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초 2세 (카스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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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산초 2세는 1065년 사망한 아버지 페르난도 1세로부터 카스티야 왕국을 상속받았으며, 형제들과의 영토 분쟁을 통해 세력을 확장하려 했다. 그는 동생 알폰소 6세와 협력하여 갈리시아를 정복했지만, 이후 알폰소 6세와 대립하여 레온 왕위를 빼앗았다. 그러나 사모라를 포위하던 중 암살당했고, 후사가 없어 알폰소 6세가 카스티야와 레온의 왕위를 모두 계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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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초 2세 (카스티야)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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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 |
유형 | 군주 |
이름 | 산초 2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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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 기원후 1036년/1038년경 |
출생지 | 레온 왕국, 사모라 |
사망일 | 1072년 10월 6일 (33~36세) |
사망지 | 레온 왕국, 사모라 |
매장지 | 산 살바도르 데 오냐 |
배우자 | 알베르타 |
가문 | 히메네스 왕조 |
아버지 | 페르난도 1세 |
어머니 | 산차 데 레온 |
통치 정보 | |
칭호 | 카스티야 국왕 |
통치 기간 | 1065년 - 1072년 |
이전 통치자 | 페르난도 1세 |
이후 통치자 | 알폰소 6세 |
레온 국왕 정보 | |
칭호 | 레온 국왕 |
통치 기간 | 1072년 |
대관식 | 1072년 1월 12일 (레온) |
이전 통치자 | 알폰소 6세 |
이후 통치자 | 알폰소 6세 |
갈리시아 국왕 정보 | |
칭호 | 갈리시아 국왕 |
통치 기간 | 1071년 - 1072년 |
이전 통치자 | 가르시아 2세 |
이후 통치자 | 알폰소 6세 |
2. 생애
1067년 어머니 산차가 사망하자, 산초 2세는 본격적으로 영토 확장에 나섰다. 세 산초의 전쟁에서 사촌인 나바라의 산초 4세와 아라곤의 산초 라미레스를 격파하고 라부레바(La Bureba), 알타리오하(Alta Rioja), 알라바를 정복했다.[4] 이 지역은 원래 산초 2세의 아버지가 가르시아 3세에게 레온의 베르무도 3세를 대항하는데 도움을 준 대가로 할양했던 곳이었다.[5]
1071년, 산초 2세는 알폰소 6세와 함께 갈리시아를 정복하고 분할했다. 그러나 1072년 골페헤라 전투(Batalla de Golpejeraes)에서 알폰소 6세를 꺾고 톨레도 타피아국으로 몰아냈다.[3] 이후 레온 왕으로 즉위하여 아버지 페르난도 1세가 분배했던 세 왕국을 모두 차지하게 되었다.[4]
산초 2세는 누이 우라카가 통치하던 사모라까지 점령하려 했으나, 우라카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혔다.[4] 결국, 1072년 사모라의 귀족 벨리도 아돌포(Bellido Dolfos)에게 암살당하고 말았다.[1][2] 그는 탈영병으로 위장하여 산초 2세의 진영에 잠입, 산초 2세를 암살했다. 산초 2세 사후, 알폰소 6세가 다시 왕위를 이었다.[3]
2. 1. 즉위 전
1063년, 숙부인 아라곤 왕국의 왕 라미로 1세가 타이파의 하나였던 사라고사 왕국을 공격했다. 사라고사는 파리아 (공납금)을 카스티야에 지불하며 종속하고 있었는데, 아버지 카스티야-레온 왕의 명령으로 엘 시드와 함께 사라고사를 구원하러 가서 라미로 1세를 쳐부쉈다. 당시에는 종교보다 보호 관계가 더 중요했기에 이슬람교도인 사라고사를 구원했다.[3]1065년,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영토와 타이파로부터의 파리아를 받을 권리가 분할되었다. 카스티야와 사라고사의 공물은 산초 2세가, 레온과 톨레도 왕국의 공물은 알폰소 6세가, 갈리시아와 세비야 왕국의 공물은 가르시아 2세가 상속받았다. 토로와 사모라는 왕녀이자 두 누나인 엘비라와 우라카가 각각 상속했다(상속은 왕국 모든 수도원과도). 그러나 산초 2세는 분할에 불만을 품고 영토를 모두 차지하려 했으며, 이때 시드를 친위대장으로 발탁했다고 한다.[4]
1067년 어머니가 사망하자 군사 행동을 개시했다. 나바라의 왕 산초 4세와 아라곤 왕 산초 1세를 격파하고, 브레바, 알타 리오하, 알라바를 정복했다. 이 땅들은 아버지가 나바라 왕 가르시아 3세 (5세)에게 레온 왕 베르무도 3세에 대항하는 원조의 대가로 준 것이었다.
