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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대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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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당 대종은 당나라의 제9대 황제로, 안사의 난을 겪고 즉위하여 혼란스러운 시기를 다스렸다. 그는 안사의 난을 진압하고 토번의 침략을 막아냈지만, 절도사의 할거와 환관의 발호로 국력이 쇠퇴했다. 불교를 장려하고 사찰에 특혜를 주었으나, 이는 재정 악화로 이어졌다. 54세에 사망했으며, 묘호는 대종, 시호는 예문효무황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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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대종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당 대종
로마자 표기Tang Daizong
중국어 간체唐代宗
개인 이름이예 (李豫)
이전 개인 이름이숙 (李俶)
묘호대종 (代宗)
시호예문효무황제 (睿文孝武皇帝)
존호보응원성문무효황제 (寶應元聖文武孝皇帝)
재위 기간762년 5월 18일 ~ 779년 6월 10일
출생일726년 11월 11일
출생지뤄양, 당나라
사망일779년 6월 10일
능묘원릉 (元陵)
아버지당 숙종
어머니장경황후
배우자볼링 최씨 (746년 결혼, 757년 사망)
정의황후 (775년 사망)
예진황후 (759년 실종)
황후정의황후 독고씨
예진황후 심씨
왕조당나라
연호보응 (寶應) 762년–763년
광덕 (廣德) 763년–764년
영태 (永泰) 765년–766년
대력 (大曆) 766년–779년
당 대종의 초상
황제 즉위
즉위일762년 5월 18일
이전 군주당 숙종
다음 군주당 덕종
가족
자녀당 덕종 이괄 포함. (자세한 내용은 가족 섹션 참조)
생애 초기
초기 이름이숙 (李俶)
작위광평군왕 (廣平郡王)
초왕 (楚王)
성왕 (成王)
황태자 책봉758년 11월 10일
기타
사후 칭호예문효무황제 (睿文孝武皇帝)

2. 생애

현종의 장손이자 숙종의 장남으로 태어났다.[4] 생모 오씨의 가문은 유력 귀족이었으나 몰락한 상태였다. 어려서부터 조부 현종의 총애를 받았으며, 740년 아버지가 황태자가 되자 '''광평왕'''(廣平王)에 봉해졌다.[4][5]

756년, 안사의 난이 발발하여 현종이 으로 피난할 때 아버지 이형(훗날 숙종)과 동행하였다. 이후 영무에서 숙종이 즉위하자 병마대원수(兵馬大元帥)에 임명되어 곽자의 등과 함께 반란군에게 점령당한 수도 장안과 부수도 낙양을 탈환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6][8] 이 과정에서 회흘의 군대를 원군으로 동원하였고, 하북삼진 등 절도사들의 지원을 받았는데, 이는 훗날 외침과 절도사 세력 강화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758년 황태자로 책봉되었다.[10][8]

762년, 현종숙종이 연이어 사망하자 황제로 즉위하였다.[13] 즉위 직후에는 환관 이보국이 조정을 장악했으나, 대종은 다른 환관 정원진을 이용하여 이보국을 숙청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정원진, 어조은 등 환관 세력이 연이어 권력을 장악하며 황권을 제약하고 국정을 혼란시켰다.[13][17][19]

763년에는 7년간 지속된 안사의 난이 사차의의 자살로 마침내 종결되었다.[13] 그러나 난 중에 항복한 설숭, 이회선, 이보천, 전승사 등 옛 안록산 휘하 장수들을 그대로 절도사로 임명하면서 군벌 할거 시대의 막이 올랐다.[13][16] 같은 해, 토번에게 비단 공납을 중단한 것에 분노한 토번 왕 트리송 데첸의 침공으로 수도 장안을 일시적으로 빼앗기고 피난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이 사건으로 서부 영토 상당 부분을 상실했다.[17]

치세 동안 복고회은의 난을 비롯한 내부 반란이 끊이지 않았고, 하북삼진을 비롯한 절도사들의 세력은 더욱 강성해져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되었다.[17][19][20] 대종은 불교에 깊이 심취하여 사찰에 많은 특혜를 주었으나 이는 국가 재정을 악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19] 소금 전매제 등 재정 재건을 위한 정책을 시행했지만 큰 효과를 보지는 못했다.

