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룰리우마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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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수필룰리우마 1세는 히타이트 제국의 왕으로, 투드할리야 2세의 통치 기간 동안 고문이자 최고 군사령관으로 복무하며 영토 회복에 기여했다. 그는 북쪽의 카스카 족과 아지-하야사를 상대로 승리하며 세력을 확장했고, 아르자와 연합에 대항하여 투와누와 도시를 회복하는 등 초기 군사 활동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투드할리야 2세 사후 왕위에 오른 그는 히타이트 제국의 부흥을 이끌었으며, 아나톨리아에서 세력을 확장하고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미탄니 왕국을 공격하여 영향력을 확대했다. 특히 이집트 여왕과의 혼담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이집트와 전쟁을 벌였고, 이 과정에서 발생한 역병으로 인해 사망했다. 그의 치세는 히타이트 중흥기로 평가받으며, 그의 아들 무르실리 2세가 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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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누완다 2세는 수필룰리우마 1세의 아들로 히타이트 왕위를 계승했지만, 카스카인의 위협과 히타이트 역병으로 짧은 통치 기간을 보냈다.
수필룰리우마 1세 | |
---|---|
기본 정보 | |
칭호 | 히타이트 왕 |
아버지 | 투드할리야 3세(양자) |
배우자 | 헨티 말니갈 |
자녀 | 아르누완다 2세 텔리피누 피야실리 잔난차 무르실리 2세 무와티 |
계승자 | 아르누완다 2세 |
통치 기간 | 기원전 1350년경–기원전 1322년경 |
이름 | |
로마자 표기 | Šuppiluliuma I |
2. 출신 배경과 초기 생애
수필룰리우마 1세의 출생 배경은 불분명하다. 그의 손자인 하투실리 3세의 기록에 따르면, 수필룰리우마 1세의 아버지는 하투실리 2세로 여겨졌었다.[5] 그러나 이 기록의 용어는 더 먼 혈통을 나타낼 수도 있으며, 하투실리 1세를 가리킬 수도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6] 이후 수필룰리우마 1세를 투드할리야 3세(때로는 2세)의 아들로 명시한 인장이 발견되면서, 학자들은 이전 가설을 폐기하고 수필룰리우마 1세가 투드할리야 3세의 아들이라고 결론 내렸다.[7][8]
수필룰리우마 1세의 첫 번째 부인은 투드할리야 3세의 딸로 추정되는 헨티였다.[9] 헨티는 수필룰리우마 1세의 "적법한" 아들들, 즉 아르누완다 2세, 텔리피누, 피야실리(사리-쿠슈), 잔난자, 무르실리 2세의 어머니였던 것으로 여겨진다.[23][24][25][26][27] 또한, 수필룰리우마 1세에게는 딸들도 있었는데, 무와티는 미라-쿠왈리야의 왕 마슈후일루와와 결혼했고,[28] 다른 딸(이름 미상)은 미탄니의 왕 사티와자와 결혼했다.[29] 수필룰리우마 1세의 누이(이름 미상)는 아지-하야샤의 왕 후카나와 결혼했다.[30]
헨티는 남편에 의해 아히야와 땅으로 추방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는데,[32] 그 이유는 카시트의 바빌론 왕과의 결혼 동맹의 필요성,[33] 또는 그 결혼 동맹 이후 헨티와 수필룰리우마의 새로운 바빌론 아내 사이의 갈등 때문으로 추정된다.[34] 수필룰리우마 1세의 마지막 왕비는 바빌론 공주 말니갈이었으며, 그녀는 부르나-부리아쉬 2세의 딸로 추정된다.[35]
수필룰리우마 1세는 투드할리야 2세의 아들로, 아버지와 형 투드할리야 3세 아래에서 샤무하를 거점으로 카슈카족과 하야사에 맞서 싸우며 군사적 능력을 발휘했다. 형 투드할리야 3세가 왕위에 오른 직후에는 그를 살해하고 왕위에 올랐다.
