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티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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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티와자는 투슈라타의 아들로, 미탄니 왕위 계승 분쟁 과정에서 히타이트 왕 수필룰리우마 1세의 지원을 받아 미탄니의 왕이 되었다. 슈타르나 3세에게 왕위를 찬탈당한 후 히타이트로 피신, 수필룰리우마 1세의 사위가 되어 히타이트 군대의 지원을 받아 미탄니로 돌아와 왕위를 되찾았다. 이 과정에서 히타이트는 유프라테스 강 서쪽의 하니갈바트/미탄니 영토를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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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누완다 2세는 수필룰리우마 1세의 아들로 히타이트 왕위를 계승했지만, 카스카인의 위협과 히타이트 역병으로 짧은 통치 기간을 보냈다.
사티와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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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직책 | 미탄니 국왕 |
재위 기간 | 기원전 1350년 ~ 기원전 1320년 (고) / 기원전 1330년 ~ 기원전 1305년 (저) |
대수 | 11 |
전임 | 슈타르나 3세 |
후임 | 샤투아라 1세 |
아버지 | 투슈라타 |
2. 히타이트와의 관계
사티와자는 미탄니의 왕 투슈라타의 아들이었으며, 그의 후르어 이름은 ''킬리-테슈프''였다. 아버지 투슈라타가 자신의 아들 중 한 명에게 살해당한 후[2] 미탄니는 정치적 혼란에 빠졌다. 이 틈을 타 왕위를 찬탈한 슈타르나 3세는 투슈라타의 또 다른 아들인 사티와자를 살해하려 했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사티와자는 히타이트 제국으로 도망쳐 당시 왕이었던 수필룰리우마 1세에게 의탁했다.[2]
수필룰리우마 1세는 이전부터 미탄니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시도하고 있었다. 그는 북시리아의 우가리트를 복속시키고 카시트 왕조 바빌론과 동맹을 맺는 등 외교적 압박을 가하는 한편, 군사적으로도 미탄니를 위협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탄니 내부의 혼란과 사티와자의 망명은 히타이트에게 좋은 기회가 되었다. 특히 슈타르나 3세가 기원전 14세기경 독립한 아시리아의 아슈르-우발리트 1세에게 지원을 요청했으나 실패하자, 수필룰리우마 1세는 사티와자를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수필룰리우마 1세는 사티와자에게 자신의 딸을 아내로 주고, 미탄니 왕위를 되찾을 수 있도록 군사적 지원을 제공했다. 사티와자는 히타이트 군대의 도움을 받아 미탄니로 돌아가 슈타르나 3세를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다. 이 과정과 결과는 수필룰리우마 1세와 사티와자 사이에 체결된 두 개의 조약(기원전 1345년에서 1323년 사이 체결 추정)에 기록되어 있으며[3], 이 사건을 계기로 히타이트는 미탄니에 대한 강력한 영향력을 확보하고 유프라테스강 서쪽의 영토를 얻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2. 1. 히타이트의 지원과 미탄니 왕 즉위
아버지 투슈라타 왕이 자신의 아들 중 한 명에게 살해당한 후[2] 정치적 혼란 속에서, 찬탈자 슈타르나 3세는 투슈라타의 또 다른 아들인 사티와자를 살해하려 했다. 위협을 느낀 사티와자는 히타이트 제국으로 도망쳐 왕 수필룰리우마 1세에게 의탁했다.수필룰리우마 1세는 사티와자에게 자신의 딸을 아내로 주고, 미탄니 왕위를 되찾도록 군사적 지원을 제공했다. 사티와자는 히타이트 군대와 함께 미탄니로 돌아갔으며, 이 과정에서 수필룰리우마 1세의 아들인 피야실리(사리-쿠수)가 동행하여 그를 도왔다.[2] 한편, 왕위를 찬탈했던 슈타르나 3세는 아시리아로부터 지원을 얻으려 했으나 실패했고, 결국 사티와자와 히타이트 연합군에게 패배했다.
