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타우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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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비타우타스는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지배자이자 1377년부터 1430년까지 살았던 인물이다. 그는 아버지 케스투티스와 요가일라 사이의 권력 투쟁에 휘말렸으며, 튜턴 기사단과의 동맹과 결별을 반복하며 권력을 다졌다. 1392년 아스트라바 조약을 통해 리투아니아의 섭정이 되었고, 폴란드와의 크레보 연합 및 호로들 연합을 통해 관계를 맺었다. 비타우타스는 동방 정책을 통해 영토를 확장하고, 튜턴 기사단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삼지대를 획득했다. 그는 국가의 경제 발전을 지원하고, 중앙 집권화를 추진하는 등 개혁을 단행했으며, 1430년 사망 후 리투아니아는 폴란드에 통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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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타우타스 | |
|---|---|
| 기본 정보 | |
![]() | |
| 직함 | 트라카이 공작 |
| 통치 기간 | 1392년 8월 4일 - 1430년 10월 27일 |
| 이전 통치자 | 요가일라 스키르가일라 (섭정) |
| 다음 통치자 | 슈비트리가일라 |
| 출생일 | 1350년경 |
| 출생지 | 세니에이 트라카이, 리투아니아 대공국 |
| 사망일 | 1430년 10월 27일 |
| 사망지 | 트라카이, 리투아니아 대공국 |
| 매장지 | 빌뉴스 대성당, 빌뉴스 |
| 배우자 | 안나 율리아나 |
| 자녀 | 소피아 |
| 가문 | 케스투티스 |
| 아버지 | 케스투티스 |
| 어머니 | 비루테 |
| 이름 | |
| 리투아니아어 | '' |
| 벨라루스어 | Vitaŭt |
| 사모기티아어 | Vītauts Dėdlīsis |
| 폴란드어 | Witold Kiejstutowicz, Witold Aleksander, Witold Wielki |
| 우크라이나어 | Vitovt |
| 루테니아어 | Витовт, Vitovt |
| 라틴어 | Alexander Vitoldus |
| 고대 독일어 | Wythaws, Wythawt |
2. 권력 투쟁
1384년 요가이라와 화해하여 귀국한 비타우타스는 골든 호드의 내전 당시 토크타미시를 지지하며 그의 세력과 동맹 관계를 맺었다. 1385년 요가이라가 폴란드 국왕으로 즉위하자, 비타우타스는 사실상 리투아니아의 통치를 맡아 발트 해와 흑해 방면으로 세력을 확장하였다. 1401년 바디스와프 2세로부터 공식적으로 리투아니아 대공 지위를 양위받아 즉위한다.
2. 1. 1377년–1384년
비타우타스의 삼촌인 알기르다스는 1377년 사망할 때까지 리투아니아 대공이었다. 알기르다스와 비타우타스의 아버지인 케스투티스는 이원집정 형태로 공동 통치했는데, 알기르다스는 동부를, 케스투티스는 서부를 다스렸으며, 케스투티스는 주로 튜턴 기사단에 대한 방어를 담당했다.[1] 알기르다스의 사후 그의 아들 요가일라가 뒤를 이었고, 권력 투쟁이 이어졌다.[1] 1380년 요가일라는 케스투티스에 대항하여 튜턴 기사단과 비밀리에 도비디슈키스 조약을 체결했다.[1] 1381년 케스투티스가 이 사실을 알게 되자 빌뉴스를 장악하고 요가일라를 투옥시킨 후 자신이 대공이 되었다.[1] 그러나 요가일라는 탈출하여 케스투티스에 대항하는 군대를 모았다.[1] 양측은 대치했지만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다.[1] 케스투티스는 협상할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그와 비타우타스는 체포되어 크레바 성으로 이송되었다.[1] 일주일 후, 케스투티스는 사망했다.[1] 그가 자연사했는지, 아니면 살해당했는지는 여전히 논쟁의 여지가 있다.[1]1382년 비타우타스는 크레바에서 탈출하여 당시 요가일라와 협상 중이던 튜턴 기사단에 도움을 요청했다.[1] 요가일라와 기사단은 두뷔사 조약에 합의했는데, 요가일라는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기사단의 동맹이 되며, 두뷔사 강까지의 사모기티아 일부를 기사단에 넘겨주기로 약속했다.[1] 그러나 이 조약은 비준되지 않았고 1383년 여름 요가일라와 기사단 사이의 전쟁이 재개되었다.[1] 비타우타스는 가톨릭 세례를 받고 비간드(리투아니아어: ''Vygandas'')라는 이름을 받았다.[1] 비타우타스는 요가일라에 대항하는 여러 차례의 습격에 참여했다.[1] 1384년 1월 비타우타스는 네베지스 강까지의 사모기티아 일부를 튜턴 기사단에 할양하는 대신 리투아니아 대공으로 인정받기로 약속했다.[1] 그러나 같은 해 7월 비타우타스는 기사단과 결별하고 요가일라와 화해했다.[1] 그런 다음 그는 튜턴 기사단의 중요한 성 세 곳을 불태우고 트라카이를 제외한 케스투티스의 모든 영토를 되찾았다.[1]
