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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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조의는 돌궐 출신으로, 안사의 난 시기 대연의 황제였다. 사사명의 아들로 태어나 안록산의 반란에 가담하여 기주와 상주를 지켰으며, 759년 사사명이 안경서를 살해하고 황제를 칭하자 회왕에 봉해졌다. 761년에는 아버지를 살해하고 대연 황제로 즉위했으나, 당나라 군대의 반격으로 낙양을 잃고 도주하다가 붙잡혀 자결했다. 그의 죽음으로 안사의 난이 수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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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 (안사)의 황제 - 사사명
사사명은 안사의 난에 가담하여 세력을 키우다 아들에게 살해당한 당나라의 장군이자 연나라 황제로, 본래 이름은 사사간이었으며 돌궐과 소그드인 혼혈로 뛰어난 언어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 연 (안사)의 황제 - 안록산
당나라 현종의 총애를 받던 안록산은 안사의 난을 일으켜 당나라 쇠퇴의 원인을 제공한 반란 지도자였으나, 2년 후 아들에게 암살당했다. - 8세기 중국의 군주 - 당 대종
당 대종은 안사의 난 진압에 공을 세우고 당나라 황제에 올랐으나, 환관의 권력 장악, 절도사의 세력 확대, 토번의 침입으로 어려움을 겪으며 당나라 중앙집권 체제 약화와 봉건화의 시작을 초래했다. - 8세기 중국의 군주 - 당 덕종
당 덕종은 779년 즉위하여 재정 개선과 양세법 시행을 시도했지만, 절도사 반발과 환관 중용으로 실패하고 반란과 토번 침입을 겪었으며, 중앙 집권 약화와 당나라 멸망의 원인을 제공한 황제이다.
사조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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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사조의 (史朝義) |
로마자 표기 | Shi Chaoyi |
신상 정보 | |
출생 정보 | 알 수 없음 |
사망 정보 | 763년 2월 17일 이전 |
가문 | 사씨 (史) |
통치 정보 | |
칭호 | 황제 |
왕조 | 연 |
재위 기간 | 761년 4월 18일 이후 – 763년 2월 17일 이전 |
이전 통치자 | 사사명 |
계승자 | 없음 |
연호 | 현성 (顯聖) 761년–763년 |
가족 관계 | |
부친 | 사사명 |
사후 정보 | |
시호 | 없음 |
2. 생애
사조의는 돌궐 영이주 출신으로 사사명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759년 사사명이 안경서를 살해하고 황제를 칭하면서 사조의는 회왕에 봉해졌다.
761년 사조의는 아버지 사사명을 살해하고 대연의 황제로 즉위하여 연호를 현성(顕聖)이라고 하였다. 사사명은 막내 아들 사조청을 총애하여 후계자로 삼으려 하였으나, 이에 불만을 품은 사조의가 사사명을 살해한 것이다.
762년 당나라 군이 위구르 세력의 지원을 받아 반격하여 사조의의 거점인 낙양을 함락시키자, 북방의 막주(현재의 하북성 런추시)로 피했다. 763년 민심을 잃었다고 판단한 대연 정권의 전승사, 이회선 등이 배신하자, 사조의는 자살함으로써 안사의 난은 수습된다.[5]
2. 1. 초기 생애 및 안사의 난 가담
사사명의 맏아들로 돌궐 영이주에서 태어났다. 언제 태어났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버지 사사명의 맏아들이었고 (따라서 720년 이후에 태어났을 가능성이 높음) 사사명의 부인 신 황후의 아들이 아니었다. 757년 당시 안록산의 휘하에서 복무하던 사사명은 안록산의 아들이자 계승자인 안경서를 배신하고 당나라 숙종에게 투항했고, 그가 통치하던 범양(范陽, 현대의 베이징) 지역과 함께였다. 사사명은 당나라에 투항한 후 사조의를 기주(冀州, 대략 현대의 형수시, 허베이성)의 자사로 임명했다.[3]758년 사사명은 다시 당나라를 배신하고 안경서를 도왔다. 759년 봄, 사사명은 안경서를 살해하고, 사조의를 야성에 남겨두고 범양으로 돌아갔다. 그 해 말, 사사명이 연나라 황제를 칭했을 때, 사조의를 회왕(淮王)으로 봉했지만, 황태자로 임명하지는 않았다. 대신, 그의 부인 신씨를 황후로 봉하고 그녀의 아들 사초청(史朝清)을 총애하며 사초청을 황태자로 세울 것을 고려했다.[3] 759년 여름, 사사명이 낙양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시작했을 때, 사조의 및 다른 연나라 장군들과 합류했다.
한편, 사사명은 잔혹하고 살인을 즐겨 군대를 공포에 떨게 하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반면에 사조의는 친절하다고 여겨졌고 병사들의 호감을 샀지만, 사사명은 사조의보다 사초청을 더 총애했고 사조의를 죽일 생각까지 했다. 761년 봄, 사사명은 사조의를 선봉 지휘관으로 삼았지만, 사조의는 당나라 장군 위백옥(衛伯玉)에게 계속 격퇴당했다. 사사명은 사조의의 실패에 분노하여 그와 그의 부하 장군들을 처벌할 생각을 했다. 4월 18일,[4] 사사명은 사조의에게 언덕을 한쪽 면으로 하여 삼각형 요새를 건설하고 식량 물자를 저장하도록 명령했으며, 이를 하루 안에 완성하도록 명령했다. 날이 거의 끝날 무렵, 사조의는 요새를 완성했지만 벽에 흙을 바르지 않았다.