2. 1. 초기 군사 활동
슈필룰리우마 1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무르실리 2세가 저술한 『슈필룰리우마의 업적』에 따르면, 슈필룰리우마는 투드할리야 3세의 고문이자 최고 군사령관으로 복무하며, 왕이 적의 공격으로부터 더 안전하게 하기 위해 궁정이 자리를 잡았던 샤무하로부터 영토를 회복하는 데 기여했다.[11]투드할리야와 슈필룰리우마는 북쪽의 카스카에 대항하여 성공적인 원정을 벌였고, 이후 서쪽과 남서쪽의 카시야와 훌라나 강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회복하고 보호하기 위해 개입하여 침략자들에게 반격을 가했다.[12] 피야필리 휘하의 카스카의 새로운 위협을 처리한 후, 투드할리야와 슈필룰리우마는 북동쪽의 아지-하야사의 왕 카란니(또는 라니)와 싸워야 했다. 카란니는 히타이트 영토를 침략하여 심지어 샤무하를 위협했지만 패배했고, 투드할리야와 슈필룰리우마는 차례로 아지-하야사를 침공했다. 쿠마하(아마도 케마)에서 벌어진 전투는 히타이트의 승리로 끝난 것으로 보이며, 아지-하야사는 이후 히타이트의 속국으로 나타난다.[13]
이러한 북쪽에서의 성공 이후, 투드할리야는 히타이트 수도인 하투사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14] 그는 슈필룰리우마를 아르자와 연합에 대항하여 남서쪽으로 보냈고, 슈필룰리우마는 여러 전투에서 승리하여 적에게 점령되었던 투와누와(아마도 티아나) 도시를 회복했다.[15]
히타이트 왕국은 잃었던 영토의 상당 부분을 회복했지만, 아르자와는 여전히 위험한 적이었으며, 무르실리 2세는 서쪽 지역을 정리하는 데 슈필룰리우마가 약 20년(아마도 그의 통치 기간까지 연장)이 걸렸다고 말했다. 이러한 회복은 투드할리야 3세의 통치 말기에 분명히 시작되었지만, 그 공로의 대부분은 슈필룰리우마에게 돌아갔다.[16]
슈필룰리우마는 투드할리야 2세의 아들로 여겨진다. 아버지 왕과 형 투드할리야 3세 아래에서, 샤무하를 거점으로 북방의 카슈카족 지배자 피야필리와 동방의 하야사 지배자 카란니와 싸웠다. 그의 활약으로 구도 하투샤에 히타이트 왕궁을 복구하는 데 성공했으며, 유능한 장군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3. 왕위 계승
투드할리야 3세가 사망했을 때, 왕위는 그의 아들인 투드할리야 2세에게 상속되었어야 했다. 수필룰리우마와 다른 히타이트 엘리트들은 그에게 충성을 맹세했었다.[17] 투드할리야 2세가 실제로 왕위에 올랐는지 여부는 불분명하다.[18] 그는 수필룰리우마의 지지자들에 의해 그의 형제들과 함께 살해당했다.[17] 투드할리야의 수석 군사 사령관으로 오랫동안 활동했던 수필룰리우마 1세가 이제 왕이 되었다.[19] 투드할리야 2세의 살해는 후에 신탁에 의해 수필룰리우마의 아들이자 두 번째 계승자인 무르실리 2세의 치세까지 20년 동안 히타이트 왕국을 휩쓴 역병의 원인으로 밝혀졌다.[20]
수필룰리우마는 투드할리야 2세의 아들로 여겨진다. 아버지 왕과 형 투드할리야 3세 아래에서, 사무하(Samuha)를 거점으로 북방의 카슈카족 지배자 피야필리와 동방의 하야사(Hayasa) 지배자 카란니와 싸웠다. 그의 활약으로 구도 하투샤에 히타이트 왕궁을 복구하는 데 성공했으며, 유능한 장군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형 투드할리야 3세가 왕위를 계승한 직후 음모를 꾸며 그를 살해하고 스스로 대왕에 즉위했다.