779년, 54세의 나이로 사망하였고, 황태자 이괄덕종으로 즉위했다.[20]

2. 1. 초기 생애와 안사의 난

대종 이예(李豫)는 아버지 숙종(당시 중왕 이형)과 어머니 오씨(吳氏) 사이에서 태어났다.[4] 오씨의 집안은 본래 유력한 귀족 가문이었으나, 반역 혐의로 인해 몰락하였다. 그는 현종의 100명이 넘는 손자들 중 맏손자였으며,[4] 어린 시절부터 조부 현종에게 능력을 인정받아 총애를 받았다. 성품은 친절하고 온순하며 효성이 지극했고, 특히 ''예기(禮記)''와 ''주역(易經)'' 연구에 몰두하는 학구적인 면모를 보였다고 전해진다.[5]

740년, 아버지 이형이 황태자로 책봉되자 당시 이추(李俶)라는 이름이었던 그는 '''광평왕'''(廣平王)에 봉해졌다. 같은 해 어머니 오씨(무비)가 세상을 떠났다.[4] 현종은 자신이 총애하던 양귀비의 여동생인 한씨 부인의 딸 최씨를 그의 정실부인으로 정해주었으나, 훗날 덕종으로 즉위하는 장남 이괄(李适)은 인 심비(沈妃)에게서 태어났다.[4]

755년, 장군 안록산안사의 난을 일으키면서 당나라는 큰 혼란에 빠졌다. 756년 여름, 반란군이 수도 장안으로 진격해오자 현종성도로 피난을 떠나야 했다. 당시 황태손 신분이었던 이예는 아버지인 황태자 이형과 함께 현종을 따라 서쪽으로 피난길에 동행하였다. 피난 도중 마외역(馬嵬驛, 현재 섬서성 보계)에 이르렀을 때, 성난 군사들이 재상 양국충과 그의 가족들을 살해하고 현종에게 양귀비의 처형을 강요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후 이형은 현종의 명으로 백성들을 위무하다가, 환관 이보국, 건녕왕 이담, 그리고 이예(당시 이추) 등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이들은 현종을 따라 성도로 가는 대신 북쪽으로 가서 장안을 수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형은 이를 받아들여 현종과 헤어져 영무(靈武)로 향했고, 현종 역시 이 결정을 허락했다. 영무에서 이형은 군대의 추대를 받아 황제로 즉위하니, 이가 바로 숙종이다.[6]

숙종이 즉위한 후, 이예는 병마대원수(兵馬大元帥)에 임명되어 곽자의 등과 함께 반란군 토벌의 선봉에 섰다. 그는 안경서가 점령하고 있던 수도 장안과 부수도 낙양을 탈환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이 과정에서 회흘(回紇)의 군대를 원군으로 끌어들였는데, 이는 이후 외적의 침입을 유발하는 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또한 안사의 난 잔당 소탕을 위해 하북삼진 등 절도사들의 지원을 요청하였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절도사의 세력을 강화시켜 중앙 정부의 통제력을 약화시키는 부작용을 낳았다. 758년, 숙종의 황후인 장씨와 환관 이보국의 지지 하에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2. 2. 즉위와 환관의 발호

762년, 숙종은 중병에 걸렸다. 그 해 여름 현종이 사망하자 숙종은 슬픔에 잠겨 병세가 더욱 악화되었고, 황태자 이유(李豫, 즉위 전 이름 이추(李俶))에게 섭정을 맡겼다.[13]

당시 조정은 숙종의 황후인 장황후(張皇后)와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환관 이보국(李輔國)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다. 장황후는 이보국과 그의 측근인 환관 정원진(程元振)을 제거하기 위해 이유에게 도움을 청했으나, 이유는 병든 숙종에게 충격을 줄 것을 우려하여 거절했다.[13] 이에 장황후는 이유의 동생인 월왕(越王) 이계(李係)와 손을 잡고, 자신들에게 충성하는 환관들을 동원하여 이보국을 제거하려 시도했다. 762년 5월 14일,[12] 장황후는 숙종의 이름으로 조서를 내려 이유를 궁궐로 불렀다.[13]

그러나 정원진이 이 계획을 미리 알아채고 이보국과 이유에게 알렸고, 이유는 정원진의 호위 아래 황궁 근위대 본부로 피신했다. 이보국과 정원진이 이끄는 황궁 근위대는 궁궐로 들어가 장황후와 이계 및 그 일파를 체포했다. 이 과정에서 병석에 있던 숙종은 방치되었고, 5월 16일에 사망했다. 이보국은 즉시 장황후, 이계, 연왕(燕王) 이첨(李僩) 등을 처형했다. 5월 18일, 이유는 황제로 즉위하니 이가 바로 대종(代宗)이다.[13]

