빔펜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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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빔펜 전투는 1622년 5월 6일 30년 전쟁 중 벌어진 전투로, 바덴-두를라흐 변경백 게오르크 프리드리히가 이끄는 개신교 군대와 요한 체르클라스 폰 틸리 장군이 지휘하는 가톨릭 동맹군 사이에 벌어졌다. 전투 이전 개신교 군은 분열되었고, 가톨릭 군은 스페인 군의 지원을 받으며 전력을 강화했다. 게오르크 프리드리히는 전투 마차를 이용한 수비 전술을 사용했지만, 가톨릭 군의 공격에 패배하여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이 전투로 인해 개신교 세력은 약화되었고, 팔츠 선제후국의 운명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개신교측 세력으로 참전했던 프리드리히와 만스펠트의 군대는 밍골스하임 전투에서 틸리의 추격군을 물리치고 합류했다. 그러나 두 군대는 서로 다른 입장과 병력 특성 때문에 원활한 전략을 구상하기 어려웠다. 만스펠트는 대규모 전투를 피하려 했지만, 프리드리히는 전투를 원했다. 또한, 만스펠트는 가톨릭 교도였고 약탈로 물자와 병력을 조달했기 때문에 평판이 좋지 않았다. 결국 두 군대는 각자 활동하기로 결정했고, 만스펠트군은 상대 영토를 공격하고, 바덴군은 적 병력을 맞아 수비하는 방식을 택했다.
2. 전투 이전
한편, 가톨릭군의 틸리는 프리드리히와 만스펠트 군대의 합류에 대응하여 코르도바가 이끄는 스페인 파병 군대를 불러 합류시켰다. 틸리는 적이 분열된 것에 기뻐하며, 각개격파를 위해 바덴군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주장하여 관철시켰다.
프리드리히가 수비를 맡은 이유는 바덴군이 대규모 전투용 마차(Wagenburg)를 보유하고 있었고, 이를 수비용으로 사용하는 전술에 대한 강한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과거 얀 지슈카가 후스파 전쟁 당시 전투 마차를 수비용으로 사용하여 큰 성과를 낸 것을 알고 있었으며, 날붙이와 박격포 등을 부착하여 수비에 치중하는 전술을 맹신하고 있었다. 그는 적의 병력이 압도적으로 많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전술 덕분에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1]
2. 1. 보헤미아 반란과 팔츠 선제후의 개입
30년 전쟁의 '보헤미아 반란' 단계에서 개신교 보헤미아 귀족들은 페르디난트 2세를 왕으로 인정하는 것을 거부하고,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에게 보헤미아 왕관을 제안했다. 프리드리히는 1619년에 대관식을 치렀지만, 1620년 백산 전투에서 틸리 백작 요한 체르클라에스 장군 휘하의 가톨릭 동맹 군대에 왕국을 잃었다.
개신교 제후들 사이의 분열로 인해 개신교 연합은 1620년 울름 조약에서 분쟁에 대한 중립을 선언할 수밖에 없었고, 이듬해 해산되었다.
개신교도측 세력으로서 전쟁에 뛰어들었던 프리드리히와 만스펠트의 군대는 서로 합류를 시도하였고, 밍골스하임 전투에서 만스펠트가 틸리 백작 요한 체르클라에스의 추격군을 물리침으로써 합류가 성사될 수 있었다. 그러나 만스펠트와 프리드리히군은 서로 가진 입장 차이와 병사들의 특성 때문에 원활한 전략 구상을 할 수 없었다. 만스펠트는 대규모 전투를 피하려 한 반면, 프리드리히는 대규모 전투를 추구하였으며, 만스펠트는 가톨릭 교도인데다 약탈로 물자나 병력을 조달하는 방식 때문에 평가가 매우 좋지 않았다. 때문에 두 군대는 각자 활동하기로 결정했으며, 만스펠트군은 상대의 영토를 공격하는 방법을, 바덴군은 상대의 병력을 맞아 수비하는 방법을 택하기로 했다.[1]
