는 경우가 많다. 니오이(匂い)가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냉각제의 교반 정도에 따라서는 기름 담금질로 물 담금질보다 단단하게 구울 수 있다. 날카로움은 별개로 하더라도, 기름 담금질은 날문에 광택을 내지 못하고 미술 공예품을 지향하는 현대도에는 부적합하다고 여겨진다.[178] 문부과학성이 정하는 현대 일본도의 정의는 물 담금질이므로, 기름 담금질은 총포도검법 위반이 된다.

; 맞추기(合い取り)

: 뜨임(焼戻し) 공정으로, 화로의 불 위에서 칼날을 약 150도 정도로 가열한다. 담금질로 조성 변화한 강을 안정화시키고, 인성 등이 강화되어 날이 깨지는 것을 방지한다. 휨은 가로 방향으로도 약간 생기므로 나무 받침대로 작은 망치를 사용하여 수정한다. 자루(なかご)도 뜨임을 하여 모양을 다듬는다.

가열한 구리 덩어리로 칼날을 끼우고, 능선 담금질을 하는 등의 작업을 하는 경우도 있다.

5. 6. 장인 분업

일본도는 보통 6~8명의 장인이 분업하여 제작한다.[105][106] 각 장인은 다음과 같은 부분을 담당한다.

장인역할설명
도장(刀匠)칼날 제작도코(刀工) 또는 가타나카지(刀鍛冶)라고도 불리며, 칼날을 제련한다. 견습 대장장이들을 조수로 둔다.
도기시(砥師)칼날 연마칼날을 연마한다.
킨코시(金工師)금속 장식초킨시(彫金師)라고도 불리며 칼의 금속 장식을 만든다. 현대에는 시로가네시와 쓰바시의 역할을 겸하는 경우도 있다.
시로가네시(白銀師)하바키 제작칼날 목가리(하바키)를 만든다.
사야시(鞘師)칼집 제작칼집을 만든다.
누리시(塗師)칼집 옻칠칼집에 옻칠을 한다.
쓰카마키시(柄巻師)손잡이 제작손잡이에 끈을 감는다.
쓰바시(鍔師)쓰바 제작손잡이 가드(쓰바)를 만든다.



무로마치 시대 이전에는 도장과 무기 제작자(甲冑師)가 남는 금속으로 쓰바를 만들었지만, 무로마치 시대 이후부터는 전문 장인이 쓰바 제작을 맡기 시작했다.[105][106] 현재는 킨코시가 시로가네시와 쓰바시의 역할을 겸하는 경우도 있다.[105][106]

칼 제작자가 모든 작업을 완료하면, 연사(硏師)에 의해 최종적인 연마가 이루어진다.[123] 무로마치 시대 이전에는 칼 제작자가 직접 연마를 했다고 한다. 일본도는 칼 제작자뿐만 아니라 연마사, 칼집 제작자, 도장사, 칠기 장인, 금속 세공사, 은세공사 등의 장인들이 협력하여 완성하는 종합 예술품이다.[123]

6. 일본도의 해부학적 구조

일본도는 본체인 칼날과 외장품인 코시라에(拵え) 로 나뉜다. 코시라에는 칼집(さや), 손잡이(つか), 츠바(鍔, つば) (손잡이 가드) 등의 부분으로 구성된다. 칼날을 제외한 모든 부분은 조립식으로, 각자의 취향에 맞춰 자유롭게 교체할 수 있다. (수백 년 전의 오래된 칼에 새로운 코시라에를 장착하는 경우도 있다.)

특히 에도 시대부터는 칠공예와 금속 세공 기술이 발달하면서 장식이 화려해졌다. 칼날에는 정교한 조각이 새겨지고, 칼집에는 마키에가 사용되었다. 메누키(目貫), 코가이(笄), 코즈카(小柄)의 세 가지 금속 장식은 '삼소물(三所物)'이라 불리며 같은 무늬로 장식되어 더욱 정교해졌다.[179]

다음 표는 일본도 각 부분의 명칭과 설명을 나타낸다.

명칭설명
카시라(頭)손잡이 머리 장식
상어가죽(鮫皮)손잡이를 감싸는 가죽
츠카이토(柄糸) / 츠카마키(柄巻)손잡이를 감는 끈
메쿠기(目釘)칼날과 손잡이를 고정하는 못
나카고(茎)칼날의 손잡이 속 부분
츠카(柄)손잡이
메누키(目貫)손잡이 장식
후치(縁)손잡이 테두리 장식
츠바(鍔)손잡이 가드
셋파(切羽)칼날과 츠바 사이의 와셔
하바키(鎺)칼날과 츠바를 고정하는 쐐기
무네(棟)칼날의 등 부분
하몬(刃文)칼날의 무늬
히(樋)칼날의 홈
나가사(長さ)칼날의 길이
소리(反り)칼날의 휨 정도
시노기(鎬)칼날의 능선
시노기지(鎬地)능선 부분
(地) / 히라지(平地)칼날의 평평한 부분
(刃)칼날
요코테(横手)칼날과 칼끝의 경계선
킷사키(切先)칼끝
머리 금속 장식(かしらがね)손잡이 머리 부분의 금속 장식
감개 고정 장식(まきどめ)손잡이 끈을 고정하는 장식
코이구치(鯉口)칼집 입구
쿠리카타(栗形)칼집 끈을 묶는 돌기
시토도메(鵐目)쿠리카타의 구멍 장식
사게오(下げ緒)칼집 끈
사야(鞘)칼집
코지리(鐺)칼집 끝부분
모노우치(物打)칼날의 중간 부분
하사키(刃先)칼날 끝
칼집 끝 장식(ぼうし)칼집 끝의 장식



새우 장식을 한 코지리


사야(鞘)는 칼날이 긁히지 않도록 부드러운 목련(ほお) 나무를 사용하며, 가공 후 휘어짐을 방지하기 위해 10년 이상 건조시킨다. 칼날을 꽂는 쪽을 코이구치(鯉口), 반대쪽을 코지리(鐺)라고 부른다. 코지리 끝에는 코지가네(鐺金具)라는 보호구가 부착될 수 있다. 허리에 칼을 찰 때 사야가 몸에 닿는 쪽을 '사시우라'(さしうら), 바깥쪽을 '사시오모테'(さしおもて)라고 부른다.[180] 사시오모테에는 쿠리카타(栗形)라는 장치가 있어 사게오(下げ緒)를 꿰어 허리띠에서 빠지는 것을 방지한다. 또한 카에리즈노(かえりづの)라는 돌출 부품이 부착되는 경우도 있으며, 칼을 뽑을 때 사야째로 빠지지 않도록 이 부분을 허리띠에 걸어둔다. 코가이(笄)를 보관하기 위해 사야의 코이구치 근처에 코가이비츠(こうがいびつ)라는 홈이 만들어지기도 한다.[181]

사야는 도장 등의 가공이 끝나면 내부 청소가 어려워진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이리코자야'(いりこざや)라는 2개로 분리 가능한 구조를 사용하기도 한다.

