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두다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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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비두다바는 코살라 왕 파세나디와 샤카족의 족장 마하나마의 딸인 바사바카티야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파세나디 왕의 부재를 틈타 왕위를 찬탈했으며, 샤카족을 멸망시키려 진격했다. 비두다바는 샤카족을 정복한 후 동쪽 이웃인 마가다에 합병되었고, 아자타샤트루에게 패배하여 죽임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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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살라 국왕 - 파세나디
파세나디는 기원전 6세기 코살라국의 왕으로, 불교에 귀의하여 석존과 교류하고 기원정사 건립을 후원하는 등 불교 발전에 기여했으나, 말년에는 쿠데타로 왕위를 잃고 피신 중 사망했다. - 코살라 국왕 - 수미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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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두다바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작위 | 코살라 국왕 |
재위 | 기원전 5세기 |
전임자 | 파세나디 |
후임자 | 왕국 폐지 |
아버지 | 파세나디 |
어머니 | 바사바카티야 |
친척 | 바지라 공주(이복 자매) |
이름 | |
산스크리트어 | 비루다카 |
팔리어 | 비두다바 |
2. 생애
비두다바는 코살라의 왕 파세나디와 샤카족 족장 마하나마의 딸이자 노예 소녀 나가문다의 딸인 바사바카티야 사이에서 태어났다.[4][5] 8세에 석가족에게 궁술을 배우러 갔다가 모욕을 당하고 원한을 품었다.[6]
파세나디는 이 사실을 알고 아들과 부인을 냉대했지만, 석존의 설득으로 마음을 돌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탁샤실라에서 교육받은 말라인 반둘라는 파세나디 치세에 코살라 장군으로 복무했다. 반둘라 부부가 리차비족 전차를 침범해 코살라와 리차비족 간 갈등이 생겼고, 반둘라는 아들들과 함께 파세나디에게 배신당해 살해되었다.[1] 일부 말라족은 이에 복수하고자 비두다바의 왕위 찬탈을 도왔고, 파세나디는 마가다 수도 라자그리하 문 앞에서 사망했다.[1]
왕위에 오른 비두다바는 칼라마 공화국을 완전히 합병했다.[1] 칼라마족이 부처 사후 유해 분배를 요청하지 않은 것은 이때 독립을 잃었기 때문일 수 있다.[1]
또한 샤카와 콜리야 공화국을 침략, 긴 전쟁 끝에 승리하여 영토를 정복했다.[2] 불교 기록에는 비두다바 어머니의 신분에 대한 보복으로 묘사되었지만,[2] 실제로는 마가다 왕 아자타삿투의 바지카 연맹 정복과 유사한 동기였을 가능성이 크다.[2] 샤카족과 콜리야족은 비두다바 왕국에 병합된 후 정치적 중요성을 잃고 코살라에 흡수되거나 정체성을 상실했다.[2]
그러나 샤카족 정복 과정에서 코살라도 큰 피해를 입어 국력이 약화되었고, 결국 동쪽의 마가다에 합병되었다. 비두다바는 아자타삿투에게 패배하여 살해당했다.[3]
불교 설화에 따르면, 비두다바는 석존의 만류에도 카필라 성을 공격해 석가족을 멸망시켰다. 여기서 "부처님 얼굴도 세 번"이라는 속담이 유래했다. 석존은 비두다바와 그의 군대가 7일 안에 죽을 것이라 예언했고, 실제로 이들은 연회 중 낙뢰를 맞거나 폭풍우로 불어난 강물에 휩쓸려 죽었다고 한다.
