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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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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사명은 안사의 난 시기에 활약한 인물로, 돌궐계 출신이며 안녹산과 함께 자랐다. 그는 당나라 장군으로 시작하여 안녹산의 반란에 가담, 연나라 황제를 칭했다. 안녹산 사후 안경서에게 반기를 들고 스스로 황제가 되었으나, 아들 사조의에게 살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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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03년 출생 - 안록산
    당나라 현종의 총애를 받던 안록산은 안사의 난을 일으켜 당나라 쇠퇴의 원인을 제공한 반란 지도자였으나, 2년 후 아들에게 암살당했다.
  • 761년 사망 - 왕사례
    왕사례는 당나라의 장군으로, 고구려 멸망 후 당나라 영주에 정착한 집안 출신이며, 무예와 지략이 뛰어나 석보성 전투와 안사의 난 진압에 공을 세워 우금오위장군과 사공에 임명되었고 사후 태위에 추증되었으며, 《구당서》에는 영주성 방면의 고구려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 연 (안사)의 황제 - 사조의
    사조의는 안사의 난 시기 사사명의 아들로, 아버지를 살해하고 대연 황제에 올랐으나 당나라군의 반격과 부하들의 배신으로 몰락하여 자살하며 안사의 난 종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 연 (안사)의 황제 - 안록산
    당나라 현종의 총애를 받던 안록산은 안사의 난을 일으켜 당나라 쇠퇴의 원인을 제공한 반란 지도자였으나, 2년 후 아들에게 암살당했다.
사사명
기본 정보
이름시 쓰밍 (史思明)
출생703년
사망761년 4월 18일
가족 성스 (史)
원래는 수간 (窣干), 후에 쓰밍 (思明)
통치
즉위759년 5월 9일
퇴위761년 4월 18일
이전 통치자안칭쉬
다음 통치자스차오이
칭호
사후 칭호자오우 황제 (昭武皇帝)
연호순톈 (順天) 759–761
잉톈 (應天) 761
왕조
왕조연 (안사의 난)
가족 관계
배우자신황후
자녀스차오이
기타 정보
직업군사 장군, 군주, 정치인

2. 배경

사사간은 언제 태어났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의 친구 안녹산보다 하루 먼저 태어났고 함께 자랐다고 한다. 그는 돌궐계 출신으로, 마르고 피부가 매끄러우며 성격이 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와 안녹산은 모두 성장한 후 용맹함으로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그는 가난했고 사회적 지위가 낮아 지역 주민들에게 멸시받았다. 하지만 지역 명문가의 딸인 신부인은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와 결혼하겠다고 고집했고 결국 뜻을 이루었다.

3. 생애

사사명은 돌궐소그드인의 혼혈로, 안녹산과 같은 시대, 같은 고향 출신으로 서로 친밀한 관계였다. 그는 6개 국어를 구사하고 교양에도 밝아 점차 두각을 나타냈다. 유주절도사의 부하로 있을 때 공을 세웠고, 752년에는 안녹산의 부하가 되었다.

755년, 안녹산이 현종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사사명은 하북 지역에서 군대를 이끌고 이광필, 안진경 등이 이끄는 당나라 군대와 맞서 싸웠다. (안사의 난) 757년, 안녹산의 아들 안경서가 아버지를 살해하고 연나라 황제 자리에 오르자, 사사명은 이에 반발하여 범양으로 돌아가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했다.

이후 사사명은 당나라에 항복하는 듯했으나, 숙종과 그 측근들이 자신을 암살하려는 계획을 알아채고 항복을 철회했다. 759년, 사사명은 낙양의 안경서를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스스로 '''대연 황제'''라 칭하며 독립했다. 그러나 761년, 막내 아들 사조청을 후계자로 삼으려 하자, 장남 사조의에게 살해당했다.