4. 히타이트 제국의 부흥
수필룰리우마 1세는 히타이트 제국의 부흥을 이끈 왕이다. 투드할리야 3세 치세에 최고 군사령관으로 활약하며 북쪽의 카스카와 서쪽의 아르자와를 격퇴하고 잃어버린 영토를 회복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11][12][15] 특히, 아지-하야사를 정복하여 히타이트의 속국으로 만든 것은 중요한 업적이다.[13]
수필룰리우마 1세는 서부 아나톨리아에서 히타이트의 지배권을 확립하기 위해 노력했다. 미라-쿠와릴리아의 왕위 계승자였던 마슈후일루와에게 망명을 제공하고 자신의 딸과 결혼시켜 미라-쿠와릴리아의 봉신으로 삼았다.[37] 또한, 히타이트 사령관이 아르자와 지도자에게 패배하자 직접 개입하여 히타이트의 요구를 강제하기도 했다.[38]
그의 통치 말기에는 북쪽의 카스카와 다시 전쟁을 벌여 일시적으로 평정하고 히타이트 전초 기지를 세웠으나, 카스카의 반란으로 인해 북부 전선은 불안정하게 유지되었다.[39][40]
수필룰리우마 1세는 동남쪽의 미탄니를 견제하기 위해 북동쪽 국경을 확보하고자 했다. 그는 자신의 누이와 후카나를 결혼시켜 후카나를 아지-하야사의 왕으로 만들고 봉신 조약을 체결했다.[41]
또한, 남쪽과 동쪽에 위치한 키주와트나와 테가라마에 대한 지배권을 회복하고자 했다. 이 지역들은 메소포타미아 상부에 위치한 미탄니 왕국의 간접적인 지배를 받고 있었다. 수필룰리우마 1세는 미탄니 왕족 아르타타마 2세 및 바빌로니아와 동맹을 맺어 미탄니를 압박했다.[43][44]
4. 1. 아나톨리아에서의 세력 확장
수필룰리우마 1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무르실리 2세가 저술한 『슈필룰리우마의 업적』에 따르면, 수필룰리우마는 선왕 투드할리야 3세의 고문이자 최고 군사령관으로 복무하며, 왕이 적의 공격으로부터 안전하게 하기 위해 궁정이 자리 잡았던 샤무하로부터 영토를 회복하는 데 기여했다.[11]투드할리야와 수필룰리우마는 북쪽의 카스카에 대항하여 성공적인 원정을 벌였고, 이후 서쪽과 남서쪽의 카시야와 훌라나 강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회복하고 보호하기 위해 개입하여 침략자들에게 반격을 가했다.[12] 피야필리 휘하의 카스카의 새로운 위협을 처리한 후, 투드할리야와 수필룰리우마는 북동쪽의 아지-하야사의 왕 카란니(또는 라니)와 싸워야 했다. 카란니는 히타이트 영토를 침략하여 심지어 샤무하를 위협했지만 패배했고, 투드할리야와 수필룰리우마는 차례로 아지-하야사를 침공했다. 쿠마하(아마도 케마)에서 벌어진 전투는 히타이트의 승리로 끝난 것으로 보이며, 아지-하야사는 이후 히타이트의 속국으로 나타난다.[13]
이러한 북쪽에서의 성공 이후, 투드할리야는 히타이트 수도인 하투사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14] 그는 수필룰리우마를 아르자와 연합에 대항하여 남서쪽으로 보냈고, 수필룰리우마는 여러 전투에서 승리하여 적에게 점령되었던 투와누와(아마도 티아나) 도시를 회복했다.[15]
히타이트 왕국은 잃었던 영토의 상당 부분을 회복했지만, 아르자와는 여전히 위험한 적이었으며, 무르실리 2세는 서쪽 지역을 정리하는 데 수필룰리우마가 약 20년(아마도 그의 통치 기간까지 연장)이 걸렸다고 말했다. 이러한 회복은 투드할리야 3세의 통치 말기에 분명히 시작되었지만, 그 공로의 대부분은 수필룰리우마에게 돌아갔다.[16]
수필룰리우마 1세는 서부 아나톨리아에서 히타이트의 지배권을 확립하기 위해 계속 노력했고, 미라-쿠와릴리아의 왕위 계승자였던 마슈후일루와에게 망명을 제공했다. 수필룰리우마 1세는 자신의 딸 무와티를 마슈후일루와와 결혼시킨 후, 그의 새로운 사위를 미라-쿠와릴리아의 봉신으로 만들었다. 셰하 강 유역의 젊은 마나파-타르훈타가 형제들에게 쫓겨나 카르키샤로 도망치자, 수필룰리우마 1세는 카르키샤의 통치자에게 선물을 보내 그의 안전을 보장했으며, 이 망명자는 결국 수필룰리우마 1세의 아들 무르실리 2세에 의해 왕좌에 복귀했다.[37] 히타이트 사령관 히무일리가 아르자와 지도자 안자파흐아두에게 패배한 사건이 발생했는데, 안자파흐아두는 히타이트 포로 석방 요구를 거부했고, 이로 인해 수필룰리우마 1세가 직접 개입하여 요구를 강제하게 되었다. 수필룰리우마 1세는 자신의 부관 하누티를 이 지역의 총독으로 임명했고, 하누티는 랄란다의 항복을 받아내고 하팔라를 약탈했다.[38]