2. 2. 1385년–1392년
1385년, 요가이라는 크레보 연합을 통해 폴란드와 연합을 맺었고, 폴란드의 야드비가와 결혼하여 야기에우워 2세(Władysław II Jagiełło)로서 폴란드 국왕이 되었다. 비타우타스는 이 연합에 참여했고, 1386년 알렉산더(Alexander)라는 이름으로 재세례를 받아 가톨릭교도가 되었다. 같은 해 비타우타스는 폴란드 국왕으로 즉위한 야기에우워에게 충성을 맹세했다.[8]
요가이라는 그의 동생인 스키르가일라를 리투아니아의 섭정으로 남겨두었다. 그러나 스키르가일라는 백성들에게 인기가 없었고, 비타우타스는 대공이 될 기회를 보았다. 1389년 그는 빌뉴스를 공격했지만 실패했다. 1390년 초, 비타우타스는 쾨니히스베르크 조약 (1390)을 통해 다시 한번 테우토니 기사단과 동맹을 맺었다.[9] 비타우타스는 1384년 합의를 확인하고 사모기티아를 기사단에 할양해야 했다. 1391년, 비타우타스는 더 많은 영향력을 얻기 위해 외동딸인 소피아를 바실리 1세와 결혼시켰다.[9]
폴란드 귀족들은 새로운 국왕이 리투아니아 문제에 너무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것에 불만을 느꼈다. 전쟁이 수년간 계속될 수 있으며 폴란드에 이익이 되지 않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1392년, 요가이라는 마조비에의 헨리를 보내 비타우타스를 스키르가일라 대신 섭정으로 임명하자는 제안을 했다. 비타우타스는 이를 받아들였고 다시 기사단과 결별했다. 그는 테우토니 기사단의 성 세 곳을 불태우고 빌뉴스로 돌아왔다. 요가이라와 비타우타스는 아스트라바 조약에 서명했는데, 이 조약에서 비타우타스는 케스투티스의 모든 영토를 회복했고, 더 많은 영토를 얻었다. 비타우타스는 요가이라의 이름으로 리투아니아를 통치할 것이었다. 비타우타스가 사망한 후, 그의 모든 영토와 권력은 요가이라에게 돌아갈 것이었다.
3. 리투아니아 대공
1384년 비타우타스는 사촌인 요가이라와 화해하여 귀국하였다. 1385년 요가이라가 폴란드 국왕으로 즉위하자, 사실상 리투아니아의 통치를 맡았다.[16] 1401년 바디스와프 2세로부터 공식적으로 리투아니아 대공 지위를 양위받았다.
이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으로 독일 기사단에 대항하여 1410년 그룬발트 전투에서 승리했고, 호로들 합의에서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국가는 더욱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한편, 딸 소피아를 모스크바 대공 바실리 1세에게 시집보내 그의 아들 바실리 2세의 장인으로서 모스크바 대공국의 정치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3. 1. 동방 정책
비타우타스는 알기르다스의 루테니아 영토 확장 정책을 이어받아, 가능한 한 많은 영토를 확보하고자 했다. 이미 많은 영토가 대공의 통치하에 있었지만, 나머지는 몽골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1395년 티무르에게 패배한 후 폐위된 골든 호드의 칸 토크타미시는 비타우타스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비타우타스는 토크타미시의 복위를 돕는 대가로 더 많은 영토를 할양받기로 합의했다. 1398년 비타우타스의 군대는 크림 반도 일부를 공격하여 성을 건설했고, 리투아니아는 발트 해에서 흑해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많은 타타르족 포로들이 민족 리투아니아로 끌려왔다.폴란드가 리투아니아를 종속시키려는 시도가 계속되자, 비타우타스는 튜턴 기사단과 동맹을 맺었다. 1398년 10월 살리나스 조약을 통해 비타우타스는 자신의 조상 영토인 사모기티아를 기사단에게 할양하고, 프스코프와 노브고로드 대공국 정복 및 분할에 대한 동맹을 맺었다.[9]

티무르에 대한 성공적인 원정에 고무된 비타우타스와 요가일라는 교황 보니파시오 9세에게 몽골에 대한 십자군을 조직할 지지를 얻었다. 이는 리투아니아가 기독교를 완전히 받아들여 신앙을 수호하고 있으며, 튜턴 기사단이 더 이상 리투아니아를 공격할 근거가 없음을 보여주는 정치적 행보였다. 그러나 1399년 보르스크라 강 전투에서 십자군은 참패했고, 요가일라의 두 형제를 포함한 20명이 넘는 왕족이 사망했으며, 비타우타스 자신도 간신히 살아남았다. 이 패배는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폴란드에 큰 충격을 주었고, 많은 영토가 비타우타스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스몰렌스크는 세습 통치자 스몰렌스크의 게오르게에게 탈환되었고, 1404년까지 리투아니아에 재정복되지 않았다.