즉위 직후 조정의 실권은 이보국이 장악하고 있었다. 대종은 국정을 직접 장악하기 위해 또 다른 환관인 정원진(程元振)을 등용하여 이보국을 반역죄로 숙청했다. 그러나 이는 결국 정원진이 이보국의 자리를 대신하여 조정을 장악하는 결과로 이어졌고, 이후 중용된 환관 어조은(魚朝恩)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환관 세력의 연이은 발호는 대종 시대 내내 황제권을 제약하고 국정을 혼란시키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환관들이 군권까지 장악하고 무장들의 공을 제대로 평가하지 않는 등 무관을 홀대하면서 변방의 방비가 약화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2. 3. 절도사의 할거와 당나라의 쇠퇴

안사의 난이 진압된 후, 당나라 조정은 항복한 구 안록산 휘하의 장군들, 즉 설숭(薛嵩), 이회선(李懷仙), 이보신(李寶臣), 그리고 전승사(田承嗣)를 어떻게 처리할지 고심했다. 복고회은(僕固懷恩)은 이들이 더 이상 저항하지 않도록 기존의 지위를 유지시켜 절도사로 남겨두어야 한다고 건의했고, 더 이상의 전쟁을 원치 않았던 대종은 이를 받아들였다. 이는 당나라 말기까지 이어지는 군벌 할거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13][16] 안사의 난 잔당 토벌을 위해 하북삼진 등 절도사의 지원을 요청한 것 역시 절도사의 권력 강화를 초래했다.

대종의 치세 동안 외부의 위협도 계속되었다. 대종은 티베트고원토번 왕조에게 비단을 공물로 바치던 것을 중단했는데, 이는 당시 토번 왕 트리송 데첸의 분노를 샀다. 763년, 토번의 장수 다짜뤼공(達扎樂宮)이 20만 대군을 이끌고 당나라를 침공하여 수도 장안을 11일간 점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17] 당시 환관 정원진(程元振)이 권력을 잡고 있었는데, 그가 이전에 여러 장군들을 모함하여 죽음에 이르게 했기 때문에[13][17] 지방의 절도사들은 황제의 긴급 구원 요청에도 응하지 않았다. 결국 대종은 장안을 버리고 산주(陝州, 현 허난성 싼먼샤시)로 피신해야 했다. 토번군은 대종의 사촌인 광무왕 이승굉(李承宏)을 꼭두각시 황제로 내세우려 했으나, 곽자의 등이 이끄는 당나라 군대의 반격과 백성들의 저항에 부딪혀 한 달 만에 철수했다. 대종은 장안으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이 사건으로 많은 서부 영토가 토번의 수중에 넘어갔고 당의 군사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이 사태의 책임을 물어 정원진은 실각했고, 이후 재상 원재(元載)와 환관 어조은(魚朝恩)이 조정의 실권을 장악했다.[17]

내부적으로도 반란이 끊이지 않았다. 764년, 다른 장수 및 환관들과의 갈등 끝에 복고회은이 산시성 하중(河中, 현 산시성 운성시)에서 반란을 일으켰다.[17] 그의 아들 복고창(僕固瑒중국어)이 이끄는 군대가 패배하고 복고창 자신도 부하에게 살해당하자, 복고회은은 닝샤 후이족 자치구 영무(靈武)로 퇴각하여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 그는 회흘 및 토번과 연합하여 764년 말과 765년에 장안 지역을 공격했으나, 765년 복고회은이 사망하면서 반란은 종결되고 그의 군대는 다시 당 조정에 귀순했다.[17] 그러나 복고회은의 난 이후에도 구 안록산계 절도사 4명 외에 이정기(李正己), 양숭의(梁崇義) 등이 사실상 독립적인 세력으로 자리 잡았다.[17]

절도사들의 할거는 더욱 심화되었다. 768년, 노룡(盧龍, 현 베이징) 절도사 이회선이 부하 장수 주희채(朱希彩), 주차(朱滔), 주도의 형제에게 암살당하자 대종은 노룡 번진을 직접 통제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결국 주희채를 절도사로 임명할 수밖에 없었다.[19] 772년, 주희채 역시 부하 이회원(李懷瑗중국어)에게 암살당하고 주차가 뒤를 이었다. 주차는 이전 절도사들보다는 중앙 정부에 존중하는 태도를 보였으나, 노룡 번진에 대한 실질적인 통제권은 여전히 중앙 정부에 돌아오지 않았다.[19][20] 773년 소의(昭義, 현 허난성 안양시) 절도사 설숭이 죽자, 인근 위박(魏博, 현 허베이성 한단시) 절도사 전승사가 개입하여 775년 소의 번진을 장악했다.[20] 전승사의 이러한 월권 행위는 다른 절도사들과 중앙 정부의 분노를 사, 775년 여름 대종은 여러 절도사들에게 전승사 토벌을 명했다. 초기에는 관군이 우세했으나, 전승사의 회유책에 넘어간 이정기가 군대를 철수시키고, 이보신마저 전승사 측에 가담하여 주차를 공격하면서 토벌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결국 776년 대종은 전승사를 사면해야 했다.[20] 같은 해, 변송(汴宋, 현 허난성 카이펑시) 번진에서 장교 이령요(李靈曜중국어)가 반란을 일으켰으나 곧 진압되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변송의 8개 주 중 5개 주가 이정기의 평로(平盧, 현 산둥성 웨이팡시) 번진에 병합되어, 이정기의 세력만 더욱 커지는 결과를 낳았다.[20]