그의 통치 말기, 아마도 잔난자 사건 직전 즈음에, 수필룰리우마 1세는 북쪽의 카스카와 전쟁을 벌여 그들의 땅 일부를 일시적으로 정복하고 평정했으며, 그곳에 히타이트 전초 기지를 세웠다. 이어서 카스카 반란이 일어나 많은 히타이트인들이 살해당하고 히타이트 요새가 공격을 받았다. 수필룰리우마 1세와 그의 장군 두 명은 반격하여 적의 영토를 침략하고 약탈했으며, 투마나(고전 도마니티스?)의 북서부 땅에 대한 히타이트의 통제권을 회복했다.[39] 북부 전선은 불안정하게 유지되었고, 통치 말년에 수필룰리우마 1세는 다시 카스카에 대항하여 원정을 벌였다. 그는 겉으로는 성공을 거두었지만, 이러한 성과를 공고히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40]
수필룰리우마 1세는 동남쪽 야망을 추구하기 전에 북동쪽 국경을 확보하려는 듯, 자신의 누이와 후카나 사이의 결혼을 주선하여 후카나를 그의 고향인 아지-하야사의 왕으로 만들었다. 이러한 봉신과의 조약에는 일반적인 내용 외에도 광범위한 도덕 조항이 포함되었다. 이 조약은 아마도 수필룰리우마 1세의 통치 초기에 체결되었을 것이다.[41]
4. 2.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 원정
수필룰리우마 1세는 선왕 투드할리야 3세의 고문이자 최고 군사령관으로 복무하며 샤무하를 중심으로 히타이트 영토를 회복하는 데 기여했다.[11] 투드할리야 3세와 함께 북쪽의 카스카를 격퇴하고 서쪽과 남서쪽 지역의 통제권을 회복했다.[12] 이후 북동쪽의 아지-하야사를 정복하여 속국으로 삼았다.[13]히타이트는 잃었던 영토 대부분을 회복했지만, 아르자와는 여전히 위협적인 존재였다. 수필룰리우마 1세는 아르자와와의 전투에서 승리하여 투와누와(티아나)를 되찾았다.[15] 무르실리 2세는 수필룰리우마가 서쪽 지역을 정리하는 데 약 20년이 걸렸다고 기록했다.[16]
수필룰리우마 1세는 남쪽과 동쪽에 위치한 키주와트나와 테가라마에 대한 지배권을 회복하려 했다. 이 지역들은 상부 메소포타미아에 중심을 둔 미탄니 왕국의 간접적인 지배 하에 있었다. 초기에는 미탄니 공격에 실패했지만, 미탄니 왕족 아르타타마 2세와 동맹을 맺고, 바빌로니아와도 동맹을 맺어 미탄니를 압박했다.[43][44]
수필룰리우마 1세 통치 말년, 미탄니를 완전히 제거하기 위한 6년 전쟁이 벌어졌다. 이 전쟁은 주로 그의 아들 텔리피누(키주와트나의 사제)가 수행했으며, 텔리피누는 알레포의 종속 왕으로 임명되었다. 텔리피누는 미탄니의 공격을 격퇴했지만, 미탄니와 이집트군은 히타이트의 속국인 카데시를 공격했다.[52] 수필룰리우마는 카르케미시를 점령하고 아들 피야실리(사리-쿠수흐)를 그곳의 종속 왕으로 임명했다. 투슈라타가 아들에게 살해당하면서 미탄니 내부 갈등이 심화되었고, 히타이트는 시리아와 유프라테스강에서 영토를 공고히 할 수 있었다.[53]
미탄니의 약화를 틈타 아시리아와 알시가 독립했다. 투슈라타의 아들 샤티와자는 왕위를 되찾기 위해 수필룰리우마에게 의탁했다. 수필룰리우마는 딸을 샤티와자와 결혼시키고 군대를 지원하여 미탄니의 왕으로 복귀시켰다.[54] 샤티와자와의 조약 내용은 다음과 같다.[55]
> 수타르나는 전차 전사들과 함께 샤티와자 왕자를 죽이려 했다. 그러나 그는 도망쳐 나의 폐하, 하티의 왕, 영웅, 폭풍의 신이 사랑하는 수필룰리우마 앞에 왔다. 나는 위대한 왕으로서 이렇게 말했다. "폭풍의 신이 그의 법적 사건을 결정했다. 내가 투슈라타 왕의 아들 샤티와자를 내 손에 잡았으니, 나는 그를 그의 아버지의 왕좌에 앉혀 위대한 미탄니의 땅이 멸망하지 않도록 할 것이다. 나는 위대한 왕, 하티의 왕으로서, 내 딸을 위해 미탄니의 땅에 생명을 부여했다. 나는 투슈라타의 아들 샤티와자를 내 손에 잡았고, 그에게 딸을 아내로 주었다."[56]