2. 1. 어린 시절
비두다바는 코살라의 왕 파세나디와 샤카족의 족장 마하나마, 그리고 노예 소녀 나가문다의 딸인 바사바카티야 사이에서 태어났다.[4][5] 그는 잘생기고 건강한 청년으로 성장했다. 그는 할아버지인 마하나마와 할머니인 나가문다에 대해 궁금해했지만, 그의 어머니 바사바카티야는 그가 그들을 방문하는 것을 계속 막았다. 그러나 어느 날, 마침내 그녀는 그의 부탁을 마지못해 들어주었다. 샤카 공화국에서 그는 기대했던 것처럼 따뜻한 환영을 받지 못했고(그는 노예 소녀의 아들이었다), 그의 어머니의 진짜 정체에 대해 알았을 때 기분이 상했다.[6]비두다바가 8세가 되자, 왕은 그에게 어머니의 친정인 석가족의 땅으로 가서 궁술 등의 수련에 힘쓰도록 명했다. 비두다바는 석가족 자제들과 함께 궁술을 배웠다. 그때 성 안에 새로운 강당이 완성되었는데, 신들과 왕족 등만이 오를 수 있는 신성한 사자좌에 비두다바가 올라앉는 것을 석가족 사람들이 보았다. 그들은 "너는 하녀가 낳은 아이다. 그런데 아직 제천도 오르지 못했는데 앉았구나"라고 분노하며 태자의 팔꿈치를 잡아 문 밖으로 내쫓고 채찍으로 때려 땅에 내리쳤다. 비두다바는 "내가 후에 왕위에 오르면, 이 일을 잊지 않겠다"고 원한을 품게 되었다.
일설에는 파세나디 왕도 이 사실을 알고 하녀였던 비(妃)와 비두다바 태자에게 혐오감을 품고 지위를 낮춰 성에서 내쫓아 변변치 못한 생활을 하게 했지만, 석존의 설득으로 원래의 생활로 돌아갔다고도 한다.
2. 2. 권력 장악
파세나디 치세 동안, 탁샤실라에서 교육을 받은 말라인 반둘라는 말라족과 코살라 사이의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코살라 왕 휘하에서 장군으로 복무했다. 나중에 반둘라는 그의 아내 말리카와 함께 리차비족의 아브히세카-포카라니 전차를 침범했고, 이것은 코살라와 리차비족 사이의 무력적인 적대감을 낳았다. 반둘라는 나중에 파세나디에 의해 배신당하며 그의 아들들과 함께 살해되었다.[1] 이에 대한 복수로 일부 말라족들은 반둘라의 죽음에 복수하기 위해 파세나디의 아들 비두다바가 코살라의 왕위를 찬탈하는 것을 도왔고, 그 후 파세나디는 코살라에서 도망친 후 마가다의 수도인 라자그리하의 문 앞에서 사망했다.[1]2. 3. 치세
비두다바는 치세 동안 코살라의 봉신국이었던 칼라마 공화국을 완전히 합병했다.[1] 칼라마족이 부처 사후에 그의 유해 분배를 요청하지 않은 것은 당시 그들이 독립을 잃었기 때문일 수 있다.[1]비두다바는 코살라의 일부였던 샤카와 콜리야 공화국을 침략하여 영토를 정복하려 했다.[2] 양측 모두 막대한 인명 피해를 입은 긴 전쟁 끝에 비두다바는 마침내 샤카족과 콜리야족에게 승리하고 그들의 국가를 합병했다.[2] 이 전쟁의 세부 사항은 후대의 불교 기록에 의해 과장되었는데, 비두다바의 침공은 비두다바의 어머니가 된 노예 소녀를 아버지에게 시집보낸 것에 대한 보복 때문이라고 주장했다.[2] 실제로는 비두다바의 샤카 침공이 마가다 국왕 아자타삿투가 바지카 연맹을 정복한 것과 비슷한 동기를 지녔을 가능성이 있다. 아자타삿투는 바지카 공주의 아들이었으므로 어머니의 고향 영토에 관심이 있었다.[2] 코살라의 침공 결과 샤카족과 콜리야족은 비두다바 왕국에 병합된 후 정치적 중요성을 잃었다.[2] 샤카족은 합병 후 곧 코살라 인구로 흡수되었고, 소수의 실향민 가족만이 샤카 정체성을 유지했다.[2] 콜리야족도 합병 후 곧 정체성을 상실했다.[2]
샤카족을 정복하는 동안 코살라가 입은 막대한 인명 피해로 인해 코살라는 곧 동쪽 이웃인 마가다에 합병되었고, 비두다바는 아자타삿투에게 패배하여 살해당했다.[3]
2. 4. 몰락
비두다바는 샤카족 정복 과정에서 코살라국에 막대한 인명 피해를 입혀 국력이 약화되었고, 결국 동쪽의 이웃 마가다에 합병되었다. 비두다바는 아자타샤트루에게 패배하여 죽임을 당했다.[1]불교 설화에 따르면, 비두다바는 석존에게 "왕이시여, 친족의 그늘은 시원한 법입니다."라는 말을 세 번 듣고도 석가족을 멸망시키기 위해 카필라 성으로 쳐들어갔다. 부처님 얼굴도 세 번이라는 속담은 여기서 유래했다. 석존은 "그와 그의 군대는 7일 후에 죽을 것이다"라고 예언했고, 실제로 비두다바와 그의 군대는 전쟁 승리 연회 중 낙뢰를 맞거나, 강에서 물놀이를 하다 폭풍우로 불어난 강물에 휩쓸려 바다로 떠내려가 물고기 밥이 되었다고 한다.
