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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무두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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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베르무도 3세는 레온의 알폰소 5세의 아들이자, 1028년 아버지의 사망으로 즉위한 레온의 왕이다. 그의 치세 동안 나바라 왕국은 산초 3세 아래 최성기를 맞이했으며, 베르무도 3세는 나바라 왕녀 히메나 산체스 데 나바라와 결혼했다. 카스티야 백작 가르시아 산체스가 암살당한 후, 나바라 왕 산초 3세는 카스티야를 침공하여 영토를 점령하고 아들 페르난도 1세를 새로운 카스티야 백작으로 임명했다. 베르무도 3세는 나바라에게 빼앗긴 영토를 회복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타마론 전투에서 전사했다. 왕위는 여동생 산차와 페르난도 1세에게 넘어갔다. 베르무도 3세의 무덤은 레온과 나헤라에 위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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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무두 3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레온 시의회에 있는 베르무도 3세
레온 시의회에 있는 베르무도 3세
이름베르무도 알폰세스
왕조아스투리아스-레온 왕조
통치
작위레온 국왕
재위 기간1028년 – 1037년
대관식알려진 정보 없음
이전 통치자알폰소 5세
후임 통치자페르난도 1세
결혼과 자녀
배우자히메나 산체스
자녀알폰소
출생과 사망
출생기원전 1015년경
사망1037년 9월 4일 (22세)
사망 장소타마론
매장지산 이시드로 대성당, 이후 나헤라의 산타 마리아 라 레알
종교
종교칼케돈 기독교
가족 관계
아버지알폰소 5세
어머니엘비라 메넨데스

2. 생애

베르무도 3세 서명


베르무두 3세는 알폰소 5세와 그의 첫 부인 엘비라 멘데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028년, 아버지 알폰소 5세가 사망하자 불과 11세의 어린 나이에 레온의 왕위를 계승했다. 그의 치세 동안 이웃 나바라 왕국은 산초 3세 아래에서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베르무두 3세는 정치적인 이유로 산초 3세의 딸인 히메나 산체스와 결혼했다.

베르무두 3세의 통치 초기는 불안정한 사건들로 점철되었다. 1029년, 그의 누나인 산차와 결혼하기 위해 레온을 방문했던 카스티야의 가르시아 산체스 백작이 정적이었던 벨라스 가문에 의해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1] 후계자 없이 카스티야 백작이 사망하자, 카스티야 백작령의 계승권을 둘러싸고 레온과 나바라 사이에 분쟁이 시작되었다.

나바라의 산초 3세는 자신의 아내 무니아도나(살해된 가르시아 산체스 백작의 누이)의 권리를 주장하며 카스티야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그는 자신의 아들 페르난도를 새로운 카스티야 백작으로 임명하고, 레온과 카스티야 사이의 분쟁 지역이었던 세아 강과 피수에르가 강 사이의 영토를 점령했다. 나아가 1032년에는 자신의 아들 페르난도와 베르무두 3세의 누나 산차의 결혼을 강요하여[1] 점령한 영토를 산차의 지참금 명목으로 카스티야에 넘겨주었다. 산초 3세의 압박은 계속되어 1034년에는 레온의 수도마저 빼앗겼고, 베르무두 3세는 갈리시아로 밀려나는 수모를 겪었다.

1035년 산초 3세가 사망하자 베르무두 3세는 즉시 레온으로 돌아와 빼앗긴 영토를 되찾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다. 그는 카스티야와 매형이 된 페르난도를 상대로 군사 활동을 벌였으나, 1037년 9월 4일 티에라 데 캄포스 지역에서 벌어진 타마론 전투에서 페르난도에게 패배하고 전사했다.[2] 그의 유해 부검 결과, 말에서 떨어진 후 보병의 창이나 파이크에 찔려 사망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베르무두 3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면서 레온 왕위는 그의 누나 산차와 남편 페르난도에게 넘어갔다. 페르난도는 1038년 페르난도 1세로 즉위하여 레온과 카스티야를 통합한 왕국의 통치자가 되었다. 이 통합은 이베리아 북부 기독교 사회의 정치적 중심지를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베르무두 3세의 매장지에 대해서는 레온의 산 이시도로 성당 왕실 영묘와 나헤라의 산타 마리아 왕립 수도원 두 곳이 거론되며 논쟁이 있다.

2. 1. 나바라와의 관계



베르무도 3세는 나바라의 산초 3세의 딸인 히메나 산체스와 결혼했다.

1029년, 카스티야의 가르시아 산체스 백작은 베르무도의 누나인 산차와 결혼하려 했으나, 레온에서 벨라스 가문에 의해 암살당했다. 이들은 이전에 카스티야에서 추방되어 레온에 망명 중이던 귀족 세력이었다. 가르시아 산체스 백작이 후사 없이 사망하자, 카스티야 백작령의 계승권을 두고 레온과 나바라 사이에 분쟁이 발생했다.[1]

카스티야의 무니아도나는 살해된 백작의 누이이자 나바라의 산초 3세의 아내였다. 산초 3세는 아내의 권리를 내세워 카스티야 백작령을 주장했고, 자신의 아들 페르난도를 새로운 카스티야 백작으로 임명했다. 그는 또한 레온과 카스티야 사이의 오랜 분쟁 지역이었던 세아 강과 피수에르가 강 사이의 국경 지대를 점령했다. 1032년, 산초 3세는 자신의 아들 페르난도와 레온의 산차 사이의 결혼을 강요했고,[1] 점령한 땅은 산차의 지참금의 일부로 카스티야에 넘어갔다.