슈타르나 3세가 축출되면서 사티와자는 미탄니의 새로운 왕으로 즉위했다. 이 일련의 사건들은 수필룰리우마 1세와 사티와자 사이에 체결된 두 개의 조약에 기록되어 있으며, 이 조약들은 기원전 1345년에서 1323년 사이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된다.[3] 이 과정에서 피야실리와 히타이트는 유프라테스강 서쪽의 옛 미탄니 영토(하니갈바트)를 상당 부분 확보했을 가능성이 있다.
2. 2. 히타이트의 영향력 확대
히타이트의 왕 수필룰리우마 1세는 미탄니를 공략하려 했으나 초기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이후 그는 북시리아의 우가리트를 산하에 두고 종속 조약을 체결했으며, 혼인 외교를 통해 카시트 왕조 바빌론과 동맹을 맺어 미탄니를 외교적으로 압박했다. 또한 이수와를 공격하며 미탄니의 수도 와슈칸니를 위협했다.미탄니 내부에서는 투슈라타 왕이 자신의 아들 중 한 명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후 슈타르나 3세가 왕위를 찬탈하며 정치적 혼란이 가중되었다. 슈타르나 3세는 한때 미탄니의 지배 하에 있었으나 아슈르-우발리트 1세 치세(기원전 1365년-1330년)에 독립한 동쪽의 아시리아로부터 지원을 얻으려 했으나, 히타이트에게 격파되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투슈라타의 아들 사티와자(후르어 이름: 킬리-테슈프)는 슈타르나 3세의 살해 위협을 피해 히타이트로 망명했다. 그는 수필룰리우마 1세에게 의탁하여 그의 딸과 결혼했고, 히타이트의 군사적 지원을 약속받았다.[2]
사티와자는 히타이트 왕자이자 수필룰리우마 1세의 아들인 피야실리(사리-쿠수)가 이끄는 히타이트 군대의 도움을 받아 미탄니로 돌아왔다. 그는 자신을 제거하려 했던 찬탈자 슈타르나 3세를 물리치고 미탄니의 왕으로 즉위했다.[2] 이 과정은 수필룰리우마 1세와 사티와자 사이에 체결된 두 개의 조약(기원전 1345년에서 1323년 사이 체결된 것으로 추정)에 기록되어 있다.[3]
이 사건의 결과로, 히타이트와 피야실리는 유프라테스강 서쪽에 위치한 하니갈바트, 즉 미탄니 영토의 거의 전부를 장악하게 되었다.[3] 이는 히타이트 제국이 메소포타미아 북부 지역으로 세력을 크게 확장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사티와자의 즉위 이후 미탄니는 실질적으로 히타이트의 속국 상태가 되었다.
사티와자의 뒤를 이은 미탄니 왕은 사투아라로 여겨지지만, 그가 어떻게 왕위에 올랐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이후 아시리아의 왕 아다드-니라리 1세는 사투아라를 자신의 봉신으로 삼았다고 주장하며, 미탄니에 대한 아시리아의 영향력 확대를 보여준다.
3. 미탄니 왕위 계승 분쟁
사티와자의 형 투슈라타가 미탄니의 새로운 왕이 되자, 히타이트의 왕 슈필룰리우마 1세는 미탄니를 공격했지만 처음에는 실패했다. 이후 슈필룰리우마 1세는 외교 전략을 구사하여 북시리아의 우가리트를 영향력 아래에 두고 종속 조약을 맺었으며, 혼인 외교를 통해 카시트 왕조 바빌론과 동맹을 맺어 미탄니를 압박했다. 또한 히타이트는 미탄니를 다시 공격하기 위해 이수와를 먼저 공격하고, 수도 와슈칸니를 목표로 삼았다.