에도 시대 후기에는 목련 나무를 백목 그대로 마감하여 칼날이 녹슬기 어렵고 내부 청소가 용이한 시라사야(しらさや)가 탄생했다. 이에 따라 코시라에는 외출용, 시라사야는 가정 보관용으로 용도에 따라 구분되었다.

엄지손가락으로 츠바(鍔)를 잡고 사야에서 조금 밀어내는 동작을 "코이구치를 자른다"라고 한다.

6. 1. 칼날

일본도 날의 부분을 표기한 그림


일본도 칼날은 고유한 형태를 가지는데, 이는 주로 검 제작자와 제작 방식에 따라 달라진다. 가장 두드러진 부분은 중앙의 능선인 시노기(鎬)이다. 위 그림의 예시에서는 시노기(鎬)까지 평평하게 이어지다가 날 끝으로 갈수록 가늘어지는 형태이다. 하지만 시노기(鎬)까지 가늘어지다가 날 끝으로 갈수록 더 가늘어지는 형태, 또는 시노기(鎬)쪽으로 넓어졌다가 날 끝으로 갈수록 가늘어지는 형태(사다리꼴 형태)도 있다. 평평하거나 가늘어지는 시노기(鎬)는 시노기-히쿠시(鎬弱), 평평한 날은 시노기-타쿠시(鎬強)라고 한다.

시노기(鎬)는 날의 뒷부분 가까이에 위치하여 더 길고 날카롭지만 잘 부러지는 끝을 만들거나, 날의 중앙 가까이에 더 완만한 시노기(鎬)를 만들 수 있다.

일본도는 또한 매우 중요한 특징으로 여겨지는 정확한 끝 모양을 가지는데, 끝은 길다(ōkissaki(大来崎)), 중간이다(chūkissaki(中来崎)), 짧다(kokissaki(小来崎)), 심지어 뒤로 구부러져 있다(ikuri-ōkissaki(郁里大来崎)) 등으로 나뉜다. 또한, 끝의 앞쪽 가장자리가 더 굽었는지(fukura-tsuku(膨つく)), (상대적으로) 직선인지(fukura-kareru(膨減る))도 중요하다.

kissaki(茎)(끝)는 보통 "끌" 모양의 끝이 아니며, 서양식 나이프에서 해석하는 "탄토(tantō) 끝"은 진정한 일본도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직선으로 경사진 끝은 갈기 쉽다는 장점이 있지만, 전통적인 일본식 kissaki(茎) Fukura(끝의 날 부분 곡률) 유형에 비해 찌르는/관통하는 능력이 떨어진다. Kissaki(茎)는 보통 곡선 형태이며, 가장자리쪽으로 매끄러운 3차원 곡률을 가지고 있지만, ''yokote(横手)''라고 하는 직선으로 경계를 이루고 모든 가장자리에 선명한 정의를 가지고 있다. "아메리칸 탄토"의 직선형 끝은 전통적인 일본식 fukura(膨)와 동일하지만, 두 가지 특징이 일본도와 구분된다. 현대 도구로만 가능한 절대적인 곡선의 부재와 서양식 명칭에서 "탄토(tanto)"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단지 칼이나 단검을 의미하는 일본어를 언급하는 것일 뿐, 끝의 스타일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끌 모양" kissaki(茎)는 일본에서 유래했다. 그러한 예는 간잔 사토(Kanzan Sato)의 저서 ''일본도(The Japanese Sword)''에 나와 있다. 미국 검 제작자들이 이 디자인을 광범위하게 사용하기 때문에 이 디자인이 미국에서 유래했다는 오해가 흔하다.

손잡이 nakago(茎)에는 mekugi-ana(目釘穴)라고 하는 구멍이 뚫려 있다. 이것은 작은 대나무 핀인 mekugi(目釘)를 사용하여 날을 고정하는 데 사용되는데, 이 핀은 손잡이 tsuka(柄)의 다른 구멍과 mekugi-ana(目釘穴)를 통과하여 삽입되어 날이 빠지는 것을 방지한다. 손잡이를 제거하려면 mekugi(目釘)를 제거한다. 검 제작자의 서명인 mei(銘)는 손잡이에 새겨져 있다.[4]

6. 2. 칼의 장식(코시라에)

일본도의 명칭


도검 장식. 18세기 또는 19세기에 이시구로 마사요시(石黒正慶)가 만든 츠바(鍔) (왼쪽 위)와 후치가시라(縁頭) (오른쪽 위). 18세기 에도 시대(江戸時代)에 야나가와 나오마사(柳川直正)가 만든 코가이(笄) (중간)와 코즈카(小柄) (아래). 도쿄 후지 미술관(東京富士美術館).


다이쇼(大小) 형태의 고대 코시라에(拵), 카타나(刀)(위), 와키자시(脇差)(아래). 19세기, 에도 시대. 도쿄 국립박물관.


1300년경 노리시게(則重) 작 타치(太刀). 에도 시대에 오스리아게(大摺上) 방식으로 카타나로 개조되었다.


일본어로 칼집은 사야(鞘, saya)라고 하며, 손잡이 보호대인 츠바(鍔, tsuba)는 특히 에도 시대(江戸時代) 후기에 개별 예술 작품으로 정교하게 디자인된 경우가 많았다. 다른 장식 부분들(코시라에, koshirae, 拵)인 메누키(目貫, menuki) (손잡이 장식), 하바키(鎺, habaki) (칼날 칼깃과 칼집 쐐기), 후치(縁, fuchi)와 카시라(頭, kashira) (손잡이 칼깃과 마개), 코즈카(小柄, kozuka) (작은 실용적인 칼 손잡이), 코가이(笄, kogai) (장식적인 꼬챙이 모양의 도구), 사야(saya, 鞘)의 칠, 그리고 츠카이토(柄糸, tsuka-ito) 또는 츠카마키(柄巻, tsukamaki) (전문적인 손잡이 감개) 등도 비슷한 수준의 예술성을 보여준다.