777년경, 주요 군벌들은 다음과 같이 사실상 독립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다.[20]

절도사번진관할 주병력 규모
이정기(李正己)평로(平盧)15개 주6만 명
전승사(田承嗣)위박(魏博)7개 주5만 명
이보신(李寶臣)성덕(成德)7개 주5만 명
양숭의(梁崇義)산남동도(山南東道)6개 주2만 5천 명



대종은 환관들의 전횡을 제어하려 시도하기도 했다. 762년, 이보국이 "폐하께서는 궁궐 안에 계시고, 바깥일은 이 늙은 신하에게 맡기십시오."[13]라고 말할 정도로 권세를 누리자, 대종은 정원진과 손잡고 이보국을 숙청했다. 그러나 이는 정원진의 세력 강화로 이어졌고, 이후 어조은 역시 강력한 권력을 휘둘렀다. 770년, 대종은 원재와 모의하여 어조은을 제거했지만, 이번에는 원재가 조정의 권력을 독점하게 되었다.[19] 777년, 대종은 마침내 원재와 그의 동료 왕진의 부패와 권력 남용을 문제 삼아 원재를 처형하고 왕진을 유배시켰다.[20]

한편, 대종은 불교에 깊이 심취하여 사찰에 많은 토지를 하사하고 면세 혜택을 부여했으며, 승려 불공에게 공작 작위를 내리는 등 불교를 크게 우대했다. 이는 안사의 난과 같은 국가적 위기를 부처의 가호로 극복했다고 믿었던 원재 등 신하들의 영향도 있었다.[19]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국가 재정을 더욱 악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대종은 소금 전매제 등 재정 재건을 위한 정책들을 시행했지만 큰 효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779년, 전승사가 사망하자 대종은 그의 조카 전열(田悅)이 위박 절도사 자리를 계승하는 것을 허락했다. 같은 해, 화서(淮西, 현 허난성 주마뎬시) 절도사 이중신(李重臣)이 부하 장수 이희열(李希烈)에게 축출당하자, 대종은 이중신을 중앙으로 불러들이고 이희열을 절도사 대행으로 임명했다.[20] 이러한 상황 속에서 779년 여름, 대종은 54세의 나이로 병사했고, 황태자 이괄(李适)이 덕종으로 즉위했다.[20] 대종 시대에 심화된 환관의 발호와 절도사의 할거는 이후 당나라 쇠퇴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

2. 4. 말년과 죽음

762년 황제로 즉위했으나, 환관 이보국이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보국은 대종에게 "폐하께서는 궁궐에 계시고, 이 늙은 신하에게 외부 일을 맡기십시오."[13]라고 말할 정도로 권세를 누렸다. 대종은 속으로 불쾌했지만 그를 달래기 위해 상부(尚父, 아버지와 같은 존재)라는 칭호를 내리고 이름 대신 부르게 했으며, 사공(司空) 겸 중서령(中書令중국어)에 임명하여 재상의 지위를 주었다.[13] 그러나 대종은 권력을 되찾기 위해 환관 정원진과 손을 잡고 762년 여름, 이보국의 군권을 박탈하고 궁궐 밖으로 내보냈다. 이후 762년 11월 12일,[14] 대종은 암살자를 보내 이보국을 살해하고 머리와 팔을 가져가게 했으나, 공식적으로는 암살범을 찾는 척하며 나무로 만든 머리와 팔을 시신과 함께 성대히 장례를 치러주었다.[13] 이보국 제거 후에는 정원진이, 그 이후에는 어조은 등 다른 환관들이 차례로 권력을 장악하면서 환관의 폐단은 계속되었다.