3. 1. 당나라 장군 시절

시스간은 처음에는 당나라 장군 우즈이() 휘하에서 복무했는데, 우즈이가 그에게 공격을 명령할 때마다 적군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안녹산과 그는 각자 6개의 비한족 언어를 이해했기에 군사 심문에서 통역관으로 복무했다. 그는 나중에 안녹산과 함께 장수구이() 장군 휘하에서 복무했다. 당 현종의 ''천보'' 연간(741–756) 초기에 시의 거듭된 군사적 공로로 인해 그는 평로군(平盧|평로중국어, 현대 랴오닝성 차오양시에 주둔)의 장군이 되었다. 한번은 현종에게 보고하기 위해 수도 장안에 갔을 때 현종은 그에게 깊은 인상을 받고 그의 등을 두드리며 "경은 언젠가 영광을 누릴 것입니다. 이것을 명심하시오."라고 말했다. 그는 시에게 이름을 사명(思明)으로 바꾸게 했다. 사명은 문자 그대로 "밝음을 생각하다"라는 뜻이다.[4] 시는 나중에 북평군(北平|북평중국어, 대략 현대 허베이성 친황다오시)의 지사가 되었다. 751년, 당시 평로(이후 군사 순찰구로 전환)와 범양(范陽, 현대 베이징) 및 하동(河東|하동중국어, 현대 산시성 타이위안시) 순찰구의 절도사(''절도사'')였던 안녹산이 계족과의 전투에서 큰 패배를 겪은 후, 시는 붕괴된 군대를 재편성하여 더 이상의 재앙을 막았고, 안녹산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시는 만약 패배 직후 조금만 더 일찍 안녹산을 만났더라면, 안녹산이 패배의 책임을 물어 처형했던 다른 장군 거제(哥解|거해중국어)와 어승선(魚承仙|어승선중국어)처럼 자신도 처형당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752년, 안녹산의 추천으로 시는 평로군의 병마사(), 즉 지휘관이 되었다.

3. 2. 안사의 난

안사의 난 지도


755년, 안녹산이 현종의 통치에 반기를 들었을 때, 사사명은 안녹산의 휘하에 있었다. 처음에는 황하 북쪽의 당나라 군현 대부분이 안녹산에게 항복하여, 안녹산은 빠르게 남쪽으로 진격하여 당나라의 동쪽 수도인 낙양을 점령했다. 그러나 756년 새해 즈음, 안녹산에게 항복했던 관리 안고경이 자신이 지사로 있던 상산군(常山, 오늘날의 스자좡, 허베이성)에서 안녹산에게 반기를 들었고, 다른 군현들도 잇따라 안녹산에게 등을 돌렸다.[1]

당시 낙양에 있던 안녹산은 사사명과 이립절(李立節)을 보내 상산군과 박릉군(博陵, 오늘날의 바오딩, 허베이성)을 공격하게 했다. 안고경의 배신 8일 만에 사사명과 채희덕(蔡希德)이 모두 상산에 도착하여 안고경을 생포했고, 안고경은 낙양으로 끌려가 처형되었다. 사사명, 이립절, 채희덕은 이후 안고경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던 다른 군현들을 공격했고, 이들은 다시 안녹산에게 항복했다. 안녹산은 스스로 연이라는 새로운 국가의 황제를 칭했다.[1]

그러나 요양군(饒陽, 오늘날의 헝수이, 허베이성)의 지사인 노전성(盧全誠)은 항복을 거부했고, 사사명은 요양을 포위했지만 신속하게 점령할 수 없었다. 당나라 장군 이광필이 하동로에서 구원병을 이끌고 오자 포위를 풀 수밖에 없었다. 그 후 그는 이광필, 곽자의 등 다른 당나라 장군들과 여러 차례 전투를 벌였고, 대부분 사사명에게 불리하게 진행되어 결국 많은 군현들이 다시 안녹산에게 반기를 들게 되었다. 이는 안녹산에게 큰 우려를 안겨주었고, 한때 안녹산은 낙양을 포기하고 북쪽으로 돌아갈 것을 고려하기도 했다.[1]