일본도는 우선 본체인 '''칼날'''과 그 외장품인 '''코시라에(拵え)'''로 나뉘며, 코시라에는 '''칼집(さや)''', '''손잡이(つか)''', '''츠바(鍔, つば)'''의 각 부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칼날을 제외하고 완전 조립식으로 되어 있으며, 코시라에는 각자의 취향에 맞춰 자유롭게 커스터마이즈할 수 있다(수백 년 전의 고도에 새 코시라에를 한 것도 있다). 외장품인 각 부위의 도장구의 대략적인 위치와 형태는 오른쪽 그림을 참조. 특히 에도 시대부터는 칠공예와 금속 세공 기술의 발달과 함께 장식이 화려해졌고, 칼날에는 호화로운 조각이 새겨지고, 칼집에는 마키에가 베풀어졌으며, 도장구 중 특히 메누키, 코가이, 코즈카의 3점 세트 금구는 「삼소물(三所物)」이라 불리며 같은 무늬로 장식되어, 더욱 정교한 세공이 베풀어지게 되었다.[179]

명칭설명
카시라(頭)손잡이 머리 장식
상어가죽(鮫皮)손잡이를 감싸는 가죽
츠카이토(柄糸) / 츠카마키(柄巻)손잡이를 감는 끈
메쿠기(目釘)칼날과 손잡이를 고정하는 못
나카고(茎)칼날의 손잡이 속 부분
츠카(柄)손잡이
메누키(目貫)손잡이 장식
후치(縁)손잡이 테두리 장식
츠바(鍔)손잡이 가드
셋파(切羽)칼날과 츠바 사이의 와셔
하바키(鎺)칼날과 츠바를 고정하는 쐐기
무네(棟)칼날의 등 부분
하몬(刃文)칼날의 무늬
히(樋)칼날의 홈
나가사(長さ)칼날의 길이
소리(反り)칼날의 휨 정도
시노기(鎬)칼날의 능선
시노기지(鎬地)능선 부분
(地) / 히라지(平地)칼날의 평평한 부분
(刃)칼날
요코테(横手)칼날과 칼끝의 경계선
킷사키(切先)칼끝
머리 금속 장식(かしらがね)손잡이 머리 부분의 금속 장식
감개 고정 장식(まきどめ)손잡이 끈을 고정하는 장식
코이구치(鯉口)칼집 입구
쿠리카타(栗形)칼집 끈을 묶는 돌기
시토도메(鵐目)쿠리카타의 구멍 장식
사게오(下げ緒)칼집 끈
사야(鞘)칼집
코지리(鐺)칼집 끝부분
모노우치(物打)칼날의 중간 부분
하사키(刃先)칼날 끝
칼집 끝 장식(ぼうし)칼집 끝의 장식



사야(さや)는 칼날에 긁힘이 생기지 않도록 부드러운 목련(ほお)나무를 사용하며, 가공 후 휘어짐을 방지하기 위해 10년 이상 건조시켜 사용한다. 칼날을 꽂는 쪽을 “코이구치(こいくち)”, 반대쪽을 “코지리(こじり) 또는 코지리(鐺)”라고 부른다. 코지리 끝에는 코지가네(鐺金具)라고 불리는 보호구가 부착될 수 있다. 허리에 칼을 차면 사야가 몸에 닿는 쪽을 “사시우라”(さしうら), 바깥쪽을 “사시오모테”(さしおもて)라고 부른다.[180] 사시오모테의 허리 부분에는 각 또는 금속으로 된 “쿠리카타(くりがた)”라고 불리는 장치가 있어, 여기에 사게오(さげお)를 꿰어 허리띠로부터 빠지는 것을 방지한다. 또한 쿠리카타의 코지리보다 “카에리즈노(かえりづの)”, “사카즈노”(さかづの), “오리가네”(おりがね)라고 불리는 돌출 부품이 부착되는 경우도 있으며, 칼을 뽑을 때 사야째로 빠지지 않도록 이 부분을 허리띠에 걸어둔다. 더불어 “코우가이(こうがい)”라고 하는 작은 주걱 모양의 장신구(머리 손질 등에 사용)를 보관하기 위해 주로 사야의 코이구치 근처의 지표에 “코우가이비츠”(こうがいびつ)라고 불리는 홈이 만들어지기도 한다.[181]

사야는 도장 등의 가공이 끝나면 내부의 오염을 제거하기 어려워진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사야 내부에 작은 사야를 넣은 “이리코자야”(いりこざや)라고 불리는 것이 있으며, 2개로 분리 가능한 구조를 하고 있다.

에도 시대 후기에는 목련나무를 백목 그대로 마감하여 칼날이 녹슬기 어렵고 사야 내부 청소가 용이한 구조로 되어 있어 보관 및 보호에 적합한 사야인 “시라사야(しらさや)”가 탄생했다. 그에 따라 코시라에는 외출용, 시라사야는 가정에서의 보관용으로 용도에 따른 사야의 사용이 구분되었다.

엄지손가락으로 츠바(鍔)를 잡고 사야에서 조금 밀어내는 동작을 “코이구치를 자른다”라고 한다.

7. 일본도의 문화적, 사회적 의의



일본도는 단순한 무기를 넘어 일본 사회에서 문화적, 사회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천황이나 무사의 권위를 상징하고, 신앙의 대상이자 미술 공예품으로도 여겨졌다.[129] 현대에는 주로 미술 공예품이나 문화재로 취급된다.[129]

일본 역사에서 유명한 일본도와 도공은 시대별 권력자나 권위자에 의해 책에 정리되거나 등급이 매겨졌다. 도쿠가와 요시무네가 편찬한 교호명물장에 기록된 미술적 가치가 높고 내력이 있는 다이묘 소유의 귀중한 도검은 '명물'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3] 야마다 아사우에몬이 간행한 「회보검척」, 「고금단치비고」에 실린 날카로운 칼날을 가진 도공의 도검은 '업물' 등으로 등급이 매겨졌다.

유명한 일본도에는 일본 국보인 대포평, 뢰절,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애도 일기일진, 천하오검이라 불리는 5자루의 명도(국보 동자절, 삼일월종근, 대전태, 중요문화재 주주환, 어물 귀환) 등이 있다. 유명한 도공으로는 마사무네, 아와타구치 요시미츠, 향의홍, 무라마사, 나가소네 고우리(초대 코테츠), 겐 세이마로 등이 있다.