즉위 직후인 763년 초, 안사의 난은 사차의의 자살로 완전히 종결되었다. 그러나 대종은 난 중에 항복했던 설송, 이회선, 이보천, 전승사 등 옛 안록산 휘하 장수들의 처리를 두고 고심했다. 결국 복고회은의 건의에 따라 이들을 절도사 직위에 그대로 두었는데, 이는 당나라 말기까지 이어지는 군벌 할거 시대의 시작이 되었다.[13][16]

외교적으로는 토번(吐蕃)과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대종이 토번에게 보내던 비단 공물을 중단하자, 토번의 왕 트리송 데첸은 분노하여 763년 가을, 장수 다짜뤼공에게 20만 대군을 주어 장안을 공격하게 했다. 당시 실권자였던 환관 정원진의 실정으로 변방 방비가 허술했고, 지방 절도사들은 구원 요청에 응하지 않았다. 결국 대종은 산시성의 산주(山州)로 피난해야 했고, 토번군은 장안을 11일간 점령하며 대종의 사촌인 이승홍을 꼭두각시 황제로 내세우는 수모를 겪었다. 곽자의 등의 활약으로 토번군은 물러났으나, 이 사건으로 많은 서부 영토를 상실했고 정원진은 실각했다. 이후 원재와 어조은이 새로운 실권자로 부상했다.[17]

764년, 대종은 아들 이괄(李适)을 황태자로 책봉했다. 이괄의 생모인 심씨(沈妃)는 안사의 난 중에 실종되었는데, 대종은 그녀를 찾기 위해 노력했으나 끝내 찾지 못했다.[17] 같은 해, 하중 절도사 복고회은은 조정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회흘과 토번 세력을 끌어들여 765년까지 장안을 위협했으나, 그가 병사하면서 반란은 종결되었다.[17] 한편, 관리 유연은 안사의 난으로 막혔던 황하와 회하를 잇는 편하(汴河) 운하를 복구하여 강남의 물자를 다시 장안으로 운송할 수 있게 함으로써 수도권 경제 회복에 기여했다.

그러나 지방에 대한 통제력은 계속 약화되었다. 765년 검남(劍南)에서는 절도사 연무 사후 후임 국영애(郭英乂중국어)와 부장 최녕 사이에 내분이 발생하여 최녕이 실권을 장악했고, 조정에서 파견한 두홍건조차 이를 제압하지 못했다.[19] 775년, 위박절도사 전승사는 소의절도사 설숭이 죽자 그의 동생 설악의 자리를 노리고 반란을 부추겨 소의 번진의 수도인 상주(相州중국어)를 점령했다. 대종이 중지 명령을 내렸음에도 전승사는 공격을 계속하여 위주(衛州), 명주(洺州) 등을 추가로 점령했다.[20] 이에 분노한 대종은 이정지, 이중신, 주도, 이보천 등 다른 절도사들과 연합하여 전승사 토벌에 나섰다. 초기에는 관군이 우세했으나, 전승사의 이간책에 이정지가 철수하고 이보천이 배신하면서 토벌은 실패로 돌아갔다. 결국 776년 대종은 전승사를 사면할 수밖에 없었다.[20] 같은 해 변송(汴宋) 번진에서는 이령요(李靈曜중국어)가 절도사 자리를 찬탈했으나 곧 토벌되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변송 번진의 8개 주 중 5개 주가 평로절도사 이정지에게 넘어가면서 오히려 그의 세력만 강화되는 결과를 낳았다.[20]

775년, 대종이 총애하던 독고귀비가 사망하자 황후로 추증하고 크게 슬퍼하며 3년 가까이 시신을 궁에 두었다가 778년에야 장례를 치렀다.[20]

777년, 대종은 오랜 기간 전횡을 일삼던 재상 원재와 왕진의 부패에 염증을 느끼고 그들을 숙청했다. 원재는 처형되고 왕진은 유배되었으며, 양염과 상곤이 새로운 재상으로 등용되었다. 대종은 양염을 통해 개혁을 추진하려 했으나 그가 곧 사망하면서 상곤이 국정을 주도하게 되었다.[20]

이 시기 여러 군벌들은 사실상 독립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다. 777년 기준 주요 군벌 세력은 다음과 같다.[20]

절도사번진관할 주병력 규모
이정지평로(平盧)15개 주6만 명
전승사위박(魏博)7개 주5만 명
이보천성덕(成德)7개 주5만 명
양숭의산남동도(山南東道)6개 주2만 5천 명