그러나 상황은 당나라 장군 고선지동관에서 또 다른 연나라 장군 최건우(崔乾祐)에게 패배하면서 바뀌었고, 연나라 군대는 장안을 점령하여 현종과 그의 태자 이형을 도주하게 만들었다. 이형은 영무로 도주하여 그곳에서 스스로 황제를 칭했다(숙종). 곽자의와 이광필은 사사명에 대한 공격을 포기하고 영무로 향했고, 이로 인해 사사명은 황하 북쪽 지역을 연나라를 위해 상당 부분 안정시킬 수 있었다. 평로에서 안녹산에게 반기를 들었던 유정신(劉正臣)이 반양을 기습 공격하자 사사명은 유정신을 격파했고, 유정신은 평로로 도망쳐야 했다.[1]

757년 봄, 안녹산은 그의 아들 안경서에게 살해당했고, 안경서가 연(燕)나라의 왕위를 계승했다. 그 동안 안녹산의 사망 소식을 듣지 못한 사사명은 당시 이광필, 채희덕, 고수암, 우정계와 함께 있던 태원(太原)을 10만 대군으로 공격했다. 그들은 한 달 넘게 태원을 포위했지만 함락시키지 못했다. 이후 안녹산의 사망 소식이 전해졌고, 안경서는 사사명에게 번양(范陽)으로 돌아가 지키도록 명령하고, 채희덕을 태원에 남겨 이광필을 감시하게 했다. 안경서는 또한 사사명을 번양의 절도사로 임명하고 귀천왕(歸川王)으로 봉했다.[1]

그러나 사사명은 안녹산이 이전에 번양으로 보낸 물자를 비축하며 안경서의 명령을 따르지 않기 시작했고, 안경서는 그를 제어할 수 없었다. 757년 겨울, 안경서가 당(唐)나라와 회흘의 연합 반격으로 낙양(洛陽)을 버리고 도주한 후, 여러 비한(非漢) 종족 병사들이 안경서를 버리고 북쪽으로 도망쳤다. 사사명은 정예 예락하(曵落河) 군대와 다른 여러 종족들을 회유하여 자신에게 복종하게 했지만, 동라(同羅)군은 거부했고, 그는 이들을 격파했다.[1]

한편, 안경서는 아사나 승경(阿史那承慶)과 안수충(安守忠) 장군을 번양으로 보내 사사명에게서 군대를 징발하고, 번양을 빼앗을 수 있는지 살펴보게 했다. 사사명은 그의 보좌관 경인지(耿仁智)의 조언에 따라 안경서를 배신하고, 아사나와 안수충을 구금한 후, 고(高)와 함께 당나라에 귀순할 것을 제안했다. 당 숙종은 이를 기뻐했다. 그는 사사명을 번양의 절도사로 임명하고 귀의왕(歸義王)으로 봉했다. 그는 또한 환관 이사경(李思敬)과 오지의 아들 오승은(烏承恩)을 보내 사사명을 위로했다.[1]

돌궐소그드인의 혼혈 출신인 사사명은 안록산과 동시대에 동향이었기 때문에 친한 사이였다. 또한, 자신도 6개 국어를 구사하고 교양에 통달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차츰 두각을 나타냈다. 유주절도사의 부하로 있을 때 전공을 세웠고, 천보 11재(752년)에는 안록산의 부하가 되었다.[1]

지덕 원년(756년)에 안록산이 반란을 일으키자, 하북에서 군대를 이끌고 싸웠으며, 이광필과 안진경이 이끄는 당나라 군대와 싸웠다([안사의 난]]). 그러나 성무 2년(757년)에 안록산의 차남인 안경서가 아버지를 살해하자 그 뒤를 이어 연나라 황제를 칭했다. 사사명은 이에 반발하여 범양으로 돌아가 자립했다. 이윽고 당나라에 항복했지만, 숙종과 그에게 가까운 요인들이 자신의 살해를 계획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항복을 철회하고, 천성 3년(759년) 3월, 낙양의 안경서를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여기서 스스로 '''대연 황제'''를 칭하며 자립했다. 그러나 순천 3년(761년), 막내 아들 사조청을 후계자로 삼으려 하자 장남인 사조의에게 살해당했다.[1]