일본도는 도공 유파에 따라 분류되기도 한다. 오가전이라 불리는 5대 도공 유파는 야마토국의 야마토전, 야마시로국의 야마시로전, 비젠국의 비젠전, 사가미국의 소슈전, 미노국의 미노전이다. 각 유파는 다시 세분화된다.[130]

일본도가 귀하게 여겨진 결과, 도공에게는 궁정에서 공식적인 관위가 주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13세기 초 고토바 상황이 자신의 어번단지에 관위를 준 것이 시작으로 여겨진다.[130] 에도 시대 이전에는 센코 무라마사(5위를 나타내는 "후지와라 아소무라 마사" 사용), 비젠 나가후네 카츠미츠(우쿄료), 비젠 나가후네 야스미츠(사쿄료), 비젠 나가후네 모리미츠(수리료), 오다 노부나가의 부하 대장장이 무쓰노카미 다이도 등이 귀족에 서작된 명공으로 알려져 있다.[130] 에도 시대에는 이가노카미 킨도가 "일본 단지 총장"으로 도공에 대한 수령명 알선을 제도화했다.[130]

중세 일본도는 평시 싸움, 강도, 호신 등에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무기였으며,[131] 승려 등 비무사 계층도 칼을 차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132] 합전에서도 궁술이나 장병기의 보조적인 위치로 사용되었지만, 일본도로 한 경우 일번태도나 "태도의 공명"이라 하여 창이 보급되기 전까지는 제일의 훈공으로 여겨졌다.[133][134]

메이지 시대 이후 일본 정부는 일본도를 가치에 따라 국보, 중요문화재, 중요미술품으로 지정 및 인정하고, 도공의 기량에 따라 제실기예원(1890-1947)이나 인간국보(1955-)로 지정했다. 2020년 기준 일본에는 약 250만 점의 일본도가 있으며, 그 중 약 120점이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도쿄국립박물관이 19점으로 가장 많은 국보 일본도를 소장하고 있으며, 도쿠가와미술관과 후쿠야마미술관이 각각 7점으로 2위이다.[135]

일본미술도검보존협회는 일본도, 도장, 도장구에 대한 감정 심사를 통해 4등급을 매기고 있으며, 최상급인 "특별중요도검"은 중요문화재에 준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동 협회는 현대도직전의 결과에 따라 2019년까지 39명의 도공을 최고위인 "무감사"로 인정하고 있다. 무감사가 만든 도검 중 뛰어난 것에는 마사무네상이 수여되며, 2019년까지 총 15명(실제 8명)이 수상했다.[136][137]

'일본도'라는 명칭은 일본 국외 도검과 구별하기 위한 것이다. 국외에서는 11세기 초 중국 문헌(오양수의 「일본도가」)에서 이미 그 명칭이 확인된다.[138] 일본 국내에서는 막말 이후 해외 문화가 유입되면서 '일본도'라는 용어가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 이전에는 '카타나', '츠루기', '타치' 등 세분된 명칭으로 불렀다. '목도', '죽도', '모의도'와 대비하여 '진검'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아시아에서는 '왜도'라는 명칭이 있었지만, 현지에서 일본도를 본떠 만든 것을 가리키는 경우도 많다. 현대 한문권에서는 ''를 피해 '화도(和刀)'라고 표기하기도 한다. 구미에서는 'Japanese sword', 'katana' 등으로 불린다. 일본미술도검보존협회 도검박물관의 공식 번역은 'The Japanese Sword Museum'이다. 상징적인 의미로 'Samurai sword'라는 호칭도 있지만, 현대에는 일본도를 본떠 만든 칼(모조도)에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139][140]

7. 1. 종교, 명예, 신화

일본도의 특징은 곡선인데, 이 일본도의 기원은 일본 동북지방에 살던 에미시(蝦夷)가 사용하던 곡선있는 칼 케누키가타와라비테토(毛抜形蕨手刀)이다. 문화의 많은 부분은 칼과 연계되어 있다. 칼을 차고 다니는 법, 청소하는 법, 보관하는 법, 날을 세우는 법(혹은 무디는 법), 칼을 쥐는 법 등이 시대를 따라 진화했다. 예를 들어, 남의 집에 들어가는 사무라이는 그가 정좌할 때 칼집에 넣은 칼을 어떻게 보관해야 할 것인지를 고려해야 한다. 그의 칼을 쉽게 뽑을 수 있는 위치에 놓는 것은 의심과 적대감을 불러 일으켰다. 따라서, 그가 왼편이든 오른편이든 간에 날이 자신을 향하게 칼을 놓거나 완만하게 기울어진 위치에 칼을 놓는 것은 중요한 에티켓으로 간주되었다.[40][41] 자신의 집에서는, 가타나 진열대의 와키자시 윗 자리에 가타나의 날이 위를 향하도록 올려 놓았다. 칼을 차고 다닐 때와 마찬가지로, 손잡이는 항상 보는 입장에서 왼쪽을 향하도록 놓였다. 칼을 세워 놓을 때는 손잡이를 밑으로 향하게 하고 칼집을 위로 향하게 하여 세워 놓았다.

에도 시대가 되기 전까지는 사무라이들은 칼을 주무장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그들은 을 제일 먼저 사용했고, 그 다음 을 사용했고, 마지막으로 칼을 사용했다. 전해져오는 속담인 "부러진 칼과 빈 화살통"은 그들이 활용 가능한 모든 무기를 이용해서 싸웠음을 시사한다.

센고쿠 시대를 거치면서 칼의 급격한 발달이 이뤄지게 되었는데, 전국 시대까지만 해도 칼은 무사들의 다양한 무기들 중 하나일 뿐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 에도 시대가 되면서 검술이 도장을 통한 자기수양이나 신분상승을 위한 형태로 바뀌어감에 따라 일종의 정신 문화로서 자리 잡아가게 된다.

그러면서 점차 칼은 사무라이의 정신으로 여겨졌다. 전국 시대 말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집권 중에 시행한 가타나가리(刀狩り)를 통해 오직 사무라이만이 칼을 차고 다니도록 하고 그 외에 농민 같은 사람들로부터 칼을 몰수하여 병농분리가 행해졌다.

특별한 선물로 사용하기 위해 잘 보관해 두는 것이 관례였다. 이런 칼들은 주로 쇼군이 자신의 총애를 표시하기 위해 선물했다.

다만 닌자의 경우 사무라이와 상호고용상태 또는 대등한 상태이기 때문에 사무라이와 마찬가지로 일본도를 소지하는 것이 가능했다. 하지만 닌자들은 사무라이용 일본도처럼 날이 휘어진 일본도가 아니라 날이 일직선으로 곧게 뻗은 닌자 전용 일본도를 사용했다.