779년, 전승사가 사망하자 대종은 그의 조카 전열의 계승을 인정했다. 같은 해 화서절도사 이중신이 부장 이희렬에게 축출당하자, 대종은 이중신을 장안으로 불러 재상으로 삼고 이희렬을 권한대행으로 임명했다.[20]

779년 여름, 대종은 54세의 나이로 병사했다. 황태자 이괄당 덕종으로 즉위했다.[20]

3. 대외 관계

(내용 없음)

3. 1. 토번과의 관계

당 대종은 티베트고원토번吐番bo 왕조에게 비단을 공물로 바치던 것을 중단하였다. 이 조치는 당시 토번의 왕이었던 치쏭데찬赤松德贊bo의 분노를 샀다. 결국 763년, 토번의 장수 다짜뤼공達扎樂宮bo이 이끄는 20만 대군이 당나라를 침공하여 수도 장안을 11일 동안 점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는 당나라에게 큰 수모였다.

3. 2. 위구르(회흘)와의 관계

대종은 아버지 숙종이 황제로 즉위한 후 병마대원수(兵馬大元帥)에 임명되어 곽자의 등과 함께 안경서에게 점령당한 장안과 낙양 등을 탈환하는 과정에서 회흘족(回紇族)을 원군으로 불러들였다. 이는 안사의 난을 진압하는 데 도움을 주었지만, 동시에 후일 외적의 침입을 불러오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4. 평가

대종 재위 말기는 안사의 난 이후 심화된 번진 세력의 발호와 중앙 정부의 통제력 약화가 두드러진 시기였다. 여러 차례 번진을 통제하려 시도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오히려 번진의 독립성은 더욱 강화되는 결과를 낳았다.

773년, 소의절도사(昭義節度使) 설숭이 사망하자 대종은 그의 동생 설이(薛餌)의 계승을 허락했다. 그러나 이웃 위박절도사(魏博節度使) 전승사(田承嗣)는 이를 기회로 삼아 775년 소의 번진의 장수 배지청(裴志清중국어)을 부추겨 반란을 일으키게 하고 수도 상주(相州)를 점령했다. 설이는 조정으로 도망쳤고, 대종은 전승사에게 작전 중지를 명했으나 그는 이를 무시하고 위주(衛州), 명주(洺州), 자주(磁州) 등을 차례로 점령하며 소의 번진 대부분을 장악했다. 이는 중앙 정부의 명령이 번진에게 더 이상 효력을 발휘하지 못함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20]

전승사의 이러한 독단적인 행동과 더불어, 평로절도사(平盧節度使) 이정기(李正己)와 성덕절도사(成德節度使) 이보신(Li Baochen) 등 다른 번진과의 마찰은 결국 황제와 다른 번진들의 군사적 대응을 불러일으켰다. 775년 여름, 대종은 이정기, 이중신(李重臣), 주도(朱滔), 이보신, 설겸훈(薛兼訓중국어) 등에게 전승사 토벌을 명했다. 초기에는 관군이 승리하는 듯했으나, 전승사가 교묘하게 이정기를 설득하여 회군하게 만들었고, 이보신 역시 환관 마승천(馬承倩중국어)과의 마찰 및 전승사의 회유로 인해 동맹이었던 주도를 기습 공격하면서 토벌군은 와해되었다. 결국 776년, 대종은 전승사를 사면하고 토벌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번진 간의 복잡한 이해관계와 중앙 정부의 군사적 통제력 상실을 여실히 드러냈다.[20]

비슷한 시기, 변송절도사(汴宋節度使) 대행 전신옥(田神玉중국어)이 사망하자 그 휘하의 장수 이령요(李靈曜중국어)가 번진을 장악하려 했다(776년). 대종은 주변 번진들에게 토벌을 명했고, 이령요는 전승사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빠르게 패배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변송 번진의 8개 주 중 5개 주가 평로절도사 이정기에게 넘어가면서 황실은 실질적인 이득을 거의 얻지 못하고 오히려 이정기의 세력만 키워주는 결과를 낳았다.[20]

777년에 이르면 주요 번진들은 사실상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다.[20] 아래는 당시 주요 번진의 세력 규모이다.