한편, 가톨릭군의 틸리는 프리드리히와 만스펠트의 군대가 합류하자 이에 대응하여 스페인으로부터 파병되었던 곤살로 페르난데스 데 코르도바가 이끄는 군대를 불러 합류하였다. 틸리는 합류했던 적이 갈라진 것에 기뻐했고, 이를 각개격파하기 위해 바덴군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할 것을 주장해 관철시켰다. 이에 따라 틸리와 코르도바가 이끄는 가톨릭군은 프리드리히가 이끄는 개신교도군을 격파하기 위해 진격하였다.[1]
프리드리히가 수비를 맡은 이유는 바덴군이 대규모의 전투용 마차(Wagenburg)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것을 수비용으로 사용하는 전술에 대해 강한 자신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과거 얀 지슈카가 후스파 전쟁 당시 전투 마차를 수비용으로 사용하여 큰 전과를 낸 것을 알고 있었으며, 때문에 여기에 날붙이와 박격포 등을 부착하여 수비에 치중하는 전술을 추구했고 그 효용성을 맹신하고 있었다. 그는 적의 병력이 압도적으로 많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이러한 전술에 힘입어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거라 믿고 있었다.[1]
2. 2. 팔츠 전역의 시작
개신교도 세력으로 참전했던 프리드리히와 만스펠트의 군대는 밍골스하임 전투에서 틸리 백작 요한 체르클라에스의 추격군을 물리치고 합류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두 군대는 서로 다른 입장과 병력 특성 때문에 원활한 전략을 구상하기 어려웠다. 만스펠트는 대규모 전투를 피하려 했지만, 프리드리히는 전투를 원했다. 또한, 만스펠트는 가톨릭 교도였고 약탈로 물자와 병력을 조달했기 때문에 평판이 좋지 않았다. 결국 두 군대는 각자 활동하기로 결정했고, 만스펠트군은 상대 영토를 공격하고, 바덴군은 적 병력을 맞아 수비하는 방식을 택했다.
한편, 가톨릭군의 틸리는 프리드리히와 만스펠트 군대의 합류에 대응하여 코르도바가 이끄는 스페인 파병 군대를 불러 합류시켰다. 틸리는 적이 분열된 것에 기뻐하며, 각개격파를 위해 바덴군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주장하여 관철시켰다. 이에 따라 틸리와 코르도바가 이끄는 가톨릭군은 프리드리히가 이끄는 개신교도군을 격파하기 위해 진격하였다.
프리드리히가 수비를 맡은 이유는 바덴군이 대규모 전투용 마차(Wagenburg)를 보유하고 있었고, 이를 수비용으로 사용하는 전술에 대한 강한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과거 얀 지슈카가 후스파 전쟁 당시 전투 마차를 수비용으로 사용하여 큰 성과를 낸 것을 알고 있었으며, 날붙이와 박격포 등을 부착하여 수비에 치중하는 전술을 맹신하고 있었다. 그는 적 병력이 압도적으로 많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전술 덕분에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2]
2. 3. 개신교 군대의 분열과 가톨릭 군대의 결집
밍골스하임 전투에서 틸리 백작 요한 체르클라에스의 추격군을 물리친 만스펠트와 프리드리히의 군대는 합류에 성공했다. 그러나 두 군대는 서로 다른 입장과 병사들의 특성 때문에 원활한 전략을 세우기 어려웠다. 만스펠트는 대규모 전투를 피하려 했지만, 프리드리히는 전투를 원했다. 또한, 만스펠트는 가톨릭 교도인데다 약탈로 물자와 병력을 조달하는 방식 때문에 평판이 좋지 않았다. 결국 두 군대는 각자 활동하기로 결정했다. 만스펠트는 상대 영토를 공격하고, 바덴군은 적의 병력을 맞아 수비하는 역할을 맡았다.
한편, 가톨릭 군대의 틸리는 프리드리히와 만스펠트 군대의 합류에 대응하여, 스페인에서 파병된 곤살로 페르난데스 데 코르도바가 이끄는 군대를 불러 합류시켰다. 틸리는 적이 분열된 것에 기뻐하며, 각개격파를 위해 바덴군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주장하여 관철시켰다. 이에 따라 틸리와 코르도바가 이끄는 가톨릭 군대는 프리드리히가 이끄는 개신교 군대를 격파하기 위해 진격하였다.