"카타나(katana)"라는 단어는 고대 일본에서 사용되었으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반면 "니혼토(nihontō)"라는 단어의 옛 용법은 송나라 시인 오양수(歐陽修)의 시, 「니혼토가(Nihontō)」에서 찾아볼 수 있다.[2]

"명품(meibutsu)"은 18세기의 "교호명품장(Kyoho Meibutsucho)"이라는 편찬물에 등재된 검 명작에 부여된 특별한 명칭이다. 등재된 검들은 여러 다른 지방의 고토(Koto) 검이며, 166자루 중 100자루가 현재까지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소슈(Sōshū) 검이 매우 많이 등재되어 있다. "교호명품장(Kyoho Meibutsucho)"에는 요시미츠(Yoshimitsu), 마사무네(Masamune), 요시히로(Yoshihiro), 사다무네(Sadamune) 등의 검을 포함하여 명품(Meibutsu)의 별칭, 가격, 역사, 길이가 기록되어 있으며, 이들 검은 매우 높은 가격으로 평가되었다.[3]

미술관(Museum of Fine Arts)은 장인이 새로 제작한 칼을 차가운 물에 담글 때, 그의 정신의 일부가 칼에 전달된다고 말한다. 그 당시 그의 정신, 도덕성, 마음가짐은 칼의 도덕적, 물리적 특징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99]

고훈 시대(250~538년)에는 일본 사회에 아님주의(Animism)가 도입되었다. 아님주의는 모든 생명체에 신성한 영혼이 담겨 있거나 연결되어 있다는 믿음이다. 이러한 정령 세계와의 연결은 불교가 일본에 전래되기 이전부터 존재했다. 이 시기에 중국은 한국 반도의 강철 검을 갈망했다. 일본은 이를 국가 안보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고 군사 기술을 개발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 결과, 씨족 지도자들이 군사 엘리트로 권력을 장악하고, 권력과 영토를 놓고 서로 싸웠다. 지배적인 인물들이 권력을 잡으면서 충성심과 봉사가 일본 생활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고, 이는 종종 일본인과 관련된 명예 문화의 촉매제가 되었다.

에도 시대(1603~1868년)에는 칼이 무사의 무장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일상생활에서 중요성을 얻었다. 에도 시대에는 칼이 다이묘(大名)와 사무라이(侍) 사이의 유대를 맺는 수단이 되었다. 다이묘는 사무라이에게 그들의 공로에 대한 표시로 칼을 선물했고, 사무라이는 존경의 표시로 다이묘에게 칼을 선물했으며, 대부분의 다이묘는 이 칼을 가보로 간직했다. 이 시대에는 칼이 다기능적이라고 믿었는데, 정신적으로는 군사적 업적의 증거를 나타내고, 실제로는 귀중한 전쟁 무기이자 외교 선물이었다.

에도 시대의 평화로 인해 칼에 대한 수요가 감소했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1719년 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徳川吉宗)는 "가장 유명한 칼" 목록을 작성했다. 마사무네, 아와타구치 요시미츠, 고 요시히로는 "3대 명장(三名工)"으로 불리게 되었고, 그들의 칼은 다이묘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이러한 지위 상징에 대한 명성과 수요가 높아짐에 따라 이러한 명품의 가격이 급등했다.

메이지 시대(1868~1912년)에는 외세가 일본에 국제 무역을 개방할 것을 요구함에 따라 사무라이 계급이 해체되었다. 300년 동안 이어진 일본의 쇄국이 끝을 맺은 것이다. 1869년과 1873년에 정부에 칼 착용 관습을 폐지해야 한다는 두 건의 청원이 제출되었는데, 사람들은 외국이 칼을 "유혈 사건을 위한 도구"로 보고 일본인을 폭력적인 사람들로 연상할까 우려했기 때문이다. 폐도령(廃刀令, 1876년)은 군인과 정부 관리를 제외하고는 공개적으로 칼을 차는 것을 금지했으며, 칼은 사회에서 그 의미를 잃었다.

일본도의 기원과 사회에 미친 영향과 그 효과는 어떤 이야기를 따르느냐에 따라 다르다.

  • 칼과 무사는 일본 문화의 신도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신도는 "신들의 길"을 의미하며, 세상의 모든 요소에는 신과 같은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한다.[101] 신도는 자기 정화, 조상 숭배, 자연 숭배 및 천황의 신성을 지지한다. 칼은 지혜의 원천이며 사용자에게 영감을 주는 "에너지를 발산한다"고 한다. 신도가 일본의 팽창주의와 국제 관계의 발전을 형성한 것처럼, 칼 또한 변화의 수단이 되었다.[102]
  • 일본 전설에 따르면, 거울과 보석과 함께 칼은 3종의 신기 중 하나를 이룬다. 3종의 신기는 모든 훌륭한 황제가 천상의 권위를 가진 지도자로서 가져야 할 세 가지 가치와 성격적 특징을 나타낸다.[103]
  • 일본 신화는 칼을 "진리의 상징"이자 "미덕의 표시"라고 말한다. 전설에 따르면 아마테라스와 그의 남동생 스사노오노미코토(스사노) 사이의 싸움에서 유래한다. 아마테라스는 스사노를 물리치기 위해 열 자 길이의 칼을 쪼개어 자신을 세 조각으로 나눴다. 전설에 따르면 칼은 사물을 두 개 이상으로 자르고 조각의 모양과 크기를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회 질서를 부과함으로써 통합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한다.
  • 신화는 또한 짐무 천황이 군대를 이끌고 땅을 지나갈 때, 신이 독가스로 그들의 길을 막아 무기한 수면 상태에 빠지게 했다고 한다. 이를 본 아마테라스는 천둥의 신에게 그 신을 벌하고 황제가 진행할 수 있도록 간청했다. 천둥의 신은 그녀의 명령을 따르는 대신, 황제에게 땅을 진압할 칼을 보냈다. 황제는 칼을 받자 군대와 함께 깨어나 임무를 계속했다. 이 전설에 따르면 칼은 필요할 때 황실(신성한) 혈통을 구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 무술 훈련에서 칼 안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가 있다고 믿어진다:
  • * "칼날은 지도자와 신들의 지혜가 평민과 교차하는 지점을 나타낸다. 칼은 사회가 관리되는 도구를 나타낸다. 도구로서의 칼의 효과와 그것을 둘러싼 사회적 신념은 모두 칼을 무사 상징의 정점으로 끌어올린다."[104]
  • 칼은 일본의 명예와 백병전에 대한 존중을 상징한다. 그것은 다른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것은 명예롭게 해야 하며, 원거리 전투(화기)는 다른 사람의 생명을 끝내는 비겁한 방법이라는 생각을 나타낸다. 이것은 또한 일본의 자기 희생 신념과 연결되는데, 무사는 자신의 국가(천황)를 위해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칼, 일본 문화, 사회 발전 사이에는 풍부한 관계가 있다. 칼의 기원과 영혼 세계와의 관계에 대한 다양한 해석은 과거와 현재의 일본 사회에서 각자의 가치를 지닌다. 어떤 해석을 선택하고 현대 사무라이가 칼의 역사를 어떻게 해석하는지에 따라 그들이 선택하는 사무라이와 무사의 유형에 영향을 미친다.