3. 샤카족 멸망 사건
비두다바는 코살라의 봉신국이었던 칼라마 공화국을 완전히 합병했다. 이후 칼라마족은 부처의 사리 분배를 요청하지 않았는데, 이는 그들이 독립성을 잃었기 때문으로 보인다.[1]
비두다바는 샤카족과 콜리야족을 침공하여 긴 전쟁 끝에 승리하고 그들의 영토를 합병했다.[1] 이 전쟁의 세부 사항은 후대의 불교 기록에 의해 과장되었는데, 비두다바의 침공 동기가 어머니와 관련된 복수 때문이라고 주장한다.[1] 실제로는 마가다 국왕 아자타샤트루가 밧지 동맹을 정복한 것과 유사하게, 어머니의 고향 땅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있다.[1]
샤카족과 콜리야족은 코살라에 합병된 후 정치적 중요성을 잃었으며, 샤카족은 코살라 인구에 흡수되었고 콜리야족도 정체성을 상실했다.[1] 샤카족 정복 과정에서 코살라 역시 막대한 인명 피해를 입어 국력이 약화되었고, 결국 마가다에 합병되어 비두다바는 아자타샤트루에게 패배하여 살해당했다.[1]
3. 1. 배경
코살라의 파세나디 왕은 샤카족 족장 마하나마와 노예 소녀 나가문다 사이에서 태어난 딸 바사바카티야를 왕비로 맞이하였다.[4][5]당시 중인도에는 마가다국과 코살라국이라는 두 강대국이 있었고, 그 사이에서 샤카족은 작은 부족으로서 코살라국에 종속되어 있었다. 석존이 깨달음을 얻은 지 얼마 되지 않아, 파세나디 왕은 샤카족에게 왕비를 요구했지만, 왕비를 내주지 않으면 샤카족을 공격할 생각이었다.
샤카족은 "우리는 대성(大姓)이다. 어찌 천한 자와 인연을 맺어야 하는가!?"라며 혈통의 긍지를 높게 여겼다(샤카족은 다른 민족과는 혼인하지 않는다는 전통이 있었다고도 한다). 샤카족의 마하남은 "파세나디 왕은 포악하니, 만약 화를 내면 우리나라를 멸망시킬 것이다"라고 생각하여, 자신의 노예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름다운 딸을 자신의 딸이라고 속여 파세나디 왕에게 시집보냈다. 이 왕비가 곧 비두다바 태자를 낳았다.
3. 2. 원한
비두다바는 코살라 파세나디 왕과 샤카족 족장 마하나마의 딸이자 노예 소녀 나가문다의 딸인 바사바카티야 사이에서 태어났다.[4][5] 그는 할아버지 마하나마와 할머니 나가문다에 대해 궁금해했지만, 어머니 바사바카티야는 그가 그들을 방문하는 것을 막았다. 그러나 어느 날, 비두다바의 부탁에 마지못해 허락하였다. 샤카 공화국에서 그는 기대했던 따뜻한 환영을 받지 못했고, 어머니의 진짜 정체를 알게 되면서 분노하였다.[6]비두다바가 8세가 되자, 왕은 비두다바에게 어머니의 친정인 석가족 땅으로 가서 궁술 등을 수련하도록 명하였다. 비두다바는 석가족 자제들과 함께 궁술을 배웠다. 그러던 중, 성 안에 새로운 강당이 완성되었는데, 비두다바가 신들과 왕족만이 오를 수 있는 신성한 사자좌에 올라앉았다. 이를 본 석가족 사람들은 "너는 하녀가 낳은 아이다. 그런데 아직 제천도 오르지 못했는데 앉았구나"라며 분노하며 비두다바를 내쫓고 채찍으로 때렸다. 이때 비두다바는 "내가 후에 왕위에 오르면, 이 일을 잊지 않겠다"고 원한을 품게 되었다.