2. 4. 전투 마차 전술에 대한 맹신
틸리 백작 요한 체르클라에스의 추격군을 물리치고 곤살로 페르난데스 데 코르도바가 이끄는 스페인 파병군과 합류한 가톨릭군에 맞서, 프리드리히가 이끄는 바덴군은 대규모 전투 마차(Wagenburg)를 이용한 수비 전술에 강한 자신감을 보였다. 프리드리히는 과거 얀 지슈카가 후스파 전쟁에서 전투 마차를 활용하여 큰 승리를 거둔 것을 알고 있었고, 자신의 전투 마차에도 날붙이와 박격포 등을 부착하여 수비력을 강화했기 때문에 적의 병력이 압도적으로 많음에도 불구하고 승리할 수 있다고 믿었다.[1]
3. 전투
1622년 5월 6일, 양측은 이른 아침부터 오전 11시까지 서로에게 공격을 가했지만 실패했다. 양측 모두 바겐부르크 방어선을 구축했고, 강력한 포병을 배치했으며 공격에 신중했다. 틸리는 처음에는 코르도바 부대를 예비대로 유지했는데, 주변에 있는 다른 프로테스탄트 군대의 공격을 두려워했지만 실제로 공격은 없었다. 가톨릭 군대가 무너지기 시작하자 틸리의 정예 연대가 자리를 지키며 빽빽한 창병 대형을 형성하여 게오르크 프리드리히의 기병 연대를 쫓아냈다.[3]
저녁까지 전투는 소강 상태였고, 가톨릭 측의 게오르크 프리드리히의 우익 측면 공격으로 그의 기병대가 도망쳤다. 오후 6시경 적의 포탄이 프로테스탄트 화약고에서 폭발을 일으켜 그들의 대열에 공포를 확산시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의 바겐부르크는 가톨릭 측의 공격으로 함락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뵐링거 바흐'' 개울을 건너 도망치려다 사망했다.[4][5]
3. 1. 초기 교전
틸리는 처음 목도하는 바덴군의 전투 마차를 보고 그것을 시험할 목적으로 테르시오 보병대의 접근을 지시했다. 적 보병대가 접근하자 마차에 설치된 박격포에서 대규모의 포탄이 터져 나왔고, 가톨릭군 보병대는 큰 손해를 입고 퇴각하였다. 이에 고무된 프리드리히는 방심하고 병사들을 휴식하게 했으나, 이 틈을 타 스페인군의 소규모 보병대가 바덴군 좌측에 있는 숲으로 이동해 점령해버렸다. 좌측이 노출된 프리드리히는 이를 쫓아내기 위해 병사들을 동원했으나, 강력한 스페인 테르시오의 위력에 계속 격퇴되었고, 3,000명 가량의 병력을 투입하고서야 이들을 몰아낼 수 있었다.[3] 분노한 프리드리히는 전황을 타개하기 위해 우측에 위치시킨 기병대를 모두 동원하여 가톨릭군의 좌측 기병대를 공격하게 했다.
경기병대가 대부분이었던 가톨릭군 기병대는 패퇴해 물러났고, 바덴군 기병대는 측면이 노출된 가톨릭군 보병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가톨릭군 보병대의 주축인 테르시오 부대는 측면 공격에도 저항력이 있는데다, 틸리가 적의 측면 공격에 대비해 부대 양 측면에 가장 뛰어난 테르시오 부대를 배치해 놓았기 때문에 기병대의 측면 공격은 전혀 통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틈에 가톨릭군 우측에 위치한 스페인군 소속 테르시오 보병대들이 바덴군의 전투 마차 대형을 향해 진격하였다. 스페인 보병대 3개 중 2개 부대는 전투 마차의 박격포탄을 견디지 못하고 물러났으나, 한 개 부대는 이를 견뎌내고 적 대형에 붙어 백병전을 벌이기 시작하였고, 기병대의 공격을 막아내던 가톨릭군 보병대가 반격을 시작하고 기병대까지 다시 반격해오자 바덴군 기병대는 패주하기 시작했다.[3]
기병대가 패주하자 바덴군 보병대는 동요하기 시작했다. 특히 프리드리히가 대부분의 고급 지휘관들을 기병대에 배치한 탓에 이 동요를 제지할 지휘관도 없었다. 그러던 중 가톨릭군 대포가 포탄이 실린 바덴군의 마차 하나를 명중시키자 연쇄 폭발이 일어났고, 바덴군 측에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것은 물론, 바덴군의 전투 마차 대형에 커다란 구멍이 생기게 되었다.[3]
가톨릭군은 구멍이 뚫린 전투 마차 방어선을 뚫고 적에게 진격하였고, 바덴군은 전체가 패주하기 시작했다. 가톨릭군은 패주하는 적들을 추격하여 사살하거나 포획하였고, 프리드리히는 대부분의 병력을 잃고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3]
5월 6일, 양측은 이른 아침부터 오전 11시까지 서로에게 공격을 가했지만 실패했다.