7. 2. 무사도와 일본도

에도 시대 이전에는 사무라이들이 칼을 주무기로 사용하지 않았다. 그들은 을 먼저 사용하고, 그 다음 , 마지막으로 칼을 사용했다. "부러진 칼과 빈 화살통"이라는 속담은 그들이 모든 무기를 활용해 싸웠음을 보여준다.[2]

센고쿠 시대를 거치면서 칼의 급격한 발달이 이루어졌는데, 이전까지 칼은 무사들의 다양한 무기 중 하나일 뿐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 에도 시대가 되면서 검술은 도장을 통한 자기 수양이나 신분 상승을 위한 형태로 바뀌어 일종의 정신 문화로 자리 잡았다.

점차 칼은 사무라이의 정신으로 여겨졌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집권 중에 시행한 가타나가리(刀狩り)를 통해 오직 사무라이만이 칼을 차고 다니도록 하고 농민 등에게서는 칼을 몰수하여 병농분리가 이루어졌다.[2]

닌자의 경우 사무라이와 상호 고용 상태 또는 대등한 관계였기 때문에 일본도 소지가 가능했다. 하지만 닌자들은 사무라이용 일본도처럼 날이 휘어진 것이 아니라 날이 곧게 뻗은 닌자 전용 일본도를 사용했다.[2]

8. 평가

가마쿠라 시대에는 타치(太刀)가 기병의 주무기로 사용되었다. 에도 시대에는 무사들이 갑옷을 입지 않고 도보로 이동했고, 기마전투가 줄어들면서 근접전 무기의 필요성이 커져 다이쇼(大小)를 휴대하게 되었다.

타메시기리(試し斬り)는 검의 날카로움과 베는 기술을 시험하는 검증 방법이다.

켄주츠(剣術)는 일본도를 사용하는 일본 무술이다. 일본도는 주로 베는 무기이지만, 곡선 덕분에 찌르기도 가능하다. 손잡이는 양손으로 잡았지만, 한손 기술도 존재한다. 검을 뽑아 한 동작으로 공격하는 바토주츠(抜刀術)와 아이주츠(居合術)는 훈련 이론과 방법에서 차이가 있다.

베는 기술에는 "텐우치(天打ち)"라는 팔과 손목을 조직적으로 사용하는 기술이 있었다. 텐우치는 검을 내려칠 때 팔꿈치 관절을 펴 검을 고정하고, 손아귀를 비틀어 강한 힘으로 초기 저항을 깨는 기술이다. 이후 썰기 동작으로 최대 피해를 입힌다.

켄주츠 스타일은 추단노카마에(中段の構え)(중간 자세), 조단노카마에(上段の構え)(높은 자세), 게단노카마에(下段の構え)(낮은 자세), 핫소노카마에(八相の構え)(팔각형 자세), 와키가마에(脇構え)(측면 자세)의 5가지 기본 자세를 공유한다.

일본도는 날이 단단하여 다른 검날과 부딪히면 깨질 위험이 있어 날끼리 부딪히는 것을 피했다. 방어 시에는 날 대신 평평한 부분이나 등을 사용했고, "우산 방어"는 내려치는 공격을 막는 효과적인 방법이었다.[108]

코시아테(刀掛)는 여러 종류가 있으며, 끈으로 고정하거나 옷 사이에 넣어 검을 휴대할 수 있다.


일본도는 무기이자 천황이나 무사의 권위 상징, 신앙 대상, 미술 공예품으로, 현대에는 문화재로 취급된다.[129]

도쿠가와 요시무네의 교호명물장(享保名物帳)에는 미술적 가치, 내력, 전승이 뛰어난 다이묘 소유 도검이 "명물"로 기록되었다. 야마다 아사우에몬의 「회보검척」,「고금단치비고」에는 날카로운 도검이 "업물(わざもの, wazamono)"로 등급이 매겨졌다. 유명한 일본도에는 국보 "대포평", "뢰절",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기일진", 천하오검(국보 "동자절", "삼일월종근", "대전태", 중요문화재 "주주환", 어물 "귀환") 등이 있다. 유명 도공에는 마사무네, 아와타구치 요시미츠, 향의홍, 무라마사, 나가소네 고우리(초대 코테츠), 겐 세이마로 등이 있다.

일본도는 오가전(五箇伝)이라는 5대 도공 유파(야마토국의 야마토전, 야마시로국의 야마시로전, 비젠국의 비젠전, 사가미국의 소슈전, 미노국의 미노전)으로 분류된다. 혼아미 코우스손(本阿弥光遜)이 정리한 오가전 도공 수는 비젠 4005, 미노 1269, 야마토 1025, 야마시로 847, 소슈 438이었다.[130]

일본 도공은 궁정으로부터 관위를 받았으며, 공적 지위가 높았다. 고토바 천황이 어번단지(御番鍛冶)에 관위를 준 것이 시작이며, 센코 무라마사, 비젠 나가후네 카츠미츠, 비젠 나가후네 야스미츠, 비젠 나가후네 모리미츠, 무쓰노카미 다이도 등이 귀족에 서작되었다. 이가노카미 킨도는 "일본 단지 총장"으로 도공의 수령명(受領名) 알선을 제도화했다.

중세 일본도는 평시 싸움, 강도, 호신 등에 사용되었고,[131] 비무사 계층도 칼을 찼다.[132] 합전에서는 궁술, 장병기 보조로 사용되었지만, 일번태도(一番太刀), "태도의 공명"(太刀の功名)[133]은 제일의 훈공이었다.[134]

메이지 시대 이후 일본도는 국보, 중요문화재, 중요미술품으로 지정되었고, 도공은 제실기예원(1890-1947), 인간국보(1955-)로 지정되었다. 도쿄국립박물관은 국보 일본도 19점을 소장하여 1위, 도쿠가와미술관과 후쿠야마미술관이 각각 7점으로 2위이다.[135] 일본미술도검보존협회는 "특별중요도검" 등 4등급으로 도검을 평가하고, 현대도직전 결과에 따라 "무감사"(無鑑査)를 인정한다. 무감사 도검 중 뛰어난 것에는 마사무네상이 수여되며, 스미야마 마사미네, 아마다 아키츠구, 오오스미 슌페이가 3회, 쓰키야마 테이이치(2대)가 2회 수상했다.[136][137]

8. 1. 역사적 평가

일본도는 무기로서 뿐만 아니라, 특히 고급 일본도는 예술 작품으로도 여겨져 왔다. 오랫동안 일본인들은 화려한 장식보다는 칼날 자체를 미적 평가의 핵심으로 보는 독특한 감상법을 발전시켜 왔다.[114][115]

칼날을 감상할 때 가장 주목할 만한 세 가지 요소는 다음과 같다.