1406년~1408년, 비타우타스는 사위인 모스크바의 바실리 1세와 튜턴 기사단의 지원을 받아 대공으로 자처한 요가일라의 동생 슈비트리가일라에 대항하여 전쟁을 벌였다. 두 군대는 우그라 조약으로 전투 없이 대치를 끝냈는데, 이 조약에 따라 벨리키 노브고로드는 요가일라의 형제 랭그베니스에게, 프스코프는 요가일라의 사절 예르지 노스에게 주어졌다. 이는 라치옹 조약을 명백히 위반하는 것이었다.[10][11] 모스크바와의 전쟁은 1408년 12월에 끝났지만, 이 조건은 첼리에의 헤르만 2세의 중재 시도에도 불구하고 튜턴 기사단과의 추가적인 갈등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12]
3. 2. 튜턴 기사단과의 전쟁
살리나스 조약에서 비타우타스는 삼지대를 튜턴 기사단에게 넘겼다. 삼지대는 프로이센에 기반을 둔 튜턴 기사단을 라트비아에 기반을 둔 리보니아 기사단과 분리했기 때문에 기사단에게 매우 중요했다.[13][14] 두 기사단은 연합하여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1401년 비타우타스의 지원을 받은 삼지대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두 개의 성을 불태우면서 기사단은 3년 동안만 삼지대를 지배했다.[9] 기사단은 비타우타스의 칭호를 빼앗고자 했던 요가일라의 형제 슈비트리가일라의 지원을 받았다. 1404년 라치옹 평화 조약이 체결되어 삼지대는 다시 튜턴 기사단에게 넘어갔고, 폴란드는 또 다른 전쟁이 일어날 경우 리투아니아를 지원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기사단은 동쪽에서 비타우타스를 지원하고 게디미나스 왕조 중 리투아니아 대공의 칭호를 주장할 수 있는 자들을 지원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이 조약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고, 모든 당사자들은 전쟁을 준비했다.1408년 비타우타스는 동쪽에서 평화를 이루고 삼지대 문제로 돌아왔다. 1409년 반군이 스키르스네무네 성을 불태우면서 튜턴 기사단에 대한 두 번째 삼지대 봉기가 시작되었다.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모두 반군을 지원했다. 비타우타스는 자신의 지배하에 있는 18개 지역에서 대규모 군대를 모아 폴란드군과 합류하여 마리엔부르크 성에 있는 튜턴 본부로 진격했다. 1410년 비타우타스는 직접 그룬발트 전투에서 대공국의 군대를 지휘하여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결정적인 승리를 이끌었다.[9] 마리엔부르크 공방전이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튜턴 기사단은 결코 힘을 회복하지 못했고 그 이후로 폴란드-리투아니아에 대한 위협은 줄어들었다.
1411년 토룬 평화 조약의 결과로 비타우타스는 생애 동안 삼지대를 얻었지만, 국경에 대한 합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지기스문트는 분쟁 조정에 동의했고, 1413년 네만 강의 오른쪽 강둑 전체가 삼지대이며 리투아니아에 속한다고 선언했다. 튜턴 기사단은 이에 동의하지 않았고 1414년 새로운 전쟁이 시작되었지만, 몇 달 만에 끝났다. 분쟁은 콘스탄츠 공의회로 넘겨졌지만 해결되지 않았다. 이후 여러 조정 시도가 실패했고, 1422년 튜턴 기사단과 또 다른 전쟁이 시작되었다. 몇 달간의 전투 끝에 멜노 호수 조약이 체결되어 삼지대는 영구히 리투아니아에 반환되었고, 메멜시와 주변 지역은 기사단에 남았다. 이 조약에 따라 확립된 국경은 1923년 메멜 영토 분쟁이 일어날 때까지 약 500년 동안 안정적으로 유지되었다.