양측 모두 바겐부르크 방어선을 구축했고, 강력한 포병을 배치했으며 공격에 신중했다. 틸리는 처음에는 코르도바 부대를 예비대로 유지했는데, 주변에 있는 다른 프로테스탄트 군대의 공격을 두려워했지만 실제로 공격은 없었다. 가톨릭 군대가 무너지기 시작하자 틸리의 정예 연대가 자리를 지키며 빽빽한 창병 대형을 형성하여 게오르크 프리드리히의 기병 연대를 쫓아냈다.[3]
초저녁까지 전투는 소강 상태였고, 가톨릭 측의 게오르크-프리드리히의 우익 측면 공격으로 그의 기병대가 도망쳤다. 오후 6시경 적의 포탄이 프로테스탄트 화약고에서 폭발을 일으켜 그들의 대열에 공포를 확산시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의 바겐부르크는 가톨릭 측의 공격에 함락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뵐링거 바흐'' 개울을 건너 도망치려다 사망했다.[4][5]
3. 2. 스페인군의 숲 점령과 바덴군의 대응
틸리는 처음 보는 바덴군의 전투 마차를 시험하기 위해 테르시오 보병대의 접근을 명령했다. 적 보병대가 접근하자 마차에 설치된 박격포에서 포탄이 터져 나왔고, 가톨릭군 보병대는 큰 손해를 입고 퇴각했다. 이에 고무된 프리드리히는 방심하고 병사들을 쉬게 했다. 그러나 이 틈을 타 스페인군의 소규모 보병대가 바덴군 좌측의 숲을 점령했다. 좌측이 노출된 프리드리히는 병사들을 동원해 이들을 쫓아내려 했으나, 강력한 스페인 테르시오의 위력에 계속 격퇴되었고, 3,000명가량의 병력을 투입하고서야 이들을 몰아낼 수 있었다.[3]
3. 3. 바덴군 기병대의 공격과 가톨릭 군대의 반격
틸리는 처음 보는 바덴군의 전투 마차를 시험하기 위해 테르시오 보병대의 접근을 명령했다. 적 보병대가 접근하자 마차에 설치된 박격포에서 대규모 포탄이 발사되었고, 가톨릭군 보병대는 큰 피해를 입고 퇴각했다. 이에 고무된 프리드리히는 방심하고 병사들을 쉬게 했으나, 이 틈을 타 스페인군의 소규모 보병대가 바덴군 좌측 숲을 점령했다. 좌측이 노출된 프리드리히는 병사들을 동원해 이들을 쫓아내려 했으나, 강력한 스페인 테르시오에 계속 격퇴되었고, 3,000명 가량의 병력을 투입하고서야 이들을 몰아낼 수 있었다. 분노한 프리드리히는 전황을 타개하기 위해 우측 기병대를 모두 동원하여 가톨릭군의 좌측 기병대를 공격하게 했다.
경기병대가 대부분이었던 가톨릭군 기병대는 패퇴해 물러났고, 바덴군 기병대는 측면이 노출된 가톨릭군 보병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가톨릭군 보병대의 주축인 테르시오 부대는 측면 공격에도 저항력이 강했고, 틸리가 적의 측면 공격에 대비해 부대 양 측면에 가장 뛰어난 테르시오 부대를 배치해 놓았기 때문에 기병대의 측면 공격은 효과가 없었다. 오히려 이 틈에 가톨릭군 우측의 스페인군 소속 테르시오 보병대가 바덴군의 전투 마차 대형을 향해 진격했다. 스페인 보병대 3개 중 2개 부대는 전투 마차의 박격포탄을 견디지 못하고 물러났으나, 한 개 부대는 이를 견뎌내고 적 대형에 붙어 백병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기병대의 공격을 막아내던 가톨릭군 보병대가 반격을 시작하고 기병대까지 다시 반격해오자 바덴군의 기병대는 패주하기 시작했다.[3]
3. 4. 전투 마차 방어선의 붕괴와 바덴군의 패주
틸리는 처음 보는 바덴군의 전투 마차를 시험하고자 테르시오 보병대의 접근을 명령했다. 바덴군 마차의 박격포 공격으로 가톨릭군 보병대는 큰 피해를 입고 퇴각했다. 방심한 프리드리히는 병사들에게 휴식을 주었으나, 이 틈을 타 스페인군 보병대가 바덴군 좌측 숲을 점령했다. 프리드리히는 병력을 투입해 이들을 몰아냈지만, 3,000명의 병력을 소모해야 했다.