1034년, 산초 3세는 사위인 베르무도 3세로부터 레온의 수도까지 빼앗았고, 베르무도 3세는 갈리시아로 물러나야 했다. 산초 3세가 1035년에 사망하자, 베르무도 3세는 즉시 레온으로 돌아와 카스티야와 그의 매형 페르난도로부터 세아 강과 피수에르가 강 사이의 영토를 되찾기 위한 군사 활동을 시작했다.

베르무도 3세는 빼앗긴 영토를 회복하려 했으나, 티에라 데 캄포스를 점령하려던 중 1037년 9월 4일 타마론 전투에서 페르난도에게 패배하고 전사했다.[2] 베르무도 3세에게 후계자가 없었기 때문에, 레온 왕국은 그의 누나 산차와 그녀의 남편 페르난도를 통치자로 인정했다. 페르난도는 1038년 6월 22일 레온에서 페르난도 1세로 즉위하여 레온과 카스티야의 통합 왕국을 다스리게 되었다.

2. 2. 카스티야 백작령 분쟁

1029년, 카스티야의 가르시아 산체스 백작은 베르무도 3세의 누나인 레온의 산차와 결혼하기 위해 레온으로 왔으나, 과거 가르시아 산체스의 아버지에게 원한을 품고 추방당했던 카스티야 귀족 벨라스 가문에 의해 살해당했다.[1] 이 사건으로 후계자가 없어진 카스티야 백작령의 계승 문제가 불거졌다.

나바라의 산초 3세는 자신의 아내이자 살해된 가르시아 산체스 백작의 누이인 카스티야의 무니아도나의 권리를 내세워 카스티야 백작령을 차지하려 했다. 그는 자신의 아들 페르난도를 새로운 카스티야 백작으로 임명하고, 레온과 카스티야 사이의 오랜 분쟁 지역이었던 세아 강과 피수에르가 강 사이의 국경 지대를 점령했다. 1032년, 산초 3세는 아들 페르난도와 베르무도 3세의 누이인 레온의 산차 사이의 결혼을 강요했으며,[1] 점령한 영토는 산차의 지참금의 일부로 카스티야에 넘겨졌다.

1034년, 산초 3세는 사위인 베르무도 3세로부터 레온 도시마저 빼앗았고, 베르무도 3세는 갈리시아로 물러나야 했다. 산초 3세가 1035년에 사망하자, 베르무도 3세는 즉시 레온으로 돌아와 카스티야와 그의 매형 페르난도가 차지한 세아 강과 피수에르가 강 사이의 영토를 되찾기 위한 군사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베르무도 3세는 1037년 9월 4일, 티에라 데 캄포스를 점령하려다 벌어진 타마론 전투에서 페르난도에 맞서 싸우다 전사했다.[2] 베르무도 3세에게 후계자가 없었기 때문에, 레온 왕위는 그의 누이인 산차와 남편 페르난도에게 돌아갔다. 페르난도는 페르난도 1세로 즉위하여 레온과 카스티야를 통합하게 되었다.

2. 3. 타마론 전투와 죽음

1035년 나바라의 산초 3세가 사망하자, 갈리시아로 물러나 있던 베르무도 3세는 즉시 레온으로 돌아왔다. 그는 카스티야와 그의 매형인 페르난도로부터 세아 강과 피수에르가 강 사이의 분쟁 지역을 되찾기 위한 군사 활동을 시작했다. 베르무도 3세는 이 영토 회복 시도의 일환으로 티에라 데 캄포스를 점령하려 했으나, 1037년 9월 4일 타마론 전투에서 페르난도가 이끄는 카스티야군과 싸우다 전사했다.[2] 그의 유해에 대한 부검 결과, 그는 말에서 떨어진 후 보병의 창이나 파이크에 의해 사망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베르무도 3세에게는 후계자가 없었기 때문에, 레온 왕국은 그의 누나인 산차와 그녀의 남편 페르난도를 새로운 통치자로 인정했다. 페르난도는 1038년 6월 22일 레온에서 페르난도 1세로 즉위했다. 이로써 레온 왕국카스티야의 연합 왕국이 형성되었으며, 이는 아스투리아스와 갈리시아의 변방 지역과 함께 이베리아 북부 기독교 사회의 정치적 중심지가 되었다.

베르무도 3세의 매장지에 대해서는 레온의 산 이시도로 성당 왕실 영묘와 나헤라의 산타 마리아 왕립 수도원 두 곳이 거론되어 논쟁이 있다.

3. 가족

나헤라에 있는 레온의 베르무도 3세의 무덤


베르무도 3세는 1035년 나바라 왕 산초 3세의 딸인 히메나와 결혼했다. 아내 히메나와의 사이에서 아들 알폰소(Alfonso)를 낳았으나, 알폰소는 어린 나이에 사망했다.[3]

참조

[1] 간행물 León http://www.newadvent[...] Robert Appleton Company 1910-05-20
[2] 서적 The Contest of Christian and Muslim Spain, 1031-1157 Blackwell 1995
[3] 서적 Sepulcros de la Casa Real de Castilla Instituto Jerónimo Zurita. Consejo Superior de Investigaciones Científicas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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