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아산 (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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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부아산은 한남정맥에 속하는 산으로, 칠장산에서 이어지는 주요 봉우리 중 하나이다. 동쪽으로는 함박산으로, 남쪽으로는 상봉고개로 능선이 이어진다. 북서사면의 물줄기는 신갈저수지로, 남동사면은 진위천으로, 북동사면은 경안천으로 흘러든다.
《택리지》에는 부아산이 칠장산에서 뻗어 나왔다는 기록이 있으며, 《동국여지지》와 《여지도서》에는 각각 부아산의 위치와 유래에 대한 기록이 전한다. 부아산이라는 이름은 옛날 한 며느리가 호랑이에게 아이를 잃고 시아버지를 구한 이야기에서 유래되었으며, 이 이야기는 용인 지역의 구비전승으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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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아산 (경기) - [지명]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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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부아산 |
한자 표기 | 負兒山 |
높이 | 402.7m |
위치 | 대한민국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삼가동, 이동읍 서리, 기흥구 지곡동 |
2. 지리
부아산은 한남정맥에 속하는 산으로, 칠장산에서 시작하여 도덕산, 국사봉, 상봉, 달기봉, 무너미고개, 함박산, 학고개, 메주고개, 석성산, 할미성, 인성산, 형제봉, 광교산, 백운산, 수리산, 국사봉, 청계산, 응봉, 관악산, 소래산, 성주산, 철마산, 계양산, 가현봉, 필봉산, 학운산, 것고개, 문수산 등으로 이어진다.[1]
2. 1. 위치 및 지형
부아산은 한남정맥에 속해있는 산으로 칠장산에서 이어지는 주요 봉우리 중 하나이다. 동쪽으로는 학고개~함박산, 무너미고개 등으로 능선이 이어지고, 남쪽으로는 아흔아홉고개~상봉고개를 거쳐 다시 동쪽으로 함봉산으로 능선이 이어진다. 북쪽으로는 상대적으로 낮은 봉우리들이 능선을 이루고 있다. 북서사면의 유수는 지곡천을 거쳐 신갈저수지에 모였다가 오산천으로 유입되며, 남동사면의 유수는 상덕천을 거쳐 진위천으로 유입되고, 북동사면의 유수는 금학천을 거쳐 경안천으로 유입된다.2. 2. 수계
부아산의 북서사면 유수는 지곡천을 거쳐 신갈저수지에 모였다가 오산천으로 흘러가며, 남동사면 유수는 상덕천을 거쳐 진위천으로 유입되고, 북동사면 유수는 금학천을 통해 경안천으로 유입된다.3. 역사적 기록
택리지, 동국여지지, 여지도서 등 조선시대 여러 문헌에 부아산에 관한 기록이 있다.
3. 1. 택리지
택리지에는 ‘죽산의 칠장산(七長山)이 크게 끊어져 평지가 되었다가 다시 일어나 부아산(負兒山)을 일으킨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무너미고개(수유현)에서 끊어져 평지가 되었다가 함박산과 하고개(학고개)를 거쳐 부아산에서 높이 솟았다는 의미로 해석된다.3. 2. 동국여지지와 여지도서
《동국여지지》에는 ‘현의 남쪽 22리에 있는데 봉우리 위에 작은 봉우리가 있어 마치 어린아이를 업은 형상이라 부아산이라 불린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1] 《여지도서》에는 ‘현 동남쪽 20리에 있는데 굴암산에서 맥이 왔다’라고 기록되어 있다.[1]4. 유래담
부아산에는 효심 깊은 며느리와 관련된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이 전설에 따르면, '부인이 아이를 업고 헤맨 산'이라 하여 '부아산(負兒山)'이라 부르고, '어린아이의 할아버지를 찾던 고개'라 하여 '멱조현(覓祖峴)' 또는 '메주고개'라고 불렀다고 한다.[1]
4. 1. 전설의 내용
1978년에 채록되어 《내 고장 옛 이야기》에 실려 있고, 1995년에 출간된 《용인 중부지역의 구비전승》에는 부아산의 유래와 관련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1]홀로 된 시아버지를 모시고 외아들을 키우며 사는 한 부부가 있었다. 이들 부부는 가난했지만 남들이 부러워할 만큼 부친을 잘 봉양하였다. 할아버지 역시 손주를 끔찍이 아껴 항상 집안에 화기가 돌았다. 어느 해, 남편이 관가에서 시키는 부역 때문에 여러 날 집을 비우게 되었다. 남편이 없는 동안에도 며느리는 시아버지를 극진히 모셨고, 시아버지는 아들 대신 나무를 해서 시장에 내다 팔았다. 며느리는 시아버지가 돌아올 때쯤이면 항상 아이를 업고 고갯마루에서 시아버지를 기다렸다. 그런데 웬일인지 밤이 깊어가고 있는데도 시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았다. 아이를 업은 며느리는 조금씩 앞으로 가다가 자신도 모르는 길을 헤매게 되었다.