프리드리히는 전황을 타개하고자 우측 기병대로 가톨릭군 좌측 기병대를 공격하게 했다. 가톨릭군 기병대는 패퇴했으나, 틸리가 배치한 테르시오 부대 덕분에 기병대의 측면 공격은 효과가 없었다. 오히려 가톨릭군 우측의 스페인군 테르시오 보병대가 바덴군의 전투 마차 대형을 공격했다. 스페인 보병대 3개 중 2개 부대는 격퇴되었으나, 1개 부대가 백병전을 벌이기 시작했고, 가톨릭군 보병대와 기병대의 반격으로 바덴군 기병대는 패주했다.
기병대 패주에 바덴군 보병대는 동요했고, 지휘관 부재로 혼란은 가중되었다. 가톨릭군의 포격으로 바덴군 마차에서 연쇄 폭발이 일어나 전투 마차 대형에 구멍이 생겼다. 가톨릭군은 이 틈으로 진격했고, 바덴군은 패주했다. 프리드리히는 대부분의 병력을 잃고 달아났다.[3]
5월 6일 오전 11시까지 양측의 공격은 실패했다. 양측 모두 바겐부르크 방어선을 구축하고 포병을 배치했다. 틸리는 코르도바 부대를 예비대로 유지했으나, 실제 공격은 없었다. 가톨릭 군대가 무너지자 틸리의 정예 연대가 창병 대형으로 게오르크 프리드리히의 기병대를 쫓아냈다.[3]
저녁까지 전투는 소강상태였고, 게오르크-프리드리히의 우익 측면 공격으로 그의 기병대가 도망쳤다. 오후 6시경 포탄이 프로테스탄트 화약고에서 폭발을 일으켜 대열에 공포를 확산시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겐부르크는 함락되었고, 많은 이들이 ''뵐링거 바흐'' 개울을 건너 도망치다 사망했다.[4][5]
4. 전투 결과 및 영향
게오르크 프리드리히는 얼굴에 부상을 입고 슈투트가르트로 겨우 탈출하여 장남에게 양위했다. 그러나 그의 영지는 가톨릭 군대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었고, 8월에는 영지의 상당 부분이 바덴 가문의 라이벌 가톨릭 분파인 바덴-바덴의 빌헬름에게 넘어갔다. 1771년까지 변경백국은 프로테스탄트 "바덴-두를라흐"와 가톨릭 "바덴-바덴"으로 분할되었다.[1]
틸리 장군은 작전을 계속하여 6월에 회흐스트 전투에서 다시 승리한 후, 팔츠 선제후국의 요새 도시들을 하나씩 정복해 나갔다.[1]
1623년 레겐스부르크 제국 의회는 프리드리히 5세의 영지와 선제후 자리를 바이에른 공작 막시밀리안에게 주었는데, 그는 가톨릭 동맹의 지도자였다. 1623년부터 그는 스스로를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1세로 칭했으며 그의 공국은 바이에른 선제후국이 되었다.[1]
4. 1. 전략적 실패와 전술적 한계
바덴군이 빔펜 전투에서 패한 주된 원인은 보병대와 기병대가 서로 협력하지 않고 따로 움직였기 때문이다. 특히, 전투 마차는 바덴군 보병이 앞으로 나아가 기병대를 돕는 것을 방해했다. 프리드리히가 참고한 후스파의 전투 마차 대형은 200년이 지난 30년 전쟁 시기에는 이미 효과가 없는 전술이었다.[1]이 전투에서 패하면서 프리드리히는 바덴 변경백으로서 모아놓았던 재산 대부분을 잃었고, 신교도군의 세력과 사기도 크게 떨어졌다. 이후 프리드리히는 신교도 내에서 큰 힘을 쓰지 못하고 뚜렷한 활약도 보여주지 못하다가, 1627년 하일리겐호펜 전투에서 진 뒤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1]
프리드리히의 전투 마차 전술은 움직임이 둔하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박격포 사격은 상대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이 전술은 나중에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이끄는 스웨덴군에 의해 발전되어 더 효과적인 전술이 되었다.[1]
4. 2. 개신교 세력의 약화
이 전투로 프리드리히는 바덴 변경백으로서 모아놓았던 대부분을 상실하였으며, 신교도군의 세력과 사기 또한 크게 하락하였다. 많은 것을 잃은 프리드리히는 이후 신교도 내에서도 큰 발언권을 가지기 어려웠으며, 뚜렷한 활약을 보이지 못하다가 1627년 하일리겐호펜 전투에서 패한 이후 그 책임을 지고 은퇴하게 된다.한편, 프리드리히의 전투 마차 전술은 기동성 측면에서는 한계를 보였으나, 이를 이용한 박격포 사격은 상대에게 큰 충격 효과를 불러왔다. 이 전술은 이후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이끄는 스웨덴군에 의해 개량되어, 보다 효율적인 전술로 거듭나게 된다.