일설에 따르면, 파세나디 왕도 이 사실을 알고 하녀였던 비(妃)와 비두다바 태자에게 혐오감을 느껴 지위를 낮춰 성에서 내쫓았다. 그러나 석가모니의 설득으로 원래의 생활로 돌아갔다고 한다.
3. 3. 침공과 멸망
비두다바는 왕위에 오른 뒤, 한때 코살라의 일부였던 샤카와 콜리야 공화국을 침공했다. 양측 모두 막대한 인명 피해를 입은 긴 전쟁 끝에, 비두다바는 마침내 샤카족과 콜리야족을 정복하고 그들의 국가를 합병했다.[1] 이 전쟁의 자세한 내용은 후대의 불교 기록에서 과장되었는데, 비두다바가 자신의 어머니가 된 노예 소녀를 아버지에게 시집보낸 것에 대한 보복으로 침공했다고 주장했다.[1] 실제로는 마가다 국왕 아자타샤트루가 밧지 동맹을 정복한 것과 비슷한 동기, 즉 어머니의 고향 땅에 대한 관심 때문에 침공했을 가능성이 있다.[1] 코살라의 침공 결과, 샤카족과 콜리야족은 비두다바의 왕국에 합병된 후 정치적 중요성을 잃었다.[1] 샤카족은 곧 코살라 인구에 흡수되었고, 소수의 실향민 가족만이 샤카 정체성을 유지했다. 콜리야족 역시 합병 후 곧 정체성을 상실했다.[1]석존은 비두다바가 샤카족을 공격할 것을 알고 마른 나무 아래에서 기다렸다고 한다. 비두다바 왕이 석존에게 이유를 묻자, 석존은 "친족의 그늘은 시원한 법"이라고 답하며 세 번이나 발길을 돌리게 했다. 그러나 결국 비두다바는 카필라 성으로 쳐들어갔고, 부처님 얼굴도 세 번이라는 속담이 여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4]
이때, 마하나만은 "제가 연못에 잠겨 있는 동안 도망친 사람은 살려주십시오."라고 간청했고, 비두다바는 이를 허락했다. 그러나 마하나만은 연못 속에서 자신의 머리카락을 풀에 묶어 목숨을 끊은 채 발견되었다.[4] 비두다바는 샤카족 여성 500명을 빼앗았고, 샤카족은 코살라국 군대에 의해 거의 멸망했다.[4]
샤카족을 정복하는 동안 코살라가 입은 막대한 인명 피해로 인해, 코살라는 곧 동쪽 이웃인 마가다에 합병되었고, 비두다바는 아자타샤트루에게 패배하여 살해당했다.[1] 또한 비두다바는 샤카족을 멸망시키고 돌아와 자신의 형인 제타 태자(기타)도 살해했다고 전해진다.[4] 석존은 "그와 그의 군대는 7일 후에 죽을 것이다"라고 예언했고, 예언대로 전쟁 승리 연회 중 낙뢰, 혹은 폭풍우로 인해 강물이 불어나 바다로 휩쓸려 물고기의 먹이가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4]
4. 기타
무샤노코지 사네아쓰의 희곡 나도 모른다는 비두다바의 샤카족 멸망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4. 1. 한국 불교에 미친 영향
무샤노코지 사네아쓰의 희곡 나도 모른다는 샤카족 멸망 상황을 다룬 작품이다.참조
[1]
서적
Political History of Ancient India
University of Calcutta
1972
[2]
서적
The Culture and Civilisation of Ancient India in Historical Outline
Vikas Publishing House
1988
[3]
서적
Legends from Indian History
https://books.google[...]
Children's Book Trust
1968
[4]
서적
Political History of Ancient India
University of Calcutta
1972
[5]
서적
The Culture and Civilisation of Ancient India in Historical Outline
Vikas Publishing House
1988
[6]
서적
Legends from Indian History
https://books.google[...]
Children's Book Trust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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