샤티와자는 미탄니(하니갈바트)의 왕이 되었지만, 히타이트와 아시리아에 번갈아 종속되다가 결국 살만에세르 1세에 의해 완전히 병합되었다. 미탄니의 이전 영토와 속국들은 히타이트의 통제하에 재편되었으며, 에마르를 중심으로 하는 아스타타의 종속 왕국이 그 예이다.[57] 시리아의 히타이트 속국들은 카르케미시와 알레포에서 통치하는 히타이트 왕자들의 관리하에 있었다.[58]
4. 2. 1. 미탄니와의 전쟁
오랜 준비 끝에 수필룰리우마 1세는 이른바 1년 전쟁에서 미탄니를 다시 공격한 것으로 보인다. 누하쉬의 작은 왕인 사룹쉬가 미탄니에 대항하여 도움을 요청하자 수필룰리우마 1세는 미탄니를 직접 공격하여 그 속국인 이슈와를 점령한 후 미탄니의 수도 와슈카니를 점령하고 약탈했다. 투슈라타는 저항할 수 없어 다른 곳으로 피신하여 재결집했다.[45] 이 시점에서 수필룰리우마 1세는 메소포타미아 최북단에 위치한 알시의 속국 왕 안타라틀리를 세웠다.[46]그 후 수필룰리우마 1세는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시리아로 진격하여 알레포, 무키쉬(중심지: 알라라흐), 니야, 아라흐투, 카트나, 누하쉬를 포함하여 미탄니의 종주권을 인정했던 작은 왕국들을 정복했다. 그러나 카르케미시는 굳건히 미탄니의 통제하에 있었다.[47] 수필룰리우마 1세는 이집트와 느슨한 관계를 맺고 있던 작지만 부유한 우가리트 왕국을 무키쉬와 누하쉬에 대한 공동의 적대감을 통해 동맹으로 유도했고, 결국 우가리트의 왕 니크마두 2세는 수필룰리우마 1세의 종주권을 인정했다. 이러한 왕국들을 정복한 후 수필룰리우마 1세는 우가리트에 그들의 영토 일부를 하사했다.[48] 히타이트와의 동맹을 배신했던 누하쉬의 사룹쉬는 왕위에서 쫓겨났지만, 후에 그의 손자인 테테가 수필룰리우마 1세에 의해 속국 왕으로 임명되었다.[49]
카데시는 이집트의 종속국이었기에 수필룰리우마 1세는 이곳을 지나치려고 했지만, 그 왕 슈타타라에 의해 전투가 벌어졌다. 히타이트는 승리했고 왕과 그의 가족은 포로로 잡혀갔다. 이후 수필룰리우마 1세는 슈타타라의 아들 아이타카마가 히타이트의 속국으로 카데시를 통치하도록 허락했다.[50] 이집트는 당분간 이 도발에 대응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며 (수필룰리우마 1세는 나중에 자신이 카데시를 미탄니로부터 빼앗았다고 주장할 것이다), 수필룰리우마 1세는 1년 동안의 전쟁에서 자신이 이룬 모든 것에 큰 만족감을 느꼈다.[51]
이후 투슈라타가 새로운 미탄니 왕이 되자, 수필룰리우마 1세는 미탄니를 공격했지만 실패했다. 이후 수필룰리우마 1세는 북시리아의 교역 거점 도시 우가리트를 산하에 두고 종속 조약을 체결함과 동시에, 혼인 외교를 통해 바빌론 제3왕조(카시트)과 동맹을 맺어 미탄니를 압박했다. 그리고 다시 미탄니를 공격하기 위해 후리인의 국가 이슈와를 공략하고, 더 나아가 미탄니의 수도 와슈칸니를 목표로 했다. 미탄니 왕 투슈라타는 싸우지 않고 도망쳤지만, 그 후 아들에게 살해당했다. 동남쪽의 "후리인의 왕"이라는 칭호를 가졌던 알타타마 2세와 조약을 맺고 동쪽의 국경선을 정했다. 수필룰리우마 1세는 미탄니의 새로운 왕으로 투슈라타의 정적인 알타타마 2세를 옹립했다.
다음 슈타르나 3세가 아시리아와 동맹을 맺으려 하자 쳐부수고, 샤티와자(마티와자라고도 함)를 옹립하여 자신의 딸과 결혼시켜 미탄니에 영향력을 확보했다. 더 나아가 미탄니 영토였던 할파 시와 카르케미시 시를 공략하고, 아들 테레피누를 할파 왕으로, 또 다른 아들 피야실리를 카르케미시 왕으로 봉하여 국내를 굳혔다. 테레피누의 후손은 대대로 할파 왕, 키즈와트나의 신관, 그리고 테슈프, 헤파트, 샤르루마와 같은 신들의 신관을 역임했다.
4. 3. 바빌로니아와의 동맹
수필룰리우마 1세는 바빌론 제3왕조 (카시트)와 혼인 외교를 통해 동맹을 맺어 미탄니를 압박했다. 그는 바빌로니아 공주와 결혼했는데, 그녀가 그의 마지막 왕비였다.[44]5. 이집트와의 관계
미탄니의 약화는 히타이트와 이집트의 관계에도 영향을 주었다. 초기에는 아멘호테프 3세 이래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지만,[86] 아무루 왕국 문제를 둘러싸고 갈등이 시작되었다.