1068년 산초 2세는 막내 동생 알폰소 6세와 교전했지만, 1071년에는 돌연 손을 잡고 막내 동생 가르시아 2세를 세비야로 추방, 갈리시아를 정복했다. 1072년 1월 알폰소 6세를 배신하고, 시드의 활약으로 루란타다와 골페헤라에서 알폰소 6세를 격파하여 왕위를 빼앗고 레온도 병합했다. 알폰소 6세는 부르고스에 유폐되었지만, 사모라 영주였던 누나 우라카의 도움으로 톨레도로 망명했고, 산초 2세에게 남은 것은 사모라뿐이었다.[5]
2. 2. 카스티야 왕 즉위와 영토 분할
사모라에서 태어난 산초는 페르디난드 1세와 레온의 산차의 장남이었다. 1063년, 숙부인 아라곤의 왕라미로 1세가 타이파의 하나였던 사라고사 왕국을 공격하자, 사라고사가 파리아 (공납금)을 카스티야에 지불하며 종속하고 있었던 관계에서, 카스티야-레온 왕이었던 아버지의 명령으로 시드와 함께 구원하러 가서 라미로 1세를 쳐부쉈다. 사라고사는 이슬람교도였지만, 당시에는 종교보다는 보호 관계가 더 중요했다.[3]
1065년, 아버지 페르난도 1세가 사망한 이후, 그의 유언에 의해 영토와 타이파로부터의 파리아를 받을 권리가 분할 상속되었다. 이 상속으로 카스티야와 사라고사의 공물은 산초 2세가, 레온과 톨레도 왕국의 공물은 알폰소 6세가, 갈리시아와 세비야 왕국의 공물은 가르시아 2세가 상속받았다. 또한, 엘비라와 우라카는 각각 토로와 사모라를 상속받았다. 그러나 산초 2세는 이러한 분할에 불만을 품고, 모든 영토를 차지하려는 야심을 품었다. 이때 시드를 친위대장으로 발탁했다고 한다.[4]
1067년에 어머니 산차가 사망하자, 산초 2세는 군사 행동을 개시했다. 산초 2세는 사촌들인 나바라의 왕산초 4세와 아라곤 왕 산초 1세를 격파하고, 브레바, 알타 리오하, 알라바를 정복했다. 이 땅들은 원래 그의 아버지가 나바라 왕 가르시아 3세에게 레온 왕 베르무도 3세에 대항하는 원조의 대가로 준 것이었다.
1068년, 산초 2세는 동생 알폰소 6세와 교전했지만, 1071년에는 갑자기 손을 잡고 막내 동생 가르시아 2세를 세비야로 추방하여 갈리시아를 정복했다. 다음 해인 1072년 1월, 산초 2세는 알폰소 6세를 배신하고, 시드의 활약에 힘입어 루란타다와 골페헤라에서 알폰소 6세를 격파하여 왕위를 빼앗고 레온을 병합했다. 알폰소 6세는 부르고스에 유폐되었지만, 누나 우라카의 도움으로 톨레도로 망명했다. 이로써 산초 2세의 영토 확장은 사모라만을 남겨두게 되었다.[5]
2. 3. 형제들과의 전쟁
1065년, 아버지 페르난도 1세의 유언에 따라 영토가 분할되었는데, 산초 2세는 카스티야와 사라고사의 공물을, 알폰소 6세는 레온과 톨레도의 공물을, 가르시아 2세는 갈리시아와 세비야의 공물을 상속받았다. 두 누나인 엘비라와 우라카는 각각 토로와 사모라를 상속받았다.[4] 그러나 산초 2세는 이러한 분할에 불만을 품고 모든 영토를 차지하려 했다.[4]1063년 숙부 라미로 1세가 사라고사 왕국을 공격했을 때, 시드와 함께 사라고사를 구원하러 가서 라미로 1세를 격파했는데,[3] 이때부터 시드를 친위대장으로 발탁했다고 한다.[4]
산초 2세는 세 산초의 전쟁, 갈리시아 정복, 레온 병합 등을 통해 영토를 확장했다.