얼마나 헤맸을까, 가까운 곳에서 사람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며느리는 혹시나 시아버지가 짐승에게 해를 입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여 그곳으로 달려갔다. 과연 그곳에서는 시아버지와 호랑이가 죽음을 무릅쓰고 다투고 있었다. 이 광경을 본 며느리는 호랑이를 크게 꾸짖으며, “네가 정말 배가 고파서 그런다면 내 등에 업힌 아이라도 줄 테니 우리 시아버님은 상하게 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러고는 어린아이를 호랑이 앞에 주자, 호랑이는 아이를 물고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겨우 정신을 차린 시아버지는 손자를 잃은 슬픔에 오열을 금하지 못했으나 며느리의 간곡한 애원으로 결국 집으로 돌아왔다. 시아버지가 낙담하며, “나는 이미 늙었으니 죽어도 한이 없을 텐데, 어째서 어린아이를 죽게 했느냐?” 하였더니 며느리는, “어린아이는 다시 낳을 수 있지만 부모는 어찌 다시 모실 수 있겠습니까?” 하며 마음 상하지 않기를 재삼 부탁하였다. 시아버지도 며느리가 더욱 마음 아파할까 봐 겉으로는 슬픈 척도 하지 않았다.
그 후 사람들은 '부인이 아이를 업고 헤맨 산'이라고 하여 '부아산(負兒山)'이라고 부르고, '어린아이의 할아버지를 찾던 고개'라고 하여 '멱조현(覓祖峴)'이라고 이름붙였다. 멱조현은 또 '메주고개'로도 전해지고 있다.[1]
4. 2. 전설의 채록 및 출간
이 전설은 1978년에 채록되어 《내 고장 옛 이야기》에 실렸고, 1995년 《용인 중부지역의 구비전승》에도 수록되었다.[1]홀로 된 시아버지를 모시고 외아들을 키우며 사는 한 부부가 있었다. 이들 부부는 가난했지만 남들이 부러워할 만큼 부친을 잘 봉양하였다. 할아버지 역시 손주를 끔찍이 아꼈다. 어느 해, 남편이 관가에서 시키는 부역 때문에 여러 날 집을 비우게 되었다. 남편이 없는 동안에도 며느리는 시아버지를 극진히 모셨고, 시아버지는 아들 대신 나무를 해서 시장에 내다 팔았다. 며느리는 시아버지가 돌아올 때쯤이면 항상 아이를 업고 고갯마루에서 시아버지를 기다렸다. 그런데 웬일인지 밤이 깊어가고 있는데도 시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았다. 아이를 업은 며느리는 조금씩 앞으로 가다가 자신도 모르는 길을 헤매게 되었다. 얼마쯤 헤맸을까, 가까운 곳에서 사람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며느리는 혹시나 시아버지가 짐승에게 해를 입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여 그곳으로 달려갔다. 과연 그곳에서는 시아버지와 호랑이가 죽음을 무릅쓰고 다투고 있었다. 이 광경을 본 며느리는 호랑이를 크게 꾸짖으며, “네가 정말 배가 고파서 그런다면 내 등에 업힌 아이라도 줄 테니 우리 시아버님은 상하게 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러고는 어린아이를 호랑이 앞에 주자, 호랑이는 아이를 물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겨우 정신을 차린 시아버지는 손자를 잃은 슬픔에 오열을 금하지 못했으나 며느리의 간곡한 애원으로 결국 집으로 돌아왔다. 시아버지가 낙담하며, “나는 이미 늙었으니 죽어도 한이 없을 텐데, 어째서 어린아이를 죽게 했느냐?” 하였더니 며느리는, “어린아이는 다시 낳을 수 있지만 부모는 어찌 다시 모실 수 있겠습니까?” 하며 마음 상하지 않기를 재삼 부탁하였다. 시아버지도 며느리가 더욱 마음 아파할까 봐 겉으로는 슬픈 척도 하지 않았다.
그 후 사람들은 '부인이 아이를 업고 헤맨 산'이라고 하여 '부아산(負兒山)'이라고 부르고, '어린아이의 할아버지를 찾던 고개'라고 하여 '멱조현(覓祖峴)'이라고 이름 붙였다. 멱조현은 또 '메주고개'로도 전해지고 있다.(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김량장동의 구비전승 이야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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