  • 전체적인 형태 (姿, 스가타): 칼의 굽힘, 길이, 너비, 칼끝, 칼자루의 모양 등을 본다.
  • 칼날 표면의 미세한 무늬 (肌, 하다 또는 地鉄, 지가네): 칼날을 반복해서 접고 두들겨 만들면서 생기는 지문, 나이테, 나무껍질 같은 무늬를 말한다.
  • 刃紋 (하몬): 담금질과 뜨임 과정에서 생긴 칼날의 흰 무늬 속에 있는 흐릿한 선이다. 칼날 측면의 흰색 부분은 刃紋을 더 잘 보이도록 연마한 부분(覇道, 하도리)이며, 실제 刃紋은 그 안에 있는 흐릿한 선이다. 칼을 들고 빛의 각도를 바꿔가며 刃紋의 모양과 경계에 형성된 결정 입자를 살펴본다. 입자 크기에 따라 별이나 안개처럼 보이는 沸 (니에)와 匂 (니오이)로 나뉜다.


이 외에도 칼 제작자의 서명, 칼자루에 새겨진 파일 패턴, 칼날에 새겨진 조각 (彫り物, 호리모노)도 감상 대상이다.[2][2]

「押形」(오시가타) ―刃紋(하몬)의 정확한 복제― 와 사진의 차이


일본도 감정의 권위자였던 본아미(本阿弥) 가문은 이러한 예술적 관점에서 일본도를 평가했다. 현대 일본도 전문가들도 칼이 언제, 어떤 칼 제작 학교에서 만들어졌는지 판단할 때 이러한 기준을 사용한다.[2][2]

1702년 본아미 고추(Hon'ami Kōchū)가 14세기에 유키미쓰(Yukimitsu)가 만든 단도(tantō)의 진품임을 인증한 일본도 감정서(Origami)


일반적으로 일본도의 칼날과 칼집은 박물관에서 따로 전시되는 경우가 많으며, 이는 일본에서 두드러진 경향이다. 예를 들어, 일본 최대의 칼 박물관 중 하나인 나고야 일본도 박물관 "나고야 도검 월드(Nagoya Touken World)"는 공식 웹사이트와 유튜브에 칼날과 칼집의 영상을 따로 게시한다.[118][119]

일본에서는 각 시대의 당국에서 일본도를 평가했으며, 일부 평가 기관의 평가는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1719년, 8대 에도 막부 쇼군인 도쿠가와 요시무네는 도검 감정 전문가 호나미 고추에게 전국의 다이묘들이 소유한 도검을 기록하도록 명령했다. 완성된 "교호 명물장(享保名物帳)"에는 249자루의 귀중한 도검이 기록되었고, 이후 25자루가 추가되었다. 이 목록에는 이전 화재로 소실된 81자루도 포함되어 있다. 이 책에 기록된 도검은 "명물(名物)"이라 불렸으며, 선정 기준은 예술적 요소, 기원 및 전설이었다. "명물" 목록에는 마사무네가 만든 59자루, 아와구치 요시미츠가 만든 34자루, 고 요시히로가 만든 22자루가 포함되어 있어, 이 세 명의 검 제작자는 특별하게 여겨졌다. 다만, 다이묘들이 에도 막부에 몰수될까 봐 숨긴 도검도 있어, 일부 귀중한 도검은 목록에 포함되지 않았다. 예를 들어, 현재 국보로 지정된 "다이한냐 나가미츠"와 "야마토리게"는 목록에 없다.[23]

나가소네 고테쓰는 최상대업물로 평가받았으며, 에도 시대 가장 인기 있는 검 제작자 중 한 명이었다. 사진은 단도인 "호라이산 고테쓰".


에도 막부의 공식적인 도검 절단 능력 시험관이자 처형인이었던 야마다 아사에몬 5세는 1797년에 도검의 절단 능력을 순위 매긴 책인 "회보검척(懐宝剣尺)"을 출판했다. 이 책에는 228명의 검 제작자가 나열되어 있으며, 그들이 제작한 도검은 "와자모노"(業物)라고 불렸다. 최고 등급인 "최상대업물(最上大業物)"에는 12명이 선정되었다. 1805년 재판에서는 최고 등급에 1명이 추가되었고, 1830년 개정판인 "고금단치비고(古今鍛冶備考)"에서는 최고 등급에 2명이 추가되어 최종적으로 15명이 최고 등급으로 평가되었다. 최고 평점을 받은 검 제작자 중 한 명인 나가소네 고테쓰가 제작한 카타나(刀)는 책이 출판될 당시 매우 인기를 끌어 많은 위조품이 만들어졌다. 이 책에서는 "교호 명물장"에서 특별히 다루어진 세 명의 검 제작자와 당시 높은 절단 능력을 가진 도검 제작으로 유명했던 무라마사는 언급되지 않았다. 이는 야마다가 쇼군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을 두려워했고, 다이묘가 소유한 귀중한 도검을 시험에 사용할 수 없었으며, 무라마사의 저주에 대한 전설을 고려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23][120]

마고로쿠 카네모토가 제작한 카타나. (최상대업물) 후기 무로마치 시대. (위) 카타나 장착, 초기 에도 시대. (아래)


현재는 문화재보호법에 따라 역사적 가치가 높은 중요한 도검은 중요문화재(重要文化財)로, 그중 특별한 도검은 국보(国宝)로 지정된다. 이미 폐지된 1930년 법에 따라 문화재로 지정된 도검은 중요문화재 다음 등급인 중요미술품(重要美術品)으로 분류된다. 또한 공익재단법인인 일본 미술 도검 보존 협회는 고가의 도검을 4등급으로 평가하며, 최고 등급인 특별중요도검(特別重要刀剣)은 중요미술품의 가치와 동등한 것으로 간주된다. 일본 황실이 소유한 도검은 문화재보호법의 관할 밖에 있기 때문에 국보 또는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지만, 국보급 도검이 많이 있으며, "어물(御物)"이라고 불린다.[23][121]