아멘호테프 4세(아크나톤) 사후, 그의 미망인 Dakhamunzu|다하문즈영어와 히타이트 왕자 잔난자와의 혼담이 오갔지만, 잔난자가 이집트로 가는 도중 암살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87] 이에 격분한 수필룰리우마 1세는 이집트를 침공하여 아르누완다 2세를 시켜 이집트 영토인 아므카와 가나안을 정복했다. 이 과정에서 이집트 포로들이 히타이트에 토끼열로 추정되는 역병을 퍼뜨렸고, 이는 수필룰리우마 1세와 그의 아들 아르누완다 1세의 사망 원인 중 하나로 여겨진다.[79][80]
5. 1. 아무르 왕국 문제
이집트와의 초기 우호 관계 이후, 결국 아무루를 두고 갈등이 벌어졌다. 하비루의 유목 부족 군대의 지원을 받은 압디-아쉬르타는 이집트의 늦은 군사 행동으로 포획되기 전까지 이웃들을 약탈했다.[59] 그의 아들 아지루는 이웃에 대한 약탈을 재개하는 동시에, 이집트 왕에게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며 히타이트의 공격에 대비하여 전차와 군대를 요청했다. 아지루는 이집트로 소환되어 구금되었고, 히타이트의 침략에 대처하기 위해 풀려났다.[60] 아지루는 잠시 이집트에 충성을 보인 후, 히타이트의 봉신인 니크마두 2세 우가리트와 아이타카마 카데시와 동맹을 맺고, 공개적으로 이집트에 반항하며 수필룰리우마의 봉신이 되었다. 새로운 히타이트 봉신들은 이전보다 더 열정적으로 이집트의 인접 속국들을 약탈했다.[61]시리아 남부는 전통적으로 고대 이집트 역대 왕조의 종주권 아래에 있었으며, 당시 이집트 제18왕조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히타이트와 이집트의 국경 지대에 존재했던 아무르 왕국 또한 이집트에 종속되어 있었다. 아멘호테프 4세 (아크나톤) 생전에 국경은 오론테스 강 이남과 아무르 왕국까지를 이집트의 영향하에 두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당시 Amurru kingdom|아무르 왕국영어의 왕 Aziru|아지르영어는 친 이집트적인 태도를 보였으나, 아멘호테프 4세 (아크나톤)가 종교 개혁 등으로 내정 중시의 자세를 취하고 있었던 것을 호기로 삼아 수필룰리우마 1세는 아무르 왕국에 압력을 가해 아지르 왕에게 히타이트의 종주권을 인정하게 하는 데 성공했다.
5. 2. 잔난자 사건
아크나톤(닙후루리아) 또는 투탕카멘(네브케페루레)의 왕위명)의 미망인이었던 이집트 여왕은 아들이 없었다. 그녀는 신하 중 한 명과 결혼하는 것을 꺼려, 히타이트 대왕 수필룰리우마 1세에게 그의 아들 중 한 명을 이집트로 보내 자신의 남편이자 왕으로 삼아달라고 요청했다. 이집트 여왕은 앙케세나문으로 추정된다.[63]무르실리 2세가 쓴 ''수필룰리우마의 업적''에 따르면, 앙케세나문은 자신의 고통을 표현하며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 내 남편이 죽었고 나는 아들이 없다. 당신에 대해 당신에게 많은 아들이 있다고 한다. 내 남편이 되도록 당신의 아들 중 한 명을 나에게 줄 수 있다. 나는 신하 중 한 명을 남편으로 맞이하고 싶지 않다... 두렵다.[64][65]
수필룰리우마 1세는 이 요청에 놀라며, 자신의 조언자들과 상의한 후 시종 하투사-지티를 이집트로 보내 진실을 확인하게 했다.[68] 앙케세나문은 수필룰리우마 1세의 의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했다.
> 어째서 당신은 "그들이 나를 속인다"라고 말했는가? 만약 내 아들이 있었다면, 내가 내 자신과 내 나라의 수치를 외국에 대해 썼겠는가? 당신은 나를 믿지 않았고 심지어 나에게 그렇게 말했어! 나의 남편이었던 자가 죽었다. 나는 아들이 없다! 결코 내 신하를 데려다가 남편으로 만들지 않을 것이다! 나는 다른 나라에 편지를 쓴 적이 없고, 오직 당신에게만 썼다! 그들은 당신의 아들이 많다고 말한다: 그러니 당신의 아들 중 한 명을 나에게 주시오! 나에게 그는 남편이 될 것이고, 이집트에게는 왕이 될 것이다.[69][70]
수필룰리우마는 여전히 의심을 거두지 않고 이집트 사신 하니에게 앙케세나문에게 다른 의도가 있다고 비난했다.