절도사번진관할 주병력
이정기(李正己)평로절도사(平盧節度使)15개 주60,000명
전승사(田承嗣)위박절도사(魏博節度使)7개 주50,000명
이보신(Li Baochen)성덕절도사(成德節度使)7개 주50,000명
양숭의(梁崇義)산남동도(山南東道)6개 주25,000명



이러한 상황 속에서 779년 전승사가 사망하자, 대종은 그의 조카 전열(田悅)의 위박절도사 계승을 허락했다. 이는 번진의 세습을 사실상 용인한 것으로, 중앙 정부의 권위 약화를 더욱 심화시키는 조치였다. 같은 해, 회서절도사(淮西節度使)에서는 이중신(李重臣)이 부하 장수 이희열(李希烈)에게 축출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대종은 자신에게 충성했던 이중신을 장안으로 불러 재상으로 삼고, 이희열을 절도사 대행으로 임명하며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20]

한편, 궁정 내부에서는 변화가 있었다. 775년, 대종이 총애하던 독고귀비(獨孤貴妃)가 사망하자 황제는 크게 슬퍼하며 그녀에게 황후의 시호를 추증하고 시신을 오랫동안 궁궐에 두었다가 778년에야 장례를 치렀다.[20] 777년에는 오랜 기간 권력을 누리며 부패했다는 비판을 받아온 재상 원재(元載)와 왕진(王縉)을 숙청했다. 원재는 처형되었고 왕진은 유배되었으며, 그 자리에는 양염(楊炎)과 상곤(常袞)이 임명되었다. 대종은 양염을 통해 정부 개혁을 추진하려 했으나, 양염이 그해 말 사망하면서 개혁 동력은 약화되고 상곤이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다.[20]

779년 여름, 대종은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황태자 이괄(李适)이 덕종(德宗)으로 즉위했다.[20]

대종 재위 기간 동안 임명된 주요 재상은 다음과 같다.

재상재임 기간
묘진경(苗晉卿)762–763
배준경(裴遵慶)762–763
원재(元載)762–777
이보국(李輔國)762[21]
유안(劉晏)763–764
이괄(李适) (황태자 시절)763–764
이현(李峴)763–764
왕진(王縉)764–777
두홍점(杜鴻漸)764–769
배면(裴冕)769
양염(楊綰)777
상곤(常袞)777–779
이중신(李忠臣)779


5. 가족 관계


  • '''조부''' : 현종(玄宗) 지도황제(至道皇帝) 이융기(李隆基)
  • '''조모''' : 원헌황후(元獻皇后) 양씨(楊氏)
  • '''부친''' : 숙종(肅宗) 문명황제(文明皇帝) 이형(李亨)
  • '''모친''' : 장경황후(章敬皇后) 오씨(吳氏)

5. 1. 황후

wikitext

봉호시호이름(성씨)별칭재위년도생몰년도국구(장인)능묘비고
궁인(宮人)예진황후
(睿眞皇后)
심씨(沈氏)[22](추존)? ~ ?서국공(徐國公)
심역직(沈易直)
원릉(元陵)[23]
귀비(貴妃)정의황후
(貞懿皇后)
독고씨(獨孤氏)(추존)? ~ 775년독고 영(獨孤 潁)장릉(莊陵)[24]


5. 2. 자녀

순서봉호시호이름생몰년도생모자식비고
장남황태자(皇太子)이괄(李适)742년 ~ 805년예진황후 심씨11남 11녀제9대 황제 덕종(德宗).[28]
차남정왕(鄭王)소정황태자
(昭靖皇太子)
이막(李邈)746년 ~ 773년귀비 최씨1남[29][30]
3남균왕(均王)이하(李遐)미상요절함.
4남목왕(睦王)이술(李述)? ~ 791년미상
5남단왕(丹王)이유(李逾)? ~ 820년미상15남 15녀[31]
6남은왕(恩王)이련(李連)? ~ 817년미상1녀
7남한왕(韓王)이형(李迥)750년 ~ 796년정의황후 독고씨1녀[32]
8남간왕(簡王)이구(李遘)? ~ 809년미상[33]
9남익왕(益王)이내(李迺)미상
10남수왕(隋王)이신(李迅)? ~ 784년미상
11남형왕(荊王)이선(李選)미상요절함.
12남촉왕(蜀王)이소(李遡)? ~ 783년귀비 최씨
13남흔왕(忻王)이조(李造)? ~ 811년미상
14남소왕(韶王)이섬(李暹)? ~ 796년미상
15남가왕(嘉王)이운(李運)? ~ 838년미상
16남단왕(端王)이우(李遇)? ~ 791년태비
17남순왕(循王)이휼(李遹)미상
18남공왕(恭王)이통(李通)공왕태비
19남원왕(原王)이규(李逵)? ~ 832년미상
20남아왕(雅王)이일(李逸)? ~ 799년미상