현재, 검 제작자에 대한 몇 가지 권위 있는 평가 시스템이 있다. 일본 정부가 승인한 평가에 따르면, 1890년부터 1947년까지 궁내청 기술원으로 임명된 두 명의 검 제작자와 1955년 이후 인간문화재로 지정된 여섯 명의 검 제작자가 최고의 검 제작자로 여겨진다. 일본 미술 도검 보존 협회가 승인한 평가에 따르면, 1958년부터 무감사(無鑑査)로 지정된 39명의 검 제작자가 최고 순위의 검 제작자로 간주된다. 일본 검 제작자가 제작한 최고의 검에는 일본 미술 도검 보존 협회에서 가장 영예로운 마사무네 상이 수여된다. 1961년 이후 8명의 검 제작자가 마사무네 상을 수상했으며, 그중 스미타니 마사미네, 아마타 아키츠구, 오스미 토시히라 세 명은 각각 세 번, 가산 사다카즈 2세는 두 번 수상했다. 이 네 명은 인간문화재와 무감사 모두로 지정되었다.[122]

8. 2. 현대의 평가

역사적으로 일본도는 단순한 무기를 넘어, 특히 고급 일본도는 예술 작품으로 여겨져 왔다. 오랫동안 일본인들은 화려한 장식보다는 칼날 자체를 미적 평가의 핵심으로 보는 독특한 감상법을 발전시켜 왔다.[114][115] 칼날 감상 시 주목할 만한 세 가지 요소는 다음과 같다.

  • 전체적인 형태 ('姿', 스가타): 칼의 굽힘, 길이, 너비, 칼끝, 칼자루 모양 등을 감상한다.
  • 칼날 표면의 미세한 무늬 ('肌', 하다 또는 '地鉄', 지가네): 칼날을 반복해서 접고 두들겨 만들면서 생기는 지문, 나이테, 나무껍질과 같은 미세한 무늬를 말한다.
  • 刃紋 (하몬): 담금질과 뜨임 과정에서 생긴 날의 흰 무늬 속에 있는 흐릿한 선이다. 칼날 측면의 흰색 부분(覇道, 하도리)은 연마를 통해 刃紋을 더 잘 보이게 만든 부분이며, 실제 刃紋은 그 안에 있는 흐릿한 선이다. 刃紋의 모양과 경계에 형성된 결정 입자에 따라 별이나 안개처럼 보이는 沸(니에)와 匂(니오이)로 나뉜다.[116][117]


이 외에도 칼제작자의 서명, 칼자루에 새겨진 파일 패턴, 칼날의 조각인 彫り物(호리모노)도 감상 대상이다.[2][2]

일본도 감정의 권위자였던 본아미(Hon'ami) 가문은 이러한 예술적 관점에서 일본도를 평가했다. 현대 일본도 전문가들도 이와 같은 관점에서 칼의 제작 시기와 제작 유파를 판단한다.[2][2]

일반적으로 일본도의 칼날과 칼집은 박물관에서 따로 전시되는 경향이 있으며, 이는 일본에서 두드러진다. 예를 들어, 나고야 일본도 박물관 "나고야 도검 월드"는 공식 웹사이트와 유튜브에 칼날과 칼집의 영상을 আলাদা 게시한다.[118][119]

일본에서는 각 시대의 당국이 일본도를 평가했으며, 일부 평가 기관의 평가는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 1719년: 8대 에도 막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는 도검 감정 전문가 호나미 고추에게 전국의 다이묘들이 소유한 도검을 "교호 명물장"(享保名物帳)에 기록하도록 명령했다. 이 책에는 249자루의 귀중한 도검(이후 25자루 추가)이 기록되었으며, 선정 기준은 예술적 요소, 기원, 전설이었다. "명물" 목록에는 마사무네 59자루, 아와구치 요시미츠 34자루, 고 요시히로 22자루 등 세 명의 검 제작자가 특별히 여겨졌다.
  • 1797년: 에도 막부의 공식 도검 절단 능력 시험관 야마다 아사에몬 5세는 "회보검척"(懐宝剣尺)을 출판하여 도검의 절단 능력을 순위 매겼다. 최고 등급인 "최상대업물"(最上大業物)에는 12명의 검 제작자가 선정되었다. (이후 추가됨)


현재는 문화재보호법에 따라 역사적 가치가 높은 도검은 중요문화재로, 그중 특별한 도검은 국보로 지정된다. 또한 일본 미술 도검 보존 협회는 고가의 도검을 4등급으로 평가하며, 최고 등급인 특별중요도검(特別重要刀剣)은 중요미술품과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 일본 황실 소유 도검은 "어물"(御物)이라 불리며 국보급 도검이 많다.[23][121]

현재 검 제작자에 대한 권위 있는 평가 시스템은 다음과 같다.

  • 일본 정부: 1890~1947년 궁내청 기술원으로 임명된 검 제작자 2명과 1955년 이후 인간문화재로 지정된 검 제작자 6명을 최고로 평가한다.
  • 일본 미술 도검 보존 협회: 1958년부터 무감사(無鑑査)로 지정된 39명의 검 제작자를 최고 순위로 간주한다. 이 협회는 최고의 검에 마사무네 상을 수여하며, 스미타니 마사미네, 아마타 아키츠구, 오스미 토시히라, 가산 사다카즈 2세 등이 수상했다.


일본도의 칼날과 칼 장식은 박물관에서 별도로 전시되는 경향이 있으며, 이는 일본에서 두드러진다. 예를 들어, 나고야 일본도 박물관 "나고야 도검 월드"는 공식 웹사이트와 유튜브에 칼날과 칼 장식의 영상을 별도로 게시한다.[118][119]

일본도는 무기이지만, 천황이나 무사의 권위 상징, 신앙 대상, 미술 공예품으로서의 측면도 있으며, 무기로 사용되지 않는 현대에는 미술 공예품이나 문화재로 취급된다.[129]

일본 역사에서 유명한 일본도와 도공은 시대별 권력자나 권위자에 의해 책에 정리되거나 등급이 매겨졌다. 도쿠가와 요시무네가 편찬을 명령한 교호명물장에 게재된 미술적 가치나 내력, 전승에 뛰어난 다이묘 소유의 귀중한 도검은 "명물"이 붙여졌다. 야마다 아사우에몬이 간행한 "회보검척"이나 "고금단치비고"에 게재된 날카로운 칼날을 가진 도공의 도검은 "업물(わざもの, wazamono)" 등으로 등급이 매겨졌다.

유명한 일본도에는 일본 국보인 "대포평", "뢰절",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애도 "일기일진", "천하오검"이라 불리는 5자루의 명도(국보 "동자절", "삼일월종근", "대전태", 중요문화재 "주주환", 어물 "귀환" 국강(国綱)) 등이 있다. 유명한 도공에는 교호명물장에 가장 많은 도검이 게재되어 명물 삼작(천하삼작)이라 불린 마사무네, 아와타구치 요시미츠, 향의홍이나, 후세에 그 제작이 요도(妖刀)라고도 불린 무라마사, 최상대업물의 나가소네 고우리(초대 코테츠), 겐 세이마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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