3. 3. 폴란드와의 관계
1384년 비타우타스는 사촌인 요가이라와 화해하여 귀국하였다. 1385년 요가이라가 폴란드 국왕으로 즉위하자, 사실상 리투아니아의 통치를 맡았다.[16] 1401년 바디스와프 2세로부터 공식적으로 리투아니아 대공 지위를 양위받아 즉위한다.1399년 폴란드의 야드비가 여왕과 신생아가 출산 중 사망하면서, 요가일라의 폴란드 내 권력은 위태로워졌다. 보르스크라 전투에서의 패배는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간 관계를 재평가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1401년 빌뉴스-라돔 연합이 체결되었다. 비타우타스는 광범위한 자치권을 부여받았지만, 그가 사망한 후 리투아니아 대공 칭호와 권한은 폴란드 국왕에게 이전될 예정이었다. 만약 야기에우워가 상속인 없이 먼저 사망할 경우, 폴란드 귀족들은 비타우타스와 상의하지 않고 새로운 국왕을 선출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1413년 비타우타스는 폴란드와의 호로들 연합 창설자 중 한 명이었다. 연합 조약에 따라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별도 대공과 의회를 유지하게 되었다. 동시에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세임 모두 중요한 문제를 공동으로 논의하게 되었다. 이 연합은 리투아니아 그리스도교 귀족들에게 폴란드 슈략타와 동일한 권리를 부여했기 때문에 정치적, 문화적으로 중요했다. 이 조약에는 동방 정교회 귀족은 포함되지 않았으며, 이는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귀족 간 더 많은 접촉과 협력의 길을 열었다. 이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으로 독일 기사단에 대항하여 1410년 그룬발트 전투에서 승리했다. 그 결과, 직후 호로들 합의에서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국가는 더욱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1429년 1월 루츠크 회의에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지기스문트(Sigismund, king of Hungary)는 비타우타스를 리투아니아 국왕으로 즉위시킬 것을 제안했다. 이는 비타우타스, 블라디슬라프 국왕, 폴란드 귀족들 사이에 큰 위기를 초래했다. 비타우타스 대관식을 지지하고 리투아니아, 헝가리, 튜턴 기사단 간 동맹을 제안하는 문서를 운반하던 사절단은 1430년 가을 폴란드-리투아니아 국경에서 저지당했다.[16]
3. 4. 개혁
비타우타스는 국가 경제 발전을 지원하고 많은 개혁을 도입했다. 그의 통치 아래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점차 중앙집권화되었는데, 왕위와 가계적으로 연결된 지역 공작들이 비타우타스에게 충성하는 총독들로 대체되었기 때문이다. 총독들은 부유한 지주들이었고, 리투아니아 귀족의 기반을 형성했다. 비타우타스 통치 기간 동안 영향력 있는 라드지빌 가문과 고슈타우타스 가문이 부상하기 시작했다.1398년 비타우타스는 크리미아 카라이 (388가구)와 크리미아 타타르족을 데려왔다. 그들의 주요 역할은 성과 다리를 지키는 것이었지만, 통역관, 농부, 상인, 외교관으로도 일했다. 그는 그들 사이에서 매우 높은 명성을 얻었으며, 그의 사망 기념일은 1930년 빌뉴스의 케네사에서 공식적으로 기념되었다.[17]
4. 가족
비타우타스는 케이스투티스(Kęstutis)와 그의 아내 비루테(Birutė)의 아들이었다. 비타우타스는 1386년 폴란드 국왕이 된 요가일라(Jogaila)(우와디스와프 2세 야기에우워(Władysław II Jagiełło))의 사촌이자 어린 시절 친구였다. 1370년경 리투아니아 대공비 안나(Anna, Grand Duchess of Lithuania)와 결혼하여 딸 소피아(Sophia of Lithuania)를 낳았다. 소피아는 모스크바 대공 바실리 1세(Vasily I of Moscow)와 결혼하여 아들 바실리 2세(Vasily II of Moscow)의 어머니이자 섭정이 되었다. 1418년 안나가 사망한 후, 비타우타스는 그녀의 조카이자 이반 올샨스키(Ivan Olshanski)의 딸인 줄리아나 올샨스카(Juliana Olshanska)와 결혼했는데, 그녀는 비타우타스보다 오래 살았다.[18] 두 여성의 관계 때문에 빌뉴스 주교는 교황의 특별 허가 없이는 결혼식을 집례하려 하지 않았지만, 얀 크로피들로(Jan Kropidło)는 그러한 망설임 없이 1418년 11월 13일에 그들을 결혼시켰다.[19] 16세기 비호비에츠 연대기(Bychowiec Chronicle)에 따르면 그의 첫 번째 아내는 마리아 루콤스카(Maria Łukomska)였지만, 이는 다른 자료들에 의해 확인되지 않았다.[19]
5. 각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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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일본어) 長音 を無視してヴィタウタスと書かれる
[22]
문서
(일본어) 主格 において「ヴィートルト」のように発音される
[23]
문서
(일본어) 原語発音は「ヴィータフト」のようになる
[24]
문서
(일본어) 原語発音にはぶれがあるが、標準的には「ヴィートウト」と表され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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