> ...당신은 마치 내 의무인 것처럼 내 아들을 나에게 계속 요구한다. 그는 어떤 식으로든 인질이 되겠지만, 왕으로 만들지는 않을 것이다![69][71]
하니의 추가적인 확약 후, 수필룰리우마는 결국 앙케세나문의 제안에 동의하여 자신의 아들 잔난자를 이집트로 보냈다. 그러나 잔난자는 이집트로 가는 도중에 살해되었다.[72]
무르실리 2세에 따르면, 수필룰리우마는 아들의 죽음에 대해 이집트인들에게 책임을 물으며 신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오 신들이여! 나는 악을 행하지 않았는데, 이집트인들이 나에게 이렇게 했고, 그들은 또한 내 나라의 국경을 공격했다.[73]
수필룰리우마의 며느리가 될 뻔한 앙케세나문은 투탕카멘의 미망인으로, 투탕카멘의 후계자인 아이가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되었다. 히타이트의 보복을 예상한 아이는 수필룰리우마에게 화해 서신을 보냈지만, 수필룰리우마는 이를 거부하고 전쟁을 위협했다.[74]
수필룰리우마의 분노에 더하여, 이집트 사신 하니는 잔난자의 죽음에 대한 책임 일부를 회피하려 했고, 아마도 이전 히타이트의 이집트 영토 공격을 지적했을 것이다.[77]
무르실리 2세의 ''역병 기도''에 따르면, 히타이트와 이집트는 하티의 폭풍의 신에 의해 맹세했지만, 히타이트가 합의를 어기고 이집트 영토 암카를 공격했다. 이집트인들은 수필룰리우마에게 아들을 왕위로 요청했고, 수필룰리우마가 아들을 보냈으나 이집트인들이 그를 죽였다. 수필룰리우마는 이집트를 공격하여 승리했지만, 이집트 포로들이 히타이트에 역병을 퍼뜨렸다.[79] 무르실리 2세는 이집트인들이 잔난자를 살해한 것이 히타이트에 역병(토끼열)이 발생한 원인이라고 판단했다.[80]
아멘호테프 4세(아크나톤) 사후, 수필룰리우마 1세는 왕자 잔난자와 아멘호테프 4세의 미망인 Dakhamunzu|다하문즈영어[86]와의 혼담을 마무리하고 잔난자를 이집트로 파견했지만, 잔난자는 도중에 암살되었다.[87] 수필룰리우마 1세는 이에 격분하여 이집트 침공을 결의하고, 왕자 아르누완다 2세에게 이집트 영토 아므카와 가나안을 공격하게 하여 정복했다.
5. 3. 이집트와의 전쟁
아무루의 작은 왕국을 두고 이집트와 초기 우호 관계를 맺은 이후, 결국 갈등이 벌어졌다. 하비루 유목 부족 군대의 지원을 받은 아무루의 왕 압디-아쉬르타는 이집트의 늦은 군사 행동으로 포획되기 전까지 이웃들을 약탈했다.[59] 그의 아들 아지루는 이웃에 대한 약탈을 재개했고, 이집트 왕에게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며, 히타이트의 공격에 대비하여 전차와 군대를 요청했다. 아지루는 이집트로 소환되어 구금되었고, 히타이트의 침략에 대처하기 위해 풀려났다.[60] 아지루는 잠시 이집트에 충성을 보인 후, 히타이트의 봉신인 니크마두 2세 우가리트와 아이타카마 카데시와 동맹을 맺고, 마침내 공개적으로 이집트에 반항하며 수필룰리우마의 봉신이 되었다. 새로운 히타이트 봉신들은 이전보다 더 열정적으로 이집트의 인접 속국들을 약탈했다.[61]수필룰리우마와 텔리피누가 시리아에 부재한 동안 이집트가 카데시를 공격한 것은 히타이트의 이집트 영향권 침입에 대한 보복으로 보인다. 수필룰리우마가 카르케미시를 포위하기 위해 시리아로 돌아왔을 때, 그는 보복으로 자신의 장군 두 명을 보내 이집트의 속국인 다마스쿠스 지역의 암카를 습격하고 약탈하게 했다.[62]
시리아 남부는 전통적으로 고대 이집트 역대 왕조의 종주권 아래에 있었으며, 당시에는 이집트 제18왕조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히타이트와 이집트의 국경 지대에 존재했던 아무르 왕국 또한 이집트에 종속되어 있었다. 이집트 왕 아멘호테프 4세(아크나톤) 생전에 국경은 오론테스 강 이남과 아무르 왕국까지를 이집트의 영향하에 두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당시 Amurru kingdom|아무르 왕국영어의 왕 Aziru|아지르영어는 친 이집트적인 태도를 처음에는 보였으나, 이집트에서 아멘호테프 4세(아크나톤)가 종교 개혁 등으로 인해 내정 중시의 자세를 취하고 있었던 것을 호기로 삼아 수필룰리우마 1세는 아무르 왕국에 압력을 가해 아지르 왕에게 히타이트의 종주권을 인정하게 하는 데 성공했다. 그 한편으로 아마르나 문서에는 아멘호테프 4세에게 보낸 수필룰리우마의 점토판 문서도 포함되어 있으며, 부왕 아멘호테프 3세 이래의 히타이트-이집트 간의 우호 관계 유지를 희망하고 있었다.