2. 3. 1. 세 산초의 전쟁
산초 2세는 1067년 어머니가 사망하자 사촌인 나바라의 산초 4세와 아라곤의 산초 라미레스와 세 산초의 전쟁을 벌여 승리했다.[4] 이 전쟁의 결과로 라부레바(La Bureba), 알타리오하(Alta Rioja), 알라바 등을 정복하였다.[4] 이 땅들은 원래 산초 2세의 아버지가 가르시아에게 레온의 베르무도 3세를 물리치는 데 도움을 준 대가로 할양했던 땅이었다.[5]2. 3. 2. 갈리시아 정복
1071년, 산초 2세는 알폰소 6세와 함께 갈리시아 왕국을 정복하여 분할하였다.[4][5] 당시 알폰소 6세는 갈리시아 영토 남부에서 칙허장을 발급하고 있었고, 가르시아 2세는 세비야 타이파로 망명하면서 형제들은 갈리시아 왕국을 나누어 가졌다.[5]산초 2세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막내 동생의 왕국까지 차지하려는 욕심을 드러냈다.[5] 1068년에 알폰소 6세와 전투를 벌이기도 했지만, 1071년에는 갑자기 손을 잡고 가르시아 2세를 세비야로 추방하며 갈리시아를 정복했다.[5]
2. 3. 3. 레온 병합
1071년, 산초 2세는 알폰소 6세와 함께 갈리시아를 정복하고 분할하였다. 그러나 1072년, 산초 2세는 마음을 바꿔 골페헤라 전투에서 알폰소 6세를 물리치고 승리하여 톨레도 타피아국으로 피신시켰다.[3] 그 후, 산초 2세는 레온 왕으로 즉위하여 아버지 페르난도 1세가 아들들에게 분배했던 세 왕국을 모두 차지했다.[4]산초 2세는 누이 우라카가 통치하던 사모라까지 점령하려 했지만, 저항이 강해 실패했다.[4] 결국, Vellido Dolfos에게 암살당하면서, 알폰소 6세가 다시 왕위를 이었다.[3]
2. 4. 사모라 포위와 암살
1072년, 산초 2세는 골페헤라 전투(Batalla de Golpejeraes)에서 알폰소 6세를 물리치고 왕위를 빼앗았다. 알폰소 6세는 톨레도 타피아국으로 피신했다. 그 후, 산초 2세는 우라카가 통치하던 사모라를 포위했지만, 우라카는 완강히 저항했다. 결국, 사모라의 귀족 벨리도 아돌포(Bellido Dolfos)가 탈영병인 척 산초의 진영에 들어가 그를 암살했다.[1][2] 벨리도는 엘 시드에 의해 사모라로 쫓겨났지만, "반역자의 문"이라는 뜻의 '포르티요 델 트라이도르'(Portillo del Traidor)라는 문을 통해 도시 안으로 도망쳤다.산초 2세가 죽은 뒤, 이전에 폐위되었던 동생 알폰소 6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알폰소 6세는 망명에서 돌아온 가르시아를 속여 평생 투옥했고, 아버지의 재통합된 영토를 경쟁 없이 장악하여, 나중에 아버지의 칭호인 "전 스페인 황제"를 칭했다. 산초는 오냐의 산 살바도르에 묻혔다.[6]
2. 5. 죽음 이후
산초 2세는 사모라의 귀족 벨리도 아돌포(Bellido Dolfos)에게 암살당했는데,[1][2] 그는 탈영병인 척 산초 2세의 진영에 잠입하여 범행을 저질렀다. 벨리도는 엘 시드에게 쫓겨 사모라로 도망쳤지만, "반역자의 문"이라는 뜻의 '포르티요 델 트라이도르''(Portillo del Traidor)라는 문을 통해 도시 안으로 들어갔다. 산초 2세가 죽은 후, 그의 동생 알폰소 6세가 왕위를 이었다.산초 2세는 이전에 폐위시켰던 동생 알폰소 6세를 후계자로 삼았다. 알폰소 6세는 세비야에서 돌아온 가르시아 2세를 1073년에 붙잡아 1090년 죽을 때까지 루나 성에 가두었고, 갈리시아까지 차지하여 아버지의 영토를 독차지하고 "전 스페인 황제"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산초 2세는 오냐의 산 살바도르에 묻혔다.[6]
산초 2세는 미혼으로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알폰소 6세가 카스티야와 레온의 왕위를 모두 이어받았다.[6]
3. 가족
참조
[1]
서적
The New Cambridge Medieval History: Volume 4, c.1024–c.1198, Part 2
[2]
서적
The Contest of Christian and Muslim Spain 1031 - 1157
[3]
기타
フレッチャー、P196 - P198、芝、P74 - P76、西川、P112
[4]
기타
フレッチャー、P199 - P200、芝、P76 - P77、西川、P91 - P92
[5]
기타
フレッチャー、P202 - P203、芝、P77、西川、P92 - P95
[6]
기타
フレッチャー、P203 - P207、芝、P77 - P78、西川、P95 - P100
[7]
웹사이트
두산백과 - 산초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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