순서봉호이름생몰년도생모부마비고
차녀기조의공주(齊昭懿公主)? ~ 810년귀비 최씨곽애(곽자의의 6남)의안황태후의 어머니.
5녀화양공주(華陽公主)? ~ 774년정의황후 독고씨
6녀옥허공주(玉虛公主)미상
10녀조장의공주(趙莊懿公主)미상전서(천승사의 6남)
?영선공주(靈仙公主)미상
?진정공주(真定公主)미상
?영청공주(永清公主)미상배방(裴仿)
?옥청공주(玉清公主)미상
?가봉공주(嘉豐公主)미상고이(高怡)
?장림공주(長林公主)미상심명(沈明)
?태화공주(太和公主)미상
?보녕공주(普寧公主)미상오사광(吳士廣)
?진양공주(晉陽公主)미상배액(裴液)
?의청공주(義清公主)미상유고(柳杲)
?수창공주(壽昌公主)미상두객량(竇克良)
?신도공주(新都公主)창(暢)미상전화(천승사의 3남)
?서평공주(西平公主)? ~ 784년미상
?장녕공주(章寧公主)미상
?가성공주(嘉誠公主)미상
?낙안공주(樂安公主)미상장호(張怙)
?영락공주(永樂公主)미상전화(천승사의 3남)


6. 연호

대종원년2년3년4년5년6년7년8년9년10년
서력
(西曆)
762년763년764년765년766년767년768년769년770년771년
간지
(干支)
임인(壬寅)계묘(癸卯)갑진(甲辰)을사(乙巳)병오(丙午)정미(丁未)무신(戊申)기유(己酉)경술(庚戌)신해(辛亥)
연호
(年號)
보응(寶應)
원년
2년
광덕(廣德)
원년
2년영태(永泰)
원년
2년
대력(大曆)
원년
2년3년4년5년6년
대종11년12년13년14년15년16년17년18년
서력
(西曆)
772년773년774년775년776년777년778년779년
간지
(干支)
임자(壬子)계축(癸丑)갑인(甲寅)을묘(乙卯)병진(丙辰)정사(丁巳)무오(戊午)기미(己未)
연호
(年號)
7년8년9년10년11년12년13년14년


참조

[1] 서적 Old Book of Tang, vol. 11 Old Book of Tang 762-05-18
[2] 서적 Old Book of Tang, vol. 11 Old Book of Tang 726-11-11
[3] 서적 Old Book of Tang, vol. 11 Old Book of Tang 779-06-10
[4] 서적 Old Book of Tang, vol. 52 Old Book of Tang
[5] 서적 Old Book of Tang, vol. 11 Old Book of Tang
[6] 서적 Zizhi Tongjian, vol. 218 Zizhi Tongjian
[7] 서적 Zizhi Tongjian, vol. 219 Zizhi Tongjian
[8] 서적 Zizhi Tongjian, vol. 220 Zizhi Tongjian
[9] 서적 Outlines of the History of the Chinese, vol. 2 Bo Yang
[10] 서적 Old Book of Tang, vol. 11 Old Book of Tang 758-06-29
[11] 서적 Zizhi Tongjian, vol. 221 Zizhi Tongjian
[12] 서적 Old Book of Tang, vol. 11 Old Book of Tang 762-05-14
[13] 서적 Zizhi Tongjian, vol. 222 Zizhi Tongjian
[14] 서적 Old Book of Tang, vol. 11 Old Book of Tang 762-11-12
[15] 서적 Bo Yang Edition of the Zizhi Tongjian, vol. 53 Bo Yang Edition of the Zizhi Tongjian 759
[16] 서적 Bo Yang Edition of the Zizhi Tongjian, vol. 53 Bo Yang Edition of the Zizhi Tongjian 763
[17] 서적 Zizhi Tongjian, vol. 223 Zizhi Tongjian
[18] 서적 Old Book of Tang, vol. 11 Old Book of Tang 763-11-16
[19] 서적 Zizhi Tongjian, vol. 224 Zizhi Tongjian
[20] 서적 Zizhi Tongjian, vol. 225 Zizhi Tongjian
[21] 서적 New Book of Tang, vol. 62 & Zizhi Tongjian, vol. 222 New Book of Tang & Zizhi Tongjian
[22] 인물 예정황태후
[23] 인물 예정황태후 759
[24] 인물 정의황후
[25] 인물 정의황후 759
[26] 인물 미상
[27] 인물 미상
[28] 인물 봉절군왕/노왕/옹왕
[29] 인물 익창군왕
[30] 인물 미상
[31] 인물 침왕
[32] 인물 연경군왕
[33] 인물 부왕
[34] 인물 승평공주/괵국공주/제국공주
[35] 인물 경화진인
[36] text
[37] t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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