아멘호테프 4세의 사후, '''수필룰리우마 1세''' 아래로 왕자 자난자와 아멘호테프 4세의 미망인 Dakhamunzu|다하문즈영어[86]와의 혼담이 오가, 이야기를 마무리하여 자난자를 이집트로 파견했지만, 그 도중에 자난자는 암살되었다[87]. 왕자 자난자의 죽음에 격분한 수필룰리우마 1세는 이집트 침공을 결의하여 왕자 아르누완다 2세에게 명하여 이집트 영토 아므카와 가나안을 공격하게 하여 이를 정복했다.
6. 역병과 죽음
슈필룰리우마 1세는 이집트와의 전투 중, 이집트인 포로가 옮겨온 것으로 추정되는 역병으로 인해 히타이트 본국에서 발생한 역병으로 사망했다. 이 역병은 규모가 매우 컸으며, 당시 병의 치유를 기원하는 기도서가 다수 제작되었지만 역병은 귀족과 왕족 사이에도 퍼졌다. 결국 슈필룰리우마 1세는 병에 걸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3] 그의 사후 아들 아르누완다 2세가 즉위했지만, 그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같은 역병으로 사망했다.[3] 그리고 다른 아들 무르실리 2세가 즉위했다.[3]
7. 유산
슈필룰리우마 1세는 이집트와의 전투 중 이집트인 포로에게서 옮겨온 것으로 추정되는 역병으로 인해 사망했다.[1] 히타이트 본국에서 유행한 이 역병은 귀족과 왕족에게까지 퍼졌으며, 슈필룰리우마 1세도 이 병에 걸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1]
슈필룰리우마 1세 사후 아들인 아르누완다 2세가 왕위를 이었으나, 그 역시 같은 역병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1] 이후 또 다른 아들인 무르실리 2세가 왕위에 올랐다.[1] 무르실리 2세가 남긴 슈필룰리우마 연대기 덕분에 히타이트 중흥을 이끈 슈필룰리우마 1세의 업적을 비교적 자세히 알 수 있게 되었다.[1]
히타이트 왕국사는 고왕국과 신왕국, 또는 고왕국, 중왕국, 신왕국의 세 시기로 구분되는데, 세 시기로 구분할 경우 슈필룰리우마 1세를 신왕국 시대의 시작으로 본다.[1]
8. 대중문화에서의 묘사
미카 발타리의 역사 소설 《이집트인》에서 수필룰리우마 1세는 궁극적인 악당이자 무자비한 정복자, 완벽한 폭군으로 묘사된다. 대중문화 연구원 에이브 브라운은 "발타리의 책은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쓰여졌기 때문에, 수필룰리우마의 묘사는 역사적 사실보다는 히틀러에게서 영감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라고 언급했다.[81]
자넷 모리스는 수필룰리우마 1세를 주인공으로 하는 상세한 전기 소설 《나는 태양이다》를 썼다. 히타이트 학자 O.M. 거니는 "작가는 히타이트 문화의 모든 측면에 정통하다"라고 평했다.[83]
필립 암스트롱의 소설 《그림자 왕자》에서 수필룰리우마는 주인공 투필리울리마의 할아버지이자 조연으로 등장한다. 그는 전임자의 광기로 인해 마지못해 왕위를 차지했다고 설명된다.[85]
역사 소설 만화 《붉은 강》에서 수필룰리우마는 전쟁에서 은퇴한 노인으로 소개되며, 이야기 시작 직후 사망한다.
S.M. 스털링의 '낸터킷' 소설에서 수필룰리우마는 칼카시라는 아들과 함께 다른 이름으로 묘사될 수 있다.
수필룰리우마는 터키 작가 후세인 니할 아츠즈의 풍자 소설 《달카부클라르 게제시》(아첨꾼의 밤)에 등장하며, 이 소설은 히타이트 왕국을 배경으로 한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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