결국 투슈라타는 수도에서 도망쳤으나, 자신의 아들 중 한 명에게 살해당하며 미탄니는 혼란에 빠졌다. 이 기회를 이용해 슈필룰리우마 1세는 후르족의 왕이라는 명목상의 칭호만 가진 아르타타마 2세와 조약을 맺고 그를 미탄니의 왕으로 세웠으며, 양국 간의 국경선을 새로 정했다.
이러한 혼란기에 미탄니 동쪽에서는 한때 미탄니의 지배를 받았던 아시리아가 아슈르-우발리트 1세(기원전 1365년 ~ 기원전 1330년) 아래에서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아르타타마 2세의 뒤를 이은 슈타르나 3세는 히타이트로부터 독립을 시도하고 아시리아의 지원을 모색했으나, 결국 히타이트에 의해 축출되었다. 이후 투슈라타의 동생인 사티와자가 히타이트의 슈필룰리우마 1세의 지원을 받아 미탄니의 왕위에 올랐다.
3. 1. 슈타르나 3세와의 갈등
투슈라타 왕 사후의 정치적 혼란기에 찬탈자 슈타르나 3세가 권력을 잡았다. 그는 투슈라타의 아들[2] 또는 동생[3]인 사티와자(Kili-Tešup|킬리-테슈프hur)를 살해하려 했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사티와자는 히타이트로 탈출하여 수필룰리우마 1세 왕에게 피신했다. 그는 수필룰리우마 1세의 딸과 결혼하며 히타이트의 지원을 확보했다.[2]한편, 미탄니의 왕위를 차지한 슈타르나 3세는 히타이트로부터 독립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그는 한때 미탄니의 지배 하에 있었으나 아슈르-우발리트 1세(기원전 1365년 ~ 기원전 1330년) 아래에서 세력을 키우던 동쪽의 아시리아로부터 지원을 모색했다.[3]
사티와자는 히타이트 군대의 지원을 받아 미탄니로 돌아왔다. 이 군대는 수필룰리우마 1세의 아들인 피야실리(사리-쿠수)가 이끌었다.[2] 사티와자는 아시리아와 손을 잡으려던 슈타르나 3세를 격파하고 미탄니의 왕으로 즉위했다. 이 일련의 사건들은 기원전 14세기 중반(기원전 1345년 ~ 1323년 사이)에 체결된 수필룰리우마 1세와 사티와자 간의 두 조약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3]
그러나 이 과정에서 히타이트는 유프라테스강 서쪽의 하니갈바트/미탄니 영토를 차지하게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4. 아시리아와의 관계
기원전 14세기경, 한때 미탄니의 지배하에 있던 동쪽의 아시리아는 아슈르-우발리트 1세(기원전 1365년경 - 기원전 1330년경) 치세에 점차 독립적인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사티와자의 왕위 계승 경쟁자였던 슈타르나 3세는 아시리아의 지원을 얻으려 했으나, 히타이트에 의해 패배하였다.[2][3] 이후 사티와자가 히타이트의 지원으로 미탄니 왕위에 올랐지만, 미탄니의 국력은 약화된 상태였다.
사티와자 사후 미탄니 왕위를 계승한 것으로 추정되는 사투아라 시대에 이르면, 아시리아의 영향력은 더욱 커졌다. 아시리아의 왕 아다드-니라리 1세는 사투아라를 자신의 봉신으로 삼았다고 주장했으며, 이는 이 시기 미탄니가 아시리아에 사실상 복속되었음을 시사한다.
참조
[1]
논문
The Kings of Mittani in Light of the New Evidence from Terqa
https://sepoa.fr/wp/[...]
NABU
2019-03
[2]
서적
Emar and the Transition from Hurrian to Hittite Power
Penn State University Press
2021
[3]
간행물
Details That Make the Difference: The Akkadian Manuscripts of the ‘Šattiwaza Treaties.’
https://ur.booksc.eu[...]
2018
[4]
서적
世界大百科事典 第2版
平凡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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