4. 3. 전투 마차 전술의 발전
바덴군이 전투에서 패배한 이유는 보병대와 기병대가 유기적으로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상호 협조 없이 따로 행동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적을 막기 위해 내세웠던 전투 마차는 바덴군의 보병들이 적에게 진격하는 것을 방해해 기병대를 돕기 어렵게 만들었다. 프리드리히가 참고하고 개량했던 후스파의 전투 마차 대형은, 200년이 지난 30년 전쟁기에는 한계가 있는 전술이었다.[1]한편, 프리드리히의 전투 마차 전술은 기동성 측면에서는 한계를 보였으나, 이를 이용한 박격포 사격은 상대에게 큰 충격 효과를 불러왔다. 이 전술은 이후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이끄는 스웨덴군에 의해 개량되어, 보다 효율적인 전술로 거듭나게 된다.[1]
4. 4. 팔츠 선제후국의 운명
바덴군이 전투에서 패배한 이유는 보병과 기병 간의 유기적인 조화가 이루어지지 못했고, 상호 협조 없이 따로 행동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적을 막기 위해 내세웠던 전투 마차는 바덴군의 보병들이 적에게 진격하는 것을 방해해 기병대를 돕기 어렵게 만들었다. 프리드리히가 참고하고 개량했던 후스파의 전투 마차 대형은, 200년이 지난 30년 전쟁기에는 한계가 있는 전술이었던 것이다.[1]이 전투로 프리드리히는 바덴 변경백으로서 모아놓았던 대부분을 상실하였으며, 신교도군의 세력과 사기 또한 크게 하락하였다. 많은 것을 잃은 프리드리히는 이후 신교도 내에서도 큰 발언권을 가지기 어려웠으며, 뚜렷한 활약을 보이지 못하다가 1627년 하일리겐호펜 전투에서 패한 이후 그 책임을 지고 은퇴하게 된다.[1]
한편, 프리드리히의 전투 마차 전술은 기동성의 측면에서는 한계를 보였으나, 이를 이용한 박격포 사격은 상대에게 큰 충격 효과를 불러왔다. 이 전술은 이후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이끄는 스웨덴군에 의해 개량되어, 보다 효율적인 전술로 거듭나게 된다.[1]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백작은 얼굴에 부상을 입고 가까스로 슈투트가르트로 탈출하여 그곳에서 장남에게 양위했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가족을 처벌에서 구해주지 못했다. 그의 영지는 가톨릭 군대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었고, 8월에는 그의 영지의 상당 부분이 바덴 가문의 라이벌 가톨릭 분파인 바덴-바덴의 빌헬름에게 수여되었다. 1771년까지 변경백국은 프로테스탄트 "바덴-두를라흐"와 가톨릭 "바덴-바덴"으로 분할되었다.[1]
틸리 장군은 그의 작전을 계속하여 6월에 회흐스트 전투에서 다시 승리한 후, 팔츠 선제후국의 요새 도시들을 하나씩 정복해 나갔다.[1]
1623년 레겐스부르크 제국 의회는 프리드리히 5세의 영지와 선제후단에서의 자리를 바이에른 공작 막시밀리안에게 수여했는데, 그는 가톨릭 동맹의 저명한 지도자였다. 1623년부터 그는 스스로를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1세로 칭했으며 그의 공국은 바이에른 선제후국이 되었다.[1]
참조
[1]
웹사이트
Battle of Wimpfen
https://usacac.army.[...]
Combined Arms Research Library
2018-10-21
[2]
간행물
Der Feldzug des Jahres 1622 am Oberrhein
ZGO
1906
[3]
서적
Europe's Tragedy: A New History of the Thirty Years War
https://books.google[...]
Penguin UK
2009-07-30
[4]
서적
Deutsches Soldatenjahrbuch 45
1997
[5]
서적
Der Dreißigjährige Krieg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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