3. 3. 연나라 황제 즉위와 최후

사사명은 안경서가 안녹산을 살해하고 연나라 황제가 된 후, 안경서에게 반발하여 범양으로 돌아가 자립했다. 이후 당나라에 항복했지만, 당 숙종과 측근들이 자신을 살해하려는 계획을 알게 되자 항복을 철회했다.[5] 759년, 안경서를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스스로 대연 황제를 칭하며 자립했다.[6]

안경서는 사사명에게 도움을 요청하며 왕위를 제안했고, 이에 사사명은 남쪽으로 진격하여 엽성을 향했다. 759년 4월 7일,[7] 사사명은 당군과 교전했고, 갑작스러운 폭풍으로 양측 군대가 혼란에 빠진 틈을 타 엽성에 대한 포위를 풀었다. 안경서는 사사명에게 왕위를 제안했지만, 사사명은 거절하고 대신 서로 독립적인 동맹국의 황제가 될 것을 제안했다. 안경서는 기뻐하며 사사명을 만나 동맹을 맹세했다.

안경서가 사사명에게 감사를 표하며 무릎을 꿇자, 사사명은 안경서가 아버지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것을 꾸짖으며 그와 그의 가족, 측근들을 처형했다.[8] 사사명은 안경서의 영토와 군대를 차지하고 범양으로 돌아가 장남 사조의에게 엽성을 맡겼다. 그는 곧 스스로 연 황제를 칭하고 부인 신씨(辛氏)를 황후로, 사조의를 회왕(懷王)으로 책봉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사명은 황후 신씨의 아들 사조청에게 범양을 맡기고 남쪽으로 향했다. 그는 곧 변주(汴州, 대략 오늘날의 카이펑, 허난성)와 낙양을 점령했지만, 더 나아가려던 시도는 하양(河陽, 오늘날의 자오쭤, 허난성)과 섬주(陝州, 대략 오늘날의 싼먼샤, 허난성)에서 당나라 군에게 저지당해 교착 상태에 빠졌다.

사사명은 잔혹하고 살인을 즐겨 군대를 공포에 떨게 했다고 한다. 그는 사조의보다 사조청을 총애하여 사조청을 태자로 세우고 사조의를 죽일 것을 고려했다. 761년 봄, 사사명은 사조의를 선봉 지휘관으로 삼아 산주(陝州)를 공격하려 했지만, 사조의는 당나라 장군 위백옥(衛伯玉)에게 거듭 격퇴당했다. 사사명은 사조의의 실패에 분노하여 그를 처벌하려 했다.

4월 18일,[1] 사사명은 사조의에게 요새를 건설하고 식량을 비축하라고 명령하며 하루 안에 완성하도록 지시했다. 사조의는 요새를 완성했지만, 사사명은 진흙을 바르지 않은 것을 꾸짖으며 사조의를 죽이겠다고 위협했다. 그날 밤, 사조의의 부하들은 그에게 위기에 처해 있음을 알리고 사사명을 폐위시키기 위한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당나라로 투항하겠다고 경고했다. 사조의는 조치를 취하기로 동의했고, 부하들의 도움으로 사사명을 포박한 뒤 교살했다.

4. 가족

배우자신황후 (759년 책봉, 761년 사망)
아들사조의 (회왕, 759년 책봉, 연나라 황제)[2]
아들사조청 (신황후 소생, 태자, 761년 사망)[2]
아들최소 다섯 명 이상의 아들[2]


참조

[1] 서적 Zizhi Tongjian
[2] 서적 Zizhi Tongjian
[3] 서적 Zizhi Tongjian
[4] 서적 Zizhi Tongjian
[5] 서적 Bo Yang Edition of the Zizhi Tongjian 759
[6] 서적 Zizhi Tongjian
[7] 서적 Zizhi Tongjian
[8] 웹사이트 Archived copy http://www.bjxw.gov.[...] 2008-05-03
[9] 웹사이트 史思明(ししめい)の解説 https://dictionary.g[...] goo人名辞書 2020-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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