사사명이 도착하여 흙을 바르지 않은 것을 꾸짖고 자신의 하인들에게 머물러 흙 바르는 것을 지켜보라고 명령했다. 그는 화를 내며 "내가 산주를 점령하면 너, 이 도적놈을 죽이겠다!"라고 말했다. 그날 밤, 사조의의 부하이자 측근인 나열(駱悅)과 채문경(蔡文景)은 그에게 심각한 위험에 처해 있으며, 사사명을 폐위시키기 위한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당나라에 투항하겠다고 경고했다. 사조의는 조치를 취하기로 동의했고, 나열은 사사명의 호위 사령관 조 장군(개인 이름은 역사에 남아있지 않음)을 설득하여 음모에 동의하게 했다. 그날 밤, 나열은 300명의 군인을 이끌고 사사명을 매복하여 묶은 다음 군대를 이끌고 낙양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낙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열은 누군가가 사사명을 구출하려고 시도할까 두려워 그를 목 졸라 죽였다. 사조의는 연나라 왕위를 주장하고 신 황후와 사초청을 죽이라고 범양에 사자를 보냈다.
2. 2. 아버지 사사명과의 갈등
사조의는 돌궐과 소그드인의 혼혈 출신으로, 영이주에서 사사명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사사명은 아들인 사조의보다 막내아들인 사조청을 더 총애했고, 심지어 사조의를 죽일 생각까지 했다.[3]천성 3년(759년)에 사사명이 안경서를 살해하고 황제를 칭하자, 사조의는 회왕에 봉해졌지만, 황태자로 임명되지는 않았다. 사사명은 자신의 부인 신씨를 황후로 봉하고 그녀의 아들 사초청을 총애하며 사초청을 황태자로 세울 것을 고려했다.[3]
순천 3년(761년) 봄, 사사명은 장안 공격을 위한 발판으로 삼고 싶어 산주를 공격하려는 시도를 시작하면서 사조의를 선봉 지휘관으로 삼았지만, 사조의는 당나라 장군 위백옥(衛伯玉)에게 계속 격퇴당했다. 사사명은 사조의의 실패에 분노하여 그와 그의 부하 장군들을 처벌할 생각을 했다.
4월 18일,[4] 사사명은 사조의에게 언덕을 한쪽 면으로 하여 삼각형 요새를 건설하고 식량 물자를 저장하도록 명령했으며, 이를 하루 안에 완성하도록 명령했다. 날이 거의 끝날 무렵, 사조의는 요새를 완성했지만 벽에 흙을 바르지 않았는데, 사사명이 도착하여 흙을 바르지 않은 것을 꾸짖었다. 그는 자신의 하인들에게 머물러 흙 바르는 것을 지켜보라고 명령했다. 그는 화를 내며 "내가 산주를 점령하면 너, 이 도적놈을 죽이겠다!"라고 말했다.
그날 밤, 사조의의 부하이자 측근인 나열(駱悅)과 채문경(蔡文景)은 그에게 심각한 위험에 처해 있으며, 사사명을 폐위시키기 위한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당나라에 투항하겠다고 경고했다. 사조의는 조치를 취하기로 동의했고, 결국 사사명을 살해했다. 이후 사조의는 연나라 왕위를 주장하고 신 황후와 사초청을 죽이라고 범양에 사자를 보냈다.
2. 3. 대연 황제 즉위와 몰락
761년, 사조의는 아버지 사사명을 살해하고 대연의 황제로 즉위하여, 연호를 현성(顕聖)이라고 하였다. 다음 해 당나라 군대가 위구르 세력의 지원을 받아 반격하였으며, 사조의의 거점인 낙양이 함락되자 북방의 막주(현재 하북성 런추시)로 피했다.[2] 763년 민심을 잃었다고 판단한 대연 정권의 전승사(田承嗣), 이회선(李懷仙)이 배신하고, 사조의는 자살함으로써 안사의 난은 수습된다.[5]사조의는 낙양 지역을 통치했지만, 전쟁으로 황폐해진 상황이었다. 다른 연(燕)나라 장군들은 사조의에게 형식적으로만 복종했다.
사조의는 당나라 장군들에게 연이어 패배를 겪었고, 당나라의 노주(潞州중국어, 대략 현대의 장즈시, 산시성)와 송저우를 공격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762년 겨울, 당나라 군대가 위구르 카간국의 등리 칸의 지원을 받으면서 낙양이 함락되었다. 사조의는 낙양을 떠나 도주했지만, 설송, 장충지, 전승사, 이회선 등 그의 장군들은 그에게 등을 돌렸다. 그는 계 또는 거란으로 도망가려 했지만, 763년 봄 도중에 이회선이 보낸 군대에 붙잡혔다. 체포를 피하기 위해 그는 목을 매 자살했다.
참조
[1]
서적
Zizhi Tongjian Volume 222
[2]
서적
Zizhi Tongjian Volume 222
[3]
웹사이트
Archived copy
http://www.bjxw.gov.[...]
2008-05-03
[4]
서적
Zizhi Tongjian Volume 222
[5]
서적
Zizhi Tongjian Volume 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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